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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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국민학생이었을 때, 내 밑으로 어린 동생 둘까지 포함해 우리만 남겨두고 엄마와 아빠는 돈을 벌러 나갔다. 밥통에  밥은 항상 있었고 나는 동생들에게 끼니때면 밥통에서 밥을 퍼서 밥상을 차려주었다. 엄마는 집에서 나서기 전 화장대에 항상 천 원짜리  한 장을 올려두셨고,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돈으로 혹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으라 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그 돈을  가지고 슈퍼마켓으로 가 먹고 싶던 과자를 골라 사들고 와서는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놀거나 숙제를 하거나 학원을 다녀오거나 혹은  내가 만들어준 간식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냈다.

우리만 놔두는 것이 엄마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터,  가끔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할아버지께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 좀 봐달라 부탁드렸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나는 할아버지의 밥을 차렸고  할아버지의 간식도 챙겼다. 할아버지는 그저 가만 계셨고, 그러다 엄마가 돌아오시면 엄마가 드리는 수고비를 들고는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오면 달랐다. 엄마는 아주 가끔 천안에 계신 외할머니께 부탁을 드리기도 했는데, 버스를  타고 오셔야 했고 딸 집이기도 해 자주 방문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어쩌다 우리를 봐주러 오시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셨고,  우리를 씻겨주셨고, 나가 놀다 다치고 돌아오면 약을 발라 주셨고,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셨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나는 다시 내 나이에 걸맞은 어린아이가 됐다.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에서의 '지연'은 희령이란 지역에 취직을 해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 남편과 이혼하게 돼서 마음이 너덜너덜한데, 그  사랑은 다정하고 영원할 줄 알았다가 깨지게 되어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데, 남편은 본인의 외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지연의  부모님을 포함해 지연 주변의 사람들은 지연 남편의 외도를 지연 탓으로 돌린다. 네가 어떻게 했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라고. 그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 마침 희령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입사를 지원했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거다. 자동차 뒷좌석에  짐을 싣고 희령으로 가 머무를 집을 구하고 혼자 지내게 되면서 지연은 우연히 자신의 외할머니 영옥을 만나게 된다. 열 살 때 할머니를  본 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니 22년 만이다. 22년 만에 할머니가 먼저 지연을 알아보았고, 그렇게 지연은 할머니와 종종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고 지연도 할머니가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저 안에 자리한 애정이 건드려지기 시작하면서 다정하고 우정 어린 사이가 되고 그 만남들 속에서 지연은  영옥의 어머니이자 본인의 증조할머니인 이정선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팠지만 증조할머니의 삶은 더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병든 어머니를 두고 개성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백정의 자식이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심지어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편은 본성이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해주는 나에 취한 허영심 가득한 남자였다. 

지연의 할머니 영옥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가 결혼하자고 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로 자신과 중혼한 거였고, 그에 대해  끝까지 사과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딸 미선을 자신의 호적에 올린 채 전 부인과 함께 떠난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영옥의 험담을  한다. 조강지처 있는 거 알면서도 결혼한 게 분명하다고. 영옥은 자신의 딸 미선을 홀로 힘들게 키우고, 미선은 정상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낳으면서 이 결혼생활과 삶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를 힘겹게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미선은 자신의 엄마와도 사이가 소원해졌고 자신의 딸 지연과도 서로 상처주기에 바쁘다. 다정한 남자랑  살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들 모두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버텨오면서, 그러나 자신의 딸만큼은 다정한 남자와  결혼하길 바랐지만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여기에 영옥의 친구 새비와 새비의 딸 희자가 이 가족들과 단단히 연결되는 다른  여자들로 나오는데, 영옥이 힘들 때 새비가 있었던 것처럼, 새비가 힘들 때 새비가 살아야 할 이유를 영옥은 매일 메모에 남겨준다. 넌  살아야 한다, 넌 살아야 해, 네가 살아야 할 이유는 많아. 죽고 싶어질 때마다 죽고 싶어 질 만큼 힘들 때마다 곁에서 그들은 서로를  감싸 안고 힘이 되어주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영옥이 말할라치면 새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자고 말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았어. 그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p.258



그들은 서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아주고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건 비슷한 삶을 사는 다른 여성이었다.

영옥은 지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얘기한다. 평생 그런 사람이 그리고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자신의 시를 통해 말했었다. 나의 외할머니의  삶 역시 고통스러웠음을, 고생길이었음을 나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나의 엄마로부터 그 얘기를 반복해 들었던 까닭이다. 엄마는  그렇게 험난한 할머니의 삶 속에서도 엄마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어서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엄마는 매일 할머니랑 통화하고 안부를  묻고 자주 들러 할머니를 챙긴다. 이가 성치 않은 할머니를 위해 순두부찌개를 준비해 가시고,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가 좋아해서  소주 두 잔과 천천히 씹어 먹는 닭강정도 포장해가신다. 


나의  외할머니는 이제야 비로소 행복하고 평안하다 하신다. 혼자 사는데, 아들과 같이 살았던 때보다 더 평안하고 지금이 너무 좋다고  계속 말씀하신다. 할머니가 사는 연립주택은 할머니처럼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고, 그들과 벗이 되어 종종 함께 외출하시며(지금은  못하시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을 아직 오르내리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다. 매일, 지척인 한강까지 산책하기도 잊지 않으신다.  할머니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나는 왜 할머니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이렇게 늦게 온 걸까 안타깝다가도 그래도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걸 지금이라도 깨달으시니 다행이다 하면서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나는 그 이메일이 답을 받을 수 있기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랐다. 부른다면, 응답해주기를.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던 사이라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토록 시간이 오래 지나도 내가 불러주면  응답해주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라도 삶은 계속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다. 


