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유미리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유미리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 책은 운좋게도 그녀의 처녀작이다. (처음 접하는 소설이 첫 작품이라는 것은 작가의 변화를 그대로 쫓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자신의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8년간 재판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책은 그 와중에 조금 개정을 본 후 출판된 것을 번역한 작품이다. 책 후기에 쓰여진 재판 과정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외적인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소설은 주인공이 일본에서 희곡으로 유명해지고,  그 작품이 한국에서 번안되어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한국을 찾는 과정이 삽입되어져 있다. 힘없는 아버지와 남자를 찾아다니는 어머니와,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받아야 하는 남동생 등등 가족들의 이야기 한편으로, 연극 연출가와의 동거 중에 카메라 작가와의 바람 등 남성과의 편력,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동성의 친구와 그로 인해 얽히게 되는 주변 인물 등의 이야기가 마치 일기장이나 다큐멘터리를 들여다보듯 그려지고 있다. 말그대로 사소설의 전형으로 보여지는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으면서 숨이 턱턱 막힌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왜 이리 주인공의 삶을 조여오는지, 그리고 왜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증오하는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분노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감나무집 사내와 리화라는 한국의 여자친구가 사이비 종교집단에 같이 있는 것을 목격하는 착각 또는 현실로 끝을 맺는 소설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불경의 한 구절만을 Ÿ슷떳게 만든다.

세상에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는 행복의 나라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어머니의 자궁과 닮은 바다, 물이 주는 평온함과 거리가 먼, 딱딱하고 건조한 돌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 고독과 소외감이 온 몸에 들러붙어 도저히 떨쳐내지 못하는, 끝없는 몸부림조차 유영을 가능하게 하지는 못한다. 그곳은 물 속이 아니라 돌이기 때문에. 자신 안으로의 침잠. 애벌레처럼 갇혀버린 자신만의 공간. 오직 그곳만이 나를 자유롭도록 만들 것인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만 하는가? 가끔은 스스로, 홀로, 무너져 내리는 나를 생각한다. 돌은 황무지며, 황망하지만, 그곳이 내 삶의 터전임을 자각한다. 끝내 도달하지 못할 물을 꿈꾸며 온 몸으로, 지느러미를 꿈틀댄다. 그(녀)는 (혹은 나는) 행복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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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피날레 - 종말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
아베 가즈시게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일본에 오타쿠를 보고 있자면 입이 벌어진다. 참 별의 별거에 집착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다가도 한 편으론 이해가 간다. 이해란 먼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쳇바퀴 도는 생활, 탈출구가 있다면 무엇이라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예전 TV서 보았던 '앗! 이런 일도'류의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을 먹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를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책에선 롤리타 컴플렉스를 지닌 주인공이 나오는가 하면, 자살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아이들, 환각제에 취한 어른들, 자위기구에 집착하는 남자 등이 나온다. 단편들 모음집이기도 한 이책은 첫번째 단편 <그랜드 피날레>가 워낙 강렬해 나머지 단편들의 맛을 조금 앗아가 아쉬운 점이 있다. 하지만 그 강렬함은 오래도록 머릿 속에 남아 있을듯하다.

부인에 대한 폭력으로 이혼뿐만 아니라 접근조차도 불가능하게 된 주인공. 8살 된 딸 생일에 어떻게든 얼굴 한 번 보고싶어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알고보면 그를 안쓰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가 이혼한 이유는 단순히 폭력때문이 아니라, 아니 폭력은 거의 우발적인 것이고, 롤리타 컴플렉스가 주 원인이기 때문이다. 교육영화를 찍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주인공은, 오디션을 보러 온 아이들을 유혹해 아동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행위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주인공을 욕하기는 무척 쉽다. 아무리 내가 도덕적이지 못하더라도 넘어서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는 상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선을 넘어선 자다.

