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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소련 우랄의 한 지방이 이 세상에서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에 들어 있던 플루토늄의 폭발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병원에서 유폐당한 채 죽어간 이 참극은 망명한 소련 과학자의 증언으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났다.  

1986년 4월 26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우수하다고 정평이 난 체르노빌 원자로의 대폭발은 죽음의 재를 지구 전체에 전파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물론, 스웨덴, 벨기에, 심지어 8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본에게까지 죽음의 재는 당도했다. 

2011년 3월 우리는 악몽이 현실화되는 것을 지척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일본 열대를 덮친 거대한 쓰나미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 오만하고 얄팍한 믿음을 일거에 말소시켰다. 체르노빌에 육박하는 원전 사고가 터졌다.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 1만톤을 인접국가인 우리나라에 그 어떤 상의나 통보도 없이 방류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직 진정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방사능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새어 나오고 있다. 생태계 전체를 교란시킬 방사능으로 오염된 해류는 유유히 태평양을 흘러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저농도라 괜찮단다. 우리나라에 들어올 즈음이면 많이 희석될 거란다. 내일은 비가 온다. 촉촉하고 마음을 이상스레이 달뜨게 하던 봄비가 이렇게 꺼림칙하기는 또 처음이다.  

 

일본의 반핵반전운동가인 히로세 다카시가 체르노빌의 참사를 제대로 증언하고 원전의 위험성을 경고한 이 책은 거의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종말 대예언과 맞먹는 울림을 준다.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적중했다. 1989년에 간행되어 1990년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내용들은 21년이 지나 예리한 칼날이 되어 되돌아 왔다. 진실은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깨달음을 이런 식으로 얻고 싶지는 않았다. 일상이, 순간 순간의 삶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표현은 미사여구가 아니라 참혹한 진실이었다. 우리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고 있다.  원전은 첨단의 기술이자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는 그린에너지원이 아니라 아직 실체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통제할 여력도 없는(앞으로도 가능해질지도 확신할 수 없는) 비과학적이고 허술한 허상이며 그 허상에 기대어 미래를 설계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력하고 악질적인 것인지를 이 책은 제대로 폭로하고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이미 원전의 긴급 노심 냉각 장치와 격납용기, 콘크리트 구조물 모두가 제대로 위험 상황을 제어할 수 없음을 간파했다. 실제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이 세 가지 위험 완충 장치는 모두 제 구실을 못했다. 또한 원전 기술 자체가 전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할 수 없는 구조로 수입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얼마전 일본의 원전 기술자가 폭로한 원전의 허술함과도 일맥 상통하는 얘기다. 현장 기술자들은 피폭량 허용치를 준수하면서 눈앞의 일을 단시간안에 해치워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구조, 제한된 시간, 심리적 불안감 등이 겹쳐 제대로 된 보수나 조치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위험요소들을 간과하고서라도 원전을 유지하고 증설해야 하는 논거들로 흔히 에너지 부족과 석유, 석탄 자원의 고갈을 얘기하고 있다. 이것은 진실일까?  실제 원전논란에서  첨예하게 대립되는 지점에서 흔히 나오는 얘기이다.  

   
  원자력은 석유 절약이 안 됩니다. 원자력 그 자체가 석유 제품이고 원자로 1기는 화력 발전소 3배의 건설 생산원가가 필요하며 <중략> 우라늄의 채광에서 정제, 운전에 이르기까지 대량의 석유를 소비해야 됩니다. 또 최대의 문제점인 영원히 관리해야 하는 폐기물 관리 비용이 전기값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직도 방사능 처리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리비용조차 계산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들을 폐쇄하는 데 드는 비용은 8조 정도로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확한 피해집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비용들을 감안한다면 원전은 사고가 터질 경우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결코 꿈의 대안 에너지원이 아닌 것이다. 차라리 이 노력과 비용을 신재생 에너지나 대안 에너지로 돌리면 어떨까. 

덴마크의 예가 있다. 1976년 원자력 착공 계획을 발표한 정부를 대체 에너지 정책안으로 설득해 내고 실제 그것을 현실화한 시민 단체의 개가는 덴마크라는 나라 자체의 유리한 조건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배울 점이 있다. 히로세 다카시는 에너지 문제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사회 문제는 없다고 얘기한다. 모두 자기 문제라고 역설한다.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덤벼드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하고 남에게 묻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중략>

나는 이론적으로 절망 상태에 있습니다. 내 딸이 죽임을 당하는데 방관할 수 있습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원자력산업 때문에 죽어야 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내 생명, 내 삶에 대해서 말입니다.

 
   

체르노빌 원전 대폭발후 체르노빌에서 남서쪽으로 450킬로미터나 떨어진 체르노프치에서는 15세까지 아이들이 모두 머리카락이 빠진 일이 있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70%는 20세이하의 젊은 층이라고 한다. 체르노빌로부터 30킬로미터까지의 위험지대의 감시는 2060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직도 치우지 못한 사체들과 각종 폐기물 들에서는 방사능이 나오고 있다. 체르노빌의 재해는 끝난 것이 아니라 망각되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지금 컴퓨터 자판으로 하기 좋은 소리들을 하고 있다. 이 전기는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이 생업으로 미역을 말리며 수명이 다해 가동중지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무리하게 수명연장을 한 원전을 이따금 보면서 "그래도 어떡해. 나라가 한 일인데..."하며 슬픈 체념을 한 그곳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아이가 또 그 아이의 아이가 속절없이 무방비로 떠안은 그 고준위위험성 폐기물들로 그득찬 땅과 공기, 물을 마시며 살아갈 미래를 무책임하게 예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그냥 입을 닫고 컴퓨터를 꺼야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말하련다. 더이상은 안된다. 그 모든 것보다 생명이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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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4-07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핵 운동가들은 하나같이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이 헌법보다 더 위에 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의 초법적 행위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티비 광고를 통해 원자력이 깨끗한 청정 에너지라고,
지구온난화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죠.

우리는 정말 어이없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blanca 2011-04-07 11:18   좋아요 0 | URL
도쿄전력과 완전 닮았네요. 원자력이 청정 에너지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힙니다. 저자가 일본 다음은 프랑스나 우리나라가 될 수도 있다고 예언했네요. 빗물 튀긴 얼굴을 비누로 박박 문지르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더라구요. 친구들과 비 맞으며 서로 손잡고 걷던 낭만은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생각도 할 수 없는 풍경이 되어 버렸어요.

감은빛님, 환경운동하신다고 들었던 것 같아요.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어도 행동은 진정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요. 저도 좀 덜 비겁해지는 방법을 연구해 봐야 겠습니다.

