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뭔가 주저주저할 때가 있다.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며, 그 작가의 문체, 때로는 그 작가의 철학까지 긍정하게 되면, 마치 그 작가 생전의 기행, 편향된 사상, 정치관까지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런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며 할복 자살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이 대목은 더없이 거북하다. 그의 극도의 탐미주의가 아슬아슬하게 횡단하는 윤리의 경계 부분도 그러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고의 가치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작가의 윤리관, 가치관에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금각사>를 불태우는 이 천재 작가에 대한 연상들은 반쯤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갈수록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을 우리는 철저히 오해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떨칠 수 없다. 하루키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대하고는 자신이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오해하지만 실은 지극히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충실히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도 세상 사람들의 오해로 규정되는 캐릭터를 강제로 부여받은 게 아닐까. 실제 그의 에세이나, 소설들에 우경화된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적 시각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미시마는 자신을 천재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극우라고 정치적 입장을 작품 속에 표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떤 고정된 가치관에 유보적이고, 퇴폐미와 유미주의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서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어처구니 없는 전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비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솔직한 고백록이다. 당연히 문장들은 아름답고, 묘사력 또한 출중하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자신 없어하는 머뭇거림들이다. 흔히 일본 작가들의 사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비대한 자아 따위는 없다. 그는 작중 캐릭터와 작가 자신을 혼동하는 다자이 오사무가 싫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세상에서 유리된 듯 하지만 그 현실에 우뚝 서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좋다고 거듭 고백한다. 여기에 우리가 미시마 유키오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미친 천재 작가는 없다. 십대의 치기,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철저한 해체, 반성의 대목도 그렇다. 


지금 내가 빨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스물다섯 살의 나는 하양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마흔 살의 나는 그것을 초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소설을 쓰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현실이 확정되는 순간, 그것은 소설가에게 죽음일 것이다.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 <소설가의 휴가>


마지막에 실린 <팽이>는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어느 날, 집앞에서 하염없이 이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젊은 작가를 기다리던 십대 소년에게 미시마 유키오가 허용했던 단 하나의 질문. 그건 바로 "선생님은 언제 죽습니까?"였다. 십대의 어느 순간, 돌던 팽이가 돌연 투명해지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게 되는 그 유일한 순간에 대해 미시마 유키오는 이야기한다. 진짜가 출몰하는 그 찰나에 대하여.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다. 자신을 추앙하는 무리들에게서 온갖 찬사를 받던 이 작가는 이 엉뚱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자신의 삶이 어떤 죽음으로 마감될지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예술로서 다 용인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한 작가의 생애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에세이를 읽는 일이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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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15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얼마전에 잠자냥 님도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이젠 블랑카 님도! 미시마 유키오란 작가는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잠자냥 님과 블랑카 님 두 분 모두, 책 잘 읽고 글도 잘 쓰시는 두 분 모두 이렇게 기꺼이 페이퍼를 헌정하시는걸까요.....

blanca 2026-02-15 19: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봄눈>으로 시작해 보세요. 좀 과할 데도 있지만, 문장이 말도 못하게 아름답습니다. <금각사>도 그렇고요.

카스피 2026-02-16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시절(45년 2월) 징집명령을 받았으나 당시 페결핵으로 오진을 받아 병역 부적격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징집된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전사해 일종의 죄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하지만 일각에선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동경한 미시마 유키오가 오진을 이용해 징집을 피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전후에 그가 병약했던 육체를 단련하고 극단적인 군국주의 성향과 자위대 궐기 촉구, 할복 자살 등의 행보를 보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문학관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옐ㄹ 들면 금각사),부도덕 교육강ㅇ좌를 읽으시면 5~60년대 일본 사회를 위선적 도덕관을 비판하고 풍자했던 그의 날카로운 통찰과 역설의 유머를 느끼실수 있을실 겁니다.

blanca 2026-02-16 10:4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군국주의자라는 평이 있는데 개인적 사상관이나 작품을 통해 보면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마지막 죽음의 명분이 너무 뜬금 없어서 생 전체가 오해받게 됐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봅니다.

