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는 생전에 600여편의 단편을 썼다. 그의 희곡이 현대 연극 무대에서도 여전히 관객의 호응을 얻고 있는 만큼 그의 단편집 또한 잊을만 하면 나오는데 출판사가 다르다 보니 겹치는 작품이 많다. 체계적 선집 형태로 정리가 좀 됐으면 하는 개인적 소망이 있다. 


















가장 단편을 잘 쓰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체호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의 이야기들은 서정적인데 가볍지 않고 무겁지 않으면서도 울림이 크다. 여성의 시점에서 쓴 이야기들도 어느 하나 남성 작가의 시선에서 노출되는 괴리가 없다. 상류층 귀족의 이야기도 노동자의 이야기도 소년의 이야기도 노인의 이야기도 어느 하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 단편에 회의가 든다면, 체호프에서 시작하고 체호프로 돌아가기를 추천한다. 아니, 소설 자체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면 체호프를 수혈하기를 권한다. 톨스토이가 체호프의 작품에 감동한 나머지 자기 손님들에게 체호프를 읽어봤냐고 일일이 확인하고 손수 낭독해 주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자크 랑시에르의 <체호프에 관하여>는 왜 하필 체호프냐는 질문에 가장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답변이 될 것 같다. 여기에는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은 체호프의 작품들을 일례로 들어 체호프의 미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을 알지 못해도 자크 랑시에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독자에게 바로 전달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체호프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에 예속된 현대인들이 지향하는 자유와의 거리가 그것이다. 체호프는 바로 그 간극을 겨냥한다. 우리가 체호프를 읽고 감동 받는 지점에는 바로 그러한 것이 있다. 나도 모르게 놓치고 있던 내가 지향했던 별과 지금 내가 여기 발을 딛고 선 땅과의 그 거리. 그 거리를 확인한 순간 우리는 아득해진다. 잊고 살았던 그것이 진짜였음을 확인하는 순간 대안적 삶에 대한 가능성이 떠오른다. 꼭 그 삶으로 점프하지 않아도 단지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달라질 수 있다. 왜냐면 그런 삶을 꿈꿨던 나를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임무는 자유와 인간 사이를 가르는 거리에 대해 거짓 없이, 그리고 자유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자유의 지평 아래 인간을 안내하는 것이다. 작가의 임무는 먼 곳에 있는 자유의 파열을 예속의 시대 속에 새겨넣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체호프에 관하여>


"시작도 끝도 없이" 출발하여 마침내 끝내는 체호프의 이야기가 비겁하지 않은 이유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나오는 길목에서 뭔가 저릿하면서도 아득한 멀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 자유에 대한 사랑을 그가 기억해 내도록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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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좋지만 작가 개인으로는 도저히 호감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작품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작가를 만나보고 싶은 경우도 있고. 작품도 좋고 작가 개인으로도 매력적인 경우가 내겐 체호프다.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인 걸 알지만 중간중간 틈입하여 교조주의적 연설을 시작할 때는 좀 숨 막힌다. 반면 체호프는 유연하고 너그러운 위트가 있으면서도 심오하다. 내 말이 맞다고 애써 강변하지 않는다. 내 이야기가 최고라 도취되지도 않는다. 어떤 머뭇거림의 왈츠 속에 그 특유의 예리한 직관이 빛난다. 재미있게도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서로 합이 맞았다. 이 사랑이 세간의 일부에서 떠드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였다고나 할까?(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교감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숨어 있다. 톨스토이는 체호프의 <귀염둥이>를 정말 좋아해서 방문객들에게 그 이야기를 읽었는지 재차 확인하고 몸소 여러 번 낭독해주기도 했다. (박현섭 해설 참고) 체호프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아들의 작품처럼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체호프의 <약혼녀>에는 흥미롭게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르겠구나, 얘야..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면 눈을 이렇게 꼭 감고서, 안나 카레니나가 걸어다니며 말하는 모습이라든지, 아니면 역사적인 장면 같은 걸 떠올린단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굳이 언급해 주는 센스는 톨스토이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걸까.


