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적인 사람은 평범하고 친숙한 삶을 낯설게 성찰할 수 있습니다. 15쪽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가운데 하나인 사랑마저도 왜곡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을 신처럼 숭배하기 떄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자본주의와 같은 세속적 신학을 포함하여 모든 신학적 사유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공통된 목표였으니까요. 53쪽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ㄷ르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천주교 성당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누구나 성당이란 공간이 내뿜는 강렬한 힘을 느낍니다. 이런 공간에 적응해가며 천주교적 인강, 일종의 종교적 인간이 탄생하게 됩니다. 77쪽 

두가지 종류의 개인주의.양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비록 수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동일한 인간성을 보편적으로 공유한 존재가 됩니다. 사실 이 같이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성을 인정했기 떄문에 칸트의 정언명령, 무조건적인 도덕명령이 가능했습니다. 칸트의 윤리적 명령에ㅓ 중요한 것은 보편적 입법자라는 개념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 마치 잣니이 국회의원인 양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이나 입장에 근거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칸트의 주장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는 내용에서나 형식에서 보편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짐멜에게 자유란 내 자신이 어떤 타인과도 구별되고, 이러한 구별됨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말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양적 개인주의 가 아니라 질적 개인주의르르 옹호한 니체의 편에 섰지요. 니체에게 모든 개인은 타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단독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니체가 말한 본성이나 본는ㅇ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마다 가진 고유성을 의미한다. 니체가 볼 떄 이런 개인의 고유한 본성과 욕망을 부정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 자체를 범죄적으로 매도하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그가 칸트의 양적 개인주의에 대해 본성을 거역하는 도덕, 즉 반자연적 도덕이라고 보았단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95쪽 

짐멜의 논의를 역사적 순서로 정리하며 ㄴ다음과 같습니다. 산업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이전, 그러니까 대도시가 형성되기 이전에 인간은 공동체주의에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와 대도시가 점차 발달하자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고, 이에 따라 서서히 자신만이 가진 단독성을 깨닫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개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이 이전 시대보다 더욱 강해집니다. 짐멜은 이것이 바로 질적 개인주의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가 명확하게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만의 특이성 혹은 질적 고유성을 표현하려는 욕망은 사실 도시적 삶이 가져다주는 고독을 극복하려는 데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97쪽 

전자본주의 시대든 자본주의 시대든 인간은 특이한 허영심, 즉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짐멜이 대도시의 삶에서 보았다너 질적 개인주의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허영심과 그것을 이용한 산업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논리가 결합된 현상ㅇ                                                                                                                                                                                                                                                                                                                                                                                                                                                                                                                                                                                                                                                                                                                                                                                                                                                                                                                                                                                                                                                                                                                                                                                      인 셈입니다. 따라서 짐멜이 니체를 통해서 긍정하고자 했던 질적 개인주의는 인간이 새로운 역사로 나아갔다는 진보의 표시로 보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표현하는 자유가 실현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생산의 차원이 아니라 소비의 차원에마 ㄴ국한된 문제이기 떄문입니다. 99쪽

산업자본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 상품만을 구매하면, 잉여가치를 얻겠다는 산업자본의 끝없는 욕망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합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입니다. 새로운 상품이 아케이드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낡은 상품이 되어버리고 결국 아케이드에서 추방되고 말지요. 바로 여기서 유행이 가능해졌습니다. 119쪽 

벤야민이 보기에 인간은 신화적 사유에 익숙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유는 당연히 자본주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인식론적 장애물이 됩니다. 벤야민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고 싶었습니다. 최신의 사유로 보이는 것도 사실 너무나 낡은 사유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는 자본주의가 가져다준다는 진보와 행복이란 관념이 신화적 사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했습니다.126쪽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상품이 교환됩니다. 그러나그 교환의 이면에는 상품에 대해 돈이 갖는 존재론적 우월성이 있습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다른 것보다 절대적 우월성을 갖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지요. 자본의 존재론적 우월성은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상품에 대한 돈의 존재론적 우월성으로 드러납니다. 돈이란 그 액면가에 해당하는 모든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절대적 힘을 상징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미래라는 시간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166쪽 

