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조지 오웰 지음, 한기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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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는 기묘한 책이다. 읽어보지 않고도 책 속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감시자 '빅 브라더'는 대부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조지 오웰의 예언적 디스토피아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거의 1세기 전에 출판된 이 책은 개인 정보, 온라인 검색 알고리즘 추적이 일상화된 2026년에 읽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현재적이다. 


종이 위에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을 결정적인 행위였다.

-pp.15

첫장면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모든 행동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을 등지고 일기를 쓰고 있다. 오세아니아라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그는 핵심당원 오브라이언이 자신과 당에 반하는 무언의 가치관을 은밀히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오세아니아는 상시 전쟁 중이고 그 상대는 유라시아나 동아시아와 어디여도 상관없다. 여기에서 전쟁은 잉여 물자를 처리하고 사회적 긴장감을 만들어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으로 기능한다. 당은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하며,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실제 끊임없이 과거의 역사를 편의에 맞게 갱신하고 있고, 그 일에 윈스턴은 연루돼 있다.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의 이중사고는 사상으로 저지르는 반역조차 엄벌에 처하는 이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 시민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상의 사고방식이다. 그들은 "2 더하기 2가 4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다. 


유부남이었던 윈스턴은 사상경찰이라 의심했던 젊은 여성 줄리아와 금지된 사랑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그들의 밀회의 장소가 됐던 곳에서 체포된 이후 그는 자신의 사상적 동료라 믿고 의지했던 오브라이언에게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며 결국 지배적 당론에 자신의 의지와 반해 항복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인간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얼마나 비겁해질 수 있는지를 읽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결국 이 끝에서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이나 이상적 가치를 내던지고 연인까지 배신하게 되는 윈스턴의 전락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하게 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예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실에 맞닿아 있다.


'최후의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던 윈스턴이 우리가 숱하게 접해왔던 현실을 뛰어넘거나 영웅이 되는 주인공 서사에 대한 기대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리는 장면은 서글픈 현실의 축도이기도 하다. 여기에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한 반전은 없다. 이 건조하고 잔인할 만치 인간의 위선과 위악, 유약함을 증언하는 거친 이야기 사이 윈스턴이 이따금 회고하는 어린 시절 가난한 어머니와 여동생과의 슬픈 삽화는 윈스턴이 결국 그 최후의 인간이 되지 못한 하나의 애조 띤 복선으로 자리한다. 조지 오웰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갈피짬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사랑을 바랐지만,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없을 만큼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가진다는 게 그 사람의 성장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게 되면, 삶은 결국 정치 행위와 동떨어져 얘기될 수 없다.


더는 책을 읽거나 스스로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되지 않는 시대에서 단어를 폐기함으로써 사고를 제한하는 이 디스토피아가 가지는 무시무시한 위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장 좋은 책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해 주는 책"이라는 문장은 조지 오웰의 1984가 그 전범이 됨을 보여주는 말 같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은, 인간에게 자유는 그 무엇보다 근원적인 존재 기반이 된다는 것, 그럼에도 여전히 읽고 쓰는 일은 그 존재의 무게추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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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의 낮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5
레오나르도 샤샤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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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목격하고 진실을 얘기하는 건 생각만큼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하필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닐 때, 그리고 나머지 모두가 다 함께 침묵할 때 그걸 깨고 나오는 건 더더욱 그렇다. 사람은 생각보다 더 비겁하고, 복잡한 존재다. 


레오나르도 샤샤의 <올빼미의 낮>은 백오십 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흔히 이 정도 분량이면 앉은 자리에서 집중하면 두어 시간 정도면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며칠에 걸쳐 집중해서 읽어야 사건의 내막과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가까스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다층적인 결과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재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점의 변화가 계속되긴 하지만,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농밀한 페이지터너다.


첫 장부터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울리며 시작한다. 바로 살인이 일어나는 것이다. 시칠리아 팔레르모행 버스에 올라타려던 건설협동조합장의 죽음 이후 이 사건을 맡게 된 군경 벨로디 대위는 정보원 파리니에두에게서 연이어 벌어진 농부의 실종 사건까지 연결 고리를 찾게 된다.


이 사건의 정점에는 '마피아'가 있다. 우리가 영화 '대부' 같은 곳에서 떠올리는 그 끈끈한 혈족 같은 마피아의 유대는 이탈리아에서 훨씬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를 공공연하게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로 작용한다. 바깥에서 보듯 낭만적이고 미화된 캐릭터의 어두운 뒷 배경 정도가 아닌 것이다. 작가 샤샤는 이 소설의 분량이 이렇게 줄어든 데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마피아의 거대한 영향력이 있었음을 작가 노트에서 고백한다. 덜어내고 또 덜어낸 이유를 솔직하게 항변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마지막에 덧붙인 작가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하나의 눈속임 장치인지도 모른다. 즉, 이 정도로 두려워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비겁한 공모의 풍자일 수 있는 것이다. 


