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아이가 열네 살이 됐다. 목소리도 변하고 체구도 커졌지만, 무엇보다 부모와의 관계가 변했다. 이제 더는 내가 절대적 보호자나 아이 앞에서 절대적인 권위자가 될 수 없다. 사사건건 대립하자면 끝도 없다. 어제의 아이는 없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급변하는 이 시대에 아이의 성장은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을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어른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말 그대로 '줄탁동시'의 어미닭처럼 안에서 부리로 알을 쪼고 있는 병아리를 시의적절하게 도와줘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며 서두르지 않아야 하는데, 바깥 세계는 그런 잠깐의 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다룬 문학은 많지만, 몇 대에 걸쳐 한 가문을 뚫고 내려온 유장한 역사를 짊어진 한 소년의 성장기를 이토록 아름답고 치밀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소설은 포크너만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이 존엄한 인간을 단지 피부 색깔로 나눠 차별하고 한 가문의 노예로 종속시킨 백인의 오만함은 대지, 노동, 야생의 자연과 맞물려 그 윤리적 패배의 업,속죄, 수치심과 섞여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유장한 가문의 연대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단 하나 아이의 '성장'에는 주인도 노예도 신분도 차별도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고, 모두가 한 가족처럼 협력하여 하나의 지도를 그린다. 포크너 자신이 투영된 것만 같은 소년의 성장기가 그렇다. 


여섯 편의 연작 소설은 따로 분리된 것 같으면서 연결되어 있다.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아이작 매캐슬린의 탄생 비화를 풀어내는 <옛일>을 필두로 그 소년이 샘 파커스라는 흑인 노예 노인으로부터 야생에서 첫사냥을 배우고, 곰을 대면하게 되며 성장을 이뤄내는 이야기인 <곰>과 그 소년이 노인이 되어 후손들을 지켜보게 되는 <삼각주의 가을>로 이어지고, 다시 몇 대를 내려와 그 매캐슬린 가문이 흑인 노예 집안의 손자를 장사 지내주는 <내려가여 모세여>로 마무리된다. 외형적으로는 엄격하게 주인과 노예로 양분되어 있는 두 집안이 수 대에 걸쳐 서로 얽히고 설켜 살아나가는 대서사시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계층, 계급을 만들고 삶과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해도, 인간의 생명과 삶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인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세속적인 경계선 일거에 지워버리고 진짜를 기민하게 인식하는 직감이 있다. 이 이야기 속 소년의 평생을 지배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런 통념까지 다 부수어 버리고 난 대지에서 야생의 숲을 향해 전진하는 법을 가르쳐 준 흑인 노예였다. 
















일본에서는 어느덧 우리에게도 익숙한 용어인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세대도 나이를 먹어 50대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돼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80대가 된 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은 중학교 시절 등교 거부 이후로 7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게 된 히키코모리 아들과 뒤늦게 그 아들의 가해자들을 향한 학폭 소송을 진행하게 된 50대 아버지의 이야기다. 초반부에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들과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가정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아들의 칩거의 원인을 간파하게 된 아버지가 법적 투쟁에 뛰어들게 되는 과정과 그 마무리가 여러 의미 있는 질문과 생각 거리를 남기는 소설이다. 이 과정에서 소위 어른들이 선호하지 않는 비학군지 지역 학교 출신 젊은 변호사 다카이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 아이의 성장에는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십대의 성장이란 안온하고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대 사회에서 아이들을 야생숲 곰사냥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안의 핸드폰 앞에서 홀로 고립되는 현대의 아이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 부모는 아이의 열리지 않는 방문 앞에서 망연히 서성인다. 성장이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일 텐데, 오늘도 이런 고립된 가정들이 겪고 있는 성장통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는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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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관점의 양 극단에 선 책을 읽었다.



























제목만 봐도 두 책이 대척점에 있다. <인간의 비참>과 <가치 있는 삶>. <인간의 비참>의 저자인 데이비드 베너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 교수로 소위 반출생주의자다. 말 그대로 비참한 존재이자 필멸의 소멸을 품고 있는 인간을 재생산하는 출산을 일종의 생식적 폰지 사기로 보고 있다. 삶의 큰 질문,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에 제한된 지상적 관점에서 그럴 수는 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는 단호히 그 어떤 의미도 없으며, 이런 곤경이 삶뿐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 소멸인 죽음에도 있다고 단언한다.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만, 죽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망 없는 존재를 세상에 퍼뜨리는 출산 또한 나쁘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진실은 종종 추하다.'의 그의 이 '인기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철학을 듣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비관이 아닌 끈질긴 낙관주의다. 그러나 이 낙관주의가 때로 책임 없는 모호한 환상이나 기만일 경우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통과하여 결국 비존재로 간다. 지금 내가 '내'가 가진 것이라 느끼는 소망, 의지, 꿈, 추억도 결국 존재의 소멸로 종결된다. 이 덧없음을 직시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비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가 그간 묻어두거나 간과했던 이런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환기하며 퇴장한다. 이미 존재함으로써 겪어야 하는 생래적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불필요한 일들이었다. 