2026-02-16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처음 읽었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이제 그런 결말의 반전이 더는 새롭지 않은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이 부커상 수상작이 가졌던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내게 줄리언 반스는 젊고 예리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작가였다. 인문학적 소양과 픽션을 적절히 융합시킨 그의 소설은 어떤 것은 와닿았고 또 어떤 것은 내게 너무 난해했다. 그래도 줄리언 반스의 신작은 내게 언제나 챙겨보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오십대 후반에 이미 죽음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책 속에서 형인 철학자와 죽음에 관해 나눈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게 아버지뻘인 그가 얘기하는 죽음은 어쩐지 좀 유쾌했다. 오십대 후반에도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끼기는 힘들구나, 싶었고 또 그것을 읽었던 삼십대의 나는 더더군다나 '죽음'을 현실이 아닌 하나의 철학적 소재나 주제로 치환하여 마음 편하게 받아들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작가인 그나 독자인 나에게나 그때의 죽음은 '아직은...'이었다.


그러던 그가 스스로 마지막 책이라 호명한 소설을 썼다. 아니,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그 자신이 한국인 독자에게 쓴 편지에서 고백한 것처럼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책이다. 이제 만으로 팔십 살이 된 노작가는 자신이 소설가로서 살아온 삶과, 갑작스럽게 뇌종양으로 떠나보낸 아내의 상실, 코로나 시기의 암 진단, 친구의 연애와 이별, 다시 재결합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기억 등을 한데 모아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 어느 인터뷰보다 그 어떤 소설보다 줄리언 반스에 대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들로 채워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부터가 작가 개인의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지점들 경계에서 줄리언 반스는 특유의 호쾌한 농담으로 독자들과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한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나'를 주어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일상 속에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고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거라는 각성은 차갑다. 삶이란 영속성, 연속성의 관성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들이 곧 흩어지고, 그 일들을 하고 말하는 내가 사라지는 세상을 매순간 가정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쓰는 글이 사실상 마지막 작별인사가 될 거라 선언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소멸하고 말 거라는 걸 철학적이고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직접적으로 육박하는 시간 속에서 인정하는 일의 낙차는 아찔할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줄리언 반스는 여전히 그의 글처럼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도 무겁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논평가처럼 한다. 여기에서 멈추면 줄리언 반스가 아니다. 이제 줄리언 반스는 그가 만나지 못한 수많은 우리 같은 독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 인사말이 어쩌면 이 책 전부를 아우르는 가장 아름다운 종결어일지 모른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

-2022~2025년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


슬쩍 사라지지 말고 다음 책 한 권 정도는 더 써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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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이 구성된 방식, 물려받은 유산과 비유산, 움직이는 정체성, 내밀한 브리콜라주를 조정해 나가며 살아간다."

-클레르 마랭 <제자리에 있다는 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하나의 이야기라기엔 하나의 현상이자 문화적 계보 역할을 하게 된 경이로운 작품이다. 중년의 남자가 어린 소녀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는 이야기는 사회적 금기, 금제, 윤리적 논란의 지점과 예술적 성취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한다. 이쯤 되면 다들 나보코프의 삶 그 자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혹시 어두운, 감춰진 자전적 역사나 욕망이 투영된 건 아닐까? 하는. 그러나 그런 질문에 나보코프는 삶으로 답한다. 그가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의 조각들인 언어의 정묘함과 아름다움은 물론 그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비윤리적 도착의 세계는 그의 삶과 애정관과는 턱없이 멀다. 이제 이 자서전에서 그는 러시아어로 아로새겨진 기억을 영어로 서술했다, 다시 러시아어로 바꿨다, 최종적으로 영어로 바꿔 <결정적 증거>로 만들어 낸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존재는 두 영원의 어둠 사이 갈라진 틈으로 잠시 새어나온 빛에 불과하다."는 첫문장은 그의 네 살 세례식의 출발을 알린다. 19세기 말, 러시아 상테르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의 소년 시절의 기억의 워터마크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생생하다. 언어에서 색감을 보는 독특한 공감각적 인식의 재능을 가진 조숙한 소년은 여러 가정교사들을 거치며 광활한 극지의 자연과 아름다운 소녀들과 "경이로운 내일"을 기다리며 자신의 기억이 태피스트리를 찬란한 언어로 직조해낸다. 


