프랑스 혁명 시대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몇 년 전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읽었는데 츠바이크가 서문에서 발자크의 한 소설을 언급하며 여기서 영감을 받아 푸셰를 연구하게 되었고 희대의 철새 정치인인 푸셰의 전기를 쓰게 되었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마침 번역이 되어 나왔길래 읽어 보았다.
여러 주인공이 나오지만 출세한 정치인 말랭은 푸셰를 빼닮은 인물이다.
"말랭은 푸셰처럼 수많은 얼굴과 그 각각의 얼굴 밑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갖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 인물들은 게임을 하는 순간에는 결코 속내를 알 수 없으며 게임이 끝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푸셰가 실제로 몇 차례 결정적 장면에 등장하기도 한다.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이 펼쳐지며 소설은 궁지에 몰린 귀족들의 음모를 따라간다. 정치 소설, 추리 소설, 연애 소설, 법정 소설이라는 다면성을 지니고 있어서 초반에는 인물들을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나름 프랑스 혁명사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리오 영감]이나 [종매 베트] 같은 사회 풍속 소설에 비하면 완성도가 떨어지고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발자크 특유의 독창적인 설정과 묘사가 돋보이는 부분도 많지만 미슈라는 소작인이 귀족의 지지자로 목숨을 걸고 활약한다는 내용이 비현실적이었다. 발자크는 귀족 지지자였지만 작품 활동에서만은 리얼리즘의 승리를 이루어냈다는 칭찬을 받는데 정치소설에서만은 그 승리가 빈약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로랑스 양의 인물 설정은 상황 변화에 따라 아마존 같은 영웅이었다가 어리광스런 귀족 아가씨이기도 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내 눈을 끈 대목은 마지막 부분에 나폴레옹이 마렝고 전투에 참전 중 그가 패배했다는 오보가 전해진 상황에서 푸셰, 탈레랑, 카르노 등이 사후 대책을 의논하는 대목이다. 츠바이크도 이 대목을 언급했는데 발자크가 상상력으로 신랄하게 그려낸 정치인들의 모습이 탁월했다.
다만 단번에 몰입해서 읽기에는 설정이 산만하고 번역이 너무 문어체이고 외국어 식으로 명사가 이어지고 (...의 ...의) 비문이 많아서 추천하기는 좀 그렇다.
나에겐 츠바이크의 책이 몰입감이 있고 설정 자체가 독자에게 친절한 데다가 번역이 매끄러워서 더 재미 있었고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에도 더 도움이 됐다.
소설 끝에 해설이 있어서 나중에 이해가 되는 부분도 많았지만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