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여행.

나에게 성석제의 <칼과 황홀>의 백미는 막상 음식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자취를 찾아 떠난 여행기였다. 저자는 그에게 사로잡혔던 청춘을 회고하며 지나치게 자신 속에서 비대해져 버린 이 거인의 여성편력의 흔적에 때로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성석제가 네루다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과 경탄이 엿보인다.

 

 

 

 

 

 

 

 

 

 

 

 

 

 

파블로 네루다는 시에 삶을 밀착시킨 시인이다. 그의 시의 가장 적나라한 현현은 그의 삶 그 자체다.  그의 시는 쓰인 순간 그의 손을 떠나지만 다시 그에게 떨어진다. 성석제는 네루다가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자신을 얘기한 책이 있음에 흥분한다. 더불어 나도 흥분했다. <칼과 황홀>을 읽고 네루다의 자서전으로 간다.

 

 

 

칠레의 숲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

-p.16

 

네루다의 첫 시는 글을 배운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어머니였던 새어머니에게 바친 시였다. 세계적인 대시인이 될 이 꼬마의 시는 자갈기차 기관사 아버지 앞에서 무참히 폄하된다. 아버지의 반응은 "어디서 베꼈니?"가 다였다고 한다. 꼬마는 절망하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른다. 그의 시는 생존 자체가 투쟁인 일용 노동자의 입술에서 체 게바라의 배낭에서 절망으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달려가는 젊은이의 슬픈 사랑의 여정에서 신산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일군다. 터키 정부에서 18년 동안이나 감방에 가두고 해군 반란 선동 혐의를 씌워 인분이 가득한 화장실까지 몰아 넣었지만 기억 나는 사랑의 시와 노래를 모두 읊으며 타협도 승복도 하지 않았던 나짐 히크메트.  네루다가 "행성처럼 삶의 행복을 반사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 시인 로르카와의 추억담들을 회고하는 대목들이 저릿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신뢰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가장 낭만적인 사람은 가장 용감한 투사가 되기도 한다. 파시즘, 군국주의, 제국주의와 투쟁했던 평생은 그가 저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인간에 대한 연민, 신뢰,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써 내려간 궁극의 시였다. 이런 그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은 노래"라고 노래한 혁명시인 나짐 히크메트와 프랑코 정권과 투쟁하다 암살당한 로르카와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사람은 사람일 뿐, 그 외의 어떤 규칙이나 호칭이나 딱지를 붙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중략> 내가 생각하는 투쟁이란 모든 투쟁을 끝내기 위한 투쟁일 뿐이며, 강력한 대응이란 모든 강력한 대응을 끝내기 위한 강력한 대응이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p.341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고 고백하는 네루다의 슬픈 최후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의 말미를 장식한다. 이 짧은 이야기에는 네루다가 머물렀던 아름다운 이슬라 네그라의 유일한 우체부 직원으로 일하게 된 청년 마리오가 그와 나눈 교감으로 흘러 넘친다. 비틀즈의 노래에 맞추어 정열적으로 춤을 추는 네루다, 청년의 연애사업을 전두지휘하고 시심을 일깨우는 네루다의 모습은 실제 같다.

 

 

 

시인은 사람들이 반역자라고 불러도 놀라지 않았다. 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이 파괴분자라고 불러도 화내지 않았다. 생명은 모든 구조를 초월하며, 영혼은 새로운 규범을 찾는다. 씨앗은 도처에서 싹을 틔우며, 모든 생각은 이국적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엄청난 변화를 기대하며, 인간질서의 변혁을 열렬하게 고대한다. 봄은 반역이다.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p.436

 

네루다가 정치적 동지 아옌데와 함께 꿈꾸었던 이상은 군부 쿠데타로 무참히 짓밟힌다. 꿈의 궁전에서 살듯이 아름다운 지명에서 살기를, 그래서 죽거들랑 바다 근처 지명이 아름다운 곳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의 소망은 그가 죽고 이십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다.

