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언 고닉의 <연애 시대의 종말>을 읽고 있다 화들짝 놀랐다. 뒷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가 각각 열여덟 살의 대학 신입생, 삼십 대의 교수로 만나 실제 불륜 관계로 나아갔으며, 이후 각자의 길을 가고 나서도 결국 노년에 다시 재회했다는 얘기를 비비언 고닉을 통해 알게 됐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가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하이데거와 연인관계였던 것도 모자라 노년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에 힘을 보탰다고? 비비언 고닉은 용감하게 아렌트의 허점을 공략한다. 즉, 그녀가 자신의 갈망,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삶에 통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감정을 이해하더라도 삶에 통합하지 못하면 오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감정을 부인하고 감정의 힘을 무시하면, 완전히 망한다.

-비비언 고닉 <연애 시대의 종말>






'아렌트와 하이데거 이야기는 비평가가 아니라 극작가의 영역'이라는 고닉의 이야기는 맞다. 머리로 옳고 그름을 재단할 사안이라기보다는 십대의 영특한 여학생이 학문적으로나 위계로나 자신을 압도하는 젊은 유부남 교수와 함께 '마의 산'을 읽고 사랑에 빠지는 일,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 그 영향력으로 다시 회귀하는 일은 비평가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랑을 지지하지 않지만, 어렵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관계를 전면에 내세워 모두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 칭하는 한 사람의 신화를 벗겨내면서도 그 사람의 성취나 기여를 폄하하지 않는 비비언 고닉의 다층적이고 섬세한 글쓰기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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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06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최대 수치가 하이데거라고 하는데… 저는 둘 다 그럴 수 있으려니 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난 것도… 완벽한 인간도 없고 모순 없는 인간은 더더욱 없는지라….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수치라기보다는 하이데거가 그 높은 지성으로 나치 부역한 게 더 수치죠… 에효.

blanca 2026-07-06 18:08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저는 처음 알아서... 사실 충격 받았어요. 그냥 인간이란, 인생이란 그럴 수 있는 거더라고요. 인간은 생각보다 더 약한 존재 같아요.

다락방 2026-07-0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지점이 바로 아렌트가 자신의 스승 하이데거를 뛰어넘었다는데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유부남에 나이도 많으면서 영민한 제자 꼬셔서 사귄것도 빡치고 그런데 아내랑은 헤어지지 않고, 심지어 아내와 아렌트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잘못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은 그의 아내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하여간 이 둘의 관계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제가 보기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이 사랑의 당사자가 아닌데 남의 사랑에 뭐라 할 수 있을것인가... 싶다가, 그런데 한쪽이 십대였고 한쪽이 애까지 잇는 유부남이었다는 데에서, 게다가 거기엔 위계가 존재했다는 데에서 그냥 또 쌍놈 되고 그렇습니다.

블랑카 님, 이들의 사랑에 대해 쓴 얇고 재미있는 책이 있어요. ‘엘즈비에타 에팅거‘ 의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입니다.부제는 무려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 입니다. 추천합니다!

blanca 2026-07-07 10:27   좋아요 0 | URL
여튼 저는 너무 놀랐어요. 노년의 재회도 무슨 드라마 같고요. 십대 제자를 유부남 교수가 그것도 당시에 이미 학계에서도 유명했던 하이데거였으니... 아마 이 영향은 아렌트 평생을 갔을 것 같아요. 죽은 시기도 너무 비슷해서 또 놀랐고요. 다락방님, 권해주신 책은 꼭 읽어볼게요.
 


이제 뭔가를 좀 알까 싶은데 이런 앎의 유효 기간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다. 우리는 뭔가를 향해 평생을 달리기도 하는데, 그 종점은 어처구니없게도 죽음이다. 이런 부조리가 또 있을까. 모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뭔가를 욕망하고 그것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더 나이 들어 노년의 삶을 사는 사는 사람들은 이런 부조리와 실존의 비극을 어떻게 삶과 화해시킬 수 있는 걸까. 종점이 뻔히 보이는데도 일상을 충실히 영위할 수 있는 그 용기가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존경스럽다. 내게는 각자의 고단한 운명을 감내하며 묵묵히 살다 죽는 일 자체가 영웅적인 행위로 보인다.
