벤야민이 보기에 자본주의의 생명력은 오히려 종교성 자체에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태고시대부터 인간을 지배했던 종교 논리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만약 돈이라는 신에 대한 철저한 복종, 그리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소망과 기대 심리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는 결코 기능할 수 없다고 보았지요. 도박에서 판돈을 잃었어도 자신을 탓할 뿐 결코 룰렛을 탓하지는 않는 경건함. 자본주의 종교성의 신비는 바로 이런 장면들 속에 고스란힌 담겨 있습니다. 179쪽 

문명의 세계, 즉 도시의 삶에서는 객관적 시간이 무척 중요합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분업화되고 복잡하기만 한 도시에서 사람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항상 만날 시간과 장소를 객관적으로 정해야만 합니다. 이 떄문에 도시에서의 삶은 각자의 체험된 시간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210쪽  

화폐경제가  확립되어야 비로소 미래에 대한 염려가 가능하고, 미래를 염두에 둔 시간관념도 가능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식 속에서 미래의 소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현재를 통제하며 조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의식이 지닌 전형적 특징입니다. 214쪽 

부르디외에 따르면 전자본주의적 인간과 자본주의적 인간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미래와 관련된 시간의식에 있습니다. 전자본주의적 인간에게 미래란 가능성의 장이 아니라 단순히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만 이해됩니다. 가능성의 장으로서 미래란 다양한 경우의 수들 가운데 인간이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프랑스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미래에 나는 파리의 센 강에 있을 테고, 만약 체코에 여행가기로 결정하면 나는 미래에 프라하의 야경을 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잠재적으로 올 것으로서의 미래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올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도래할 그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로 이어지는 순환에 비유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21쪽 

동양철학이나 생태철학이 기본적으로 전자본주의적 삶과 사유 형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에 대한 동경 혹은 동양적 사유의 회복은 일종의 노스탤지어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스탤지어는 대도시에서 지친 도시인들이 시골이나 전원의 삶을 꿈꾸는 정서적 동기를 공유하기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과연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현재 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낳은 폐단들을 치료하는데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요? 237쪽 

최소한의 생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상근 노동자들은 자신이 속한 자본주의 체계의 문제점들에 대해 숙고하고 여론을 형성할 만한 힘을 갖게 됩니다. 244쪽 

어느 곳에 갔을 때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아비투스가 그곳에서 별다른 문제없이 작동하기 떄문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비투스를 의식했다면, 이것은 새로운 환경이 자신의 아비투스와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외부, 혹은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254쪽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이렇게 웃음은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행동, 혹은 일상에 대한 조롱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웃음에는 혁명적 힘이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유연한 생명의 운동을 긍정하는 반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행위를 거부하는 무의식적 행위의 하나이기 떄문입니다. 261쪽 

칸트에 따르면 진선미의 세계는 우리의 관심이 이론적 관심, 실천적 관심, 아니면 무관심에 따라서 다르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269쪽  

