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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
미셸 우엘벡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3월
평점 :
평점
4점 ★★★★ A-
젊은 니체(Nietzsche)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만난다. 그 책은 바로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책을 손에 쥔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한다. 하지만 니체가 고전 문헌학자에서 철학자로 변신할수록 쇼펜하우어에 향한 애정이 식어간다. 결국 니체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망치로 내려친다. 1874년에 쓴 글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천재’라고 표현하지만, 후기 저작 《우상의 황혼》(1888년)에서 ‘삶에의 의지를 제거하려 한 악의에 찬 천재’[주]라고 비꼰다.
청년 니체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게 만든 쇼펜하우어의 책은 오랜 시간이 흘러 문학 애호가인 프랑스 청년의 정신을 흔들어 놓는다. 위대한 작가들의 걸작을 섭렵한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은 갑자기 균형 잃은 마음을 잡기 위해 헌책방을 전전한다. 2주 동안 헤맨 끝에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드디어 만난다. 쇼펜하우어 철학을 접한 우엘벡은 과거에 만난 니체 철학과 결별한다. 십여 년 후에 우엘벡은 실증주의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라는 새로운 철학 친구를 만난다. 실증주의로 완전히 기울인 우엘벡은 쇼펜하우어와의 지적 동행을 마무리한다.
우엘벡의 에세이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를 만나면서 시작된 지적 동행 기록이다. 국내에 소개된 우엘벡의 에세이는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미국의 공포소설 작가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삶을 분석한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가 작년에 번역 출간되었다(원서는 1991년에 발표되었다).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와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모두 같은 번역자의 손을 거쳤고, 출판사도 같다.
우엘벡은 지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 즉 인간이 살면서 겪는 다양한 고통과 언젠가 마주해야 할 죽음을 말한 쇼펜하우어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다. 우엘벡은 쇼펜하우어를 처음 만나면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부담이 덜어진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니체는 ‘삶에의 의지’를 제거하려 한 쇼펜하우어를 비판하지만, 역으로 우엘벡은 쇼펜하우어야말로 ‘의지의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우엘벡이 생각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고통스럽고 역겨운 대지를 한 발씩 밟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자양분이다.
쇼펜하우어는 온갖 고통으로 얼룩진 대지를 불행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세계로 본다. 이어서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죽으면 ‘비(非)존재’가 된다. 쇼펜하우어와 일정 간격 거리를 둔 우엘벡은 비존재로 이르는 죽음을 조용히 기다려야만 하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실질적 제안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엘벡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지탱해준 옛 철학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젊은 문학 애호가 우엘벡은 쇼펜하우어를 만난 후부터 소설가로 성장한다. 그의 소설들 속에 옛 철학 친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마주하며》는 미셸 우엘벡의 소설을 처음 마주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주] “쇼펜하우어는 총체로서의 생의 가치를 허무주의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정반대의 것들, 곧 ‘삶에의 의지’의 위대한 자기 긍정이나 삶의 풍요로운 형식들을 제거하려 한 악의에 찬 천재이기 때문이다.”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123쪽)
※ 정오표
* 12쪽 [역주]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319/pimg_7365531663348509.png)
출판연도 오류: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는 2021년에 출간되었다. 번역자와 출판사 관계자가 자신들이 만든 책이 나온 연도를 착각하면 어떡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