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건축학도가 칠십 대의 노장 건축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보낸 한 때가 어떤 식으로 그의 삶에 각인되는지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절창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풍광, 귓가에 들리는 듯한 소리의 감각에 대한 표현들, 시간의 경과 속에 변전하는 것들에 대한 천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땅에 건물을 짓는 행위에 대한 심오한 탐구는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단숨에 흡입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시종일관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대한 오마주가 투영되어 있다. 특히나 라이트가 노년에 만든 일종의 젊은 건축도들의 도제 시스템의 장소인 '탤리에신'은  이야기의 배경인 건축 사무소의 영감을 제공해 주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시스템, 노건축가의 카리스마로 운영되는 시스템, 실현되지 못한 설계들, 그럼에도 그곳에 있었던 청춘들이 계승한 스승의 미완성의 꿈들. 간토 대지진을 견뎌낸 라이트의 제국호텔에 대한 이야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자연스럽게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진혼곡이 된다.

















라이트는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할 정도로 세대와 장소를 넘나드는 유명한 건축가다. 그가 생의 후반에 건축한 별장 '낙수장'과 '구겐하임 미술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차를 넘어선 영감과 경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의 성취와는 별개로 그의 사적인 삶에는 많은 논란의 지점이 있다. 아버지로서 무책임했고 남편으로서 불성실했으며 사적 개인으로서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약속을 어겼고 거짓말을 남발했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고객의 아내를 가로채고 산적한 문제들에 무책임하게 도피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러한 일들을 수습하고 여전히 속아주는 무리들이 그의 성취들을 가능케 한 역설은 어느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은 처절한 비극과 배신극과 불굴의 의지와 무모한 낭만적 열정이 결합된 막장 드라마와 위대한 성취가 혼재된 복합적인 융합체다. 그래서 그의 삶을 그의 성취와 함께 이야기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칭찬할 일도 비난할 일도 침묵할 일도 폭로해야 할 일도 많은 인생이다.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건축 비평가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다룬 것은 이 균형의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해 낸 저자에 대한 맞춤한 경의라고 생각한다. 평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이 쓰는 대상에 대한 애정 없이는 결코 제대로 완성해낼 수 없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지만 그의 공과를 치우침 없이 평가하고 존경하지만 비판 받아야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 꼼꼼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자의 저력이 놀랍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다. 하나는 그가 지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실제로 산 것이다. 

-에이다 루이즈 헉스터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20세기 건축의 연금술사>


헉스터블의 언명은 머리말에 있다. 그녀는 '두 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는 이 역사적 건축가가 자신의 삶을 이미 자신이 남기고 싶었던 그래서 창조해 냈던 또 다른 삶으로 표현했던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자서전을 썼다. 그리고 이 자서전은 실체적 진실이라기보다는 라이트가 가공한 진실로 윤색해 낸 삶이다. 그러나 그 거짓은 저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라이트는 이단아였고 독불장군이었고 아웃사이더였고 반역자였다. 스스로를 '위대한 건축가'라 칭하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그의 일종의 제자 양성 도제 시스템이었던 펠로십조차 거대한 사기극이자 싼값에 젊은 건축학도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 그러한 일로 그를 고소한 이들도 있었다. 출생 연도부터 출신 학교 등 그가 스스로 설명한 많은 것들의 진실성이 의심 받았다. 금전에 무책임해서 수시로 돈을 빌리고 안 갚았고 공사 대금은 언제나 예상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으며 현장을 자주 비웠다. 그의 건축물 또한 무너지기도 했고 빗물이 새고 여러 하자를 드러냈다. 이러한 많은 결점들이 그에게 치명적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의아할 정도다. 그럼에도 그의 건축물들은 여느 다른 동시대의 동료들의 그것들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결정적인, 선도적인 탁월한 점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가 만들어 낸 것들을 도저히 모방해 낼 수 없었다. 그의 설계는 반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는 것들도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이 딜레마를 헉스터블은 정확히 지적한다. "예술에 있어서는 위대하지만 태도에 있어서는 왜소했다."는 그녀의 평은 함축적이다. 


