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좋아하고 가지고 싶어하는 것에서 의연해지기란 쉽지 않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한 위계에서 자유롭기란 더더욱 그렇다. 당연히 보이는 가치가 다가 아니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사랑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입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그런 원칙에 따라 살기란 시지푸스가 거대한 바위를 중력에 역행해 끌어올리는 것처럼 어렵다. 
















걸을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


<종이 동물원>의 sf 작가 켄 리우가 맞다. 사실 켄 리우가 뜬금 없이 도덕경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해서 놀랐다. 그러나 막상 운 좋게 그의 필체로 "May you find your own path."가 사인되어 있는 이 도덕경 판본을 읽어나갔을 때 왜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가는 하필 이천오백 년도 전에 쓰인 노자의 사상을 다시 독해하고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내밀었는지 십분 이해가 갔다.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질로 돌아가는데 이 정갈하고 아름다운 책은 큰 길잡이가 되어줬다. 특히나 "모든 생은 공포와 아름다움이 함께 추는 춤이다."라는 작가의 말은 더더욱 더. 


발생시키고, 키우고, 보호하고, 치유하고, 돌보고, 지킨다. 소유 없이 창조하고, 기대 없이 베풀며, 지배 없이 양육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형언할 수 없는 덕의 특성이다.

-길을 찾는 책 도덕경, 켄 리우


지금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보이는 것들이 지나고 나면 다 부수적인 것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일깨우는 대목이다. 















놀라운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말 그대로 평면 도형들의 플랫랜드에서 사는 정사각형이다. 우연히 구와 함께 3차원 공간을 여행하게 된 정사각형은 그 새로운 관점을 설파하려다 사회적으로 불온 세력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플랫랜드에서 다각형의 변이 모두 같지 않은 불규칙 도형들이 태어나면 그들을 균질화하기 위해 부모들이 위험한 수술을 감행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녀들을 정다각형으로 만들고 깎고 다듬어 최상위계층인 원에 가깝게 만들수 있다면, 부모들은 자식의 죽음도 불사한다. 각자의 차원에서 편견에 갇힌 도형들의 우화는 놀랍도록 인간 세계를 닮았다. 우리는 우리가 갇힌 세계 안의 절대적 가치와 관점 안에 갇힌다. 누군가 손을 내밀어 다른 차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 관점이 영원한 족쇄가 되어버리는 걸 막을 수 없다. 이런 도형의 기하학적 세계가 여전히 현실감을 가지며 공명하는 지점은 이런 인간의 경향성을 간파하고 형상화한 작가의 통찰력도 통찰력이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회귀하고 마는 인간의 근원적 편향성을 탈피하는 게 그만큼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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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11-23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랫랜드는 과학소설이면서 수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지요.예전 과학소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지 않았을 적에 과학 소설 리스트가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는데 그때 구한다 구한다 하면서 깜빡 잊은 작품인데 blanca님 덕분에 읽어볼 마음이 다시 생겼네요.
그나저나 이런 작품이 19세기 후반에 쓰였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blanca 2025-11-24 10:45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저 생각보다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3차원의 세계를 인지한 2차원의 정사각이 저자라니 이 상상력이 정말... 주석 달린 걸로 다시 읽어볼까 싶을 만큼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롤런드는 한숨지었다. 신중해야 했다. 언쟁을 중단해야 했다. 지금 반대하면 로런스의 반항심만 커질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좋아, 네가 원하는 건 뭔데?"

이건 질문이었다. 로런스는 대답하기 전에 시선을 피했다. "모르겠어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끔찍한 계획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서 털어놔봐."

"연기를 해볼 생각이에요."

롤런드는 아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그렇지.

-이언 매큐언 <레슨>


롤런드의 아들 로런스는 공부를 특히 수학을 탁월하게 잘했다. 그러니 대학에 가지 않은, 가기 전에 학교에서 도망쳐버린 롤런드에게 로런스를 수학에 특화된 칼리지에 보내는 건 일종의 평행우주에서 실현된 자신의 또 다른 대리자아의 환상적인 삶이었다. 심지어 로런스는 이미 입학허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역시 아들은 그의 기대를 배반한다. 


이 한 장면에서 나는 딸을 떠올렸다. 나와 사춘기 딸은 자주 부딪혔다. 나는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질문은 이미 내가 규정한 이상적인 답안을 전제한 것이었다. 아이가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 나는 이미 그게 내가 정한 그 경로를 이탈한 것이라 틀렸다고 여기곤 했다. 


오늘 아이는 수능을 보러 갔다. 교문 앞에서 아이를 들여보내며 내가 잘못한 일들과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며 딸에게 했던 행동과 말들이 한꺼번에 격랑이 되어 몰아쳤다. 어쩌면 그렇게도 미숙했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제 나에게 김붕년 선생님 말처럼 잠시 머물다 떠날 손님이 되어 온 아이는 인생의 한 장을 닫고 연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 "그럼 그렇지" 같은 말을 하지 않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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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11-13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아이가 오늘 수능을 봤군요. 복잡하고 답답한 심정이야 말할 것이 없지요. 뒤에 있는 사람 같아요, 부모는... 저도 오늘 미숙했던 제 사랑을 많이도 반성했구요.

