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돌아가다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필립 케니콧 지음, 정영목 옮김 / 위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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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골드베르크 협주곡 리사이틀을 직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흐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내가 피아노를 결정적으로 그만두게 된 계기가 '바흐인벤션'이기 때문에 바흐를 원망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음악을 들으면 설명하기 힘든 치유력을 느끼기에 그 점은 내가 또 바흐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골드베르크 협주곡은 이미 굴드의 해석으로 여러 번 들었지만 제대로 그 음악을 알고 있다기엔 부족한 채로 인터미션 없는 한 시간 삼십분 가량의 연주를 들었다. 큰 기대도 정보도 없이 들어 그런지 중간은 약간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피아니스트가 이 다성부의 정교한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자신만의 그것으로 재정의했는지 그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 여실히 그대로 전해져 올 정도로 압도적인 연주였다. 귀에 익은 아리아에서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과정, 그 중간 휴지기 관객석의 엄청난 침묵은 그 감동에 모두가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 모두 이제 출발한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공명했다. 그건 마치 인생의 은유 같았다. 우리는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건 처음과 같은 끝의 반복이 아니다. 그 엄청난 여정의 끝에 우리는 변화한 모습으로 안착한다. 그리고 그건 비극적인 종점,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을 그 연주 전에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척 아쉽게 만들 만큼 정말 압도적으로 좋은 책이었다. <피아노로 돌아가다>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 필립 케이콧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자신이 직접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피아노로 연습하며 어머니의 애도 과정, 중년의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 책을 요약한다면 이 책의 반의 반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책은 지금도 수십 권이 매해 나온다. 부모의 죽음의 애도 과정에 얽힌 나의 유년, 나의 지금에 대한 사적 고백. 그런 사적인 이야기들은 피곤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은 부모와의 작별이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가 왜 갑자기 오십이 넘어 다시 바흐의 골드베르크로 하필 돌아와 그것을 피아노로 연습하는데 골몰하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가,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여정은 그것을 읽는 이들 모두를 끌어들이고 기꺼이 공명하게 한다. 심지어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골드베르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한번 이 바흐의 역작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걸 들으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이 좀 잠재워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특이하다. 모성애가 풍부하거나 한없는 그리움을 일으키는 그런 전형적 어머니상이 아니다. 통제적이고 변덕이 심하고 자신이 어머니인 것을 싫어했다. 겉으로 보이면 모두 잘 자란 네 자녀의 어머니였고, 경제적 빈곤을 경험한 적도 없는 이 여인은 내도록 불행했고 또 불행한 채로 죽는다. 자신이 그만둬버린 바이올린 대신 저자인 아들의 피아노 레슨에 열성이었던 그녀는 생애 내내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를 강론한다. 이런 어머니의 강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양육으로 고통 받았던 저자는 다행히 진정한 스승 조를 만난다. 그가 어린 시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이 사십년 전 스승이 유일하다. 조가 다른 교사들과 달랐던 점은 제자가 스스로가 되어 나아갈 자유를 줬기 때문이다. 


너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 할 일을 해라.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 너 자신이 되어라.

-pp.261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주는 제언이기도 하다. 저자의 기획은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애도이자 삶을 재발견하고 죽음을 재정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의미한 종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해보이리지라도 결국 움직여 전진해야 함을 몸으로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중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다시 제대로 친다고 해도 그게 과연 무슨 거대한 의미를 창출하겠는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삶의 커다란 비의를 각성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될 자유를 다시 재확인하며 우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미친 기획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 허무하고 겸손한 결론은 그것을 넘어서는 울림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일 그 자체가 삶이라는 것. 그 도돌이표 앞에서 다시 바흐로 돌아오는 저자의 여정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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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1-02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바흐 너무 재미없어서 피아노칠때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ㅋㅋㅋㅋ그래서 지금도 싫어요ㅜㅜ근데 이 책은 읽고싶어요^^

blanca 2024-01-02 19:35   좋아요 1 | URL
저는 바흐를 치면서 난 안되는구나, 이만 접자, 필이 딱 왔어요. ㅋㅋ 피아니스트들 보니 왼손 타건 힘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평범한 저 같은 사람과의 경계가 딱 드러나는 게 왼손의 힘인 것 같아요. 바흐인벤션 집어 던지고 제 피아노 교습은 끝났던 기억이 나네요. ^^ 아, 이 책 완전 강추드립니다.

