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비현실적인 정경이 있다. 집앞에 대학교가 있었고, 그 안에 대형 서점이 있었다. 지역 주민들도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안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서너 살 아이를 데리고 그 서점에 가는 게 우리 가족에게는 일종의 가족 나들이였다. 매대에 눕혀 있던 수많은 책들 중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거기에서 만났다. 이름만 아는 작가의 이 표지에 매혹 당해 이 책을 집어들었던 시간. 서가 사이를 신나는 미로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말려야만 했다.



이 표지다.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대학교 안 서점에서 집어들기에 가장 위화감이 없는 표지가 아닌가. 맨몸으로 자신을 감싸 안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그 하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결국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점점 고개를 숙여야 하겠지만, 그런 말로는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러 여기에 왔다. 이제 그 서점은 사라졌고, 우리는 더는 대학교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암묵적 합의. 세대는 분리됐고, 대학교 안에서 문학책을 파는 서점은 이윤을 남기기 어렵다. 작가와 나만 남아 그 사이로 나만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 애착이 자라났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신간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 읽었다. 그는 나의 그 시절을 환기한다. 조금은 더 밝았고, 조금은 더 무람 없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온전히 그 시대의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젊었던 내 과거에 대한 애달픈 복기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그리워한다.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건 그의 글에는 소위 '젠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줄, 한줄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 지점을 만나게 된다. 30대였던 작가도 이제 50대를 훌쩍 넘었고, 청년이었던 인물들도 함께 나이 들어 인생의 능선을 내려오고 있다. 그 안엔 시간 여행자로 삶을 경유하는 감각이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오고 가며 때로는 섞이고, 삶은 그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정경으로 떠오른다. 


우주는 머물러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비로소 움직인다. 일월성신은 본래 멈춰 있으되 일월성신의 빛은 사람을 따라 움직이나니 그것이 시간이다. 빛은 나로 인해 생겨나고 나로 인해 소멸한다. 

-김연수 <눈 내리는 삼일포>

좀이 슬어 구멍이 뚫린 삼일포의 그림은 어느새 그것이 실격의 이유가 아니라 존재의 의의가 된다. 손상이나 실패, 좌절은 눈부신 눈이 되어 현재의 예술 작품으로 태어나고, 그것을 조우한 다른 작가는 하나의 서사를 꿰어낸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숱한 좌절들이 결국 빛의 염주가 되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날지 모르는 이야기를 우리는 일상이라 부르며 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표현으로 "너울거리는 신의 마음 아래에서"에서는 복원된 마음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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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날, 가장 맞춤한 작가의 조언 아닐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가을가을을 누려 보자. 이 찰나 같은 삶에 그보다 훨씬 더 짧은 가을날은 언제나 누리기에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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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10-03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씻고 나가야겠어요. 글씨가... 너무 예쁘네요. 어쩜~~~

blanca 2026-10-03 14:30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 하늘은 진짜 축복 그 자체더라고요. 마침, 이 책 읽는데 당장 나가야겠다 싶었어요.

다락방 2026-10-05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맞춤한 한 줄이며 모두에게 들려주고픈 한 줄 입닌다. 필체도 좋으시네요, 정말.

blanca 2026-10-05 14:54   좋아요 0 | URL
캘리그라피 하시나 봐요. ㅋㅋ 이 책 읽느라 콕 박혀 있다가 나가야 될 듯 하는 문구더라고요.
 

이윤 리는 베이징에서 태어나 면역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왔으나 우연히 아이오와대학 작가 워크숍을 통해 작가가 된 특별한 이력을 지녔다. 




"살아가는 일은 독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이 에세이는 상당히 어둡다. 자식을 학대했던,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친정 어머니에 대한 기억, 두 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명징한 언어들로 감침질되어 있지만, 처절할 정도로 삶의 그 잔혹한 속살을 드러낸다. "생명이 있는 한, 삶에 면역이 될 수 없다."는 작가의 이야기는 이윽고 다음 이야기의 복선이 된 것만 같다.


