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네 권의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게 좋다. 지금 나를 뒤흔드는 좋은 책보다 더더 계속해서 좋은 책이 나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절대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절대반지 같은 책들이 있다. 고전 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신호탄 같은 책이 운좋게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문학동네가 2009년 12월 흑백의 모던한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1권으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이를 낳은 지 만 이 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한동안 육아로 지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안나 카레니나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자살이 결말일 거라 여기며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투영된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한 인물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톨스토이가 가장 천착했던 주제인 생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자비함이 끌고 가는 이야기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주제를 장대하고 아름답고 떡밥 많은 스토리로 끌고 가는 힘은 톨스토이 정도의 거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어려운 수많은 인물들은 제각각 성격도 가치관도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수많은 모순적 충돌을 일으키는 탐욕, 무모함, 현명함, 쩨쩨함, 비겁함, 용기, 선의를 섬세하게 인생의 파도와 엮어 낸다. 그의 인물 중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안쓰럽지 않은 인물도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거리두기가 힘든 독서의 체험을 준다.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러나 이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지는 체험을 선사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라는 절대적인 부사어를 붙일 일이 가히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시간 그 자체가 견인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프루스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체험 그 자체가 독자의 인생 그 자체가 되기를 바랐다. 10년간 총 5704쪽의 이야기를 번역해 낸 역자의 시간은 원작자의 그것에 감히 비견될 만하다. 마르셀이 젊은 시절 그렇게 선망해마지 않았던 귀족들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자신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매달렸던 사랑도 스러지는 정경은 쓸쓸하지만 거기에서 건져낸 미학의 미덕은 울림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에 감동하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이것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길고 또 길어야 마땅하다. 


하루키의 1Q84를 나는 작년에야 읽었다. 아오마메가 하늘에서 두 개의 달을 보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도 하늘에서 또 하나의 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흔적을 찾아 헤맸다. 이 평행 우주적 세계 안의 환상적 이야기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세계는 이대로 합당한가? 비단 이 세계가 전부인가? 접안과 피안 사이에서 작가는 치열하게 자신의 인물들 내면의 심연을 길어오르며 독자의 그것을 발굴한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다. 그가 파고드는 이야기는 으스스한 판타지인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읽지만 일단 그의 월드에 입성하면 절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그런 면에서 그의 리얼리티는 감히 최고다.


<면도날>은 삶의 그 허위가 숨기고 있는 삶의 그 연약한 속살에 가닿으려는 작가의 기민한 시선에 찔리는 이야기다. 모옴은 이런 일에 천부적이다. 누구나에게 숨겨진 그 욕망이 삶을 끌고 달릴 때 놓치는 것들. 우리는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현실도 이상도 전적으로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 늙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함에도 끝까지 그 초대를 기다리는 엘리엇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오늘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며 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해도 결국 인생 그 자체가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사는 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직 내 인생의 네 권은 완결된 게 아니다. 이 목록이 한번 뒤집혔으면 좋겠다. 그만큼 좋은 책은 끊임없이 태어난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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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2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크게 인상 깊게 읽지 못했던 저는 블랑카 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이 나이에 한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지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4-04-25 11:04   좋아요 0 | URL
오 찌찌뽕~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아주 감탄하며 읽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다시 읽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21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마음이 내키실 때 천천히 다시 읽으시면 또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이 목록엔 없지만 저는 <죄와 벌> 정말 지루하고 싫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니 정말 완전 새롭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독서에도 어떤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4-2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작품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잃ㆍ시를 꼭 완독해야겠단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30   좋아요 1 | URL
마지막 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과 감동이 오더라고요. 여기까지 오느라 그렇게 프루스트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했구나 싶었어요. ^^;;

다락방 2024-04-2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정말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글입니다, 블랑카 님.
인생 네권 중 저랑 겹치는 건 없지만 블랑카 님의 목록은 그 자체로 너무 좋네요.
[안나 카레니나]야 말로 책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안나 카레니나가 불륜을 저질러 자살한 이야기로 알테지만,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 들고 읽는다면 그게 그게 아니잖아요. 안나도 안나지만 레빈의 이야기도 그렇고 저는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심지어 사냥개의 입장이 되어서도 글을 써내는 천재라고 생각했더랬어요.

그리고 아오마메를 좋아합니다.

blanca 2024-04-25 12:3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그렇고요, 하루키도 그렇고요. 여자에 빙의하는 순간이 있어요. 남자 작가로서 여자를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되는 순간.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가능한 작가는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해요. 인생 네 권 재미있네요. ^^

은하수 2024-04-25 21:02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도 아오마메 좋아요
또 만나고 싶어요
전 다음권 나오는 줄 알고 한동안 계속 기다렸잖아요. 끝인게 믿기지 않는 작품이었죠!

stella.K 2024-04-25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의 이 글 읽고 읽다가 밀어뒀던 안나를 다시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러는 줄 알았거든요. ㅋ
근데 따님이 벌써 그렇게 자랐군요. 크니까 좋지 않나요? 대화도 잘 통하고 친구같고. 브랑카님 닮았으면 분명 미인이겠어요. 전엔 가끔 따님 얘기도 들려주시곤 했는데 말이어요. ^^

blanca 2024-04-26 09:19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벌써 열일곱이 되었답니다. 세월 빠르죠? 딸은 크고 저는 늙네요. ^^;;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벌써 알라딘에 머무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그런 추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새파랑 2024-04-2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인생네권인데 선택하신 권수는 20권인데요? ㅋ 1.2.3 완전 동의합니다~!!!

면도날 고르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궁금합니다~!!

blanca 2024-04-26 14:37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무려 20권. 일단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서머싯 몸 소설은 대체로 서사 장악력이 좋아 대부분이 영화화됐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4-26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고르겠어요ㅠㅠ

blanca 2024-04-28 08:44   좋아요 0 | URL
^^ 저도 쓰고 나니 또 생각 났어요.

페크pek0501 2024-04-2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카레니나를 오디오북으로 듣는 중에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오디오북이랑 같은 출판사의 책을(더클래식) 사야 되나 제가 좋아하는 민음사 책으로 사야 되나 고민이 됩니다. 면도날은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서머싯 몸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네요.
잃어버린~ 시리즈는 저로선 엄두를 못 낼 독서입니다. 뿌듯하실 것 같네요. 완독을 축하합니다.^^

blanca 2024-04-28 12:57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더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것 같아요. 서머싯 몸은 심지어 에세이도 재미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