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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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이쉬킨 공작의 이야기에는 실제 이십 대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직전 감형 받은 체험이 녹아 있다. 고작 이십대 후반의 청년 앞에 당도한 확실한 죽음의 인식. 그것은 그의 전생애를 바꾼다. 내 눈 앞에 백퍼센트가 되어 도착한 나의 종결 앞에서 비대해지는 삶의 무게와 가치에 대한 각성이 이 천진하고 진실한 백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 그에게 무엇보다 괴로웠던 것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죽지 않는다면 어떨까! 만일 삶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어떨까 -그야말로 무한이리라! 그리고 그건 고스란히 내 것이 될 테지! 그렇게만 되면 나는 일분일초를 한 세기로 만들어 그 무엇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일분일초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그 무엇도 헛되이 써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 생각은 마침내 증오감으로까지 변해서, 차라리 한순간이라도빨리 총살시켜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는 겁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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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1-09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옛날에 읽은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네요. 지금부터 열심히 고전을 읽어도 2-3번은 읽어야하니 갈 길이 멉니다.ㅎ
 
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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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는 하드SF, 즉 과학 이론적 원리가 이야기를 위한 보조장치가 아니라 이야기의 근간이 된 SF소설이다. 컴퓨터 엔지니어인 작가 류츠신의 방대한 이론물리학, 천체물리학적 지식이 <삼체>의 도입 장벽이 되기도 하지만 이야기 자체의 동력이자 흡인력이 되기도 한다.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해리와 친구들의 마법이 마치 현실에 기반한 것처럼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처럼 태양이 세 개인 삼체의 외계문명도 류츠신의 탄탄한 이론적 설계도 하에서는 생생한 현장감을 띤다. 


류츠신의 유니버스는 태양계를 벗어나 외우주로 향하고, 우리가 익숙한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나 4차원으로 확장되다 마침내 2차원으로 붕괴되고, 유한한 시간을 벗어나 몇 십만년도 우스운 미래로 뻗어나간다. 80년 남짓을 한정된 영토 안에서 살며 모두가 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현대 문명의 한계와 인류의 오만을 냉정히 조망하는 관조적 시선은 이런 방대한 스케일의 SF만이 가질 수 있는 혜안일 것이다. 


1부 삼체문제


'중화 2호' 고에너지 가속기 프로젝트 나노 부품 책임자 왕먀오는 '과학의 경계' 학술단체 소속 여성 과학자의 자살과 관련하여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협조 요청을 받게 된다. 왕먀오가 하는 삼체 세계 발전사를 시뮬레이션한 VR 게임 속에서 진시황, 공자 등과의 상호작용은 사이버 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항세기와 난세기를 갈마들며 생존을 향해 발버둥치는 문명사의 복기와 예행 연습의 기능을 한다. 한편 죽은 과학자 양둥의 어머니인 예원제는 문화대혁명기에 물리학자인 아버지가 어린  홍위병들에 의해 공개처형된 후 홍안기지에 가게 된다. 이곳에서 예원제는 삼체 문명에서 보낸 신호를 수신하게 되고 지구의 좌표를 노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4광년 떨어진 삼체의 우주선이 침략을 위해 지구를 향하는 400년의 여정을 시작하게 한다.



2부 암흑의 숲


삼체문명에서는 지구에 일종의 정보원인 지자들을 보내게 되고 지구에서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지구를 방위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면벽자' 프로젝트 및 태양계 방어기지 건설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과 배신이 일어난다.



3부 사신의 영생


말기암에 걸린 청년 윈톈밍이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여학생 청신에게 별을 선물하고 안락사를 택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주 엔지니어인 청신이 인류 문명을 외계 침입에서 수호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 동면으로 뛰어넘은 미래의 은하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삼체 세계의 지령으로 호주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고 우주 도시, 우주선에서 혹은 동면을 통한 미래에서 생존의 딜레마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에 대한 묘사가 현 인류의 생존 위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전체주의를 동원하고 타인을 공격하는 참상은 그리 먼 것이 아니다. 


