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결혼기념일을 잊어 버렸다. 지나고 나서야 둘 다 "맞다!" 했다. 한 술 더 떠 우리가 과연 4월 16일날 결혼을 했는지 19일날 했는지에 대한 헷갈림까지. 누구 한 명이 잊고 누구 한 명이 헷갈렸다면 우린 슬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이 동시에 더이상 기념일에 의의를 두지 않고 그런 지나침에 큰 서글픔을 동반하지 않게 된 것은 일순 달달한 연애와는 다른 삶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다독여 주기로, 이제는 그러한 사이클에 우리가 서서히 진입하게 된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에 대한 수긍이기도 했다.(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스물 세 살과 스물 여섯이 만나 스물 여덟과 서른 하나로 결혼하기까지 왜 많은 사연들이 없었을까. 남녀가 소개팅으로 만나 서로 호감을 느끼고 갑자기 세상 전체에 둘만 손을 잡고 걷는 듯한 그 두둥실한 판타지에서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털 하나도 얄미운 순간도 있었을 테고 그러다 또 갑자기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처럼 느껴져 마침내 하나의 공동체로 들어서기까지. 그러나 어쨌든 해피엔딩은 언제나 많은 기억들을, 많은 고난들을 저만치 밀어내고 현재가 마치 태곳적 과거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 아, 나도 이런 책을 읽었다. 너무 늦게.

 

 

연애소설. 참 오랜만이다. 이미 다 읽어버린 듯한 착각에 이제는 읽지 않게 된 장르. 첫장부터 큰 기대 없었다. 그냥, 한번쯤은 이런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소개팅으로 만난 결혼 적령기의 남녀. 각자의 너무나 다른 유년기가 복기된다. 남자는 가난하고 얼마쯤 비참하다. 여자는 중산층에서 자란 유별나지 않은 캐릭터. 정이현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남녀의 배경차. 둘은 사랑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디테일이 참 예쁘다. 정이현의 매력이기도 하다. 아, 그래, 경청. 남녀 관계를 이러한 구도로 설명하는 시선은 참 신선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누구나 들어주는 사람에 고프다.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p.114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우리는 가장 경청하게 된다. 상대방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이야기도 그 나름으로 멋진 서사다. 그것이 과장이나 망상일지라도. 그 언어들이 구성하는 세계에서 상대는 독보적인 존재다.  내가 가미한 멋대로의 환상과 겹쳐져 우리는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인 '너'를 내 나름으로 재구성해서 껴안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사랑'이라 명명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아주 담담하다. 남녀가 만나 불타오르다 식는 그 파고가 롤러코스터의 그것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아주 당연하게 얌전하게 납득할 수 있게 현실과 환상이 만나 어떻게 그 환상이 사그라드는지 지극히 현실적으로 읊조린다. 남녀는 권태를 느끼고 결혼 앞에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다 원거리에서 주춤 주춤 이별을 준비한다. 연애 소설의 독자인 나로서는 다시 재결합했으면 하는, 지극히 당연한 소망 앞에서 움찔했지만 그렇게 쉽게 해피엔딩이 아닌 기만을 던져 주지는 않는다. 똑똑한 이야기. 우리가 지척에서 당면했던 정말 그럴 법했던 이야기.

 

아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p.208

 

이별의 연착륙. 울며 불며 매달리고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절규하지 않아도 싫증나서 겸연쩍은 이별을 했다고 해도 이 지구에서 타인을 만나 잠시 온기를 쬐었다는 것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회고해도 역시나 근사한 의미 있는 일이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p.209

 

이 대목에서 소설가 김연수가 떠올랐다. 그의 화법과 그의 시선과 묘하게 겹친다.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 모든 만남은 그것이 스쳐갔던 것일지라도 하나의 기적이다. 잘 만나고 잘 헤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섭섭하기도 하고 공감가기도 하고. 아, 이런 결말의 연애는 남의 것일지라도 언제 들어도 가슴 한 켠이 뻥 뚫리는 것같다. 아줌마는 언제나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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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1-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기념일을 두분 다 잊다니요? 게다가 날짜가 헛갈리다니 ㅜㅜ
너무 우울해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끔 서로 처음 만나 호감을 느끼던 그때를 생각하면 사는 일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올 해는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계획해보시면 어떨까요? ㅎㅎ

blanca 2013-01-22 11:07   좋아요 0 | URL
ㅋㅋ 안 그래도 저희 너무하다 했어요. 그래서 그 작년에는 절대 잊지 않겠다고 표시해 놓고 나름 즐겁게 보냈답니다. 올해도 또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네요. 꿈섬님 말씀처럼 올해는 더 특별하게 보낼 이벤트를 찾아 봐야겠습니다.66
 