비로그인 2011-04-0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해 전 체르노빌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나왔던, 아마 지난번에 blanca님께 댓글로 얘기한 적도 있는 것 같은데요. 오랜만에 찾은, 그 끔찍한 폐허의 현장을 기억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위를 따져보진 않았지만 그 속에서 나온 기형아들의 사진을 보며 또 한번 앞쪽으로만 향해있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옆, 뒤를 돌아보게 되네요.


blanca 2011-04-08 15:58   좋아요 0 | URL
요즘 듣는 소식들은 참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하네요. 귀를 막고 안보고 그냥 근시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특히 무고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탐욕과 오만 때문에 고통받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올라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참 힘든 요즈음입니다.

꿈꾸는섬 2011-04-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내린 비는 봄비라고 반가운게 아니라 방사능비라 무섭고 겁나더라구요. 오전에 문화센터 가야해서 아이들 유치원 데려다 주었는데 오후엔 아들이 태권도장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하루 쉬라고 했죠. 점점 더 환경을 생각해야하는데 실천은 늘 어려워요. 그래도 작은 실천부터 해나가야겠죠. 최대한 가전제품의 사용을 줄여야죠. 전기밥통 없앤지 1년이 되어가네요. 드라이어도 되도록 안하려고 하구요. 세탁물도 나누어서 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한꺼번에 모아서 하게 되었어요.^^ 쌀뜨물도 은근 수질오염 시킨다고해서 큰 그릇 옆에 두고 모아서 다른데 한번 더 쓰고 버리고 있어요. 시작하기 전엔 그쯤이야했는데 모아서 다른데 쓰다보니 아무래도 물도 적게 쓰게 되더라구요.^^ 블랑카님도 살림노하우 있음 알려주세요.^^

blanca 2011-04-09 23:33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주방세제를 소다로 바꿀까 생각중이에요. 예전에 아이가 어리니 자꾸 물휴지를 썼는데 이제 손수건을 쓰고 전원차단기 내리고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면생리대^^;; 얘기하다보니 부끄러운 수준이네요. 늦게라도 깨달아서 이제 좀 달라져 보려고 합니다. 전기밥솥도 그러고 보니 전기 낭비가 심하겠어요. 우아, 그러면 끼마다 새밥을 해 드시는 거예요? 오늘 샤워하다가 샴푸, 비누를 대체할 좋은 게 없을까 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질 오염의 주범이라고 해서요. 쌀뜨물은 무조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물을 오염시키는군요. 아, 무엇보다 조그만 아이들이 걱정이에요. 무엇이든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시기라 걱정이 많이 되어요. 이 좋은 봄날 마음껏 뛰어놀게 하지 못하고 왠지 꺼림칙한 느낌을 항상 지울 수 없다는 사실도 씁쓸하구요. 앞으로 친환경적 살림 노하우 좋은 거 알게 되면 말씀드릴게요^^

노이에자이트 2011-04-1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갔을 때 시녀들이 따라갔는데 일종의 감시자들이었지요.청령포에는 관광객을 위해 그녀들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그중에서 단종이 마음을 둔 사람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만 정약용과 홍임엄마와 같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그리고 여하튼 단종은 스물도 못되어 사약받고 죽었으니 정약용과는 달랐지요.

blanca 2011-04-10 22:05   좋아요 0 | URL
홍임엄마요? ㅋㅋㅋ 단종은 너무 어려 그리 됐고 여러 야사가 많이 전해지니 그런 얘기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정약용은 거의 기정 사실인 것 같네요. 하기사 서양에서는 더한 경우도 많다고는 하더라구요. 며칠전에 라디오에서 프로이드의 불륜에 관한 얘기도 나오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04-10 23:47   좋아요 0 | URL
홍임엄마라고 하니 좀 웃긴가요? 제가 환상을 깨는 데 일가견이 있나봐요.이제 블랑카 님은 앞으로 정약용에 대한 책을 펼치면 우선 홍임엄마 생각이 날 것도 같네요.
단종이 죽은 후 그 시녀들도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는데...영월에도 낙화암이 있거든요.시녀들이 거기서 떨어져 죽었대요.일종의 순사?
서양이 더한 것이라기보다는 워낙 우리나라에선 유명인물의 불륜을 전기에 묘사하지 않아서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인 것 같아요.파헤쳐 보면 대단할 거에요.아랫도리 사연에 양반 상놈 따로 있냐 하는 속언도 있잖아요.

순오기 2011-04-1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재앙이군요~ ㅠㅠ

blanca 2011-04-11 13:20   좋아요 0 | URL
그 점이 더 무서워요. 아, 일본 원전 사태는 해결 기미도 안 보이네요. 이대로 무감각해질까 두려워요.
 

<소년중앙>이었나 보다. 체르노빌원전에서 일하는 아빠를 둔 아이는 그 날도 어제처럼 평온하게 잠들었다 번쩍이는 섬광과 폭발음을 듣고 잠을 깬다. 아이가 놀라서 창가에 서 있는 장면을 그린 만화를 읽고 몇날 며칠을 잠을 못 이루었다. 원자력발전소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땐 다 끝이라는 생각들로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두려운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선병질적이었던 나는 제대로 건수를 잡은 셈이었다.  

   

정말 그 어린 시절의 괴로움과 막연한 추측, 그리고 강한 고통을 주었던 이상하게 원근감 없이 보이는 인생관을 회상할 수 있다면, 어린이들이 느끼는 슬픔을 비웃지 말아야 한다.
-p.112 

어른이 되어가며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그 단조로운 일상성을 체득해 나갔고,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안전할 거라는 눈먼 믿음에 자꾸 중독되어 갔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외외성'과 '돌발적 비극'에서 언제나 비켜가는 행운은 없다는 것을 머리와 가슴으로 조금씩 알아 가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때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라는 것을 가끔은 떠올릴 수 있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단란한 가족, 유달리 친밀감 있는 남매, 영롱한 유년기.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 그리고 칭찬받지 못할 사랑, 남매의 불화, 마을을 덮친 자연재해, 죽음...  

심판은 누구의 입에서건 나올 수 있다. 모질고 잔인하고 지각없는 거리의 부랑아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움과 동정은 드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올바른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미덕인 것이다.
-p.380

커다란 재난에 처해 우리 삶의 인위적 껍질이 벗겨지고 우리 모두가 근본적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하나가 된 그런 순간에 어떤 싸움인들, 어떤 모진 행동인들, 그리고 어떤 상호불신인들 존속할 수 있으랴?
-p.422 

덜컹거리는 지하철 옆에서 중년의 남자는 갤럭시탭으로 재난기사를 읽고 있었다. 중독처럼 스마트폰으로 일본지진기사를 읽는 것이 갑자기 참혹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쑥 내밀어 그의 화면을 훔쳐 봤다. 시선을 깨달아 버린 듯 고개를 들어버리는 행동에 머쓱해져 150년도 더 넘어 떨어진, 하지만 마치 작가가 지금의 상황을 알고라도 있는 듯 덧붙인 얘기들을 가슴 아프게 담았다. 어떤 행동을 해도 무슨 생각을 해도 계속 불편하고 가슴 한켠이 무지근했다. 나는 그다지 올바르지도 미덕이 많은 인간도 아니지만 그냥 같은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퍼졌다. 역사적 과오와 종교적 특수성이 마치 아주 객관적인 심판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 하필 이 시점에서 언급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얄팍해 보인다. 죽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도 어머니들도 아버지들도. 인간의 입으로 심판 운운하는 작태가 역겹다.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의 1권을 읽는 동안 행복했었다. 작가 조지 엘리엇 특유의 위트와 재기는 물방앗간집 남매의 유년을 사실적이고 사랑스럽게 채색한다. 완벽하지 않은, 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가족의 과거는 언제나 유쾌하다. 아버지의 파산이후로 전개되는 2권은 바깥의 일들과 맞물려 허덕거리며 읽었다.  섬뜩한 오버랩. 책을 읽는 행위가 사는 일과 겹칠 때 삶은 더 가볍게도 무겁게도 들썩인다.

