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대학 시절 가장 친했던 동기의 결혼식장으로 향하던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 날을 위하여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번연히 알면서도 까만 나비 날개 같은 원피스를 구입하여 입고 평소 같으면 질끈 동여맬 머리를 풀고 귀찮아서 안 하던 귀걸이, 목걸이를 다 동원하였다.

 

우리는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때로 스물세 살 정도였다. 어떤 날은 기분이 너무 좋아 세상이 한없이 친절해 보이고 어떤 날은 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세상처럼 냉혹한 게 없어 보였다. 어떤 날은 세상 모든 이치를 알 것 같았고, 또 어떤 날은 세상에서 아는 게,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학하였다. 시간이 한정없이 있으면 돈이 없었다. 동기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것도 같았고 때로 무심코 들은 한 마디에 큰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여 끙끙 앓기도 했다. 그게 바로 청춘이었을까?

 

해 질 녘, 초록색의 황혼 녘, 바닷가에 서면, 눈을 감아야 참으로 보이는 나의 별. 잘 익은 과일. 하루에 한 번 익은 지구가 비로소 내 가슴에 깊이깊이 들어앉는다. 내가 그 별 속에 살고, 그 별이 나의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전을 시작한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 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김화영 <행복의 충격> 중

 

 

 

이젠 중년들의 티가 완연히 났다. 사내 아이들은 이제 한 집안의 가장이었고 이미 초등학생 학부형이 된 녀석은 아이 둘을 쫓아다니느라 대화의 맥이 자꾸 끊겼다. 여기 저기에서 익숙하지만 십여 년을 만나지 않고 나니 대학 시절처럼 무람없이 대할 수 없는 얼굴들도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나는 백팩을 매고 마구 그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 깡통매점에서 청량음료를 하나씩 나누어 들고 퍼더 앉아 했던 얘기를 또 하고, 들었던 얘기를 또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젠 어제 같았다고밖에 그런 진부한 표현을 빌릴 수밖에 없는 느낌을 가지고 내 앞에 포박해 들어온 그 아이들의 시간의 무게에 아연해졌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나를 둘러싼 녀석들을 보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 시간을 뒤로 밀어내며 왔던 것이다. 내 가슴 속의 별. 그 별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찬연하게 때로는 서럽게 빛나고 있다. 아무리 비하하고 아무리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것만큼 찬란한 별은 없을 것이다. 젊음. 청춘. 지금의 깨달음을 가지고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나이는 또 그 만큼의 어리석음과 치기를 들쳐업고 나타날 것이다. 청춘은 그런 것같다.

 

해질 녘이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항상 우주가 보인다는 저자 김화영의 얘기는 그 젊음을 고스란히 집과 학교에 누려야 했던 좁은 공간 출신의 나로서는 더없이 샘이 나게 한다. 사실 나는 문학평론가서로도 유명한 번역가로서도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알게 된 그는 청춘을 우주가 보이는 지중해에서 보내고 그것을 적당한 거리에서 관조하며 복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세계.

 

그 꿈은 어느 여름 오후를 보낸 쿠르 미라보의 까페, 그늘지고 조용한 구시가의 작은 골목으로의 산책,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서점에서 만난 초록빛 눈의 처녀, 부활절 무렵부터 늦봄까지 피는 코클리코 붉은 야생화, 자동차로 십오 분이면 항상 눈앞에 출렁거리는 지중해, 근교의 푸른 하늘을 물들일 듯한 보랏빛 라벤더의 광활한 고랑들, 언덕배기의 자욱한 텡(타임)의 그윽한 냄새, 토르네 성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양옆의 숲 속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하얀 별장들, 작열하는 태양에 빛이 바랜 붉은 기와, 시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학생들이 이 소도시를 가득히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설렘, (중략)

- 김화영 <행복의 충격> p.37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흔쾌히 그렇다,고 얘기하는 대신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더 행복해하며 그 자체로 충만해하며 젊음을 누리고 싶다고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아쉬움을 가지고 덧붙일 것같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니까. 너무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 나를 너무 아프게 했던 일들. 그 자체로 웃어도 되었던 일들을 왠지 망설이며 유보했던 일들. 청춘은 덜 익은 차가운 과일 같다. 싱그럽지만 처음 베어 먹을 때의 그 아릿한 차가움은 피할 수 없다.

 

누군가를 붙자고 이야기해도 그 자체로 용인되던 그 날들 같지는 않았다. 주고받는 안부 인사. 자꾸 끊기는 화제들. 우리는 그렇게 삶의 가장 바쁘고 과업이 많은 시기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면 충분히 나이들고 나면 그 때는 우리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들 얘기했다. 지금은 아직인 것 같았다.

 

우리는 그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모든 것을 향해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언제든 느낄 태세를 갖추고 있는 오관과 살을 가지는 그 순간에 모든 목적은 달성되었다. 날들은 과일과 같다. 우리들의 역할은 그 과일들을 먹는 일이다.

- 김화영 <행복의 충격> p,80

 

이제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딘가를 지향하며 직선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나이 드는 일도 또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사실도 두렵고 때로 이제는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과업들 앞에서 망연해지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게 죽음이라는 게 나이든다는 게 그 자체로 가치롭고 의미를 품고 있다는 가르침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는 중이다. 죽을 때까지 가장 찬란하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슬펐던 시간들은 제가끔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 각기 다른 버전으로 다른 가르침으로.

