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문지클래식 7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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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저기까지 아등바등 걸어가면 이 무거운 짐을 마침내 내려놓고 평지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때가 있다. 친정 엄마는 나의 그런 믿음을 야멸차게 정정했다. 아니야, 사는 건 산 넘어 산이야. 나는 엄마의 비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엄마의 개별적 삶이고 그 삶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 거라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죽는 일은 그래,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내가 행하는 느끼는 모든 일들이 그 주어를 잃어버리는 풍경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박완서 작가의 얘기처럼 내심 나는 나의 불멸을 믿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바깥의 풍경이고 모든 무의미는 덜 노력하는 자의 불평처럼 때로 느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에서 제외하고는 도저히 연상할 수 없는 시간 틀 안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거기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다. 분명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고 때로 안고 걸었는데 이제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우리의 두 발이 단단한 대지에 붙박힌 것처럼 때로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 애는 없다. 죽음은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나의 삶에 실감을 끼워 놓으며 나를 옥죈다. 죽음 없는 삶은 없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죽음이 항존하는 삶은 그 모순과 불합리와 부조리를 극복해 낼 재간이 없다. 어차피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런데 애쓴다. 애닳아 한다. 


박상륭 소설가의 <죽음의 한 연구>는 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것은 표면적 형태일 뿐이다. 이 안에는 작가가 표방한 제목처럼 엄청난 사변이 녹아 있는 '죽음의 한 연구'가 한 도보 고행자의 행로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기독교, 불교, 무교, 민간신앙의 경계를 해체하여 거듭나고 있다. 그것은 "붙매이지 않고 자꾸 변절하고, 자꾸 받아들이고, 자꾸 떠나는 일밖엔 없다구"다. 광대하고 심원하다. 작가의 이야기는 작가의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깨달은 삶과 죽음의 비의는 이야기의 틈새마다 비어져 나온다.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 인물들의 움직임 속에 형식과 틀의 비극에 유형당한 우리의 비극적인 생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읽는 일은 그래서 나와 나의 삶과 나의 종말을 듣고 보는 일이다.





은유의 향연

아버지를 알지 못한 채 고을의 창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인공 승려는 아버지처럼 따르던 스승의 죽음 이후로 수도를 위해 유리라는 곳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수도부 여인과 살림을 차렸으나 이마저 그를 그곳에 매이진 못하게 하고 연이어 읍으로 향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샘터의 존자와 염주 스님을 살해하고 스승을 압살한다. 그러나 그것을 자백하고 그것에 합당한 형을 받기 위해 떠나왔던 유리로 귀환하여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대략의 줄거리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살인은 실제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탐욕과 편견과 아집을 끊어내는 것은 결국 자기 안의 편협한 자아를 과감히 파괴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행위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이라 항변하는 장면은 묘하게 아이러니한 느낌을 풍긴다. 작가는 우리의 해석의 틀마저 해체하려는 기지를 발휘한 것 같다. 이야기는 몽환적이고 비약적이어서 결국 전체가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난 하나의 은유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준다. 개아의 틀을 해체하고 인습과 습속, 종교의 경계도 허물고 마침내 '나'라는 자아의 허상까지 부수고 나면 도달할 그곳에 죽음이 당도해 와 있다는 결말은 거대한 풍자처럼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철학

박상륭은 죽음 앞에서의 삶과 생의 무의미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삶을 폄하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쉬운 길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상의 덧없음을 결국 살아내며 체험해야 한다는 고행길을 택한다. 한없이 흔들리고 절망하며 걸어가는 노정의 끝의 깨달음을 삶의 책무로 자인한다. 불교에서의 업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고 다시 살아서라도 우리는 그 업을 숙명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풀어내야 한다. "필멸의 윤회"는 우리의 "영생의 희원"과 충돌하지만 생이 삶다로우려면 그것은 숙명의 과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의 죽음은 그래서 허무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성취적 결말로 자리매김한다. 박상륭 특유의 아름답고 서늘한 문장들은 어떤 예감처럼 그가 받아들이는 죽음을 결정체처럼 형상화한다. 그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위안이자 안식이다. 그 안은 공허하거나 사변적이지 않다.