어떨 땐 정말 우리 말로 된, 그러니까 번역을 거치지 않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사실 참으로 난감하다. 이런 추상적인 소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줄 딱 바로 그 책을 어디에선가 골라야만 하는 것이다. 대체 어떤 책이 그러한 난감함을 무마시켜 줄 수 있을까.

 

난삽한 검색에 들어간다. 그냥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알라딘 동네를 떠돌다 우연히 만난 책. 그냥, 제목이 좋았다. 이 작가는 처음이다. 나는 그 유명한 그의 <19세>를 읽지 않았다.

 

 

'수색'은 실제 은평구 수색동의 지명과 겹친다. 정말 이 수색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장마만 되면 한강 하류에 위치해 물이 이곳까지 차오르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이 지명은 이 소설 전체를 견인한다. 소설 속의 '나'는 직장생활과 소설 창작을 병행하다 전업 작가가 되는 모양새로 실제 작가 이순원의 이력과도 겹친다. 자전적이라는 용단은 위험하지만 군데군데 이것이 소설인지, 정말 작가의 내밀한 고백인 것인지에 대한 경계가 모호하다. 그 모호함이 묘하게 매력적이다. 이건 정말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몰라, 를 의식하며 읽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만큼 핍진하고 뭉클하다. 거짓부렁인지 알면서도 화자의 이야기가 어디에선가 실제 일어났던, 일어나는, 일어날 이야기라고 믿는 것은 청자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인 포기할 수 없는 기만이다.

 

'나'는 아내와 엄격하지 않은, 그러니까 언제든 다시 합칠 용의가 있는 별거를 하게 된다. 아니, '용의'는 없었다. 심한 갈등의 골로 벌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 정도의 간극. 신사동에 새로운 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가는 시점에 부부는 한 명은 작업실로 한 명은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가는 비현실적인 별거에 착수하게 된다. 계기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냥 자연스럽게 멀어진 부부. 그 거리 어느 지점엔가 '나'의 '엄마'가 있다. 나를 낳지도 온전히 키우지도 못하고 떠난 두 번째 엄마. 생모는 아버지의 외도로 들어오게 된 시앗에게 '나'를 지목하여 '나'의 엄마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무언의 압력이었다. 아이를 갖지도 이곳에 정착하지도 말라는. 수호는 그러나 그 엄마를 잊지 못한다. 여기까지 왔을 때 언젠가 어디에선가 티비에서 두번이나 본 그 드라마가 생각났다. 젊은 엄마. 눈이 땡글하게 큰 조은숙의 연기였다. 그 등에 업힌 아이. 그러한 이야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걷는 길에서 나온다. 이순원의 또다른 작품 <아들과 함께 걷는 길>과 이 작품이 한데 섞인 그러한 드라마였던 것같다.

 

 

 

'업힌다'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모든 그리움과 아련함과 유년의 애착을 한데 그러모으고 남는다. 나를 자주 업어 주었던 나의 꼬부랑 할머니는 나를 업고 정육점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손으로 '고. 고'하며 고기를 가리키던 시간을 잊지 못하셨다. 나는 이렇게나 젊은데 나의 작은 아이를 조금만 업어도 숨이 턱하니 막힌다. 업어주는 데에 인색하다. 나는 아이를 업어준 엄마로는 기억되지 못할 것이다. 대신 아기띠로 안고 고 작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방팔방을 다녔다. 버스도 지하철도 계단도 지나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아이의 달랑거리는 오종종한 다리를 때로 양해를 얻고 만져보며 좋아들 했다. 그 정도의 추억이다. 그 아기띠를 뒤로 돌려 업고 무릎을 꿇고 시장통에서 국수를 먹은 기억은 있다. 아이를 누일 곳도 앉힐 곳도 없는 그런 협소한 곳. 국수맛은 일품이었다.