리디아 데이비스의 <세부 속으로>는 예일대 문학상 재단에서 출판하는 '나는 왜 쓰는가' 시리즈 청탁으로 완성된 책이다. 통상, 이런 테마 선집 청탁에 의해 나오는 책은 아무래도 기대되는 틀 안에서 작가의 또렷한 개성이 발휘되기 힘들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 책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칠십 대의 노작가가 자신의 쓰는 일의 의미를 풀어나가며 대뜸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책, '수레바퀴 제작인의 작업실'을 들이민 것은 큰 복선이었다. 독자와 시대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는 우직한 내 세계에 대한 천착과 기록이 결국 '쓰기'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이 모든 쓸모없고 작은 것들의 가치는 결국 죽어 사라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뭔가에 몰두하고 사랑하고 시간을 들이는 삶의 그 무용해 보이는 아름다움과도 만난다. 젊은 시절 처절하게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는 <굶주림>을 써냈던 크누트 함순이 말년에 <풀이 무성한 오솔길에서>의 일상의 산책기를 툭 던져 놓고 가장 중요한 재판의 결말은 밝히지도 않은 채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그 무심함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수용시설에서 130킬로(13킬로가 아니라)미터를 걸어 집으로 갔던 존 클레어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언뜻 이 책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 노골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공명한다. 


결국 좋은 에세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원대한 사회학적 장광설에 얽매이지 않고 개인적 미시사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그 누가 독자로 와도 개인적인 읽기가 가능한 글 말이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듯하지만,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테마를 불러내는 작가의 필력에 처음부터 끝까지 마법처럼 걸려들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책 안에서 인용한 이 짧은 민속시가 이 책 전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빨간 털실로 이 손모아장갑 뜨기를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장갑은 이제 완성했지만,

내 인생은 끝나버렸네.

-러시아 민속 시(세부 속으로-리디아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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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rebooks 2026-07-03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의 몽상가님. 저는 에트르 출판사의 편집자 나희영입니다. <세부 속으로>를 읽으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후기를 써주셔서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읽기와 쓰기 그리고 살아감에 대한 리디아 데이비스의 통찰이 넘 깊고 흥미로워서 처음 이 원고를 읽고는 크게 감동이 밀려왔더랬습니다. 다락방의 몽상가님께서 데이비스의 생각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생각을 이러한 스타일과 필력으로 밀어부친 그의 문장에 깊이 공명하신 듯해 참 반갑고 감사합니다.

blanca 2026-07-05 15:00   좋아요 1 | URL
오, 안녕하세요. 리디아 데이비스는 원래 믿고 보는 작가지만, 이번에 또 한번 느꼈네요. 어떤 기획이라도 이 작가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는 걸요. 좋은 책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yrus 2026-07-05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과 겹쳐 읽었어요. 두 권의 책에 나온 핵심을 엮으면서 ‘쓸모없는 세부 사항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 언급된 ‘진지한 관찰자’가 글을 쓰면 남들보다 더 자세하게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죠. 저는 알라딘 서재가 없어질 때까지 ‘무용한 글쓰기’를 하려고 해요.

blanca 2026-07-06 09:26   좋아요 1 | URL
오, cyrus님 이미 읽으셨군요. 네, 우리 오래도록 여기 남아 무용한 글쓰기를 합시다!
 

둘째 아이가 열네 살이 됐다. 목소리도 변하고 체구도 커졌지만, 무엇보다 부모와의 관계가 변했다. 이제 더는 내가 절대적 보호자나 아이 앞에서 절대적인 권위자가 될 수 없다. 사사건건 대립하자면 끝도 없다. 어제의 아이는 없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급변하는 이 시대에 아이의 성장은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투쟁을 밖에서 지켜봐야 하는 어른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말 그대로 '줄탁동시'의 어미닭처럼 안에서 부리로 알을 쪼고 있는 병아리를 시의적절하게 도와줘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며 서두르지 않아야 하는데, 바깥 세계는 그런 잠깐의 여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미국의 흑인 노예제와 남북전쟁을 다룬 문학은 많지만, 몇 대에 걸쳐 한 가문을 뚫고 내려온 유장한 역사를 짊어진 한 소년의 성장기를 이토록 아름답고 치밀하게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소설은 포크너만이 쓸 수 있지 않을까. 똑같이 존엄한 인간을 단지 피부 색깔로 나눠 차별하고 한 가문의 노예로 종속시킨 백인의 오만함은 대지, 노동, 야생의 자연과 맞물려 그 윤리적 패배의 업,속죄, 수치심과 섞여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유장한 가문의 연대기를 형성한다. 그러나 단 하나 아이의 '성장'에는 주인도 노예도 신분도 차별도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고, 모두가 한 가족처럼 협력하여 하나의 지도를 그린다. 포크너 자신이 투영된 것만 같은 소년의 성장기가 그렇다. 


