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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평점 :
여기 남자와 여자가 있다. 남자는 평소 사랑하는 여자와 데이트를 하던 중 진한 스킨십을 시도한다. 그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강제로 삽입 섹스를 한다. 남녀 간의 삽입 성교는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지만, 남성이 강제로 여성의 몸속으로 들어왔다면 ‘데이트 강간’이다. 어떤 남성들은 ‘데이트 강간’이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말하며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 용어는 데이트 중 생기는 강간의 개념으로 부부강간만큼이나 생소하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단지 낯설다고 느끼며 외면하기엔 그 심각성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이런 상황을 비관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 지속적인 피해자로 남게 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강간 피해자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가해자에게 상처를 입은 강간 피해자는 두 번 세 번 운다. 검찰과 경찰 수사 과정에서 또 상처를 입고 재판 과정에서 또다시 모욕을 당한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존심은 짓밟히고 인권은 파괴당한다. 심지어 가해자에게 협박까지 당한다. 강간 피해 여성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 지속한다면 ‘강간 문화’라는 위험하고도 왜곡된 편견이 횡행하는 세상이 된다.
수잔 브라운밀러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오월의봄, 2018)는 강간 피해 여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증언하기만 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강간이 ‘성적 본능’ 때문에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폭력성’과 ‘권력’에 의해 매개된 가해자의 고의적인 행동임을 입증한 책이다. ‘남성 연대(male bonding)’는 물리적 폭력과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실행하는 장이다. 여성을 강간하고 학대함으로써 남성은 ‘남성성’을 확인하고, 가부장적 권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든다. 그 폭력 행위가 여성을 유린하는 행위였던 만큼, 남성들은 그 행위를 실행하여 우월성을 가진다.
진화생물학은 인간의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학문이다. 진화생물학에서 특히 논쟁이 격렬한 주제는 남녀관계 또는 섹스다. 대부분 진화생물학자는 “남성의 강간 본능은 진화의 산물이다”, “남성이 여성을 겁탈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라고 주장한다.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을 이어받은 심리학자들은 강간 피해 여성의 심리상태를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강간범이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은 강간범을 ‘성적 사이코패스’로 규정했고, 강간범이 심리치료를 받으면 과도한 성적 욕구가 제거된다고 믿었다. 마르크스와 남성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지적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했으나 여성을 불리하게 만드는 강간 문화를 문제 삼지 않았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폭로한다. 강간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저자는 성경(2장), 전시 강간(3장), 19세기 미국에서 일어난 백인 남성의 흑인 여성 · 인디언 여성 강간(4장, 5장, 7장), 동성 간의 감옥 강간(8장) 등 생생한 사례들을 해석하면서 이 문제들이 여성에 대한 폭력이 권력의 문제이며 국가 · 민족 · 인종 등과 결합된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난제임을 드러낸다. 각종 강간 사건의 진행과정을 통해 가해자의 권위적 위치에 억눌려 피해와 비난을 감수하는 피해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강간 반대 운동이 확산하기 전까지 강간은 당연한 일상 문화(!)이거나, ‘남녀상열지사’로 미화되었다. 성경에서 묘사한 강간은 피해 여성을 소유한 가족,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서, 남성 가부장의 재산권 침해를 의미했다. 여성의 몸이 남성의 소유라는 인식 때문에 강간은 범죄로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다. 강간은 대개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발생하는 사건의 특수성(강간 사건의 증거는 대부분 형태가 없다)과 재판부의 남성(가해자) 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강간 사건을 법에 호소하는 경우 승소율이 매우 낮다. 경찰과 법원은 강간 피해 여성을 ‘방탕한 자’로 간주하여 이들을 의심하고 추궁한다. 심지어 피해 여성의 취약점을 노려 강간을 시도한 경찰들도 있다. 경찰은 ‘법의 권위를 대행하도록 사회가 인정한 직업’이다. 그런데 인권의식이 낮은 경찰은 가해자를 엄벌하기는커녕 피해자에게 진술을 강요하고 수치심을 들게 하는 질문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2차 가해’가 벌어진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나온 지 삼십여 년이나 지났으나 강간 범죄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피해자들은 ‘가해자’로 몰린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강간 문화에 대해 질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도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미투 운동을 깎아내리는 남성들이 있다. 그들이 페미니스트와 미투 운동에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을 단순히 페미니즘에 반기를 드는 일탈 문제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구조도 살펴봐야 한다. 한국은 강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협박할 수 있는 아주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형성된 곳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고소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이 부조리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는 성폭력 피해자를 모욕하는 강간 문화와 왜곡된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다.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뎌지게 하는 이 몰상식한 강간 문화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1975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내용이 여럿 등장한다. 저자는 1장에서 ‘야생 상태에서 강간하는 동물’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출간된 이후부터 동물도 강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비판받은 저자는 서문에 진화생물학을 비판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저자는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까치, 1990)을 참고하면서 중세 시대의 초야권(신부의 결혼 첫날밤을 소유하는 영주의 권리)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초야권은 ‘일종의 강간’이며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비정기적으로 초야권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초야권은 ‘중세 유럽의 악습’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초야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박 입장에 더 힘이 실리고 있다.
책 304쪽에 ‘방관자 효과’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키티 제노비스 사건’ 이야기가 나온다. ‘38명의 사람’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하고도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50년 후, 이 사건이 모두 ‘언론의 왜곡 보도’로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제로 제노비스가 살해당하던 당시의 목격자 수는 6명이었으며 그중 2명이 신고를 했다.
책 306쪽에 잠깐 언급된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역자의 설명이 빈약하다. 1953년 미국의 로젠버그 부부는 소련에 미국의 원자폭탄 제조관련 비밀을 넘긴 혐의로 체포되었다. 부당한 재판으로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전기의자에 앉아 숨을 거두었다. 아인슈타인, 사르트르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교황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부부의 정해진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게 지금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던 로젠버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는 주석에 ‘죄를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 없이 부부는 간첩죄로 사형당했다’라고 썼다. 후일 전직 KGB 요원의 증언에 따르면 남편은 산업정보를 제공한 간첩이었음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그가 넘긴 정보가 원자폭탄을 만들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내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2016년에 로젠버그 부부의 자녀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모친이 무죄임을 증명해달라고 청원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저자는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마조히즘’으로 연관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낸다(406쪽). 그녀는 동성애자들이 강조하는 ‘마조히즘’이 동성 간 강간 문제의 본질을 회피할 수 있다고 봤다.
마조히즘적 요소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은 강제로 당하기를 원한다는 식의 믿음이 그렇듯, 경우를 가리지 않고 마조히즘을 가정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406쪽)
‘모든’ 남성 동성애자들이 강제적 성행위를 선호한다고 볼 수 없다. 저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동성애자는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인 성행위를 강요하는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인식은 반동성애를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입장과 유사하다.
282쪽에 오식이 있다. “범행 시간대는 보통 낮보다 밤히 선호된다.” ‘밤히’는 ‘밤이’의 오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