 

공강 시간 결혼식의 신부와 나는 벤치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절실하고 시급한 고민을 껴안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점심 때에 과연 명동까지 가서 틈새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시간과 거리를 가늠해 본다. 가능할 것도 같다. 우리 둘은 일어나서 명동까지 가기로 한다. 젊으니까 젊었으니까 가능한 일들. 그 빨갛고 강렬한 맛을 적절하게 중화시켜 줄 밥알이 탱탱한 김밥은 필수다.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꼭 껴안았다. 구태여 말하여지지 않아도 신부와 나는 눈을 맞추며 순간 눈물을 재빠르게 숨긴다. 이제 행복해할 일만 남기기로. 우리들의 역할은 잘 반죽된 빵 같은 지구에서 과일 같은 하루 하루를 맛있게 음미하며 먹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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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8-3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어요~~ blanca님!
나도 '잘 반죽된 빵 같은 지구에서 과일 같은 하루 하루를 맛있게 음미하며 먹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정신없이 분주한 나날들이라 하루 세끼 챙겨먹기도 어려워요, 더구나 책은 몇날 며칠 손놓기 일쑤고요.ㅠ

blanca 2012-08-30 13:0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요즘은 바쁜 것도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디선가 나를 찾아주고 내가 필요한 일들이 많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세 끼는 꼭 챙겨 드세요. 저는 며칠 점심을 건너뛰곤 했었는데 몸이 지치더라고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프레이야 2012-08-3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잘 익은 나날들,이란 제목이 책제목보다 더 좋아요. 요즘 포도알이 달달해요. 태풍에 과일들이 떨어져 안타까워요. 수확만 기다리고 있던 잘 익은 것들이요. 오늘하루도 맛나게 먹어야겠어요!^^

blanca 2012-08-30 13:07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그렇네요. 행복의 충격보다 이게 낫겠어요! 오늘 또 태풍이 올라온다네요. 창문에 붙인 테이프를 뜯자 마자요. 농민들도 어민들도 피해 안 보고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어제 전복 폐사했다고 막 우는 모습 보니 안타깝더라고요. 저도 요새 거봉이 넘 맛나서 하루 걸러 한 송이씩 해치우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2-08-3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봐도 감각적으로 글 잘 쓰는 블랑카님. 이 책 산다면 거의 전부가 님 글 덕분이지요. 나머지 10퍼센트가 김화영 브랜드 값. 크~

blanca 2012-08-31 18:17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이 댓글 읽고 배시시 웃음이^^;; 나요. 좋아서요.

굿바이 2012-08-30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글을 읽으며 잠시 저도 이십대의 어느 날로 불려갔어요~! 좋은데요, 이렇게 추억할 것들이 있어서 말이죠.
그나저나 언제 읽어도 글이 참 따뜻하고 좋아요.

blanca 2012-08-31 18:19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도 그러셨다니 반갑네요. 저는 그런데 너무 옛날 생각을 많이 해서 할머니가 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할머니가 되면 또 지금을 추억할 텐데. 지금도 어떻게든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어 놓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십 대의 그 풋풋하고 강렬한 싱그러운 추억과는 좀 성질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2-08-3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오고, 블랑카님 글 읽으며 난 또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어요.^^ 잘 살아야겠다....남은 날들은 더 열심히~ 이러고 있어요.^^

blanca 2012-08-31 18:21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잘 지내고 계시죠? 이미 그러고 계신 것 같아요. 현준이 학교 생활 적응기 읽고 참 부러웠어요. 저는 배우는 입장인 걸요. 아이 키우는 일에서도 참 시행착오를 많이 겪고 반성도 많이 하는 중이랍니다.
 

작가 이디스 워턴은 미국 상류층 가문 출신의 여류작가다.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수상했고 위노나 라이더의 한창 때의 아름다운 눈망울을 볼 수 있는 영화 <순수의 시대>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의 성에 갇혀 있던 그녀는 어떻게 보면 당시로서는 쉽지 않았던 이혼을 통하여 일탈을 감행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난민 보호와 자선사업에 투신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은 것은 그녀의 일탈이 단순히 가진 자의 개인적 치기로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순수의 시대>, <기쁨의 집> 같은 작품들은 그녀가 몸담았던 상류층 사교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들이니 만큼 그 작품이 가지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더라도 그녀니까 그녀만이 쓸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물론 이 두 소설은 너무나 아름답고 단연코 지루하지 않지만 제인 오스틴이 자신이 살았던 세계의 바깥을 나가려는 시도도 나갈 필요도 없었던 것처럼 그 어떤 경계의 철책을 뛰어넘지 않는 용의주도함이 느껴져 아쉽기도 하다.

 

 

 

 

 

 

 

 

 

 

 

 

 

 

 

 

 

물론 <순수의 시대>도 <기쁨의 집>도 예쁘기만 한 작품들은 아니다. <기쁨의 집>에서의 여주인공의 슬픈 최후는 우리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물질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얼마나 잔혹한 허구인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실제 이디스 워턴은 이러한 세계를 "사람들과 이상을 천박하게 만드는 경박한 사회"로 명명한다. 누렸으니 불평할 수 있다,는 생래적 한계로 그녀의 시선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뭐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그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어떤 정당성을 부여받은 목소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다층적인 내면을 포박하는 예리한 시선, 레이스 결 같은 묘사들, 마치 살아 움직이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은 등장 인물들의 힘일까?

 

 

 

 

 

 

 

 

 

 

 

 

 

 

 

 

이디스 워턴에게는 이러한 작품들도 있었다. 대조되는 계절로 마치 이란성 쌍둥이 같은 이 소설들의 주제는 다 같이 '좌절된 사랑'이다. 꿈꾸는 사랑 앞에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의 벽을 이렇게도 사실적으로 비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신분의 차, 사회의 편견, 인습, 전통 앞에서 <여름>의 소녀 채리티도 <겨울>속 초로의 사내 이선 프롬도 우리 앞에 마치 삶의 은유처럼 고독하게 서 있다.

