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아직 국민학생이었을 때, 내 밑으로 어린 동생 둘까지 포함해 우리만 남겨두고 엄마와 아빠는 돈을 벌러 나갔다. 밥통에  밥은 항상 있었고 나는 동생들에게 끼니때면 밥통에서 밥을 퍼서 밥상을 차려주었다. 엄마는 집에서 나서기 전 화장대에 항상 천 원짜리  한 장을 올려두셨고, 엄마 아빠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돈으로 혹여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 먹으라 하셨다. 우리 삼 남매는 그 돈을  가지고 슈퍼마켓으로 가 먹고 싶던 과자를 골라 사들고 와서는 엄마 아빠가 올 때까지 놀거나 숙제를 하거나 학원을 다녀오거나 혹은  내가 만들어준 간식을 먹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보냈다.

우리만 놔두는 것이 엄마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터,  가끔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할아버지께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 좀 봐달라 부탁드렸다. 할아버지가 오시면 나는 할아버지의 밥을 차렸고  할아버지의 간식도 챙겼다. 할아버지는 그저 가만 계셨고, 그러다 엄마가 돌아오시면 엄마가 드리는 수고비를 들고는 당신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외할머니가 오면 달랐다. 엄마는 아주 가끔 천안에 계신 외할머니께 부탁을 드리기도 했는데, 버스를  타고 오셔야 했고 딸 집이기도 해 자주 방문하지 않았던 할머니가 어쩌다 우리를 봐주러 오시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밥을 차려주셨고,  우리를 씻겨주셨고, 나가 놀다 다치고 돌아오면 약을 발라 주셨고,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셨다.  외할머니가 오시면, 나는 다시 내 나이에 걸맞은 어린아이가 됐다.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에서의 '지연'은 희령이란 지역에 취직을 해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 남편과 이혼하게 돼서 마음이 너덜너덜한데, 그  사랑은 다정하고 영원할 줄 알았다가 깨지게 되어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는데, 남편은 본인의 외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지연의  부모님을 포함해 지연 주변의 사람들은 지연 남편의 외도를 지연 탓으로 돌린다. 네가 어떻게 했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라고. 그  상황을 견디기가 힘들어 마침 희령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에 입사를 지원했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된 거다. 자동차 뒷좌석에  짐을 싣고 희령으로 가 머무를 집을 구하고 혼자 지내게 되면서 지연은 우연히 자신의 외할머니 영옥을 만나게 된다. 열 살 때 할머니를  본 게 마지막 기억이었으니 22년 만이다. 22년 만에 할머니가 먼저 지연을 알아보았고, 그렇게 지연은 할머니와 종종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할머니는 지연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고 지연도 할머니가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그 둘 사이에는 저 안에 자리한 애정이 건드려지기 시작하면서 다정하고 우정 어린 사이가 되고 그 만남들 속에서 지연은  영옥의 어머니이자 본인의 증조할머니인 이정선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여성들의  삶은 언제나 고달팠지만 증조할머니의 삶은 더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병든 어머니를 두고 개성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자와 결혼했지만 백정의 자식이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심지어 자신을 구원해주고자 했던 남편은 본성이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해주는 나에 취한 허영심 가득한 남자였다. 

지연의 할머니 영옥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가 결혼하자고 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로 자신과 중혼한 거였고, 그에 대해  끝까지 사과하지 않으며 그들 사이의 딸 미선을 자신의 호적에 올린 채 전 부인과 함께 떠난다. 여기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영옥의 험담을  한다. 조강지처 있는 거 알면서도 결혼한 게 분명하다고. 영옥은 자신의 딸 미선을 홀로 힘들게 키우고, 미선은 정상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낳으면서 이 결혼생활과 삶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를 힘겹게 고민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미선은 자신의 엄마와도 사이가 소원해졌고 자신의 딸 지연과도 서로 상처주기에 바쁘다. 다정한 남자랑  살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들 모두 자신의 삶을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버텨오면서, 그러나 자신의 딸만큼은 다정한 남자와  결혼하길 바랐지만 그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여기에 영옥의 친구 새비와 새비의 딸 희자가 이 가족들과 단단히 연결되는 다른  여자들로 나오는데, 영옥이 힘들 때 새비가 있었던 것처럼, 새비가 힘들 때 새비가 살아야 할 이유를 영옥은 매일 메모에 남겨준다. 넌  살아야 한다, 넌 살아야 해, 네가 살아야 할 이유는 많아. 죽고 싶어질 때마다 죽고 싶어 질 만큼 힘들 때마다 곁에서 그들은 서로를  감싸 안고 힘이 되어주었다. 서로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 함께 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영옥이 말할라치면 새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하자고 말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았어. 그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p.258



