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예약녹음을 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아이가 서랍에서 굴러다니던 MP3를 꺼내었다. 아이리버, 나의 것이었던 것 같은데 연애 시절 남편에게 빌려줬다 결혼해서 돌아온 그 MP3. 아니 남편이 선물로 주었던 것을 자기가 다시 빌려달라라고 했던 것도 같고. 여하튼 죽어 있는 고물 같은 투박한 그것에 재미삼아 건전지를 넣으니 예상외로 전원이 들어왔다.

 

아이폰에게 이어폰을 빌려 음악을 들으니 세상에나, 예전 음악들이 고스란히 들려온다. 낯선 노래도 있다. 김동욱의 "떠나가 버렸네" 지금의 JK김동욱의 허스키한 음성이 아니라 그냥 깔끔하고 잔잔한 다른 남성 가수의 목소리이니 동명이인인가 싶기도 하고. 내처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작동법을 더듬어 가며 예전 흔적들을 더듬는다. 머라이어 캐리의 "Hero"도 있다. 재수 시절 책상이 앞 뒤로 빽빽이 줄 지어 있어 그저 내 자리에서 몸통 한번 돌려 뒤에 앉았던 친구들과 얘기하는 게 인간관계의 전부였던 그 시간 아침에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고 우연히 보게 된 그녀의 뮤직 비디오의 가사는 정말 "다시 한번!"을 외치게 만들어 주었다.

 

잠깐 추억에 젖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아무리 이리 누르고 저리 눌러봐도 라디오 예약녹음 기능을 찾을 수가 없다. 분명 무언가를 열심히 예약 녹음해서 공부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인터넷에 찾아 보니 지식인은 2004년으로 돌아가 있다. 아, 이 제품이 그 때 나왔었구나. 컴퓨터에서도 과거의 질문과 답들은 마치 현재의 것처럼 살아 움직인 채 고스란히 안겨 있었다. 일단 타이머로 들어가 현재 시간 설정을 해야 한단다. 들어가 보자. 역시나 2004년으로 되어 있다.

 

2004년.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어떻게 지냈을까. 아무리 더듬어 봐도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이상하다. 열여섯 살 윤진이와 시장통을 헤매며 가사 시간에 만들 치맛감을 끊었던 일은 엊그제 같이 생생하고 그 때 진이와 나누었던 그 따뜻한 공기들은 지금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도 훨씬 지금과 가까운 2004년은 일부러 나이를 계산해 보고 되짚어 보지 않으면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아이를 재우며 복기해 보니 알 것도 같은 시간. 인사 이동을 해서 한창 또 손에 익지 않은 일로 괴로워하고 책을 읽을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없었던 나날들. 그 시간들은 기억의 바닥에 가라앉으려 아우성이었나 보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추억으로 갈무리 해두고 싶지도 않아서 그렇게 망각 속에 묻혀 버렸나. 뜬금없이 회사 앞 골뱅이 집에서 두툼한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주어서 열심히 비벼 먹었던 기억 정도가 났다. 한심하고도 서글픈 노릇이다.

 

그는 남자 노인 30명에게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반드시 그 안에 포함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야기 다섯 가지를 해보라고 말했다. <중략> 노인들이 들려준 기억들 중에는 열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기억이 쉰 살에서 여든 살 사이의 기억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다우베 드라이스마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서

 

 

 

 

스무 살 때보다 서른 살이 되고나서 또 그 중반이 되고 나서 기억은 자꾸 후진한다. 이게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게 더 놀랍다. 그리고 더 심해질 것이라는 것도.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회상 현상에 관련된 세 가지 이론을 제시한다. 하나는 이십대 때의 기억력. 두 번째는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사이에 사람들이 대개 기억할 만한 일을 많이 경험한다는 사실,  세 번째 이론은 어린 시절과 성인기 초기에 사람들이 성격 형성과 정체감 확립에 영향을 미치고 인생행로의 지침이 되어주는 일을 겪는다는 것.  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추억할 일들은 점점 더 줄어든다는 얘기. 그러고 보면 나이드신 분들은 주로 최근의 일보다 아주 예전의 일들을 얘기하시기를 즐긴다. 자기 전에 내가 떠올리는 일들도 현실의 자질구레한 고민들을 제외하면 이십 년 정도 후진하여 좋았던 시간들이다. 앞으로 가면서 자꾸 더 먼 곳을 뒤돌아 보게 된다는 건 인생이 가지는 기본적인 아이러니일까.