 

'나'는 수색으로 가면 그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몇 번이나 그 '어머니'의 무늬를 직접 찾아 더듬을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피한다.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끌리듯 수색은 '나'의 뒷덜미를 잡는다. 진짜 어머니가 아닌데, 정말 나의 가족도 아니었는데 누구나 한 명쯤은 자신의 유년을 통째로 저당잡은 하나의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의 복기는 본능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만날 듯 만날 듯 만나지 못하고 잡을 듯 잡힐 듯 하면서도 끝내 놓치고 마는 그러한 것. 삶은 그러한 것들의 점철일런지도 모른다.

 

'성장'에는 눈물이 스며든다. 그 안에 담긴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떠오는 길에 이 '수색'이 있다. 마지막 장면. '나'의 자전적 작품이 발표되고 말없이 계속 걸려오는 그 전화. 자동응답기에 '안녕하세요. 이수홉니다. 저는 지금 수색에 가 있습니다'는 말을 녹음해 둔 '나'. 너무나 아름답고 아련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메시지는 잃어버린 그 '어머니' 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색의 그 어머니는 마침내 수호의 그 메시지를 받았다. 작가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었던 그 물빛 무늬는 이제 읽는 이들을 향하여 점점이 번져 온다. 파문처럼.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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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1-11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은숙, 그런 드라마가 있었군요. 블랑카님의 아련한 유년의 기억도 작품의 이야기만큼이나 물빛 같아요. 수색ᆢ물빛. 늘 마음이 깨끗하게 벅차오르는 페이퍼 고마워요.^^

blanca 2013-01-13 21: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고맙습니다. 이 책 참 좋더라고요. 오랜만에 재미있고 뭉클한 한국 소설을 만나 참 반가웠어요^^

Jeanne_Hebuterne 2013-01-15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함민복의 '눈물은 왜 짠가'를 추천합니다. 이 사람의 가난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무엇보다도 블랑카님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읽으실 듯 해서요.

blanca 2013-01-16 17:59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쥬드님, 찾아 볼게요^^

blanca 2013-01-16 18:02   좋아요 0 | URL
품절이네요.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3-01-1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순원 작가라...오늘 처음 알았네요. 저도 다음에 기회되면 찾아봐야겠어요.^^

2013-01-18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3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이 결핍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타인의 빈곤, 고통, 애환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지나치게 결핍에 시달려도 닻을 내리고 정착할 곳이 없어 타인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공감과 연대는 구호로 만들어야 할 만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가치다. 절로 우러나오기엔 우리의 시야가 너무 좁고 세계가 너무 바쁘고 걍팍하게 돌아간다.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 하는 여자. 그 여자가 어디 한 구석이라도 먼지를 놓치지 않을까 감시하며 물 한잔을 권하지 않는 여자. 이 풍경은 주인과 노예로 계급신분제가 있었던 머나먼 과거 속의 것이 아니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 자본주의의 축배를 들었던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두 개의 극단은 더욱 자주 서로를 비껴간다.

 

 

 

 

이 책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발칙한 발상을 한다. 그녀는 백인이고 중상류층에 속해 있는 저널리스트다. 그녀에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워킹 푸어들의 생활상은 주변 세계에서 풍경으로라도 자주 떠오르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다. 고급 음식점에서 잡지의 기사 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직접 워킹푸어들의 세계로 입수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가 철저한 실험과체험을 중시하는 과학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엉뚱하고 가당찮게 느껴지는 출발이었다. 인위적으로 빈곤해지기로 인위적으로 피곤해지기로 결심하는 모습은 또 하나의 오만이자 독선으로 비쳐지는 면도 있다. 하지만 여하튼 따라가 보자. 그녀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이것은 감정적인 동정이나 박애주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정말 그렇게 일정 자본금 없이 노동시장에서 몸으로 벌어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가능성 타진이다. 날로 높아가는 집세, 물가, 생각보다 비탄력적인 임금, 미국의 복지정책 개정으로 인한 일정 기간 보조금 수급 후 의무 취업 정책하에서, 산다는 것은 가능할까?