그들은 서로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아주고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들어주었던 사람들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건 비슷한 삶을 사는 다른 여성이었다.

영옥은 지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고 얘기한다. 평생 그런 사람이 그리고 그런 시간이 필요했을 테다.


'뮤리엘 루카이저'는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라고 자신의 시를 통해 말했었다. 나의 외할머니의  삶 역시 고통스러웠음을, 고생길이었음을 나는 익히 잘 알고 있다. 나의 엄마로부터 그 얘기를 반복해 들었던 까닭이다. 엄마는  그렇게 험난한 할머니의 삶 속에서도 엄마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어서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엄마는 매일 할머니랑 통화하고 안부를  묻고 자주 들러 할머니를 챙긴다. 이가 성치 않은 할머니를 위해 순두부찌개를 준비해 가시고,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가 좋아해서  소주 두 잔과 천천히 씹어 먹는 닭강정도 포장해가신다. 


나의  외할머니는 이제야 비로소 행복하고 평안하다 하신다. 혼자 사는데, 아들과 같이 살았던 때보다 더 평안하고 지금이 너무 좋다고  계속 말씀하신다. 할머니가 사는 연립주택은 할머니처럼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고, 그들과 벗이 되어 종종 함께 외출하시며(지금은  못하시지만)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을 아직 오르내리실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시다. 매일, 지척인 한강까지 산책하기도 잊지 않으신다.  할머니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나는 왜 할머니가 스스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이렇게 늦게 온 걸까 안타깝다가도 그래도  평안하고 행복하다는 걸 지금이라도 깨달으시니 다행이다 하면서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생사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장면이 책에 나온다. 나는 그 이메일이 답을 받을 수 있기를 순전히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랐다. 부른다면, 응답해주기를.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우리가 서로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던 사이라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러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토록 시간이 오래 지나도 내가 불러주면  응답해주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라도 삶은 계속 유지해야 할 가치가 있다. 


최은영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숱한 관계들에 상처 받다가도 그러나 돌아봐주고 들여다봐주고 응답해주는, 애정과 연대로 이어진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얘기하고 당신이 들어준다면, 당신이 얘기하고 내가 들어준다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불렀을 때 응답해준다면, 그 밤은 밝을 것이었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 P17

"제가 수저라도 놓을게요."
내가 어정쩡하게 앉아서 그렇게 말하자 할머니는 손을 휘휘 저었다.
"대접받을 줄도 알아야지." - P27

삼천아, 새비에는 지금 진달래가 한창이야. 개성도 그렇니. 너랑 같이 꽃을 뽑아다가 꿀을 먹던 게 생각나. 그걸 따다가 전을 부쳐 먹던 것두, 같이 쑥을 캐다가 떡을 만들어 먹던 것도. 인제 나는 꽃을 봐도 풀을 봐도 네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됐어. 별을 봐도 달을 봐도 그걸 올려다보던 삼천이 네 얼굴만 떠올라. 새비야, 참 희한하지 않아? 밤하늘을 보면서 그리 말하던 네가 떠올라. 이것도 희한하구 저것도 희한한 우리 삼천이가 생각나누나. - P12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엑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P134

"놉 갔다가 받아왔어. 씻어온 거야. 먹어. 껍질이랑 씨는 봉지에 버리고."
나는 포도 한 알을 깨물어 먹었다. 혀뿌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달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쪽으로 부채를 부쳤다. - P211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6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1-08-23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읽다가 약간 저 이북 사투리 때문에 덮은 채로 모셔만 뒀어요!! 언제 또 홀랑 읽으시고 이렇게 홀랑 쓰신 거예욥? 🥲 중간에 스포당하지 않으려고 문단 건너뛰고 읽었어요. 책 다 읽고 돌아오겠숩니다!!