여섯 편의 연작 소설은 따로 분리된 것 같으면서 연결되어 있다. 가장 중심적인 인물인 아이작 매캐슬린의 탄생 비화를 풀어내는 <옛일>을 필두로 그 소년이 샘 파커스라는 흑인 노예 노인으로부터 야생에서 첫사냥을 배우고, 곰을 대면하게 되며 성장을 이뤄내는 이야기인 <곰>과 그 소년이 노인이 되어 후손들을 지켜보게 되는 <삼각주의 가을>로 이어지고, 다시 몇 대를 내려와 그 매캐슬린 가문이 흑인 노예 집안의 손자를 장사 지내주는 <내려가여 모세여>로 마무리된다. 외형적으로는 엄격하게 주인과 노예로 양분되어 있는 두 집안이 수 대에 걸쳐 서로 얽히고 설켜 살아나가는 대서사시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계층, 계급을 만들고 삶과 사회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해도, 인간의 생명과 삶은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나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 전인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세속적인 경계선 일거에 지워버리고 진짜를 기민하게 인식하는 직감이 있다. 이 이야기 속 소년의 평생을 지배한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그런 통념까지 다 부수어 버리고 난 대지에서 야생의 숲을 향해 전진하는 법을 가르쳐 준 흑인 노예였다. 
















일본에서는 어느덧 우리에게도 익숙한 용어인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 세대도 나이를 먹어 50대가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고립돼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80대가 된 부모의 연금에 기대어 사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소설은 중학교 시절 등교 거부 이후로 7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게 된 히키코모리 아들과 뒤늦게 그 아들의 가해자들을 향한 학폭 소송을 진행하게 된 50대 아버지의 이야기다. 초반부에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들과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가정의 모습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아들의 칩거의 원인을 간파하게 된 아버지가 법적 투쟁에 뛰어들게 되는 과정과 그 마무리가 여러 의미 있는 질문과 생각 거리를 남기는 소설이다. 이 과정에서 소위 어른들이 선호하지 않는 비학군지 지역 학교 출신 젊은 변호사 다카이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 아이의 성장에는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십대의 성장이란 안온하고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렇다고 현대 사회에서 아이들을 야생숲 곰사냥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안의 핸드폰 앞에서 홀로 고립되는 현대의 아이들이 알을 깨고 나오는 시간, 부모는 아이의 열리지 않는 방문 앞에서 망연히 서성인다. 성장이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일 텐데, 오늘도 이런 고립된 가정들이 겪고 있는 성장통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는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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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관점의 양 극단에 선 책을 읽었다.



























제목만 봐도 두 책이 대척점에 있다. <인간의 비참>과 <가치 있는 삶>. <인간의 비참>의 저자인 데이비드 베너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 교수로 소위 반출생주의자다. 말 그대로 비참한 존재이자 필멸의 소멸을 품고 있는 인간을 재생산하는 출산을 일종의 생식적 폰지 사기로 보고 있다. 삶의 큰 질문, '우리의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에 제한된 지상적 관점에서 그럴 수는 있지만 우주적 관점에서는 단호히 그 어떤 의미도 없으며, 이런 곤경이 삶뿐 아니라 존재의 궁극적 소멸인 죽음에도 있다고 단언한다. 태어나는 것도 나쁘지만, 죽는 것 또한 그 못지 않게 나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가망 없는 존재를 세상에 퍼뜨리는 출산 또한 나쁘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진실은 종종 추하다.'의 그의 이 '인기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철학을 듣다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건 비관이 아닌 끈질긴 낙관주의다. 그러나 이 낙관주의가 때로 책임 없는 모호한 환상이나 기만일 경우가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누구나 생로병사를 통과하여 결국 비존재로 간다. 지금 내가 '내'가 가진 것이라 느끼는 소망, 의지, 꿈, 추억도 결국 존재의 소멸로 종결된다. 이 덧없음을 직시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비참>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가 그간 묻어두거나 간과했던 이런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환기하며 퇴장한다. 이미 존재함으로써 겪어야 하는 생래적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불필요한 일들이었다. 