여주인공 매기가 아버지를 몰락에 이르게 한 사람의 곱사등이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구성은 의외로 신파적이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나쁘고 추한 것들에서 좋은 것들을 항상 기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그 진저리처지는 관성에 대한 통찰을 놓치지 않은 작가의 저력때문인 것 같다. 남다르게 지냈던 사촌의 연인과 위험한 사랑으로 미끄러지는 그 위험한 도발의 묘사의 결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고 예리하다.  그리고 마을을 덮친 홍수. 매기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불화했던 오빠 톰과 함께 그 물에 쓸려간다. 매기는 끊임없이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하려 했던 세상을 향해 무기력한 저항과 기만적인 순응의 양단 사이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자신을 그냥 놓아 버린다. 이런 허무하고 슬픈 결말.

에필로그에서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는 구절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믿고 싶지만 큰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이백 년 가까운 세월을 질러 돌아온 재해는 인간이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고 휘둘렀던 남용된 힘과 만나 엄청난 상흔을 남겼다. 이 상흔도 치유될 수 있을까? 아이가 되고 싶다. 걱정하는 것들이 다 기우라고 나만 믿으라고 어깨를 다독거려 줄 보호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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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_1759년에 쓴 어느 철학자의 상상
    from Value Investing 2011-03-16 09:51 
    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꿈꾸는섬 2011-03-1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라는 구절의 말을 믿어야할 것 같아요.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을 보며 그저 놀라울뿐이에요.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눈물만 나더라구요.ㅜㅜ


blanca 2011-03-16 22:52   좋아요 0 | URL
상황이 수습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악화일로를 치닫는 것 같아 참 절망적이에요. 산다는 게 참 어려워요. 제발 더한 비극이 없기를 일본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기원합니다.

양철나무꾼 2011-03-1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하느라 얼마나 자기 자신을 후벼팠을까요?
자연의 상흔은 치유된다는 어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모든 있어야 할 게 제자리에 있는 것이다'랑 같은 맥락이 아닐까요?^^

blanca 2011-03-16 22:53   좋아요 0 | URL
양철댁님, 제자리에 있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지 정말 여실히 깨달아요. 그냥 지루하고 평온한 일상, 이게 가장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왜 사람은 항상 까먹고 말까요?

비로그인 2011-03-16 0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런저런 망언들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이 치유될 것 같은데요^^

blanca 2011-03-16 22:54   좋아요 0 | URL
후와님, 댓글이 참 따뜻하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그러기를 바라요.

책가방 2011-03-16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특히 더 말조심을 해야할 터인데... 안타깝더군요.


blanca 2011-03-16 22:56   좋아요 0 | URL
환멸이 드는 모습이지요. 오히려 더 모범 선례를 보여주어야 할 자리가 얼룩지는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oren 2011-03-1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의 글은 거의 언제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같은 것들을 어루만지고 다독거리고 보듬어주는 따스한 손길 같은 것이 늘 느껴집니다.

저도 '일본 대지진'을 접하면서 떠올랐던 몇몇 생각들과 blanca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생각들 때문에 최근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었는데, 그 책의 '일부 내용들'을 한 데 모아 '먼댓글'로 정리해 봤습니다. 아무튼 저한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1-03-16 22:57   좋아요 0 | URL
oren님 과찬을 진짜라고 착각해도 될까요?^^ 예, 먼 댓글 찬찬히 잘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3-16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정말 아이가 되고 싶으세요? ^^
안전하다고 믿던 세상이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던,
진정으로 첫 충격이 오는 시기가 이르면 초등학생, 늦으면 중학생부터잖아요.
참 힘들었어요.........

저는 걸프전 발발 뉴스를 기억해요. 우리의 우방이라던, 선하다던 미국이 진짜 전쟁을 일으킬까 하면서
그럴 일 없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날 속보로 뉴스에 나오더군요.
전쟁이란게 실존하는구나, 하고 굉장히 당황하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요. ㅠ

blanca 2011-03-16 22:58   좋아요 0 | URL
가끔은 엄마 뱃속으로도 들어가고 싶어져요^^;; 걸프전! 아, 저도 어렴풋하게 기억나요. 마고님, 오늘도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뉴스들이 계속 속보로 뜨네요. 현실이 더 악몽 같아요.

2011-03-16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16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1-03-1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조지 엘리엇보다 <소년중앙>이 더 반가울까요? ^^

blanca 2011-03-16 22:5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저 <소년중앙> 사달라고 어찌나 아부지를 많이 졸랐던지 몰라요. 매달 매달 사고 싶어 아주 가슴을 태웠던 기억이 나네요. 가끔 <보물섬>과 <어깨동무>도. 아, 다 그리워지네요.

반딧불이 2011-03-16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언을 일삼는 사람보다 블랑카님처럼 마음아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에 위안은 가져봅니다.

blanca 2011-03-16 23:02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그냥 지금은 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함께 이겨나갔으면 좋겠는데 또 분란이 생기나 봐요. 방사능 문제, 과거사 문제들과 겹쳐져. 어떤 게 정답인지 자꾸 다투지 말고 지금은 마음이 가는 대로 그냥 다 기다려 주고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줬으면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엘리엇이 영국의 전원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은 참...잔잔하고 좋죠...

blanca 2011-03-16 23:03   좋아요 0 | URL
아! 노자님, 그래요. 저도 정말 그게 너무 좋더라구요. 노자님 혹시 조지 엘리엇 <미들마치> 읽으셨어요? 완역본이 없다면서요. 왜이리 관심 가는 작가들은 번역본이 없는 건지. 참 아쉬워요.

노이에자이트 2011-03-16 23:07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소설이죠.시중엔 없고 광주엔 도서관에 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있어서 빌려봤습니다. 다른 지역은 잘 모르겠어요.금성 것이 완역본입니다.

blanca 2011-03-16 23:10   좋아요 0 | URL
아, 완역본이 있군요. 최근에 나온 것이 축약본이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도서관에 찾아 볼게요. 감사합니다., 꾸벅.
 