 

광기가 자신을 어떠한 행동으로 이끌었는지를 갑자기 깨닫자 그 광기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가운데 남아 있을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 이디스 워턴 <겨울> 중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프란체스카가 사랑 앞에서 버리고 놓고 떠날 수 없었던 것들보다 더 눅진하고 끈기 있는 것들이 가난한 농부 이선 프롬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삶'을 바라보며 그가 돌아선 곳에는 그럼에도 사랑을 떠나 보낼 용기마저 없었다. 그는 자살을 감행하고 실패한 자살은 더 곤궁하고 비참한  앞으로 그를 돌려 놓는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이전에 우리는 이선 프롬의 슬프고 비참한 삶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여름>의 산에서 내려온 소녀 채리티의 경우는 또 어떠한가? 그녀는 약혼녀가 있는 부잣집 도련님과 사랑과 빠진다. 그녀를 산에서 데려온 후견인이자 보호자인 로열 변호사를 끔찍히도 증오하며 그녀가 벌인 사랑의 행각들의 종점은 힘빠지기도 하고 괴이쩍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렇게 체념이 쉬울까. 현실의 삶으로 그렇게도 잘들 돌아오는 걸까. 이디스 워턴은 삶이 죽음 다음으로 슬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녀에게는 별을 보고 그 별을 향해 걸어가는 것은 어렵지만 우리가 발 붙이고 있는 슬픈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예정된 수순처럼 작용한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가 어리고 가난했던 태오를 선택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디스 워턴의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가 포기하고 현실에 양보했던 것들의 은유들로 반짝인다. 그것은 언제나 힘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가장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고 잊었던 것들을 찰나라도 추억할 수 있는 순간들을 선물받는 일이기도 하다. 이디스 워턴은 곱게 늙은 충분히 제대로 늙은 고고한 할머니처럼 우리를 무릎에 앉혀 놓는다.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 너무 아파 차마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들, 하지만 달달한 향내를 품은 그 사연들은 손주들에게 안겨 주는 사탕 같은 것들. 언젠가는 충치 때문에 반드시 끊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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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8-17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때문일까요??? 내용도 밝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뭔가 배신감이 드네요, ㅎㅎㅎㅎ
하지만 소개하신 이디스의 약력(?)을 보자니 그녀의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블랑카님은 여전히 고전(?)탐독 중이신가 봐요???^^
암튼, 제 서재에 달아주신 댓글도 마음을 따듯하게 해줬어요. 고마워요.
분홍 공주님은 잘 지내지요???^^

blanca 2012-08-19 07:58   좋아요 0 | URL
저도요. 이렇게 어두운 결말일 지는 모르고 시작했어요. 이 작가를 좋아해서 자서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아직 번역이 안 되어 있어 아쉬워요. 나비님 같은 실력이면 원서로 도전해 볼 터인데 자서전은 내용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여져요. 분홍 공주는 요새 말대꾸 연습 중이랍니다.ㅋㅋ

라로 2012-08-19 22:48   좋아요 0 | URL
자서전도 있군요!! 저도 실력이 별로라~~~~^^;;
그나저나 저희 해든이 말대꾸를 넘어 이제는 소리를 막 지르면서 호령하는 단계,,ㅠㅠ

댈러웨이 2012-08-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마 다음 달 정도엔 제가 <순수의 시대>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상 탱투나, 댓글은 못 달았지만, 이디스 워튼=blanca님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아래 김연수 작가 코끼리 그림이 보이는군요. 교보 광화문도 눈에 확 들어오구요. 교보는 제게는 정든 곳이에요.

블랑카님께 저는 좀 많이 고맙습니다. 자주 올께요. ^^

blanca 2012-08-20 23:05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순수의 시대>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너무 예쁜 원서들이 많이 나와 있어 저는 이미 번역본으로 읽어버린 게 좀 아쉽더라고요. 아무리 번역이 잘 되어 있어도 작가가 쓴 글을 날것으로 접하는 감동은 못 따라갈 것 같아요. 들러 주셔서 고마워요.

Jeanne_Hebuterne 2012-08-2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만난지 백 년은 된 것 같군. 또 다시 만나려면 또다른 백 년이 지나야 할지도 모르지.
남자가 그렇게 말했어요. 선행하여(앞서간다는 말 대신 선행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살아가는 여자에게 할 수 있는 말.

blanca 2012-08-20 23:07   좋아요 0 | URL
음, 이 댓글은 조금 어려워요. ^^;; 음. 어떤 느낌일까요? 어떤 거리감의 표현일까요? 어긋남의 얘기일까요?

Jeanne_Hebuterne 2012-08-22 19:1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너무 앞뒤 상황 설명도 없이 말했군요! 습기에 글쓰기 능력도 변질되었나 봅니다.

순수의 시대 원작에서 남자가 여자에게(엘렌 카민스키였던가요?) 했던 말이었어요. 마차 안에서 겨우 만나서. 실제로 써먹지는 못할지언정 전 종종 이런 말들을 잘 기억하곤 해요.

마틴 스콜시지의 영화를 보고서는 친구들끼리 메이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다'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다'라고 열심히 각자의 의견을 토로했던(주로 그러니까 뒷담화죠) 기억이 납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중절모가 수많은 중절모 무리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도요. 개인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전 이 영화의 영화음악까지도 기억해요. 후훗

blanca 2012-08-23 13:09   좋아요 0 | URL
아,<순수의 시대> 다시 찾아 볼게요!