그가 조강치처를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 여인과 함께 할 보금자리로 설계한 '탤리에신'에서의 비극은 오래도록 뇌리에 박힐 정도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에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은 무참하게 살해 당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삶의 비극 앞에서도 라이트는 일어난다. 그곳이 몇 번이고 화재에 전소되어도 라이트는 없는 돈을 끌어들여 재건한다. 심지어 육십이 훌쩍 넘어 남들은 은퇴할 연령에 이르러서도 그는 가장 정력적으로 일에 뛰어들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제자 양성 시스템을 자급자족 공동체로 만들어 낸다. 그의 위대한 성취는 이러한 생의 후반기에 이루어진다. 이 대책없는 몽상가의 투지와 무모함은 그가 이루어 낸 예술적 성취가 빚진 대목이다. "완벽함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헉스타블의 말은 라이트를 가장 잘 집약해서 표현한 문구다. 그는 완벽해지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천재성을 발현할 수 있었다는 역설의 지점에 우뚝 선 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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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갑론을박이 있어왔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마존만 봐도 거의 실물의 책에 가깝게 구현했다는 평을 듣고 심지어 절판된 종이책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킨들조차 종이책 시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실시간으로 클릭 한번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고 자리도 차지하지 않고 심지어 물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이북이 있음에도 무겁고 번거로운 종이책이 여전히 매대에 놓여있는 이유가 뭘까.


킨들과 카르타가 있다. 원서야 배송료나 배송 기간을 생각하면 킨들이 비교우위다. 킨들은 새로운 세대를 계속 시도하며 종이책의 장점과 단점을 골고루 분석해 종이책과 전자책의 접점의 지대에서 완벽체에 가깝게 구현해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다. 터치감도 시각의 피로도 개선도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설명하기 힘든 이물감, 실재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느낌은 여전하다. 마음대로 줄치고 긋고 메모할 수 없다. 물론 하이라이트, 메모 기능이 있지만 한 박자씩 미끄러진다. 내가 읽은 책은 전자책장에 있지만 정말 제대로 읽었다,는 느낌이 없다. 책의 실물이 없이 활자는 내려앉지 않는다. 


거의 몇 개월만이었을까. 한참만에 꺼낸 카르타는 'NO POWER'라며 울어댄다. 아무리 충전해도 요지부동이다. 인터넷에서 온갖 노하우를 섭렵하여 실험해본다. 재부팅을 해보려 끝이 뾰족한 드라이버로 미친듯이 리셋 버튼을 뚫어버릴 태세로 찔러도 보고 아예 그 상태에서 충전을 해서 효과를 봤다는 사례에 드라이버를 고정시키고 충전도 해보다 무응답에 던져버렸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책장에 앉은 먼지를 보니 나는 여전히 책의 실물을 줄여야겠기에 다시 도전한다. 드라이버로 이미 만신창이가 됐을 리셋 버튼을 강박적으로 찔러댄다. 여전히 부팅조차 안 된다. 마음을 비우고 서비스 센터에 보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상한 오기가 발동해 아예 셀프로 보드를 갈아볼까 하는 마음까지 들려는 찰나 다시 검색을 해보니 충전 케이블을 교체해 보라는 조언에 솔깃한다. 다시 찔러대기 시작하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읽었던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의 표지가 반갑게 나타난다. 오기로 고,쳤,다.


와, 어쩔 수 없이 오늘 주문하려 했던 책들은 조금 참고 전자책을 주문해야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실물의 책들을 영접하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고장나면 꺼지면 읽을 수 없는 전자책들에 대한 비호감은 여전하지만 책을 이고 지고 살지 않으려면 전자책과 친해져야 한다. 이게 사실은 다 상호대차까지 신청해서 한참 걸어 빌려온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의 너무나 낡은 책 상태, 불친절한 소설 도입부 때문이다. 에밀 졸라로 실패해 본 경험은 없는데 도저히 다 못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에밀 졸라가 여성을 묘사하고 자신의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방식이 거슬린다. 그 시대상을 핍진성 있게 드러낸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작가가 여성에게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시선이 때로 필요 이상으로 거칠고 폭력적이다. 물론 편견이나 의도적 무시, 성적 상품화가 에밀 졸라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에밀 졸라는 비겁하지 않은 작가이지만 섬뜩한 면이 있다. 여성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가 노출될 때가 있다. 너무 잘 알아서일까, 그는 절망을 서슴지 않고 나는 그 어두움이 때로 참 싫다.


