<상자 속의 사나이>에 실린 체호프의 모든 작품이 골고루 좋았지만, 특히나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은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죽는 사람이 좀처럼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의 시골마을서 관 짜는 일을 하는 괴팍한 야코프의 개과천선은 죽음 직전에 온다. 그는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잇속을 차리는 탐욕스럽고 괴팍한 노인이다. 그런 남편에게 평생을 헌신한 아내가 결국 죽어가며 한참 전의 과거의 아픈 상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그를 회심하게 한다. 부업으로 했던 바이올린 연주 악단에서 야코프가 구박하고 무시하던 유대인 청년에게 그가 아끼던 바이올린을 물려주는 장면은 우리가 삶을 사느라 놓쳐버린 정작 소중한 것들의 회한에 대해 경고하는 듯하다. 가뭇없이 빠져나간 세월들 사이로 산다고 주장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시선을 줘야 할 것들을 놓치다 보면 어느새 죽음은 눈앞에 와 있을 것이다. 체호프의 주인공들은 급작스런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장면이 비극적이라기보다는 뭔가 환기하는 바가 큰 종결어미처럼 보인다. 괴로워하거나 후회하거나 허무해하거나 하는 감정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아직은, 깨달을 시간이 있다는 일종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구스베리>에서 늙은 이반이 연못에서 비를 맞으며 수영을 하는 장면의 묘사 같은 것. 심지어 젊은 동행인이 말릴 정도로 만끽하는 생의 막간의 휴식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도 지극히 체호프적인 것이다. 체호프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어느 한쪽의 극단이 없다. 그리고 그게 참 좋다.


구스베리는 딱딱하고 시었지만, 푸시킨이 이런 말을 했죠. '우리를 북돋워주는 기만은 진실의 어둠보다 소중하다'라고요. 

-체호프 <구스베리>


모든 화려한 것, 세속적인 세상사에서 물러나 마침내 자신이 바라던 전원의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된 이반의 동생은 그 이후로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이반에게 그 행복의 뒤안길에서 놓친 타인들의 희생과 비참함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만의 행복에 순간 취할 수 있지만 삶은 그러도록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파한 그는 그러나 그 자신이 알몸으로 연못에서 생이 주는 그 환희를 즐길 줄도 아는 사람이다. 톨스토이라면 이 지점에서 이반의 연설로 마침표를 맺었을 것이지만. 체호프는 그러는 대신 그 자신이 모순의 결정체인 인간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톨스토이는 이런 체호프의 글을 좋아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톨스토이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체호프는 톨스토이보다 먼저 떠난다. 마치 그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반전처럼. 그 죽음조차도 그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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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1-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네요, 블랑카 님.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소중한 소개입니다.

blanca 2024-11-20 13:49   좋아요 1 | URL
체호프가 좋아요. 평전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이 안되어 있더라고요. 개인적 삶도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여배우를 사십대에 만나 결혼까지 하고 얼마 안돼 죽어버리는...제일 웃긴 대목은 톨스토이 아내가 그렇게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를 질투했다고 ㅋㅋ
 

어느 영상에서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는 젊은 시인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네가 죽음을 알 나이가 아니니까."


그 시인의 다감한 인상에 나는 어떤 냉소를 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고명재 시인을 잘 몰랐다.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인이 얘기하는 죽음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짙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고백할 수 있다. 자신을 키웠다는 비구니의 이야기에 무심결 집어 든 그의 책은 나를 많이 울렸다. 



나이듦은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는 일과 가깝다. 어떤 선의에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혜도 경험지도 아니다. 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옅어지는 일은 서글프다. 그러나 나는 이미 받은 무한사랑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고명재 시인이 이 책을 헌사한 비구니가 그에게 베풀어 준 사랑의 시어들을 읽으며 나는 잊었던 그 사랑들을 기억해 냈고 그 기억의 복원에 압도됐다. 지금의 나에게도 어린 시절 그런 사랑을 퍼부어 준 사람이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 사랑으로 견딜 것이다.


반드시 요동치고 심장 뛰고 들썩여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 마음과 존재를 아래에서부터 떠받친 채로 기둥처럼 지속되는 사랑도 있다. 사시사철 최선을 다해 존재하는 것. 은은한 지속. 그 기쁨, 놀라운 세계. 창호 너머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면 만물이 견고하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바로 거기 있구나. 

