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구 여행기 -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
문경연 지음 / 뜨인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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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 되면 교보문고 문구 코너 다이어리 판매대는 여전히 붐빈다. 내지를 그득 채우지 않더라도 새해에는 무언가 좀더 계획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일종의 의식처럼 종이 플래너를 사는 습관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아무리 스마트폰을 껴안고 살아도 내가 새해에 가지는 비장한 결심에는 종이와 연필이 필요한 법이다. 그 틈에 중후한 노신사가 서서 다양한 다이어리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신에게 새해는 당신을 둘러싼 젊은이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겠지만 여전히 새로운 결심과 의지와 파이팅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날이 죽어간다고 이곳저곳에서 애도하는 활자의 시대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문구 시장은 건재하다. 쓰지 않는 연필이라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연필들을 수집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종이 노트, 다이어리 꾸미기(일명 다꾸), 스티커, 스탬프, 엽서, 파일 등에 다양한 브랜드가 생겨나고 확장된다. 사람들은 꼭 그것들을 백프로 소비하지 않아도 소유하고자 수집하고자 하는 열망에 기꺼이 굴복한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고 대단한 공간을 요구하지 않는 이 시장이 죽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동네 문방구가 하나둘씩 문을 닫아도 그 안에서 고작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지우개 한 개를 한 시간이 넘게 고르며 주인 아주머니와 근황을 주고 받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사랑은 비단 책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문구에게까지 확장된다. 이 사랑은 그런데 왠지 떳떳하지가 않다. 그게 문제였다. 문구 사랑은 왠지 내밀해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불러온다. 


'아날로그 키퍼'라는 범상치 않은 문구 브랜드를 운영하는 저자도 그러한 저어함을 고백한다. 이 책의 표지에는 심지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용기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 전쟁에 뛰어드는 대신 문구덕후는 63일간의 문구 여행을 감행한다. 파리에서 베를린에서 바르셀로나에서 런던에서 상하이에서 그녀가 찾아간 곳은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문구점이었다. 문을 열기 전 대기했다 주인이 장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설레어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구 여행이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러웠다. 문방구에 찾아가고, 사진 찍는 게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 멋진 문방구를 눈으로만 담으면 되지, 왜 사진을 찍고 글을 써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배배 꼬인 마음을 이겨내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잔뜩 흡수했다. 마음껏 호들갑을 떨었다. 

-p.180


그녀의 호들갑이 때로 생략했던 기록들이 쑥스러워했던 사랑이 열정이 이 책의 골조다. 그 여정에서 사회에서 주입한 것들이 아닌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세상을 향해 표현하는 일은 통속적이지 않다. '아날로그 키퍼'에서 구입한 소위 떡메모지의 그 평범하지 않은 격자무늬도 주인장의 마음을 알고 나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를 목도하는 느낌이다. 그 사랑은 언뜻 가벼워보이지만 제대로 느끼면 묵직하다. 사랑하는 것을 끝까지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시연에 전염된다. 내가 제대로 미처 표현 못했던 사랑들에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은 이 아름다운 음각의 각인들이 남아 있는 하얀 책에 대한 되돌려 보내지 못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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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 부는 사람 - 모든 존재를 향한 높고 우아한 너그러움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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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올리버는 사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던 것같다. 여러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녀의 시가 낭송되고 각종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은둔에 가까운 삶을 그녀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그녀는 자신의 시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느낌으로 응답한다. 그리고 그녀의 동반자를 묘사한 시 <휘파람 부는 사람>을 그래도 딴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 되었다.


<휘파람 부는 사람>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활에 대하여 미주알고주알 고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솔직하게 표현한다. 우리는 그녀를 대면하지 않아도 그녀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온한 삶을 상상할 수 있을 정도다. "지난주에는 황금빛 작은 태양 같은 거북이알을 먹었고, 오늘은 주엽나무 꽃을 먹을 것이다."는 엉뚱한 고백. 관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손수 요리해 먹으며 살찌우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진다. 가식도 과장도 생략도 없다.


