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아무리 좋아하는 책이라도 인상적이거나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나와도 줄을 긋지 않았다. 접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혼 때 이사를 하면서 고스란히 기증하고 팔고 하며 책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갈피로 연필을 사용하며 줄을 좌악좍 그어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아름다운 묘사, 기억해 두고 싶은 경구, 잘 이해가 안 가는 어구, 공감 백배인 인물의 고백.
줄을 긋기 시작하면 그 책은 마음에 안 들어도 안고 가야 한다. 팔 수도 기증할 수도 없고 빌려주기도 뭣하다. 줄 그은 문장은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내밀한 고백 같아서다. 그래서 법정 스님의 책을 친구에게 빌려 주면서 줄 그은 문장들이 괜히 걸렸다. 지나고 보면 왜 줄을 그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다. 뜬금없는 대목에 별표까지 되어 있는 경우는 정말 낯선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건네준 것 같다. 시간의 지형은 모든 것을 이해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한다. 과거의 나와 지금와 나와 미래의 나는 타인만큼 낯설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줄긋기를 참는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곤혹스럽다. 색깔 간지, 북다트, 심지어 영수증도 줄긋기를 대신한다. 중반쯤 와서 이 책은 반드시 소장할 것이고 너무 표시해 두고 싶은 곳이 많다는 깨달음이 오면 앞서 번거롭게 붙여 두었던 간지들을 처절하게 추억하며 잡아 빼고 줄을 긋기 시작한다. 간지가 문어발처럼 붙어있던 책을 발견한 친구는 기겁하는 표정으로 "이게, 이게 참..."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간지가 해도 해도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돌아서서는 누군가에게 참 이상한 독서벽이 있다고 뒷담화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빌린 책도 줄을 그을 수 없다. 이 책.
아무 기대 없이 눈에 띄어 빌려 온 이 책은 마치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내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의 허점, 약점, 맹점을 예리하게 파헤쳐서 보여 주고 질타하고 조언하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제목은 진부한데 내용은 진부하지 않았다. 보상과 처벌, 특히 훈육 과정에서의 타임 아웃 같은 격리가 동물을 이용한 행동주의 실험에서 온 것이라는 데에 무척 놀랐다. 신사적이고 왠지 좀 덜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훈육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애정 철회의 훈육 방식은 아이에게 무척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칭찬 스티커 같은 보상 방식도 인간 관계를 교환 논리로 치환해서 생각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애들을 지나치게 자유 방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유 방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고 지적한 것에도 공감이 갔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한 통찰 있는 시선이 놀라웠다. 다만 대안이나 해결책에 대한 얘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해서 아쉬웠다. 형광연두 간지를 두둑하게 붙였다가 옮겨 적지도 못하고 반납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우 한 권 사서 가지고 있기도 하는데 그냥 '이런 측면에서 생각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안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제목이나 표지나 사실 <금각사>, <가면의 고백> 등으로 노벨문학상에 거론되기도 했던 미시마 유키오와는 잘 매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해서 대체 어떤 작가인가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책갈피도 없이 빈 손으로(연필 없이) 드러누워 읽기도 하고 티비를 보며 읽기도 하고 불성실하게 시작했다.
줄거리와 구성의 완성도는 사실 작가의 문명에 미치지 못한다. 하이틴 로맨스 아니야? 하며 좀 의아해하며. 그런데 역시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 특히 언어로 결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재주가 놀라웠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떠돌아 다니는 것들을 하나 하나 언어로 채집해 꾸욱 꾸욱 눌러 쓴 것만 같았다.
한 고개를 넘으면 연애도 역시 하나의 집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의 집이 마련되는 것이다. 만나지 않는 동안에 있었던 서로의 동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밀회 때마다 하나의 투명한, 눈에 보이지 앟는 집에서 살게 된다.
-p.86
소재는 아침 드라마 같은 불륜인데 미시마 유키오는 거기에서 인간의 더없이 나약한 속성을 제대로 묘파해 낸다. 이 작가는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른 작품들도 기회가 되면 읽어 보고 싶다.
그리고 오늘 손 안에 들어온 책. 간지를 꺼낼 것인가, 연필을 들 것인가. 기대 중.
김영하는 서사력이 소위 글발을 앞지르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 것 같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나쓰메 소세키는 재미있을 턱이 없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흡인력 있게 하는 재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아 중독성이 있다. 가지려면 줄을 그을 것이고 떠나 보내려면 간지를 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