아이리시스 2012-08-2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해피엔딩처럼 생겼는데 이디스 워튼이 그런 게 아니군요. 이선 프롬이 농부라니, 장바구니에서 확 빼고 (일단 농부는 나중에..) [여름], [겨울] 저건 꼭 세트로 읽는 게 좋을지 궁금해요, 블랑카님. <달콤한 나의 도시> 저도 많이 좋아했었어요^^

blanca 2012-08-23 13:12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여름>, <겨울> 세트로 안 읽으셔도 돼요. 예전의 에쿠니 가오리라, 츠치 히토나리의 <좌안>, <우안> 같이 시점이 교차하는 작품도 아니고 <겨울>은 사실 제목이 이선 프롬인데 겨울로 번역되어 나온 거더라고요. 그런데 전 개인적으로 <겨울>이 더 좋았어요. 저는 <달콤한 나의 도시> 드라마에 흠뻑 빠져서 정말 열심히 봤어요. 드라마도 책도 너무 좋았어요. 딱 그 시절, 그런 친구들과만 경험할 수 있는...

2012-08-21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7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2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수많은 친구와 풍요롭고 고귀한 우정을 나누었다. 또한 계속해서 여러 편의 소설과 단편소설을 썼으며, 그 대부분이 걸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에는 <순수의 시대>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서문> 신시아 그리핀 울프

 

 

 

 

 

 

 

 

 

 

 

 

 

 

 

 

어제 이 책을 다 읽었다. 어찌나 더운지 몸 속까지 뜨거운 열기가 들어와 하루 종일 멍했다. 어떤 기분 나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계속 나빴다. 더위와 이 책 때문에 기분이 저조했던 것같다. 이 책의 서문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그리고 서문의 곳곳에 나오는 이 소설의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서문의 저자 신시아의 얘기에 쉽게 동조하기는 힘들었다. 이 책의 서문은 그러니 책을 다 읽고 되짚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스포일러는 무언가를 각오하게 한다. 삶에서 고통에 면역이 되지 않는 것처럼 비극적인 결말도 미리 안다고 해서 덜 충격을 받거나 조금 슬프고 마는 것은 아니다. 다 읽고 나면 저절로 힘이 빠지는 이야기다.

 

<순수의 시대>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이디스 워튼의 사진을 보면 흑백 사진 속에서 코르셋으로 잔뜩 죈 것 같은 허리를 가진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다. 어떤 그녀의 작품이라도 그 주인공의 용모로 대입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책 날개에는 이디스 워튼이 1862년 유서 깊은 전통을 지닌 뉴욕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다. 요즘말로는 엄친딸이었던 모양이다. 뉴욕의 사교계를 배경으로 한 이 책 <기쁨의 집>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녀가 몸담고 있었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 '내가 사용하기에 가장 적절한 주제'였다고 고백한다. 작가가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보다 독자들의 적절한 몸풀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닫힌 이야기처럼 빗장을 열기 시작한 이야기는 이윽고 실타래처럼 풀리면서 독자의 시공간을 장악하게 된다. 그것은 한정되고 근시안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정밀하고 농축된 지점으로 누군가를 이끌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지대가 된다. 그래서 정치 사회적인 비판의식, 원대한 가치에 대한 탐사가 없더라도 우리는 제인 오스틴과 이디스 워튼에게 기꺼이 굴복하게 된다.

 

결혼 적령기를 살짝 넘긴 릴리 바트라는 미모의 여자가 있다.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것에 익숙하고 고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쉽게 느껴지도록 자라온 그녀는 정작 조실부모하고 깐깐한 고모의 집에 얹혀 사는 처지이다. 작가의 말처럼 세속적인 이상주의자인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에 근원적인 환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 세계를 벗어나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수많은 유혹과 간계들 앞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주변부로 밀려나가게 된다. 이런 몰락에는 그녀가 정작 추구했던 것들을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았음을 알려주는 방증일런지도 모른다. 그녀의 속물적인 배우자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로렌스 셀던이 일깨워 주었던 것들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지만 그녀를 가장 그녀답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릴리 바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슬몃 자신의 고민들을 끼워 넣었던 것 같다. 자신이 몸담은 세계의 가치 기준과 자신의 내면에서 숙성된 미덕이 상충할 때 불행해지기란 그냥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과도 같다.

 

릴리 바트는 너무 인간적이고 생생해서 도저히 소설 속 주인공으로만 납득할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릴리가 9월의 어느 화창한 날 눈부신 모습으로 로렌스 셀던과 만났던 그 날로부터 걸어나와 초라하고 추레한 방에서 숨을 거두고 뒤늦게 달려온 로렌스 셀던에게 대답을 줄 수 없었을 때 그래서 나는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이건 단지 이야기일 뿐이야, 릴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얼러 주어야 했다.  누구의 마음 속에도 릴리 한 명쯤은 살고 있기에 그래서 릴리의 몰락에 울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들이대는 가치 기준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은 이상이다. 오늘도 밥을 먹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려면 우리는 그 세속적인 기준, 속물적인 욕망에 어느 정도 동참하고 스스로를 물들여야 한다. 그것은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다분히 작위적인 일이기도 하다. 때로 완전히 세상이 등을 돌릴 때가 있다. 어떤 욕했던 세계에서 완벽하게 쫓겨나게 될 때도 있다. 릴리처럼 이 세계를 경멸하기는 쉬웠지만 머물 만한 또다른 세계를 찾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죽을 때까지 아말 그럴 것이다.