<죽음의 한 연구>가 그 입구는 음험하고 지난해 보여도 그 출구로 나아가는 길이 매끄럽게 확장되는 것은 작가의 죽음 그 자체에 대한 탐구와 형상화보다 그것을 품고 있는 삶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탄탄한 기반을 딛고 선 이야기라는 데에 있다. 이야기가 자칫 현학적이고 사변적으로 흘렀을지 모를 한계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그 교감과 세상의 현상에 기꺼이 동참하는 그 기꺼운 역동성으로  극복된다. 죽음의 무게가 신분에 따라 달리 매겨지는 것, 종교적 허위를 입은 탐욕 등의 간파는 예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문장들은 단 하나도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과 생과 죽음을 채집하는 어휘들은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진다. 전라도의 방언들이 가지는 리듬감은 사람들의 말을 하나의 집단적인 제의 속 구슬픈 노래처럼 들리게 한다. 모두 다 정확히 하나하나 알아듣지 못해도 괜찮게 느껴질 정도로 어떤 경계나 틀을 넘어 마음으로 건너가는 흐름의 강 속에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운 체험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우리가 걸어간 그 길에서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한다. 심지어 그것이 쇠락으로 향한 것일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나름으로 충만하다. 


마지막 노래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 나도 기꺼이 그의 목소리에 동참한다.

그래, 다시 그 세상에 태어났으면 싶다. 왕후며 장상 마님들의 태 속도 말고, 나를 낳았던 그저 그런 어미, 그런 어떤 옌네 태 속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싶고, 그래서 저 바닷가 모래가 번쩍이는 곳에서 모래집이나 쌓으며, 조수가 밀리고 밀려가는 것을 그저 망연히 지켜보고 앉았으면이나 싶다. 저 무염무애의 그러나 비천한 머슴아이, 학대와 멸시 속으로도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사내아이. 바다의 음기로만 굳어진 조개 알을 씹어 비린내를 풍기며, 갈매기의 울음에 얼을 빼앗기던 별로 오래도 흐르지 않은 옛적에 있었던 아이, 그 아이가 다시 되었으면 싶다.

-박상륭 <죽음의 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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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7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5-27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딩 2021-06-05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좋은 주말 되세요~

blanca 2021-06-05 18:43   좋아요 1 | URL
초딩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5 19:3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알려드렸듯이 뿌듯합니다
:-) 3만원도 확인하세요 ㅋㅋㅋ
 
나의 안토니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5
윌라 캐더 지음, 전경자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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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나날들이......가장 먼저 사라진다.-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의 노래>에서 인용한 제사는 <나의 안토니아>의 정서를 가장 집약적으로 잘 응축해 보여주는 표현일 것이다. 이 책은 중년의 화자가 밀과 옥수수의 거대한 평원으로 둘러싸인 네브래스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성장소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 책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은 '성장'에 초점을 맞춘 전형성을 과감히 탈피하고 자신이 유년 시절 간직한 자연과 생명의 불꽃의 현현 같았던 소녀 안토니아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대지와 자연, 삶의 실재, 우리의 잃어버린 꿈을 형상화했다. 소년의 성장기는 사실 그의 주위에 있었던 유럽의 이민자 처녀들의 그 약동했던 혈기와 적극성, 생의 약동하는 의지를 그려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다 읽고 나면 알아차리게 된다. 작가 윌라 캐더가 결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중년 남자 짐 버든의 시선을 통과한 그 인습과 전형성에 위배되는 처녀들의 모습이었다는 깨달음은 극적인 반전 이상이다.


부모를 잃고 조부모가 사는 네브래스카로 향하는 소년의 여정은 보헤미아 이민자 쉬메르다 가족의 그것과 겹친다. 가난하고 영어를 제대로 못 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찌든 그 가족은 소년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일꾼들의 도움을 받으며 마침내 정착하게 되고 소년은 그 집의 딸 안토니아와 대지와 자연에 대한 공통의 정서로 교감하며 서로의 삶에 깊숙히 발을 들여놓게 된다. 