-<너무 보고플 때 눈이 온다> 고명재


너무너무 가난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동생과 할머니에게 맡겨진 시인이 또 어느 한 시기 절의 비구니와 함께 한 유년은 눈물겹도록 애잔하고 아름답다. 작디작은 비구니는 시인에게 무한정의 사랑과 무소유의 고결한 삶과 그것의 존엄한 마지막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이 시인이 되게 한다. 그러니 이 시인이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구나. 숨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한 어린 아이를, 부모와도 헤어져 자라야 했던 그 가난하고 작은 아이에게 무한의 사랑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랑이 있구나. 세상에 대한 냉소로 온마음을 꽉꽉 채울 수도 있었을 아이가 자라 사랑을 노래하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게 하는 그런 빛나는 사랑이 있었구나.
















슈테판 츠바이크의 슬픈 최후를 우리는 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 이야기들은 그러니 절망과 체념과 세상에 대한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오히려 반대다. 그는 여전히 사랑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연민을 노래한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들이 빛난다. 어떤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은 그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거나 이룩해서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그 지점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그 불굴의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그 여린 구석이야말로 가장 짓밟기 힘든 인간의 고결한 실재가 아닐까 한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돈이 없이 그저 자신이 가진 기술과 도움을 타인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살아가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 최악의 인플레에서도 여전히 일상을 영위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는 <나에게 돈이란>, 혁명이 지척에서 일어나는데도 무감하게 낚시를 하는 방관자의 역사가 사실은 우리들의 지금의 모습 그 자체라는 통찰이 인상적인 <센강의 낚시꾼>, 젊은 시절 우연히 방문하게 된 로댕의 작업실에서 배운 무아지경의 몰입의 순간에 대한 교훈을 얻은 <영원한 교훈> 등 짤막한 이야기 하나하나하가 가지는 심오한 메시지에 절로 공명하게 됐다. 짧아서 아쉽고 또 그만큼 농밀하게 압축된 이야기들이 주는 감동의 여운이 길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려움에 이기는 건 여전히 진부한 사랑이다. 그런 걸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고 내 존재 자체가 그 사랑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건 어려운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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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아이와 교보문고에 갔다. 모두가 아는 바로 그 이유로 사람들이 평소보다 적어도 두 배는 많았다. 내가 주인인 것처럼 으쓱했다. 새로운 알바생도 대거 투입된 것처럼 보였다. 뭔가 흥성거리는 이 축제의 느낌이 신 났다. 고른 책을 결제하려다 젊은 알바생에게 십 프로 쿠폰이 계정에 있냐 물었는데 없단다. 그 앞에서 모바일로 영업점 체크인을 하고 쿠폰을 바로 받으려고 하니 바로 눈에 안 띄어 당황했다. 나는 이제 이런 모습을 들키는 게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됐다. 그래서 침착을 가장한 채 다시 오겠다고 하고 교보문고 한강 작가 책이 품절됐다는 안내가 있는 매대에서 열심히 영업점 체크인 쿠폰을 찾아 헤맸다. 한참이나... 정말 너무 오래여서 내 자신이 싫어지려 했다. 드디어 찾았을 때 이 모습을 누군가가 봤을까 봐 부끄러워 다른 직원에게 가려 했으나 하필 그 아르바이트생과 눈이 바로 마주쳤다. 나는 짐짓 처음인 듯 이 책을 내밀었다. 


"이 쿠폰을 찾으시려고 그러셨군요." ㅋㅋㅋ

아르바이트생이 굳이 아는 체 해준다. 그래 노화란 그런 거다. 







내가 십 프로 쿠폰을 힘들게 찾아 결제한 책은 바로 이 책이다. 왜 하필 또 이 책인가. 칠십 대의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저자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 과정을 세포에서 일어나는 단백질 대사 기전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더 나아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항노화산업붐에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과학책일 수도 있고 철학책일 수도 있다. 잘 읽히고 매력적이고 심오하다. 