최은영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숱한 관계들에 상처 받다가도 그러나 돌아봐주고 들여다봐주고 응답해주는, 애정과 연대로 이어진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얘기하고 당신이 들어준다면, 당신이 얘기하고 내가 들어준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불렀을 때 응답해준다면, 그 밤은 밝을 것이었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 P17

"제가 수저라도 놓을게요."
내가 어정쩡하게 앉아서 그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손을 휘휘 저었다.
"대접받을 줄도 알아야지." - P27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P12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엑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P134

"놉 갔다가 받아왔어. 씻어온 거야. 먹어. 껍질이랑 씨는 봉지에 버리고."
나는 포도 한 알을 깨물어 먹었다. 혀뿌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달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부채를 부쳤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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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3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읽다가 약간 저 이북 사투리 때문에 덮은 채로 모셔만 뒀어요!! 언제 또 홀랑 읽으시고 이렇게 홀랑 쓰신 거예욥? 🥲 중간에 스포당하지 않으려고 문단 건너뛰고 읽었어요. 책 다 읽고 돌아오겠숩니다!!

다락방 2021-08-23 12:08   좋아요 3 | URL
저 어제 이거 다 읽고 잤어요. 책장 잘 넘어가고요 눈물도 몇 번이나 닦았네요. 사실 딱히 스포당하고 할건 없어요. 스포 당하고 뭐 그럴 내용이 아니에요. ㅎㅎ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라 아쉽지만 읽는 맛이 나는 소설이었어요. 쟝님의 독서 화이팅!

독서괭 2021-08-23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최은영인가요? 장편도 잘 쓴 모양이예요. 리뷰 잘 읽었어요^^

다락방 2021-08-23 12:35   좋아요 3 | URL
네 잘 썼는데 단편이 더 좋긴 해요.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좋긴 하지만 좀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휴, 책 한 권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었네요 ㅠㅠ

붕붕툐툐 2021-08-23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차이는 왜 그리 큰 걸까요??
외할머님이 건강하고 평안하셔서 너무 좋네요~~
그리고 락방님이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챙기고 간식도 만들고 그래서 지금도 사이도 좋고 빵도 잘 만드시고 그런가봐요?

다락방 2021-08-24 08:10   좋아요 1 | URL
사실 그당시 제가 만들어준 간식이라고는 식빵 구워서 그 안에 계란프라이+케찹 넣어줬고요, 떡볶이.. 해줬습니다. 떡볶이 떡이 슈퍼마켓에서 350원 할 때였어요. 하하하하하.
그 당시 저희 삼남매만 집에 있었기 때문에 저희 사이가 더 돈독해진것 같다는 생각을 저도 합니다. 그 시절의 어떤 부분은 분명 제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 삼남매가 이렇게 친해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요.

할아버지 진짜 싫어요. 너무 싫어요. 끔찍한 존재였어요.
그런 반면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지금에도 혹여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늘 조심하려 하세요. ㅠㅠ 어휴 우리 할머니들 ㅠㅠ

2021-08-24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5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1-08-2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동네 살 적엔 (아이들 어릴 때) 시아버님께 아이들 (주로 막둥이 혼자) 봐달라고 부탁드린 적 있어요. 그런데 오셔선 티비만 보시다 가시고 애는 혼자 뒹굴고.... 친정 엄마가 오시면 집안 청소에 이불빨래 까지 하셔서 제가 오히려 못오시게 했어요. 그렇습니다. 친정아버진 어떠셨더라? ;;;; 아, 친정 아버진 우리 애랑 같이 놀아요. 어지르고 막. 둘이서 그림도 그리고. - -;;;;

다락방 2021-08-25 08:54   좋아요 1 | URL
ㅎㅎ 저희 아버지도 손주들을 사랑하시지만 사랑만 하십니다 ㅋㅋㅋ 짜증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말만 하죠. 애들 잘 봐라, 잘 지켜봐라.. 아, 풍선껌 같은건 잘 사다주셔요. 예전에 타미가 타요 껌을 너무 좋아해서 ㅋㅋ 타미만 오면 타요껌 사다주는게 아버지의 즐거움이었죠. 그래도 애들하고 잘 놀아주시긴 하네요. 전 아버지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 존재들에 대해 딱히 기대하는 게 없답니다? 하하하하하.

독서괭 2021-09-1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흐 다락방님 당선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1-09-10 16:23   좋아요 0 | URL
이유경 작가님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09-1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

다락방 2021-09-10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축하 감사하지만 매번 이렇게 안해주셔도 됩니다. 하핫;;

2021-09-10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9-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
 

으앗.

보통은 걸을 때 머릿속에서 상황극에 열중하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근무중에 찾아와서 지금 대환장 지점이다. 머릿속에서 드라마 그려지고 있네. 오늘 머릿속 상황극의 남주는 누구일까요? 키가 185센치다. 아 상황극을 못끝내겠다. 상황극에서도 나는 일을 하고 있어.. 그런데 ... 아아 부끄러워 상황극에 대해 말하지 말자. 어휴... 제발 멈춰, 멈춰라! 일 해야 한다 ㅠㅠ



그리고 복숭아에 대해서.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도 복숭아를 사먹는게 어째 매번 실패다.

