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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팝니다 - 상업화된 페미니즘의 종말
앤디 자이슬러 지음, 안진이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2월
평점 :
알라딘 서점에 ‘페미니즘 굿즈(goods)’를 사면 페미니즘 도서를 끼워 준다. 여성단체와 페미니즘 모임들은 티셔츠부터 에코백, 스티커, 배지 등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한다(대구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도 페미니즘 굿즈를 만들 예정이다). 페미니즘 도서가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명단에 오르고, 여성단체 기부 · 후원 운동도 벌어지면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말이 나왔다. 반 페미니스트들은 ‘돈’과 손잡은 페미니즘을 조롱하기 위해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은 메갈리아가 먼저 쓴 것이다. 메갈리아는 이 구호를 사용하면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페미니즘 굿즈 생산 및 후원 운동을 진행할 거라고 천명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는 페미니즘 구호이다.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의 ‘돈’은 ‘자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 구호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공모자가 되지 않겠다는 페미니스트의 선언이라고 평가한다.[1]
손희정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구호는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구호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논리가 페미니즘을 흡수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페미니스트라면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을 반드시 정독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을 따져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앤디 자이슬러는 상업주의에 물든 페미니즘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영화나 TV 프로그램, 언론, 광고 등 대중매체의 파급 효과가 불러온 오늘날의 페미니즘 열풍의 이면을 분석한다. 페미니즘 대중화에 힘입어 탄력받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과거와 달리 세련되고 매력적인 여성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여권 신장’을 표방하는 기업의 광고들이 등장했고, 할리우드에서는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연예인들은 페미니스트라고 떳떳하게 선언한다. 엠마 왓슨의 UN 연설이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의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예인인지 불분명하지만) 한서희가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면서 페미니즘 굿즈를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거론된 사례들은 ‘시장 페미니즘(marketplace feminism)’이라고 부른다.
시장 페미니즘에 익숙한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1980~90년대에 등장한 포스트페미니스트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다. 그녀들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담배는 남성 흡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도 ‘선택’할 수 있는 기호품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섹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들이 섹스하는 것도 여성 해방의 기치를 내건 페미니즘에 따른 ‘선택’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여성의 외모를 부각하는 ‘매력 자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개인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 성형 수술을 ‘선택’한다.
포스트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선택하는 권리’ 정도로 여긴다. 그녀들이 쟁취하고 싶은 ‘여권(女權)’은 ‘모든 여성이 가져야 할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이다. 저자는 공익보다는 사익에 초점을 맞춘 포스트페미니스트와 그녀들이 지향하는 시장 페미니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어쩌다가 페미니즘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시장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포스트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가 손을 잡으면서부터다. 기업이 주도한 시장 페미니즘은 ‘속 빈 강정’이다. 기업은 페미니즘을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했고, 상품 판매를 유도하기 위해 여성 친화적인 홍보를 펼쳤다. 시장 페미니즘은 여성 운동 이후로 경제적 지위를 가지게 된 여성을 ‘소비자’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했다. 시장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정의와 정반대이다. 신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들의 여성운동을 ‘구닥다리’로 취급했으며 “개인의 선택이 성공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시장 페미니즘은 정치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개인의 자아실현 및 성공에 초점을 맞춘 ‘쉬운 페미니즘’이다.
시장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속상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페미니즘은 ‘유행어’가 아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운동을 지지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연예인, 심지어 협찬을 받아 페미니즘 굿즈를 사용하는 연예인에게 열렬히 환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을 ‘페미니스트의 오류’라고 말한다. 사실 ‘오류’보다 ‘착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인기 여성 아이돌이 “저는 페미니스트예요!”라고 말한다면 아이돌 팬들도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까? 천만에!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 물론, 몇몇 팬들은 자신이 동경하던 연예인을 따라 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 속 페미니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기만 하다. 즉, 연예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한낱 유행이 될 수도 있으며 연예인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연예인 페미니스트에게만 몰리는 대중 및 언론의 시선은 ‘심각하고, 지루한’ 페미니즘의 문제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앤디 자이슬러는 페미니즘의 ‘휘슬 블로어(whistle-blower)’다. 그녀는 페미니즘에 문제가 있을 때 휘슬(호루라기)을 불어 잘못을 바로 잡아준다. 《페미니즘을 팝니다》는 페미니즘의 가치를 변질시킨 신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공모자가 된 페미니즘도 비판한다. 따라서 이 책은 방만한 신세대 페미니즘,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방관한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내부 비판적 성격이 강하다. 페미니즘은 쉬운 학문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들)’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수적인 이름 안에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페미니즘(들)’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쉽고 재미있는 시장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 페미니즘은 어려워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고 가벼운 페미니즘은 없다.
[1] 손희정, [청춘직설-페미니즘은 ‘파워’가 된다], 경향신문, 2016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