무엇보다 윌라 캐더의 자연의 묘사가 절창이다. 아름답고 생생한 언어의 향연이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넘나들며 독자들을 포섭한다. 


그 시절 늦가을의 오후란 모두 같은 것이었건만 나에게 똑같은 오후는 하나도 없었다. 붉은 구릿빛 풀이 하루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렬하게 햇빛에 젖은 채 우리 시야가 닿는 곳까지 수 킬로미터나 뻗어 있었다. 노란 옥수수밭은 석양 아래에서 붉은 황금빛을 띠었고 높이 쌓아 놓은 건초 더미들은 장밋빛을 발하면서 기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넓고 넓은 초원 전체가 꺼지지 않으면서 계속 타오르는 불꽃처럼 보였다. 

-p.48~49


안토니아의 아버지 쉬메르다의 죽음은 소년의 성장에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짐은 안토니아의 아버지가 안토니아와 그를 한데 묶어 놓는 하나의 구심점이 될 것을 예견한 듯 그의 죽음이 그의 존재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대지를 떠나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의 귀향의 길에 짐의 집이 있었다. 


짐은 성장하여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하며 그곳에서 젊은 클레릭 교수를 만나 새로운 사상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어느 저녁 대학생이 된 짐이 자신의 하숙집에서 <아이네이스>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간 베르길리우스가 자신의 "시신"을 작은 시골 농가인 자신의 고향으로 데려가기를 바란 마음을 표현한 <전원의 노래>를 읽는 대목은 절묘하게 다시 이 책의 제사로 돌아간다. 죽음 앞에서 결국 자신의 미완성의 역작을 바라보며 위대한 로마의 시인이 시의 여신을 거창하고 화려한 곳이 아닌 아버지의 작은 밭으로 데리고 돌아가기를 바랐던 마음은 소설의 화자 짐이 나이가 들어 늙고 살이 찐 안토니아와 그녀의 아이들을 만나는 마지막 대목과 겹친다.


그녀 앞에서 "난 돌아올 거야"라고 했던 약속을 짐은 충실히 지킨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과거를 함께 소유한 어린 시절의 친구와 그 친구가 낳은 아이들에게 귀환한 짐 버든의 궤적은 결국 회귀하는 작은 원이 되었다. 


가장 행복한 날들이......가장 나중에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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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18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처에 나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공을 했어도 역시 짐 버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고향에서
보낸 추억의 순간들이었나 보네요.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리뷰도
기대해 봅니다.

blanca 2021-01-21 09:44   좋아요 0 | URL
아, 레삭매냐님 이 작가 참 좋아서 <로스트 레이디> 대기 중입니다.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도 조만간 읽어보겠습니다.
 

책값과 분량에 꼬챙이 같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그와 아버지의 일본인으로서 가지기 힘든 역사 의식과 특유의 담백하면서 간명한 문체에 무장해제 되어가는 중이다. 역시 하루키구나 싶은 감탄이 나온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로 이런 글은 하루키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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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0-27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평에 읽고 싶어졌어요..사소설류나 사적 얘기는 손이 잘 안가던데...블랑카님은 제가 믿는 서재친구이니까.ㅎㅎ

blanca 2020-10-27 21:39   좋아요 0 | URL
테레사님, 전 하루키의 팬이라 사실 전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

scott 2020-10-27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 00에세이 최고상을 받았데요. 중학교 교과서에 실릴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데 아베이후 스가가 어찌 할지 모르겠네요.
아버지-소년 하루키-고양이 이러 연결고리로 아버지의 청년-중년-노년 한남자의 일대기를 담백한 문체로 써내려간 하루키 대단한것 같아요.
인터뷰에서 70세가 되니(전업작가로 40년의 세월) 연필만 쥐면 글이 술술 써진다고 하더군요. 이정도에 경지에 올라갈때까지 오로지 글만 쓰며 (작가 본업에 충실) 조급해 하지 않고 세계적인 작가에 반열을 차근 차근 밟고 올라가 하루키라서 인지 다음작품을 항상 기대하게 되네요. ^.^

blanca 2020-10-27 21:42   좋아요 1 | URL
우아, 이런 내용이 일본 교과서에 실린다고요? 가능할지... 나이가 젊을 때는 용감한 발언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노년이 되어 게다가 우익이 정권을 잡고 있는 일본에서 역사적 실책을 용감하게 발언할 수 있는 사람은 진짜 드물잖아요. 게다가 하루키가 그런다는 게. 어디 하나 허투루 쓴 문장이 없어요. 에세이인데도 이 글은 그 누구도 쓸 수 없다, 반드시 하루키여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더라고요. 사실 제 꿈이 쿨럭 하루키를 만나는 겁니다. ^^;;;