"할 수 있다고 반드시 해야 할까?" 이 도발적인 질문은 작금의 수명 연장 기술과 각종 항노화 산업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축제의 현장"에서 홀로 떠나야 하는 그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이 과연 잘 사는 삶에 도움이 될수 있을런지에 대한 도발적 반문이다. 의료 기술, 과학의 발전으로 우리가 우리의 노화를 뒤로 미루고 삶을 연장하는 것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환각을 주는 것이 가지는 궁극적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우리가 훨씬 오래 산다고 해서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리라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1세기 전보다 수명이 두 배 늘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120살이나 150살까지 산다면, 그때는 왜 300살을 살지 못하느냐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을까? 수명 연장을 추구하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다. 진정한 영생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충분치 않다.

-pp.330


노화가 불쾌한 것은 그것이 마치 다가올 죽음의 전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 인지능력이 퇴화하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하나의 불길한 해석이 된다. 인생의 유한성이 그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백만장자들이 그토록 항노화 사업에 매달리거나 참여하는 기저에는 내가 이생에서 성취하여 가진 그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직시하기 힘든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는 방법이 절대로 인간의 과학기술일 수는 없다는 게 과학자이자 노인인 저자의 제언이다. 그의 어조는 냉철하고 냉정하다. 지금으로서는 노화를 막는 방법도 죽음을 무한정 늦추는 방법도 없다고. 받아들이고 쿨하게 떠나라고. 말은 쉽지만. 글쎄다. 내가 나의 어리버리함을 타인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마음의 기저에도 그런 두려움이 깔려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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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0-21 2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불편한 것들이 생기는데, 그것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워요.
가장 두려운 것은 늙는다는 것 자체보다 늙어서 아픈 것이죠.
아프면 돈이 들텐데, 늙고 아프면 돈을 벌 수 없고,
그러면 다른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니, 그점이 제일 싫고 두려워요.

늙어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다 딱 적절한 시점에 죽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blanca 2024-10-22 11:17   좋아요 0 | URL
나이듦이라는 건 아무리 이론적으로 들어도 내 몸에 나타나야 비로소 실감 나는 것 같아요. 제가 기대하는 노년과 죽음이 가능할까 가끔 너무 두렵기도 합니다.
 

나이듦은 상실의 누적이다. 매일이 평온하고 모두가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이제 잘 기억하려 한다. 이 만남이 언젠가 결국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이젠 상기한다. 나는 애도의 주체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되는 날도 결국 맞아야 한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두렵고 서럽다. 답이 없는 문제다. 명쾌한 해결책도 없다. 자꾸 잊으려 하지만. 하루하루가 결국 그런 날들을 향해 가는 그 자체를 막을 도리가 없다. 어린 사람들의 해맑음을 되찾을 수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상실과 발견>의 저자 캐스린 슐츠의 책은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점은 그 상실과 대구를 이루어 평생의 반려자를 발견하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어가며 사랑을 시작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그러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레이먼드 카버 또한 그랬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바로 그 병원에서 아이의 탄생을 맞았다. 저자가 발견의 장을 상실의 장 뒤에 둔 것은 섣불리 사라짐에 관련한 절망으로 마침표를 맺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삶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찰나와 같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유의미한 무언가가 있다는 그 희망을 꿈꾸는 어려운 길에 대해 나는 여전히 매혹을 느낀다.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가 결국 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 

-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



















이 이야기 또한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근원적 유한함에 대하여 다룬다. 다만 더 과학적으로. 저자 마리라 마르티논 토레스는 의사이자 고인류학자다. 우리 인간 종의 "병력전기학"에 대해 다룬다. 죽음, 늙음, 두려움과 불안, 수면장애, 암, 감염, 사춘기, 음식, 알레르기, 폭력, 죽음의 의식에 대해 과학적인 정보들과 더불어 저자 자신의 성찰과 문학적 식견을 안내자로 동행한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책이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한계, 폭력성, 이기심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필멸을 의식하며 집단에 기억을 남기고 기여하는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는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렇게도 나약한데 그렇게 위대해질 수 있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듣는 순간, 상실을 애도하고 사랑을 발견하는 길을 찾아 떠나는 <상실과 발견>의 저자와 다시 만나는 느낌이다. 


숱한 상실들로 인간들은 불완전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발견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우리 종이 비천해지지 않고 스러지지 않는 이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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