칸트 철학을 독해할 때 우리는 그의 철학이 근대사외의 한 특징인 직업의 전문화 및 세분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선미의 구분을 통해서 칸트는 전문화된 직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계기를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전문직 종사자들, 즉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그런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능력은 대부분 부모나 가족의 역량에 따라 후천적으로 재생산된 것입니다. .. 부르디외는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이라는 대작을 내놓습니다. 이 책을 통해 부르디외는 노골적으로 칸트의 미학이 추구하던 순수성을 비판합니다. ... 부르디외에 따르면 칸트가 말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부르주아 계층뿐입니다. 왜냐하면 무관심하게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는 이미 상당한 돈과 시간을 투자해 학습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부르디외는 칸트의 순수 미학이 아닌 혀재 대중미학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대중에게 아름다움은 감각적 쾌적함이나 윤리적 메시지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물론 부르디외는 대중 미학만이 진정한 미학이라고 보지 않아ㅏㅆ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름다움이란 물질적 조건을 다르게 갖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껴진다느 ㄴ점을 강조합니다. 상류 부르조아 계급처럼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자신 이외의 지시 대상은 갖고 있찌않은 이미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인다면, 노동자 계급은 모든 미적 이미지가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에 ㄸ라라 취향이 달라짐을 보여줍니다. 부르디외는 미학 논의를 통해 칸트의 미학이 결코 보편적이거나 유일한 미적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 것입니다. 275쪽 

부르디외는 미적 성향, 즉 취향의 차이가 어떤 계급이 자신을 다른 계급으로부터 구별짓게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원리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런 미적 취향은 혈연같은 선천적 요인이 아니라 특정한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서서히 획듭됩니다. ... 취향은 무엇보다도 먼저 혐오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한 공포감 또는 본능적인 짜증 구역질난다에 의해 촉발되는 불쾌감이라고 할 수 있다.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 이외에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자본을 더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가 문화자본입니다 이것은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미적 감각 그리고 사람들이 소장한 작품들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학력자본입니다. 이것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장ㅇ르 따거나 국가고시와 같은 시험제도를 통ㄱ솨해 얻는 자격 혹은 지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사회관계자본입니다. 이것은 문화자본과 학력자본을 얻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인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디외가 주목하는 세 가지 자본들은 모두 경제적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라고 하더라도, 돈 만으로 이 세가지 자본을 저절로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세가지 자본들은 지속적인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얻을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 가지 자본들은 하류계층에서 상류계층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벼락부자들을 막는 방어막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곧 상류사회의 성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  

그렇다면 하류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떄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286쪽

부르디외는 미적 취향이 계급적 아비투스의 전형적 사례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적 취향이 그에 걸맞은 실천이나 상품으로 인도한다는 부르디외의 지적입니다.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운동이나 행동 그리고 상품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비싼 명품을 구입할 때, 상류계급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류계급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분명히 입증하는 것입니다....경제적 자본을 확보한 부르주아 계급은 소비라는 과시 행위로 자신들이 남보다 훨씬 많은 돈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게되었지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사실ㅇ느 지금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이 미적으로 선호하는 모든 아이콘은 사실 19세기 사업자본을 상품화한 것에 지나짖 않는다는 점입니다 291쪽 

여러분의 현재 노동은 미래의 월급이라는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 같은 시간 의식은 기독교의 시간의식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선ㄴ 현재를 고통의 순간,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괴로운 순간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심판 논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현재의 삶을 미래의 그날을 위한 하나의 수단쯤으로 간주하겠지요. 300 쪽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미래의 좋은 삶, 장밋빛 삶을 약속합닏.ㅏ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고된 노동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각자의 삶을 경건하게 검열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나 기독교가 제공하느 ㄴ달콤한 미끼를 덥석 무는 순간,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직 됩니다. 이에 우리의 현재와 삶은 깊은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현재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게 되지요. 하지만 이미 로빈슨은 알아버렸습니다. 자시느이 삶이 초월적 목적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이 있다는 것, 삶은 놀이의 주체이지 결코 노동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 나아가 오직 현재만이 긍정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삶의 철학자 니체라면 놀이의 아비투스를 획득한 로빈슨을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불렀을 테지요.303쪽 