복숭아 좋아한단 말에 제부는 매해 여름 내게 복숭아를 박스로 보내주는데, 올해는 제부가 보내준 복숭아 박스도 맛이 없었고, 내가 시장 가서 사먹은 것도 맛이 없었고, 마트 가서 사온 것도 맛이 없었고, 엄마가 사다준 것도 맛이 없었다.

경비일 하시는 아빠가 아파트 단지 주민으로부터 몇 개 받아오신 복숭아만 유일하게 맛있었다. 왜 복숭아 실패하지요?


그러니까 몇해전 여름, 그 때 그 사람이 날 보겠다고 한국에 와서 함께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 내 손을 잡고 동네를 걸으면서 과일가게를 찾았다. 과일가게에 들어가서는 복숭아 좋아하니까 박스로 사주고 싶다고 복숭아 한박스를 사준 적이 있다. 여름이었다. 아 쉬바.. 상황극에 복숭아 과거까지, 완전 집에 가서 술마실 각이네. 마침 늦은 생일 선물로 와인도 받았겠다. 오늘은 와인을 마실까. 그런데 상황극은 어떡하고 내 머릿속 추억은 또 어떡하지.



여름이 다 가고 있어서 미치겠다. 너무 아쉽다.

나는 여름이 지나갈 때마다 미칠것 같은 기분이 된다.

상황극도 추억도 그래서이다.

붙잡고 싶은데 나는 한번도 떠나가는 것을 붙잡아본 적이 없다.

붙잡아도 어차피 다 갈거면서.



여름의 끝


오래된 시간 앞에서 새로 돋아난 시간이 움츠린다

머리에 조그만 뿔이 두 개 돋아나고

자꾸 만지작거린다

결국 도깨비가 되었구나, 내 사랑



신발이 없어지고 발바닥이 조금 단단해졌다

일렁이는 거울을 삼킬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수천 조각으로 너울거리는 거울 속에

엉덩이를 비추어 보는 일은

이젠 그만하고 싶다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배 뒤집혀 죽어 있는 풀벌레들,

촘촘히 늘어선 참한 죽음이

여름의 끝이었다고

징- 징- 징-

파닥이는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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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20 17: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엇 여름이 가는 게 싫으시군요. 저는 가을을 좋아해서 선선한 바람 불어오기 시작하면 미치게 좋습니다 ㅋㅋ 아침에 뛰기도 편해졌어요.
상황극 궁금하다아 ㅋㅋㅋ

다락방 2021-08-20 18:36   좋아요 2 | URL
저는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변함없이 여름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름이 너무 좋아요. 땀 흐르고 뜨겁고 냄새나는데(응?) 왜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렇다해도 가을은 또 가을대로 즐깁니다만. 훗.

그레이스 2021-08-20 1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 너무 슬퍼요

두 손으로 만든 손우물 위에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쓸데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어쩔 수 없죠?!

다락방 2021-08-20 18:34   좋아요 2 | URL
바로 언급하신 그 연이 저도 너무 슬퍼요. 흐르는 당신을 올려놓는 일, 쏟아져도 쏟아져도 자꾸 올려놓는 일. 쏟아지는데도 번번이 올리려는 마음이 너무 뭔지 알겠어서 슬프죠. 흑 ㅜㅜ

잠자냥 2021-08-20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정말 아직 맛난 복숭아 못 드셨어요? 전 올해 사먹는 복숭아마다 너무 맛있어서... 올해 왜케 맛있냐고 막 그랬는데....? 이것도 다부자님 완패?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근데 복숭아 관련 낭만적이다... 하면서 글읽고 있는데..... ˝아 쉬바˝ ㅋㅋㅋㅋㅋㅋ 이게 뭡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웃 터짐...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 주말엔 꼭 딱복 백도입니다... 황도는 앞으로도 먹을 기회 많아요. 빨리 백도 사러 가요 =33

잠자냥 2021-08-20 17:54   좋아요 2 | URL
다부장 오타났는데 다부자도 괜찮은 거 같아서 걍 둡니다. 부자되세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1-08-20 18:33   좋아요 2 | URL
아시다시피 제가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보니 아름다운 추억 생각나 샤라라랑 하다가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는 자각이 찾아와 쉬바.. 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낭만.. 있었지요, 한때는, 내게도…

아무튼 40평 아파트 고고씽 입니다. 이젠 40평 아파트만 보고 갑니다. 으르렁-

새파랑 2021-08-20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상황극 왠지 슬프면서도 재미있네요. 다락방님은 시도 읽으시는군요. 근데 그레이스님 말처럼 시가 슬프네요 ㅜㅜ

다락방 2021-08-20 18:31   좋아요 2 | URL
시 슬프죠? ㅠㅠ
시는 많이 안읽어요. 시를 잘 못읽겠더라고요. 저는 내심 시는 이과의 영역인가.. 생각합니다. 킁킁.

- 2021-08-20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85 곰곰… 박서준…?

다락방 2021-08-20 18:31   좋아요 2 | URL
땡!! 난 박서준 관심 1 도 없다굳!!!

- 2021-08-20 18:40   좋아요 1 | URL
박서준 몬생겨서 싫은데… 자꾸 유튜브에 떠요… 그래 인정하자…. 난 떠주니가 좋아… 글이라고는 없는 상…
맞춰볼란다. 주지훈!

