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바른 토너로 얼굴 전체에 트러블이 확 일어났다. 내 피부는 민감성도 아니고 그 토너는 처음으로 쓴 것도 아닌데. 

저는 민감성이 아닌데 왜 갑자기 이렇죠?

원래 그런 거예요. 사람이 평생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기사, 그렇네요.


가슴 아픈 일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이야기에 질리지 않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터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장은 서사를 압도한다. 아니, 서사를 구축한다는 말이 맞겠다. 문장 자체가 주인공의 성장, 주인공의 삶 그 자체를 닮아 아름답고 빛나고 허무하고 때론 폭력적이다. 이런 문장.


나는 잃어버린 낮, 잃어버린 빛, 잃어버린 여름 때문에 울었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아버지의 유언대로 교토의 금각사의 도제가 된 소년은 절대적인 미의 상징과도 같은 금각사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한다. 그건 닿을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실재의 현현으로 마치 약올리듯 가까워질듯 가까워지다가도 저만치 멀어져만 갔다.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른의 문지방을 넘어가며 소년이 이루어 낸 성장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하나의 장례 절차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고 허무하다. 그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 다만 본인이 상정한 절대미에 근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뿐이다. 거기엔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에게는 윤리가 없다. 선이 빠져 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그는 그러한 가치들을 방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서 혼란스럽다. 내가 이런 글에 감동해도 되는 걸까.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이라니.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좋아했던,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반가운 해후 같은 작품집. 음악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뭉쳤다지만 역시나 고수들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들로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원래는 어떤 테마로 청탁 받은 이야기들의 작위성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소설집>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좋았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화상 영어로 만나는 현업에서 은퇴한 원어민 교사와 중년 여성의 시간이 나온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잃고 삶의 전장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시간도 이미 지나온 그들의 외국어 수업이라는 체를 통과한 한계를 가진 미약한 소통은 그들의 상실의 시간들의 교감과 기대할 것이 많지 않은 남은 시간들에 대한 작은 기대들을 한데 불러온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잠시잠깐 빛이 쨍하고 나는 그 시간의 마침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말까지도 상세히 축조된 김애란 작가의 문장들이 참 좋았다. 


김연수가 의도한 사나운 어머니의 모습이 <수면 위에서>는 여전히 잔잔하고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무조건 희생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가족을 위한 시간을 통과하는 전형성을 탈피한 지점에는 삶이 있었다. 우리 여기 지금에서의 삶들이 가질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작가의 심오한 탐구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나는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윤성희의 <자장가>이 십대 여고생 화자의 이야기는 내도록 슬펐다. 과거의 어느 시점 내가 어딘가에 두고 온 내 여고생 시절의 모습을 환기하는 그 지점 때문일까. 우리는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거꾸로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내가 아직 덜 컸다는 사실을 항상 환기한다. 


은희경의 <웨더링>은 궁금증을 남겼다. 기차의 서로 마주 보는 4인석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던 그 낯선 이들의 조합은 정말 처음이었을까. 옆자리의 노인이 주인공에게 양보한 우산이 가지는 여운이 길었다.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는 좀 의외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작품을 편혜영 작가가 썼다고? 나는 그녀의 문장이 가지는 긴장감과 그 절제된 어두움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의 친구들을 이모라 부르며 그녀들과 교감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에 기대보다 더 너무나 쉽게 빠져들었다. 받아야 할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아니 못하는 그 어처구니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얽히는 일은 수많은 결들이 차곡차곡 쌓여 누적되는 일이니까. 깔끔하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를 압축하기는 어려우니까. 그 행간에서 작가는 독자와 소통한다. 


얼굴의 피부염은 얼추 가라앉았다. 그런데 또 그럴까봐 무서워서 뭔가를 다시 얼굴에 얹는 일이 망설여진다. 마치 겁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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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4-07-16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의문의 두드러기로 몸고생 맘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ㅠㅠ 전에 없던 일이 자꾸 몸에 일어나는 것 보니까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 거 같아서 더 슬퍼요. 지금 여행왔는데 예전과 달리 햇빛을 피하고 있으려니 더 슬프네요. 암튼 <음악소설집> 담습니다. 많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겁쟁이처럼 망설이는 마음 아주 잘 알아요. 그래도 용기 내시길. 화이팅!!

blanca 2024-07-17 09:28   좋아요 0 | URL
라로님도요? 제 친구도 그러더라고요. 피부가 진짜 묘한 것 같아요. 쉽게 생각했는데...저는 최근 화장품에 자꾸 알레르기가 생겨서 선블럭도 못 발라요. 와우, 모처럼 편안한 휴식,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라요.