하지만 소설이 주인공의 내면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조금 당황하게된다.  그 내면이란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뿐이지만, 일견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당황스러운 것은 이 내면의 소리가 결코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내가 타인의 행동을 바라보고 나름대로 이해하건만, 그것은 상호 소통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로 따로 독립된 채로 놓여져 있는 것이다. 즉, 내 생각엔... 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은 바로 내 생각일 뿐이며, 타인이 취한 행동의 근거도 배경도 이유도 되지 못한다. 서로간의 대화로 이 간격을 극복할 수 있으련만 대화는 항상 현실의 바닥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空론이 되어버린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소통과 이해는 불가능하다. 서로 겉에서 맴돌뿐 침투하지 못한다. 마치 텔레비젼 뉴스 속에 비쳐지는 사건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이 느껴지듯 말이다. 누가 살인사건이나 화재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던가?

개인은 말 그대로 파편화되고 원소화되어 공기를 떠돈다. 다른 누군가와 만난다면 비누방울처럼 펑 하고 터져버릴듯이 위태롭게 말이다. 내가 다가서려 해도, 또는 남이 다가서려 해도, 그 비누방울은 속을 보여주지도 않고, 부딪히면 터질 각오를 해야하니, 우리는 그 세상에 환성을 질러야 할 것인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인가? 적당히 속엣말을 내뱉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래야지 귀찮아지지 않는 삶이란...

비눗방울은 이슬처럼 영롱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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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매듭일까?

스필버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절대 감추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도 이런 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뮌헨>이라는 이번 영화 역시, 그런 관점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 영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 중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단이 죽음을 당하고 배후는 아랍의 '검은 9월단'임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공적인 보복을 감행하지 못하지만(아니 실제로 감행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특수 공작원을 보낸다. 영화의 주인공은 이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인물이 11명의 제거 대상을 찾아 하나하나씩 없애가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팀들이 맨 처음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대화는 들리지 않고 장중한 음악만이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크게 웃는 그네들의 장면은 무엇인가 언발란스하게 느껴진다. 자신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그리고 그 임무라는 것이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는 것, 그것이 과연 정의인지 살인인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을 그 장면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갈등들은 영화 중간중간 계속해서 튀어나온다. 아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오직 타겟만을 죽여야 한다는 휴머니즘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테러집단과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점차 이들은 테러 대상과 별도로 자신들의 동료를 죽인 킬러에 대한 복수를 행하기도 하면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자신들이 행한 임무가 또다른 폭력을 불러온다는 사실에 과연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회의하게 되고, 자기 자신이 살해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자신이 행한 살인방법을 떠올리며 침대, 전화기, 텔레비젼을 뜯어보고도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스필버그가 나름대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려 애쓴 흔적은 중간중간 삽입되는 뮌헨 올림픽 당시의 상황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인질들을 잔인하게 죽인 테러리스트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묘사된 장면은 격앙된 음악만큼이나 애절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짠하게 느껴진다. 물론 영화 속 주인공에게 보다 많은 감정이입을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가족이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 또한 가족이다. 이들과 그들에게 있어 국가란 가족의 확장이다. 무력으로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던 두 집단은 결국 이것이 해결책을 찾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무력은 보다 더 큰 무력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스필버그는 평화와 화해의 손을 잡지 않는 이스라엘 정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요르단 장벽 앞에서 팔레스타인 남자들 옷을 다 벗기며 검색을 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떠올린다. 탁 트인 마을 앞에서, 앞에 여자가 있든, 아이들이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수모를 이들은 어떻게 해결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영화는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걸까? 그래서 영화는 따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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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거기서도 가족이 튀어나오는 군요. 맘이 확 바뀝니다.
미국인들의 그 '가족'타령이 넘 질리는지라....

하루살이 2006-02-13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필버그에겐 가족은 떼어낼 수 없는 분신처럼 여겨집니다.
 

 절에서 마음을 닦는다고 얘기하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적절한 표현은 마음을 쓴다, 즉 용심(用心)입니다. 용심이 곧 수행입니다.