그래서 빌려온 책을 읽지 않게 됨으로써 새로운 책을 준비해야 하고. 읽고 싶은 책들은 대기 상태이고. 다 살 수는 없고. 그런 상태다. 이북 리더기를 자가 수리했으니 전자책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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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르타ㅠㅠ 읽지도 않으면서 생각날 때마다 충전만 해놓는 상태-_- 왜 샀나 모르겠어요 이 욕심ㅠㅠ 아무리 애써봐도 전자책과 친해질수는 없겠는데 이미 한참 과포화상태인 책장을 보면 한숨만=_=;;;

blanca 2020-01-19 16:29   좋아요 0 | URL
달밤님, 그래도 잘 관리하시네요. 저는 아예 방치하다 아예 못 쓰는 줄 알았답니다. 전자책보다 실물책이 훠얼씬 좋은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리 목록이 있다손 치더라도 딱 어떤 페이지을 찾아 읽는 그 느낌도 없고, 되팔 수도 없고. 저는 두 번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은 전자책으로 읽으려 하는데 전자책으로 읽어버린 책이 너무 좋은 경우 초난감입니다. 여하튼 책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좀 덜해지면 좋은데 그게 어려우니 말이에요.
 

여섯 살 때부터 열한 살까지 피아노를 배웠다. 정확히 체르니 50번의 1번까지 마쳤다. 집안이 넉넉해서도 재능이 넘쳐서도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본인이 피아노를 배우고 자유롭게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과 열정이 빚어낸 우연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때로 믿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공부하라고 닦달하던 엄마의 모습이 아닌 피아노 연습하라고 잔소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학년 때 그만둔 피아노로 참 길게도 덕을 봤다. 중학교 때 아이들 앞에서 한창 인기였던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의 영화 주제가를 연주했던 기억, 고등학교 때 기악 시험 합주에서 굳은 손가락으로 엉망으로 친 피아노 때문에 음악 선생님께 신 나게 야단맞고 다시 연습해 제대로 완주했을 때 받은 칭찬, 둘째를 가지기 전 동네 아이들과 함께 다닌 피아노 학원. 


잠시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 한 연주로 마치 재능있는 아이인 것처럼 착시 효과를 주던 시절에도 나는 내가 열정도 소질도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게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바흐를 치면서부터다. 바흐는 정말 그렇게 행복한 대가족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서 빚에 시달리고 요절한 모차르트보다 가혹했다. 왼족 새끼 손가락까지 오른손 엄지 손가락의 강도와 활용을 요구하다니. '바흐인벤션'은 나를 결국 피아노앞에서 몰아냈다. 한 마디로 양손을 충분히 흠뻑 사용하기를 바라는 그 기대치를 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왼손은 왼손다웠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그러한 평범성은 당연히 제약 요인이었다. 진지하게 피아노를 그만 치고 싶다는 나의 요청에 응한 엄마의 마음을 지금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음을 알고 체념했던 걸까. 엄마가 그렇게나 염원했던 음악가에 대한 열망은 아무도 실현시켜주지 못했다. 지금도 엄마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 로이드는 그러한 평범했던 나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다. 피아노를 시작한 나이는 나보다 많았지만 무려 13년간 피아노를 배웠고 고등학교 조회 때는 학교 조회에서 대표로 반주를 했고 절대 음감을 가졌다. 고등학교 졸업 20주년 동창회에서 많은 이들이 그녀가 피아노를 여전히 칠지 궁금해할 정도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유망한 전망을 지녔던 소녀였다. 이 책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피아노 연주자가 되지 않은 여자의 피아노에 얽힌 일종의 애증의 연대기를 손녀와 비슷하게 음악적 재능을 지녔던 할머니 앨리스의 삶과 교차시키며 짚어가고 있다. 여성이 음악, 특히 피아노 연주에 소질과 재능을 보여도 남자들과는 달리 전문 음악가로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구조적 한계, 또한 클래식 연주 위주로 형성된 음악계에서 즉흥연주나 재주에 관심을 가질 때 그것이 일종의 일탈로 간주되는 경직된 시선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 많았던 '피아노 앞의 여자들'이 피아노 앞을 떠나게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방증이다.