그녀 자신의 얘기뿐만 아니라 프로스트, 휘트먼, 포에 대한 이야기는 짧은 지면 안에 시인들의 전생애를 심도 있게 관찰하고 그들의 시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분석도 인상적이다. 막연하게 그들의 삶의 단편들을 접하고 그들의 시를 토막토막 끊어 읽는 우리들에게 진짜 시인이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위대한 선구자들에 대한 분석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구나 싶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일례로 우리는 이 대목을 읽고 나서야 포가 왜 그렇게 음울하지만 아름다운 시들을 토해냈는지 그의 성장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게 된다. 시인들의 개인적 삶을 그들의 시와 분리해서 이해한다는 건 그들의 작품을 진정한 의미에서 해독하는 데에 한계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다가 가느다란 은빛 줄무늬가 들어간 검정 레이스를 흔들어 과시한다. 이따금 개들이 행복한 발로 모래밭을 질주하다 올아온다. 우리가 다시 방파제에 이르러 마당을 건너기 전에 밤은 지나가버린다. 우리는 집 문 옆에 서 있다. 우리는 날카롭고 흰 낮으로 이어지는 연푸른 반도에 서 있다. 작고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장미 덤불 아래서 뛰어간다. 개들이 기분 좋게 짖어댄다. 

날마다 하루가 이렇게 시작된다.

-p.138


그의 전령인 말로 그려지는 그림 같은 풍경에 사람과 문명은 없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휘파람 부는 사람'이 든든하게 서 있다. "아름다운 걸 보고 가슴이 환호할 때마다 달려가 말해 주고 싶은" 사람이다. "사춘기가 다시 돌아온 기분"을 느꼈던 사람과 30여 년을 함께 살아왔다는 그녀의 고백은 감동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고 삶의 의미를 확신하는 시인의 희망어린 마무리에 2020년이 따스해져 온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그녀와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족이 필요없는 얘기다. 간직하고 싶은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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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1-03 0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을 읽으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와 테이트를 떠올립니다. 아침부터 뭉클합니다 감동 감사드려요ㅜㅜ

blanca 2020-01-03 16:46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달밤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그렇게 좋다면서요! 몇 번이나 읽을까 하나 지나갔는데 결국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하긴요, 시간 내서 글 읽어주시는 님이 고맙죠.

프레이야 2020-01-03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굿모닝 블랑카님
우리 모두는 서로 운명이다. ^^

blanca 2020-01-03 16:46   좋아요 1 | URL
벌써 오후가 되어버렸네요. 새해 인사가 늦었습니다, 프레이야님. 많은 성취가 있었던 나날들 더 복된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라로 2020-01-03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름 알라딘에서 메리 올리버를 일찍 발견했다고 혼자 우쭈쭈하는 저는
이제 메리 올리버와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네요.
너무 책을 안 읽고 있는 저는 블랑카 님을 보며 반성은 안 하고 그냥 부러워 하는 걸로 만족.^^;;;

blanca 2020-01-03 16:48   좋아요 0 | URL
라로님은 지금 정말 바쁘고 보람된 나날들을 보내고 계시잖아요. 저는 라로님이 부럽습니다.^^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 - 시인 장의사가 마주한 열두 가지 죽음과 삶
토마스 린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테오리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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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며 의례와 의식이 단순히 허례허식이 아니라 생의 주기마다 일어나는 탄생, 성장, 진학, 결혼, 죽음 등의 외부 사건을 자신의 내면과 삶에 통합하는 데에 적잖은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간소화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얘기지만 그 의식 자체가 가지는 무게는 폄하할 것이 아니다. 특히 장례식이 그러하다. 어쩌면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은 자, 우리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자를 보내고 기억하고 아쉬운 점, 죄의식을 절차에 의해 떠나 보내고 남은 역할을 추스르는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살게 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매년 나는 우리 타운 사람들 이백 명을 묻는다. 거기에 추가로 서른 명 정도는 화장터로 데려가 불에 태운다. 나는 관, 지하 납골당, 유골함을 판다. 부업으로 묘석과 비석도 판매한다. 요청이 있으면 꽃도 취급한다.

