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도 1월 1일 일어나 보니 무려 열 시였다. 아무런 다짐도 결심도 미처 하지 못했는데 일어나 보니 해는 중천에 떠 있는 기분은 착잡했다. 그냥 똑같은 시간들, 인간이 임의로 지은 경계에 불과하다고 되뇌어도 역시 한 살 더 먹는 일은 서른 이후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마흔도 되고 쉰도 되고 그럴 텐데. 잘 할 수 있을까?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이모부는 사촌동생의 결혼식 폐백실 앞에서 나와 시선이 마주쳤고 나를 향해 걸어 오셨다. 병색이 어려 있기만 했지만 그래도 이모부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는데 이모부와 나는 작별하였다. 이모부도 나도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었던 듯 서로 머뭇거리며 또 한번 마주치려고 했지만 그 날은 그렇게 무언가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었다. 하지 않은 이야기들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은 이제 담을 곳이 없어졌다. 영영 완성되지 않을 것 같은 교각 위에 입김을 내뿜으며 안전모를 쓰고 작업하는 인부들의 모습과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가족을 부양했던 젊었던 당신이 겹쳐 가슴 한켠이 아렸다.

 

나는 붙잡아 두고 싶은 풍경들이 가차없이 차창 뒤로 쉭쉭 밀리어져 나간다. 기착지는 잠깐씩 있겠지만 예전처럼 간이 판매대에서 우동까지 사서 들고 올 시간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2011년 12월 31일 기분이 저조했나 보다. 그래서 꼭 읽어 보려고 했던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었다. 밤에도 읽고 대낮에도 읽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꼭 내용을 읽지 않아도 제목만으로 수많은 추억들, 느낌들은 저마다 수런거리며 벌써 거대한 이야기를 이룬다. 이미 김연수는 얘기를 하기 전에 얘기를 끌어 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작가인가 보다. 이러한 느낌을, 추억을 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물론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처럼 여기에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같은 제목의 단편은 없다. 그것을 찾는 건 읽는 이의 몫이다. 김연수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는 뉴욕제과점 막내 아들이었다. 그때 그 거리를 다시 복기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작가처럼 나는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사당동 시장 골목을 언제나 어른 같았던 나의 친구와 다시 걸었다. 가정 시간 만들 치맛감을 끊어서 언제나 언니 같고 침착했던 그 친구와 함께.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찾아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다른 시절에 할애된 시간을 줄여서라도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

 

되도 않은, 호러물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면 그 친구는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쳐주고 호들갑을 떨고 분석까지 하며 들어주곤 했다. 가차없는 비판도 아프지 않았다. 이제 그런 친구는 없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아직이라는 말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 오지 않은 것들, 기다리는 것들이 한아름 내 몸 속을 꽉 채우고, 지나치는 것들이 다 그 자리에 고대로 서서 나를 기다려 줄줄 알았다.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가야 할 길을 보는 심정은 서늘하다. 아직 계획도 포부도 세우지 않았는데 길은 또 내 앞에서 저만지 달음질쳐 가서 기다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또 걸어가야 한다. 이별도 해야 하고 포기도 해야 하고 실망도 해야 한다. 김연수의 말처럼 죽게 되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되돌아볼 기회가 온다면 지금 이 시절에 할애된 시간도 소중하게 여겨졌으면 좋겠다. 자꾸 태엽을 뒤로 감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만을 아련하고 아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늦잠 잔 새해 2012년을 천천히 되짚어 다시 걷고 싶을 만큼 소중하고 그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유년기와 청춘을 추억하는 모습이 당연한 것처럼 중년과 노년을 복기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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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2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작년 12월 31일과 1월1일이 뭐라고.
이렇게 새 계획들을 새우고, 포부를 다지고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못 지킬 것을 알기에 안 세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즈음 드는 생각은, 계획을 세우건 안 세우던지간에 내가 행복하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행해지겠더란 말이죠.
언젠가 저도 나의 어린 시절을 복기하고 싶은데 그게 마음에만 있지 쉽지 않네요.
블랑카님도 행복하시길 빌어요.^^

blanca 2012-01-03 17:0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스텔라님. 저도 모르게 그런 강박에 시달렸나 봐요. 오늘은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어요. 내가 행복해지기를 결심해야 한다는 말, 참 귀중하게 들리네요. 스텔라님도 저도 올해는 작년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01-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내가 위로해줄게요.
난 1월 1일에 11시반에, 2일에 또 11시반에 일어났어요! 진짜 위안이 되지 않아요?
일어났더니, 하루의 반이 휙 사라졌는데, 몸은 개운하더라구요. ^^

내가 차끌고, 분홍공주님 델구 일산 오랬죠. 강변북로 타면 올만할건데... 그럼
내가 가차없이 비판해주고 분석해주고 안아주고 할게염. 그리고 블랑카님은 항상 안절부절하지만
항상 무엇인가 준비하고 나아가고 있다고, 전 보고 있는데요.. 멋지세요, 항상.