hnine 2024-01-0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바흐를 재미있어 하며 친 기억 가지고 있는 사람 있을까요? 바흐 인벤션에 이어 3성, 4성, 조곡...
어른이 되어서도 잘 모르겠더니, 바흐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과 다른 차원에서 사람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느낀 날이 있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blanca 2024-01-02 19:36   좋아요 0 | URL
아, 이 작가가 정확히 그 지점을 간파했더라고요. 대충이 통하지 않는 지점에 바흐가 있다는...너무 좋아서 소장하기로 했어요. 퓰리처상 타는 작가는 사적 에세이도 공적으로 승화시키는 지점을 기가 막히게 아는 것 같아요. 정말 문장이 말도 못하게 탁월하더라고요.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지음, 이태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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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한국학 연구자가 쓴 한국 소설, 한국 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는 마르세유에서 태어나 엘스마르세유 대학교에서 한국학을 창설한 사람이다. 이런 배경을 듣게 되면 흔히 설정하게 되는 기대치가 있다. 즉 대단히 심오하거나 한국적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르지는 않을 거라는. 그러나 이 책은 그런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그 어느 한국인 평론가 못지않게 한국 소설에 대한 심오한 이해와 넓고 본질에 가닿은 해석이 놀랍다. 한유주, 장강명, 은희경, 김애란, 저자와 사적인 친분이 있는 이승우에 이르기까지. 미처 읽지 않은 소설에 대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그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스포일러가 되는 것은 지양하면서, 소설과 작가, 그것이 태어난 한국의 사회, 경제적 상황까지 심도 있게 고찰한다. 


특히나 이제는 사라져 가는 한국의 포장마차에 대한 아련한 정경에 대한 글은 한 편의 아름다운 단편 같다. 파란 눈의 한국 문학을 연구하는 프랑스인이 포장마차에서 한국어로 이제는 사라질 옛사람들과 밤새 나누는 일회성의 정담의 풍경은 박완서, 김승옥이 그렸던 포장마차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보다 더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의 MZ 세대가 느끼는 구조적 불안에 대한 해석 또한 냉철하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아야만 한다. 새로운 사회 규칙은 과잉 상태이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기준의 부족이 아니라, 기준의 과잉이다. 새 시대는 긍정의 과잉으로 특징 짓는다. 

-pp.42


우리가 기준의 과잉으로 억압하는 청년들에게 그들의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강요했다는 고백을 그 사회 속의 기득권인 기성 세대가 과연 과감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빛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애정을 가지고 이국의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그곳에서 거주하고 그곳의 언어로 그곳의 글을 읽고, 그곳의 사람들과 교유하며 진단하는 여러 문제적 지점들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오리엔탈리즘과 대척점에 있을지도 모를 저자의 신중한 제언의 울림이 크다. 그리고 그 진동의 폭은 결국 저자가 한국의 작가와 문학에 가진 진심어린 애정 덕택일 것이다.  


저자가 예견적 시각이라 상찬한 우리 작가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누군가 하는 우리의 이야기 덕택에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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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즘
브라이언 딜런 지음, 김정아 옮김 / 카라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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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에 대한 에세이를 표방(글쎄, 작가 자신의 표현은 아니다.)한 이 하얀 표지의 작은 책자는 에세이라는 장르에 대한 천착이라기보다는 온갖 편린이 부유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울프와 몽테뉴, 바르트, 손택, 디디온을 읽고 직접 우리의 글을 쓴다는 게 가지는 의미에 대한 깊이 있는 단상에 더 가깝다고 느껴진다. 그 단상들은 언뜻 겉으로는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친연성을 가지고 조합되어 하나의 매력적인 인생의 풍경화와 저자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저자 브라이언 딜런은 시종일관 모든 것에 회의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그 자신이 에세이라는 이 천대 받은 장르를 탐구함으로써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가진 아름다운 에세이집을 만들어 냈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는 글.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글. 형식, 스타일, 표면적 짜임새의 차원에서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고 이로써(누군가는 "이로써"에 이견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룩할 가능성이 있는 글. 