-p.17


<죽음을 묻는 자, 삶을 묻다>의 저자 토마스 린치의 직업이다. 그는 시인 장의사다.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 종사하는 일종의 가업이다. 그와 그의 형제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 친구, 이웃 주민, 동료의 죽음을 갈무리한다. 그리고 시를 쓴다. 만가를 부른다. 


우리의 핵심-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은 늘 죽음과 죽어감과 슬픔과 사별이었다. 그러니까 생명, 자유 또......뭔가의 추구 같은 더 강건한 명사들의 취약한 하복부인 셈이었다. 우리는 작별, 안녕, 마지막 경의를 거래한다.-p.45


시인이 아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생계의 수단으로 물려준 아버지는 언제 장례에 관한 책을 쓸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응답이다. 시인과 장례지도사를 오가며 그는 결국 어떤 노래든 죽은 자를 추모하는 만가가 될 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일랜드인 이민자로서의 성장과정, 숱하게 보고 듣고 경험한 불합리한 죽음들, 이혼하고 싱글파더로 아이들을 양육해야 했던 나날들, 죽음을 거래해야 하는 직업적 특수성 들은 그의 묵직한 때로 자조적인 어조에 실려 과연 우리가 죽음을 전제한 삶의 의미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까 반문하게 한다. 그가 결국 사랑과 믿음,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진부하지만 설득력 있는 진실이라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된다. 종착점과 마침표를 안다고 해서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그 균형의 지점에 어떻게든 폭력이 개입되기 마련이라 인정하지 않는다는 그의 얘기가 인상적이다. 그래서 그는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스스로 택하는 죽음에 찬성하거나 전염되지 않는다. 


이월이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게 나한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세부적인 것들에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굳이 물어보니-이월이면 좋겠다. 내가 처음 아버지가 된 달, 내 아버지가 죽은 달, 그래. 심지어 십일월보다도 낫다.

-p.369


그 자신의 장례를 위한 지침이다. 그의 자녀들이 절대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회피하지 말기를 바라는, 끝까지 아버지의 장례의식을 참관하고 참여하고 함께 하기를. 그래서 마침내 잘 떠나 보낼 수 있기를, 남은 죄책감마저 그대로 온저히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전해져온다. 별로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그 엄연한 종결들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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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9-12-30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은 죄책감마저 그대로 온전히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전해져온다. ...는 글이 아프지만 깊은 느낌을 줍니다.
블랑카님은 아직 부모님의 장례식을 치뤄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책을 많이 읽으시고 생각을 많이 하시는 분이시라
경험을 안해도 이런 문장이 나오나봐요.^^;
그나저나 언제 미국에 또 안 오세요? 보고싶네요.^^ 새해 인사도 전할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9-12-31 09:55   좋아요 0 | URL
라로님, 흑, 그립네요. 프쉬케님도 함께 참 따뜻하게 맞아주셨는데... 아마 제가 미국 가는 것보다 라로님 한국 오시면 뵐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어요. 라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로님에게도 왠지 근사한 한 해가 될 듯합니다. 보지 않았는데도 왠지 친하게 느껴지는 해든군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
 
장수 고양이의 비밀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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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의 하루키와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의 하루키의 낙차는 시간 차만큼이나 크다. 그도 그럴 것이 <장수 고양이의 비밀>에서의 하루키는 아직 젊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화자는 영원한 청년 같은 느낌도 이기고야 마는 노년에 이미 접어들었다. 진지하고 조심스럽고 성실한 작가로서의 고백은 그의 대담한 서사와 대조를 이룰 정도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기발함, 유머, 엉뚱함, 도발의 흔적을 찾고 싶다면 좀더 시간을 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군데군데 눈물이 날 정도로 웃긴 얘기가 많다. 자신을 인간 관계에 서툴고 재미 없는 사람인 것처럼 자주 폄하하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반증처럼 보일 정도로 하루키의 에세이에서의 그의 모습은 재미있다. 그건 그를 둘러싼 현상 그 자체보다 그 현상을 묘파하는 하루키만의 하루키스러운 능력에 빚진 바가 클 것이다. 그렇다고 내도록 가벼운 얘기는 아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쉽다는 건 젊은이에게 흔히 보이는 경향인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가 아닐까 하고.