피아노를 매개로 버지니아 로이드도 할머니 앨리스도 인생에서 가장 큰 상실의 시차를 공유한다. 앨리스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결국 장차 버지니아를 낳게 될 버지니아의 아버지를 입양함으로써 치유하고 버지니아는 양지에 내어놓을 수 없었던 즉흥연주에 대한 열망을 재즈 피아니스가 됨으로써 실현한다. 결국 할머니 앨리스는 손녀인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를 얻게 됨으로써 자신의 고향에 두고 온 음악에 대한 애정을 실현하게 되는 셈이다. 


피아노는 그녀의 정체성이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숱하게 울며불며 매달렸던 그 고투의 시간들이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굳는다. 한 달만 피아노를 치지 않아도 손가락은 내가 연주하고 싶은 선율을 어색하게 튕겨낸다. 그래도 여전히 쇼팽의 에튀드 중 '나비'를 연주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등뒤에서 속도가 빨라지지 않나 나를 감시하는 선생님도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야단치는 엄마도 아닌 나 홀로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연습으로 기계적인 타건이 아닌 쇼팽이 원했던 바로 그 느낌, 그 연결에 가까이 가 닿는 느낌으로. 그게 나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 속에서 피아노는 여전히 패배감으로 기억되는 말줄임표이므로 무언가 제대로 된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낭만적인 믿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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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나. 2년 가까이 여러 가지 의도에서 해 온 채식이 심각한 빈혈로 중지되었다. 완전 채식도 아니었겄만 고기를 피하려는 나의 마음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오랜만에 세상에서 이런 기쁨이 있었나, 싶게 열중했던 프랑스 자수는 바늘에 찔린 상처가 지속적으로 염증을 일으켜 포기해야 했다. 바늘땀 하나는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의 시간과 인내가 모여 완성되는 그림이 주는 감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바늘에 찔리지 않고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종종 습진이 생기는 손가락에 바늘이 들어가면 사소하지 않은 염증이 생긴다. 그것을 또 각오할 자신이 없다. 항생제를 먹고 손가락에 주사를 맞는 일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고통스러웠다. 


아이가 큰다는 것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몸도 마음도 서서히 분리해 가며 아이를 기꺼이 세상에 내어 놓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사춘기가 오고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혹은 핸드폰과 함께 하는 기회를 더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참 씁쓸하다. 나의 열네 살을 생각해본다. 그냥 지켜보고 크게 잔소리 하지 않은 엄마 마음도 헤아려본다. 나는 나 같은 아이는 솔직히 못 키울 것 같다. ㅋ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는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사춘기를 보냈던 것처럼 아이를 붙잡고 훈계를 한다. 정말 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10년쯤 뒤의 내가 와서 현재의 나에게 방향 지시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넌 지금 이러면 안 돼!, 이 길로 가, 저 사람과 시간을 더 보내.

















문학동네 북클럽에서 보내온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강희영의 <최단경로>를 읽었다.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시점이 교차하는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라디오 피디 경력과 사이언스 커뮤니케이션 전공의 이력이 투영되어 신선하다. 상실과 이별이 남긴 어떤 윤리적 책임에 대한 상기는 그것을 방기한 한 남자와 그의 후임자로서 그의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낳는다. 이야기의 속도감 있는 전개, 빅데이터 세계에서의 진부하지 않은 여러 신기술과 신조어의 순발력 있는 재치로 굉장히 탄력적인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아이를 키우고 잃는다는 그 처절한 상실의 서사의 깊이와 호소력에서는 전통적인 글쓰기의 해법이 담아낼 수 있는 스펙트럼을 포용하지 못한 면이 있어 아쉬웠다. 


요즘의 이야기들은 영화나 드라마의 시놉시스 같은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모두가 활자의 때로 지루하고 해독하기 힘든 심리적 묘사보다는 화면에서의 동적인 움직임에 탐닉하는 시대에 그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이야기들만 담아낼 수 있는 그 무엇이 때로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미지와 활자는 사실 싸워 이기고 지는 구도가 아닌데 어느새 그렇게 되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기도 하고. '최단경로'만 추구하는 지금 이 시대에서 아날로그적 감수성 운운하는 게 나이듦인 건가 싶기도 하고.