책을 고를 때 리뷰에서 찾아 헤매는 대목은 무엇보다 그 책이 재미있는지의 여부, 그 여부를 초월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얘기다.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느냐,  어렵게 얻은 숨통 트이는 시간을 그 책에 할애해도 아깝지 않느냐. 

책에 대한 책에는 그런 얘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가독성에 대한 얘기는 슬쩍 피한다. 추천도서목록은 위압적이기 쉽다. 그 추천 도서 목록을 피하는 독서에 약간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얹어 주는 경우까지 있다. 책에 관한 책은 자기가 읽고 자기식으로 해석해 내는 책들에 대한 일종의 지적 허영이나 과시로 흐르기 쉽다. 그 책을 읽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가 되는 분위기는 숨이 막힌다. 

 

이 책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한 자기식의 해석과 자화자찬의 대척점에 서 있다. 정말 읽을 책을 찾아 헤매는 독자를 위한 사려 깊은 안내서다. 이미 읽은 책들조차 이 책을 통해 재독의 욕구를 느끼게 할 만큼 매혹적인 책지름신이기도 하다. 작가, 비평가, 출판사의 편집장, 라디오쇼의 사회자까지 거친 저자는 그가 사망해던 그 해에 증보를 거듭한 이 책의 완결판을 펴내게 된다. '평생독서계획'이라는 제목 만큼이나 이 책에서 다루는 책들은 장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독자들의 지속적인 흥미를 이끌어 낼 책을 선별해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수정판을 거치면서 도서 목록은 계속해서 수정작업을 거친다. 시간의 혹독한 평가를 이겨내지 못한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책들은 빠지기도 하고 그 시점에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어도 후에 재평가된 책들은 다시 이 책의 초대를 받게 된다.

기원전 2,000년경의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치누아 아제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까지 133명의 작가들에게는 각각 12매의 원고가 할애된다. 그 작가들의 생애, 뒷얘기, 대표작, 추천작 등이 얘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가 재미없는 책은 솔직히 재미없다,고 신랄하게 얘기한 점, 과감히 축약본을 읽으라고 권하는 대목들,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하다고 독려해 주는 얘기들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이런 얘기를 기다렸다. 저자가 이 책들은 자기 계발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발견의 도구로 사진 필름의 현상액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던 '독자들과의 간단한 대화'는 정말 정직한 얘기였던 것이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 <금명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등을 삽입한 것은 그런 대로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미국적이고 미국인의 정서에 맞는 책들 위주였다는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달과 6펜스>에서 인간에게 연민과 눈물어린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서머싯 몸의 이 책을 읽으면 단박 그의 소설이 그 자체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도 책에 관한, 그리고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얘기다. 다만 아주 신랄하다. 그 신랄함은 작가의 생애에도 닿아있고 그 작가들의 작품의 허술한 지점에도 파고든다. 소설은 즐기면서 읽는 것이라 어떤 소설이라도 그것을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사정없이 뱉어 놓고 난 다음 서머싯 몸은 발자크도 플로베르도 심지어 톨스토이까지도 눈치 보지 않고 욕할 부분을 잡아 채어 주무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뒷담화가 참 묘한 게 욕먹는 당사자를 꼭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다는 아이러니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나면 대체 서머싯 몸은 그 책의 어디를 그렇게 물고 늘어졌나, 꼭 다시 확인해 보게 만든다. 노이즈 마케팅이 생각난다. 사생활을 까발리고 욕먹을 짓을 했다고 한껏 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다음 이 당사자가 어떤 것을 내놓았나 몰려 가게 만드는 그 교묘한 상술은 이미 여기에서 예고된 것 같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쉰세번째 생일을 맞은 날, 예전부터 좋아해온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그런 망구엘의 결심을 따라 1월부터 12월까지 망구엘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키플링의 <킴>을, 샤토브리앙의 회고록 등을 읽어나가는 여정이다. '이 책을 강추한다', 따위는 아쉽게도 없다. '이런 어려운 책을 나만 읽고 이해했다',는 식의 자기자랑도 생략되어 있다. 그저 그 나이의 그 만큼의 깨달음, 그리고 상념, 겹치는 독서이력 등을 잔잔하고 아름답게 하나씩 펼쳐 보이고 있다. 예쁘고 단아한 책이다. 독서는 편안하고 고독하며 느릿한 감각적인 행위라는 그의 정의는 그의 책에도 해당된다. 

 

 

 

 

 

 

 

이제 우리나라의 차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책들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시사다큐 전문프로듀서인 저자는 우울한 날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쳐 든다. 그리고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나 우울함을 태생적으로 지닌 이들을 떠올리며 위로 받는다. 남자들이 미워죽겠는 날은 <개선문>이나 <장미의 이름> 같은, 남자들이 예뻐 죽겠다는 책을 찾아 읽으면 된다고 얘기한다. 이 책은 어쩌면 쓰는 사람 자기 자신을 위한 독백이 될 수도 있는 지점과 그런 상황을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읽는 사람들을 토닥거리는 지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과 저자의 일상은 한데 엉켜 있고 그 책이 재미있다거나 아주 유익하니 꼭 읽어 달라는 당부는 툭툭 털어버린지 오래다. 이것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고 이 책을 펼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펼치면 줄긋고 싶은 문장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두고두고 참고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인이 같은 책을 어떻게 그녀의 일상에 뭉클하게 끼워 넣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김연수가 권하는 추천도서목록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발췌독의 자료다. 그가 추린 소설들의 인상깊은 대목이 인용되어 있고 김연수의 시 같은 짧은 소회가 간략하게 덧붙여져 있다. 김연수의 글은 앞서의 인용된 작품과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있다. 뒤라스의 <연인>의 한 대목, 그리고 사랑은 3D업종이라는 김연수의 얘기.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그가 추린 작품들의 대목에 흠뻑 젖게 된다. 저자의 글은 짧고 저자가 읽은 책의 원문은 길다. 신기한 게 막상 그 인용된 소설을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저자의 글들을 읽으며 그 책을 읽겠다고 메모하게 된다. 그건 인용의 힘이기도 하고 저자의 성실한 삶에 대한 뜬금없는 고백때문이기도 하다. 진정성은 그냥 교감하게 되는 것 같다. 

