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혐오와 매혹 사이 - 왜 현대미술은 불편함에 끌리는가
이문정 지음 / 동녘 / 2018년 9월
평점 :

예술가의 똥. 정량 30g. 신선하게 보존됨. 1961년 5월에 생산됨.
1961년 이탈리아의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는 자신의 똥을 90개의 깡통에 담아 ‘예술가의 똥’이란 이름을 붙여 전시했다. 이 전시 작품(?)은 당시 같은 무게의 금값으로 매겨져 팔려나갔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이게 미술이냐?” 당신이 『예술가의 똥』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할까? 우선은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미술을 이것저것 떠올리다가 그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 수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는 미술 작품을 시각적 쾌락을 주는 대상으로만 생각해서 이런 지저분한 미술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알 수 없는 작품을 하물며 내 삶과 관련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것, 사진을 찍어 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작품이다. 그래서 고전미술은 이해가 쉽다. 반면 현대미술은 그렇지 않다.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두개골(데미안 허스트), 박물관 전시실 바닥에 놓은 침대(트레이시 에민), 심지어 예술가의 똥도 미술 작품으로 인정된다. 현대미술은 눈에 보이는 형태보다 ‘의미’에 방점을 찍어 해석하고 분석하며, 관객 스스로 이해해야 하는 조형 세계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현대미술, 즉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의 한 지점을 차지하는 예술가들은 작품의 생경함 때문에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이들의 작품은 산뜻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추하고, 혐오스럽고, 엽기적이다.
《혐오와 매혹 사이》는 혐오와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현대미술을 집약한 책이다. 작년 말에 나온 《불편한 미술》의 개정판이다(알라딘에는 구판에 관한 정보가 없다). 비위가 약한 독자는 책을 펼치기 전에 읽을지 말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책에 실린 도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시각적 충격’을 주는 미술 작품의 도판 몇 점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는 포르말린 수조에 동물 사체를 넣은 작품을 선보였다. 마크 퀸(Marc Quinn)은 자신의 피를 직접 뽑아 모은 것을 굳혀 자신의 두상을 만들었다.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는 시체 안치소에 있는 시체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찍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거부감과 두려움. 피하고 싶지만 어쩐지 끌리는 두 갈래 길에 직면한다.
인간의 혐오 심리를 분석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이론을 연구한 저자는 폭력, 죽음, 질병, 피, 배설물, 섹스, 괴물 등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소재들이 어떻게 현대미술에서 표현되는지 소개한다. 작가들이 유독 추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어 있는 현실의 이면을 바라보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혐오를 유발하는 대상은 단지 아름답지 않거나 청결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떤 대상이 적절한 자리에 있지 않으면 기성 체계나 기존 정체성에 벗어난 것이 된다. 크리스테바는 혐오를 유발하는 대상을 ‘애브젝트(abject)’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불쾌한 애브젝트를 피하려고 한다. 문제는 그것을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어도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이를테면 우리는 몸을 씻을 때마다 때를 민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때는 목욕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소중한 몸의 일부였다. 때는 애브젝트다. 우리는 이 애브젝트를 벗겨 내서 몸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여러 번 씻어도 때는 다시 생긴다. 역설적으로 애브젝트는 우리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기호이다.
데미안 허스트와 안드레 세라노 등은 ‘죽음’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들은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무관심과 냉소로 끔찍한 살육을 보여주는 작품 이면에 어떤 숭고함과 비장함이 어려 있어 죽음에 대한 경고와 성찰을 불러일으킨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다. 현대미술은 작가의 다양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조형 세계이다. 이 조형 세계에는 과거 미술의 단골 인물이었던 신, 영웅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주인공은 작가와 관객이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것, 죽은 것, 폐기물도 미술 작품의 소재가 된다. 과거 미술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조형 세계라면, 현대미술은 관객들에게 더럽고 불편한 ‘현실’을 과감하게 보여주는 조형 세계이다. 현대미술에서의 애브젝트는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사회 체제에 저항하는 상태이자 물체들이다.
이 책을 본 독자들은 엇갈린 반응이 내놓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그래도 이걸 미술이라고 하다니. 요즘 예술가들은 미술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다른 독자는 ‘아름답지 않지만, 계속 보니 이 작품이 관객에게 무얼 전달하고 싶은지 알겠어’하면서 수긍할 것이다. 전자의 반응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름다움이 동시대 미술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사실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그림’으로 알려진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당대 사람들은 ‘추한 그림’이라고 놀리면서 비난했다. 지금 난해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미술이 시간이 좀 지나지 않으면(이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으로 새롭게 인정받을지 모른다.
※ Trivia
* 103, 105쪽
허스트는 주물을 떠 백금으로 만든 해골에 1106.18캐럿에 달하는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어 <신의 사랑을 위하여>(2007)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빛나는 투명한 수정으로 조각된 고대 아즈텍의 두개골의 연상시킨다.
→ 고대 아즈테카인이 만들었다는 일명 ‘크리스탈 해골’은 영화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한 불가사의한 유물로 알려졌으나 오래 전에 ‘가짜’로 판명되었다.
* 221쪽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19)이다.
→ 작품 연도가 잘못 적혀 있다. 1866년에 나온 작품이다. 1819년은 쿠르베가 태어난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