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가의 소설이 AI 대필 의혹으로 공쿠르상 1차 후보에서 제외된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AI 탐지기의 신뢰성에 관한 논란뿐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AI 활용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인간의 글쓰기 창작 활동만큼은 끝까지 사수해야 하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나 같은 논의를 촉발하는 지점이다. 


회의록도 광고도 심지어 드라마도 AI로 만들고 감상하는 시대에 우리는 유난히 '글쓰기'의 '인간 저자'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셈이다. 이는 인간이 사고하는 존재로 그 사고를 언어화하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을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인간이 언어로 사고하고 문자로 기호화하여 표현하는 것만큼 인간을 가장 인간적인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다른 행위가 있을까? AI가 사실은 거대언어모델로 이 표현의 영역에서만큼은 인간만큼, 어쩌면 인간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벌써 현실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사람이 아닌 AI에게 소통의 욕구를 채우고, AI로 블로그 활동을 하고, 심지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고, 이메일에 답장한다. 인간만이 쓸 수 있는 서툰 글과 유예의 지점이 과연 언제까지 소구력을 가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기술철학의 권위자인 마크 코켈버그와 데이비드 J. 건컬의 공저인 이 저작은 말 그대로 LLM으로서의 AI가 가지는 의미를 인문학적, 철학적, 역사적인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 책에 따르면 가부장적인 저자의 절대적 권위는 생성형 AI의 발달로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바르트와 푸코는 이미 이런 저자의 절대적 권위와 기능이 조만간 사라질 것임을 예견했다. 소크라테스의 '테크네'로 명명한 글쓰기의 기술은 플라톤식 실재 대 형상이라는 이분법과 로고스 중심주의를 내려놓고 독자와 상호 접촉하는 가운데 생성되는 의미화 과정으로 무게추가 옮겨가고 있다. 이 와중에 출현한 LLM이 가지는 현상으로서의 의미는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작가가 자신이 AI를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활용했는지 정정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면, 이 과정은 AI와 "텍스트 및 텍스트성의 창조와 창발에 함께 참여하는 의미화 과정"을 글쓰기 과정으로 새로 해석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조만간 인간과 비인간의 협업 과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읽는 게 일상이 되는 날이 오게 되는 걸까.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하나씩 잠식당하는 변화를 겪게 되는 게 달갑지만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칠십대 중반 아버지는 이제 자주 사후 당신이 묻힐 곳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올린다. 사후 당신의 영혼이 안식을 찾을 곳을 찾아 헤매며 육신의 죽음을 넘어선 그 이후 흐를 시간을 당연한듯 전제하는 모습에 나는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종교가 없는 아버지는 그럼에도 영혼과 넋에 대한 믿음이 있다. 고인을 기리고 추억하며 각종 의례를 지내는 일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죽음 이후라는 가정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도 내 죽음을 떠올리면 아득한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그 공포를 잠재우는 건 산란한 일상 빼고는 없다. 즉, 나는 내 호흡이 멈추고 육신이 부패하고 남을 그 뼈의 운명에 대해 불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 남는 것이 있다면, 죽음이 구원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답을 영영 알지 못한 채 나는 죽음으로 건너갈 것이다.



이 도발적인 제목은 누구나에게 공명하는 한탄이기도 하다. 과연 누가 알겠는가? 종교적 믿음이 신실하다고 해도 죽음 너머 남을 뼈의 운명을 확신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17세기 의사이자 산문 작가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영국 노퍽주 들판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한 수십 개의 유골 항아리들을 시작으로 죽음과 장례, 매장, 화장 풍습들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은 결국 삶에 익숙해지며 결코 적응하지 못할 허무한 결말인 죽음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러니임을 설파하는 브라운의 문장은 버지니아 울프의 경탄과 닿아 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설교자"이며 동시에 독자를 "비범한 사색의 비상으로 이끈다." 허무론자 같으면서 동시에 삶의 찬란한 불꽃을 찬탄하는 그 아이러니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삶은 순수한 불꽃이며, 우리는 내면의 보이지 않는 태양에 의지해 살아간다. 살아생전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작은 불씨 하나면 충분하지만, 죽음 뒤에는 아무리 거대한 불길도 인간의 허영을 채우기엔 늘 부족해 보인다.

-pp.124


그의 사후 벌어진 웃지못할 해프닝은  그 자신이 쓴 이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에 덧붙여질 텍스트가 된다. 19세기 중반, 근처 무덤 작업 중 드러난 브라운의 두개골이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출되어 병원에 전시되었다 다시 원래 무덤에 안치된다. 그의 뼈는 만인의 전시 대상이 될 운명이었을까? 그 정도로 아무도 우리 사후 벌어질 일에 대한 통제권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방증 같기도 해서 씁쓸하기도 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026-10-08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08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은 비현실적인 정경이 있다. 집앞에 대학교가 있었고, 그 안에 대형 서점이 있었다. 지역 주민들도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심지어 그 안의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서너 살 아이를 데리고 그 서점에 가는 게 우리 가족에게는 일종의 가족 나들이였다. 매대에 눕혀 있던 수많은 책들 중 김연수 작가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거기에서 만났다. 이름만 아는 작가의 이 표지에 매혹 당해 이 책을 집어들었던 시간. 서가 사이를 신나는 미로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를 말려야만 했다.