 

 

읽을 책들의 목록은 늘어만 간다. 살아 온 만큼 더 살면 기력이 쇠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는 이제 내가 살아온 삶과 읽어낸 책들의 기억을 소환하며 하루 하루를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평생독서계획>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처럼 책을 읽는 행위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여타 다른 체험들을 하는 것과 대등한 행위라는 말이 맞다. 한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과 어느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에 흠뻑 빠지는 것은 같은 무게다. 먼저 사랑을 경험해 본 친구의 조언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되는 법이다. 그런 책들에 관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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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1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관한 책들만 모은 유용한 페이퍼네요. <평생독서계획>에다가 동양의 고전들을 더 보태서 저만의 평생독서계획표를 짜야할까봐요.그런데 저자가 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골라서 저 책을 썼을 것이라 생각해보니 제가 계획표를 짜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 급 좌절...

blanca 2011-03-01 15:2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안그래도 이 추천도서목록을 표로 만들어 게시하신 분도 있더라구요. 아무래도 동양 고전 부문이 빈약한 편인데 반딧불이님이 이 분야 추천도서목록이나 계획표를 만드시면 많은 분들이 도움이 될듯합니다. 저도 엑셀로 좀 관리를 해야 하나, 생각만 하고 있어요^^;; 무언가 체계를 좀 잡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너무 난삽해져 가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양철나무꾼 2011-03-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평생독서계획'은 읽다말다 하게 돼요.
저도 평생 독서 계획을 짜야 하겠지만, 일주일 한달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걸요.
문제는 계획을 잘 짜놔도 어느새 읽고 싶은 새책이 나와주신다는거죠~ㅠ.ㅠ

blanca 2011-03-01 15:29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그렇죠? 저는 매일 새로 나온 책 검색하다 장바구니가 그득해집니다. 되도록 한 권씩만 주문해서 읽으려 해요. 안그러면 밀릴 것 같아서요. 오늘 서점 구경갔는데 아아아, 세상엔 왜이리 읽은 책이 많은 걸까요....

송도둘리 2011-03-0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겨울 고전 몇 권과 신간 몇 권을 더해서 겨울독서계획을 만들어봤는데...겨울의 끝자락에서 검토해보니 고전보다는 짧고 쉬운 신간을 훨씬 더 많이 읽었네요.^^;; 근데 '그 책을 읽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가 되는 분위기는 숨이 막힌다.'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무엇을 읽느냐보다 왜 읽느냐가 더 중요한 거겠죠. '평생독서계획'이란 책은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blanca 2011-03-01 15:3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독서계획을 만드셨어요? 우아, 저는 그런 생각조차를 못해본 것 같아요.이 책은 쉬엄쉬엄 곁에 두고 읽으시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저는 고전도 새로 나온 반짝반짝거리는 책에 눈길이 가더라구요.

cyrus 2011-03-0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독서계획> 읽어봤는데,, 페디먼이라는 사람,, 정말 대단한거 같더라구요, 왠만한 유명한 고전들을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게 쉽지 않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피터 박스홀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보다는 페디먼의 책이 더 나은거 같아요. 피터 박스홀의 책에는
거의 대부분이 서양 문학이 많은데다가 시, 희곡, 수필 작품이 극히 드물거든요.

blanca 2011-03-01 15:33   좋아요 0 | URL
저는 정말 <읽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다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랐어요. 게다가 몇 번이나 읽은 책도 있고. 정말 보통 사람이 아니지요. 안 그래도 <죽기 전에~>도 비슷한 류의 책인 것 같아 눈길이 가더라구요. 이 책이 더 좋군요^^ 다행이네요. 갑자기 읽어야 할, 읽고 싶은 책들이 무진장 늘어 나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다락방 2011-03-0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구엘의 독서일기는 저도 가지고 있는데 도무지 책장을 끝까지 넘길수가 없더라구요. 절반쯤 읽다가 손을 놓고 말았어요. 그런데 블랑카님의 이 글을 읽고 나니, 이쯤에서 다시 읽어볼까 싶어져요. 손 놓은지 일년이 다 되어가서 사실 그 책안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블랑카님. 예쁘고 단아한 책이라니, 저도 다시 도전해봐야 겠어요.

책에 대한 책을 말씀하셔서 말인데요, 블랑카님.
혹시 [채링크로스84번지]란 책은 읽어보셨나요? 저는 그 책을 읽으면 블랑카님이 흥분하실 정도로 좋아한다는 데 만원 걸겠습니다. 훗 :)

blanca 2011-03-01 22:22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채링크로스84번지> 벌써 읽었어요! 암요. 만원 ㅋㅋㅋ 난중에 다락방님한테 커피 한 잔 대접할 날이 오면 커피값으로 퉁 칠게요^^;;

다락방 2011-03-02 08:44   좋아요 0 | URL
댓글 쓰고 저장을 누르는 순간, 음, 블랑카님은 읽으셨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괜히 댓글 남겼네요. 하하하핫;; 무안해요. 하하하핫;;

blanca 2011-03-02 20:47   좋아요 0 | URL
에이, 무한하긴요. 다락방님도 참^^;; 좋은 책을 같이 읽었다는 게 좋은 거지요.

비로그인 2011-03-01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독서계획.
참 쪼그만 책에 많은 내용이 들어 있죠? ㅎ 저도 말씀하신 정직하고, 솔직한 얘기들이 와닿던 책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나저나 다락님과의 내기는 과연 어떤 분이 이기실지..ㅎ (오랜만에 와서는 쓸데없는 거에 궁금하고 그러네요 킄)


blanca 2011-03-01 22:2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안그래도 책이 너무 초끄매서 넘 좋더라구요. 요새는 조그만 책이 좋아요. 다락방님과의 내기는 위 댓글을 참고해 주세요^^;;

2011-03-01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3-02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1년 전에 읽은 책이,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이.. 기억이 안 나는거예요!
아아..... 기력은 쇠하고 에서 꽈당. 정말이지, 읽고 망각하고 읽고 망각하고, 이래도 읽어야 하는 걸까요?
거기다, 왜 이리 세상에 책이 많은거죠.

blanca 2011-03-02 20:4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 요새 무서울 정도로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서 기록하는 수밖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써놓아야 겠다고 생각한 것까지 잊어버릴 때도 있어요--;; 이미 나온 좋은 책들, 그리고 계속 쏟아져 나오는 신간, 시간, 돈, 공간만 좀 된다면 막 사들일 텐데요.
 

안나 카레니나가 선로 위에서 무릎을 꿇고 달려오는 차량을 맞는 장면은 <안나 카레니나>의 엔딩이 아니다. 톨스토이가 여느 작가와 달리 가지는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던 사랑의 당사자가 죽음을 맞고도 이 이야기는 도약할 구석을 찾아 튀어 오른다. 사건의 대단원은 안나가 아닌, 그녀의 주변 인물이자 톨스토이의 분신인 레빈의 머릿속을 오고 가는 각종 상념들 속으로 슬며시 가라 앉는다. 이 대목은 지리멸렬하지도 사변적이지도 않게 삶 그 자체의 심원한 의문들과 한계들을 자문하며 독자의 가슴과 머리를 쥐고 사정없이 흔들어 댄다. 생각하는 나, 내가 보고 있는 생동하는 모든 것들도 결국은 이 순간을 지나면 다 스러져 갈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 톨스토이는 그런 면에서 독자들을 얼마쯤은 꼭 서글프게 한다. 결국 모두 다 끝나고 만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결론 나고 만다.  