다락방 2021-08-20 18:48   좋아요 2 | URL
땡! ㅋㅋㅋㅋㅋㅋㅋㅋ 정답 몇 번째에 나오나 보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20 18:53   좋아요 2 | URL
힌트 좀 줘요 ㅎㅎ

다락방 2021-08-20 18:58   좋아요 2 | URL
잘생겼다!!!!!

- 2021-08-20 19:03   좋아요 1 | URL
제이슨 스타댐은 190넘을고 같구…. 젊은 시절 주드로? (얼마전에 리플리보고 홀림)

다락방 2021-08-20 19:10   좋아요 2 | URL
땡! 재이슨 스태덤 180 안돼요 ㅋㅋ 아니, 왜 정답을 피해가지? 왜?

- 2021-08-20 19:12   좋아요 1 | URL
현빈 정우성 조인성 강동원 … (내 기준 잘 생긴 남자 다 나왔다..)

다락방 2021-08-20 19:24   좋아요 2 | URL
왜 떼거지야. 이 중 한명이라굳!!

- 2021-08-20 19:54   좋아요 1 | URL
현빈!

다락방 2021-08-20 19:55   좋아요 2 | URL
딩동댕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8-20 20:01   좋아요 1 | URL
현빈 185였구나…. 다가진 남자…. 무슨 상황극이었는지 다음 페이퍼애 투비 컨티뉴 … 😣

다락방 2021-08-20 20:05   좋아요 1 | URL
안됏! 그건 안됩니다. 내 안의 로맨스는 비밀이에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8-20 20:35   좋아요 1 | URL
이 건 안 봐도 알겠어!! (속닥 야한거였군요?) 아후… 그럼 난 박서준….😫

독서괭 2021-08-20 21:17   좋아요 2 | URL
당연히 야한 거겠죠 쟝쟝님 대체 뭔 건전한 상상을 하신 거예요??.ㅋㅋㅋ

다락방 2021-08-20 21:31   좋아요 2 | URL
이분들 왜이러시지? 아니야, 아니라고! 저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상상 했다고요!! 야한거는 .. 초큼 초큼 아니, 거의 안했다구욧!! 😡

독서괭 2021-08-20 22:35   좋아요 1 | URL
자세히 말을 못 하는 만큼 다락방님 상황극이 야하다는 확신은 점점 커져만 가고…

다락방 2021-08-20 22:59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믿어 주세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8-20 23:03   좋아요 2 | URL
아니 뭐 사람이 살다보면 길을 걷다가도 야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죠 뭘 그리 부끄러워해요(어깨를 토닥인다).

- 2021-08-21 09:45   좋아요 0 | URL
어제 키큰 사람들 업청 검색하다 잤는데 꿈에 송강 나왔어요 ㅋㅋ 야하진 않았고요 ㅋㅋ 거기서도 발연기를 하더라고요??

Falstaff 2021-08-20 1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혹시, 저 시에서 시인의 대가리, 아니, 머리에 뿔 돋는 건, 애인이 바람피워서 그랬나요?
요즘 시는 정말 허벌 어려워서리....

그리고 죄송합니다. 전 올 여름 복숭아, 정말 맛나게 연이어 히트입니다. 지금도, 오늘도 계속. 흑흑흑.....

다락방 2021-08-20 19:59   좋아요 1 | URL
저는 저기 저부분 쏟아져도 올려 놓는 일.. 부분을 좋아하지만 다른 부분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시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주 부족합니다 ㅠㅠ 여튼 뭐가 잘 안됐다는 것 같아요. 잘 안됐고 불발이고 속상하고 뭐 그런… 🙄

내일 복숭아 사러 갈거에요 ㅜㅜ

그렇게혜윰 2021-08-20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한 수 읽으신 게 아니라 술을 한 잔 하신 느낌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8-20 19:56   좋아요 2 | URL
앗 ㅋㅋㅋㅋㅋㅋㅋㅋ 술은 지금 마시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1-08-20 20:35   좋아요 1 | URL
저두 한잔 중입니다 ㅋㅋㅋ

Forgettable. 2021-08-2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현빈 좋아하는 거 바로 모르시다니.. 나만 팬이었던 건가 🥰🥰

- 2021-08-21 09:43   좋아요 0 | URL
저도 똑똑한 친구로서 일위가 현빈임을 알고 있았지만 현빈은 키가 185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ㅋㅋㅋ 저도 팬이예요 껄껄🥰🥰🥰

다락방 2021-08-21 16:30   좋아요 1 | URL
얘들아 싸우지마~ 난 모두를 사랑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

=3=3=3=3=3=3=3=3=3=3

- 2021-08-28 18:20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왜 인제봤지.. 다락방님의 지독한 팬사랑..

Forgettable. 2021-08-21 16: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로가 팬이라고 자처하는 모습 훈훈하군요. ^^ ㅋㅋ

다락방 2021-08-22 12:52   좋아요 2 | URL
아름답지뭡니까! ㅋㅋㅋㅋㅋ

초딩 2021-08-28 13: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뉴스레터 산정 축하드려요~
ㅎㅎㅎ
좋운 주말 되세요~
 
















서론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간신히 서론만 읽고 저쪽으로 제쳐두었었는데, 아아 야속한 시간은 왜 이다지도 빨리 흐르는지, 벌써 8월이 다 갈 기미가 보이는게 아닌가. 이러다 이번달 안에 못읽겠다 싶어 어제는 딱 마음먹고 이 책을 펼쳤다.


