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책]방
EP. 24
2023년 2월 24일 토요일
하나의 시선
밤이 되면 책은 살쪄요. 열두 시가 넘으면 책의 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해요. 밤에 살찐 책을 읽으면 내 눈꺼풀이 무거워져요. 이런, 책에서 자장가가 나오네요. 그럴 땐 사탕과 초콜릿을 항상 즐겨 듣던 노래처럼 꺼내 먹어요.[주] 조용히 있던 입과 혀가 바빠져요. 새벽이면 주전부리가 심해요. 새벽만 되면 지치는 눈을 흔들어 깨우는 방법이 뭐가 있을지 예전부터 고민해 왔어요. 그렇다면 이번에 ‘향수’로 코를 잡아서 흔들어 볼까?
대구 앞산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하나의 시선>이라는 책방이 있어요. 이곳에서 평일과 주말에 ‘책 향수’를 만드는 수업이 진행됩니다. 저는 어제 11시 30분에 시작되는 주말 수업을 신청했어요.
<하나의 시선>은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과 주말 ‘11시’에 문을 엽니다. 수업 시작하기 전에 책방에 도착했는데, 책방 내부는 조용했습니다. 어제 오전 수업과 오후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오전 수업을 신청한 사람이 저 혼자였거든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책 향수 수업을 ‘일등’으로 신청했고, 책방지기 ‘하나’가 만든 책방에서 하는 ‘일일(One day)’ 수업을, 아로마 테라피스트 선생님과 ‘일 대 일’로 했어요. 제 수업을 선생님의 반려견이 간식을 먹으면서 지켜봤어요. <하나의 시선>은 반려동물이 들어올 수 있는 책방입니다.
책 향수를 만들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향을 알아야 해요. 스무 가지 에센션오일을 하나씩 맡아 봅니다. 저는 오렌지 향, 레몬 향, 삭힌 홍어에 나는 암모니아 향을 좋아해요. 향을 한 번 맡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른 향을 맡아야 합니다. 아주 잠깐 코를 쉬게 해주는 거죠. 너무 빨리 향을 맡으면 에센션오일 고유의 향을 느낄 수 없어요. 스무 가지 에센션오일의 향을 다 맡으면, 코를 잠시 쉰 다음에 2차로 향을 다시 맡습니다. 처음 향을 맡았을 때 느낌과 다시 맡은 향의 느낌이 다를 수 있대요.
제가 고른 에센션오일은 레몬그라스, 페퍼민트, 유칼립투스, 시더우드(cedarwood), 프랑킨센스(Frankincense)입니다. 다섯 가지 에센션오일이 향수의 재료가 되는데, 이들을 조합하면 만족스러운 향이 나오는지 코로 확인해야 합니다. 두 가지 향을 동시에 맡아봅니다. 조합해 보니 페퍼민트 향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페퍼민트 향을 덜어내기 위해 향수를 만들 때 페퍼민트 오일을 단 두 방울만 넣었어요. 완성된 향수는 일주일 지난 후에 사용할 수 있어요. 일주일 동안 알코올이 증발하면서 향이 더 좋아집니다.
집에서 향수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어서 선생님에게 질문을 많이 했어요. 선생님이 명함을 주셨는데 선생님 이름이 책방지기 이름과 비슷한 ‘하나’였어요. 세상이 이런 ‘일’이.
선생님이 향을 신중하게 맡고 있는 저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어요. 사진을 보는 순간 내가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에 몰입하면 엄지손가락을 살짝 지켜 드는 버릇이 있어요. 이때 손의 모습이 ‘엄지척’하는 형태와 비슷한데, 어제 수업은 ‘엄지척’을 할 정도로 만족스러웠어요.
* [구판 절판] (글) 미셸 투르니에, (사진) 에두아르 부바, 김화영 옮김
《뒷모습》 (현대문학, 2002년)
* [개정판]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세 번째 선정 도서]
《뒷모습》 (현대문학, 2020년)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라는 프랑스의 사진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사람들의 뒷모습을 주목했어요. 산책하는 사람, 연인, 무희 등 여러 사람의 뒷모습만 사진에 담았어요.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뒷모습을 찍은 부바의 사진에 자신의 글을 곁들였어요. 두 사람의 글과 사진이 만나서 태어난 책이 《뒷모습》입니다. 투르니에는 뒷모습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뒤쪽이 진실이다.’
<두루미> 세 번째 모임 선정 도서는 《뒷모습》입니다. 독서 모임 도서는 제가 예전에 읽었던 것입니다. 《뒷모습》은 2002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2012년에 제가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썼어요. 그때 쓴 《뒷모습》 서평이 ‘이달의 당선작’이었네요. 12년이 지나서 오랜만에 《뒷모습》을 봤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구판이에요. 구판 표지는 상반신만 탈의한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었어요. 지금 나온 《뒷모습》 앞표지는 구판과 달라요. 표지만 다를 뿐 내용은 같습니다.
책 속 사진과 내용은 같아도, 20대 때 읽었을 때 느낌과 30대인 지금 읽었을 때의 느낌은 달랐어요. 책에 눈으로만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나요. 처음 책을 보면서 느낀 향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느껴지는 향은 달라요. 당신의 책장에 과거에 만난 책이 있으면 한 번 펼쳐보세요.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책이 새 책처럼 보일 거예요.
[주] “그럴 땐 이 노래를 초콜릿처럼 꺼내 먹어요.” (자이언티의 <꺼내 먹어요> 노랫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