 

 

 

 

 

 

 

 

 

 

톨스토이의 가정생활은 개인적으로 비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나 그가 말년에 저작권 문제로 아내와 일으킨 분란은 마치 그가 탐욕스러운 악처를 만나 파멸에 이른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내 소피아와 보낸 결혼 전반기 십오년은 그 스스로무척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기간 동안(1862~1877) 그는 필생의 대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낳았다. 임종도 못 지키게 할 만큼 경멸하고 미워했던 아내와 함께 일구었던 가정이 한때 그의 창작의 자양분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사랑했던 여인이 아이를 낳고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은 그의 작품 속 여인들에게 종종 투영된다.

<전쟁과 평화>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세 귀족 가문의 영락과 성쇠를 그리고 있다. 베주호프, 볼콘스키, 로스토프 가는 실제 톨스토이의 모계와 부계 가문을 모델로 하고 있다. 이 가문 출신의 안드레이 공작, 피에르 백작, 니콜라이 등이 전쟁에 참전하여 경험하게 되는 전장의 모습은 각기 다른 시각에서 역사 속에서의 '전쟁'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과감하게 이야기에 개입하여 죽고 죽이는 살육을 일으키는 힘, 언어로 압축되고 마는 전장의 허구, 그 안의 필연적이고도 허무한 죽음을 저미고 헤치고 벗겨 낸다.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더러운 사업이야. <중략> 전쟁의 목적은 사람을 죽이는 거야. 전쟁의 도구는 간첩, 반역의 장려, 주민의 황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강탈과 절도, 전략이라는 이름이 붙은 속임수와 거짓말이야. 
-4권 p.335

 
   

톨스토이가 그리는 전장은 사령관이 내린 명령하에 병사들이 일치단결하여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곳이 아니다. 명령은 정작 제대로 전달되지도 해석되지도 실행되지도 않는다. 전장에 남는 것은 무용한 언어들의 편린이 지워진 그곳에서 포탄과 유탄의 틈 속에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생의 의지들이다. 이 의지들은 산발적이고 비논리적이다. 1812년, 병사들과 그 병사들을 지휘했던 총사령관 개개의 의식적인 의지는 전인류적인 목적과 역사의 흐름 속에 녹아 뭉그러졌다. 이 어처구니 없는 거대한 살육의 현장은 그럼에도 반성없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다. 더러운 사업, 톨스토이식의 전쟁의 명명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무기대신 전장을 점령한 것은 공허한 명분과 연극이다. 전쟁은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열하고 추잡스러운 사업에 불과하다.  

 

영웅은 없다

<전쟁과 평화>에서 영웅 나폴레옹은 없다. 그는 저열하고 어리석고 모순적인 존재로 발가벗겨진다. 모스크바를 점령하고도 그곳의 풍부한 식량을 활용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퇴각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와 한참 떨어져 있다. 톨스토이식으로 보자면, 우리들은 '나폴레옹'을 만들기 위하여 '나폴레옹'을 지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위인, 영웅이 견인하는 역사를 수긍하지 않는다.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전체 민중의 의지와 열정, 의도의 총화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 전장의 총사령관 쿠투조프의 냉소적, 방어적 태세가 부정적으로 폄하되지 않은 것은 언어로 명분으로 치장된 영웅이 전두지휘하는 '전쟁' 그 자체의 허구를 신랄하게 지목한 것이다. '그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리다. 권력은 사기다.

 

   
  예술가들에게는 이 인물이 생활의 온갖 면에서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존재할 수도 없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된다. 다만 인간들이 존재해야 한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몇 마디의 말> 중
 
   

나폴레옹,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치워 낸 자리에는 러시아의 민중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그 민중이 발산하는 정기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 속 사건들의 그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채운다. 털외투로 몸을 감싸고 포장마차를 탄 황제나 대공 대신 이름없이 얼어죽고 타죽어간 수백만의 병사들, 주어진 삶의 여건과 비극마저 불평없이 수용하고 묵묵히 살아나간 익명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행동과 숨결이 가지는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대로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합류한다. 영웅은 죽고 민중은 부활한다.  톨스토이가 러시아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인간적인 것이다. 역사의 서술이 놓치고 가는 이삭들을 하나 하나 주워 그 결을 쓰다듬는 일은 언제나 예술가가 자원해야 할 가장 긴요한 임무다.

 

지치지 않는 화두, 죽음

톨스토이는 그의 저작에서 죽음에 대한 일관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이 단지 생의 종결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향한 도약의 통로로서 재정의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는 주인공들은 무언가를 일시에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순간 타올랐다 사그라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도 ,<안나 카레니나>에서의 안나도 죽음의 순간 묘한 각성의 체험과 환희를 느낀다. 안드레이 공작이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맞게 되는 최후의 묘사는 장엄하고 아름답기 조차하다. 그리고 우리가 이 다음에도 무언가를 더 기대하게 한다. 죽음을 통해 조망된 생의 파노라마는 덧없지만 아름답고, 죽음을 향해 내딛는 일보는 개개의 절절한 삶과 소망, 생의 역사를 더 크고 심원한 전체로 통합하는 도정이 된다. 안드레이가 자신을 배신했던 약혼녀 나타쉬아 곁에서 생과 죽음 가운데의 문을 힘겹게 잡고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는 것으료 묘사되는 죽음, 그래서 어느 순간 열리고야 만 문을 통해 들어온 죽음이라는 '그'를 맞아들이는 최후의 묘사는 생에 끄달리며 죽음을 어떻게든 밀어내 보려는 모든 인간의 비극적 최후를 구체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것을 수긍해야 하는 숙명을 비장하게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톨스토이가 하는 죽음에 관련한 이야기는 생에 맞닿아 있어 더 울림이 크다. 

 

생... 

귀족의 서자였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게 되는 등장인물 피에르에게는 유독 톨스토이의 진지한 질문들이 많이 녹아 들어가 있다. 세속의 온갖 부귀 영화를 누리고도 남고야 마는 그 허무감 속에 그는 드디어 생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때로는 영적이고 고결하고 자기희생적인 삶에, 때로는 아무 의문없이 현생의 것들을 마음껏 누리는 생에 경도되어 가며 그는 포로생활 중에 만난 하층민 카라타이예프의 순박하고 순정한 생의 긍정에서 답의 실마리를 끄집어 낸다.  

   
  우리들은 익숙한 생활궤도에서 내던져지면 이젠 만사가 글렀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기서에서부터 비로소 새로운 좋은 것이 시작되는 겁니다. 목숨이 있는 동안은 행복이 있습니다. 앞길엔 많은 것이,정말로 많은 것이 있습니다.
-5권 p.348
 
   

생은 필연과 자유의지로 이루어져 있다. 절대적인 자유도 절대적인 필연, 이성도 없다고 톨스토이는 말한다. 나에게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것의 기억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절망할 필요도, 내가 더 나은 것들을 택할 수도 있었다고 후회하며 자학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주무를 수도 없지만 그 어떤 것이 전적으로 나를 주무를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길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그 무한한 가능성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 무기력함도 생 전체를 포박할 수는 없다. 어떤 한계에 부딪혀 전체를, 어떤 의미를 갈망할 때 우리는 톨스토이와 만난다. 