 

그녀의 저임금노동자 체험 생활 그 자체는 점차 진정성을 얻어 가는 것 같다. 식당의 웨이트리스, 호텔 청소부, 청소 용역 업체의 가정집 청소부, 요양 병원의 영양 보조원, 월마트의 판매원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취업 이력은 점차 다양한 굴곡을 그려간다. 시간당 6달러에서 7달러를 벌어 그 수입의 50프로 이상을 집세로 지불하면서도 모텔의 장기투숙 등 주거는 안정되지 못하고 식사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사먹는 정크 푸드들로 점차 채워진다. 벌어서 먹고 근근히 살아나가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취업 때마다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운 약물검사 절차, 일터에서의 고용주들의 대리인들의 숨막히는 감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은 하나의 잠재적인 범주자로 간주되는 일이었다. 청소 용역 업체에서 파견나간 으리으리한 대저책에서 핏빛 같은 녹물로 더러워진 샤워실의 대리석 벽의 이음새를 말끔히 청소해 달라는 주인 앞에서 그녀가 차마 할 수 없었던 되뇌었던 이야기는 가슴으로 와 닿는다.

 

"당신의 대리석 벽이 피를 흘리는 게 아닙니다. 저것은 전 세계의 노동자 계급, 즉 대리석을 캐 나른 노동자들, 당신이 아끼는 페르시아산 카펫을 눈이 멀 때까지 짠 사람들, 당신이 가을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 놓은 식탁 위의 사과를 수확한 사람들, 쇠못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제련한 사람들, 트럭을 운전한 사람들,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 그리고 지금 이 집을 청소하려고 허리를 쪼그리고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흘리는 피입니다." 

-p.129

 

이 르포르타주는 70년 전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세계를 취재한 조지 오웰의 것과 만난다. 두 개의 풍경은 시간과 장소의 격차를 무색케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가진 자들의 호화로운 세계, 중산층의 그럴 듯한 생활을 지탱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서 허우적 대는 빈곤층들의 고난과 처절한 생활상은 외피만 조금씩 갈아 입을 뿐 끈질기게 반복된다.

 

 

 

현대적인 대도시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뜨거운 지하굴 안에서 접시를 닦으며 보내야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중략> 그의 일은 노예적이고 기술이 없다. 그는 딱 살아 있을 만큼을 보수로 받는다. 그의 유일한 휴일은 해고다.
-p.152

 

 

이 불결하고 작은 식기실을 둘러보면서 우리들과 저 식당 사이에 양날개 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었다. 식당에는 깨끗한 식탁보, 꽃병, 거울, 금박 처마 장식, 아기 천사 그림 등 온갖 화려함을 누리는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불과 몇 자 떨어진 이 곳에서 우리는 혐오스럽도록 불결했다.
-p.88

 

 

'앎'이라는 것은 때로 대안이 없는 공허함으로 마무리되기도 한다. 이 둘은, 그리고 이 둘이 알게 된 사실을 읽게 된 우리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죄책감. 부책감. 남의 아이를 돌보기 위하여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방치해야 하고 남의 음식을 서빙하고 남이 사고자 하는 쇼핑 품목을 배치하게 위하여 정작 자신들의 욕구는 돌보지 못해 아예 마비되어 버린 사람들. <노동의 배신>의 바버라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인다. 나의 선택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고 화려한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의 거리는 더 까마득하게 멀어져버린 것만 같은 지금의 무력감 속에서 어떤 결론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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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잠이 깨면 도무지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한다. 친구 카카오톡의 대문에서 "나이가 들었나, 새벽에 깬다"라는  메시지를 읽고 난 후였다. 새벽에 밀려오는 생각들은 대체로 다 시리다. 온갖 불가능, 온갖 모호함, 온갖 상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다 어쩌면 아침이 밝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루에 나와 눈을 비비니 고작 새벽 네 시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 새벽에 아침을 하는 것도 티비를 보는 것도 왠지 다 어울리지 않는다. <위대한 유산>의 얼마 안 남은 부분을 읽기로 한다. 얼마 안 남았던 마지막 장. 다 읽어도 시계는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대한 유산> 덕이다.

 

 

 

 

 

 

 

 

 

 

 

 

 

 

 

 

 

소년 핍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스무 살이나 많은 누나와 대장장이 매부 조가 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마치 이성과 신앙과 도덕이 명령하는 것을 거역한 채,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강력히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태어나기를 고집한 죄인인 것처럼 누나에게 취급당했다. -p.45

 

찰스 디킨스의 해학은 마치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의 그 소년들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의 눈높이는 우리가 이미 잊어버렸던 유년의 그 한없이 순수하고 굴절된 시선까지 정확히 내려간다. 핍의 내면에서 오가는 모든 생각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다. 누나에게 '따끔이'로 체벌을 당하고 온갖 악담과 비난의 세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던 핍. 아이의 세계는 너무나 작고 너무나 연약하다.