올해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하세요.

blanca 2012-01-03 17:0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의 운전은 꾸준히 동네운전이랍니다.ㅋㅋ 사실 이것도 저를 작아지게 하는 원인 중 하나지요. 전용도로를 탔다 주눅들었어요. 그 후로는 자신감 완전 상실했어요--;; 일산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데. 아마 올해에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중이에요^^ 코알라도 마녀고양이님도 만날 날이 오겠죠? 아, 지금 밖에 보니 완전 눈보라예요. 일산은 어떨까요? 마고님도 창밖을 한번 보세요. 올해 감기 바이러스란 바이러스는 다 마고님을 피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순오기 2012-01-0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언제나 돌아가고픈 추억이죠.
새해에 늦게 일어났으면 어때요, 잠을 푹 잤으면 몸도 마음도 개운하고 건강에도 좋잖아요.^^
이러면 위로가 될려나~

blanca 2012-01-03 17:0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위로가 됩니다. 맞아요. 정말 숙면을 취했어요. 이제는 좀 일찍 일어나 보려 해요. 아이가 방학을 하니 밤에 잠을 안 자서 이런 일과가 굳어졌어요. 저도 자주 아이가 되고 싶어요. 오늘 같이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도요. 순오기님, 새해에는 더욱더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진 2012-01-02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2년이 되었는데도 교회와 학교를 오간다고 아침 일찍일어나야 해요 ㅠㅠ
맞아요, 인간이 임의로 정해논건데 신경쓸 필요가 없겠네요.
그렇다면 저는 이때까지 미뤄둔 다이어리를 더 미뤄야겠어요 ㅋㅋ

아무리 나이가 한 겹 한 겹 더 쌓여간대도
블랑카님 새해 복은 무수한 겹으로 받길 바래요~

blanca 2012-01-03 17:1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사진 아이돌 같습니다.^^ 포즈도 너무 자연스럽네요. 고맘때는 마음껏 미루고 유예해도 되는 게 특권 아닐까요? 저는 그 때 일찍 일어나는 게 넘 힘들어서 꼭 대학가면 일주일 동안 잠만 잘 거라고 결심하곤 했었는데 그 심정 알지요. 이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gimssim 2012-01-02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이였을 때>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내가 아이였을 때... 이렇게 인생길을 가고 있으리라 생각은 못했어요.
'소통'이 사회적인 이슈로 대두되어 있는데, 소통하기를 어려워하는 남편 때문에 고전하고 있어서일까요?
어머니와 아버지만 계시면 모든 것이 다 되던 그 시절이 정말 눈물나게 그립습니다.

blanca 2012-01-03 17:13   좋아요 0 | URL
눈물나게 그립다는 말씀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언제나처럼 강고하고 차분하게 중전님은 다 잘 이겨나가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힘내시고 더불어 새해 복도 많이 받으세요!

cyrus 2012-01-03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끔은 어린 아이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어렸던 그 시절 그 거리를 오랫동안 공들여 천천히 다시 걸어가고 싶다'라는 책 속 구절이 마음에 깊이
와닿네요. 저도 한 번은 예전에 어렸을 때 살던 동네를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느낀 감정이
책 속 구절과 같았거든요. 비록 그 당시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이라는 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더군요 ^^

제가 작년에는 학교 생활에 치중하느라 서재에 자주 들려서 댓글이랑 안부 인사를 남기지 못했어요.
내년에도 학교 생활하면 바쁘겠지만 올해에는 안부인사는 꼭 할께요 ^^
올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고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

blanca 2012-01-03 17:15   좋아요 0 | URL
아웅 고마워요. cyrus님이 88년생이시라는 얘기 듣고 저는 그때 무얼 했나 잠시 생각했어요. 학교 생활하느라 바빴던 시간들도 그립습니다. 그 땐 참 저도 이리저리 분주했고 이리저리 갈 곳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 일들, 그 장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올해 사랑도 성취도 미래도 얻으시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잉크냄새 2012-01-0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허,새해 첫날 일어난 시간이 저와 똑같다니.
언제부턴가 새해가 별다른 의미없이 지나가네요.
자주하던 금연도 이제는 시작안한지 오래되었고, 5년째 새해를 중국에서 맞이하게 되네요.

blanca 2012-01-03 17:17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정말요? ^^ 금연결심은 건강을 위해 음력 설에 다시 하시는 게 어떨까요? ^^ 저희 집 어른 두 분께서 올해는 금연 얘기를 아예 안 꺼내시더라고요. 올해 분위기가 그런 걸까요? 중국에서 벌써 5년이나 되셨어요? 이국에서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어떨까요? 올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2-01-0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은 언제나 특별히 예민한 감수성의 촉각이 느껴져서 좋습니다. 그리고 blanca님의 이 글을 읽으니 문득문득 제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의 몇몇 구절들도 새삼 떠오르는군요.
* * *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며, 그밖의 모든 것은 다만 머릿속에 간직된 표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있던 것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이미 없어진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다음 순간에는 방금 있었던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의미한 현재도 가장 의미 있었던 과거보다 낫고, 현재와 과거의 관계는 무와 존재와의 관계와 같다."