블랑카님도, 아이도 일년 내내 수고 많으셨어요. 편안한 저녁 되시길 바래요~~

blanca 2025-11-14 09:56   좋아요 0 | URL
아, 오늘부터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인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감사합니다.

파란놀 2025-11-14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에는 ‘사춘기’가 없고, 우리나라에는 ‘사춘기’라 이를 만한 때가 없습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푸른별 온나라가 마찬가지인데, “아이에서 어른으로 건너가는 즈음”은 “철드는 나이”요, 철드는 때란 따로 ‘봄나이(봄빛을 바라볼 줄 알고 품는 나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숱한 나라는 ‘봄나이’로 무르익을 아이를 굴레(제도권입시지옥)에 가두느라 웬만한 아이는 몸앓이랑 마음앓이가 겹쳐서 지치고 앓아요.

스스로 철들며 스스로 바라보며 스스로 해보려는 무렵에 스스로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넘어지고 다치기에 비로소 봄나이를 이루면서 어른이라는 길에 접어들어요. 셈겨룸(입시)이란 아주 조그만 디딤돌이니, 이 디딤돌 건너에서 삶과 살림과 사람을 함께 바라보는 보금자리를 이루시기를 바라요.

blanca 2025-11-14 09:58   좋아요 0 | URL
생각해 보면 최근까지도 우리가 사춘기라 이르는 나이에 이미 우리 선조들은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어쩌면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 하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기회를 빼앗고 그 시간을 지연 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처럼 생각해보게 하는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5-11-14 12: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식에게 덜 관심을 갖는 것, 이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잘 되지 않는다는..ㅋㅋ

blanca 2025-11-15 08:49   좋아요 1 | URL
페크님, 이게 무한루프인 것 같아요. 저도 초연한 척해도 결국 또 실패합니다.
 

때로는 내게 일어난 일들이 정말 일어난 게 맞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내가 읽거나 본 것들이 더 진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젯밤 내가 꾼 꿈이 내게 일어났던 일들의 흐릿한 기억보다 더 와닿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이야기의 힘은 경이롭다.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간접 경험할 때 우리 대뇌에 켜지는 불은 내가 실제 경험한 것과 밝기에 큰 차이가 없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집 <레티파크>에는 화자가 친구와 공유했던 정신과 상담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가 투영된 작품의 뒷배경이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에세이>에서 자세히 나온다. 실제로 유디트 헤르만이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정신과 의사와의 한때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편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개인적 스토리들은 태피스트리처럼 엮여 또 다른 차원의 스토리라인을 구성한다. 에세이집을 표방했지만, 우리는 그저 작가가 이름 붙인 장르 속으로 들어간 유디트 헤르만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된다. 이쯤 되면 사실과 진실과 허구는 한데 섞여 모호해진다. 그리고 굳이 확실하게 그것의 경계를 긋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무용한 것인지 설득당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라고 굳게 믿는 것들이 사실은 그저 하나의 상상, 환상, 내 삶의 이야기에 통합해서 간직하고 있다 수시로 꺼내어 확인하고 싶은 하나의 거짓일 수도 있다. 



















라디오 피디인 정혜윤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내내 따라 읽어왔다. 텍스트를 향한 그녀의 사랑과 열정, 그 특유의 해석력에 때로 감탄한다. 그녀도 나이 들고 그녀를 따라 읽은 나도 나이 들며 그녀의 글도 이제는 희망과 내일과 꿈과 내일에 대한 전망보다는 상실과 어제와 그러나 더 엷고 넓게 퍼진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합의된 공명을 일으킨다. 이 세상을 채우는 건 인간 주도의 인간만의 독점적인 관계나 사랑이 아니라 그 모든 생명들의 상호 연결에서 비롯된 신비의 오라다. 


작가가 잃은 사랑과 얻은 사랑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모비딕>을 언젠가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이야기.





김연덕 시인을 만나게 된 건 지금도 젊지만 그녀가 정말 젊디젊었을 때 한 문예지에 기고한 에세이였다. 그 정갈한 문장들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기억하고 있다 시인인 그녀가 쓴 에세이들을 모조리 찾아 읽겠다, 결심했었다. 


시인이 찾아간 일본의 소도시, 아오모리에 대한 이야기와 시들이 여전히 정결하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노인들로 가득한 도시가 어떻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무기력하고 무력하고 쇠퇴한 지방처럼 보이지 않고 여전히 거기 그대로 놓여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그립게 할 수 있는지 그 과정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김연덕 시인은 그 작업을 해낸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아주 많은 대화를 하고도 금세 다 잊어버려도 또 다시 그들과 만나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것의 가치에 대하여 듣다 보면 아, 늙음이라는 게 이럴 수도 있구나. 젊음과 소통하는 지점을 이렇게 다시 낳을 수도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시인이 순전히 사과 때문에 떠났다던 '아오모리'에 그 사과가 아니어도 방문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야기. 


