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글이면 나도 쓰겠다.'와 대척점에 '나는 죽어도 깨어나도 이런 글은 도저히 못 쓴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다. 그저 작가의 이름값에 기대어 쥐어짠 듯한 에세이나 사소설을 대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는 그 자세는 칭찬할 만하지만 그럴 때 쓰고 읽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작가라는 타이틀은 때로 족쇄가 된다. 작가였다 갑자기 작가가 아닌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냥 써도 그는 책을 출판할 수 있다. 금방 입에 회자된다. 꼭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일정 부분 판매가 담보된다. 이것은 누군가를 어떤 작품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읽는 행위의 환희와 쓰는 일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는 그에 대한 상찬을 하기 위한 도입이다.




하루키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작품 전부를 읽지는 않았고 그의 여성에 대한 묘사에는 반박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소년적 판타지의 반복에 때로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번역의 창을 뚫고 나온 그의 그 간명하고 진솔한 문장은 누구라도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전적으로 복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문장은 탁월하다.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으며 급소를 가격한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의 늪에 빠져 주변부만 맴도는 가식이 없는 것도 좋다. 


<고양이를 버리다>를 처음에 받아보고 솔직히 놀랐다. 책값에 비해 너무 얇은 분량 때문이다. 이건 흡사 어떤 한 책의 몇 챕터 정도를 발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누가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하루키와 돈에 대해 혼자만의 억측으로 고민했다. 하루키가 이런 걸 요구한 걸까? 대체 이 책값은 어떻게 책정된 걸까. 한국 독자가 호구인가 싶었는데 유독 우리 나라에서만 이 책이 비싸게 팔리는 것도 아니라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이 책을 읽기도 전에 이 책을 욕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하루키를 좋아하더라도 책값을 아껴야 하는 나에게 이 책의 분량은 실망을 줬다. 그래서 빨리 읽어버리고 중고서점에 팔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줄을 너무 많이 그어버려서. 그리고 간직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또 하루키가 이 작은 책을 쓰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어떤 것이었는지 절로 수긍이 가서 책값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년시절에 아버지와 함께 어느 여름날 오후 해변가에 암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것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에피소드에서부터 확장된다. 그러나 하루키가  처음부터 고양이를 버리는 가혹한 처사로 아버지에 대한 선입견을 만드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연유에서건 집으로 돌아와 버린 그 고양이를 발견하고 안도하는 그의 모습에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닿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무려 세 번이나 징집된다. 아슬아슬하게 난징 함락전의 가해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루키는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봐 우려하며 아버지의 과거의 실상을 아는 것에 부담을 느낀 모양이다. 그러한 마음을 표현한 솔직함이 과연 하루키답다. 유명 작가가 아니어도 어느 누가 일흔이 넘어 자신의 아버지가 역사적 살육전에 가담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공론화할 수 있을까.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부모를 미화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연령대다. 자칫 사실로 밝혀질 경우 자신의 공적이나 명예에도 해가 될까 두려울 수 있다. 그런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의 공명이 크다. 마치 소년 같다. 자신이 모르는 아버지의 실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유보적인 표현도 와닿는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쉽게 합리화하지 않는다. 언제나 조심스럽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분명히 명백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단호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일본의 현정권은 강경 우익이다. 일본의 문화는 나서서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고발하거나 고백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따를 각오해야 한다. 


게다가 자신이 소설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 거의 몇십 년간을 아버지와 절연 상태로 지내왔다는 고백은 사실 충격적이다. 그 둘의 화해는 육십대의 아들과 구십대의 아버지로 만나 이루어진다. 이것 또한 동양적 효문화 정서에서 쉽지 않은 발언이다. 구구절절한 자기 변호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 안에서 바라봤던 목표가 가족과의 화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다는 솔직한 얘기가 전부다. 그러나 이 책의 전반에는 하루키가 아버지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난 우연한 존재라는 그 자각이 곳곳에 나타난다. 책을 좋아하고 하이쿠를 지었던 청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라의 부름을 받아 그 지옥 같은 곳으로 차출되었을 때 가졌을 감정들과 느낌들, 모든 아슬아슬한 우연으로 남녀가 만나 마침내 한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신비로운 과정, 그 아이가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어 다시 이 과정을 찬찬히 복기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길이 군데군데 멈추어 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구태여 많은 문장들 대신 이 수많은 감정, 깨달음, 생각을 수없이 조탁하여 정렬한 밀도 높은 그의 문장들로 충분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집단적 역사 의식 강요 아래 개개인의 고유성과 그 의미를 잊지 않아야 함을,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무의미와 동급은 아님을 하루키의 글로 읽어 통쾌했다. 그것은 '고양이를 버린' 그 여름날의 아버지로부터 잊혀진 잃어버린 아버지의 한 생애의 역사를 온전하게 복원해 내어 한 인간의 삶의 의미를 창출해 낸 하루키만의 저력에서 나온 것이다. 숱하게 죽어간 전장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당시 자신들의 적이었던 중국의 병사들을 위해서 불단에서 독경을 했던 그의 아버지를 계승하는 하루키의 윤리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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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28 1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저는 이 책이 중고샵에 나오면 사 볼까해요.ㅎ
정말 줄 너무 많이 치면 중고샵에선 안 받아 주는 것 같더군요.
헌책방에선 받아주는지 모르겠어요. 헌책방은 이용해 본 적이 없어서...
그냥 간직했다 폐지로 나가는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ㅠ