<가치 있는 삷>은 <인간의 비참>보다 훨씬 전에 읽은 책이다. 저자 마리 루티는 정신분석학자 줄리 크리스테바의 제자다. 마치 <인간의 비참>에 대항하듯 이 삶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삶의 의미를 길어올리는 위대한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삶의 덧없음은 삶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않고 드높인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덧없음을 사랑한다는 의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논거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불가지론과 불가사의함은 삶의 신비를 드높인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의미로 통합될 수 있다는 '끈질긴 낙관성'을 견지한다. <인간의 비참>의 데이비드 베너타라면 분명 이 저자가 순환론적 오류에 빠졌다 비판할 지점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삶에는 의미가 있으니까. 그 의미는 어디에서 오나? 살아내면 안다. 논리성 앞에서 선 삶은 허술하다. 


이 모든 인간적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면, 어떤 심원한 우주적 의미가 있어 그렇다고 얘기할 수 없다. 의미가 있어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났으니 실존적 불안을 안고 견뎌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이 존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소멸로 간다. 낙관주의도 비관주의도 침범할 수 없는 생의 자기 보존 의지는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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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독서모임이라면, 기꺼이 참여하고 싶다.


우린 동그랗게 모여 앉아 차를 마셨지 어디로 가는지 모를 하루를 쪼개 무엇이든 한 장씩 읽어나가자 그렇게 모아서 만든 구슬들을 쿠션 보자기에 담아와 동그란 탁자 위에 풀어놓아보자. 

-박상수 <서촌 일요 독서회>



이상하게 읽기도 전에 마음이 가는 책이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파스텔 민트 단일 색감의 이 시집을 동네 서점에 주문하고 찾으러 가서 큰 소리로 외쳤다지. 

"제가 주문한 책 왔다고 해서요."

서점 주인이 제목을 말해 보라 하자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 없는 말은.

"트렁크요."

서점 주인이 "메신저 백이죠."

내가 말해놓고 내가 포복절도했다. 친절한 서점지기가 "어차피 여행 갈 때 필요한 가방들이니 그럴 수 있어요."라고 위로해준다. 


시인의 '트렁크'가 아닌 '메신저 백'을 읽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몰입해서 읽는 경험을 하게 됐다. 시인의 어휘들은 짧은 단편들, 작은 그림들, 단편 영화를 연상시킨다. 과거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현실 자본주의에 소모되는 처절한 노동의 나날들이 교차하며 그 경계를 넘나든다. 아름다움을 환기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조를 피하지 않는다. 서정성과 서사가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맞아, 시는 이런 거야, 라고 절로 수긍하게 되어버리는 마법. 


좋아해요, 라는 말이 떨리면서 흘러나오는 순간을 더할 수 없는 기분으로 좋아해요.

-박상수 <다하지 못한 마음>


내가 있는데 없는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박상수 <파견>-기울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고백을 기다리는 시간과 나를 마치 투명인간, 종이상자 하나 정도로 취급하는 근로의 나날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형언하기 힘든 모순의 지점을 통과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시인은 많지 않다.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한줌의 사람'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누가 한숨처럼 내뱉어도

우리가  여기 모인 게 기적이야! 그런 말로 되받을 줄 아는"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그런 정경을 그려낼 수 있게 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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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4-16 0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정리하고 구매를 자제하는 중인데, 블랑카 님의 글 때문에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blanca 2026-04-16 09:41   좋아요 1 | URL
저는 자목련님 만큼 시에 조예가 깊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 시집은 진짜 압도적으로 좋았어요. 소장하려고 줄도 박박 그었네요. 오랜만에 진짜 시를 읽는다는 느낌도 들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