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
노동절 일(work)기 시작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방에 있는 책들을 정리했다. 책 정리는 읽고 싶은 책 한 권 찾기 시작하면 해야 하는 나만의 노동(일)이다.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책 탑 하나를 조심스럽게 무너뜨리면, 바로 뒤에 우뚝 솟은 또 다른 책 탑이 나를 기다린다. ‘산 넘어 산’이 아니라 ‘(내가) 산 책 탑 넘어 산 책 탑’이다. 가까스로 원하는 책을 찾으면 다시 책 탑을 만든다. 종종 찾아야 할 책을 끝내 찾지 못하고 책 탑을 다시 만들 때도 있다. 책 찾는 것을 포기하고 분류 없이 손이 가는 대로 아무 책이나 집어서 다시 책 탑을 건설하는 일은 건설적이지 않다.
Scene 2
굴러온 책이 나의 독서 계획에 박힌 책을 뺀다
서평을 쓰기 위해 참고해야 할 책은 필요한 내용만 찾아서 읽는다. 그런데 참고 도서의 내용에 문제가 많으면 책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달라진다. 책이 얼마나 못 썼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끝까지 읽는다. 참고 도서가 생각보다 재미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오늘 읽기로 정한 책은 제쳐두고 참고 도서를 읽는다. 굴러온 책이 나의 독서 계획에 박힌 책을 뺀다. 책 정리가 끝나면 오전에 서평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써야 할 글은 못 쓰고 참고 도서를 절반까지 읽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책이 흥미진진했다. 재미있게 읽은 참고 도서를 소개한 서평 한 편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결국 해야 할 일이 한 개 더 생겼다.
Scene 3
다시 한번 도서관과 친해지길 바라
* 금정연 《매일 쓸 것, 뭐라도 쓸 것: 마치 세상이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북트리거, 2024년)
* 우치다 다쓰루, 박동섭 옮김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처음 듣는 이야기》 (유유, 2024년)
4월 말부터 동네 도서관에 자주 들랑거리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에 나온 금정연의 일기와 ‘장서로 가득한 도서관의 부활’을 바라는 우치다 다쓰루(内田樹)의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를 같이 읽기 시작한 이후로 확실히 스스로 다짐했다. 책을 덜 사고, 되도록 책을 빌려서 읽자고. 금정연과 우치다 다쓰루. 이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양의 책을 가지고 있는 ‘활자 중독자’다. 금정연은 일기를 쓸 때 다른 작가가 쓴 일기의 문장을 따서 자신의 삶에 포갠다. 그는 다른 작가의 일기를 보면서 일상을 반추하고, 일이 진척 없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 남의 일기를 보면서 위로받기도 한다. 나는 금정연의 일기를 보면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되었다. 일기에 적힌 두 개의 문장은 책만 보면 신용카드와 함께 말랑말랑해지는 내 마음을 때리는 죽비가 되었다.
책, 음악, 영화에 빠지는 것은 쇼핑 중독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금정연, 11월 19일 일기 중에서, 19쪽)
책장에 새 책을 둘 자리가 없어서 한참 노려보다가 그냥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맨날 책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면서 또 책을 사는 걸까? 마조히스트인가?
(금정연, 6월 8일 일기 중에서, 93~94쪽)
죽비가 된 문장에 두 번이나 맞고 나서야 책을 많이 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도서관과 친하게 지내야겠다.
Scene 4
나도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과학책방 담다’는 <담담 책방>의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다.[주] 고로 실체가 없는 책방이다. <담담> 책방지기가 감사하게도 나를 ‘일일 책방지기’로 소개했다. 책방에 일하지 않는, 책방에 나타나지 않는, 얼굴 없는 책방지기가 되었다. 내가 만든 ‘담다’가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하러 <담담>에 갔다. 오랜만에 <담담>에서 책을 읽으면서(오전에 쓰기로 한 글은 언제 쓰려고‥…?) 반 정도 남은 휴일을 알차게 보내려고 했다.
* 박민경 《사람이 사는 미술관: 당신의 기본 권리를 짚어주는 서른 번의 인권 교양 수업》 (그래도봄, 2023년)
손님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책방을 바라면서 왔는데, 책방 안에 이미 여러 사람이 모여서 앉아 있었다. 오늘이 <담담>에서 하는 ‘인권 공부 독서 모임’ 날이었다. 작년 10월 중순, 쉬는 날에 <담담>에 갔다가 인권 독서 모임에 합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사람이 사는 미술관》이라는 책이었다. ‘읽지 않은 책’과 관련된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말을 많이 안 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해 보지만, 어느새 내 입과 머리는 말하느라 바빠진다.
* 한우리 번역, 기획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현실문화, 2016년)
이번 달 인권 독서 모임의 선정 도서는 ‘반 페미니즘’ 노선을 취한 젊은 저자의 책이었다. 독서 모임 참석자 모두 나이가 중년이다. 이분들은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며 독서 모임 선정 도서 저자의 견해를 요목조목 비판했다. 물론 지금까지 페미니즘 운동을 지켜보면서 느낀 아쉬운 점과 한계도 밝혔다. 인권 독서 모임 정규 회원인 중년 남성은 문제의 독서 모임 선정 도서와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선언문들을 모아놓은 《페미니즘 선언》을 같이 가지고 왔다. 그분은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몇 권 봐도 ‘페미니즘을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다. 나도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
Scene 5
절망
독서 모임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두 개의 슬픈 소식이 찾아왔다. 하나는 폴 오스터(Paul Auster)가 별세했다는 소식, 또 하나는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하라는 상사의 문자 메시지. 오늘 하루에 글 한 편 다 쓰지 못하고, 책 한 권 다 읽지 못한 것보다 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노동 절망 일기 끝.
[주] 가상의 책방 <과학책방 담다>가 궁금한 분은 이 글(링크)을 참조하면 된다.
https://blog.aladin.co.kr/haesung/15476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