정의를 믿고 그것의 실현을 추구하는 청년 장교와 노인이 된 마피아의 대화 장면은 영화의 한 씬처럼 인상적이다. 노인은 사회, 국가, 법망의 외부에서 하나의 힘이 된 그 불의의 세력을 이 청년에게 이해시키려 해보지만, 물론 실패한다. 그러나, 그가 이 파르티잔 출신의 청년에게 '인간'이라고 칭한 것은 그 젊음이 가지는 무모한, 무해한 희망에 대한 일종의 경의 또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올빼미의 낮>의 미덕은 이것이다. 이 복잡다단한 인간과 그 인간들이 엮어내는 그 역동의 가운데에서 섣불리 판단, 재단하려 하지 않는 작가의 신중함이 결국 독자들에게 저마다의 감상을 살아내기를 바라는 것. 절대악을 성토하는 것으로 납작하게 눌러버리지 않고 그 악을 눈앞에 갖다댐으로써 어떻게 대결해야 할지를 개인 각자의 교훈으로 남겨두는 틈에서 작품의 깊이가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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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6-19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피아는 소문으로만 존재합니다…! 🤣
저도 이거 생각보다 읽는 데 오래 걸렸어요.

blanca 2026-06-20 13:52   좋아요 0 | URL
이 말 충격이죠. 마피아는 소문으로만 존재한다니...이 작가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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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너무나 완벽해서 별 다섯 개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인종, 여성에 대한 멸칭, 편견은 오늘날 PC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 논란 거리가 될 지점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판된 20세기 초 시대상을 감안하고 본다면,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을 도리가 없는 책임은 분명하다. 어떤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노출하는 한계, 단점에도 불구하고 너무 크고 심오해서 읽는 행위 자체가 버거울 때가 있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생명력을 지닌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 여전히 읽는 일에 대한 환희를 느낀다.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잠식한다는 기사로 사방이 도배되는 와중에도 한 인간이 직접 몸으로 부딪혀 살아내고 만들어 낸 이야기에 감동 받을 수 있다는 건 여전히 경이롭다.



<야생 종려나무>는 윌리엄 포크너가 처음 내세운 제목이 아니다. 부제인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이 그가 붙인 원제목이다. 성경 구약 시편 137편에서 따온 유대인들의 망향가의 일부다. 물론 이 대목 또한 현대 중동 상황을 감안한다고 보면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그 시대를 뛰어넘는 실험적 구조다. 1930년대 사랑 이야기인 <야생 종려나무>와 1927년 미시시피주 대홍수를 배경으로 한 죄수 이야기 <노인>이 교차하며 십 장으로 구성된다. 결국 그 이야기 속 인물들이 서로 시간의 흐름 속에 만나는 걸로 쉬운 접점을 가질 거라 생각했던 내 기대는 보기좋게 깨졌다. 주인공 둘이 마지막으로 각자 다른 이유로 같은 교화 시설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완전히 분리된 이야기로 이렇다할 접점은 없다. 이 두 이야기는 설정이나 인물이 아닌, 주제에서 만난다. 사회의 통상적인 기대나 가치관을 배반한 두 인물의 실패담으로, 승리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결국 무참히 패배하고 마는 이야기다. 윌리엄 포크너는 바로 이 실패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시간과 육체 앞에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생래적 한계를 직시한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극한까지 밀고 갔는지를 따라가는 과정의 읽기다.


<야생 종려나무>

이야기의 시점은 언뜻 치밀한 위장으로 보인다. 사십대 의사가 한밤, 정식 부부로는 보이지 않는 이십 대 부부 세입자 중 남자의 구조 요청을 받는 걸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고지식한 '순수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의사는 그 베일을 타의에 의해 찢을 수밖에 없는 불편한 순간이 온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 의사의 것이 아닌, 그에게 찾아온 청년 헨리와 죽어가는 샬럿의 것이다. 샬럿은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여자다. 의대생 인턴이었던 헨리는 우연히 파티에서 그녀와 만나 위험한 사랑의 도피 행각에 빠지게 된다. 사회적 관습, 시선, 평판에서 벗어나 오직 둘만의 사랑의 세계로 만들었던 그들의 일상은 그러나 지난한 먹고사는 문제들과 충돌한다. 여기에 더해 샬럿은 임신까지 하게 되며 그 낙태 과정에 헨리를 끌어들임으로 둘의 사랑은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들이 추구했던 영원한 사랑은 결국 지고야 말 싸움이다. 한낱 가벼운 불륜 스토리로 치달을 수 있었던 통속적 이야기는 포크너의 펜끝에서 인간이 시간과 사회, 관습 바깥으로 탈출을 감행할 때 감수해야 할 것이 결국 삶 그 자체라는 통렬한 진실로 파고든다. 