"삶의 지혜는 대부분 현재와 미래에 대한 주의와 관심이 알맞은 균형상태를 이룰 때만 얻을 수 있다. 경박한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현재 속에 파묻혀 산다. 불안과 근심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래에만 매달려 산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추구하며 미래 속에 사는 사람은 늘 앞을 보며 살아간다. 그들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무엇인가를 향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를 즐기지 않는다. 현재는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그 곁을 지나쳐갈 따름이다. 이처럼 그들은 죽을 때까지 미래를 향해 줄곧 '잠정적'인 상태로만 살아간다.

현재의 평온함이 불확실한 불행, 또는 확실하다 해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으로 깨뜨려져서는 안된다. 틀림없이 겪게 될 불행, 그리고 언제 겪을지 분명한 불행은 매우 적다. 불행은 대부분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아마도 그렇게 되기 쉬우리라고 생각될 뿐이다. 틀림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나쁜 일들도 있기는 하다. 이를테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확실치 찮다.

우리가 이 같은 일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잠시도 평온한 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불확실하거나 언제 생길지 불분명한 불행 때문에 평생 마음의 평화를 잃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런 불행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거나 적어도 지금 일어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blanca 2012-01-03 17:20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제가 다시 적어 봐야겠습니다. 저한테 지금 가장 절실한 얘기들이네요. oren님에게 들킨 기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oren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런 좋은 댓글도 많이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카스피 2012-01-03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ca님,2011년 서재의 달인 등극을 축하들려요.
2012년 흑룡의 해,좋은일만 계시길 바라며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그리고 신년 새해 용꿈 꾸시라고 용 한마리 선물로 보냅니다
\▲▲/
( ^^ )
<(..)>
<(▶◀)>
<( = )>
<( = )>

━┛┗━

blanca 2012-01-04 15:1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섯 살 때였는지 여섯 살 때였는지 가물가물하다. 동네 아주머니가 과실주를 담가 왔다. 우리 집에서는 시음회가 벌어졌고, 나도 아마 한 모금 졸랐던 것 같다. 예상 외로 너무 달콤해서 홀짝 홀짝 계속 먹었나 보다. 먹었던 과정은 사실 기억이 잘 안 나고 영화의 장면 전환처럼 갑자기 엄마 등에 업혀 울고 불고 하며 술기운에 고통스러워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그 출렁이던 멀미의 포격 같은 기분은 아직도 삼삼하다. 술에 참 일찍이도 취했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에서 철저하게 감정이입이 된 대목은 앤이 라즈베리 시럽으로 착각하고 건네 준 포도주를 연거푸 마시고 술에 취한 다이애너에게 앤이 절교당하는 부분이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다이애너는 곤드레만드레 취한 모습으로 엄마 배리 부인을 경악시킨다.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 등에 업혀 울며 주정을 했던 꼬마도 같이 생각나 기분이 묘해진다. 그 꼬마는 하여튼 커서도 술과 관련된 많은 해프닝의 주인공이 된다.-..-  

 

  

사실 그린 게이블즈의 그 주근깨투성이의 빨강머리 소녀의 얘기는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ANNE>에서는 초반에 불과하다. 무뚝뚝한 중년의 남매에게 뚝 떨어진 고아원에서 온 소녀의 얘기가 기대 이상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작가에게는 속편에 대한 부담과 압력이 가해진다. 이 덕택에 앤은 성장해서 유년기의 첫사랑 길버트와 결혼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아들들을 전장에 내보내며 늙어간다. 앤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점차 확대되어 앤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이웃들의 삶까지 닿는다. 이 작품은 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앤이 성장한 애번리 마을사람들의 연대기에 가깝다. 유년시절의 꿈, 청춘의 무모함과 순수, 열정, 중년기를 거쳐 노년기의 쇠잔, 소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밀착된 시선과 섬세한 묘사는 삶을 횡적으로 종적으로 아우른다. 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나의 유년, 청춘, 지금 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망에 얽힌 가족들, 타인들의 시점까지 함께 자꾸 돌아보게 한다. 지나치게 낭만화된 결말들, 조금씩 서투른 반전들의 아쉬움까지도 다 덮어줄 정도로 이 작품이 매력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과 삶을 결국은 믿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의 본능적 치우침을 작가가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성장'에 대한 얘기는 필연적으로 끌리고 만다. 뒤돌아봐도 만질 수 없는 것들. 그 애달픈 서투름. 시간을 돌려도 항상 과거의 실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그 몫을 고스란히 지키려 든다.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우유부단하고 어리버리한 청춘의 모습은 의외로 촌스럽지 않다. 육십 년대의 청춘이든, 구십 년대의 청춘이든, 21세기의 그것이든 청춘은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을 담보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청춘이든 그것은 시행착오, 실수와 더불어 채색되고 어느 정도 그것이 줄어들 때쯤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한다. <졸업>에서 그가 유난히도 망설이고 자신없어 하는 모습은 관객을 웃기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울리려는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성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확실한 것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술에 취해 본 것은 스물 다섯 언저리였다. 낙지 안주가 너무 잘 받아서 주량인 소주 세 잔의 두 배를 마시고도 거뜬하다고 생각하며 음식점을 나오자 갑자기 하늘과 땅이 붙어 버리는 경험을 했다. 놀림도 받고 위로도 받았던 그 사건의 최후는 엄마 등에 업혀 울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과 같다. 졸업해 버린 것들. 언제나 부끄럽고 가끔은 절절하게 그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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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무렵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 어머니가 집에서 담갔다는 포도주를 억지로 먹이고는 혼자 집에 보내는 바람에 술 기운에 비틀비틀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요. 이틀쯤 앓아누웠었죠 아마. 이 페이퍼를 읽으니 그 기억이 떠오르네요^^