 

가까스로 MP3 시간을 2012년 3월 3일로 리셋했다. 이게 제대로 작동해 줄 지는 의문이다. 2004년에 죽어 버린 녀석을 흔들어 깨워서 다시 8년만에 일어나 제 노릇을 다시 하라고 닥달하니 이 녀석이 앙탈을 부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일단 시험 삼아 내일 것을 예약녹음해 보고. 안 되면 또 그 때 가서 다시 대책을 강구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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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0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블랑카님께 페이퍼를 자주 좀 쓰시라고 닥달합니다.

blanca 2012-03-04 22:31   좋아요 0 | URL
^^ 맨날 쓰다가 임시저장 해놓고 안 올려서 그런가 봐요. 자꾸 써 버릇하면 또 쓰게 되고 안 써 버릇하면 또 그렇고. 습관의 힘이 무서운 것 같아요. 고마워요, 이 닥달^^

이진 2012-03-0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저도 다박방님과 함께 닥달을 해야겠군요...

blanca 2012-03-04 22:31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ㅋㅋ 저는 이 사진이 소이진님이 교복 입고 찍은 사진인 줄 알고 깜놀했었어요. 이렇게나 근사하다니, 하면서요 ㅋㅋ

이진 2012-03-05 19:26   좋아요 0 | URL
에이 ㅠㅠ 블랑카님 이러지 말아요... 제가 너무 초라해지잖아욧! 흑흑
내심 제가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서는 생각해봅니다...

stella.K 2012-03-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점점 나이를 먹는지 자꾸 옛날 일만 기억나고 죽겠습니다.
근데 웃기는 건, 그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왜 그리
그리운 건지. 그나마 다행이죠. 추억이라도 좋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안 좋게 기억하고 있으면 지금의 저는 되게 안 좋은 모양새를 하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또 그래서일까요, 나이 먹는 게 점점 두려워집니다. 나이 먹어 잘 살 자신이 없어요. 흐흑~
아무튼 추억은 아름다워! 입니다.하하

blanca 2012-03-04 22: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도 그래요. 그 땐 죽을 것 같았는데 그 젊음은 참 그리워요. 저도 옛날 생각 자꾸 나서 죽겠어요. 할머니 되면 종일 호시절 타령만 하다 젊은이들 다 도망가면 어떡하죠? ㅋㅋ

마녀고양이 2012-03-0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방금 어떤 물건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나서 다시 가지러 가보니 없고, 제자리 와보니 있고
머 이런 반복이랍니다. ㅠㅠ. 기억력이 없어진단게 이런거구나 싶어져요.

나이들면 세월이 정말 빨라진다죠...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지,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져요. 그거...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나랑 블랑카님이랑 느끼는 시간이 다른걸~ ^^

blanca 2012-03-05 16:13   좋아요 0 | URL
저는 이미 이 증상이 시작되었답니다. 고유명사에는 완전 약해졌고요^^;; 아웅, 너무 빨라요. 옛날엔 계속 세월아, 가라!고 했는데 이제는 제발 좀 천천히 갔으면 좋겠어요.

cyrus 2012-03-05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년 전 MP3를 봤을 때 기분이 무척 새로웠을거 같아요. 타임캡슐 안에 귀중한 물건을 보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고 있다가 드디어 발견하게 된 기분이랑 비슷하다고 봐야 하나요? ^^;;


blanca 2012-03-05 16:13   좋아요 0 | URL
너무 신기했어요! 게다가 완벽하게 다 작동이 되더라고요. 라디오 예약녹음도 되고. 현재 시간이 2004년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도 참 신기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