역시나 쉬운 문장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책장이 잘 넘어가는 건, 익히 아는 이름들이 나오기 때문인 것 같았다. 루소랑 밀 나올때는 아무 감정 없이 읽어갔는데 막 제인 오스틴하고 브론테 자매 나오기 시작하니까 씐나버려... 그리고 나는 이런 구절을 만난다.



18세기 작가들과 달리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소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p.81)



《제인 에어》는 아주 오래전에 읽었고, 로체스터 집에 갇혀 있던 부인의 입장에서 쓴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읽었다. 《폭풍의 언덕》은 고등학교때 읽었는데, 한참 트와일라잇 읽을 때 벨라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폭풍의 언덕이라고 해서 몇해전 다시 읽었더랬다. 모두 내가 막 좋다고 말하는 소설이 아니고 제인 오스틴의 경우는 더하다. 제인 오스틴의 경우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무려 네 권이나 읽었더라. 《오만과 편견》,《설득》,《에마》,《노생거 사원》인데, 그중에 에마는 내가 너무 싫어했던 소설이다. 그렇지만 노생거 사원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노생거 사원은 사실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읽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중 제일 좋았던거다. 그리고 저기, 소설의 정치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생거 사원에서 제인 오스틴은 소설속 등장인물을 통해 소설에 대해 얘기하는 거다. 나는 그 부분을 짜릿하게 읽었다.
















오전에 비가 와서 할 일이 없으면 굳이 축축하고 더러운 길을 달려가 둘이 문을 잠그고 들어앉아 소설을 읽었다. 그렇다. 소설이었다. 나는 소설가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바, 경멸적인 비난으로 자기들도 생산해 내는 바로 그 소설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옹졸하고 무례한 관습을 따르지 않으리라. 소설가들은 적들과 합세하여 소설에다가 심한 욕설을 하고, 여주인공에게 소설을 허락하지 않고 만약 여주인공이 우연히 소설을 집어 든다면 분명 그 재미없는 페이지를 욕하면서 넘기게 만든다. 안타깝다! 한 소설의 여주인공이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에 의해 후원받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보호와 관심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난 인정할 수 없다. 문학비평가들이 한가할 때 공상을 발산하도록, 그래서 요즘 출판사에서도 싫어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새로 나온 소설에 대해 떠들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자. 우리는 서로를 배신하지 말자. 우리는 이미 상처받은 몸이다. 우리의 작품 활동이 다른 문학 관련 활동보다 훨신 광범위하고 꾸밈없는 즐거움을 제공하는데도, 어떤 글쓰기도 이렇게까지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오만과 무지와 유행에 휩쓸려 우리를 비난하는 무리가 우리의 독자만큼이나 넘친다. 『영국의 역사』의 구백 번째 축약본을 쓴 작가, 또는 밀튼과 포프와 프라이어를 수십 줄 인용하면서 『스펙테이터』한 부와 스턴의 소설 한 장을 모아 펴낸 작가의 재능을 무수한 사람들이 나서서 찬양하는데, 여기에는 소설가의 능력을 비판하고 소설가의 노동을 깎아내리고 천재성과 위트와 취향을 골고루 갖춘 소설을 우습게 보려는 태도가 깔려 있다. "난 소설을 안 읽습니다. 소설은 거의 안 봐요. 내가 소설을 읽을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소설에서나 있는 일이죠." 이렇게들 떠든다. "무슨 책 읽어요, 아가씨?" 아가씨는 "그냥 소설이에요"라고 대답한다. 무관심한 척하면서 또는 순간적으로 부끄러워하면서 소설책을 내려놓는다. "그냥 『세실리아』, 『까밀라』, 『벨린다』라는 책이에요."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정신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인간 본성의 변화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와 위트와 유머의 생생한 발현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선별된 언어로 전달되는 그런 작품이란 말이다. (p.39-41)


크. 역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소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던 제인 오스틴 되시겠다. 나는 소설을 무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소설을 잘 안읽고 소설이 뭔지도 모르며 심지어 소설을 읽을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흥!!


아무튼 노생거 사원 저 부분 읽고나니 흐음, 그렇다면 오스틴 한 권 더 읽어볼까~ 생각하게 되었고 맨스필드 파크를 사도록 해야겠다. (네?)

이성과 감성도 안읽었지만 어쩐지 맨스필드 파크가 더 재미질 것 같아. 오스틴 기다려요~



















《소설의 정치사》에서는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도 언급된다.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것 같긴한데, 이 책은 내가 어떤 책에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도 분명 자주 언급되어서 전자책으로 사둔 터다.

오늘 아침 잠깐 어디 볼까, 하고 몇 장 읽었는데 오... 흥미롭다. 이 책 1권만 전자책 사뒀는데 2권도 사야겠다.
















제인 에어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책은 이미 집에 있는데 지난번에 조카가 빌려갔던가..그것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오만과 편견 빌려갔던가, 제인 에어 빌려갔던가? 제인 에어 민음사 두권짜리였던가? 그러면 안빌려갔을 것 같다. 여튼, 소설의 정치사에서 제인 에어의 한 부분을 인용했는데, 너무나 새롭고 좋은거다!