blanca 2011-11-13 22:06   좋아요 0 | URL
후와님은 정말 다이애너와 흡사한 경험을 하셨군요. 그런데 지금 포도주 마셔보면 너무 맛있어서 계속 먹을 정도는 아닌데 어렸을 때 어찌 그리 달콤하게 느꼈었는지 참 불가사의해요. 후와님도 아시는군요^^

poptrash 2011-11-13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술, 많이 마셨어요. 집에서 담근 포도주, 아버지 친구들이 마시던 맥주.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 그래서 결국 이런 어른이 되었는지도...

blanca 2011-11-13 22: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런 어른^^;; 저는 제가 상태가 안 좋은 게 혹시 그 때 술에 너무 취해 뇌에 약간이 손상이 가서가 아닌가 가끔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1-11-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 최근에서야 포도주를 처음 마셔본 적이 있었어요, 이전까지는 포도주가 달달한 포도주스인줄 알았는데,,
마셔보니 아니더군요 ^^;; 포도주는 포도주스가 아니라 포도 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ㅎㅎ

책으로 된 앤의 이야기는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블랑카님의 글을 읽으면서
어렸을 때 TV에서 해주던 만화에서 술 취한 앤이 나오는 에피소드를 본 기억이 나네요.
혹시 <토지>에 이어서 <앤> 시리즈를 읽고 계신가요? ^^



blanca 2011-11-13 22:08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포도주와 너무 늦게 만나셨군요. 그죠, 생각보다 맛없죠! <앤>은 다 읽었답니다. 이제 되도록 시리즈물은 안 읽으려고요. 부담감이 커서요. 중간에 읽다 그만둘 수도 없고. 그러면서 또 <임꺽정> 재미있다는 얘기에 자꾸 마음이 동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11-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주 전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걸어서 세계속으로'에 나왔는데, 서양에서도 <빨간머리 앤>은 여자들이 읽는 소설이라고 알려졌더군요.백인남자관광객이 "남자들은 아무래도 잘 안 읽는 작품이죠.제 아내는 감명 깊게 읽었대요." 하더군요.나는 재밌던데...

blanca 2011-11-13 22:10   좋아요 0 | URL
어, 정말요? 정말 아름다운 섬이라면서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여자들이 읽는 소설 ㅋㅋㅋ 노자님 재미있게 읽으셨어요? 내용이 남자들이 재미있게 읽기는 힘든 요소들이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노자님은 안 읽은 책이 없군요. 정말 박학다식하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11-14 16:18   좋아요 0 | URL
그쪽은 애틀랜틱 캐나다라고 해서 대서양 쪽의 동부 캐나다입니다.전에도 무슨 여행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바다경치도 좋고 산도 아름다워요.특히 캐번디시는 몽고메리 고향이면서 '빨간머리 앤'을 집필한 곳이라 관련시설이 잘 되어 있더군요.'걸어서 세계속으로' 다시 보기 하면 나올 거에요.

20여년 전에 나온 완역본 10권 짜리를 읽었는데 시간 꽤나 잡아먹었죠.

2011-11-13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3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11-13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전 얼마전에 선물받은 포도주를 따서 홀짝 홀짝 마시다가 그만 다 마셔버렸는데, 아..어릴 때 포도주 담아둔것을 마셨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

blanca 2011-11-13 22:13   좋아요 0 | URL
탁님 반갑습니다.^^ 저는 포도주를 한 잔 이상 마시면 머리가 너무 아프더라고요. 어렸을 때 다들 과실주에 취한 경험들이 있군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니 괜히 반갑네요.
 