<가치 있는 삷>은 <인간의 비참>보다 훨씬 전에 읽은 책이다. 저자 마리 루티는 정신분석학자 줄리 크리스테바의 제자다. 마치 <인간의 비참>에 대항하듯 이 삶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위대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삶의 덧없음은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드높인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덧없음을 사랑한다는 의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불가지론과 불가사의함은 삶의 신비를 드높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의미로 통합될 수 있다는 '끈질긴 낙관성'을 견지한다. <인간의 비참>의 데이비드 베너타라면 분명 이 저자가 순환론적 오류에 빠졌다 비판할 지점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에는 의미가 있으니까.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나? 살아내면 안다. 논리성 앞에서 선 삶은 허술하다. 


이 모든 인간적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면, 어떤 심원한 우주적 의미가 있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다. 의미가 있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으니 실존적 불안을 안고 견뎌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 존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소멸로 간다.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침범할 수 없는 생의 자기 보존 의지는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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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독서모임이라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


우린 동그랗게 모여 앉아 차를 마셨지 어디로 가는지 모를 하루를 쪼개 무엇이든 한 장씩 읽어나가자 그렇게 모아서 만든 구슬들을 쿠션 보자기에 담아와 동그란 탁자 위에 풀어놓아보자. 

-박상수 <서촌 일요 독서회>



이상하게 읽기도 전에 마음이 가는 책이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파스텔 민트 단일 색감의 이 시집을 동네 서점에 주문하고 찾으러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지. 

"제가 주문한 책 왔다고 해서요."

서점 주인이 제목을 말해 보라 하자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 없는 말은.

"트렁크요."

서점 주인이 "메신저 백이죠."

내가 말해놓고 내가 포복절도했다. 친절한 서점지기가 "어차피 여행 갈 때 필요한 가방들이니 그럴 수 있어요."라고 위로해준다. 


시인의 '트렁크'가 아닌 '메신저 백'을 읽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몰입해서 읽는 경험을 하게 됐다. 시인의 어휘들은 짧은 단편들, 작은 그림들, 단편 영화를 연상시킨다. 과거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현실 자본주의에 소모되는 처절한 노동의 나날들이 교차하며 그 경계를 넘나든다. 아름다움을 환기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조를 피하지 않는다. 서정성과 서사가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맞아, 시는 이런 거야, 라고 절로 수긍하게 되어버리는 마법. 


좋아해요, 라는 말이 떨리면서 흘러나오는 순간을 더할 수 없는 기분으로 좋아해요.

-박상수 <다하지 못한 마음>


내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박상수 <파견>-기울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고백을 기다리는 시간과 나를 마치 투명인간, 종이상자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근로의 나날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형언하기 힘든 모순의 지점을 통과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인은 많지 않다.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한줌의 사람'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누가 한숨처럼 내뱉어도

우리가  여기 모인 게 기적이야! 그런 말로 되받을 줄 아는"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그런 정경을 그려낼 수 있게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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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4-16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정리하고 구매를 자제하는 중인데, 블랑카 님의 글 때문에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blanca 2026-04-16 09:41   좋아요 1 | URL
저는 자목련님 만큼 시에 조예가 깊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진짜 압도적으로 좋았어요. 소장하려고 줄도 박박 그었네요. 오랜만에 진짜 시를 읽는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가족이란 어떤 존재일까.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한 가정 공동체로 묶여 서로의 가장 내밀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애증의 관계는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고 불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 우리 가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나는 전부 다 드러내어 말할 수는 없다.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가슴이 미어질 만큼 슬픈 시간들은 더 많았다. 나와 아이들의 시간도 그럴지 모른다.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운명의 힘 앞에서, 인간의 한계 안에서.