나는 내 모든 시간 강렬함 속에 '쉬기'를 원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습들'로 풍부해지기를 원한다.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원한다.지성, 인내, 열정, 기발함으로 산 삶(반드시 내 삶이어야 하는 건 니고 공식적인 나, 작가로서의 삶)을 나타내기를 원한다.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지각으로 느낀 세계가 지적인 세계로 이어지기를"... 소망해 보는 20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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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마스 이브에는 교보문고, 크리스마스에는 영풍문고에 갔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평소에는 자주 오지 않던 서점 방문을 결심한 것인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고 무언가 조용히 책을 고르거나 서점 특유의 착 가라앉은 하지만 너무 무겁지 않은 그 느낌은 절대 가질 수 없을 정도로 거의 호떡집 불난 수준의 분위기였다. 제대로 책을 보려면 아주 오래 전에 나왔거나 인기가 없는 책들이 모여 있는 서가를 공략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의외의 수확은 거의 재고가 없는 메리 올리버의 <휘바람 부는 사람>과 원서로 한번 읽어보려다 미루어 둔 토마스 린치의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가 비슷한 곳에 꽂혀 있었다는 것. 

















김연수로 알게 된 시인 메리 올리버는 산문집도 시 못지 않게 좋다. 문장 하나 하나가 시인의 그것이니 만큼 참 농밀하고 덜할 것도 더할 것도 없다. 토마스 린치는 시인이자 장의사란다. 죽음을 보필하는 시인이 하는 얘기가 궁금하다. 


문학동네 북클럽에서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최단경로>를 보내주었다. 궁금하다. 이력을 보니 나이가 내 막내 동생과 동갑이다. 지하철 안 책을 보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크리스마스 서점의 폭발적인 인기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다. 좋은 이야기는 여전히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 책의 미래를 비관하지 않는다. 점점 이북이 싫어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고. 아. 난 종이책이 여전히 좋아 큰일이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책은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하루키의 신간은, 생각보다 실물이 너무 얇아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진지한 노년의 에세이를 한 삼백 페이지 이상되는 분량으로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몸에 대해 했던 이야기들을 나이가 들수록 공감하게 된다. 정말 잘 갈고 닦으며 관리해야 이 생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텐데. 쉽지 않다. 아무리 철학과 영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사는 일은 반드시 몸을 담보로 전제로 한다. 그건 정말 완강한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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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9-12-26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리 올리버는 저도 김연수의 소설 서문에서 알게 되어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녀는 올해 1월 저세상으로 가기 전, 산문이 어찌 좋은지요. 맑고 밝은 영혼의 소유자였어요. 저 책을 크리스마스 시즌 서점에서 발견하다니 완전 인연인 거죠. 왠지 럭키 예감 블랑카 님.

blanca 2019-12-27 09:26   좋아요 0 | URL
저도 너무 좋았어요. 정말 시인 같다고나 할까요. 이 책 검색해 보니 세상에 제가 외출 나온 근처 영풍문고에 한 권 재고라고 뜨는 거예요. 찾아보니 정말 딱 꽂혀 있었고요. 너무 신기했어요...

moonnight 2019-12-27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과 프레이야님이 함께 좋아하시는 책 저도 보관함에 담습니다. 올해의 마무리 책이군요. 어느새ㅜㅜ 하루키가 좀 두꺼운 분량의 진지한 노년에 관한 에세이를 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격한 공감을. 제발♡

blanca 2019-12-27 09:29   좋아요 0 | URL
하루키. 저는 그의 용감한 역사관도 좋아요. 한국에 몰래 몇 번 왔었다는 소문을... 쿨럭쿨럭. 그 독자들 만나는 자리를 하루키가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저는 정말 신간 내면서 온다고만 한다면 달려갈 용의가 되어 있는데 말이에요. 올리버 색스, 필립 로스를 두고 그런 꿈을 꿨었는데 두 분 다 한국땅도 밟지 못하고 가셨잖아요. 좋아하는 작가 실물을 보고 사인도 받고 좀 그러고 싶은데...이제 노년에 관한 글을 쓸 때가 되지 않았을까 기대만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