 

하지만 핍은 "그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도록 허락해줬기 때문에" 매부 조만은 사랑했다.  매부 조는 소년 핍을 언제나 보호하고 지켜주려 한다.

 

인생에서 어느 하루가 빠져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인생의 진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그대 독자여, 잠시 멈추고 생각해 보라. 철과 금, 가시와 꽃으로 된 현재의 그 긴 쇠사슬이 당신에게 결코 묶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느 잊지 못할 중대한 날에 그 첫고리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p.135

 

핍에게 그 어느 하루는 교회 묘지에서 우연히 감옥선에서 탈출한 어느 죄수를 만나 그의 위협에 겁을 먹고 누나 몰래 먹을 것과 매부 조의 줄칼을 가져다 준 날이었다. 음울한 저택에서 홀로 은둔 생활을 하는 노파 미스 해비셤의 대저택에서 아름다운 소녀 에스텔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 날이었다. 핍에게 에스텔라에 대한 연정은 자신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은 어디에선가 갑자기 로또에라도 당첨이 되듯 익명의 자산가가 그에게 막대한 유산 상속을 약속하며 신사 수업을 받도록 하는 반전에서 더 뼈아픈 것이 된다. 신실하고 언제나 다정했던 매부 조는 갑자기 핍에게 숨기고 싶고 피하고 싶은 하나의 업보처럼 보인다. 거짓말 같은 기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확천금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주입된 환상이다. 핍이 늪지대의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입성하여 세속적인 열망, 물질욕, 낭비로 오염되며 전락하는 모습은 불길한 복선이다. 뻔한 도식이라고 하여도 찰스 디킨스의 손을 빌리면 한 소년의 성장기는 아름다운 리얼리즘을 획득하며 우리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의 진입로에는 숱한 왜곡과 오해와 환상의 관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생채기를 입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성장'은 뼈아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 자신만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다. 조가 업보처럼 여기며 외면했던 아버지 같았던 매부 조가 나에게는 할머니였던 것 같다. 핍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스가 그려내는 주변인들은 해학적이고 정겹다. 매부의 삼촌, 탐욕스럽고 거만한 펌블추크 캐릭터도 ,핍의 상속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 재거스, 그의 사무원 월릭도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진 조연들이다.

 

새벽 네 시, 내가 읽은 대목은 핍이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 하나의 지향처럼 사랑했던 소녀(하지만 이제 그녀는 늙고 몰락했다) ,에스텔러와 미스 해비셤의 정원에서 다시 재회하는 장면이었다. 아름답고 눈물겨운 정경. 찰스 디킨스는 소설이 이야기의 사슬을 풀고 인간의 삶으로 흘러들어오는 물꼬를 튼다. 거기에서 나는 가슴이 저릿했다. 그 말고 다른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아름답고 도도했던 소녀기를 지나 남편의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받아 시들어가는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시련이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 더 강력한 교훈을 주어서, 그 시련의 가르침을 통해 내가 네 심정이 한때 어떠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지금 이순간에는 말이야. 그동안 나는 휘어지고 부서졌어. 하지만 희망컨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졌다고 생각해.

-p.426

 

'성장'은 '위대한 유산'은 "좀 더 나은 모양으로 휘어지고 부서지는 것"이리라. 아, 왜 어린 시절 아무도 소년, 소녀들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 주지 않았던 걸까. 가르침은 말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꼭 몸소 부서지고 휘어지며 울면서 체득되는 것인가 보다. 사람도, 삶도 그래서 언제나 조금씩은 서러운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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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15 2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다 읽으셨군요. 전 핍이 죽어가는자 앞에서 죽기전에 자신이 아는 비밀을-그러나 그가 정말 알고싶었을- 말해주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어요. 그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에 맞게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blanca 2012-12-17 10:42   좋아요 1 | URL
이 책도 다락방님 페이퍼 보고 읽게 되었어요. 언젠가 읽으려고 했지만 결국 읽게 된 것은 님 덕분입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특히 다락방님 언급하신 대목도 뭉클했고. 찰스 디킨스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요.

