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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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는 하드SF, 즉 과학 이론적 원리가 이야기를 위한 보조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근간이 된 SF소설이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작가 류츠신의 방대한 이론물리학, 천체물리학적 지식이 <삼체>의 도입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동력이자 흡인력이 되기도 한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해리와 친구들의 마법이 마치 현실에 기반한 것처럼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처럼 태양이 세 개인 삼체의 외계문명도 류츠신의 탄탄한 이론적 설계도 하에서는 생생한 현장감을 띤다. 


류츠신의 유니버스는 태양계를 벗어나 외우주로 향하고, 우리가 익숙한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 4차원으로 확장되다 마침내 2차원으로 붕괴되고, 유한한 시간을 벗어나 몇 십만년도 우스운 미래로 뻗어나간다. 80년 남짓을 한정된 영토 안에서 살며 모두가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한계와 인류의 오만을 냉정히 조망하는 관조적 시선은 이런 방대한 스케일의 SF만이 가질 수 있는 혜안일 것이다. 


1부 삼체문제


'중화 2호' 고에너지 가속기 프로젝트 나노 부품 책임자 왕먀오는 '과학의 경계' 학술단체 소속 여성 과학자의 자살과 관련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협조 요청을 받게 된다. 왕먀오가 하는 삼체 세계 발전사를 시뮬레이션한 VR 게임 속에서 진시황, 공자 등과의 상호작용은 사이버 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항세기와 난세기를 갈마들며 생존을 향해 발버둥치는 문명사의 복기와 예행 연습의 기능을 한다. 한편 죽은 과학자 양둥의 어머니인 예원제는 문화대혁명기에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공개처형된 후 홍안기지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예원제는 삼체 문명에서 보낸 신호를 수신하게 되고 지구의 좌표를 노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4광년 떨어진 삼체의 우주선이 침략을 위해 지구를 향하는 400년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2부 암흑의 숲


삼체문명에서는 지구에 일종의 정보원인 지자들을 보내게 되고 지구에서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구를 방위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면벽자' 프로젝트 및 태양계 방어기지 건설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과 배신이 일어난다.



3부 사신의 영생


말기암에 걸린 청년 윈톈밍이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 청신에게 별을 선물하고 안락사를 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주 엔지니어인 청신이 인류 문명을 외계 침입에서 수호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 동면으로 뛰어넘은 미래의 은하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삼체 세계의 지령으로 호주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고 우주 도시, 우주선에서 혹은 동면을 통한 미래에서 생존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대한 묘사가 현 인류의 생존 위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전체주의를 동원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참상은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생존 자체가 행운입니다. 과거에 지구에서 그랬듯이 지금 이 냉혹한 우주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모르게 인류가 환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을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겼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들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삼체>의 핵심 메시지는 인류의 문명이 무한정 진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과연 선인가? 우리의 도덕률은 미지의 광활한 우주 세계에서 존재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의 세계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생존 의지는 도덕적 기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이 악으로 명명될 여지가 언제나 있으며, 그럼에도 살아남는 그 무엇은 결국 인간의 연대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또한 전부는 아니라는 것. 시공간에 대한 경직된 선입견은 인간의 지적 한계의 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인간 존재 자체가 거대한 우주 전체에서 가지는 의미는 지극히 미소하다는 것. 


지금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과 희열은 우주의 끝과 우주 최후의 날까지 확장되는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지평 너머로 희석된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자체가 가지는 힘이 <삼체> 읽기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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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6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은 드디어 sf를 영접하셨군요. 좋으셨나 봅니다. 저는 일단 과포자라 읽을 자신이 영...ㅠ

blanca 2024-11-27 09:21   좋아요 1 | URL
저도 솔직히 다 이해는 안가더라고요. 영혼 없이 읽은 대목도 많아요. 그래도 워낙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푹 빠져 읽었어요.

transient-guest 2024-12-14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즐겁게 푹 빠져 읽었지만 결말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SF를 동양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 너무 좋았어요. 무협지를 읽는 듯한 느낌도 좋았구요.

blanca 2024-12-14 10:06   좋아요 1 | URL
이해 안가는 대목이 저는 많았어요. ^^;; 그런데 스토리 장악력으로 다 넘어가지더라고요. 이색적인 SF라 오랜만에 푹 빠져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작가 나이가 벌써 꽤 들었더라고요.
 
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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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통일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중반 한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이야기가 <표범>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일부만 드러낸 것이다. 사십 대 중반의 시칠리아 영주가 아들처럼 사랑했던 신세대 조카의 혁명 참가와 실리적인 판단에 따른 결혼을 지지하며 삶과 죽음에 대하여 탐구하는 이야기이고 이 주인공이 작가 자신의 가문 증조 할아버지를 모델로 한 일생 유일한 장편소설로 생전에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당했다 사후에야 출판되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고 국민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뒷얘기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단 한 권 남긴 가문의 이야기는 고전이 됐고, 알랑들롱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다시 넷플릭스 시리즈 제작 중이다. 직업적 소설가도 아니고 전문적인 작가 수업을 받지도 않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은 이야기 자체로 그만큼 매력적인 스토리의 재미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돋보이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시칠리아 귀족 돈 파브리초 살리나 영주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마음껏 향유하는 한편 천문학에 심취하고 장엄한 미사를 드려 자신의 방종을 회개하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호화로운 별장을 순례하고 사냥터를 누비고 거리의 여자를 안는 그가 죽은 누나 대신 돌본 조카가 영주의 딸 대신 혁명의 세례를 받은 신흥 부자인 시장의 딸과 결혼하게 되자 화통하게 그 결혼을 응원해 주는 배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구체제에서 누린 계급적 특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급변하는 정세의 변화에도 흔쾌히 열린 마음으로 그 변화를 맞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돈 파브리초는 정작 중요한 것이 그런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가 정작 천착하는 주제는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 죽음이었고 <표범>의 비상한 흡인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살리나 가문의 문장인 표범은 지배계급의 그 간악한 공격성과 지배 욕구, 탐욕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삶을 결국 기습적으로 먹어버리는 죽음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는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추는 사람들에게서도 결국 닥칠 죽음을 보게 되고,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그 누구보다 삶 자체를 만끽하며 누리는 그가 역설적으로 죽음의 안식을 동경하고 거기에 기꺼이 승복하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이 남자의 일대기의 압축이 향하는 그 종착점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성찰이 뒷받침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화려한 이야기 이면에는 이토록 어둡고 깊은 생의 유한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우리는 영원을 제외하고는 무엇도 증오할 수 없다.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다. 이 세상에 영원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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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2-01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참 대단하고 아름답죠......원작이 번역되었군요!