상업자본과 산업자본이 이윤을 획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상업자본은 공간의 차이, 다시 말해서 가격의 차이가 나는 서로 다른 두 공간에서 이윤ㅇ르획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업자본이 항상 각양 각종의 신기한 특산물이 나는 곳, 다시 말해 가격 차이가 나는 곳을 찾아서 멀리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7세기와 18세기 초까지 영국과 네덜란드가 경쟁적으로 동인도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산업자본은 상업자본과는 다르게 시가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깁니다. 예를 들어 MP3를 만드는 산업자본은 계속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여 기존 제품들이 유행에 뒤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소비자들에게 기존 제품을 버리고 계속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유행은 소비자들이 아니라 산업자본에 의해 우선적으로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업자본이 창출하는 유행은 대중매체의 발달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328쪽 

산업자본은 계속해서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야만 합니다. 만약 소비자가 사용가치의 세계에 매몰됐다면 산업자본은 상품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공장 가동ㅇ르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산업자본은 결코 잉여가치를 달성할 ㅅ 없겠지요. 하지만 상품에 기호가치를 계속 새롭게 불어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산업자본은 이런 위기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ㅅ김을 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소비사회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통찰이 중요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 혹은 허영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점은 벤야민이나 부르디외의 통찰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구별짓기 욕망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부당하게도 자신의 ㅎ녀재 삶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일종의 피해의식 말입니다. 또한 이런 피해 의식의 이면에는 모든 인간에게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깁관도 함께 깔려 있지요. 그래서 행복, 위세 혹은 안락함은 선택받ㅇ느소수에게만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 것입니다. 스스로 그런 소수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다시 말해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려는 욕망은 바로 부르디외가 말한 귀족적 취향에 대한 욕망과 같ㄷ고 볼 수 있습니다. 333쪽 

좀바르트는 자본주의가 발닳나 진정한 이유는 사치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베버가 생산 부분에서 드러난 금욕주의적 태도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계기를 찾았다면 좀바르트는 소비 부분에서 나타난 인간의 사치와 허영에서 자본주의 발달의 신비를 발견했습니다. 339쪽 

소비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분출하고,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일종의 환각을 갖숩니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냉정하게 지적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고유한 욕망조차도 산업자본주의에서는 생산력의 일환으로 간주되고 포획된 것에 지나지 ㅇ낳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치명적인 문제겠지요. 더욱 심각한 것은 소비사회라는 호나각의 사회에 포섭되면 우리가 더는 이렇나 상황을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지 ㅇ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산업자좁주의라는 체계 자체를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역량이 소진되기 때문이지요. 보드리야르가 미래를 암울하게 전망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349쪽 

소비사회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유대감을 소비자들 사이의 경쟁적 허영심으로 변질시킵니다. 이에 휩쓸린 소비자들은 자기과시의 치열한 소비 경쟁에 빠져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연대의 전망을 잃고 고립된 개인들로 산산이 분해되고 맙니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최근 산업자본의 경향입니다. 산업자본의 소비 논리는 이제 한 인간의 내면마저도 산산이 쪼개어 분열증적 소비 촉진의 경향으로 심화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아내로서의 자아, 어머니로서의 자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아, 동창 모입 성원으로서의 자아 등드응로 쪼개질수록 한 개인이 소비하는 상품의 목록은 금나큼 거질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비사회는 궁극적으로 소비자이며 동시에 노동자의 연대 가능성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통일성마저도 가능한 분해햐려는 것입니다. 352쪽 

분업과 전문화를 통해 산업자본은 우리가 가진 야성과 잠재 능력을 오나전히 무력화합니다. 산업자본의 필요에 따라 우리 능력을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전문화하고 규격화해왔기 때문이비낟. 물론 그 대가로 일정기간 고소득을 보장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날 우리가 배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 없다고 판단함ㄴ, 산업자본은 냉정하게 하루아침에 우리를 해고해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기술을 낡고 하찮ㅇ느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산업자본의 끊임없는 변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참 낡아버린 지식이나 기술만을 가진 그들, 노숙자가 되거나 사회로부터 폐기처분된 사람들은 이제 농사를 지을 수도 그렇다고 고기를 잡을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시골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실 그들은 자연에서 살아갈 삶의 기술을 단 한 번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노동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느 ㄴ너무도 자명한 사실,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건을 자신의 임금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싸게 소비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멈추지 않고 작동하는 핵심 비밀이자 신비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업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를 파편화하고 길들이는지 그리고 우리의 노동과 소비가 어떤 위험한 논리를 내포하는 지 잘 모릅니다. 심지어 우리는 산업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고 착각할 정도입니다. .. 자본주의하에서 돈은 분명히 자유라는 감정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자유의 감정, 두려움 없는 당당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원하는 상품을 마음대로 구매할 자유, ㅅ즉 이러한 소비의 자유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절히 생산할 수 있는 생산의 자유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생산의 자유란 결국 자본가 자신이 독점하느 것이지요. 363쪽 