하루키는 정말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가 독자와 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부정할래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blanca 2020-10-28 20:16   좋아요 2 | URL
줄을 긋는 순간 그 책은 소장각입니다. ^^;; 이게 또 스트레스인게 저는 초반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책은 소장이다, 이러며 줄을 북북 그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이 책은 팔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어서요. 이래저래 책장만 미어터집니다.

하루키는 정말 작가인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scott 2020-10-28 2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편집했던 출판 관계자들이 하루키가 책으로 출간하기전에 오래전에 발행되었던 잡지 신문 기사들까지 꼼꼼하게 체크해서 아버지에 군경력상황을 조회하고 확인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을정도로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뒷받침할 증거를 집요할정도로 수집했다고 하네요 마지막 퇴고전까지 여러번 확인과 수정을 해서 편집자들이 백여페이지가 안되는 에세이여서 금방 출간하게 될줄 알았는데 하루키에 철저한 원고 확인과 수정에 두손발을 들었을정도로 하루키는 자신에 글을 세상밖으로 내보내기전에 어떤 허영이나 자만 허세가 없다는 사실을 단단히 못박아두었다고 하네요.
엄청난 프로정신 (작가로서)으로 무장해서 견고하게 흔들리지 않게 여태껏 최정상에 작가로 새책 출간할때마다 일본열도 전 서점을 하루키 책으로 도배시킨다는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글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는 비단 지금만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이 만연하는 시대는 결과적으로 더 참혹했다. 19세기 런던에 실재했던 '그럽 스트리트'는 생계를 위해 통속적인 글을 마구 써냈던 작가들이 모여 살았던 거리였다. 이는 점차 '저급 문학의 대명사'처럼 회자되었다. 조지 기싱의 <뉴 스럽 스트리트>는 이 거리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비참한 청춘들의 사실적인 이야기다.






이야기는 직업적 문필가들 재스퍼, 리아든, 비펜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중 리아든은 유일한 기혼자로서 율 가의 에이미라는 자신보다 상류층의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지만 점차 직업적인 쇠락의 길을 걸으며 아내와 불화하다 별거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쩌면 문학적 성취의 측면에서 보면 시류에 편승한 평론, 비평글로 약삭빠르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재스퍼와 대중의 호응이 없는 소설에 매달리는 비펜보다는 꽤 호평을 받은 리아든은 상대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아든은 점차 직업적 매너리즘과 창작열의 고갈로 인한 빈곤한 현실로 지쳐간다. 그는 가난이 얼마나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지를 처절하게 실감하며 절망의 나락에 빠진다. 이상주의와 현실의 간극에서 리아든과 비펜이 결국 패배하는 모습은 가슴이 저릿하다.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이거예요." 그가 계속했다. 

"한 명은 '내 삶을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먹고살까?를 고민하죠."