2024-07-17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1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발화 자체가 공적 의미를 지닌다. 신변잡기라 할지라도 화자의 내면에 침잠했던 자신의 체험이 오랜 시간 숙고와 그 나름의 의미망을 통과하면 그 경험과 떨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게 바로 좋은 에세이의 숙성에 관한 이야기일까. 엄청난 스케일의 서사가 없어도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말하여지는 그 행위 그 자체로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매혹한다. 최근 읽은 세 이야기가 그랬다. 

















여든을 훌쩍 넘긴 비비언 고닉의 최신작이다.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보면"의 그녀의 여정에 동참하는 읽기다. D.H의 <아들과 연인>, 뒤라스의 <연인>이 비비언 고닉의 개인적 삶의 역사, 예리하게 벼려진 언어의 체를 통과하면 어느덧 겉핥기식이 아닌 그 작가의 그 작품의 심해로 함께 뛰어드는 듯한 심오한 추체험을 하게 되는 마법적인 책이다.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이라는 것."이라는 그녀의 냉소의 첨언에도 우리는 읽기 체험에서만큼은 그 마법적인 연결의 순간을 비비언 고닉 그녀 본인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끝나지 않은 일"은 바로 이런 마법적인 공감의 순간을 지치지도 않고 자아내는 것이리라.

















내가 이 세상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없다. 내가 만들거나 건축한 것의 4분의 3은 도시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다. 이곳저곳에 유용한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로운 영향도 미친 것이다. 내가 굳게 믿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이 아끼던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완벽에 관하여> 마크 엘리슨


자신의 일에 대해 쓰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를 난 본 적이 없다. 내 일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온생애를 합리화하는 일에 많은 회고적 쓰기가 동원되는 현실이다. 여러 셀럽의 휘황찬란한 대저택의 건축 및 개축에 중추적 역할을 한 뉴욕의 유명한 목수가 자신의 일이 가지는 결론적 무의미를 자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감동적이다. 그 누구의 삶도 대단한 유의미와 대단한 기여에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삶의 냉철한 직시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영위하는 일상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인생은 대단한 그 무엇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에 관하여>는 그 완벽이라는 이상 자체의 허울을 벗겨내는 일이다. 전문적 작가가 아닌 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일과 관련지어 언어화하고 읽는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이 소박한 글쓰기는 방증한다. 솔직하되 그 솔직함이 전시적이면 안된다. 언어적 증류가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 치열해야 한다. 그 치열함조차 그것에 취하면 안된다. 그 어디쯤의 가장 적절한 지점에서 글쓰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작가 히샴 마타르의 고향은 리비아다. 그러나 그곳을 떠난 지 벌써 삼십 년이다. 게다가 이 글은 리비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보며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다. 이 작은 책에는 그러나 작가 인생의 전부가 농축되어 있다. 카다피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납치되어 생사불명 상태로 연락이 끊긴다. 작가는 이 이야기 <귀환>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는다. 


생이 계속될 수 없다는 증거, 어떤 갑옷을 두르든 예외 없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대면하고도,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적인가.

이 도시의 알레고리는 작가의 삶의 서사 자체를 지휘한다. 이 도시 안의 그림들은 아버지의 상실을 딛고 작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류의 그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떠오르는 강력한 의지적 희망을 적시한다. 조반니 디 파올로의 <낙원> 그림에서의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재회는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에 더없이 적절한 큐레이션이다. 결국에는 사랑하는 모든 이와 헤어져야 하는 우리 인간의 그 처절할 정도로 슬픈 삶의 기본 전제를 확인하며 그럼에도 그들과의 재회를 꿈꾸는 그 지지 않는 마음에 대한 직시는 뭉클하다. 