보드리야르가 제안한 사물의 네 가지 서로 다른 논리. 다이아몬드. 도구, 상품, 상징, 기호일 수도 있다. 도구는 무엇인가를 자르거나 부술 때 사용도리 수 있다. 도구로서의 다이아는 사용가치라는 기능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실제적 작용의 논리 혹은 유용성의 논리라고 설명. 상품의 측면에선 1억원으로 구매하거나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됩니다. 이때 상품으로서의 다이아는 교환가치라는 경제적 논리를 따르게 됩니다. 등가의 논리나 거래의 논리에 따른다. 상징의 측면. 딸의 결혼 선물이 될 수 있다. 1억원으로 다른 것을 살 수도 있다.혹은 다른 상품과 바꿀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선물로서의 교환은 앞서 말한 등가 교환과는 다르다. 다이아를 나 선물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상대방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선물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교환의 논리. 양면성의 논리. 증여의 논리. 마지막으로 기호의 측면.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도 바로 이 네번째 측면. 다이아는 상류계층에 속하므로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작동할 수 있다. 신분의 논리를 따른다. 기호의 측면이 앞서 말한 상품의 측면과 그 의미가 유사하다. 과환가치가 높으면 높을 수록  고가의 상품일수록 구매자의 더 높은 사회적 위상과 신분을 상징할 수 있다. 이는 고가의 제[품을 아무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몸소 과시하려는 허영심으로부터 나온 결과이다. 384쪽 

사실 도구 상품 기호라는 사물이 가진 생산주의적 측ㅁ녀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동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활을 윤책하고 행복하게 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사물의 측면들입니다. 하지만 상징아로서 타인에게 주는 선물 혹은 타인으로부터 뱌ㅏㄷ은 선물은 주는 사람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정신과 생활의 만족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드리야르는 상징으로서 사물이 가진 측면이 사물뿐 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산업자본주의의 마수로부터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물의 상징적 측면은 공조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주의적 만남의 장으로 이끌 수 있기 떔누이다. 386쪽 

체계는 그것이 개체 수준이든 아니면 사회 수준이든 간에, 과잉 에너지를 아낌없이 소모해야만 그 체계를 잘 유지할 수 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제안한 일반경제의 핵심 논리입니다. 389쪽  

과잉 에너지는 반드시 소모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불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전쟁이나 사치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쾌한 파멸의 길을 따라 증여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394쪽 