<노인>

기차 강도 미수 혐의로 십오 년의 형량을 선고받고 열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자마자 감옥에 갇힌 죄수는 대홍수 수재민 구조 작업에 투입되고 이 과정에서 실종돼 졸지에 사망자로 둔갑한다. 그러나 그는 우연히 만삭의 임산부를 구해 함께 이 재난을 통과하고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후일 엄청난 서사를 갖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닌, 오직 이 생면부지 여자의 안전한 출산과 이후는 아기와의 생존을 위해 온갖 굴욕과 고난을 감내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진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블랙코미디적 요소를 끼워 넣어 이야기의 균형을 잡는다. 어떻게든 교도소의 배를 안전하게 반환하기 위해 그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는 장면과, 자수해서 그곳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대목들은, 장기수가 탈출하여 해방되고 싶을 거라 생각하게 되는 게으른 선입견을 일거에 박살낸다. 그 과정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혼혈인과 함께 한 기묘한 협업과 동거 속에서 악어 사냥을 나서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다. 

결국 다시 감옥으로 돌아와 십 년 추가 형량까지 받고도 크게 분노하지 않고는 동료 죄수들 앞에서 만담을 떠들듯 자신의 여정을 간략하게 압축해서 들려주는 상황은 또 어떠한가. 윌리엄 포크너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농담 같은 결론이다. 즉 그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모범수로 형량이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난 상태로 다시 갇히지만, 어쩐지 그 상황이 크게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럼으로써 한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의 아이라는 생을 구원한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영웅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두 남자의 처절한 이야기가 있다. 손쉬운 허무주의로 침몰하지 않고 결국 삶의 부표에 올라서는 그 둘의 이야기가 시공간을 가로질러 여전히 빛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결국 그러해야 하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다. 영웅이 아닌 일상으로서 영위하는 삶, 끊임없이 패배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 연약한 육신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으로 시간을 횡단할 것이다. 대단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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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오쇠 ㅣ 풍요의 바다 4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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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다. 잘 알려진 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의 원고를 넘긴 후 할복자살했다. 그가 내세운 자살의 명분인 '자위대 궐기 촉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역사를 감안하면 여전히 독자 입장에서 거부감이 들고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죽음 직전까지도 완결 짓고 가려 했던 <천인오쇠>를 읽으면 그의 자살이 과연 그의 선언처럼 정치적인 것인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보다 그의 작품이 더 실질적인 그의 유서처럼 느껴졌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0년대 쇼와 시대 후기까지 혼다 시게쿠니라는 인물이 관찰자, 인식자가 되어 이른 죽음을 맞은 소년 시절의 친구 기요아키가 정치 궐기를 일으키고 자결한 소년 이사오로, 태공의 공주 잉 찬으로, 마지막으로는 바다의 선박 신호수 통신원 도루로 환생하는 과정을 목도하고 그것이 가지는 궁극의 의미를 불교의 유식론 철학을 통해 깨달아 나가는 장대한 스토리다. 60년에 걸친 한 인간의 생애에서 들고 나는 인연의 그 얽히고설킴 속에서 우리가 집착하고 욕망하고 상실하는 것들과 함께 '결국 붙들 수 있는 궁극의 실재는 무엇인가?'에 대해 던진 진지한 질문은 미시마 유키오 특유의 탐미주의, 허무주의와 맞물려 그 질문을 묻는 행위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킨다. 