형. 성. 평. 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이리 저리 뒤척이다 문득 중학교 윤리 선생님의 음성이 들려 화들짝 잠이 깼다.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서글서글했던 여선생님의 특유의 억양이 생생했다. 한 차시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핵심 내용을 뽑아 질문을 만들고 답도 주셨다. 단 하나의 문제였는데도 소위 임팩트가 대단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다 윤리를 잘 했다. 선생님은 더욱더 기분이 좋아지셔서 수업 말미에 이르면 '형. 성. 평. 가'를 부르짖었다. 우리는 이미 답이 주어지는 문제를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대체 몇 번을 봤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티비에서 해 줄 때마다 봤던 것 같다. 그런데 기어코 또 보고 말았다. 일요일 새벽. 너무 늦어서 찰리가 학교에 돌아가는 씬까지는 아쉽게도 보지 못했지만 봐도 봐도 멋진 탱고장면은 제대로 봤다. 삶의 후반부에서 청춘을 동행하는 설정은 진부하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삶과 시간을 조감하게 해 줄 수 있어 대부분 성공한다.  <여인의 향기>라는 영화의 미덕은 관객이 나이들어가며 시점이 고등학생 찰리에게서 알파치노가 연기한 프랭크로 서서히 이동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는 질릴래야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마치 찰리와 프랭크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찰리를 봐도 프랭크를 봐도 가슴이 저릿했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마침내 당도할 시간들. 얼마간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고로 시력을 잃은 퇴역중령 프랭크. 그의 자살 여행에 동행하게 되는 사립고등학생 찰리. 세상은 온전하게 똑같이 놓여 있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나이들어가며 저마다의 프리즘으로 굴절된 바깥을 전부로 인식하며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때로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찰리의 눈에는 아직 수많은 물음표가 있고 프랭크의 눈에는 미처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 삭아서 비늘처럼 벗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손을 잡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형성평가의 답처럼 명쾌하지 못한 수많은 질문을 그대로 인정해 주고 때로 그 질문을 밀어두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이기도 한 것 같다.  

극중 프랭크의 말처럼 인생과는 달리 실수해도 괜찮은 탱고 스텝처럼 너그러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는 프랭크와 함께 탱고를 췄던 여배우 미라 소르비노가 이쁜 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정말 눈이 부시다. 이런 관점의 변화도 나이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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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0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파치노가 화를 내기 전에 그렇게 말하죠. 후와~ㅎㅎ^^

blanca 2011-10-10 13: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무슨 얘기인가 하다 뻥 터졌어요

마녀고양이 2011-10-1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고를 추는 장면, 정말 찡하잖아요......... 미치도록 찡하죠.
그리고 학교에서 변호하는 장면도 멋지구요, 저두 그렇게 늙어갔으면. ^^

blanca 2011-10-11 11:32   좋아요 0 | URL
마고님, 참 이상한 게 어렸을 때 봤을 때는 탱고씬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요전번에 보니까 확 와닿더라고요. 아, 넘 멋져요. 크리스 오도넬도 찾아 보니 가정을 일구고 대가족을 잘 이끌고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그 장면도 넘 인상적이에요.

비로그인 2011-10-1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 선생님 하니, 저는 꽥 스러운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좀 아주 날카로운 칼이 스치는 느낌이 드네요~ 시간이 지나 다시 보는 영화. 꼭 여인의 향기가 아니더라도 왠지 blanca님의 얘기는 다른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날 것 같습니다.

blanca 2011-10-17 10:29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꽥스럽다,고 하니 저도 고등학교 때 윤리샘이 떠올라서 갑자기 웃음이 나네요. ㅋㅋ 요새 자꾸 EBS에서 야심한 시각에 해주는 영화들이 빠져 잠이 모자라 죽겠습니다.^^

감은빛 2011-10-1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오래전에 봤는데도 춤추는 장면만큼은 잊혀지지 않네요.
덕분에 저도 한번 찾아보고 싶어졌어요.

blanca 2011-10-20 09:43   좋아요 0 | URL
저는 볼 때마다 좋더라고요. 전도연의 <인어공주>와 함께 한 세 번씩은 본 것 같습니다.
 

<도가니>를 봤다. 누구는 보고 나면 너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고 추천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다른 누구는 아프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제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
 
   

 

영화는 청각장애인학교에서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폭력과 폭행을 자행했으나 솜방망이 처벌로 유야무야된 실제 사건을 다룬 공지영의 <도가니>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아내와 사별하고 어머니에게 천식으로 고생하는 딸을 맡긴 미술 교사 강인호(공유 분)가 안개로 뒤덮인 무진의 자애학원에 부임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무진, 낯이 익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안개가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삥 둘러선다는 곳. <무진기행> 속의 '나'는 결국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비겁하게 결심한다. 강인호도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일까?  