잘잘라 2012-12-16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든 책이든, ... 아니 아니 책 책 책! 책으로 꼭, 읽어봐야겠요. 그러고 싶어집니다. 블랑카님 글 읽으면요.

blanca 2012-12-17 10:43   좋아요 2 | URL
메리포핀스님, 꼭 읽어보세요. 무엇보다 참 재미있더라고요. 오히려 영화는 줄거리가 거의 기억이 안 나고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모습들만 어렴풋이 생각나요.
 

훌륭한 책을 읽는 경험은 첫 키스와 같다. 나는 진심으로 이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열다섯 살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댈러웨이 부인>은 내게 첫 키스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내가 읽은 어떤 책보다 농밀하고 내밀하게 다가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

 

 

 

이제 2012년도 채 한달이 남지 않았다. 거울을 본다. 아직도 젊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온 날만큼 더 살면 나는 완연한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주 운이 좋은 경우가 아니라면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또 몇몇의 지인도 내 곁에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세월은 꾸준하게도 뚜벅뚜벅 제 갈길을 간다. 한파는 시간의 흐름과 마무리를 응축한 은유 같아서 더 시리다. 눈이 와도 이제 강아지처럼 뛰어다닐 일은 없으리라. 아이의 성장은 나의 또다른 시계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처음이다. 그녀는 나에게 완고하고 성마른 인상이었다. '의식의 흐름기법' 들어는 봤다. 그러니 나는 그녀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같지 않았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를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강박을 준다. 그에게 이 책은 첫 키스를 회고하는 첫사랑 같은 글이라 한다. 이미 열다섯 살에 그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었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녀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첫 키스는 뒤늦게도 찾아온다.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의식의 흐름'이란 거창한 어구 아래 그저 내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모호한 생각, 느낌 들이 그녀의 명료한 언어로 분출된 듯한 느낌. 정말 농밀한 책. 구십 년도 더 전의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무단 침입한 듯하다. 표현할 수 없었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그녀의 언어에 빚진다. 소설의 한계의 철책은 그녀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구나.

 

 

런던이다. 찬란한 6월의 아침. 오십 대의 클라리사는  파티에 필요한 꽃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선다. 그리고 하루. 파티가 열린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서사는 그것이 전부다. 그녀의 눈에 비친 런던의 풍경, 그녀를 둘러싼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성공한 사람들, 때로는 그렇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의 정경.

 

그녀는 빅토리아 거리를 가로질러 건너며 인간이 너무나 어리석은 바보처럼 느껴졌다. 무엇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고, 어떻게 그런 관점으로 인생을 보고,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p.9

 

수많은 아침을 밀어넣은 지극히 농밀한 이 하나의 아침. 이 순간.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사랑도 오늘의 어리석은 세속적인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무리 불행해도 인생은 포기 못할 그 어떤 마지막 꿀을 숨기고 있다. 무모하고 비겁하고 "낭만적인 해적 같은 남자"인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랑, 피터 속에는 이러한 깨달음이 있다.

 

늙는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바로 이거야. 열정은 여전하지만 지난날의 경험을 천천히 불빛 아래 돌려 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최상의 향기를 더해주는 힘이지. <중략> 쉰세 살이 되고 보니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치 않았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순간순간, 그것의 방울방울, 여기, 이 순간, 지금 이 햇빛 속에, 리젠트 공원에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정말이지 차고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p.115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추억의 귀환. 끊임없이 테잎은 되감기고 의미는 가공된다. 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했더라면 좋았을 경험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내 인생에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의 무게의 추는 숙명적으로 내 삶의 닻이다.  단하나의 무의미함도 어떤 하나의 사소함도 걸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댈러웨이 부인>을 읽아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속의 '사자' 거기에도 파티가 있었다. 그 파티에 참석했다 우연히 죽어버린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아내 옆에서 삶을 조망하는 남자가 있었다. 묘하게 닮아 있는 이야기.

 

 

 

 

 

 

 

 

 

 

 

 

 

 

 

 

자기라는 존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뿌연 세계로 사라져가고, 그들 죽은 사람들이 한때 살던 현실의 세계 그 자체는 허물어져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았다.