모두의 삶은 상실을 품고 있다. 그 상실을 품고 나아가는 지점에서 읽고 쓰는 일에서 만나는 일은 언제나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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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24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듯 상실을 향해서 가는 여정 같습니다..^^

blanca 2024-06-25 09:18   좋아요 0 | URL
이제 점점 더 실감이 나서 마음이 무거워요.
 

폴 오스터가 77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나는 그의 팬도 아니고 그의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급작스런 소식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문학에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남달라서가 아닐까. 충격이다.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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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01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뭔가 청춘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어서 더 갑작스럽게 들리더라고요.

유부만두 2024-05-01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321 .. 을 쳐다보고 있어요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낭독회 영상을 한동안 봤었는데 먹먹합니다.

cyrus 2024-05-01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 때부터 폴 오스터의 책 대표작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여러 번 다짐했는데, 결국 책 한 권 읽지 못했어요. 제가 참석했던 서울의 독서 모임 이름이 <달의 궁전>이에요. 지금 독서 모임 멤버들이 작가의 부고에 슬퍼하고 있어요.

blanca 2024-05-02 10:00   좋아요 0 | URL
기억해요. 저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단편을 몇 편 읽은 정도인데 인터뷰가 좋아서 많이 찾아봤던 작가라 친밀감이 들더라고요.
 

인생 네 권의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게 좋다. 지금 나를 뒤흔드는 좋은 책보다 더더 계속해서 좋은 책이 나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절대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절대반지 같은 책들이 있다. 고전 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신호탄 같은 책이 운좋게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문학동네가 2009년 12월 흑백의 모던한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1권으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이를 낳은 지 만 이 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한동안 육아로 지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안나 카레니나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자살이 결말일 거라 여기며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투영된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한 인물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톨스토이가 가장 천착했던 주제인 생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자비함이 끌고 가는 이야기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주제를 장대하고 아름답고 떡밥 많은 스토리로 끌고 가는 힘은 톨스토이 정도의 거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어려운 수많은 인물들은 제각각 성격도 가치관도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수많은 모순적 충돌을 일으키는 탐욕, 무모함, 현명함, 쩨쩨함, 비겁함, 용기, 선의를 섬세하게 인생의 파도와 엮어 낸다. 그의 인물 중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안쓰럽지 않은 인물도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거리두기가 힘든 독서의 체험을 준다.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러나 이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지는 체험을 선사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라는 절대적인 부사어를 붙일 일이 가히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시간 그 자체가 견인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프루스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체험 그 자체가 독자의 인생 그 자체가 되기를 바랐다. 10년간 총 5704쪽의 이야기를 번역해 낸 역자의 시간은 원작자의 그것에 감히 비견될 만하다. 마르셀이 젊은 시절 그렇게 선망해마지 않았던 귀족들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자신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매달렸던 사랑도 스러지는 정경은 쓸쓸하지만 거기에서 건져낸 미학의 미덕은 울림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에 감동하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이것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길고 또 길어야 마땅하다. 


하루키의 1Q84를 나는 작년에야 읽었다. 아오마메가 하늘에서 두 개의 달을 보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도 하늘에서 또 하나의 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흔적을 찾아 헤맸다. 이 평행 우주적 세계 안의 환상적 이야기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세계는 이대로 합당한가? 비단 이 세계가 전부인가? 접안과 피안 사이에서 작가는 치열하게 자신의 인물들 내면의 심연을 길어오르며 독자의 그것을 발굴한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다. 그가 파고드는 이야기는 으스스한 판타지인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읽지만 일단 그의 월드에 입성하면 절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그런 면에서 그의 리얼리티는 감히 최고다.


