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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시집
파블로 네루다 지음, 정현종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이게 뭔데?"
드디어 시작된 질문 세례. 느릿 느릿 말문 트이는 네 살 아이는 종일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그 답을 어른에게 구한다. 마치 아이는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어른은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모든 것을 답할 수 없듯이 이제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나를 돌아본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모든 일들에 주어진 답이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체념과 함께 알아야 할 것들 중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오만과도 통한다. 그래서 아이의 돌연한 질문들과 죽음을 앞두고 짐짓 모든 것을 새로이 보듯이 질문하는 대시인의 시에 아연해서 멈춰서게 된다. 그 질문들은 내 안에서도 있었던 것들이다. 가라앉아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이 돌연 떠오른다. 질문은 신선하고 사랑스럽고 때로 눈물 난다. "왜 사람들은 헬리콥터들이 / 햇빛에서 꿀을 빨도록 가르치지 않지?"라고 묻는 첫장의 질문은 네루다를 소개한다. 네루다는 이런 시인이다. "소금 사막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다.
44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중략>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나였던 그 아이"는 각각 다른 시간 대에 다른 키를 가지고 두서없이 나타난다. 가장 슬펐던 기억 속에서도 찬란했던 기억 속에서도 다만 그 기억의 주체가 나라는 것으로 "그 아이"는 동일성의 흔적을 가질 뿐, 그 모든 다른 나이의 그 모든 일관성 없는 두서 없는 기질과 행동의 아이는 정말 나였을까? 싶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과도 헤어지지만 결국 그런 나였던 그 모든 아이들과 작별해야 하는 삶의 종점에 결국 다다르게 된다.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라는 말 앞에서 가슴이 시리다. 노년의 네루다는 '결국' 그 모든 답하여지지 못했던 질문들과, 그 모든 결국 행해져야 했던 이별들이 결국 한 곳으로 수렴될 것임을 이미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이제는 죽음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한다.
36
당신의 절멸은 또하나의
목소리와 다른 빛에 흡수되지 않을까?
위로가 되는 이야기.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이야기다. 섣불리 마침표를 이야기하지 않고 '나'라는 아이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이 생의 기억들이 엉겨붙어 또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질문이지만 하나의 가능성의 계시처럼 따뜻하게 들린다. 그 모든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들에 대한 질문은 그 모든 허무를 해체한다. 섭리 앞에 필멸 앞에 절망하지 않는 결기가 너무 공격적이거나 오만하게 다가오지 않는 건 그 모든 자연 현상과 사물들에 던지는 질문들에 스며든 시인의 따뜻한 애정과 위트 덕분일 것이다. "단봉낙타가 그들의 혹 속에 / 달빛을 지니고 있다는 걸 믿지 않는가?" 라고 묻는 시인 앞에서 어느덧 정말 낙타의 혹 속에 달빛이 농밀하게 고이는 느낌이다. 우리가 다만 헤어지지 위해 자란다고 해도 이러한 질문들을 하고 그 질문들 앞에서 멈추는 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그 질문에 모두 최선을 다해 답해주려 한다. 그것은 정답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마음 속에서 모락 모락 피어나는 질문들에 따뜻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모습으로 어린 시절 사랑을 기억했으면 하니까. 적어도 답이 있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생의 그 유일한 시기의 그 유한하고 허무한 아름다움을 어렴풋이나마 배워가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