테레사 2020-10-2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하루키 만나시길! 저도 잘 몰랐는데 언젠가..세계에 대한 책임감을 얘기한 걸 신문에서 읽은 후, 하루키를 다시 보게 되었어요.저는 다른 작품은 모르겠고, 토니타키타니가 들어있는 단편집, 렉싱턴(ㅋ)의 유령이라는 단편집을 참 잘 읽었어요. 가끔 그 책을 생각하곤 해요. 그리고 채소의 기분...을 좋아하고...여자없는 남자...라는 단편집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ㅎㅎ 역시 저는 하루키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blanca 2020-10-28 10:43   좋아요 0 | URL
헉, 테레사님, 저 도서관에서 <렉싱턴의 유령> 빌려 보려다 책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말았거든요. 저도 그 단편 궁금했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하루키 단편 참 좋죠. 에세이도 좋고요. ㅋㅋ 하루키가 독자와 얼굴을 보는 걸 극도로 싫어한대요. ㅋㅋ 그래서 방한도 성사 못 시켰다고 하더라고요. 코로나가 끝나지 않는한 요원한 일이죠.
 
짝 없는 여자들
조지 기싱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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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19세기의 '짝 없는 여자들'에 감정적으로 깊이 이입하며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세기를 가로질러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기회의 장에서 똑같은 존엄의 틀을 가지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에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아직도 모니카, 버지니아, 앨리스의 삶은 여전히 어디에선가 반복되고 있다. 한때 거리의 여자와 결혼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극빈곤층의 삶을 경험하기도 했던 작가 조지 기싱의 통찰력은 경이롭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 작가가 여성 주인공들을 전면으로 내세워 그들의 시선, 입장에서 경험하는 남성적 폭력과 사회의 편견을 이렇게 섬세하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뛰어난 핍진성은 조지 기싱이 작중 여성 인물들을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이미 존재하였던 그녀들을 단지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짝 없는 여자들>에서의 여성 인물들은 모두 실존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이다. 


이야기는 중산층이었던 매든 가의 딸들인, 앨리스, 버지니아, 모니카가 의사 아버지의 죽음 이후 보수적이지만 여성 인권의 태동기에 있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저마다의 삶의 행로를 개척하며 겪는 고난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특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용모를 타고난 막내 빅토리아는 우연히 거리에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부유한 위도우선을 만나 도망치듯 결혼을 택하며 고난을 겪게 된다. 위도우선은 아름답고 어린 아내를 믿지 못하고 의처증에 시달리며 실제 모니카는 정신적인 외도에 빠지게 된다. 


매든 가의 딸들을 정신적으로 교화시키고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여성의 경제적 자립, 독립적 삶을 설파하는 메리와 로더도 인상적이다. 특히 로더는 독신주의였지만 함께 살며 신조를 공유했던 메리의 사촌 바풋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심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조지 기싱의 혜안이 드러난다. 페미니즘의 선봉에 선 여인이 남자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옴쭉달싹 못하게 될 때의 상황을 중층적으로 충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상대를 독점하고 때로는 상대에 복종해야 하는 그 복합적이고 어려운 관계망에서 자신이 어린 소녀들 앞에서 독립적이고 고귀한 선구자적 삶의 원형이 되어야 한다는 부책감은 당시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쉽지 않은 역할이다. 특히나 그 사랑의 연적이 자신이 아끼던 모니카라고 오해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힘든 결혼생활로 괴로워하는 어린 여성을 헛된 질투로 미워해야 했던 로더가 결국 모니카와 화해하고 소통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스물두 살의 유부녀 앞에서 서른두 살의 독신녀는 그녀가 비참한 결혼생활로 삶 그 자체를 방기하지 않도록 독려한다. 경제적 빈곤에서 도망치고자 섣불리 무모한 결혼을 감행했던 모니카의 슬픈 최후의 아릿한 여운이 길다.