<면도날>은 삶의 그 허위가 숨기고 있는 삶의 그 연약한 속살에 가닿으려는 작가의 기민한 시선에 찔리는 이야기다. 모옴은 이런 일에 천부적이다. 누구나에게 숨겨진 그 욕망이 삶을 끌고 달릴 때 놓치는 것들. 우리는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현실도 이상도 전적으로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 늙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함에도 끝까지 그 초대를 기다리는 엘리엇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오늘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며 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해도 결국 인생 그 자체가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사는 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직 내 인생의 네 권은 완결된 게 아니다. 이 목록이 한번 뒤집혔으면 좋겠다. 그만큼 좋은 책은 끊임없이 태어난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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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2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크게 인상 깊게 읽지 못했던 저는 블랑카 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이 나이에 한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지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4-04-25 11:04   좋아요 0 | URL
오 찌찌뽕~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아주 감탄하며 읽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다시 읽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21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마음이 내키실 때 천천히 다시 읽으시면 또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이 목록엔 없지만 저는 <죄와 벌> 정말 지루하고 싫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니 정말 완전 새롭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독서에도 어떤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4-2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작품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잃ㆍ시를 꼭 완독해야겠단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30   좋아요 1 | URL
마지막 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과 감동이 오더라고요. 여기까지 오느라 그렇게 프루스트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했구나 싶었어요. ^^;;

다락방 2024-04-2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정말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글입니다, 블랑카 님.
인생 네권 중 저랑 겹치는 건 없지만 블랑카 님의 목록은 그 자체로 너무 좋네요.
[안나 카레니나]야 말로 책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안나 카레니나가 불륜을 저질러 자살한 이야기로 알테지만,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 들고 읽는다면 그게 그게 아니잖아요. 안나도 안나지만 레빈의 이야기도 그렇고 저는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심지어 사냥개의 입장이 되어서도 글을 써내는 천재라고 생각했더랬어요.

그리고 아오마메를 좋아합니다.

blanca 2024-04-25 12:3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그렇고요, 하루키도 그렇고요. 여자에 빙의하는 순간이 있어요. 남자 작가로서 여자를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되는 순간.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가능한 작가는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해요. 인생 네 권 재미있네요. ^^

은하수 2024-04-25 21:02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도 아오마메 좋아요
또 만나고 싶어요
전 다음권 나오는 줄 알고 한동안 계속 기다렸잖아요. 끝인게 믿기지 않는 작품이었죠!

stella.K 2024-04-25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의 이 글 읽고 읽다가 밀어뒀던 안나를 다시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러는 줄 알았거든요. ㅋ
근데 따님이 벌써 그렇게 자랐군요. 크니까 좋지 않나요? 대화도 잘 통하고 친구같고. 브랑카님 닮았으면 분명 미인이겠어요. 전엔 가끔 따님 얘기도 들려주시곤 했는데 말이어요. ^^

blanca 2024-04-26 09:19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벌써 열일곱이 되었답니다. 세월 빠르죠? 딸은 크고 저는 늙네요. ^^;;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벌써 알라딘에 머무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그런 추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새파랑 2024-04-2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인생네권인데 선택하신 권수는 20권인데요? ㅋ 1.2.3 완전 동의합니다~!!!

면도날 고르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궁금합니다~!!

blanca 2024-04-26 14:37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무려 20권. 일단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서머싯 몸 소설은 대체로 서사 장악력이 좋아 대부분이 영화화됐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4-26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고르겠어요ㅠㅠ

blanca 2024-04-28 08:44   좋아요 0 | URL
^^ 저도 쓰고 나니 또 생각 났어요.

페크pek0501 2024-04-2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카레니나를 오디오북으로 듣는 중에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오디오북이랑 같은 출판사의 책을(더클래식) 사야 되나 제가 좋아하는 민음사 책으로 사야 되나 고민이 됩니다. 면도날은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서머싯 몸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네요.
잃어버린~ 시리즈는 저로선 엄두를 못 낼 독서입니다. 뿌듯하실 것 같네요. 완독을 축하합니다.^^

blanca 2024-04-28 12:57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더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것 같아요. 서머싯 몸은 심지어 에세이도 재미있더라고요. ^^
 

다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렵다. 주류에서 배제되는 일은 서럽다. 인종, 직업, 연령. 심지어 어느 연령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도 그러하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산다는 일은 어쩌면 이런 사회적 압력과 기준에 억지로 나를 순응시키고 맞추거나 거부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합해도 벗어나도 매일은 투쟁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생명과 나름의 주관을 지닌 내가 그런 것에 매순간 들어맞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자아내는 고립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단지 거기에 그런 기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정답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는 군중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뇌에는 무리를 추종하는 습성이 생존 전략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그게 일종의 진화론적 생존 전략이라는 발견은 놀랍다. 즉 인류는 다수의 선택에 기대어 생존해 왔기에 군중논리에 휘말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모두가 따르는 무리의 규칙, 기대를 벗어날 때 생존에는 위기가 온다. 그 무리에서 제거되거나 배제되는 걸 기꺼이 감수할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설사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결행의 순간은 어렵다. 
