 

이디스 워튼에게는 다행히도 머물 만한 또다른 세계가 있었다. "도대체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얘기할 수 있는 그녀는 여저히 행운의 별자리를 타고 난 것 같다. 그럼에도 자신이 몸담았던 안락하고 사치스러웠던 세계를 등지고 비판하고 세세하게 이야기로 그려낼 수 있었던 그녀의 용기는 고귀하다. 누구나 다분히 속물적이지만 속물이 안 되고 싶고 속물을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소중한 것 같다. 좀 덜 속물적이고 좀 더 이상적인 것이 철이 덜 든 것이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이라고 폄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릴리 바트는 끝까지 돈을 추구했고 돈의 위력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그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방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쳤다. 그런 모습을 차마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남자에게 꼭 기억하게 하고 가고 싶었던 마음이 이디스 워튼의 결이 고운 문체로 너무나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지글거리는 주변 공기가 갑자기 시렵게 느껴진다. 편안하고자 하는 마음,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 이기고자 하는 마음, 그래도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 힘든 사람을 보면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 그러한 것들이 다 한데 모인 곳이 인간이다. 그래서 사는 것은 때로 참으로 힘겹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견딜 만하고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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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7-2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에 근원적인 환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 세계를 벗아나 갈 곳을 알지 못한다, 이 문장에 크게 공감해요.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속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면서도 동시에 다른 세계를 꿈꾸고. 생각하면 할수록 인생은 모순덩어리 같아요. 꿈을 꾸는게 참 다행스럽다가도 이게 무슨 소용이냐며 시들시들해질 때가 수천 수만번 지나가니 말이에요. <순수의 시대> 민음사판에 실린 이디스 워튼의 사진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녀의 글은 어떨지 또 궁금해지네요. blanca님 서재에 오면 불현듯 잊고 있던, 그리고 새롭게 읽고 싶어지는 책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아요 :)

blanca 2012-07-29 22:56   좋아요 0 | URL
살면 살수록 제가 성숙하고 있는 건지도 도통 모르겠어요. 아직 시행착오는 계속되고 후회는 많고 그래요^^;; 이디스 워튼의 책들은 기본적으로 일단 재미있어서 저는 이번에 또 이디스 워튼 책들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이랍니다.아, 정말 너무 더워서 재미없는 책은 참고 읽을 수 없을 것 같아요.

2012-07-2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우리는 이디스 워튼처럼 이야기를 쓸 순 없으니, '머물 만한 또 다른 세계'가 '이야기를 읽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우리를 구해줄런지요?!
2. "릴리 바트는 끝까지 돈을 추구했고 돈의 위력 앞에서 벌벌 떨었지만 그 앞에서 온전히 자신을 방기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쳤다. 그런 모습을 차마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던 남자에게 꼭 기억하게 하고 가고 싶었던 마음이 이디스 워튼의 결이 고운 문체로 너무나 처절하게 그려져 있다." 이 말만 읽어도 마음 아픈 책입니다.

-- 이디스 워튼이란 작가를 마음 속에 담게 되는 페이퍼네요. 항상 블랑카님이 소개하는 책은 다 읽고 싶어요.^^

blanca 2012-07-29 23:01   좋아요 0 | URL
섬님, 이 책은 가벼운 여자에 대하여 쓴 책인 척 하지만 사실은 너무 가슴 아프고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릴리 바트가 죽기 전에 사랑했던 남자에게 가서 자기가 끝까지 어떤 중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모습을 얘기하는 장면이 너무 가슴 아프더라고요. 저는 이야기가 우리를 구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머물 만한 또 따른 세계를 꿈꾸게 하고 그려볼 수 있게 한다는 것으로 작은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요. 섬님이 소개해 주신 책들 중 저는 아직도 조셉 캠벨의 책들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LAYLA 2012-07-2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저도 무척 기진맥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굳이 해피엔딩까진 아니더라도 순수의 시대 정도로 마무리를 해줄줄 알았거든요. 힘들게 산 제인 오스틴이 드리미한 사랑을 그리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산 이디스 워튼이 이리 잔인하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리다니 인생은 정말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blanca 2012-07-29 23:03   좋아요 0 | URL
라일라님, 그렇죠! 저도 이 책 결말이 정말 너무... 소설 읽고 이렇게 다운되기도 한다는 게 참 놀라웠어요. 원래 달달한 책이 읽고 싶어 시작한 건데 다 읽고 나니 가슴이 저릿해지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의 자서전이 그래서 읽고 싶어졌는데 번역이 안 되어 있더라고요. 아쉬워요.
 

먼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고 찰스 램의 <굴뚝 청소부 예찬>을 읽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둘은 닮아 있었다. 마루야마 겐지야 같은 직장에서 폐를 많이 끼쳤던 여직원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고 소설을 쓰는 일에 전력을 투구하였고 찰스 램은 동인도회사의 회계원으로 33년간 근속하며 틈틈이 에세이를 쓰며 정신병이 있는 누이를 부양한 독신남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삶에 대한 자세 등이 개별적인 경험에 의하여 굴절되긴 했지만 이 동서양의 조금은 괴팍한 남자들은 만나면 대뜸 너무 공통점이 많아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울 것 같다. 흥미로웠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달에 울다>를 접해 봤다. 문장 하나 하나가 어찌나 농밀하고 치열한지 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사 계절을 담은 병풍의 그림과 '나'의 삶의 격랑이 서로 주고 받는 것들이 하나의 그림, 소리를 이루어 흘러 넘쳤다. 소설이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 작품을 토해 낸 작가의 결의와 삶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인 소망, 관계에 대한 욕망을 희생한 것이었다. 모름지기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도모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각오는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문단에 대한 거침없는 비난과 비아냥거림, 여성에 대한 비하 발언 등이 거슬렸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것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이 책의 미덕은 다름 아닌 이 소설가의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투철한 소명 의식때문일 것이다. 그가 쓰는 한 우리는 아무렇게나 이러나 저러나 한 글을 주워섬기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슬픈 고백.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산기슭에 살면서 개나 기르고, 소설 따위나 쓰고,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있다니, 이렇게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화가 치민다.