생존 자체가 행운입니다. 과거에 지구에서 그랬듯이 지금 이 냉혹한 우주에서도 마차가지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모르게 인류가 환상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생존을 아주 당연한 일로 여겼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들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삼체>의 핵심 메시지는 인류의 문명이 무한정 진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과연 선인가? 우리의 도덕률은 미지의 광활한 우주 세계에서 존재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의 세계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생존 의지는 도덕적 기본 원리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것이 악으로 명명될 여지가 언제나 있으며, 그럼에도 살아남는 그 무엇은 결국 인간의 연대와 사랑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또한 전부는 아니라는 것. 시공간에 대한 경직된 선입견은 인간의 지적 한계의 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인간 존재 자체가 거대한 우주 전체에서 가지는 의미는 지극히 미소하다는 것. 


지금 여기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과 희열은 우주의 끝과 우주 최후의 날까지 확장되는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지평 너머로 희석된다.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 자체가 가지는 힘이 <삼체> 읽기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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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26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은 드디어 sf를 영접하셨군요. 좋으셨나 봅니다. 저는 일단 과포자라 읽을 자신이 영...ㅠ

blanca 2024-11-27 09:21   좋아요 2 | URL
저도 솔직히 다 이해는 안가더라고요. 영혼 없이 읽은 대목도 많아요. 그래도 워낙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푹 빠져 읽었어요.

transient-guest 2024-12-14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즐겁게 푹 빠져 읽었지만 결말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SF를 동양의 언어로 풀어낸 것이 너무 좋았어요. 무협지를 읽는 듯한 느낌도 좋았구요.

blanca 2024-12-14 10:06   좋아요 1 | URL
이해 안가는 대목이 저는 많았어요. ^^;; 그런데 스토리 장악력으로 다 넘어가지더라고요. 이색적인 SF라 오랜만에 푹 빠져 정말 즐겁게 읽었어요. 작가 나이가 벌써 꽤 들었더라고요.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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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 살 때 이걸 알았더라면…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릴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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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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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도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그 문장, 단어, 음절 하나하나를 벽돌처럼 쌓아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듯 클레어 키건은 이야기를 짓는다. 무심코 주위를 한번 쓱 들러보고 하는 배경의 묘사 같은 것들도 결국 결론이 나고 나면 이야기에 중요한 하나의 단서였음을 깨닫게 될 때, 이 작가의 작품은 비로소 그 의미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금까지 이런 소설들을 읽어본 적이 있었나? 하고 묻는다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그녀를 빼고는 없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에 초반부터 묘사되는 결혼식의 정경은 평범하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사제의 시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의 한담과 신랑, 신부의 긴장된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의 어수선함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부의 진주 목걸이가 끊어지고 그 진주알이 사제에게 굴러온 시점에서 이야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방향을 튼다. 사제는 이 결혼식에서 소외된 사람이고 이 결혼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이 화제로 올릴 때는 무관심을 가장했던 중국 사람에게 가서 그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당신 문제 있어요."라는 말을 연거푸 들을 때 사제는 예감한다. 자신의 상처를 그가 읽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그건 체념이나 절망과는 다르다는 것을.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또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은 자신이 자라난 아일랜드 전원 풍경 묘사를 통해 내밀한 곳의 울림을 자아낸다. 아일랜드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허락받지 못한 사랑을 한 사제의 내밀한 심리적 변화를 손에 만지듯 감지할 수 있는 그 지점을 알고 있다. 이제 사제에게는 한때 흔들렸던 평화가 돌아왔다. 상처의 웅덩이를 지나간 자리에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걸어가야 함을, 그리고 그 발걸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읽는 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깨닫게 된다. 


