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콧물감기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외출도 했다. 주말부터 여덟 시간 간격으로 열이 사십 도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예감이 안 좋았다. 아이는 열이 오르자 처지기 시작했다.
그는 비에 젖은 어두운 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늦췄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순탄하기만 했고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대학도, 결혼도, 경영학 고급과정 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다닌 일 년의 대학생활도, 투자회사에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게 된 일도, 아빠가 된 것도, 그는 행복했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형제 자매들은 다들 자리를 잡았으며 대학친구들은 모두 사회에 나가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p.101
나의 삶은 하워드처럼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도 있었고, 때로는 운이라고는 따르지 않는다고 비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쓰라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이는 폐렴에 걸렸다. 겁먹고 아픈 아이를 입원시키고 보조침대에 웅크려 세 밤을 자기까지 절망하지는 않았었다. 기관에 다니는 유아가 폐렴에 걸리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인생>을 갖고 와 베개로 쓰고 읽기도 하고 그랬다. 와닿는 구절들에는 줄도 그었다.
조지프 캠벨의 "모든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슬픈 예언처럼 가슴을 찔렀다. 아이는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악화되었다. 입원하고 오일 째 되던 날 아이는 하루종일 열에 들떠 먹지도 놀지도 않고 자고 또 잤다. 너무 무서웠다. 나는 모든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경구인 줄 체감하는 중이었다. 눈이 펑펑 오기 시작했다. 눈발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닿아 선뜩하게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부부의 아이는 생일날 등굣길에 당한 교통 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진다. 그 아이는 잘못되었었다. 펑펑 내리는 눈발 속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 속에 나 혼자 철저히 불행했다. 아이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이는 휠체어조차 탈 힘이 없는지 눈을 보지 않으려 했다. 강아지처럼 눈 위를 뛰어 다니던 과거의 나의 아이와 이렇게 누워 있는 아이가 같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알라딘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확인하던 그 평범한 일상들이 백 년도 더 오랜 옛날 일같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단 한 마디가 필요했다. 그 한 마디를 해 줬던 사람은 담당의가 아니라 외국인 의사였다. 낫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고 더 심한 아이들도 있었다,고. 미묘한 조사도 억양의 간극도 뛰어 넘어 눈이 파란 그 사람의 위로 한 마디에 나는 견딜 수 있었다.
거의 열흘 만에 열이 떨어지고 놀기 시작하게 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란 이다지도 나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한 존재인가 싶었다.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모든 일들 앞에서 정작 그것은 잊혀지고 수많은 자잘한 것들에 끄달리고 절망하고 집착했던 하루 하루가 어리석게도 느껴지기도 하고 눈물나게 그립기도 했다. 근시가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삶이 진저리가 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퇴원 후 집에 와서 레이먼드 카버의 차마 그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단어 하나 하나, 구절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이렇게도 절절하게 와닿을 수 있을까. 이미 이건 그냥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카버는, 소설 속 아이를 끝내 잃고 만 부부는 이미 내 등 뒤에 가만히 다가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 나의 아이는 건강해졌지만 때로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삶이 숨긴 이 예리하고 잔인한 칼날을 엿보고 나니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또 다시 다 잊어버릴 것이다. 사소한 일들에 한숨을 쉬고 불평하고 질투를 하고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이러한 가르침의 순간이 와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게 생이고 그게 인간일까? 그럼 하나만 아니 둘만 기억하기로 하자. 하나는 평범한 일상은 눈부신 축복의 찰나라는 것, 둘은 누군가에게 주는 작은 위로가 그 사람을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것. 솔직히 위로보다는 불길한 복선처럼 나를 겁나게 했던 책이지만 그래도 정말 정말 추천하고 싶은 카버의 책도 더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