이야기는 이야기라고 믿고 불러오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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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4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14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뾰 있어요?"

무료배송이 되지 않는 한 권의 책은 되도록 동네서점을 이용하기로 하고 있다. 모든 책이 항상 있는 건 아니라서 전화로 일단 물어보고 없을 경우 주문 후 하루, 이틀을 기다리는 시스템이다. 때로는 불편하고 느린 이 상황에 익숙해지려 한다. 손끝에서 바로 반응하는 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 한다. 다만, 문제라면, 내 발음이 별로 안 좋은지, 대체로 전화를 받는 직원은 재차 책 제목을 확인한다. 그 과정이 때로 민망하다. 이미 이 책을 찾기 이전부터 그랬다. 옆에 있던 다 큰 아이는 그럼 작가 이름부터 이야기해보라 시킨다. 그런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바로 알아듣고 주문해 주기로 한다. 


"뾰"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말이다. 대체 뭘까? 예전 문학동네 웹진에서 백은선 시인의 에세이가 참 좋았던 기억이 나서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에서 시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내심 반가웠다. 시인의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다. 그녀의 삶과 그녀의 시를 분리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을 발견할 때마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울림을 받는다. 




처음부터 좋아서 다시 되돌아가 읽기도 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더없이 치열하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을 직조하는 문장의 무게는 각기 다르다. 쉽게 쓴 글은 들킨다. 모를 수가 없다. 어렵게 고통스럽게 하나하나 공들여 쓴 글은 읽는 사람이 가장 먼저 그 자장을 감지하게 된다. 이 에세이는 긴 산문시 같다. 특히 시를 쓰는 시인의 삶의 무게라는 것에 대해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이다지도 무겁고 가혹하고 때로 환희에 찬 것이구나, 하면서.


나도 시에 도전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 백일장 때 매번 쓰는 산문이 지겨워서 아무말 대잔치격인 시를 썼다. 써놓고 보니 제법 내 눈에 그럴듯하게 보였다. 작문 선생님이 내 시와 나보다 어린 남학생의 시가 경쟁했고 이왕이면 어린 친구 손을 들어주는 게 맞다 싶어 그 남학생의 시를 뽑았다고 이야기해줬지만,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시는 아무나 못 쓴다. 그리고 그 '아무나'에 내가 들어간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없고 시를 쓸 수 없다고. 바로 단념했다. 내가 그 남학생보다 나이가 많아 수상을 못한 게 아니라, 내 시가 별로였다는 얘기를 돌려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중략>

남은 평생 단 하나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면

뭘 선택할래?

언젠가 네가 물었고

난 눈을 감은 채


하고 답했지


<중략>

-백은선 <뾰>


남은 평생 단 하나의 단어만 말할 수 있다면

하고 답하는

그런 사람 앞에 잠시잠깐 서게 된다.


너무나 많은 부정과 부인에 둘러싸여 있는 세상에서 단 한 명 이런 사람이 있다면, 

삶은 견딜 만한 것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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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8-15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 서점을 이용하고 싶어도 이제는 동네에 서점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 참 안타까우면서도 서글프네요.

blanca 2025-08-16 11:11   좋아요 0 | URL
계속 없어지고 있어요. 내가 한 권 사준다고 서점이 흥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문을 열고 있어야 할 이유를 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책을 읽으며 번역가를 의식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대부분의 번역가가 번역을 능숙하게 잘했다는 이야기도 되겠다. 직역과 의역의 딜레마와 한계도 인정한다. 그런데 최근 읽은 너무나 좋았던 소설은 번역이 정말 아쉬웠다. 내용이 좋아서 더 그랬다. 사소한 번역 오류 한두 개 정도가 아니라 각종 비문들, 오타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잊을 만하면 끊임없이 나왔다. 하나하나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의식되는 오류들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그 책을 도저히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없다. 


이 책의 번역 때문에 역설적으로 번역가의 역할과 번역의 힘, 지금까지 큰 생각 없었던 번역자의 노고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그러면서 잘 읽히던, 잘 이해되던 각종 번역서 뒤에 그들의 지분이 얼마나 컸던지 절감하게 됐다. 번역은 투명하지만 투명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기본기와 담보되어야 하는 성실성의 무게가 엄중하다. 한때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지만, 그 생각을 접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번역가는 나 같은 아무나가 절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번 다시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은유 작가의 정제된, 다듬어진, 성실한 문장들이 좋았다. 우리 말의 아름다움과 그 엄정한 문법으로 은유 작가의 인터뷰어로서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는 과정이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일의 무게와 가치를 일깨워줬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 사람과의 시간을 공유하기 위해 작가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그 에너지가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나도 살며 어떤 일에 매너리즘에 빠져 실수하지 않았나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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