말해야 한다, 나는. 나는 심하게 짓밟혀 왔다. 이제 돌아서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돌아설 수 있는가? 나는 내 적수에게 복수할 힘을 갖고 있는가? 나는 내가 가진 힘을 모아 이 투박한 문장 속에 터뜨렸다. "나는 속이지 않아요. 속임수를 쓰지 않아요. 내가 속인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했다고 말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인간이며, 당신이 싫다고 말합니다. -p.90, 제인 에어 재인용


위 부분은 외숙모에게 하는 말이라고 한다. 내가 놓친 많은 것들이 제인 에어 안에 있을 것 같아서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원서는 읽겠다는 거 아니고 그냥 뽀대로 올려봤다...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든 제인 에어라는 책에 대해서든, 읽는 사람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라서 책은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것이다. 단순히 재미있다 없다를 떠나서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다, 하는 것들. 제인 에어를 읽고 다락방에 갇힌 로체스터 부인의 입장으로 진 리스가 소설을 쓴 것도 역시 그것대로 의미가 있고, 브론테 자매는 이렇게 소설을 통해 할 말을 했다고 하는 낸시 암스트롱의 글을 읽는 것도 좋다.


《앵무새 죽이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내가 읽은 어떤 책에서는 앵무새 죽이기가 그렇게나 널리 읽혔는데, 왜 하퍼 리는 하필이면 그 책에 등장하는 흑인의 무고가 '강간'에 대한 것이었는지 유감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던거다. 일어나지 않은 강간을 일어났다고 거짓 신고해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인 일. 나는 책의 그 부분을 읽다가, 그러게, 그게 왜 하필 강간에 대한 것이었을까, 백인의 인종주의를 꼭 백인 여성의 강간으로 보여줘야 했을까, 고개를 끄덕인거다. 그런데 최근 읽은 《백인의 취약성》에서도 역시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실제 백인 여성이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흑인 남성이 린치를 당하는 일. 그러니까 그 일은 없는 일을 허구로 만들어낸건 아니고 실제 일어나기도 했던 일인거다. 빈번하달 수 없겠지만, 그러나 일어났던 일에는 틀림 없던 것. '리처드 라이트'의 《백인의 아들》에서는 흑인남성이 백인 여성을 죽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런데 그 죽이기까지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의 배경이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이 사람과 여기 있었다는게 알려지면 나는 분명 린치를 당할 테고, 그걸 막으려면... 하다보니 죽음에까지 이른 것. 하나의 이야기도 누가 어디에 서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지게 될것이고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게 될것이다. 낸시 암스트롱의 관점 역시 기존에 내가 읽었던 다른 작가들의 관점과 같은 부분도 있을 수 있고 다른 부분도 있을 터. 가장 중요한 건,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나의' 관점일 것이고, 그 이야기에 대한 비판을 읽는 '나의' 견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낸시 암스트롱의 소설의 정치사를 읽는 일은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 나로 하여금 별로 호감 가지 않았던 제인 오스틴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고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볼 마음이 생기게 하다니... 후훗.



아무튼 어제도 책 박스가 도착했다.




어쩌자고 두꺼운 책들을 자꾸 사대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책샀숑 또샀숑-

9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라서 《페미니즘의 투쟁》샀는데, 저건 또 왜이렇게 두꺼운가요. 왜...왜....왜.....


Orz



* 아, 그리고 제가 잭 리처 시리즈 마니아 2위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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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8-20 1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저야말로 여기 언급된 책 다 읽어봐야 할 거 같아요.
<제인에어>, <오만과 편견>,<설득>,<에마>,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저 진짜 안 읽었네요;;;

오, 잭 리처 2위 탈환 축하해요. ㅋㅋㅋ 괭님 보고 있어요? ㅋㅋㅋㅋ

독서괭 2021-08-20 12:48   좋아요 4 | URL
후우.. 이미 다락방님께서 댓글로 자랑질하셨습니다.. ㅜㅜ

독서괭 2021-08-20 13:09   좋아요 2 | URL
근데 2위를 뺏긴 건 단발머리님이고 전 사실 상관은 없네요 4위라 ㅋㅋ

다락방 2021-08-20 14:14   좋아요 5 | URL
잠자냥님이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를 읽으신다면 어떤 리뷰를 적어주실까요. 너무 기대되네요. 꼭 읽고 리뷰 써주세요, 잠자냥 님. 잠자냥 님 리뷰 읽는 재미가 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겸손과 거리가 먼 저는, 2위를 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독서괭님께 자랑하였다고 합니다. 엣헴- ㅋㅋㅋㅋㅋ

수이 2021-08-20 1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왜 못 읽어?! 읽을 수 있어요! 읽을 수 있습니다! 이미 읽은 어떤 분 말씀에 따르면 쉬워! 라고 하지는 않았던 거 같지만…… 전 노생거를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1-08-20 14:15   좋아요 2 | URL
제인 에어 너무 두꺼워요 근데. 노생거 사원.. 도전해볼까. 아 일단 지금 하는거나 좀 제대로 하고요 ㅋㅋ 이번주 분량 읽으려면 어휴... ㅋㅋㅋㅋㅋ 그 다음에 오바마.. 제인 에어는 나중에 생각하겠습니다. ㅎㅎ

꼬마요정 2021-08-20 1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노생거 좋아요… 전 제인 오스틴 좋아해요 ㅎㅎ 영드로 만들어진 것들도 좋구요. 그나저나 다락방님 책 읽는 속도도 엄청 나네요. 전 요즘 눈이 침침한데다 드라마에 빠져서 게을러졌어요ㅠㅠ

다락방 2021-08-20 14:16   좋아요 4 | URL
저 책 읽는 속도 엄청나지 않아요, 꼬마요정 님. 저 이번 해에는 아마 작년보다 훨씬 적게 읽을 것 같습니다. 어휴.. 알라딘에 워낙 빠르게 많이 읽는 분들 많으셔서 저는 그저.. 쪼렙... 입니다.
저는 노생거 책은 팔았고 맨스필드 파크 사서 도전해볼까봐요. 후훗.