타마라, 러시아. 오래된 정원과 서서히 섞여들던 야생의 숲. 북쪽의 자작나무와 전나무, 여름이 되어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올 때면 매번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산과 커다란 떡갈나무-운명은 어느 날 이 모든 것을 허둥지둥 묶어 바다 한가운데로 던져버렸고, 나는 어린 시절과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말하라, 기억이여>


1919년 나보코프 일가는 이 모든 찬란했던 과거를 러시아에 남겨두고 서유럽으로 기나긴 망명길에 오르며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다. 아버지는 암살당하고 어머니는 머나먼 이국에서 죽고 동생은 수용소에서 아사한다.  나보코프는 유럽을 떠돌며 테니스 교습, 번역 등의 일을 하는 와중에 수신자의 반응이 없는 글들을 쓰고 또 쓴다. 하지만 지금 이 과거 또한 "작은 유리공 안에 담긴 색색의 나선"으로서의 나보코프의 삶이다. 후일 자신의 반세기를 넘는 삶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는 <롤리타>의 위대한 작가는 이 기억으로 재구성된 삶을 조망하며  "지나간다, 급행으로, 급행으로, 흘러가는 세월들이."라는 호라티우스의 시어를 선창한다. 모든 과거가 복선으로 작용하는 현재의 이야기를 우리는 또 완성되고 고정된 작가의 그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시간도 빠르게 급행으로 지나간다. 


이제 비로소 나보코프가 <롤리타>를 통해 이야기하려 했던 관능의 핵심을 그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짐작한다. 그것은 "나머지 것들의 성장이 잠시 관능적으로 멈춰 있는 상태"에 대한 그 자신의 처절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것이다.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가 끝내 닿을 수 없었던 "우주에 대해 자신의 위치를 표현하려는 충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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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1-09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말하라......> 이거 벌써 읽고 계시는군요!
저 오늘 사려고 하는데...... 땡투 드갑니다. ㅋㅋㅋ

blanca 2026-01-09 16:35   좋아요 0 | URL
기억력, 문장이 진짜 ‘캬‘ 소리 나오더라고요.

다락방 2026-01-09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언제 읽어도 블랑카 님의 글은 너무 좋아서, 블랑카 님이 계속 읽고 써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보코프는 제가 딱히 좋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 글을 읽고 나보코프의 이 책도 읽어봐야지 생각합니다.

blanca 2026-01-10 11:09   좋아요 1 | URL
제게 불가사의한 두 작가가 있는데요, 나보코프와 미시마예요. 문장력은 범접 불가로 좋은데 작품의 내용은 윤리적 논란의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횡단하거든요. 그래서 이 두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들의 주제의식까지 동조하는 것처럼 보일까 좀 걱정스러워지는 작가군이요. 이 책은 나보코프 필력을 구경하는 재미만으로 소장 가치 충분하답니다.

카스피 2026-01-10 0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눈 롤리타라는 논란이 작품덕에 작가가 혹시 소아성애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지만 실제 그는 아내 베라 나브코브와 평생을 해로하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실제 일반인들은 롤리타를 변태성욕을 다룬 책으로 오해하는 편인데 문학사적으로 롤리타는 인간의 욕망,도덕적 타락,예술과 외설의 경계등을 탐구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하는군요.

blanca 2026-01-10 11:12   좋아요 0 | URL
나보코프 아내 사랑은 이 책 마지막 장을 아예 아내에게 할애하는 것으로. 거의 여신급 추앙을 받았더라고요. 대단하다 싶었어요. 저도 <롤리타> 읽고 완전 오해했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면 나보코프만한 순애보가 있을까 싶어요. 소년 시절 사랑한 소녀를 위해 군입대 결심까지 하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차의 꿈>을 봤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광활한 북서부의 삼림 풍경을 따라가는 카메라 워크와 자연빛을 활용한 촬영 기법이 인상적인 영화다. 벌목꾼 로버트가 철도 건설 일을 하게 되며 우연히 목도하게 되는 폭력의 장면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복선이 된다.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부부를 꼭 닮은 사랑스러운 딸을 얻고 생각지도 않았던 비극에 직면하게 된 한 사내의 일생을 잔잔하게 조망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결국 모든 것들과 서로 겹치고 얽히며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철도 노동자들, 벌목꾼들이 어두운 밤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나누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산문시처럼 들린다. 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야기의 원작자는 소설가 데니스 존슨이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예수의 아들>은 <기차의 꿈>과는 많이 다르다. 열한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의 화자는 너무 젊고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른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보다 더 자유분방하고 더 대책 없는 나쁜 남자다. 현실에 있다면 그 누구도 결코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인물이다. "요령을 모르고", "이질감, 겉도는 느낌, 깊은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입니까?"라고 말하는 세계는 거부감이 들고 폭력적이지만 놀랍도록 통찰력이 번득이는 날카로운 문장들로 독자를 매혹한다. 소설 속 주인공의 여자를 대하는 태도나 대사는 분명 문제적인데 그가 삶에 대해 느끼는 혼란과 그 본원적인 절망에 대한 묘사의 통찰력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데니스 존슨의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급소를 가격하는 힘은 미국 소설 쓰기의 미학에 대한 하나의 교본으로 활용된다고 한다. 