-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중

 

그는 글을 쓰기 위하여 세상과 스스로를 절연시킨다. 일본의 북알프스 산맥 한 자락의 조그만 마을에서 개를 기르며 아내와 산다. 문학상 수상도 문학상 심사위원직도 거부한다. 세상에 대하여 쓴다는 것이 세상과 이별하여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삶의 자잘한 고충들 대신 굵직 굵직한 서사와 깊은 사색, 치밀한 묘사, 함축적인 문장 등으로 잊혀진다. 저런 이야기가 있으면 이러한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나이들어 객사할 각오까지 하고 그 어떤 다른 생계를 도모하는 일도 저어한 채 오로지 쓰는 일. 미루야마 겐지 스스로의 삶은 슬프다. 그럼에도 그는 또 온에너지를 쏟아 쓰고 산을 오르내리고 또 다음 작품을 쓸 수 있는 기간 동안 먹고 마시며 버틸 돈을 계산한다. 그의 삶이 작가의 전범이라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 다만 쓰고 세상에 말하는 일들에 대하여 너무나 쉽고 편해져 버린 세태는 그가 쓰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비단 쓰는 일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일에도 우리는 어떤 치열함을 잊어버리고 덤비게 되는 것 같다.

 

찰스 램의 에세이 <퇴직자>는 1825년의 풍경을 2012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만든다. 그 누구도 이 에세이를 읽고 웃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울 수도 있다. 찰스 램이 거의 40년간 근속했다 퇴직하는 날, 그의 소회는 바스티유 감옥의 수인이 갑자기 석방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스스로 스스로를 떠맡을 힘이 없다. 오십이 되어도 밤새도록 잠 속에서 근무하며 회계 업무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꿈에 아연 놀라 깨어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직장의 노역은 영혼까지 스며들고 말았다고 고백한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에, 갑자기 광대하게 주어진 시간에 그는 아찔하다. 그렇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거짓말하지는 않는다. 금요일 저녁의 해방감은 이제 만성화되어 강도가 약해지겠지만 노역에 대한 부담 및 시간에 대한 제약에서 풀려나온 해방감은 잔잔하게 언제까지나 그를 감쌀 것이다. 오죽하면 그에게 아들이 있다면 이름을 '나씽투두'로 짓고 아무 일도 시키지 않을 것이라고까지 얘기할까. ㅋㅋ 글을 쓰기 위하여 역설적으로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찰스 램의 글에는 수많은 자잘한 세상사와 일상사들이 때로는 따뜻한 시선 아래, 비틀린 시선 아래 나열되고 묘사되고 해석된다. 이 지점은 마루야마 겐지와 조금 다른 부분이다. 독신자들을 대하는 기혼녀들의 배려 없는 행동에 분노하는 글은 문단의 허위에 치를 떠는 마루야마 겐지의 끓어오르는 화와 만난다. 마루야마 겐지처럼 글을 쓰는 일에 자신의 삶 전체를 저당잡히지도 않고 사람들과의 교제에서도 멀어지지 않고 하루 하루를 소중하게 감싸안고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조금 더 친밀하다. 그래서 이런 대목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녹색의 대지와, 도시와 시골의 풍경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농촌의 호젓함과, 길거리에서 느끼는 달콤한 안온함 따위를 사랑한다. 나는 바로 이 지상에 거처를 짓고 싶다. 나는 내가 도달한 이 나이에 가만히 멈춰 있고 싶다. 나와 내 친구들이 더 젊어지거나 더 부유해지거나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찰스 램 <섣달 그믐날 저녁> 중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어쨌든 1821년을 살아서 맞이한다며 안심했던 그는 2012년 이제 없다. 2012년 나는 내가 도달한 이 나이에 가만히 멈춰 있고 싶지만 이 나이 후에도 이백 년은 가차 없이 흘러 어딘가에 닿아 있을 것이고 그 때 나는 이 지상에 없을 것이다. 내가 살았다는 것, 읽었다는 것, 끼적인 것들의 흔적도 가차 없이 스러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사는 일은, 지금 내가 숨쉬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고통스러운 일들이 지나가고 막간의 휴식 같은 것들이 삶을 연결하는 한 나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몇 갑절은 좋다. 찰스 램을 읽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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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8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페이퍼야말로 '잘 읽었습니다'라는 인사가 가장 잘 어울리는 페이퍼가 아닌가 싶어요.

잘 안넘어간다고 말씀하시던 굴뚝 청소부를 다 읽으셨군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셨으니, 이제 새로 읽으시려고 계획한 책은(혹은 이미 시작하신 책은) 어떤건가요, 블랑카님?

blanca 2012-07-19 10:57   좋아요 0 | URL
이디스 워튼의 <기쁨의 집> 대기 중이에요. 달콤한 책을 읽고 싶어서요. 달콤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도 대기 중인데 아무래도 잘 읽히지 않을 것 같아요. 인내를 요하는 독서가 점점 힘들어져요. 좋은 작품들 중에 그러한 책들이 많네요.

twoshot 2012-07-1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덕분에 찰스 램의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blanca 2012-07-19 10:58   좋아요 0 | URL
twoshot님 안녕하세요! 찰스 램 책은 저도 처음이에요. 곁에 두고 조금씩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7-1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겐지 좋아하는 한국인이 참 많죠.장정일도 좋아하던데...예전에 오스트리아 소설가 호프만스탈 작품선을 읽고 우연히 마루야마 겐지의 수필 하나를 읽었는데 호프만스탈을 자기도 좋아한다고 썼더군요.그 수필이 소설가의 각오에 있었는지 가물가물합니다만...
찰스 램은 고교 국어참고서 수필 항목에 꼭 나오죠.엘리아 수필선도 기억이 나네요.셰익스피어 희곡을 동화처럼 쉽게 풀어쓰기도 했죠.