 

하늘의 별을 보며 책상에서 시를 쓰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 허리에 마대자루를 두른 노동자들에게 그 시를 읽어 주고 함께 손을 잡고 투쟁하고 그렇게 살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를 무참히 죽이는 풍경 앞에서 절규하며 눈을 감은 이 시인. 감히 어떤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시인이란 시란 이렇게도 위대해질 수도 있는 것이구나, 싶어 절로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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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0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성석제 작가가 네루다를 좋아했다는 걸 그책에서 알게 됐어요.
덕분에 저도 네루다를 알고 싶어졌는데 생각만 있고 영 이러고 있네요.
올해부터는 한 작가를 독파해 보는 뭐 이런 프로젝트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올해를 어떻게 보내야 할까 지금도 그냥 막막해하는 중입니다.
무계획이 계획인 저였는데, 못 지키는 계획이라도 안 세우는 것 보단 세우는 것이 낫겠죠?
올 연말에 또, 갈팡질팡하다 이럴 줄 알았지. 이러고 한해를 마감하면 안될텐데 말입니다.ㅋ

blanca 2012-01-04 22:40   좋아요 0 | URL
저도 <칼과 황홀>에서 네루다에 관련된 얘기를 읽게 될 줄 몰랐답니다. 성석제 작가 참 솔직하더라고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딴짓 하다 맞다, 맞다 이러고 있답니다.--;;

잘잘라 2012-01-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은 읽기가 두려워요. 님 글을 읽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언급하신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거든요. 그냥 ‘한번 읽어보고 싶다’ 또는 ‘읽어봐야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언제 읽지?’이러고 있으니 원..

blanca 2012-01-04 22:42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그런 두려움은 좋은 두려움 같은데요?^^;; 저도 요새 다시 책욕심이 발동해서 큰 일이랍니다. 이제 자리가 없어요. 있는 책들을 또 처분해야 하는 시기가 왔나 봐요. 하나 하나 봐도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마 할머니가 되어도 이러지 않을까 싶어요.

2012-01-04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4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4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4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2-01-0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요.

성석제의 칼과 황홀, 찜해둘게요.
더불어 파블로 네루다, 저 아직 읽어보지 못했거든요. 궁금하네요.

blanca 2012-01-04 22:44   좋아요 0 | URL
꿈섬님, 안 그래도 오늘 페이퍼 읽고 댓글 달려는 참이었어요. 꿈섬님 페이퍼에 갈게요.^^

로드무비 2012-01-0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와 네루다의 식사 장면이 네루다 자서전에 나왔나봐요.
둘의 식탐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소개한 글을 읽었거든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보니 반가워서.^^

blanca 2012-01-05 22:54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 ㅋㅋ 둘이 만난 얘기는 나오는데 제가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이 대목은 좀 낯서네요. 그런데 네루다 얼굴만 봐도 식탐 강하게 보여요 ^^;;

마녀고양이 2012-01-05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석제에서 네루다로 흐르셨군요.
좋았나봐요.. 네루다 자서전 저도 읽고 싶어집니다.
난 평전이나, 자서전이 참 좋더라구요. 정말로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이렇게 가슴을 저미는구나 싶어서.

blanca 2012-01-05 22:55   좋아요 0 | URL
마고님, 저도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래서 자서전이랑 평전 많이 읽은 사람이 추천해 주는 페이퍼 같은 것 있나 찾아봐도 아쉽게 잘 안 보이더라고요. 마고님이 추천해 주실 평전 혹시 있나요?

마녀고양이 2012-01-10 17:58   좋아요 0 | URL
난 마크 트웨인 자서전이랑, 이상 평전 사놓고 손도 못 대고 있는 사람이예요.
무슨 추천을 해줄 수 있겠어여.. 에휴휴.

프레이야 2012-01-0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과 황홀'과 네루다 자서전 담아갑니다.
블랑카님 리뷰 보면 자동으로 책을 담게 되어요.^^
참 좋은(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열할 게 많으니^^) 리뷰 늘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분홍공주랑도 잘 지내시구요.^^

blanca 2012-01-08 10:1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건강하시고요!

햇빛눈물 2012-01-07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lanca님. 바람결님 서재에 들렀다, 이렇게 댓글을 달게 되었네요. 우연히 들어오게 된 서재에 좋은 서재지기님과 좋은 글들이 많아 기분이 좋네요. 앞으로 자주 들르겠습니다. 저도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읽으며 네루다에 대해 생각하던 때가 기억나네요. <인상과 풍경>은 솔직히 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기억이. 올해는 네루다 책도 한번 꼭 읽어봐야 겠네요. 늦었지만 새해 건강하시기를~~

blanca 2012-01-08 10:1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햇빛눈물님! 새해 벽두부터 저는 몸살이 났네요. 건강하라는 인사가 그래서 더 고맙고 와닿는답니다. 햇빛눈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