조지 기싱은 이들 여성의 삶에 나타나는 남성들의 형상화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때 방탕했지만 페미니스트 로더에 빠지는 바풋이 끝내 걸어갈 수 없었던 길, 아름답고 어린 모니카에 미친듯이 빠지게 되는 고지식한 재력가 위도우선, 유부녀 모니카에게 반하지만 끝내 비겁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미남자 베비스 중 어느 하나도 전적인 나쁜 남자의 향기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조지 기싱의 여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저마다의 설득력을 지니고 자신의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최소한 여자들은.-내셔널 리뷰"

이 인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남자들도 그렇다. 모든 인물에 그 어떤 거부감 없이 깊이 공감하고 이입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그들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고 가만히 돌아보게 될 것이다. 과연 이것이 그것인가? 이 질문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읽기가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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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26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덕분에 몰랐던 책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저도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말씀하신 그런 결혼 혹은 연애 앞의 갈등에 대해 소설로 읽을 수 있다니 너무 좋네요.

blanca 2020-10-26 17:26   좋아요 0 | URL
조지 기싱 또 올해의 발견인데요. 개인적인 삶도 드라마틱하고. 이게 막 너무 재미있고 그런 건 아닌데 인물들이 어찌나 생생한지. 계속 울컥울컥해요.
 
유년기의 끝 - 아서 C. 클라크 탄생 100주년 기념판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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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아서 C.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은 단순히 제목에 이끌렸다. 상상력에 의거하여 작가가 세운 가상의 제국에 제대로 동화되지 않으면 SF는 몰입하기가 어렵다. <유년기의 끝>에는 묘한 이야기의 견인력과 흡인력이 있다. SF에 별로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쉽게 빠져들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유명세가 이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의 끝>은 '오버로드'라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내려와 인간들을 연구하고 지배하다 결국 개별성이 제거된 거대한 집단정신 에너지 군체가 되어 심우주로 뻗어나가는 인간들의 진화 작업을 마무리한 후 떠나는 이야기다. 결국 이것은 인류의 멸망이기도 하고 지구라는 행성의 절멸의 이야기이자 인간이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는 스토리다.


오버로드 입장에서 인간은 자신들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서로를 공격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종족이다. 그들은 인간을 구원함과 동시에 자신들 또한 '오버마인드'의 지배를 받는 한계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 모든 시도와 질문의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클라크는 거대하고 심오한 질문들만 남겨둔 채 이야기를 마무리짓는 한계는 보이지만 이 지구라는 행성과 지금이라는 시간의 차원을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망하는 식견을 제공해준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지평을 넓힌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집착하고 추구하고 경쟁하는 것들이 과연 우주적 차원에서 가지는 가치나 의미는 무엇일까. 위에서 내려다 본 인간사는 볼품없고 미시적인 낭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서 C. 클라크의 질문은 고차원적이고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지점까지 천착해서 내려간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여기와 저기, 모든 시공간의 경계는 어그러지고 그러고 나도 남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근원적인 탐사가 가지는 심오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나 단순히 외계 생명체와 인간과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또 그 위에 '오버마인드'의 존재를 가정한 것 등은 이분법적인 식민지배관이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을 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버로드'가 지구라는 행성에 돌아와 행했던 지배 행위가 가지는 의미도 모호하다. 두 개의 대전과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 등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모든 걸 은유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시각은 이 이야기를 지나치게 평면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계한 우주의 배경과 시공간에 대한 촘촘하고 아름다운 묘사는 수많은 우주 공상 영화와 이야기들이 태어나는 토양 역할을 하게 된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명료하면서도 대단히 시각적이라 눈앞에 거대한 우주 정거장의 환시를 보여주는 차원의 것이다. 


"별들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이 메시지는 <유년기의 끝>의 핵심이다.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이 이야기에 흠뻑 몰입하는 우주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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