- p.291

 

노이모 자매의 파티에 참석한 조카 가브리엘은 아내 레이첼의 추억을 버지니아 울프의 피터처럼 불빛 아래 천천히 돌려보게 된다. 역설적으로 추억의 귀환은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의식으로 연결되고 현재의 순간에 대한 농밀함으로 통한다. 버지니아 울프와 조우하는 부분이다. 두 작가의 생몰 연대를 보니, 놀랍게도 같다. (1882~1941)  버지니아 울프의 약력을 보니 그녀의 죽음이 제임스 조이스의 죽음에서 온 우울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친분이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밀착되어 있던 관계였던 것같다. 파티라는 생의 축제에서 갑자기 다가오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삶의 본질적 유한성에 대한 두 작가의 공통적인 통찰에서 유려하게 빚어낸 깨달음이다. 클라리사도 가브리엘도 어쩌면 작가들 자신의 투영인지 모르겠다. 파티를 개최하고 파티에서 시를 읽고. 각기 다른 의미에서 파티에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던 그들도 그들이 걸었던 그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거리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그 둘은 그럴 것을 이미 안다. 내일 죽을 것을 이미 아는 것은 머리로 가능한 명제이지, 가슴으로 간직하는 깨달음은 아니다. 모든 것의 유의미성도 무의함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지금 하는 사랑은, 지금 하는 일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기도 한다. 삶 앞에서 어리석어지는 것은 이 단순한 명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클라리사의 말처럼 그것은 의회의 법령으로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뛰어들고 싶어했을 정도로 화창했던 유월의 아침. 그 순간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반복된다.

 

눈이 온단다. 사박사박 그 눈을 밟으면 2012년 12월 5일은 또 허공으로 스러질 것이다. 그 경계를 딛고 나는 또 나아가고. 무작정 스산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은. 

 

P.S.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바치는 일종의 헌사다. 각기 다른 세 시대, 세 여인의 접점은 <댈러웨이 부인>이다. 심지어 한 명은 댈러웨이 부인의 클라리사라는 이름과 같다. <디 아워스>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을 <댈러웨이 부인>과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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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 사랑의 시작
    from A Month in the Country 2012-12-06 23:17 
    서재 이웃분이 한 번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누구처럼 쓰고 싶은지. 소설이나 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 나는 누구를 표준모델로 골라야할까 고민을 좀 했었다. 일전 한 페이퍼에서도 썼었는데, 내게 '글'이란 정연(井然)과 정연(整然)이 만나서 이뤄내는 무겁거나 깊은 어떤 것,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의 밖에 머무는 어떤 것이다. 지금처럼 소소한 상념들을 블로그에서 끄적거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문학소녀 시절을 벗어난 이후 '소설'이든 '
 
 
댈러웨이 2012-12-0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저는 <출항>을 끝냈고, 울프의 다른 책들이 오는 동안 <등대로>를 다시 읽었고, <제이콥의 방>을 읽고 있어요. 반가워요. 버닝햄의 책도 함께.

댈러웨이 2012-12-05 21:35   좋아요 0 | URL
마이클 커닝햄이에요. 뭘 버닝하고 싶었던 걸까요 저는? --; 블랑카님, 저 먼댓글 달고 싶어지는데요? ^^

blanca 2012-12-06 09:31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이 떠올랐어요. 왜 댈러웨이라고 이름 붙이셨는지 설명 안 하셔도 느낌으로 다가올 만큼 너무 좋은 책이더라고요. 저도 커팅햄이라고--;; 수정했답니다. 참, 댈러웨이님! 저 울프의 다음 책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것으로(아, 너무 지난한 표현이지만) 한 권 더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다크아이즈 2012-12-0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커팅햄의 <첫 키스> 비유가 왜 <댈러웨이 부인>에 가서 걸리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는 일인.
억지로 읽어보려 했는데도 그냥 덜 읽고 반납하고 만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번역상의 문제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삼아봅니다.
291쪽 옮긴 글(깔끔한 번역 같지 않아요.)보다 저는 블랑카님의 해설이 더 좋은 걸 어쩌라구요?^^

blanca 2012-12-06 09:33   좋아요 0 | URL
아, 팜므느와르님, 댓글 읽고 커닝햄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제가 추신으로 덧붙였습니다.^^ 아, 번역이요! 그러실 수도 있어요. 제가 읽은 이태동님의 번역은 참 좋았어요. 일단 표지가 이뻐서 낙찰했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