작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과거형이다. 두 아들중 한 명은 십대에, 다른 한 명은 대학생이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이야기는 이 에세이를 쓰고 난 다음 벌어진 일이다. 그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
















감정적으로 힘들어 몇 번이나 멈추며 읽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명민하고 건강하게 키워낸 아들 둘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후,  그 상실을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감당해 내고 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윤 리의 형언하기 힘든 고통의 자장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 시련에는 이 상실이 주는 슬픔만이 다가 아니었다. 위로랍시고 응원이라며 무심코 던지는 주변인들의 상처 주는 말들,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걸 일종의 모국에 대한 배신이라고까지 비난했던 모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선정적이고 잔인한 기사들. 타인들의 아무 의도 없이 지나가듯 묻는 안부. 그 모든 것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와 아이를 잃은 어미의 상처를 짓이겼다. 인간은 때로 얼마나 오만한가.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위로와 도움이 결국 나의 안위와 우월감을 재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우리는 삶의 뜻밖의 시련에 처한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책에서 계속 흘러가고 있는 저류다. 이윤 리는 답하지 않는다. 그저 질문할 뿐이다. 아들에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도 이윤 리는 섣불리 낙관하거나 희망적인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일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없다. 기만과 포장, 눈속임을 기꺼이 포기하고 나면, 우리는 결국 돌아설 수 없는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쓰고 읽는 일은 그래서 때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예리한 통찰과 깊이가 있는 글을 읽는 일이 언제나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이야기인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득해진다. 시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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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했는지 기억나지 않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회자되는 작가나 책은 아무래도 좀 저어하게 되는 면이 있다. <인간실격>도 읽었을 텐데, 내용이나 감상 모두 어렴풋하다. 젊은 시절 세상을 등진 그의 방식도 하나의 비장한 텍스트처럼 남았지만, 거기에 동의하거나 공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쓰가루>를 읽고 나서 왜 사람들이 이렇게나 자주 그를 여전히 소환하는지 알 것 같았다. 

<쓰가루>는 자신이 나고 자란 혼슈 북단의 고향에 돌아가 옛 친구, 친척들을 만나고 어린 시절 곁에 있었던 유모를 찾아가는 자전적인 기행 소설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인지 그 경계가 묘하게 흐릿한 일종의 오토 픽션이다. 중간중간 쓰가루 지역의 역사나 지리적 특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은 조금 지루해서 호흡이 느려졌다. 다자이 오사무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흐름이 정체되는 느낌이다. 그러다 갑자기 종반부에서 유모 다케를 찾아 상봉하는 장면은 뭐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뭉클하니 좋았다. 여느 다른 책들과 달리 절정이 결말에 배치된 듯한 특이한 구조다. 그래서 더 좋았다. 마침표로 끝나는 이야기만 읽다, 이렇게 느낌표가 팍 찍히는 느낌이 신선했다.


그 둘의 재회는 의외로 담담하다. 다케가 울먹이며 장성해 돌아온 어린 시절 도련님을 얼싸안는 장면 같은 건 없다. 나이 든 유모는 담담하게 인사하고 벚꽃나무에서 가지를 꺾어다 하나씩 꽃잎을 흩뿌리며 그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돌아온 것을 반긴다. 이 절제미에서 응축된 감정의 깊이와 열기가 대단하다. 정말 깊은 것은 말해질 수도 표현될 수 없고 그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그 흐릿한 지점을 예리하게 공략한다. 30년간 연락하지 않아도, 느닷없이 나타나 담담한 환대를 받을 수 있는 관계란...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다.