극한의 빈곤은 인간의 내면에서 때로 '괴물'적인 면을 끄집어 낸다. 당장 내일의 밥값과 집세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너그럽기란 어렵다. 이 사실을 알고도 문학적인 이상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던 리아든의 이른 죽음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기꺼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연인을 배신하는 재스퍼의 안온한 결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작가 조지 기싱의 문단과 문학에 대한 시선이 투영되어 있는 부분이다. 실제 그는 글을 쓰며 사는 삶의 극단적인 경제적 부침을 경험한 작가다. 밥을 굶었고 자신과 적절한 수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 안정된 가정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은 그를 내도록 괴롭혔고 이러한 자괴감은 여러번 리아든과 재스퍼, 비펜의 발언으로 표현된다. 마치 어처구니 없는 농담처럼 그려진 이 젊은이들의 아픈 결말에는 작가 자신의 이러한 세계에 대한 조소가 반영된 것 같다.  몇 번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의 시구 "우리는 꿈을 이루는 성분, 우리의 짧디짧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으니..."에서의 '꿈'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헛된 망상일 수도 있고 절대 현실화될 수 없는 이상주의적인 미래로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뉴 그럽 스트리트'는 여전히 현존한다. 비단 글을 쓰는 일만이 아니라 현실과 떨어져 꿈을 꾸는 일은 여전히 여러 생존과 관련된 문제와 상충한다. 우리는 여전히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권력을 가지는 직업을 선호하고 추구하고 돈이 안 되고 성공 가능성이 없고 시장에 팔리지 않는 일들을 폄하하고 그러한 일들을 추구할까 봐 아이들을 단속한다.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간극의 골짜기의 외피만을 바꿀 뿐이다. 조지 기싱의 결말의 여운이 유달리 무겁고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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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17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나왔군요. 올해 2월에 나왔는데 그놈의 코로나 땜에 묻힌 것 같습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작가가 나오는 건 좀 거시기한데
아예 이렇게 작가가 작가를 다뤄준 소설은 관심이 갑니다.
며칠 전 부촌에 사는 사람들의 부동산 탈법을 다루는 뉴스에 그들의 직업이 언급되기도 했는데
소설가도 있었다는 게 새삼 놀랍더군요.
소설가는 뭐 부자되면 안 되는 건 아니겠지만 모르긴 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막강 필력을 가진 사람이겠죠?
드라마에서야 작가를 부자로 그려놓기도 하던데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편 꽤 멋있고 낭만적이란 느낌도 듭니다.
이 책 읽으면 좀 마음이 무거울 것도 같은데 그래도 언제고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blanca 2020-10-18 09:18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내내 우울했어요. 등장인물들한테 너무 이입되어 좀 힘들 정도로요. 결말도 너무 우울하고. 무언가 비웃는 것 같고. 읽고 쓰는 일을 좋아하는 게 무언가 너무 허무맹랑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그것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게 더 우울해지고요. 조지 기싱의 다른 책도 좀 읽어봐야겠어요.
 

김금희 작가를 좋아한다. 드물게 문장도 서사의 힘도 두루 갖춘 작가라고 생각하고 과거를 환기하며 현실에 발붙이는 균형감도 잃지 않는 모습이 좋다. 서정적인데 또 현실에 대한 직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아주 달변가라는 점. 글을 쓰듯 말도 하는 작가는 처음 본 듯하다. 자신의 소설을 직접 낭독한 오디오북 <복자에게>도 아주 좋다. 



















대상작이 김금희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다. 제목에서 왠지 스피아민트 껌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 제목에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아 편집자가 제목을 붙여주는 작가가 있는 반면 김금희 작가는 제목을 먼저 정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제목에 큰 의미를 둔다고. 엄마의 죽음 뒤에 거주지를 옮기려고 결심한 중년의 화자가 우연히 받은 전화로 회상하게 되는 학부 시절의 종가의 족보 정리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층적이다. 화자는 그 종가의 손녀딸과 '기오성'과 묘한 기류가 흐르는 일종의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이야기다. 노교수의 권위, 보수적인 계층 의식, 또 그것에 대한 소극적인 반발, "시간이 지나 어떤 마음들은 닳아버렸는지도 몰랐다."고 회고하는 마음과 "와 우리 정말 미쳤다!"고 외칠 수 있었던 그 여름의 "페퍼로니에서 왔어."로 묶여 있던 마음에 대한 복기이기도 하다. 저마다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었더라도 그 어떤 공통의 청춘의 무모한 미숙한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그 시간이 지나가며 남기는 삶의 궤적에 대한 어떤 담담한 수긍 같은 것이 김금희식으로 아련하게 그려져 있다. 변하고 닳고 사라지지만 그러한 것들이 그려나가는 생의 행로를 돌아볼 때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회한, 그리움이 겹친다. '나 좋은 사람 아닌데요'로 선언하는 작가노트와 불문학자 김화영의 리뷰가 한 세트처럼 되어 있어 완결되는 느낌. 