blanca 2012-07-19 10:5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찰스 램 저도 고등학교 선생님이 "성을 봐라, 얼마나 온순하겠냐" 했던 기억이 ㅋㅋ 나네요. 실제로 읽어 보니 그렇게 순한 사람 같지는 않은데요^^;; 마루야마 겐지는 제가 읽었던 소설에서 연상한 분위기보다 조금 더 치열하고 쉽지 않은 사람 같아서 오히려 <소설가의 각오> 읽고는 조금 멈칫하게 되더라고요.

cyrus 2012-07-18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스 램이라면 그의 대표적인 수필인 '굴뚝 청소부 예찬'이랑 어렸을 때 읽은 동화전집 중의 한 권에 끼여 있는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생각나요. 찰스 램의 다른 수필돌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인용한 램의 수필 속 문장 보자마자 갑자기 읽어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여요. 블랑카님 덕분에 읽어야 할 새로운 책 알게 되었습니다. ^^

blanca 2012-07-19 11:00   좋아요 0 | URL
아,노자님 말씀하신 위에 셰익스피어 책을 cyrus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퇴직자> 같은 수필은 정말 너무 좋아서 왜 찰스 램이 그렇게 추앙 받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추천합니다.^^

2012-07-2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이런 괴퍅한 사람 좋아해요. 배우자로선?이라고 묻는다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요. (마루야마 겐지는 좀 버겁고, 찰스 램 정도면 뭐?!ㅎㅎ)
그나저나 찰스 램의 저 따뜻한 마음이 참 좋네요. 아마 그는 혼자였어도, 친구들과, 세상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아. "나는 내가 도달한 이 나이에 가만히 멈춰 서 있고 싶다."라니요. 이런 평화로운 마음이 좋아요~~.
이 삶과 나란히 저 삶을 놓아보게 되네요. 마루야마 겐지는? 그는 아마 알프스의 깍아지른 험준한 봉우리를 보며 자기 삶을 더욱 단단히 벼렸을 것 같고. 그의 아내는 좀 외롭지 않았을까?? 아님 그의 개와 돈독하게 친구하며, 이웃과 잘 지내며, 남편은 붙박이 장처럼 여기며, 혹은 헌신하며, 나름대로의 삶을 즐겼을라나?
여튼 좋은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여러 가지 생각해 보고 가요......(댓글로는 안 썼지만)^^

blanca 2012-07-20 14:02   좋아요 0 | URL
섬님, 찰스 램의 수필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퇴직과 섣달 그믐에 관한 글은 정말이지 너무 좋아서 뭉클해지더라고요. 굉장히 솔직하고 따뜻한 사람 같아요. 특히 독신자로서 기혼자들에 대하여 성토하는 글은 귀엽기까지 하더라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년 가까이 잘 쓰던 오렌지빛 주물 프라이팬에 돼지 목살을 구웠더니 흡사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치솟았다. 군데 군데 코팅이 벗겨져 있고 식재료들이 눌어붙기 시작했다. 때가 된 것이다. 고작 2년이라니. 테플론 코팅과 주물의 차이를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지만 거의 같은 내구 기한을 자랑하는 것같다.

 

건강을 위해서나 환경을 위해서나 스텐 프라이팬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비교적 저렴한 것으로 하나 구비해 두었다. 그런데 역시 쉽지 않다. 지긋이 예열해 주어야 하고 어떤 식재료에 따라서는 그냥 아예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바닥에 엉겨붙는다. 내공이 쌓이면 두부부침(스텐 프라이팬으로 하기에 가장 고난도이라고)도 찰박이게 할 수 있다는데 계란 후라이가 한번 붙는 광경을 목도하고나서는 수분이 많은 야채볶음류 등으로 한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후라이팬은 또 쌓인다.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 스텐팬, 그리고 목하 맛가고 있는 중인 주물 프라이팬. 테플론 코팅팬을 처음 사서 요리를 할 때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부드럽고 탱탱하게 그 팬 위에서 미끄러져 의기충천하게 된다. 다 요리한 것을 뒤집개로 스르륵 밀기만 해도 바로 그릇으로 유연하게 낙하한다. 그런데 이 테플론이란 놈은 세월 앞에서 약하다. 점차 무언가를 떠나 보내지 않으려는 듯 발버둥치기 시작하며 새것을 외친다. 그렇다면 이 코팅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프라이팬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안도. 또한 여자들 대부분이 테플론으로 코팅된 프라이팬에 애증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에쿠니 가오리 <부드러운 양상추> 중

 

 