여든둘의 많은 것들을 가지고 태어났었고 위대한 것들을 이루어 냈던 대문호는 스스로 초라한 객사를 택한다. 그가 숨결을 불어넣었던 <전쟁과 평화>의 피에르는 1812년의 광대한 밤하늘에서 사금을 뿌려 놓은 듯한 별들에 둘러싸여, 다른 것보다 지구에 가깝고 눈에 띄는 찬란한 혜성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그 둘을 함께 지켜보는 우리가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반드시 스러져 과거가 되고 역사가 된다. 말해질 수 없는 모든 것들의 그 한계까지 밀고 나가 마침내 말해질 수 있는 최대치의 것들을 뽑아 내어 우리 앞에 펼쳐 놓는 이 작가의 깨달음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가슴 한켠을 저릿하게 한다.  

 p.s. 오타와 파본이 종종 눈에 띈다. 박형규의 번역 그 자체는 읽히는 데에 무리가 없다. 전쟁 장면의 묘사의 실감이 놀랍다. 1권을 조금만 인내하면 다음부터 상당히 재미있다. 다만 톨스토이가 불쑥불쑥 치고 들어와 이따금씩 했던 얘기를 또하고 또하는 부분은 눈이 감긴다.  러시아 병사들과 농노들의 생생한 생활상의 묘사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생각나게 하고, 노장 쿠투조프 사령관이 승전을 일구고도 끊임없는 모함과 배척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는 김훈의 <칼의 노래>가 떠올랐다. 톨스토이가 어찌하여 동시대 차르에 버금가는 사람들의 지지와 주목을 받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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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2-2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전쟁과 평화를 읽느라고 서재에 새글이 없었군요.^^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는 책인데...
분홍공주를 돌보며 고전을 읽어내는 블랑카님은 정말 대단하셔요~~~~~~

blanca 2011-02-27 11:5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추첨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받은 책이예요. 두께에 '허걱'했는데 의외로 참 재미있어서 즐겁게 읽었어요. 올빼미가 되어 큰일이에요.

비로그인 2011-02-27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면서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어보게 되네요.
아마도 세로조판된 책으로 읽었지 싶은데...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책도 책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준 24부작인가 30부작인가 아무튼 러시아에서 만들었다는 시리즈물을 본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런데, 나타샤에 대해서는 한 줄도 언급을 안 하셨네요? ㅎㅎ ^^

blanca 2011-02-27 23:27   좋아요 0 | URL
후와님, 세로조판이요? 세로초판으로 이걸 다 읽으셨단 말예요? 우아, 저는 세로조판은 아주 얇은 책도 완독해 본 기억이 없어요. 자 대고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나네요. 영상물로 만들었다면 아주 스케일이 큰 작품이 됐을 것 같아요. 나타쉬아는 정말 감동적인 인물이지만 마지막에 저로서는 조금 너무 극단적인 모습으로 변한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밀어 뒀나 봐요. 톨스토이는 여자들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섬뜩한 면이 있어요.

2011-02-2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2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2-27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큭, 읽으면서 몇번이나 졸았나요? 솔직히 고백하세요~ ^^

전쟁과 폭력이 먼나라 이야기 같은데,
북한이나 현재 중동 사태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은거 같아요. 인간은 폭력에서 해방될 수 없나봐요...?
현실을 그대로 보자고 결심하니, 상당히 무서워집니다.

blanca 2011-02-27 23:30   좋아요 0 | URL
두 번 계속 읽던 대목 주변을 아주 열심히 반복하면서 보고 또 끄덕이고 그랬어요^^;;

마고님, 오늘 안그래도 또 속보 뜨네요. 정말 추잡스런 사업이에요. 결론은 항상 무고한 사람들만 총알받이가 되니 참 화가 납니다.

stella.K 2011-02-2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어떻게 저 두 권만 읽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거죠?
이건 완전히 톨스토이론이잖아요.
읽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이런 글을 쓰다닛!
근데 밑거름이 다 있었군요. 태백산맥도 읽고, 칼의 노래도 읽고.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입니다.
전 아직도 톨스토이란 산맥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읽어 봐야지, 읽어 봐야지 했던 세월이 얼마나 됐는지 까마득하네요.ㅠ
이벤트는 또 언제했나요?
아무튼 주인을 잘 찾아간 것 같군요.^^


blanca 2011-02-27 23:32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전 제가 <톨스토이의 비밀일기>를 사면서 이 이벤트에 응모된 사실도 잊고 있었는데 당첨이 되긴 했는데 책 상태가--;; 그래도 선물받은 책이니 고맙게 읽었지요. 사실 되게 지루할 줄 알고 겁먹었는데 생각보다 참 재미있었어요. <울분>은 언제쯤 읽게 될까요.

... 2011-02-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아아아, 처음엔 "안나 카레니나"를 다른 버전으로 다시 읽었다는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대체 <전쟁과 평화>를 읽기 시작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궁금해요! 저는 시작도 하기 힘들다는... 그래서 <전쟁과 평화>를 제외한 나머지 톨스토이 주변만 맴돌고 있지요. ^^

blanca 2011-02-27 23:3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완전 강추 또 강추합니다. 제가 브론테님 따라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으니까 이번에는 저도 읽었으니 브론테님은 당연히 아주 쉽게 즐겁게 읽으실 거예요. 이 두 시리즈가 톨스토이의 대표적 장편이니 참 아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톨스토이는 정말 여자 맘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분명해요.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들도 읽다 보면 정말 어찌나 근사한지요. 언젠가는 읽어야지, 싶었는데 몇 대목 좀 졸면서 잘 읽었어요^^;;

cyrus 2011-02-2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꼭 읽어봐야할 고전인데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에 선뜻 다가간다는게 쉽지 않네요.
저는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을 읽고 있는 중이라 만약에 도스또예프스끼 소설들을 다 읽게 되면
톨스토이 독서로 갈아타려고 생각중인데 블랑카님의 글을 읽고나니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말 오랜만에 블랑카님의 글을 읽게 되어서 반가워요 ^^

blanca 2011-03-01 01:07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 전작을 하시는 거예요? 우아, 안그래도 오늘 읽은 책에서 <악령>이 나와서 관심 있었거든요. cyrus님 이 책은 분량만 두껍지 쉽고 재미있게 펼쳐지는 얘기라 오히려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거에요. 전장 장면들이 리얼해서 남자분들은 더 흥미롭게 읽으실 것 같아요.

