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죽음의 동행-인생을 훔친 여자의 비밀'을 보고 너무나 섬뜩해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소위 '시신 없는 살인 사건'으로 노숙자 쉼터에서 지내다 어린이집 교사로 취직하게 된 젊은 여인의 신분을 가로채고 정작 본인은 죽은 것처럼 위장하여 사망 보험금을 타 낸 중년의 여자에 대한 얘기였다.
'인생을 훔치다' 타인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타인 그 자체를 훔치는 일이 가능할까.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대체 그 동기는 무엇일까. '자기'를 부정하고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의 삶의 주체가 되려는 그 극악무도한 시도가 의미하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 심판받고 단죄될 수 있을까.
이것이 소설 <화차>에 맞닥뜨리게 된 사연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로서도 장르 소설로서도 처음이었다. 영화를 볼까도 생각했지만 변영주 감독이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게까지 한 그 원작을 날것으로 접해보고 싶었다.
금융기관에서 대출 관련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자 납입을 지연하다 원금까지 연체되어 신용불량자가 되고 가족이 해체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 사람들 전부가 낭비를 해서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서도 분수를 몰라서도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거래처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서 아이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서 믿었던 부하직원이 배신을 해서 가족 중의 누군가가 큰 사고를 쳐서 아니면 본인이 큰 사고를 당해서 그런 식으로 치닫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된 결론만을 놓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피하려 들었다. 가진 재물의 양으로 그 사람의 힘을 키워주는 사회에서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돈때문에 몸과 마음이 졸아가는 그들은 어느새 이마에 주홍글씨가 찍혀 소외되고 있었다.
다리를 다쳐 휴직 중인 혼마 형사에게 죽은 아내 친정 쪽 조카가 찾아온다. 번듯한 집안의 은행원인 그는 신용카드 발급이 거절당하자 증발해버린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한다. 혼마가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두 여인은 이름을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니라 어느새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남발한 신용으로 기만당한 피해자들로 만난다. 이름을 빼앗긴 쇼코는 홀어머니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 애썼지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실족사와 신용불량자 딱지였다. 그녀가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보다 많은 소비를 한 것이 완벽하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개인파산 수속을 의뢰했던 변호사의 말은 우리가 삶에서 어쩔 수 없이 내몰리게 되는 잔인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구한다.
"제가 한 얘기를 부디 잊지 말아주십시오.
세키네 쇼코 씨는 유달리 낭비벽이 심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어요. 그녀 신상에 일어난 일은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나나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주위 상황을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중략>."
-p.171
취업을 하고 가장 먼저 받은 선물은 신용카드 발급이었다. 아니, 내가 신용카드 발급을 신청하기 이전에 당시 미친듯이 신용을 남발하던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다중채무자가 될 기회는 저절로 주어졌다. 심지어 카드도 발급해 주고 돈까지 주는 경우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로 용돈 정도를 벌던 새내기 직장인들에게 사회가 가장 먼저 선물한 것은 가진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그 환상은 제몸까지 갉아내며 곧 꺼져내릴 수밖에 없는 거품이건만 그것에 대해 그 누구도 언질을 주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가지고 싶다"와 "가질 수 있다"로 지지되는 곳이다. 그 누가 제동을 거는 순간 실상은 가지지 않은 것과 가질 수 없는 것만 남긴 채 붕괴되고 말 것이다. 행복이 소유로 환치되고 권장되는 곳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려 드는 것마저 하나의 영리 사업으로 활용되는 곳에서 정말 인간이 발가벗고도 온전히 행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교코는 그런 자신의 일란성 쌍둥이 같은 불쌍한 여자의 이름과 삶을 훔치려 들었을까. 그녀는 빚쟁이들에게 쫓겼지만 정작 자신이 그 돈을 써본 적도 없는 생래적 채무자였다. 부모의 주택 대출. 가족의 야반도주. 해체. 끈질기게 그녀가 신혼을 꾸린 곳까지 찾아와 겁박하고 괴롭히는 사채업자들은 그녀가 생존을 위해 선악의 경계마저 허물고 눈을 감게 만드는 막다른 곳으로 그녀를 끌고간다.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하면 상속포기를 할 수 있다는 얘기에서 관보에서 미친듯이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려 드는 그녀의 모습. "죽어줘. 제발 죽어줘. 아빠" 이리저리 떠돌던 아버지가 딸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곳의 지명이 예전에 근처 사형장에서 죄인이 이 세상과 이별을 고하고 가족이나 친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눈물을 흘렸다는 데에서 유래한 '눈물다리'라는 것에서 한없이 슬퍼했던 딸은 그렇게 차라리 아버지가 죽어버려 자신이 빚독촉에서 벗어나기를 소원한다.
당신들 두 사람은 같은 부류였다. 세키네 쇼코와 신조 교코. 당신들 둘은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인간이었다. 같은 족쇄에 묶여 있었다. 같은 것에 쫓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당신을은 서로를 잡아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p.368
개인인적사항까지 소비재로 둔갑하여 매매되는 신용사회에서 남의 삶을 가로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소름끼치는 현실이다. 교코가 통신판매회사에 취직하여 마침내 자신이 변신하여 살고자 하는 삶을 발견하여 그녀로 둔갑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허술한 구조가 노출된 탓도 있다. 그리고 하필 그녀가 훔치기로 한 삶은 똑같은 고통으로 개인파산제도를 밟아 자신의 과거를 허물벗듯 벗어버리려 했던 동족이었다.
미야베 미유키는 형사 혼마의 눈을 통해 두 여인의 비극적 삶을 관조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더없이 뭉클하다. 그 담담한 그리운 시선이 무언가를 무장해제시킨다.
벤치에 앉아 혼마가 생각한 것은 신조 교코도 누군가와 함께 이곳을 찾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바라보았을까. 먼지 낀 밤거리를 한가로이 거닐며 네온사인을 올려다보고, 정체된 자동차 행렬을 가로질러 도로를 건너고, 쇼윈도 안을 기웃거리고......
-p.317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네들도 보통 사람들이었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런 소망과 과거의 꿈들을 읽어내는 눈.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상황을 복기하는 섬세함. 이 이야기는 그런 것들 속에서 나와 당신, 우리들을 발견하게 한다. 서글프고 비참하지만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상황이 빚어낸 참극을 덮으며 그리고 아직도 누군가의 삶으로 도망쳐 견뎌나갈 수 있다고 믿는 교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갑자기 아연해져 버렸다. 이러한 삶. 이것은 누군가의 삶을 잔인하게 가로챈 악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