하루키가 선집에 실었던 <물가 가까이>에서 주인공은 겨우 스물한 살이다. 그의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 재력가와 재혼한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호화 리조트에 그를 초대한다. 하버드에 다니는 의붓아들의 성취를 비웃고 빈정대는 계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아직 어린 그가 안쓰럽다.  그는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대신에 가부장적 할아버지에 억압받으며 살아온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할머니가 떠나고 난 후에도 단 하루도 할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는 바다를 보고 싶어했지만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아내를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 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손녀가 아닌 손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부라 여기고 그 안에서 견뎌야 했던 할머니의 슬픔을 해원하듯 자유롭게 물속을 유영하는 장면은 한없이 먹먹하다.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청년에게 진짜 사랑과 돌봄을 줬던 할머니의 생의 비원을 실현이라도 하듯 익사 직전까지 헤엄치는 그의 이야기.


<삼림 관리원의 딸>은 도발적이고 귀엽고 또 한편 묵직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다. MBTI로 극J로 보이는 디건은 가장 자신의 아내로 적합해 보이는 마사에게 매달려 결혼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 부부 사이는 냉랭해진다. 마사는 디건을, 디건은 마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날 장미 묘목을 팔러 온 남자를 맞은 마사는 그와의 사이에서 임신하여 막내 딸을 낳게 되고 디건은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귀엽고 이상한 막내딸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척한다. 

막내딸의 생일날 숲속에서 남의 리트리버를 몰래 가지고 와 생색을 내며 딸에게 선물로 줘버린다. 딸도 마사도 그 리트리버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어느 날, 그 주인이 나타나게 되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둘째 아들이 매사에 계산적인 아버지와 상처 입은 어머니를 관찰하고 내뱉는 이야기들이 촌철살인이다. 사회적 금기나 예의를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에는 위트와 말하여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디건의 반응은 독자의 기대를 벗어난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가정의 어엿한 가장의 역할에 매달려 있던 그가 마침내 그 모든 것 뒤안에 숨겨져 있는 진짜를 발견하게 될까. 


다시 처음의 작품 <작별 선물>로 돌아온다. 어느 날, 가족을 두고 뉴욕으로 떠나는 딸인 당신. "당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떨까." 이 질문에서 자유로웠던 작별이 있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이 가족이 소유하는 더 큰 비밀이 있다. 딸을 성추행했던 아버지, 그를 방관, 방조한 어머니, 여동생의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 상황을 어떻게든 방지해 보려고 노력했던 오빠를 두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남기고 가는 그것들의 추악함에는 남들이 기대하는 소박한 그리움이 없다. 여기에 클레어 키건만의 독특한 지문이 묻어난다. 아름다운 묘사의 간극 사이로 냉정하고 가혹한 현실이 비어져 나온다. 주인공은 고통받고 고민하고 표류하지만 결국 거기에서 씩씩하게 걸어나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아름답고 허무한데 강인하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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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7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27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24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24-08-27 1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blanca님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클레어 키건 새 책 나왔는지 몰랐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blanca 2024-08-28 08:59   좋아요 1 | URL
달밤님, 반가워요. 새 책이라지만 초기 단편집이더라고요. 초기 단편집 완성도가 이 정도라니, 정말 놀라운 작가랍니다.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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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사십대의 내 앞에 이십대의 내가 나타난다면 아마도 나는 상대를 반쯤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십대에 나를 알았던 사람 그 누구도 지금 이 나이의 내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겁이 없었다. 추억 속의 나는 낯설다. 세월이라는 것은 신비롭다. 새로운 모든 걸 시도해보고 싶어했던 사람도 어느새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앤드루 포터가 돌아왔다. 텍사스 주에 사는 사십대 초반의 남자 화자로. 백인 중산층 남자. 서너 살의 아이가 있거나 없다. 결혼했다. 과거 대학 시절의 친구들과 재회하거나 혹은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젊은 여자를 통해 이삼십 대의 과거와 만난다. 나는 무언가를 세월과 함께 잃어버렸다. 그건 나다움일 수도 있고 내가 두고 온 그 무엇일 수도 있다. 대체로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들이다. 언뜻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모든 이야기가 하나하나 다 새롭게 느껴진다. 앤드루 포터 특유의 섬세한 서정성은 내가 감각했지만 언어화할 수 없었던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명명한다. 바로 그거였다. 