   

 

어딘가 불편하고 우울한 표정의 아이들.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초임교사에게 아이들은 기대를 갖고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을 찾고 뒤돌아서서는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무기력한 작은 아이들에게 폭언, 폭행, 강간을 일삼는 교장과 교사는 그들의 범죄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지역 사회, 경찰, 검찰, 법원, 교육청과 결탁하여  악의 화신이 된다. 카메라는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의 죄의 대속을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다시 그들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다.

돈과 이해 관계 앞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 선과 도덕이 생존의 문제와 만날 때 인간이 당면하게 되는 딜레마에 대한 시선이 예리하다. 강인호 교사는 가난하다. 게다가 어머니와 아픈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다. 부임할 때 학교 발전기금으로 전세금을 빼서 기탁하는 그의 출발은 이런 미묘한 갈등의 지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이들 재판 문제로 동분서주하는 그의 앞에서 침묵하기를 권하는 노모의 외침은 야속하기도 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어 저릿하다. 세상에 옳고 그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옳은 것만을 하고 살 수 없으니까 그렇다,는 어머니의 절규는 때로 올바르고 좋은 것들을 지키고 사는 삶을 포기해야 하는 생존의 비극성에 닿아 있다. 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다. 

   
  오히려 문제는, 공감 능력 따위는 과감히 내던지고 앞만 보면서 달려가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도모해 나갈 수조차 없는 시스템의 압력 때문에, 우리가 애써 공감을 거부하고 있는 데 있지는 않을까.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수전 손택은 연민이 얼마간 뻔뻔한 감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공감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의 해결을 위한 개입의 지점까지 닿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감'은 행동, 그것도 얼마간의 포기와 용기를 필요로 하기에 어쩌면 상당히 두렵고 위험한 감정이기도 하다. 내부고발자가 되고 그것이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단을 잃을 수도 있음을 담보로 한다면 누구나 갈등없이 정의를 위한 행동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 <도가니>는 이 딜레마를 직시한다. 인두겁을 쓰고는 결코 저지를 수 없는 악행들의 나열과 그것에 정의롭게 대항해 나가는 불가능맨 대신 공감마저 무력화시키는 이 사회의 잔인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 시스템 안에서 선택을 강요당해야 하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상의 모습은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는 자화상이다.  

이 영화는 미완이다. 알랭 드 보통의 얘기는 따라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영화를 봄으로써 우리는 결국 절묘하게 고조된 감정, 슬픔, 흥분에 도달하게 된다. 극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스크린에 투사된 가치에 근거하여 자신의 전존재를 재평가하기로, 그리고 자신의 타락과 성마름을 없애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다음날 저녁만 되면, 그러니까 온종일 이런저런 모임을 가지고 짜증나는 일을 겪은 뒤에는, 우리의 영화적 경험은 이미 망각의 길로 향하게 된다.
-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인터넷은 이 영화로 도가니처럼 들끓고 있다. 경찰의 재수사 결정 소식은 영화를 보고 나와 이 고조된 분노의 감정을 잊기 전에 함께 그것을 공유한 네티즌들의 힘이 모인 결과이기도 하다. 무기력하게 세상은 그렇고 그런 것이다,라고 체념하는 감정이 사실은 가장 위험한 순응이다. 크게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사치스러운 연민 때운이라고 해도 공감과 악에 대한 분노는 언제나 가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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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09-29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랭 드 보통 이 책 홍보하러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던데 님은 이미 읽으셨군요^*^
도가니, 책으로 읽고는 혼자 분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 꼭 봐야 할듯한 의무감.
오늘 신문보니 이 학교 명칭 변경할 계획이라고 하네요. 이런 **놈들.
당장 폐교시키고, 재수사 들어가야죠. 당연히....

blanca 2011-09-29 22:59   좋아요 0 | URL
세실님, 알랭 드 보통이 왔군요. 지금 저 책 읽고 있는 중인데 전작들보다 신랄하고 예리한 맛은 좀 떨어지는 것 같아요. 영화 보다가 미친 사람처럼 '아이 씨' 그러다가 울다가 했네요. 재수사 시작이 어떤 결론을 맺을지 매의 눈을 뜨고 모두들 함께 지켜 보았으면 합니다.

순오기 2011-09-29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티즌의 힘이 발휘돼서 재수사해서 제대로 응징하면 좋겠어요.
날새면 독서회원들과 조조로 도가니 보러갑니다.

blanca 2011-09-29 23:0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독서회원들과 영화 이미 보셨겠어요. 영화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일들도 몇 몇 있어서 성찰의 계기를 가지기도 했어요. 제가 공작가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도 수정된 부분이 있고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봉사'라는 것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서도 생각이 많아졌답니다.