아사이 료의 <정욕>에서의 욕망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정욕이 아닌,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정욕이다.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 이성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정작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대학생, 식품 영업부와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중등 동창들이 만나는 지점은 사람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특이한 페티시즘이다. 사회에서 흔히 연상하는  이성애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욕망의 대상은 그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다수에 설 수 없는 욕망의 접점에서 그들이 소통하게 되고 연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정욕>은 분명 힘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작가의 힘은 이야기의 서사력 자체에 있지 메시지에 있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비틀린 욕망조차 소수자이기에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사고의 불균형이 언뜻 노출되는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는 욕망으로서 분류되는 기준 안에 있지 않다. 그 욕망조차 타고나는 것이라 항변한다면 이 세상 모든  도덕률이 설 지점을 잃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과 읽게 만드는 흡인력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숙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위험하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서사가 메시지의 방편이 될 때 그건 때로 칼이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이야기에 간섭한다. 이 간섭조차 때로는 작가 자신이 경계했던 일종의 배제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모두가 분투한다. 그걸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다수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도 때로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의 독특한 욕망이 타인의 몸을 매개로 하는 관계성에서 실현될 때 그것은 어떤 한계와 한도를 상정한 상태에서 기능하여야 한다. 상호 합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독자적으로 성숙한 판단을 내릴 여건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하여야 한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다. 소수도 절대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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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4-07 2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휴 정말 감탄하며 읽는 블랑카 님의 글입니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여기에 기립 박수 칩니다. 바로 제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건 블랑카 님의 문장과 약간 다르게 표현되는데요, 저는 그걸 ‘작품에 작가가 드러나는 순간 싫은 작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작품에 참견하는게 보이는 순간 너무 싫어요. 확 멀어집니다. 블랑카 님이 그걸 우아한 문장으로 표현해주셨네요.

게다가 이 페이퍼의 마지막 문장도 명문입니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지만, 소수라고 해서 절대선인것도 아니죠.
이 작품을 블랑카 님이 읽고 써주셔서 참 좋네요.

blanca 2024-04-08 08:59   좋아요 2 | URL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에요. 다락방님 말씀처럼 손에서 놓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그건 소설의 미덕이죠. 문장도 좋았어요. 분명 재능 있는 작가더라고요. 그런데요. 욕망의 다양성을 얘기하며 슬쩍 소아성애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입장 표명이 없더라고요. 제가 잘못 받아들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다양성의 예시로 든 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양성과 소수자적 위치와 소외와 거기에 대한 배려 이야기를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해서 하면서 그것의 예시로 든 게 하필 그거란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 작가가 욕망을 이야기하며 사실은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아직 숙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 게 하는 그런 아쉬움과 우려가 들었어요. 다락방님 덕분에 잘 읽었고 오랜만에 참 많은 생각을 했어요. 고마워요.

다락방 2024-04-08 12:53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블랑카 님. 제가 바로 그 지점에서 엄청 빡쳐버린 거에요. 작가가 하다하다 소아성애를 가져오는구나 하고 말이지요. 세상에 숨겨야 할 성욕, 남들이 배제하는 성욕, 감히 말도 못하는 성욕을 표면적으로는 사물에 대한 것으로 두었지만 슬쩍슬쩍 소아성애를 가지고 오죠. 과하게 그리고 지나치게 배제와 소수자에 대해 말한게 사실은 결국 이것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이 책을 무심코 읽는다면 어느 순간 아 소아성애도 이상 성욕의 하나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이 싫은 제일 처음 이유,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소아성애 가지고 오는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