청아 2021-08-20 13: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의 투쟁> 엄청 두껍네요?! 저도 이제 사야겠어요ㅎㅎ책이 있는 풍경~♡

다락방 2021-08-20 14:16   좋아요 4 | URL
저 페미니즘의 투쟁 두꺼워서 제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어요. 이사람아, 왜 저렇게 자꾸 두꺼운 것만 골라! 하고 말입니다. 흑흑 ㅠㅠ

- 2021-08-20 17:1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두껍죠? (두달전에 사둠)

다락방 2021-08-20 17:15   좋아요 2 | URL
너무 두꺼워요, 너무. 너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2021-08-20 18:03   좋아요 1 | URL
요 책은 월 딱 시작라면 바짝 땡겨읽구로 ㅋㅋㅋ

얄라알라 2021-08-20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부장님의 애정을 듬뿍 받는 조카님은 완역본 <제인에어>를 기특하게도 빌려갔단 말인가요? 고전 읽는 청소년을 거의 본 적이(저만 그런지...) 없어서 인상 깊네요.


지난 번에 이어 <백인의 취약성> 리마인드시키며 이 리뷰에서 엮어주시니, 요건 9월에 꼭 읽어야겠네요.

다락방 2021-08-22 12:52   좋아요 1 | URL
제인 에어는 안빌려갔고(집에 있네요) 오만과 편견을 빌려갔어요. 물론 빌려만 가고 아직 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하하하하. 잔뜩 빌려가고 안읽고 그러면서 어제 와서 책 또 한권 빌려갔어요. 쌓아두고 안읽는게 제이모랑 똑같네요.. 하하하하하

얄라알라 2021-08-20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신의 화살> 데려왔는데 올려주신 <신의 전쟁>이랑 표지 색깔까지 비슷하네요. 두께랑 ㅋㅋ<신의 전쟁> 검색하러 갑니다용

다락방 2021-08-22 12:53   좋아요 1 | URL
저 북사랑님 댓글 읽고 신의 화살은 뭔가 싶어서 검색해봤어요. 이건 바이러스 얘기네요? 오오... 세상엔 왜이렇게 책이 많을까요. 좋으면서 싫습니다... ㅜㅜ
 
[전자책] 퍼스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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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들에게서 '이건 아닌 것 같아'하는 감각을 가진 걸 볼 때가 너무 좋은데, 잭 리처는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도덕적 잣대를 남에게는 들이대지만 자신에게 들이대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짜 싫은데, 잭 리처는 아닌 것 같은 일을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그랬지만  '윽 설마 그러는 건 아니겠지'하는 지점이 나올때마다 잭 리처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잭 리처 역시 '그런 짓 하는 쪽팔린 나'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지점이 좋다. 

쓸데없는 오지라퍼가 되지 않지만 마음은 따뜻한 우리의 셜록 홈리스! 내가 다 읽어주마.


자, 이제 소설의 정치사 읽으러 가자. 고고씽!!


**''셜록 홈리스'는 이 책속에서 나오는 표현임. 내가 만든 거 아님. 괜히 사람들이 나 센스쟁이로 오해할까봐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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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19 2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으으으아닛!! 결국 다 읽어버리셨다…
잭리처는 정말 이런 류의 작품 주인공답지 않게(?) 굉장히 절제하는 성격 같아요.

다락방 2021-08-20 07:55   좋아요 2 | URL
등장인물들에게 ‘윽 그건 아니야 그러지마‘ 하는 지점에 있어서라면 잭 리처는 그걸 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너무 좋아요. 저는 이 시리즈에서 진짜 ‘야, 여기서 너 그거하면 진짜 빻은새끼다..‘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안해서 너무 좋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스포일러 될까봐 조심조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8-2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셜록 홈리스가 무슨 의미인가요?😅
잭리처 입문 못해 이해 안되는 1인입니다~ㅎㅎ

독서괭 2021-08-20 07:06   좋아요 1 | URL
그냥 잭리처의 특징을 조합해 다락방님이 만드신 말 같습니다 ㅎㅎ 셜록처럼 추리를 잘하고 홈리스로 떠돌아댕기는..

다락방 2021-08-20 07:54   좋아요 2 | URL
아니 제가 저기에 ‘내가 만든 거 아님‘이라고 써놨는데 말입니다? ㅎㅎ

툐툐님, 잭 리처는 일정한 거주지가 없이 늘 떠도는 사람이거든요. 가방도 보따리도 없어요. 옷은 새로 사입고 칫솔 하나만 가지고 다니죠. 그런데 사건 해결을 잘해서 시리즈중 이 [퍼스널]에 나오는 사람들이 잭 리처를 ‘셜록 홈리스‘라고 불러요. ㅎㅎ

붕붕툐툐 2021-08-20 07:58   좋아요 1 | URL
엄훠엄훠~ 그런 사람한테 양치질 안한다고 뭐라고 하신겁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옷을 매번 새로 사입는 건, 제 입장에선 재벌인데요? 흐음~ 흥미롭네요~ 잭리처~ㅎㅎ

/독서괭님,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용~

다락방 2021-08-20 07:59   좋아요 3 | URL
아니, 양치질은 하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초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깔끔하지 못한 느낌이라서요 ㅋㅋㅋㅋㅋㅋ잠은 모텔에서 잔단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툐툐님 잭 리처 재밌어요! (영업하기 ㅋㅋ)