-번역이 유려하고 좋아 찾아보니 유숙자라는 분이다. 이름으로 역서를 찾아보게 될 만큼 좋은 번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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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8-14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놔 저 이번 휴가 때 책장 여기저기 살피다 <사양> 두 권이나 발견했어요. (창비/도서출판b). 심지어 <사양>은 유숙자 이분이 번역한 것으로(소화, 2002년) 읽은 책이거든요. ㅋㅋㅋㅋ 좋다고 다른 번역본으로 읽겠다고 또 사고 또 산 모양입니다….. 😭 아무튼 좋다고요…. ㅋㅋㅋㅋㅋ😭

blanca 2026-08-15 10:29   좋아요 1 | URL
저는 산지 모르고 또 산 책 여러 건입니다. 이렇게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가동되나 봅니다. :)
 

비비언 고닉의 <연애 시대의 종말>을 읽고 있다 화들짝 놀랐다. 뒷북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나 아렌트와 마르틴 하이데거가 각각 열여덟 살의 대학 신입생, 삼십 대의 교수로 만나 실제 불륜 관계로 나아갔으며, 이후 각자의 길을 가고 나서도 결국 노년에 다시 재회했다는 얘기를 비비언 고닉을 통해 알게 됐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가 한때 나치에 협력했던 하이데거와 연인관계였던 것도 모자라 노년에는 그를 변호하는 데에 힘을 보탰다고? 비비언 고닉은 용감하게 아렌트의 허점을 공략한다. 즉, 그녀가 자신의 갈망,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삶에 통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감정을 이해하더라도 삶에 통합하지 못하면 오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감정을 부인하고 감정의 힘을 무시하면, 완전히 망한다.

-비비언 고닉 <연애 시대의 종말>






'아렌트와 하이데거 이야기는 비평가가 아니라 극작가의 영역'이라는 고닉의 이야기는 맞다. 머리로 옳고 그름을 재단할 사안이라기보다는 십대의 영특한 여학생이 학문적으로나 위계로나 자신을 압도하는 젊은 유부남 교수와 함께 '마의 산'을 읽고 사랑에 빠지는 일,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자신의 의지에 반해 그 영향력으로 다시 회귀하는 일은 비평가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사랑을 지지하지 않지만, 어렵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관계를 전면에 내세워 모두가 행동하는 지식인이라 칭하는 한 사람의 신화를 벗겨내면서도 그 사람의 성취나 기여를 폄하하지 않는 비비언 고닉의 다층적이고 섬세한 글쓰기에 다시 한번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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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06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최대 수치가 하이데거라고 하는데… 저는 둘 다 그럴 수 있으려니 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난 것도… 완벽한 인간도 없고 모순 없는 인간은 더더욱 없는지라….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수치라기보다는 하이데거가 그 높은 지성으로 나치 부역한 게 더 수치죠… 에효.

blanca 2026-07-06 18:08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은 이미 알고 계셨군요. 저는 처음 알아서... 사실 충격 받았어요. 그냥 인간이란, 인생이란 그럴 수 있는 거더라고요. 인간은 생각보다 더 약한 존재 같아요.

다락방 2026-07-06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나 아렌트를 좋아하는 지점이 바로 아렌트가 자신의 스승 하이데거를 뛰어넘었다는데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유부남에 나이도 많으면서 영민한 제자 꼬셔서 사귄것도 빡치고 그런데 아내랑은 헤어지지 않고, 심지어 아내와 아렌트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잘못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은 그의 아내 탓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하여간 이 둘의 관계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제가 보기에 잘못된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제가 이 사랑의 당사자가 아닌데 남의 사랑에 뭐라 할 수 있을것인가... 싶다가, 그런데 한쪽이 십대였고 한쪽이 애까지 잇는 유부남이었다는 데에서, 게다가 거기엔 위계가 존재했다는 데에서 그냥 또 쌍놈 되고 그렇습니다.

블랑카 님, 이들의 사랑에 대해 쓴 얇고 재미있는 책이 있어요. ‘엘즈비에타 에팅거‘ 의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입니다.부제는 무려 ‘행간에 놓인 사랑과 철학, 위대한 대화들‘ 입니다. 추천합니다!

blanca 2026-07-07 10:27   좋아요 0 | URL
여튼 저는 너무 놀랐어요. 노년의 재회도 무슨 드라마 같고요. 십대 제자를 유부남 교수가 그것도 당시에 이미 학계에서도 유명했던 하이데거였으니... 아마 이 영향은 아렌트 평생을 갔을 것 같아요. 죽은 시기도 너무 비슷해서 또 놀랐고요. 다락방님, 권해주신 책은 꼭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