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말과 사물》을 다 읽지 않아도 읽은 척하는 방법이 있다. 《말과 사물》 1장만 읽으면 된다. 1장 제목은 ‘시녀들’이다.
[카페 <스몰 토크> 푸코 읽기 모임 선정 도서]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2012년)
‘시녀들’은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의 그림 제목이다.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Felipe IV)의 궁정 화가로 죽을 때까지 활동하면서 왕족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시녀들』은 벨라스케스의 화실을 방문한 펠리페 4세 부부의 딸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와 시녀들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 왼쪽에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가 있고, 벨라스케스는 캔버스 앞에 서 있다.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일까, 아니면 『시녀들』일까? 화실에 공주만 있는 게 아니다. 펠리페 4세 부부도 화실에 있다. 왕이 어디 있냐고? 그림 중앙에 있다. 조그맣게 그려진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다.
여기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왕과 왕비는 왜 벨라스케스의 화실에 찾아온 것일까? 마르가리타 공주를 보러 오기 위해서? 거울 속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한 점의 초상화와 비슷하다. 왕과 왕비가 초상화 모델일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스스로 모델이 되어 본인의 모습을 그렸다. 관람자는 그림 속 화가의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모델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때 화가는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관람자가 된다. 우리는 그림 바깥의 모델인 셈이다. 푸코는 『시녀들』에서 관람자와 모델 역할이 한없이 뒤바뀌는 기능을 수행하는 시선을 주목한다.
지금까지는 《말과 사물》을 읽은 척하고 싶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내용을 제시했다. 내가 언급한 것은 1장 전체 내용을 요약한 것이 아니다. 『시녀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내용만 언급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말과 사물》을 완독해서 어떤 책인지 설명할 수 있는 독자는 ‘책에 미친 사람’이다. 이런 유형의 독자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정신으로 어려운 책을 읽는 사람이다. 《말과 사물》을 읽었지만, 책의 핵심보다는 곁다리에 더 관심이 많은 독자도 있다. 이런 사람의 머릿속에 ‘진짜 광기’가 흐른다. 여기서 말하는 ‘곁다리’는 책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내용, 즉 푸코가 인용한 인명이나 문헌 또는 역주를 뜻한다. 하지만 ‘진짜 광기’의 독자는 곁다리에 더 관심이 많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현재 《말과 사물》 1부 3장까지 읽었다. 1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장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본문 읽기가 지루할수록 곁다리에 눈길이 간다. 곁다리가 재미있다.
* 30쪽 [옮긴이 주4]
화가가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하는 것은 벨라스케스가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나는 역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벨라스케스 이전에 활동한 화가들이 자신의 그림 속에 정면으로 바라보는 본인 모습을 그려 넣었다.
* 파스칼 보나푸, 이세진 옮김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 (미술문화, 2023년)
[책 소개] 서평 <못 찾겠다, 꾀꼬리> https://blog.aladin.co.kr/haesung/14923064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 등이 ‘큰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을 시도했다.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 속에 숨은 화가들의 다양한 모습을 모아놓은 책이다. 당연히 이 책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도 나온다.
* 33쪽
늙은 파체로가 세비야의 화실에서 작업 중인 제자에게 했다는 조언, 즉 “이미지는 액자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이지만 뒤집어 적용하는 이상한 방식.
[옮긴이 주] Pachero. 황금 세기(에스파냐의 16세기) 초엽에 세비야에서 활동한 화가. 벨라스케스는 한때 그의 제자였다.
역자는 《말과 사물》 프랑스어 원서와 영역본을 참고하면서 번역했다. 원서가 인쇄되는 과정에 생긴 오탈자일까, 아니면 푸코 또는 역자의 실수일까? 벨라스케스 스승의 이름이 잘못 적혀 있다.
* [절판] 자닌 바티클, 김희균 옮김 《벨라스케스: 인상주의를 예고한 귀족화가》 (시공사, 1999년)
[책 소개] 푸코의 《말과 사물》 1장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 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다.
‘파체로(Pachero)’가 아니라 ‘파체코’다. 프란시스코 파체코(Francisco Pacheco, 1564~1644)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벨라스케스》에 프란체스코 파체코가 어떤 인물인지 소개되어 있다. 세비야에 거주한 파체코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화가였다. 그의 집에 세비야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6년간 파체코의 도제 계약을 맺음으로써 그의 제자가 된다. 파체코는 제자가 성장하는 과정을 자신의 책 <회화예술>에 기록했다. 세비야의 장인(匠人) 파체코는 훗날 벨라스케스의 장인(丈人)이 된다.
《말과 사물》 다른 장에도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렇지만, 내게는) 흥미로운 곁다리’ 여러 개 발견했다. 나머지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