 

전 길상사 회주 법정 스님이 1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성북동 길상사에서 마음 씀씀이의 중요성을 화두로 삼아 동안거 해제 법문을 했다.

안거는 일년 중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스님들이 선원에 한데 모여 수행하는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이날은 석달 간의 겨울 안거를 마친 스님들이 산문 밖으로 나서는 날이었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15년 가까이 생활하고 있는 스님은 자신의 오두막 생활을 소개하는 것으로 법문을 시작했다.

이번 겨울에는 어느 때보다도 추워 온 개울과 폭포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도끼로 얼음을 깨도 물을 얻을 수 없어서 얼음을 녹여야 겨우 식수를 얻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우리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모진 마음을 먹게 되면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듣지 않게 된다면서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흘러야 자신도 살고 만나는 대상도 살리게 되지, 고여있게 되면 생명을 잃고 썩고 만다고 설했다.

스님은 나아가 내가 한 생각 일으켜서 마음을 옹졸하게 쓸 수도 있고 너그럽고 훈훈하게 쓸 수도 있다면서 내 마음이 천국을 이룰 수도 지옥을 이룰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마음을 쓰는 일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면서 대인관계를 통해서 현재의 자신을 헤아릴 수 있으며,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살펴보라고 법회에 모인 대중에게 충고의 말을 던졌다.

스님은 마음이 굳어져 닫혀 있다면 오늘부터라도 다 풀어버려라. 그래야 내 인생에 새 봄을 맞이할 수 있다면서 법문을 마무리했다.                                                         (연합뉴스)

 

겨울 산행을 하면서 계곡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을 보곤 한다. 그런데 정말로 올핸 유독 그 졸졸졸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물도 흐르지 못할 때가 있구나 라고 생각해봤다. 스님은 그 멈추어진 물을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을 확장시켰다. 봄이 마음으로부터 찾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누군가 내 마음을 녹여줄 것을 기대하기 보다 스스로 녹여야 될 일임을 깨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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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5-08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법정 스님을 참 좋아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어요.

하루살이 2006-05-22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자림 님 덕분에 마음 공부 다시 하네요. ^^
 
세계는 평평하다 - 21세기 세계 흐름에 대한 통찰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이윤섭 외 옮김 / 창해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강물이 흘러흘러 폭포를 맞이한다. 그 강물에 배를 띄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폭포로 떨어지거나, 첨단 장비를 동원해 하늘 위로 솟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평평한 세계에선 모두가 하늘 위로 솟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 강물은 자본주의라는 강물이요, 하늘 위로 떠오른 것은 무선 통신 등의 신기술이 이루어놓은 세계화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무한 경쟁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제하에 쓰여진 이 책은 그래서 다분히 미국적이다.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세상이 평평해질 수 있는 희망을 보고, 9월 11일 테러를 지켜보면서 또한 벽이 쌓일까 두려워 하는 저자는 강자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보호주의를 통해 성장했다는 사실 자체를 애써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자유 경쟁에 앞서 왔고, 또 앞장 설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그 거스를수 없을 것 같은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 폭포가 아닌 평원으로 길을 내고 싶은 심정이다. 하늘로 나는 꿈이 아니라, 다른 물길을 터, 평원에 물을 적시겠다. 즉,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라는 체제 말고도, 그것의 여러가지 변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만한다면, 폭포를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생각들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서 하기로 하자. 이 책을 읽으면서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은 저자가 순진한 건지, 이 책을 읽고 있는 내가 순진한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전부 허구라면 모를까, 미국의 유명 언론인이 세계화가 가져온 부정적 통계치나 사실 관계를 무시한채, 또는 그것에 대해 자본주의의 문제가 아닌, 폐쇄적 국가 체제나 문명의 문제로 바라봄으로써, 현재의 체제만을 유일한 삶의 시스템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잡설은 일단 그만두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세계가 평팡하다는 것은 다국적 기업을 통해서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델 노트북을 구입할 때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구매자의 손으로 들어오는지를 살펴본다면 가히 세계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제품을 주문하면, 동남아 공장에 주문장이 떨어지고, 주변 부품 공장서 2시간마다 필요한 부품이 공급된다. 그 부품이라는 것은 중국에 공장을 둔 인텔, 한국을 기반으로 하는 메모리칩과 보드, 대만에 공장을 갖추고 있는 모니터(?) 등등 국경을 초월한다. 완제품은 전용 항공기로 미국에 실려오고, 포장이 끝나면 UPS와 같은 택배회사가 소비자 집 앞으로 배달까지 해준다. 이 기간은 부품의 공급이 수월하면 1주일도 채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평평해진 세계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10가지 동력 때문이다.