독서괭 2021-08-20 09:33   좋아요 1 | URL
@다락방 응??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마음에 맨 아래 추신을 못 읽었나봐요. 당연히 센스쟁이 다락방님이 만드신 줄 ㅋㅋㅋ

다락방 2021-08-20 11:23   좋아요 1 | URL
제가 사실 그렇게까지 센스있진 않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책에서 셜록 홈리스 보고 아 리 차일드 천재? 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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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다.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이야기들을 쓰면서도 언젠가 한 번은 꼭 써야 하는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생각하면서 첫 문장도 쓰지 못했던 이야기. 그것은 원한에 대한 이야기이고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죽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써야만 비로소 원한이 사그라들것 같아서. 한 소녀가 내내 원한을 품고 살다가, 그 원한을 품게 만든 상대를  기어코 제 손으로 죽이는 이야기를, 나는 쓰고 싶었다. 그 소녀가 죽인 사람의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소녀는 그 죽음은  제 손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도 않는 이야기를, 나는 쓰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까닭은, 그것이 내가  살면서 해야 했던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 일을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늙어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결코 해낼  수 없었던 일을, 나는 그가 늙어 저절로 죽기 전에 소녀의 손을 빌어 해내고 싶었다. 반드시 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소녀가 그 사람을  죽여버리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소녀는 빛과 행복을 찾게 될까? 나는 소녀의 그다음 삶을 그려볼 수가 없어서 늘 어느  한 장면만을 상상한 채로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다.


나는 많은 여자들이 그리고 남자들도  원한을 갖고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원한을 품고 살 것이고, 그 원한을 풀어내기 위해 각자의 행동을 할 것이다.  아니, 지금 순간적으로 타오르는 화 말고, 깊은 원한. 내내 마음 저기에 응어리져 있는 것. 기어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엉엉 울거나 자신의 가슴을 쳐내면서 토로해야만 하는 그런 원한. 유령으로라도 나타나서 어떻게든 밝히고 풀어내야 할, 그런  원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 천국과 지옥에 가기 전에 아직 미련이 남게 만드는, 미처 떠오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원한.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에서는 '셜리 잭슨'이 등장해 동양의 억울한 자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억울하게 계모에 의해 죽은 자매의 이야기. 원한을 풀어달라는 자매들이 등장하면 그 공포로 죽어나가는 수령의 이야기.  자기 원한을 풀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세상에 원한을 하나 더하는 일이 아닌가. 자매의 억울함을 들어주었던 새로 부임한  수령은 그 뒤로도 억울한 원혼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사람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세상에 억울한 영혼이 하나도 남지 않는 일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전해져내려 오는 이야기를 지나쳐  대불호텔로 돌아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그 호텔에 글을 쓰기 위해 온 사람, 그 호텔에서 기어코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호텔에 살고 있는 어떤 악의를-악의는 처음부터 악의였을까?- 소리로, 그리고 모습으로 마주친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채로 신뢰는 이내 불신으로 바뀌면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내 의지가 결코 아닌 채로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가까운 사람과  멀어지고 멀어진 사람과 가까워지면서, 여기에 영영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과 여기를 어떻게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호텔 안의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소리를 듣고, 나에게 말을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모습을 본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증오해 나는 너랑 헤어질 거야 나는 너랑 헤어지기 싫어, 온갖 마음과 소리가 있다. 내 입을 통한 것이 아니거나, 내 입을 통해 나왔어도 내 것이 아닌 소리들.

그 모든 것들은 차곡차곡 대불 호텔이 품는 역사가 된다. 그리고 현재의 작가에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된다.




원한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아주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강화길도 어떤  억울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대불호텔의 유령은 나타난 것일 테다. 그러나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원한, 거기에서 멈춰있다면,  강화길은 그다음을 진행한다. 이 이야기 속에선 이 사람이 억울하고 저 이야기 속에서는 저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사랑이 있었을 거라고 얘기한다. 끝내 사랑으로 마무리한다. 어떤 원한이 기어코 나를 저주하고 찾아들어도,  그래도 옆에서 손잡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 저주에 귀를 막을 수도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다음의 삶을 그려낼 수 없어서 나는 늘  쓰고자 하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면, 그다음의 삶을 그려낼 수 있어서 강화길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테다. 결국은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원한을 넘어서는 일이어야 한다는 듯이. 

원한만으로는 우리가 살 수 없다는 듯이.


그 순간, 내 안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목소리들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나는 나의 목소리로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네가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그가 얼굴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p.294


그렇지만,

등장인물 몇 되지도 않는데 정신 사납고 산만하다. 처음엔 뭔가 있을것처럼 악의와 원한으로 진행하다 끝에 가서 갑자기 우리 사랑 ♡ 이러는데 좀 당황스러웠다. 내게 어떤 저주가 들러붙어도, 내가 어떤 환청을 들어도 사랑이면 샤라라랑~ 된다는건가 싶고, 전체적으로 용두사미의 느낌.

강화길은 <다른 사람>, <음복> 그리고 지금이 세번째 만남인데 대불 호텔의 유령이 제일 별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신형철 별로 되었지만(한때 진짜 좋아해서 뒤지면 사랑고백도 나올거다), 이 책에 대한 추천사 진짜 별로다. 이 책이 '강화길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것' 이라니, 이게 칭찬이여 저주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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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0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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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30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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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17: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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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8 18: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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