은희경의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인스타로 비춰진 화려한 뉴요커 친구의 삶에 실제 방문함으로써 느끼는 서로의 간극과 충돌이 어떻게 화해의 지점을 만드는지에 대한 교차 시점의 이야기다. 저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실제로 사는 삶의 불일치를 불편하게 접촉해나감으로써 결국 어린 시절의 소통의 지점을 다시 회복하는 이야기는 사람간의 관계의 그 미묘하게 어긋나고 침범하고 불편을 느끼는 경계를 기민하게 포착해서 드러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소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갖게 한다. 


어머니의 이혼으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모녀의 화해의 여행기를 그린 <실버들 천만사>는 진부한 소재 같지만 권여선 특유의 예민한 촉수가 만들어 낸 이야기의 울림이 역시 크다. 언뜻 작가 자신이 고백한 바와 같이 "민틋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래서 더 공감의 지대가 넓다. 언제나 짓밟히고 억압 당하며 가족 사이의 질척한 관계에서 뒤안길로 밀려나는 여성들의 서사를 복원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빛났다. 제목이 아름다워 찾아보니 김소월 시인의 <실버들>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정한아의 <바다와 캥거루와 낙원의 밤>은 다소 서걱거리는 이야기다. 이혼하고 십대 딸을 데리고 친정 아버지의 건물 관리인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된 '나'는 말기암으로 투병 중인 노파와 월세가 밀린 아이 엄마를 퇴거시키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딸은 아버지가 있는 호주로 가겠다고 조른다. 저마다의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이 결국 마지막에 가서 어떻게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지의 반전 같은 결론은 다소 섬뜩하기도 하고 씁쓸하고 안타깝다. 


여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남성들은 대체로 흐릿하거나 모호하거나 폭력적이다. 그것에는 분명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제대로 정의롭게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 진실의 중핵이 내재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수상작에 남성의 시각이 없다는 것 또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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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으로 죽음을 앞둔 은사와 삶, 죽음, 문화, 노화, 회한 등 우리가 살며 언제나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후순위로 미뤄놓고 미처 답하지 못하였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함께 성찰하고 해답을 찾아 나가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은 한번 읽고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이자 제자였던 미치 앨봄과 비슷한 연령대에 읽었을 때에는 솔직히 지나치게 원론적인 이야기의 반복이 아닌가 싶었으니까. 그로부터 십 년 정도가 흐른 뒤에 다시 원서로 접하니 감상이 완전 달라졌다. 


















이번에 읽엇을 때에는 미치가 실제 모리 교수와 대학 시절 나누었던 교감을 추억한 장들의 여운이 길었다. 서로를 코치와 선수라고 친근하게 호명하며 함께 논문을 쓰고 청춘의 고민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조언해 주는 따뜻한 교수의 모습은 미치 앨봄이 이런 스승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이 시간 이후 십수 년이 지나 돌아온 탕자처럼 이제는 노쇠해진 노교수 옆자리에 서 있는 중년의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사랑과 존경은 무에서 갑작스럽게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읽었을 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모리의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감동적이었지만 그 둘이 나눈 추억의 한 장이 유독 찬란하게 빛났다. 결국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노교수의 아포리즘은 그의 영정 앞에 이 책을 바친 제자와 몸소 경험한 것이라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늘이 마치 그날인 것처럼"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마지막을 의식하며 삶을 산다면 그 삶은 더욱 충만하고 절절한 것으로 공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무엇보다 타인과의 깊은 유대와 사랑이 있다. 
















제목이 언뜻 진부하게 들리지만 심리학자 켈리 맥고니걸의 책들은 언제나 제목보다 몇 배는 강력하고 심오한 메시지를 명쾌하게 전해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혹은 삶의 상실을 겪으며 필연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스트레스 상황이 이후에 우리의 심신에 미치는 영향이 오히려 긍정적일 수 있다는 메시지가 여러 과학적 논거에 의해 제시된다. 긴장감, 심장 박동의 증가 같은 사전 스트레스 반응이 오히려 주어지는 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준비 태세가 되고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각종 재난 후에 오히려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조망하는 데에 변곡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기억할 만하다. 스트레스를 거의 경험하지 않는 사람의 삶은 행복감과 충만감을 느낄 확률도 그만큼 낮다고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온갖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일들이 결론적으로는 우리의 삶 그 자체를 사는 행위 자체를 더욱 더 유의미한 것으로 확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고립되기보다는 타인들과 더욱 연결되고 그들의 도움과 지지를 기꺼이 받으려는 자세와 역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봉사의 자세가 병행되어야 더욱 효과적으로 스트레스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상황이 힘들고 암울할수록 오히려 더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고 개방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결되어야 한다.  "스트레스를 통해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가?"라는 저자의 질문에 대한 여러 실용적인 해법이 예시와 더불어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 있어 추천한다. 