1. 베를린 장벽 붕괴와 윈도즈의 탄생 2. 넷스케이프의 출현 3. 워크플로- 소프트웨어  4. 오픈 소싱(공개된 정보들) 5. 아웃 소싱 6. 오프 쇼어링(공장의 해외 이전) 7. 공급 사슬(예, 월마트) 8. 인소싱(예, UPS의 재고관리 서비스) 9. 인포밍(개인이 공급 사슬을 구축할 수 있게 된것) 10. 스테로이드(무선 통신 신기술) 

위의 동력이 작동한 세계는 평평해졌고, 보다 평등하게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 있게됐다고 저자는 파악한다. 저자의 생각은 크게 두 단어로 요약되어질 수 있는데(단순화라는 함정에 빠질지라도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바로 아웃소싱과 업무의 세분화다. 일을 쪼갤수 있는데까지 쪼개고 쪼개서, 아웃 소싱 할 수 있는 것은 아웃 소싱하고, 창의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하자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런 분할은 소비자에게는 값싼 제품을, 노동자들은 많은 일거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창의적이고 부가가치 높은 일을 미국인이 했으면 하고, 그 일은 이제 모두에게 열려져 있으므로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 하므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바로 희망과 용기다. 누군가가 언덕 위에 거대한 집을 짓고 살고 있다면, 나도 그 집에서 살 수 있겠다는 마음가짐을 먹고 살아야지,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겠다는 증오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증오는 바로 중동의 이슬람 문명권이 과거의 영화 속에서 아직도 살고 있으며, 현실 속에서 차별을 받으면서 느끼는 좌절감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이것이 바로 9.11의 속내라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평평한 세계 속으로 발을 딛지 못하는 나라들은 석유자본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며, 그들의 정치제도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저개발 국가들이 식랑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기반만 갖추어진다면 잉여 인력으로 교육을 통해 산업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먼저, 언덕 위 거대한 집부터 이야기해보자. 내가 그 곳에서 살거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여야만 하는 방법밖에 없는가? 다같이 그 언덕에서 살면 안된는가? 저자는 차별을 줄이는 방법 또한 평평화된 세계 속에서 논의를 통해 보다 더 빨리, 현실화된 방법으로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저 평등한 세계를 주장하는 것은 공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면 일리가 있다. 칼을 가지고, 도둑이 될지, 의사가 될지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주어진 칼과 병자 앞에 놓인 사람에게 주어진 칼이 어떻게 쓰일지는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개인의 의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처한 환경 또한 무시못할 요소다. 저자는 평평한 세계가 배고픔을 면하게 해줄 것이므로, 도둑은 사라질거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 어디 국민 1인당 수입의 많고 적음으로 평가되어지던가?  

저자가 말한 선순환을 한번 생각해보자. 배고파 굶어 죽는 나라와 1차 농수산품 수출국의 이름이 대부분 같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그 수출로 이루어진 수익이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곡물 메이저 다국적 회사가 대부분 가져가 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일의 세분화를 통한 아웃소싱의 자유로운경쟁은 또 어떤가? 1차 2차 3차 산업으로의 변경을 한번 보자. 미국은 어마어마한 돈을 1차 산업에 보조금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보조금 덕분에 세계 경쟁력을 갖춘 미국의 농산물과 곡물 메이저는 저개발국가의 1차 산업을 유린한다. 도대체가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상충하고도 남을 만큼의 보조금을 그들이 어떻게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서 마치 자유로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이 진짜 평등하게 열려진 환경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경쟁일까?