다락방 2021-08-23 12:08   좋아요 3 | URL
저 어제 이거 다 읽고 잤어요. 책장 잘 넘어가고요 눈물도 몇 번이나 닦았네요. 사실 딱히 스포당하고 할건 없어요. 스포 당하고 뭐 그럴 내용이 아니에요. ㅎㅎ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라 아쉽지만 읽는 맛이 나는 소설이었어요. 쟝님의 독서 화이팅!

독서괭 2021-08-23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최은영인가요? 장편도 잘 쓴 모양이예요. 리뷰 잘 읽었어요^^

다락방 2021-08-23 12:35   좋아요 3 | URL
네 잘 썼는데 단편이 더 좋긴 해요.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좋긴 하지만 좀 더 새로운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휴, 책 한 권 읽으면서 몇 번이나 울었네요 ㅠㅠ

붕붕툐툐 2021-08-23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차이는 왜 그리 큰 걸까요??
외할머님이 건강하고 평안하셔서 너무 좋네요~~
그리고 락방님이 어려서부터 동생들을 챙기고 간식도 만들고 그래서 지금도 사이도 좋고 빵도 잘 만드시고 그런가봐요?

다락방 2021-08-24 08:10   좋아요 1 | URL
사실 그당시 제가 만들어준 간식이라고는 식빵 구워서 그 안에 계란프라이+케찹 넣어줬고요, 떡볶이.. 해줬습니다. 떡볶이 떡이 슈퍼마켓에서 350원 할 때였어요. 하하하하하.
그 당시 저희 삼남매만 집에 있었기 때문에 저희 사이가 더 돈독해진것 같다는 생각을 저도 합니다. 그 시절의 어떤 부분은 분명 제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기도 하지만, 우리 삼남매가 이렇게 친해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요.

할아버지 진짜 싫어요. 너무 싫어요. 끔찍한 존재였어요.
그런 반면 할머니는 아흔이 넘은 지금에도 혹여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늘 조심하려 하세요. ㅠㅠ 어휴 우리 할머니들 ㅠㅠ

2021-08-24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5 08: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25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1-08-24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동네 살 적엔 (아이들 어릴 때) 시아버님께 아이들 (주로 막둥이 혼자) 봐달라고 부탁드린 적 있어요. 그런데 오셔선 티비만 보시다 가시고 애는 혼자 뒹굴고.... 친정 엄마가 오시면 집안 청소에 이불빨래 까지 하셔서 제가 오히려 못오시게 했어요. 그렇습니다. 친정아버진 어떠셨더라? ;;;; 아, 친정 아버진 우리 애랑 같이 놀아요. 어지르고 막. 둘이서 그림도 그리고. - -;;;;

다락방 2021-08-25 08:54   좋아요 1 | URL
ㅎㅎ 저희 아버지도 손주들을 사랑하시지만 사랑만 하십니다 ㅋㅋㅋ 짜증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말만 하죠. 애들 잘 봐라, 잘 지켜봐라.. 아, 풍선껌 같은건 잘 사다주셔요. 예전에 타미가 타요 껌을 너무 좋아해서 ㅋㅋ 타미만 오면 타요껌 사다주는게 아버지의 즐거움이었죠. 그래도 애들하고 잘 놀아주시긴 하네요. 전 아버지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 존재들에 대해 딱히 기대하는 게 없답니다? 하하하하하.

독서괭 2021-09-1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흐 다락방님 당선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1-09-10 16:23   좋아요 0 | URL
이유경 작가님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09-1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

다락방 2021-09-10 1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축하 감사하지만 매번 이렇게 안해주셔도 됩니다. 하핫;;

2021-09-10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9-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