어떤 때에는 가장 진부해 보이는 것이 가장 명쾌한 답이 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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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는 대단히 논쟁적인 작가다. 생전에 천황의 복권과 자위대의 독립국 군대에 걸맞은 지위를 부여하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으며 이 명분을 외치며 공개적으로 할복 자살했다. 노벨 문학상에도 회자되었던 천재적인 작가의 입지와는 별개로 이 부분은 일본 국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촉발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이 작가에게 가지는 불편한 감정과 불온한 인상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평에는 언제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의견이 따라온다. 전쟁을 미화하고 그 전장에서 전사하는 젊은이들의 충절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것이라 불편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가지는 그 정묘한 세계의 깊이와 넓이는 경이롭다. 절로 감탄하게 되는 치열한 묘사들의 문장, 그 문장에 설복하지 않는 서사의 강력한 힘,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이야기의 힘과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저력이 놀랍다. 



















아름다우면서 깊이가 있으면서 편협하지 않으며  더불어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 의지와 숙명의 대결, 정념과 이성의 대립, 역사와 개인의 긴장, 로맨스와 철학, 죽음과 삶의 의미, 이 모든 것이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되어 있는 이야기다. 메이지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된 1912년대를 배경으로  마쓰가에 후작가의 후계자 기요아키가 황실의 정혼자 사토코와 사랑에 빠지며 격랑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다. 당시의 최상류층의 습속을 엿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미시마 유키오는 기요아키의 청춘이 지나는 자기 본위의 시선과 그것의 배경을 균형감 있게 비중을 조절하며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감각적인 묘사의 문장들은 더없이 농염하고 농밀하다. 기요아키의 절친한 친구 혼다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친구와는 달리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친구가 뛰어드는 정사의 관찰자이자 조력자가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혼다는 주인공의 주변인이 아니라 주인공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할 정도로 시종일관 <봄눈>의 사고의 주류적 흐름을 담당한다. 특히 불교적 세계관에 대한 천착은 깊은 복선이 된다. 실제 미시마 유키오가 죽기 전 탈고하여 완결한 '풍요의 바다' 연작 중 <봄눈>은 1권에 해당한다. 죽음과 환생에 대한 이야기가 따르게 된다고 해서 기대가 크다. 


그는 바다의 조수와 기나긴 시간의 이행, 그리고 자신도 머지않아 늙으리라는 생각에 돌연 숨이 막혔다. 노년의 지혜 따위는 이제껏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 어떻게 하면 아직 젊을 때 죽을 수 있을까, 그것도 되도록 괴롭지 않게, 탁자 위해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둔 화려한 비단 기모노가 어느 틈에 어두운 바닥으로 흘러 떨어지는 것 같은, 그처럼 우아한 죽음.

-미시마 유키오 <봄눈>


마치 미시마 유키오 본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투영된 듯한 문장이다. 그는 사십대에 자살했다. '우아한 죽음'이라는 대목에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의 지극한 탐미주의가 스며든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기요아키와 사토코의 사랑이 해피엔딩일 리가 없다. 그 처연한 결말의 증인으로서 혼다는 홀로 남는다. 혼다는 그 자신은 상처받지 않으며 친구 기요아키를 통해 청춘의 그 무모한 찰나적 열정의 간접 체험자가 된다. 살아남아 시대에 참여하는 그의 이후가 궁금하다. 유한한 인간이 찰나 같은 삶을 통해 억겁의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마력에 절로 빨려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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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09-26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에 목격자가 된 혼다 라는 인물에 더 집중하면서 읽었네요.
작가가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느낀 모든것을 다 담았다는 말 거짓이 아니라는건
해외에서 소세키 보다 더 대단한 작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이책이 말해주는것 같아요.
올해 안에 2부 출간 안될것 같죠
안나 카레니나나 전쟁과 평화 같이 한꺼번에 4부작을 출간해주지 ㅜ.ㅜ

blanca 2020-09-27 09:33   좋아요 1 | URL
스캇님 덕분에 동네 서점 갔다 냉큼 집어 구입하게 된 거예요. 정말 경이로운 작품이었어요. 그냥 한꺼번에 4권 주욱 출시하면 안 되나요? 저 같은 기억력으로는 흑 2권 나올 때쯤 1권 내용 기억 못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래요. 민음사 번역으로 읽고 있는데 뭐 이건, 기다리다 목 빠지겠어요. 관계자분 좀 읽어주시기를. 전권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