blanca 2024-12-02 18:58   좋아요 0 | URL
알랑들롱 영화 아직 못 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지의 즐거움 - 지적 흥분을 부르는 천진한 어른의 공부 이야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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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 우치다 다쓰루 앞에서 ‘정체성 정치‘, ‘진정한 나‘, ‘민주주의‘, ‘구원‘, ‘지혜‘에 대한 틀에 갇힌 해석은 해체되고 재조립된다. 끊임없는 자기 쇄신을 통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 칠십 대 노장의 사고의 유연함에 거듭 놀라고 비판 없이 받아들였던 모든 고정 관념의 뿌리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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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07 1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 님의 별 다섯!!!!!

blanca 2024-11-07 19:44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입니다. 저는 소장하려고요.
 
8월은 악마의 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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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살 아이를 두고 이혼한 이십대 아일랜드 여자가 8월에 휴가를 떠난 이야기라 하면, 흔히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전복시키는 이야기. 감각적이고 도발적인데 헛헛한 아름다움의 마침표를 찍는 이야기. 에드나 오브라이언이라는 작가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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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10-26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왠지 책 내용을 엄청 기대하게 하는 리뷰네요.

blanca 2024-10-26 08:52   좋아요 1 | URL
분량도 많지 않은데 깊이와 재미를 다 잡은 작품 같아요. 일단 아주 재미있어요.
 
망고와 수류탄 - 생활사 이론
기시 마사히코 지음, 정세경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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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학자 기시 마사히코가 오키나와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청취하여 오키나와의 '역사와 구조'에 연결한 보고서다. 이렇게 요약하면 딱딱한 이론서처럼 들리지만, '약속으로서의 실재론'인 조사자와 구술자의 대화는 참혹한 역사적 관계에 우연히 엮여 들어간 평범한 인간 군상의 묘사로 감동적인 이야기들의 태피스트리다. 


표제작인 <망고와 수류탄>은 패전 후 일본군이 오키나와 민간인들에게 수류탄을 지급하고 자결을 명령한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할머니의 구술 이야기다. 당시 소녀는 엄마의 용기와 기지로 거기에서 탈출하지만, 미군이 쏜 박격포에 바로 옆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는다. 오십 년이 지나서야 소녀가 그날 뒤집어 쓴 게 아버지의 피였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지막에 손수 얼려서 이고 지고 온 망고를 이 연구에 참가한 젊은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끝난다. 훈훈한 결말을 품은 이야기 중에 이렇게 슬픈 사연을 지닌 것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사회학자에게 소녀 시절 겪은 역사적 참상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그 후에 깨달은 비극적인 진실까지 덧붙인 노인은 인간에 대한 불신과 삶의 잔인함, 비관을 한탄하는 대신 다음 세대에 대한 사랑의 마침표를 찍는다. 


1945년 저 섬에서 그녀는 일본군에게 두 개의 수류탄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2015년 이 공민관에서 수류탄 대신 그녀가 우리에게 건네준 것은 몇 개의 다디단 망고였다.



저자는 본인이 택한 생활사 이론의 질적 연구에서 조사자의 경계짓기, 범주화를 통한 이해에 어떤 편견과 폭력이 게재되거나 연구 대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거짓과 모순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 한계조차도 연구의 실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구를 완성하는 하나의 조각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즉 그 불완전함, 그 한계가 인간이 인간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것의 실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를 구술하면서 잘못된 기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진심 전체가 호도되고 그것을 들은 사람의 시간이 낭비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어떤 진실의 핵이 있음을 저자는 이야기한다.


말하고 듣는다,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와 감정의 상호교환이 있고 이것은 수치로 계량화할 수 없기에 특유의 가치를 지닌다. 누군가의 아픈 생애를 그 우연적인 역사의 폭력에 다친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의미란 없다. 우리가 어떤 전쟁에 휘말려들게 되는 것에도, 어떤 계층의 집에 태어나는 것에도, 혹은 '남자'나 '여자'인 것 그 어느 것에도 의미는 없다. 우리들은 절대적인 외부에 연쇄하고 있는 무한한 인과관계의 흐름 안에 갑자기 던져졌고, 거기서 살아가야 한다.



사회학자인 저자의 연구 방법론에 대한 책에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살아내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여러 명의 주인공들의 순간을 담은 아름답고 슬픈 단편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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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0-25 1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사두었는데 블랑카 님의 리뷰를 읽으니 얼른 이 책을 읽고 싶어집니다. 망고와 수류탄 이라는 제목부터가 참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잖아요?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조화를 이뤄낼지, 이 리뷰를 통해 엿본 느낌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10-25 14:19   좋아요 1 | URL
저 이 책 망설이다 다락방님도 사셨다길래 산 거예요. 중간 방법론은 좀 지루한 대목들이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정말 좋았어요. 땡스투를 사고 나서 해서 다락방님한테 제대로 갔을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