찬탄이 나올 만한 명작이었다. 다 읽고 나니 이 특수한 집안의 이야기가 왜 이리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알았다. 유진 오닐의 가족사를 고스란히 반영한 자전적 이야기는 그 누구의 가족사와도 만나는 부분이 있다. 열심히 살아보려 했던 빛나던 부모가 현실에 부딪혀 좌절하는 이야기, 그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보려 했지만 끝내 넘어지는 성인 자식들의 이야기는 현실 그 자체다. 현실은 언제나 이상보다 먼저 도착해 있다. 사랑하지만 상대의 기대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음은 실존의 치트키다. 이러한 일들이 더 빈번히 노골적으로 일어나는 역학이 가족 관계다. 


극 중 어머니 메리는 유랑극단 배우인 남편 제임스 타이론을 따라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다 거기에서 아이들을 낳는다. 한 명은 어려서 죽고 다른 한 명은 폐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 자신 아이 출산 후 처방받게 된 모르핀으로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된다. 여름 별장에 모인 네 가족은 저마다의 고통을 떠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서로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기대했다 원망한다. 실제 유진 오닐의 어머니는 유진을 호텔에서 낳았다고 한다. 몰락한 배우 아버지 타이론은 어린 시절의 가난에 사무쳐 미친듯이 땅을 사모으고 가족에게 쓰는 현금은 아까워한다. 언제나 가성비를 따지는 선택을 하고 그게 가족을 위한 거라 둘러댄다. 심지어 어린 아들의 폐병 요양소도 가장 싼 곳을 찾아 헤맨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게 비극이다.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

-pp.72


이 가족의 부유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막내 아들 에드먼드가 이야기하듯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을 전염시킨다. 우리 모두가 여기, 현재 정주하는 삶이라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타이론 가족들처럼 어느 누구나 '안개 인간'으로 언젠가는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이 슬픈 가족사를 재현한 희곡은 유진 오닐 사후 25년 후에 공개되는 것으로 약속을 맺었으나 그 약속은 깨지고 만다. 유진 오닐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아들의 자살로 더는 상처를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게 되어서. 가장 슬픈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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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연루된다는 일은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담백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삶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 끊임없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 좌표는 이동한다. 대문자 J에게 가장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딜레마가 있고, 갈등이 있다. 고민 끝에 당시에는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던 일이 현재에 와서는 깊은 회한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이 모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온다. 내가 선택이라는 걸 감히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삶이란 이미 죽 그어진 경로고 나는 무력하게 그 경로에 놓인 하나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 걸까?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만남. '윤리적 딜레마'라는 공통 주제에 소환된 두 작가의 이야기 끝에는 대담이 실려 있다. 김연수의 작품 < 근접한 세계>에는 국정 농단 사태의 폭로에 연루된 손동하라는 사람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에는 고인이 된 사진 작가의 전시회를 준비하다 우연히 마주친 작가의 성적 일탈로 인한 그의 전시를 기획한 미술관 큐레이터의 번뇌의 사연이 나온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맑고 찰랑이는 물 같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을 닮았지만, 그 둘은 묘하게 서로 공명한다. 소설이란 결국 존재가 현실과 부딪혀 자아내는 어떤 균열을 서사화하는 일이기에 서로 멀어질 수 없어서일까. 손동하의 소년 시절 만난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가스미가 생전 존경했던 작가와의 관계의 붕괴와 오버랩되는 지점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가 보는 타인의 세계는 얼마나 진실한가. 그 사람이 내게 보이는 얼굴은 그 사람의 지극히 미분화된 조각이 시간의 구획 안에 스며든 것이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과 상대가 통과하는 시간이 만나 파열음을 낼 때 그 만남을 품은 과거의 이야기는 다른 측면에서 조망된다. 이미 헤어질 것을 알고 만나는 것과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은 그래서 닮아 있다. 우리는 종내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산다.


이미 부서질 것을 알고도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돌아가 다시 듣는다. 김연수 작가는 그 향수어린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며 천천히 읽는 이들의 과거를 환기하는 시간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당면하게 되는 숱한 딜레마들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영리하게 소환한다. 덧붙여 두 작가의 대화는 그 둘의 이야기만큼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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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지움 2026-03-04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루라는 말이 와 닿네요~~

blanca 2026-03-04 12:5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연결과는 또 다른 어감이죠.

아이엠용 2026-03-10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된 글이 너무 좋아 저장해 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연수 작가의 팬인데 조만간 이 책을 접하게 되겠지요~~

blanca 2026-03-11 18:5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도 김연수 작가 책을 따라 읽는 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