저자가 우려한 석유 에너지 문제와 환경 문제도 그렇다.  세계 에너지 소비의 40%를 쓰고 있는 미국은 선진국의 환경 기술에 유리하다는 그 교토의정서마저도 체택하고 있지 않다. 석유로 곤란을 겪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은 메이저 오일 컴퍼니가 어느 나라에서 돈을 벌어먹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웃 소싱으로 나뉘어진 일자리에서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차지한다는 발상 또한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1차 산업에서 3차 산업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아웃 소싱의 단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보다 높은 단계를 차지하기 위해 아마도 미국은 엄청난 보조금을 투입할 것이다. 또는 경제적 압박으로 표준화를 이끌지도 모른다. (이것은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 본것인데, 비디오가 맨 처음 나온 시절, VHS 형식과 베타 캠 형식에서 그 질적 측면에서 베타 캠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본의 기술이라는 것 때문에, 세계 표준화로 VHS를 택한 것을 보면 알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나라가 지상파 DMB에 목숨을 걸고 전략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세계 표준화에 한발 앞서겠다는 생각일터인데, 그것 또한 미국과 호흡을 딱딱 맞추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은 아마도 HD표준 방식을 미국식으로 채택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열린 세계, 평평한 세계에선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일자리들이 플러스적 생산을 가져온다면 모를까 대부분 제로섬의 결과임을 생각해보면, 아웃소싱 덕분에 웃는 사람들 한편으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쪽이 생길 것이다. 바로 1차 산업이 곡물 메이저의 볼모로 잡혀있는 나라들처럼 말이다. 아웃 소싱의 마지막 단계가 누구의 볼모로 잡혀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나마 일자리를 창출했으니 좋은 것이라 여겨질 수 있을 것인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라다르크라는 마을의 흥망성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보면 알 수있다. )

일단 갖추어진 막강한 힘을 순순히 포기할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정말 위험한 발상이다. 9.11은 이슬람 문명권의 자격지심보다도 오히려 미국의 끝없는 욕망때문이다. 열려진 세계에선, 누구나 다 꼭대기에 올라설 수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나마 가능하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라이트 급이 헤비급을 싸워 이긴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물론 하늘의 별이야 운 좋으면 딸련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헤비급이 핸디캡 없이 라이트급과 싸운다는 것은 폭력이다. 자유 경쟁은 실은 폭력의 권장이다.

그 논조나, 전제가 어찌 돼었든, 세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 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을 통해 한가지 깨달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나마 평평화된 세계가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전쟁의 억제력을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이다. 세계가 서로 평평해 얽히고 설켜 있을때,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범한다는 것은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정치적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게 평평한 세계는 평평한 세계를 돌리는 태엽의 일부도 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기엔,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미 달콤한 돈에 취해 있으므로.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전쟁이 경제와 연관되기는 하나, 그것이 꼭 필수인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평평화된 세계를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얼르고 있는 무한경쟁 속에 감추어진 힘의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될듯 싶다. 그리고 꼭 무한 경쟁만이 세계를 평평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평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기술만큼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토대 또한 탄탄히 다져야 할 시기라고 본다. 세계가 진정 평평해지기 위해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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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4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내용일지 짐작은 했는데 역시나 이런 책이었군요.
리뷰를 보면서 열이 슬슬 오르고...이거 베스트셀러라는데 이 책보고 다들 감동하시면 어쩌나...

하루살이 2006-02-15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편에서 보니까 이렇게 생각한거고, 나름대로 세계의 흐름이나, 깨우침을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너무 분개하진 마세요^^. 알아야 대처할 수 있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