이 표지다.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대학교 안 서점에서 집어들기에 가장 위화감이 없는 표지가 아닌가. 맨몸으로 자신을 감싸 안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그 하늘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결국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점점 고개를 숙여야 하겠지만, 그런 말로는 아직 시야에 들어오지 않을 때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러 여기에 왔다. 이제 그 서점은 사라졌고, 우리는 더는 대학교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암묵적 합의. 세대는 분리됐고, 대학교 안에서 문학책을 파는 서점은 이윤을 남기기 어렵다. 작가와 나만 남아 그 사이로 나만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 애착이 자라났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신간이 나올 때마다 구입해 읽었다. 그는 나의 그 시절을 환기한다. 조금은 더 밝았고, 조금은 더 무람 없었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온전히 그 시대의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젊었던 내 과거에 대한 애달픈 복기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그리워한다.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건 그의 글에는 소위 '젠체'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한줄, 한줄 읽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그 지점을 만나게 된다. 30대였던 작가도 이제 50대를 훌쩍 넘었고, 청년이었던 인물들도 함께 나이 들어 인생의 능선을 내려오고 있다. 그 안엔 시간 여행자로 삶을 경유하는 감각이 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기점으로 오고 가며 때로는 섞이고, 삶은 그 바깥에서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정경으로 떠오른다. 


우주는 머물러 있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비로소 움직인다. 일월성신은 본래 멈춰 있으되 일월성신의 빛은 사람을 따라 움직이나니 그것이 시간이다. 빛은 나로 인해 생겨나고 나로 인해 소멸한다. 

-김연수 <눈 내리는 삼일포>

좀이 슬어 구멍이 뚫린 삼일포의 그림은 어느새 그것이 실격의 이유가 아니라 존재의 의의가 된다. 손상이나 실패, 좌절은 눈부신 눈이 되어 현재의 예술 작품으로 태어나고, 그것을 조우한 다른 작가는 하나의 서사를 꿰어낸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지금 여기에서 맞닥뜨리는 숱한 좌절들이 결국 빛의 염주가 되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날지 모르는 이야기를 우리는 일상이라 부르며 사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표현으로 "너울거리는 신의 마음 아래에서"에서는 복원된 마음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늘 같은 날, 가장 맞춤한 작가의 조언 아닐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가을가을을 누려 보자. 이 찰나 같은 삶에 그보다 훨씬 더 짧은 가을날은 언제나 누리기에 모자라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26-10-03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씻고 나가야겠어요. 글씨가... 너무 예쁘네요. 어쩜~~~

blanca 2026-10-03 14:30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 하늘은 진짜 축복 그 자체더라고요. 마침, 이 책 읽는데 당장 나가야겠다 싶었어요.

다락방 2026-10-05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맞춤한 한 줄이며 모두에게 들려주고픈 한 줄 입닌다. 필체도 좋으시네요, 정말.

blanca 2026-10-05 14:54   좋아요 0 | URL
캘리그라피 하시나 봐요. ㅋㅋ 이 책 읽느라 콕 박혀 있다가 나가야 될 듯 하는 문구더라고요.
 

이윤 리는 베이징에서 태어나 면역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 왔으나 우연히 아이오와대학 작가 워크숍을 통해 작가가 된 특별한 이력을 지녔다. 




"살아가는 일은 독창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이 에세이는 상당히 어둡다. 자식을 학대했던, 독선적이고 감정적인 친정 어머니에 대한 기억, 두 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와 정신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명징한 언어들로 감침질되어 있지만, 처절할 정도로 삶의 그 잔혹한 속살을 드러낸다. "생명이 있는 한, 삶에 면역이 될 수 없다."는 작가의 이야기는 이윽고 다음 이야기의 복선이 된 것만 같다.


작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과거형이다. 두 아들중 한 명은 십대에, 다른 한 명은 대학생이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이야기는 이 에세이를 쓰고 난 다음 벌어진 일이다. 그 상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
















감정적으로 힘들어 몇 번이나 멈추며 읽어야 하는 이야기였다. 명민하고 건강하게 키워낸 아들 둘이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후,  그 상실을 여전히 엄마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감당해 내고 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윤 리의 형언하기 힘든 고통의 자장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이 시련에는 이 상실이 주는 슬픔만이 다가 아니었다. 위로랍시고 응원이라며 무심코 던지는 주변인들의 상처 주는 말들, 중국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쓴다는 걸 일종의 모국에 대한 배신이라고까지 비난했던 모국에서 쏟아져 나온 각종 선정적이고 잔인한 기사들. 타인들의 아무 의도 없이 지나가듯 묻는 안부. 그 모든 것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려와 아이를 잃은 어미의 상처를 짓이겼다. 인간은 때로 얼마나 오만한가. 내가 누군가에게 주는 위로와 도움이 결국 나의 안위와 우월감을 재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우리는 삶의 뜻밖의 시련에 처한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책에서 계속 흘러가고 있는 저류다. 이윤 리는 답하지 않는다. 그저 질문할 뿐이다. 아들에게 언젠가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도 이윤 리는 섣불리 낙관하거나 희망적인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는 일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방법은 없다. 기만과 포장, 눈속임을 기꺼이 포기하고 나면, 우리는 결국 돌아설 수 없는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쓰고 읽는 일은 그래서 때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예리한 통찰과 깊이가 있는 글을 읽는 일이 언제나 권장되는 것은 아니다. 대단한 이야기인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득해진다. 시린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