-pp.16


브라이언 딜런의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는 인생에 대한 것처럼 들린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시험하고. 추정하거나 감행하는 만큼, 실패로 끝날 가능성도 높은. 재난의 틈에서 무언가를 구해낼 가능성이 있는 것. 그건 우리 개개인 앞에 놓인 삶과 다름 아니다. 그러니 그가 그렇게나 집착하는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도 비단 에세이만이 아닌 인생 그 자체에 적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허무와 싸우는 것. 무질서와 무의미한 세상에서 어떤 자세를, 어떤 노선을 뽑아내는 것." 내가 오늘 어떤 형식과 스타일에 달라붙어 그것이 마치 아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부풀린다면 그건 생래적 허무와 싸우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결국 흩어지고 해체되고 무용해질 것임을 알고 있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는 데 스타일보다 더 좋은 대안이 있을까? 본질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고 그것에 열정을 쏟는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을까? 가련해 보일까?


십대 시절 양친 부모를 모두 잃고도 침대에서 여전히 읽는 일을 하며 그 상실을 견뎌냈던 브라이언 딜런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렇게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순간들"을 이 유서깊은 장르로 치환해서 받아들인다. 언어로 지은 이 에세이라는 집은 허무와 재난과 싸우려 하지만 결국 질 것이고 그 지는 순간 그 자체를 형상화며 붕괴한다. 그 불안정함과 위태로움이 에세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자 강점이다. 


존 던의 인용은 저자의 메시지의 결정체일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무덤을 찾기 위함"이라는 17세기 시인의 설교에 대한 이야기다. <에세이즘>은 죽음, 허무, 붕괴에 대한 이야기면서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빛의 먼지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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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8-01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7월말 8월초는 늘 더운 시기이긴 하지만, 올해 많이 더운 것 같아요.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3-08-02 08:48   좋아요 1 | URL
오늘 새벽에 바람결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이제 곧 시원해지겠죠.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쇳밥일지 - 청년공, 펜을 들다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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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는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아니,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실제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나가는 사람의 고통, 회한, 보람, 슬픔은 영영 그 깊이와 무게를 실감할 수 없다. 


여기 마산의 한 청년 용접 노동자가 있다. 또래가 교실에서 수능 공부를 할 때 실습실에서 기판을 납땜하는 연기 때문에 두통을 앓고 이미 졸업 이후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던 아이는 대학교 교정이 아닌 공장에서 방진복을 입은 첫사랑을 만난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를 다시 대학으로 돌려보낸 이도  누나 같은 이 친구다. 


우리가 상정하는 대다수의 스물 언저리의 청년이 보내는 대학 교정에서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청년 노동자들의 삶을 관찰자의 공허한 언어가 아닌 당사자의 목소리로 듣는 일은 놀랍고 순간순간 미안해지는 일이다. 정말 이 정도였어? 산재를 당하고도 산재 신고도 하지 못하고 폭염에 정규직 노동자들이 쐬는 에어콘 바람도 사치였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무지가 때로는 죄악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한다.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의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야 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어둡고 처절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짬마다 나타나는 인생의 멘토 같은 아저씨들,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건강한 사랑, 기대하지 않았던 타인들의 따뜻한 배려. 천현우 저자가 그려내는 이 신산한 삶의 풍경이 역설적으로 가지는 온기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는 의미들은 곳곳에 뿌려져 있고 저자의 입담은 그 의미를 한층 더 심오하고 빛나게 만든다.


한 달 정도 지나 마침내 완공한 징검다리를 보게 되었다. 떡갈나무색 페인트를 뒤집어쓴 우리의 창조물에 올라섰다. 행여 볼트 하나 빠졌을까, 용접에 균열이라도 있을까 세심하게 살폈다.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은 널찍한 호숫가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람으로 가득찬 심장에서부터 사방으로 짜릿한 느낌이 퍼져나갔다. 

-천현우 <쇳밥일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의 안전망 사각 지대에서 떨었던 청년이 만든 다리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우리는 단지 그 다리를 건너면 그뿐이었다. 익명의 노동자들이 그 다리를 만들며 용접을 해서 철 사이를 메꾸며 어떤 것을 두려워했고 어떤 것을 꿈꿨는지 그들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었던 그 현실에 대한 이야기. 단지 화내고 푸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커피를 마시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소설을 쓰고 운동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며 하루하루 더 나아갔던 이야기. 