혼다는 이제 아내도 먼저 떠나 보낸 여든을 훌쩍 넘은 노인이 된다. 부와 명예를 쌓았다 여겼지만 그 틈에 어느새 시간을 잃어버린 노인이 된 혼다는 우연히 떠난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열여섯 살의 소년 도루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기요아키 환생의 흔적을 발견하고는 양자로 들이게 된다. 도루에게서 혼다가 발견한 건 바로 자기 자신의 악의와 자의식이었다. 젊음과 아름다운 외모로 획득한 그 찰나의 자의식은 반드시 깨져야 하는 것으로 혼다가 도루를 데려온 마음에는 분명 사악한 악의가 끼어들어 있다. 소년과 노인은 서로를 서로가 가장 잘 안다 여기며 팽팽하게 대치하다 어른이 된 도루는 자신에게 아낌 없는 지원을 한 나이 든 혼다를 은근히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신이 혼다의 친구로 환생한 특별한 자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탐욕스러운 저속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자 자살 미수 끝에 시력을 잃게 된다. 혼다는 마침내 젊은 시절 기요아키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출가한 사토코가 주지로 있는 월수사로 노구를 이끌고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그 애타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기요아키의 이야기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혼다는 충격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60년 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기요아키의 재래와 잃어버린 사랑이 가지는 의미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천인오쇠>의 마지막 문장은 모든 이야기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이 정원에는 아무것도 없다. 기억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기는 와 버렸다고 혼다는 생각했다. 

정원은 한낮에 쏟아지는 여름 햇빛 속에 고요히 있다......

-pp.356


이것은 <봄날>, <달리는 말>, <새벽의 사원>에서 마침내 <천인오쇠>에 이르기까지의 그 장대한 이야기들을 다 무효화하는 결론인가? 순간 어질어질했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분명 이렇게 외적으로 드러난 단순한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도 각자의 마음이지요."라고 말한 사토코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느끼고 깨닫는 것들이 결국 우리의 인식 안에서 모였다 흩어지는 하나의 신기루가 아닌가 하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우리의 인생 그 자체도 그렇다. 이제 나는 스무 살에 했던 사랑이 실재했던 것인지, 그냥 내 기억 속 하나의 환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 내 삶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과 내 삶에 들어왔다 나간 그 모든 인연들이 남긴 흔적과 기억 또한 그렇다. 내가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 내가 중심이 되어 경험했다 깨달았다 여긴 일들조차 그렇다.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시간의 화력 앞에서 모두 스러지는 것들이 가지는 의미에 천착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러니 아무것도 없다? 오롯이 남아 있는 것들은 사실 생명이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늙음과 시간이 가지는 파괴력 속에서 찰나에 떠오르는 아름다움과 젊음을 간절하게 고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의 절정이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다 자인했던 그의 한탄이 결국 향한 곳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이 허무한 이야기는 그 허무로써 이룬 성취로 울림을 준다. 죽음과 늙음 앞에서 쇠퇴하는 생의 근본적 한계를 이렇게 명료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는 그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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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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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쉰 살이 되었는데,"로 시작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연대나 각종 기록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본인의 것과 많이 겹쳐 자전적 이야기라는 짐작이 간다. 쉰 살이 된 소설가가 전집을 간행하며 우연히 소년 시절의 일기와 보낸 편지, 받은 편지를 발견하며 소개하는 구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진부한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정도로 설명하기 힘든 매력과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이 <소년>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우리 모두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 공감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기숙사 방장이었던 화자는 후배 세이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이 동성 간의 일이라 해서 띄는 색채는 주된 기조가 아니다. 세이노가 소녀였어도 이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에로틱한 정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 그건 어린 시절 우리가 기대했던 그 순전함과 이상에 대한 결국 실패하고 말 지향과 숭배, 믿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었고, 사람을 믿었던 단 한 시절의 이야기가 초로에 접어든 주인공이 지금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그 시점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공명한다. 누구나 그런 한때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을까. 잊고 있던 그 시절을 환기해 내며 '맞아, 그런 때가 있었어.' 하게 만드는. 


다시 돌아온 현실은 쓸쓸하다. 한때는 전부였던 서로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재회의 기회도 마다한다. 세이노는 끊임없이 화자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라 권하지만, 그 채근이 무용하고 결국 그 둘은 재회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이상화했던 선배 대신 빠져든 언뜻 사이비 같은 종교도. 그 시절의 인연은 그 시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추억을 간직한 채 두 번은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가타이

시절은 흐르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소리가 분명히

느껴진다.

저 소리다.

저 소리다.


흐르는 시간 소리를 듣게 하는 작품을 읽고 우리가 결국 닿게 될 그 지점이 어딘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이 이 모든 오래된 일기와 편지를 소각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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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7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문장이 정말 좋아요. 인용하신 문장에서는 정말 시간이 강처럼 흘러가는 것 같네요. 앗 그리고 블랑카님 페소아 글 읽다가 포르투갈 작년에 갔다온거 생각나서 포스팅 하나 올렸어요. ^^

blanca 2025-02-28 09:25   좋아요 1 | URL
와, 바람돌이님 포르투칼 가셨군요! 한번씩 비행편 검색해 보니 직항도 잘 없더라고요. 언젠가 저도 갈 수 있을까요? 빨리 가서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