물론 나이들어서도 상처받을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도 그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두고두고 곱씹는 건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설령 상처를 받거나 화가 나도 꿀꺽 삼켜버리고 오이처럼 서늘한 얼굴을 하려 애썼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훈련을 거듭하는 사이 점점 정말로 상처를 받지 않게 되었다.

-p.125


아, 대체 오이처럼 서늘한 얼굴은 어떤 것일까? 하루키도 젊은 시절 사람들에게 종종 상처를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는 고백은 신선했다. 그리고 점차 정말 그의 말대로 훈련의 덕이든, 연륜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처에 강력한 면역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나의 그것과도 겹치는 대목이 있어 반가웠다. 정말이지 그랬다. 아마 이십 대까지도 그랬던 것 같다. 누구의 빈정거리는 말 한 마디로 한 달을 망칠 수도 있었다. 무심코 던진 나에 관련한 평가에도 극도로 민감했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서늘한 오이 같은 담담함 대신 토마토처럼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흥분했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 안에 잊힌 채 고여있다 하루키의 지명으로 벌떡 일어선 것이다. 그래서 좋으냐, 이제 괜찮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다른 얘기다. 편안해지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이야기를 쓰는 일, 제로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어차피 비정한 세계다. 모두에게 웃어주기는 불가능하고, 본의 아니게 피가 흐르기도 한다. 그 책임은 내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p.136


하루키다운 이야기다. 그가 만드는 평행 우주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의 왕국의 뒤안길은 이러했다. 비정하다,는 말의 무게가 새삼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싶다. 


여행에 항시 가져갔다는 <체호프 전집>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여행에 대한 좋은 참조가 된다. 나에게도 이러한 '여행의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판형인지 궁금하다. 주오코론샤에서 나온 전집이라는 데 이북과 볼 거리가 난무하는 요즘에 오히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다. 지금도 하루키가 전집 중 한 권(전집 전체를 설마 가지고 비행기를 타지는 않겠지.)을 가지고 여행하는지 궁금하다. 이미 대작가가 된 과거의 하루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십 년을 넘게 장수한 하루키 고양의 뮤즈의 이야기는 왠지 스포일이 될 것 같아 삼가는 게 좋을 듯하다. 하루키의 아내가 만화 <유리의 성>에 빠져 등장인물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 '뮤즈'라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하루키도 이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었단다.


여하튼 생각보다 괴팍하고 엉뚱하고 소심하지만 자기가 믿는 가치에 대해서는 한치 양보가 없는 그의 중년의 어조를 듣는 일은 유쾌하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책이었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을 듣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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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9-06-02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저도 어제 주문한 이 책을 받아서 읽어볼 참입니다. 젊은 시절 하루키를 다시 엿볼 생각에 두근두근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드려요^^

blanca 2019-06-03 11:20   좋아요 0 | URL
책이 두께가 좀 있어요. 사실 큰 기대 없었는데 하루키 특유의 너스레 덕분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네요. 참 유쾌하고 재미있더라고요. 달밤님도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나왔다. 근 삼 년만에...

문제는 공백기에 6권까지의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많이 잊어버려 연결이 잘 될까 싶다. 솔직히 막 너무 재미있거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잠을 못 이룰 정도의 이야기가 분명 아닌데도 때로 꾸벅꾸벅 졸면서도 그 만연체의 내면 고백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8권까지 읽고 다음 권이 나올 때까지 나는 또 거진 잊어버리겠지만 그 잊음 가운데 또 잊지 못할 무언가가 남을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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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1-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6권까지 읽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프루스트 사후 100주년을 맞이하는 2022년에 완간될 예정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지금... 고민하고 있어요. 지금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말이죠.

blanca 2019-01-17 04: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뒷북소녀님. 아, 그렇군요. 이게 출간 순서대로 읽기 시작하니 밀리지 않아서 좋긴 한데, 이야기 흐름이 자꾸 끊겨요. 그래도 예쁜 꽃 장정의 책들을 주르륵 꽂아 놓으면 뭔가 좀 보람차고 그렇습니다. 2022년 완간 예정이라면 저는 다 읽고 나도 무슨 얘기였는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그림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