2011-02-28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3-03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권 초반에 작중인물들이 모여 아우스털리츠 전투 전의 유럽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생소해서 읽기를 포기한 사람이 많았다는데 독파하셨다니 대단합니다.

blanca 2011-03-03 20:56   좋아요 0 | URL
노자님, 저는 집에 있는 책중 안 읽은 책이 있으면 너무 아까워서 다른 일을 못하는 강박이 있어요--;; 톨스토이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고 이 책이 글씨도 커서 그리 지루하지 않더라구요. 1권은 개중 제일 재미 없기는 했어요..

노이에자이트 2011-03-03 21:27   좋아요 0 | URL
1권에 아우스털리츠 전투가 나오는데 나폴레옹의 전성기 때의 대전투로 유명하지요.나폴레옹 시대 전쟁만 집중해서 다룬 책을 읽으시고 다시 전쟁과 평화를 읽으시면 1권에도 관심을 두고 읽을 수 있을 겁니다.

blanca 2011-03-03 21:4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나폴레옹 시대를 제가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술이름만 생각나고--;;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그 시대를 조금은 알게 되었어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제대로 정신차리고 나폴레옹 시대를 좀 알아 봐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또 말았네요.
 

언젠가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것이 올바른 책의 선택인양 호도하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시간의 혹독한 세례를 견뎌내지 못할 책들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식의 논조는 베스트셀러는 흥미를 끌고 쉽게 읽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단정를 품고 있었다. 

베스트셀러 순위를 자주 확인하고 또 그것에 기대어 책을 사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읽고 나서 들인 시간과 비용이 어처구니 없다,고 짜증이 확 치미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일단 가독성이 좋다. 잘 읽히고  그 시간이 즐거우면 그것만으로도 더할나위 없는 역할을 한 셈이다. 정말 좋아하는 친구일지라도 반 나절을 보내면서 항상 즐겁고 너무 유익했다,고 느끼기란 쉽지 않다.  책에도 너무 큰 기대와 과업을 걸지 말고 기다려 주고 그저 친근감 있게 반겨 주다 의외로 선전할 때는 어깨를 두드려 주는 그런 봐주기가 필요한 시간인 것 같다.   

  

 

 

 

 

 

 

 

나란히 꽤나 오랫동안 1,2위를 지키고 있는 두 책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르포도 아니고 달착지근한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독자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결말을 품고 있는 추리소설도 아니다. 인문학.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그 분야에서 막말로 의외의 대박을 터뜨려 준 두 책이 읽는 내내 묘하게 서로 겹쳤다. 같은 논지를 펴는 대목도 있었고 깔끔하고 평이한 문체도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래도 영어 원작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시차는 좀 있었지만 만나는 부분들을 정리해 보았다.

*두 책 모두 사례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사례가 거의 서사의 매혹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하준은 아동 노동을 얘기하며 아들을 데리고 들어오고 마이클 센델은 표류하는 구명 보트 안에서 한 사람의 인육을 먹어 나머지 세 사람이 살 수 있는 비극적인 공리주의의 실현 현장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이 밖에도 다양한 현안, 시사적인 문제부터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례들이 졸릴 만하면 툭툭 끼어들어 눈꺼풀을 치켜올리게 한다. 인문 사회 과학서들이 대중화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린 것 같다.

*또한 두 저자는 약속이나 한 듯  분배정의에 대한 얘기를 언급한다. 평등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기회적 평등만을 강조하는 형식에 치우칠 때 실질적으로 불평등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평등에 관한 얘기는 대부분의 사람을 이입시킨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더 높은 곳, 더나은 곳의 이미지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신이 루저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등에 관한 언급은 주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에서 괜시리 극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미국식 자본주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종
장하준은 결국 미국 선도의 자유시장경제 모델이 나쁜 자본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들에게 스스로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나쁜 게임의 룰을 강요하는 패악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마이클 센델은 미군이 용병화되고 군 기능을 민간기능에 맡기면서 전쟁을 점점 우습게 생각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공공 서비스, 기능까지 시장에서 거래하는 재화처럼 만들어 버리며 방기하는 책임에 대하여 센델은 우려하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과도 만난다.

*인간의 연대, 공적인 책임에 대한 갈망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정의란 무엇인가>가 이토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긍정과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얘기를 찾아 읽으며 몸을 떨지만 결국 괜찮아, 괜찮아,라고 다독거리는 어머니의 손길 아래 잠들기를 원하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도덕을 얘기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인간이 그래도 될 만하다,는 확신에서 나온 굉장히 자신감 있는 행동이다. 고로 두 책이 가지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결말, 그 자체는 책의 완결성을 방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강한 정부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거나 독재로 치닫게 될 경우를 간과하지는 않았는지,<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그저 인간의 미덕과 연대감에 무작정 기대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는 문제를 지적하는 인문 사회서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대안과 지향해야 할 좋은 자본주의의 모델을 탐색해 보는 책들이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오를 때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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穀雨(곡우) 2011-01-12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샌든의 <정의>를 요즘 시간내어 시청하고 있는데, 명쾌한 강의가 인상적이더군요. 책에 없던 비유, 어렵고 난해하던 도덕론에 대해 자유분방하고 확고한 언어로 풀어내고 있더군요. 블랑카님 말씀처럼 인간 존재의 긍정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유, 적확하고 날카롭습니다. 다시 읽어 봐야 겠습니다.

아, 늦은 새해 인사와 감사의 마음, 함께 전합니다.^^

blanca 2011-01-12 22:58   좋아요 0 | URL
곡우님, 저도 챙겨 보려고는 하는데 항상 졸면서--;; 흐지부지 되버리네요. 그런 강의를 듣고 학생과 교수가 쌍방향으로 생각을 주고 받는 하버드의 풍경이 참 부럽더라구요. 감사합니다. 곡우님은 벌써 좋은 출발하셨죠!

마녀고양이 2011-01-12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러피안 드림을 읽어봐야하는데 말이죠. 이 책은
노무현 대통령께서 추천하시던 책이죠?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도 읽지 않았기에... 아하하.

공적인 책임... 반드시 있다 봅니다. 딱 좋은 단어입니다.

blanca 2011-01-12 22:59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가 읽게 된 계기가 노무현 대통령 책상 위에 마지막까지 펼쳐져 있었다는 그리고 그 책을 너무 좋아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어요. 사실 이 분야는 아무래도 많이 읽지 못했는데도 참 아름다운 책이더라구요. 심란한 마음으로 슬퍼하며 아이는 옆에서 쌀놀이를 하고 저는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cyrus 2011-01-1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두 책을 같이 보는 것도 참 좋은거 같아요. 이 두 책은 꼭 구입해야겠네요.

blanca 2011-01-12 23:01   좋아요 0 | URL
cyrus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지만, 이 두 책은 먹을 것이 많더라구요^^;; 아무래도 너도 나도 읽고 얘기하니 나도 덩달아 가봐야겠다 해서 접하게 된 책이지만 그렇게 덩달아 간 발걸음이 아깝지 않았답니다. 시간 나시면 꼭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1-01-13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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