에쿠니 가오리가 생선 초밥집에서 옆에 앉은 두 여자의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면서 크게 공감했던 경험이다. 부엌에서 요리를 시작하게 되면 결국 이 테플론 코팅 프라이팬과 애증의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도 없는 게 어떤 분의 어머니는 이 얄팍하고도 수명이 짧은 팬을 10년간이나 생채기 없이 잘 사용하고 계신단다. 잦은 세척이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얘기에 좀 더럽게도 사용해 보고 예열도 열심히 해 보고 해도 나의 경우에는 2년 이상은 관계를 지속할 수가 없다. 고기를 굽다 화재감지기 경보가 울릴 지도 모를 사태까지 가고나서는 다시 또 행사장의 주방용품대를 서성이게 된다. 나에게는 스텐팬이 있는데 테플론 코팅 따위는 멀리 날려 버리려고 이 책을 읽고 결심했었는데 결국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이 책에 따르면 테플론 코팅팬은 약 200도~300도 사이에서 코팅제가 분해되기 시작하고 팬이 360도 이상으로 가열되면 매우 독성이 강한 기체가 방출된다고 한다. (p.133) 심지어 이러한 조리 환경에 애완용 새가 노출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의 미숙한 요리 솜씨, 조급함 등이 정성과 시간을 요구하는 전통 무쇠팬(듣기만 해도 무거울 것 같다)이나 스텐팬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약간의 불편과 시간을 감수한다면 건강에도 해롭지 않고 제조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는 조리기구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사실 이 대목을 읽고 스텐팬을 구입했었다. 예열이 관건이라는 말에 일단 중불로 바닥을 데웠다가 껐다 다시 켜서 기름을 또 가열하여 방사상으로 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식재료를 조리해야 들러붙지 않았다. 모든 요리를 다 이것으로 해 보려고 안간힘을 써보기도 했지만 테플론 코팅팬은 아닌 주물팬을 발견하고서야 적절하게 타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주물이란 놈도 묘한 것이 과연 코팅이 안 되어 있는데 이렇게 식재료들이 부드럽게 굴러다닐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여하튼 지난 주말 나는 다시 핑크빛 주물 프라이팬을 질렀다. 이로써 도합 또 3개의 후라이팬이 차곡 차곡 쌓이게 됐다. 돼지 목살을 불타게 했던 오렌지빛 주물팬은 처분하게 되었고 언제 산 지도 모르겠는 코팅이 반나마 벗겨진 조그만 프라이팬과 바닥이 거뭇거뭇해 예전의 그 찬란했던 광은 흔적도 없어져 버린 스텐 프라이팬 위에 온 몸으로 신참임을 자랑하며 위무도 당당하게 입성한 나의 핑크 주물 프라이팬은 이렇게 오게 되었던 것이다. 불 위에서 하는 요리들은 다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결핍은 이렇게 새로운 사물로 채워진 것처럼 보이게 된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시간과 노련한 요리 솜씨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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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2-07-17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모친은 그리하여 잘 들어서 효율이 높다는 칼, 무겁지만 수분 없는 요리를 가능케 하는 프라이팬과 도구들, 빈틈없는 압력을 가하는 솥으로 주방을 가득 메우셨어요. 환경 호르몬 없음과 효율성, 영양소 파괴 없음의 삼위일체에 이어 장만하신 밀폐용기의 최강자 터퍼웨어는 공기를 완전 차단하여 심지어 식재료가 더욱 싱싱해진다는 진공상태 달나라의 기적까지 보여주시더이다. 하긴 냉장고가 세 개(이건 저도 좀 뜨악), 가스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텃밭을 두고 농산물 시장을 이용하며서 최첨단 조리기구를 구비하고 계절마다 제철 식재료를 바지런히 구비하는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한겨울 바람을 이겨내고 처음 고개를 내미는 풀을 어디선가 구해와서 최첨단 무공해(과연?) 조리기구로 요리하시는 모친님을 보면 저는 늘 쓰레기로 온몸을 그득그득 채우는 듯한 죄책감마저 들어요. 먹는 것은 인내심과 애정, 노련함과 본능의 이중주에요. 데코레이션으로 깨를 뿌려두고는 '당신을 위해 나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여인처럼.


덧-마지막 말은 부친의 생일상을 차리던 모친이 하시던 말. 먹는 것과 요리하는 것의 묘한 역설로 들렸어요.물론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는 표정을 곁들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blanca 2012-07-18 09:45   좋아요 0 | URL
쥬드님 어머님의 묘사가 참 실감나네요. 앉은 자리에서 가만히 떠올려 보니 미소가 지어져요. 냉장고가 세 개나^^;; 그런데 먹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몸을 대우하고 상대를 대접하는 일이기도 해서 단순한 의미로 그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쥬드님 어머니가 아버님에게 생신상을 차려드리는 일, 그 시간, 땀에는 아버님에 대한 사랑도 담겨 있겠지요. 저는 그래서 맛있는 것을 사 주는 사람과 만들어 주는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무장해제되어버리나 봐요. 아, 그런데 막상 제가 부엌의 주인이 되어 버리니 부엌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자아존중감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임을 깨달아 버렸답니다.

Arch 2012-07-1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읽는 <이기적 식탁>에서 '남자는 무쇠팬과 다를 게 없다'는 구절이 나와요. 스텐이나 무쇠팬은 정말 요리 고수나 쓸 수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쇠팬 길들이기도 만만치 않고. 요리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프라이팬에 대한 애증은 덜하지만 참 다루기 힘든 조리기구인 것 같아요.

blanca 2012-07-18 09:47   좋아요 0 | URL
아, ㅋㅋ 정말 좋은 표현이네요. 무쇠팬 길들이기^^ 무언가를 길들이기까지가 너무 힘든 것 같아 겁먹어 미리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스텐팬도 길들인답시고 시행착오 다 겪어 놓고 도망가게 되어 버려요. <이기적 식탁> 책 찾아 볼게요, 고마워요, Arch님^^

감은빛 2012-07-1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에도 스텐 프라이팬 있는데, 맨날 눌러 붙어서 거의 안쓰고 있어요.
아내는 채식을 해서 프라이 팬을 하나 따로 쓰고 있구요.
저와 아이들을 위해 '계란', '생선', '고기' 등을 굽는 프라이팬이 두개쯤 있어요.

코팅 팬이 나쁘다는 건 잘 아는데, 스텐 프라이팬을 쓰는 건 기술 부족으로 참 어렵네요!

blanca 2012-07-19 11:0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저도 스텐팬은 너무 힘들어요. 생각한 거란 실전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코팅팬에서 조금만 더 양보해서 주물팬으로 타협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