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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감춰진 얼굴
마이클 쉘던 지음 / 성훈출판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저기, 이 책이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대출이 가능한가요?”
“음‥… 이 책이 나온 지 꽤 오래됐는데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올해 들어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빌리는 일이 많아졌다. 현재 내 방은 포화 상태라서 더 이상 책을 헌책방에나 온라인 중고서점에 주문해서 들여놓을 수 없다. 출간 연도가 오래된 책, 즉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에 나온 책들은 주로 도서관 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서고에 보관된 책을 빌려서 읽는 것은 내 돈 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지난달에는 도서관 서고에 있는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을 읽었다. 이 책은 1992년에 나왔다. 서고에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서 그런지 정말 책 상태가 좋지 못했다. 책 가운데 쪽 제본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책 상단에 새까만 먼지가 쌓여 있었고, 얼룩진 형태의 곰팡이 떼가 남아 있었다. 서고에 있는 그 책을 가져온 사서는 휴지로 먼지를 닦았다. 사서는 이 책을 간절히 원한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휴지로 책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는 사서를 보고 나니 민망해서 괜히 사서에게 말을 걸었다.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면서 사서에게 ‘제가 (먼지를) 닦을게요’라고 말했다. 아, 정말 이런 난감한 상황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웬만하면 서고에 보관된 책을 안 빌리려고 했는데…‥ 당분간은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서고에 있는 책을 빌릴 때 뻔뻔해져야만 할 것이다.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에 적힌 저자 소개에 따르면, 저자 마이클 셀던(Michael Sheldon)은 영문과 교수이다. 그가 쓴 저서 중에 <약속의 친구들: 시릴 코놀리와 지평선의 세계>라는 책이 있다. 시릴 코놀리(Cyril Connolly: 1903~1974)는 영국의 작가 겸 비평가인데, 오웰과 같은 학교(세인트 시프리언즈 예비학교와 이튼스쿨)에 다닌 친구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에 학창 시절 오웰이 어떤 성격인지 확인해 주는 코놀리의 증언이 나온다.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은 주석 목록과 역자 후기까지 포함해서 605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90년대 초반에 나온 책 중에서 제법 분량이 많은 편이고, 그 당시 물가를 생각한다면 책값이 비싼 편이다. 책의 정가는 9,000원이다.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은 절판된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오웰에 관한 사소한 일면을 알 수 있는 훌륭한 평전이다. 생전에 오웰은 자신에 관한 전기가 나오는 것을 반대했고, 단호한 입장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는 본인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완전한 형태의 자서전이라고 보기 어려우나 1947년에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글[주]을 쓴 적이 있다. 저자는 오웰을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한마디로 모순투성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사회주의자들의 문제점과 약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말년에 소설을 쓸 계획이 있으면서도 자신은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웰은 엄격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분위기가 끔찍했다고 회상했지만, 오웰의 동창생들은 그가 학교생활을 잘하는 평범한 아이로 기억했다. 오웰의 삶을 ‘모순투성이’라고 평한 저자의 말이 그다지 놀랍지 않으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세상에 모순투성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은 굳이 알 필요 없는, 오웰에 관한 ‘TMI(Too Much Information)’로 가득하다. 책의 분량을 두껍게 만든 과도한 정보의 양은 독서를 지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지만, 이 정보들을 얻기 위해 오웰과 관련된 생존 인물들을 직접 찾아 만나고 다닌 저자의 노력을 생각하면 대충 읽을 수 없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TMI’는 오웰의 모순적인 면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일명 ‘오웰 리스트(Orwell’s list)’에 관한 내용이다.
2003년에 처음으로 전 세계에 공개된 ‘오웰 리스트’는 오웰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에 작성한 것이다. ‘오웰 리스트’가 공개되면서 오웰이 지하에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와 그들을 동조하는 자로 의심되는 38명의 지식인 이름을 명단으로 기록하여 영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에서도 오웰이 자신의 공책에 ‘비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그러나 셀던은 오웰이 공책에 적힌 명단을 정보기관에 전달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앞서 언급했듯이 정보기관에 전달된 오웰 리스트는 2003년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오웰은 어째서 ‘변절자’로 오해받을 수 있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마이클 셀던에 따르면 오웰은 스탈린 정권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을 경계했고, 영국에 있는 친 스탈린파들이 정정당당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솔직하게 밝히기를 기대했다. 오웰은 좌파 세력의 결집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명단을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명단을 작성했다는 이유만 가지고 그를 ‘좌파를 배신한 자’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오웰은 공산주의자들의 공개적인 활동을 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웰이 명단을 정보기관에 전달하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이 행동은 영국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을 알리기 위한 ‘밀고’가 아니다. 명단에 적힌 공산주의자들은 친 스탈린 파라서 소련에 맞서는 선전에 동원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즉 오웰은 정보기관에게 ‘대(對) 소련 선전’을 위해 이런 공산주의자들을 기용하지 말라고 알려줬다.
오웰은 친 스탈린 파의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했지만, 무턱대고 ‘친 스탈린파’라고 몰아세우면서 공격하지는 않았다. 일단 그는 상대방이 친 스탈린 파인지 아닌지 의심했다. 그는 칼럼에서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그들을 향해 성급하게 친 스탈린파라고 규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오웰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고 쉽게 단정한다. 그러나 그가 쓴 글이나 오웰의 삶을 단편적으로 설명한 작품 해설만 읽고서는 ‘오웰의 진짜 얼굴’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과거 유럽에서는 문장의 필체만 가지고 문장을 쓴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유사과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특정 글쓴이의 글 백 편 전부 다 읽는다고 해도 글쓴이의 전체적인 면모를 알 수 없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특정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므로 과거 글쓴이의 모습과 현재 글쓴이 모습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오웰을 제대로 알려면 그의 사소한 치부까지 보여주는 확실한 전기나 평전을 읽어야 한다. 비록 새롭게 알려진 최신 정보는 없지만, 《조지 오웰, 감춰진 얼굴》은 오웰에 관한 한, 아주 사소한 정보들이 채워져 있는 평전이다.
[주] 글의 제목은 ‘Such, Such Were the Joys’다.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제목은 ‘정말, 정말 좋았지’)와 《코끼리를 쏘다》(반니, 제목은 ‘너무나 즐겁던 시절’)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