비의딸 2011-09-29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재수사 한다는 경찰의 발표가 오늘 신문에 났더군요. 이번에는 제대로 정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blanca 2011-09-29 23:06   좋아요 0 | URL
비의딸님, 재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단순히 하나의 액션에 그치지 않기를 기원해 봅니다. 식지 않는 도가니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이야 2011-09-29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가니 보셨군요. 영화의 힘이 책보다 크다는 걸 실감합니다.
재수사는 들어갔지만 일사부재리가 어떻게 될지 지켜볼 일이에요.
학교는 이미 폐교했다는데 이건 뭐..ㅠ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고3 큰딸 사줬어요. 보통의 책을 모두 좋아해 읽었거든요. 그래서..
공부하다 쉬면서 읽고있다고 하네요.(기숙사 있다보니^^)
딸 다 읽고 나면 저도 봐야겠어요.

blanca 2011-09-29 23:08   좋아요 0 | URL
아, 공지영씨도 그런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영화의 힘. 아, 보통의 책을 선물해 줄 수 있는 따님이라니. 저도 제 딸이 좀 그렇게 컸으면 좋겠는데^^;; 오늘 '곰 세 마리' 줄창 읽어주느라 힘들었답니다. 감기 걸려 목도 아픈데 말이에요--;;

cyrus 2011-09-29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이 영화를 본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영화를 본 친구들에게
소설을 읽어봤냐고 물어봤는데.. 안 봤다거나 이 영화가 소설 원작인지 모르는 친구도 있었어요 ^^;;
영화 개봉 덕분에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의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조명받게 되어서
다행인거 같습니다.

blanca 2011-09-29 23:09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이런 식의 재조명은 정말 바람직한 것 같아요. 영화의 힘, 문학의 힘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는 것 같아 괜시리 흐뭇해집니다.

비로그인 2011-09-29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뉴스 보고 좀 놀랐어요. 도가니 소식이 연달아 나오던걸요. 이 책 나왔을 때 왜 읽어볼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면, 일단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순수한 예술이 아니라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써내려간 소설이라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없을 것 같은 부담감 때문에요. 영화를 한 번 볼까, 고민하고 있네요.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 아들이 만든 영화 보려고 했는데 ( '')...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이...

blanca 2011-09-29 23:13   좋아요 0 | URL
말없는수다쟁이님, '코쿠리고 언덕에서'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담주에 보려고 하는데요. 민망하긴요. 저도 사실 소설이 나왔다고 했을 때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답니다. 아무래도 영화는 좀더 실감나게 사건을 재현하여 사람들의 직접적인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부터도 그랬으니까요.

stella.K 2011-09-3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의 작가 정신은 높이 사 줄만은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어딘가 모르게 치우친 감이있어
별로 신뢰는 안 가요. 나름 영화 우행시 보고 저건 좀 아닌데 하는 게 있었거든요.
인정주의로 경도되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하잖아요.
이 영화도 그럴 것 같긴한데 하도 들끊으니 한번 보고 싶긴하네요.
어느 날 조조로 몰래 살짝 볼까봐요. 리뷰 잘 봤습니다.^^

blanca 2011-09-30 22:5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영화 우행시 보셨어요? 저는 책만 읽었는데 읽는 동안 감정적으로 많이 동요하고 공감하긴 했지만 지금 와서 사형 제도에 대하여서 공작가의 얘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워낙 극악무도한 범죄들이 많고 특히 아동 상대로 벌어지는 추악한 범죄들은 무기징역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 보시면 좋겠어요. 잘 만든 영화이고 가슴에 호소하는 메시지의 무게가 상당합니다. 저도 크게 내켜서 본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나서는 보기를 잘 했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조로 보시기에는 너무 어둡긴 하네요^^;;
 

 

 

 

구름 한 점이 없어도 구름이 휘핑크림처럼 쌓여 있어도 찬연하다. 우산 밑에서 고개를 떨구어야 했던 숱한 나날들은 거짓말처럼 가버리고 절로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쳐들게 하는 하늘. 어딘가에 가두어 놓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설픈 사진과 조야한 말재간으로 가능할 성싶지 않다.  

고3, 2학기 가을 바람이 스산해지면서 입시의 중압감이 본격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감히 보지 못하고 바람만 느꼈다. 해방을 예감하게 하는 야릇한 전조가 싫지 않았다. 입사해서는 결산과 실적을 예고하는 계절. 어리버리한 신입사원은 실적보다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결산업무가 자신에게 떨어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느라 가을을 놓쳐 버렸다. 첫애를 가진 임산부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산고에 대한 공포와 잦은 요의로 가을밤을 전전반측하며 보내느라 푸른 하늘을 등졌다. 작은 생명체가 젖을 떼고 두 발로 서고 걷고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기까지 하늘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사계절 병풍에 그려져 있는 달, 그리고 거지 법사와 소설속 화자인 '나'의 삶은 평행하게 흐르는 듯하다 결국 겹친다. 가을 병풍, 지금의 '나'로부터 꼭 십년 전, 서른 살 때의 '나'  이미 '나'는 충분히 늙어 있다.  미루야마 겐지는 망설이지 않고 단언해 버린다.