독특한 색감과 질감의 표지와 도발적인 편집도 훌륭하다. 


잠시 후 하디가 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는데요?"

그러자 조지가 말했다.

"생명을 구해요."

-데니스 존슨 <응급실>


그 생명을 구하는 남자는 본인은 정작 자기가 운전하다 토끼를 치고는 그 뱃속에 있던 새끼를 죽게 놔뒀다고 주인공을 저주하는 모순적인 캐릭터다. 읽는 이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허들을 가뿐히 뛰어넘어 그것을 현실적인 삶에 통합하는 놀라운 이야기들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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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12-25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차의 꿈 봤어요. 요즘에도 이런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또 보고 있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푸근해졌어요.

blanca 2025-12-25 17:51   좋아요 0 | URL
느린데 그 사이로 응축된 서사가 참 감동적이더라고요.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잘 봤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종종 듣는 <윤고은의 EBS 북카페>에서 화요일마다 방송하는 '무리하는 시인들'에서는 김소연, 김상혁 시인이 나와 그 주에 인상 깊게 읽은 시를 낭송하고 그 감상평을 전해준다. 나는 시집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고 시를 써본 적도 거의 없어서 사실 이 코너를 애정하게 될 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방송에서 김소연 시인이 낭송해주는 시는 흡사 음악처럼 귀를 울렸다. 시어 하나하나, 그 시어 사이로 끼어드는 의도된 공백까지 시인이 읽어주는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들렸다. 걷다가 '헉'하고 한번씩 멈추게 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시는 사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행위까지 덧붙여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장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간 아들이 

저녁에 서른다섯 살이 돼서 돌아왔다

늦었네 하고 말했더니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그리운 듯이 올려다보면서

아들은 어른의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

-요쓰모토 야스히로 <세계중년회의> 다녀오겠습니다! 중


김소연 시인의 목소리로 이 시의 이 대목을 듣는데 뭔가 가슴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감동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엄마와 종일 붙어있겠다고 발버둥 치던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떠난다. 떠났다 돌아올 것이다. 그리움을 가지고. 


시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들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소환하고, 또 그것을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순간 그리운 그 시간들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왜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를 낭송하는지 알게 되는 시집이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 동생의 추도식에 참여하고 나서야 그의 아버지가 이 가슴 저미는 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완벽했던 여름...... 가족 중 누구 하나도 죽어가지 않았던 그 여름을 기억한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한창인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쓴 추도사는 하나의 시다. 인생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사후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저자 제임스 우드가 문학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종지부다. 돌이켜보고 돌아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비로소 성립하는 숱한 상실과 작별로 점철된 애달픈 이야기. 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저자의 망향의 그리움과 상실의 필연성을 오롯이 담아낸 짧지만 아름다운 강의록이다. 










AI가 마치 모든 것들을 점령할 것처럼 수선을 떨고 어수선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시를 쓰고 읽고, 소설을 쓰고 읽고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태어나 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런 게 아닐까? 아마도 그게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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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22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소 라디오를 듣지 않아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 줄 몰랐네요. 시인들이 인상깊게 읽었던 시를 낭송해주는 프로그램이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시에 대해서는 늘 어렵다 느끼는 편인데, 이상하게 주위에 시인도 많고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많네요.

큰 아이가 대학생이 된 후로 자주 만나지 못해 한동안 섭섭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존재가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라나는 시기에는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만, 다 자라서는 부모 품을 떠나야 하죠. 이제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인생이 펼쳐질테니까요.

시를 공부하는 큰 아이에게 저 프로그램을 알려줘야겠어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blanca 2025-12-22 15:58   좋아요 0 | URL
큰 아이가 시를 공부하는군요. 그럼 저 코너가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인 두 명이 좋은 시를 선별해 와서 낭송해 주고 서로의 감상을 나누는데 저처럼 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시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더라고요.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부모가 전부였던 그 귀여운 시기보다는 사춘기를 통과해서 제대로 분리해 나가는 시기가 더 길고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