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너무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가 열여덟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과 남자, 사랑.

 

 

 

진부하지 않았고 통속적이지 않았고 대신 달콤하고 선뜩했다.  친정 엄마와 혼수품을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에피 브리스트의 성정, 그리고 운명까지도 암시해 버리는 그 예리하고 섬세한 문체에 일단 놀랐고

 

그녀는 가장 우아한 것만 마음에 들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없으면 둘째로 좋은 것은 아예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둘째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피 브리스트> p.31

 

그녀의 안온하고 때로는 지루한 결혼생활에 뛰어들어온 남자는 의외로 근사하지 않았고 바람둥이였고 둘은 하이네의 시를 가지고 유희를 한다. 바닷속에 가라 앉은 전설의 도시의 환영을 보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던 시인, 다가오는 적군에게서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하느님에게 간청한 과부가 하느님의 담으로 받은 하얀 눈. 이 시들은 이들의 사랑의 가벼움을 덧없음을 은유하고 예언하는 것 같다. 에피는 물론 파멸한다. 사랑으로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조차 용인받지 못하는 강고한 사회적 시선 앞에서. 이 소설은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제도의 허위를, 욕망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노작가의 소망이자 희망이다. 로맨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썰매 안에서 시작되는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남편이 에피의 배신을 알아차리고 결투를 하는 것도 에피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다수의 시선들, 그 시선들을 엮어내는 규칙, 관습들. 그 안에서 과연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에피 브리스트>는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회자된다. 상류층 여성의 외도, 그리고 파멸. 이런 지극히 통속적이고 교조적이고 싶어하는 스토리를 공유하지만 이 셋은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작가들은 나란히 세 여인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욕망을 들여다 보지만 그녀들을 단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애초에 교환 조건으로 성립된 계약인 결혼 제도의 허위와 그 틈새에서 비어져 나오고 마는 본래의 욕망, 그 욕망이 어그러진 형태로 표출될 때 인간이 맞닥뜨리는 비극에 다가간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안나와 음독 자살을 하는 보봐리 부인과 병에 걸려 죽는 에피는 실패한 사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벌써 보듬어 주어야 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뒤늦게 추억하고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착각하고 대체물을 향해 욕망을 투사하고 남는 것은 자멸감이다.

 

에피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인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다수의 시선, 다수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일들도 사회에서 주입당한 가치 기준하에서 비롯되는 일인 경우가 많다. 그것이 아니었다,고 깨닫는 것. 거기에는 항상 일말의 슬픔과 비극과 고통이 따른다. 거기에서 정지하고 마는 것이 이 여인들의 이야기의 한계이기도 하고 다분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극복하지도 체념하지도 않고 눈감아 버리는 것. 세 작품은 약속이나 한 듯 결말도 닮아 있다. 읽는 즐거움은 <에피 브리스트>가 제일 크고 감동은 <안나 카레니나>가 제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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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도 처음 들어본 책이에요. 저 역시도 읽게 된다면 [안나 카레니나]를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2-01-26 22:08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우연히 읽게 되었어요.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가며 읽었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임팩트는 정말.... 말 줄임표 이상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네요. 약간의 인내 뒤에 무한 감동이 있는 소설인 것 같아요. <에피 브리스트>가 아주 무게감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노년의 남자 작가가 이렇게 섬세하고 예리하게 여성의 심리를 흥미롭게 파헤친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stella.K 2012-01-2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쓰신,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가 열여덟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과 남자, 사랑."
확 끌리네요. 어떻게 썼을까 궁금한데요?^^


blanca 2012-01-26 22:09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다 읽고 나서 알았어요. 이 작가가 육십이 되어 소설을 처음 쓰고 이 작품은 여든 가까이에 완성했다는 사실을요. 전혀 그렇게 안 느껴졌거든요.

stella.K 2012-01-27 12:17   좋아요 0 | URL
와우, 정말요?
이건 저에겐 완전 복음이군요. 굿뉴스!
내 나이도 늦진 않은 거네요.ㅋㅋ

moonnight 2012-01-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귀가 솔깃! 올해는 제발 책 좀 작작 사고 있는 책부터 읽자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럴 수는 없겠네요. (체념;)

blanca 2012-01-26 22:11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고 있답니다. ㅋㅋ 돈과 시간, 수용공간, 시력만 허락한다면 책의 바다에서 헤엄치고파요^^;;;

비로그인 2012-01-2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보관함에 담았어요 :)

blanca 2012-01-26 22:11   좋아요 0 | URL
옙, 수다쟁이님도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책장이 휘리릭 넘어간답니다.

프레이야 2012-01-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들어본 이름, 당장 담아갑니다.^^
블랑카님의 리뷰는 지름신이에요.

blanca 2012-01-26 22:12   좋아요 0 | URL
^^ 이런 지름신은 괜찮지요?

... 2012-01-2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피 브리스트,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가 한 세트라고들 해서 이 책을 사두고 아직 안 읽었네요. 이 책 살 무렵 블랑카님의 <여명> 리뷰를 보고 그 책과 같이 샀는데 ^^ 재미있는 책이었군요. 이 책에 대한 알라딘 리뷰들도 인상적이었어요.

blanca 2012-01-27 10:2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이번 기회에 읽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저도 이 책 리뷰들 읽고 구입을 결심했지요.

비로그인 2012-01-26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 브리스트> 리뷰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ㅎㅎ 지금은 창고에 넣어두었지만 예전에 쓴 <안나 카레니나> 리뷰에서 함께 거론한 적이 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 공연히 반갑네요.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데다 주인공의 파격성에서도 가장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작품이란 생각에 짠했었는데 블랑카님이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blanca 2012-01-27 10:25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저도 표지가 참 이쁘다, 정도였지 읽을 생각 못하다 우연히 읽게 되었답니다. 이런 책을 읽기 시작하니 다 이런 부류로 또 관심이 쏠려서 미시마 유키오의 <비틀거리는 여인>이 지금 옆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