어떠다 이렇게 됐는지는 몰라도 나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는 시각을 잃어버렸으며 살인과 죽음 같은 문제라면 그저 다 슬플 뿐이다.

-<오스틴>


첫작품에서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파티에서 우연히 주거침입을 했다 집주인의 정당방위로 살해당하게 된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일하게 아이를 낳은 '나'에게 친구들은 이 사건의 촌평을 요구한다. 나는 옳고 그름 그 너머에 있다. 나는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옳고 그름에 선명하게 경계를 그을 수 있다고 믿고 흥분했던 시절이 있다. 이제 나는 그런 것과는 멀어졌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나는 일단 마음이 무거워진다. 살면서 많은 실수를 했고 그 대부분이 내가 생각했던 옳고 그름의 잣대 너머에서 벌어졌다. 나는 이제 확신이 무섭고 그 주장이 때로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결국 친구들에게 답을 주지 못한 그 사정을 공감한다.


<라인벡>이라는 작품은 특히 마음을 울렸다. 연인 사이에 낀 나. 이런 구도는 청춘의 친구들 사이에서 흔하다. 이상하게 그 시절은 그랬다. 연인은 꼭 교집합 친구를 부른다. 그들의 권태, 갈등의 접점에 그 친구를 동원한다. 그 시간은 아름답기도 하고 기만적이기도 하다. 이십 년이나 그런 구도 속에서 한 연인의 사랑, 권태, 이별, 재결합의 경로를 함께 통과한 내가 마침내 그들에게서 걸어나오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건 성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서글프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엔 또 동원할 다른 수사가 없다. 공허한 아름다움이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히메나>


나와 내 아내 앞에 나타난 여대생 히메나. 그녀는 나와도 아내와도 어떤 묘한 관계를 맺는다. 부부는 각자 그 관계에 대해 함구한다. 어느 날 히메나가 사라지고 부부는 각성의 순간을 맞는다. 어쩌면 히메나는 그들의 과거의 자신들의 모습의 환영일지도 모른다. "히메나의 이야기는 항상 바뀐다."는 문장이 갖는 의미다. 살면서 다시 쓰게 되는 과거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도 공유할 수 없다. 


표제작 <사라진 것들>에서 내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함께 하게 된 마지막 삼십 분에 느끼는 그 묘한 환희와도 통하는 이야기다. 이 감정을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건 불륜도 외도도 아니다. 다만 어떤 순간이다. 앤드루 포터는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 등장하는 제3자를 통한 그 모호한 비밀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공통점은 그들이 환기하는 내 과거의 시간이다. 내가 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어떤 것을 일깨우는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서 내가 두고 온 그 무엇들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간. 


사라진 것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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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3 0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휴 잠자냥 님에 이어 블랑카 님도 오별이라니!!

blanca 2024-01-23 09:32   좋아요 0 | URL
요새 아주 줄줄이네요. 이제 저는 미들마치로 갑니다.

잠자냥 2024-01-23 11:11   좋아요 1 | URL
다락방 님 우리 나이에.... ㅋㅋ 이거 오별 안 주기 어렵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4-01-23 11:1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우리 나이 ㅋㅋ 정곡을 때리시네요. 이것은 마치 딱 우리 나이 남자 버전 이야기예요.

새파랑 2024-01-23 11:44   좋아요 1 | URL
40대를 위한 책인가요? ㅋ이번주에 서점가서 구매해야겠습니다~!!

blanca 2024-01-23 11:45   좋아요 1 | URL
이 책 읽으면 앤드루 포터 만나보고 싶어집니다. 내가 느낀 개인적인 감정들이 실은 다 사십 대의 공통된 정서였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요. ㅋㅋ

감은빛 2024-01-24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그냥 지나치기 어렵게 만드는 글이네요. 조만간 서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제목이 [사라진 것들]이라서 더 와닿는 느낌이네요.

blanca 2024-01-24 11:41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그 나이듦이 주는 소외감, 상실감이 그냥 절창이에요. 왜 내가 기분이 안 좋았지?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그랬던 게 결국 그런 거였더라고요. 강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