그러나 비쩍 마른 그의 몸은 추억에 가득 차,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행복했던 나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해낸다.-p.61 

봄과 여름에는 가을과 겨울을 상상하지 못하지만 가을에는 겨울의 차가움을 상상할 수 있고 봄과 여름의 따스함과 설익음을 기억해 낼 수 있다.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한 모호함. 나는 지금 유년을 다시 살고 있다. 아이를 먹이는 것도 재우는 것도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큼 힘들지 않다. 아이와 함께 논다는 것이 영 낯설고 어색했다. 부모교육을 받다 보니 나를 놀아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내 안의 항상 심심하고 외로웠던 그 어린 '나'를 다시 아이 앞에 불러내야 할 것 같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 병풍을 두고 이루어지는 <달에 울다>의 '나'의 회고. 여기 나의 회고는 아이를 앞에 두고 이루어진다. 삼십 년 전. 이십 년 전. 십년 전.  

"잘 있어"하고 법사는 중얼거린다.
바람 소리가 마치 칼을 휘두를 때 나는 신음소리 같은 초원을 헤쳐나가며,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잘 있어"를 되풀이한다. 그렇게 그는 '어제'와 헤어져 간다.
-p.80 

가을은 그런 계절. '어제'와 잘 헤어져야 하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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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9-24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하늘은 언제 어떤 사각 프레임에 담겨도 멋져요!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나'를 불러내어 분홍공주와 같이 놀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가을은 조금 외로워도, 쓸쓸해도 좋은 계절이어요!^^

blanca 2011-09-25 20:37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순오기님. 정말 살 맛이 나는 계절이지요. 요 며칠 새 날씨가 정말 너무 좋아요. 야외에 앉아 있으면 살아 있다는 게 참 눈부시게 느껴지는 나날들입니다.

프레이야 2011-09-2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와 잘 헤어져야 하는 계절!
블랑카님의 언어창고엔 찬란한 언어들이 얼마만큼이나 있는걸까요?^^
잘 헤어져야 잘 만날 수 있는 것이겠죠!
어디에 있어도 마음에 가을바람 선선하게 안기는 주말 보내고 싶어요. 블랑카님도^^

blanca 2011-09-25 20:3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는 이 좋은 계절 '감기'님의 왕림의 조짐이 또 보이네요. 호되게 앓는 편이라 걱정입니다. 벌써 두 번째인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은 행복한 주말 마무리하고 계시나요.

oren 2011-09-2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동네 마을도서관에 나와, 나무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가을 바람'을 느껴가며 '커피'를 즐기면서, blanca님의 이 글을 읽고 있답니다. 오늘은 비록 하늘에 구름 한점 없지만 벤치 한켠에서는 어느새 벌써 샛노란 은행잎이 '뚝뚝' 떨어지고 있네요. 가을은 대체로 제겐 '너무 슬픈 계절'인 것 같아 애써 가을의 '좋은 것들'만 보고 느끼려 애쓰는 그런 계절이지만, 우리들 모두에겐 각자 저마다의 '그런' 계절이 또 있겠지요. 어김없이 또 찾아온 그런 가을도 머지않아 또 훌쩍 우리곁을 떠나가고 말겠지요. . . '좋은 가을' 되세요. . .blanca님.

blanca 2011-09-25 20:40   좋아요 0 | URL
oren님 읽기만 해도 얼마나 찬란한 풍경인지. 도서관 벤치에서 커피까지^^ 저는 오렌님 댓글 읽을 때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아, 가을이 은근히 신산하기도 하지요. 겨울이 올 테니까요. 그래도 가장 살아 있다는 것에 즐거움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잘라 2011-09-2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감각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속인다. -괴테

사진과 프로필 글귀가 잘 어울려요. 하늘만큼 사람도 멋있게 보이는 가을,이 좋아요.

blanca 2011-09-25 20:42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저도 모르게 저도 자꾸 감각이 느끼는 것들을 외면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또 겨울 추위에 대한 예감 때문에 좀 움츠려지기도 하고 한 살 더 먹을 일이 아연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정말 근사한 날씨들입니다.

cyrus 2011-09-2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막 해가 질 무렵의 가을 구름도 운치가 있고 멋져요. 그런데 여기 대구는
낮에만 여름인거 같아요. 밤이 되서야 가을 바람이 불어서 선선해요.
그래서 여름이 한순간에 지나간거 같아서 아쉽기도 합니다.

blanca 2011-09-25 20:43   좋아요 0 | URL
아, 그래요? 대구는 아직 그렇군요. 대구 얘기만 하면 괜시리 반가워져요. 아버지 고향도 할머니와의 시간들도 다 대구인지라. 언젠가는 대구를 한번 꼬옥 가서 제 유년 시절들의 추억들을 되짚어 보고 싶어요.

비로그인 2011-09-25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집니다. blanca님! ^^

blanca 2011-09-25 20:43   좋아요 0 | URL
무엇이요? ㅋㅋㅋ 그냥 다 멋진 걸로 알게요, 바람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