저자는 이 청춘의 노동 일지가 사적인 경험 토로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에서 답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사소한 것도 아니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내 임금이 내가 열심히 오래 일할수록 차곡차곡 오르고 어제의 불운이 결정된 미래를 몰고 오지 않는다는 믿음만 있다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죽이지 않는 사회. 저자의 마흔 살에는 그런 내일이 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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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03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 같습니다. 꿈조차 사회가 강요한 계층 사다리 안에서 꿀 수밖에 없다니...비극이네요..

blanca 2023-02-03 19:13   좋아요 0 | URL
작가 필력이 대단해요. 소설을 쓴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스토리텔링이 탁월해서 작가의 이야기가 정말 눈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읽혔어요. 재미와 깊이가 다 있는 책입니다.
 
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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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어떤 특정 규격과 기준, 범주에 넣기 곤란한 책이다. <달몰이>의 작가 조에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했다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어 남은 생을 자신의 침실에 갇혀 지내게 된다. 나는 그러한 자기 상황에 대한 절망, 연민, 승화의 개인적 경험담일 거라 여기고 책을 펼쳤다. 구체적인 고통의 현시들이 줄을 이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 멀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몸으로 산 세월보다 침실에 유폐되어 보낸 시간이 더 긴 작가가 내면으로 침잠하여 삶과 고통,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여 길어낸 진실들에 대한 거대한 산문시에 더 가깝다. 그 발견들과 그것을 표현한 언어의 깊이와 밀도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지금 산문을 읽는 것인가, 시를 읽는 것인가가 가끔 헷갈릴 정도로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에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스무 살에 포탄을 맞고 "나의 유령"이 된 조에 부스케는 그 순간부터 시인이 된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재난을 그의 바깥에 흐르고 있는 삶의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 사실들을 관통하며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우리에게 우리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겪은 일들은 내 바깥에 있다. 나는 생을 통과한다. 나는 결국 허무로 수렴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들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불행은 나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와닿아 떠나간다. 내 앞에 선 사람들, 내 옆에 선 사람들, 내 뒤에 올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생의 근본적 속성이다. 조에 부스케는 자신의 불운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생을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거대하고 심원한 하나의 본질에 합류되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 고통마저 그러한 차원의 것이라고.


네 고통도 의인화해야 그것을 이겨내는 격조차 생긴다.


'나'와 '나의 세계'와 '나의 삶'을 혁명적일 만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게 하는 책이다. 고통의 심연에 빠져 마땅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야망을 "사는 것"으로 치환하는지 보여주는 전범 같은 책. 


"우선 내가 내 심장에서 뜯어낸 책 한 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 바로 이 <달몰이>다. 내가 초래한 것들이 삶이고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그 경계를 뛰어넘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의 빛나는 언어로 보여준다.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발췌된 조에 부스케의 덧붙여진 해석은 멋진 미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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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18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분에 읽게 된 책 ˝랭스˝.
조에 부스케도 읽게 되면 다 블랑카님 덕분이겠습니다.

이 글이야 말로, 리뷰인지 산문시인지 모호하고, 모호해서 더욱 아름답네요.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이 문장은 특히 아름답지만, 솔직히 그 뜻을 제가 다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해본 적이 없이 관성적으로 매일을 채워와서 어렵게 느껴지는 지도.


blanca 2022-04-18 12:27   좋아요 1 | URL
그 문장은 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조에 부스케의 생각을 제 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요.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한 번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표시한 곳 위주로 필사를 해봤는데 역시 기분이 정말 오묘해졌습니다. 제대로 잘 읽어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수이 2022-04-18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개 주신 책들은 제가 다 좋아하는 책들이거나 좋아할 것만 같은 책들이더라구요. 달몰이는 아직 안 읽었으니;;;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2-04-18 12:28   좋아요 0 | URL
제가 후회하는 게 별 다섯 개 책을 엑셀로 좀 추렸어야 하는 건데...이 생각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서...언젠가 작업을 좀 해 보려고 해요. 누가 가장 좋았던 책 뭐였냐고 물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려서요. ^^;;

짜라투스트라 2022-04-1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진짜 한 번 읽어봐야 할 듯^^

blanca 2022-04-24 11:53   좋아요 0 | URL
네, 짜라투스트라님 정말 좋았어요.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겠다고 생각할 만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