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국민학생이었을 때, 내 밑으로 어린 동생 둘까지 포함해 우리만 남겨두고 엄마와 아빠는 돈을 벌러 나갔다. 밥통에 밥은 항상 있었고 나는 동생들에게 끼니때면 밥통에서 밥을 퍼서 밥상을 차려주었다. 엄마는 집에서 나서기 전 화장대에 항상 천 원짜리 한 장을 올려두셨고,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돈으로 혹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으라 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그 돈을 가지고 슈퍼마켓으로 가 먹고 싶던 과자를 골라 사들고 와서는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놀거나 숙제를 하거나 학원을 다녀오거나 혹은 내가 만들어준 간식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냈다.
우리만 놔두는 것이 엄마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터, 가끔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할아버지께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 좀 봐달라 부탁드렸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나는 할아버지의 밥을 차렸고 할아버지의 간식도 챙겼다. 할아버지는 그저 가만 계셨고, 그러다 엄마가 돌아오시면 엄마가 드리는 수고비를 들고는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오면 달랐다. 엄마는 아주 가끔 천안에 계신 외할머니께 부탁을 드리기도 했는데, 버스를 타고 오셔야 했고 딸
집이기도 해 자주 방문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어쩌다 우리를 봐주러 오시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셨고, 우리를 씻겨주셨고,
나가 놀다 다치고 돌아오면 약을 발라 주셨고,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셨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나는
다시 내 나이에 걸맞은 어린아이가 됐다.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에서의 '지연'은 희령이란 지역에 취직을 해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 남편과 이혼하게 돼서 마음이 너덜너덜한데, 그 사랑은 다정하고 영원할 줄 알았다가 깨지게 되어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데, 남편은 본인의 외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지연의 부모님을 포함해 지연 주변의 사람들은 지연 남편의 외도를 지연 탓으로 돌린다. 네가 어떻게 했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라고. 그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 마침 희령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입사를 지원했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거다. 자동차 뒷좌석에 짐을 싣고 희령으로 가 머무를 집을 구하고 혼자 지내게 되면서 지연은 우연히 자신의 외할머니 영옥을 만나게 된다. 열 살 때 할머니를 본 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니 22년 만이다. 22년 만에 할머니가 먼저 지연을 알아보았고, 그렇게 지연은 할머니와 종종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고 지연도 할머니가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저 안에 자리한 애정이 건드려지기 시작하면서 다정하고 우정 어린 사이가 되고 그 만남들 속에서 지연은 영옥의 어머니이자 본인의 증조할머니인 이정선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팠지만 증조할머니의 삶은 더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병든 어머니를 두고 개성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백정의
자식이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심지어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편은 본성이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해주는 나에 취한
허영심 가득한 남자였다.
지연의 할머니 영옥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가 결혼하자고 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로 자신과 중혼한 거였고, 그에 대해 끝까지 사과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딸 미선을 자신의 호적에 올린 채 전 부인과 함께 떠난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영옥의 험담을 한다. 조강지처 있는 거
알면서도 결혼한 게 분명하다고. 영옥은 자신의 딸 미선을 홀로 힘들게 키우고, 미선은 정상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낳으면서 이 결혼생활과 삶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를 힘겹게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미선은
자신의 엄마와도 사이가 소원해졌고 자신의 딸 지연과도 서로 상처주기에 바쁘다. 다정한 남자랑 살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들 모두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버텨오면서, 그러나 자신의 딸만큼은 다정한 남자와 결혼하길 바랐지만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여기에 영옥의 친구 새비와 새비의 딸 희자가 이 가족들과 단단히 연결되는 다른 여자들로 나오는데, 영옥이 힘들 때 새비가 있었던 것처럼, 새비가 힘들 때 새비가 살아야 할 이유를 영옥은 매일 메모에 남겨준다. 넌 살아야 한다, 넌 살아야 해, 네가 살아야 할 이유는 많아. 죽고 싶어질 때마다 죽고 싶어 질 만큼 힘들 때마다 곁에서 그들은 서로를 감싸 안고 힘이 되어주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영옥이 말할라치면 새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자고 말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았어. 그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p.258
그들은 서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아주고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건 비슷한 삶을 사는 다른 여성이었다.
영옥은 지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얘기한다. 평생 그런 사람이 그리고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자신의 시를 통해 말했었다. 나의
외할머니의 삶 역시 고통스러웠음을, 고생길이었음을 나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나의 엄마로부터 그 얘기를 반복해 들었던 까닭이다.
엄마는 그렇게 험난한 할머니의 삶 속에서도 엄마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어서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엄마는 매일 할머니랑
통화하고 안부를 묻고 자주 들러 할머니를 챙긴다. 이가 성치 않은 할머니를 위해 순두부찌개를 준비해 가시고,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가 좋아해서 소주 두 잔과 천천히 씹어 먹는 닭강정도 포장해가신다.
나의
외할머니는 이제야 비로소 행복하고 평안하다 하신다. 혼자 사는데, 아들과 같이 살았던 때보다 더 평안하고 지금이 너무 좋다고
계속 말씀하신다. 할머니가 사는 연립주택은 할머니처럼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고, 그들과 벗이 되어 종종 함께 외출하시며(지금은
못하시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을 아직 오르내리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다. 매일, 지척인 한강까지 산책하기도 잊지
않으신다. 할머니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나는 왜 할머니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이렇게 늦게 온 걸까 안타깝다가도 그래도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걸 지금이라도 깨달으시니 다행이다 하면서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나는 그 이메일이 답을 받을 수 있기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랐다. 부른다면, 응답해주기를.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던 사이라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토록 시간이 오래 지나도 내가 불러주면
응답해주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라도 삶은 계속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다.
최은영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숱한 관계들에 상처 받다가도
그러나 돌아봐주고 들여다봐주고 응답해주는, 애정과 연대로 이어진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얘기하고 당신이 들어준다면, 당신이 얘기하고 내가 들어준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불렀을 때 응답해준다면, 그 밤은 밝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