우리는 매 순간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선택과 행위가 어'던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심시숙고행랴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기 대문이지요. ㅎ나편 지금 삶의 고통은 순간적일 뿐이고 사후에는 영원한 복락의 삶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ㅇ느 니체에 의해 강하게 부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삶의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은ㄹ 순간적인 것이라고, 다시 ㅁ라해 일회적인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테에 따르면 현재가 고통으로 가득할 경우 그 고통은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담녀 으느 누가 현재의 고통을 해소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참고 인내하려고만 하겟습니까. 니체가 제안한 영원회귀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기독교의 염세주의적 세계관만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적 형태의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사실 앞으로도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삶이 다른 어떤 시간의 삶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413쪽 .. 이 대목에서 저자본주의적 아비투스에 관한 부르디외의 통찰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르디외는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와는 분명 다르지만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반란과 폭동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새로운 사회에 대한 합리적 기획,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르디외는 전자본주의적 아비투스가 자본주의적 아비투스의 대안이 될 수 잇다는 막연한 생각을 애초에 거부했던 것입니다. 414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업도 하지 않고 소비도 하지 않음녀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문제 대문에 고진은 지금 생산 소비 협동조합이라는 또 다른 삶의 양식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반자본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일종의 생활 공도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산 소비 협동조합이라는 공동체는 우선 화폐에 대한 시앙을 거부하는 성격을 띠ㅐㅂ니다. 화폐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일하지 않고 돈으로 댜ㅏ른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의미하지요. 결코 돈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이 공동체에서는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잉여가치를 남기는 자본가가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역교환 거래제도.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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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안철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철수 지음 / 김영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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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넓혀 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 중요한 것은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생활 태도라고 생각한다. 247, 248쪽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가장 존경받는 CEO로 꼽히는 안철수 교수. 과연 안 교수의 어떤 점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그가 세상에 말하고자 했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을 읽어보았다.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 교수는 그야말로 성실함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항상 들어왔던 성실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성실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린 성실해야 한다고 배워왔으면서도 한편으론 성실하면 바보가 된다는 세상의 이치(?)도 깨우쳐왔다. 그런 세상살이 속에서 성실함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일깨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성실함은 그저 부지런히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은 기본적이며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동료와의 상호 존중이나 고객 또는 외부와의 약속 지키기로 이어지지 않고 자기가 맡은 부분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면, 결국 그 사람이나 그 조직은 외부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우리 사회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는 일을 혼자서 열심히 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을 위해서나 절반의 책임 마인드를 가져야 하며, 나만 잘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인식을 버릴 때만이 진정으로 발전하는 개인, 발전하는 조직이 생겨 날 것이다. 39쪽 

이런 성실함은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원칙이란 말은 때론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리더십의 핵심은 원칙과 일관성이다. 원칙은 매사가 순조롭고 편안할 때에는 누구나 지킬 수 있다. 상황이 어렵다고,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다고 하여 한두 번 자신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원칙이 아니며, 현명한 태도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리더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근간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리더십 자체는 크게 보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문제이다.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가장 중요하듯, 리더십에서도 신뢰의 형성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진실한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스스로 일관성 있게 원칙을 지키고, 성실하게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솔선수범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33쪽     

그의 이러한 자세는 몇개월 동안 잠시 일손을 놓은 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세상이 얼마나 빨리 변해가는지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하지 않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고 마음 편하게 있다가, 어느 순간에 경쟁에서 밀리고 결국 도태되고 마는 것이다. 203쪽  

그렇다고 그가 원칙을 지키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혼자만 잘 살겠다는 목표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남들과의 경쟁에서 꼭 이기거나 살아남기 위한 원칙으로서만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성공하는 비결이란 제목이 어울리는 처세서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입시 제도를 거치면서 개인 경쟁력 강화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성취한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적이 없기 떄문이다. 진정한 토론이 아루어지려면 기본적인 자료 수집과 논리적인 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 다른 의견 또는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이 따라야 한다. 223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평보다는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이다. 토론과 논쟁의 차이점은, 전자가 상호 이해 속에서 서로 수긍할 수 있는 의견을 도출해 내가는 과정인 반면에, 후자는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제대로 된 토론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상대방의 발전은 곧 나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71, 72쪽  

원칙을 지키고, 성실하게 상대방을 대하며,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 그가 걸어온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의 눈길을 보내는 이유다. 그런데, 왜 이리 숨이 막히는 걸까. 조금은 답답한 느낌이 드는 건 또 왜인가. 다소 엉뚱하게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로서의 인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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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데일 패러독스
베트남 전쟁 떄 하노이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 병사들 중에서 미군 최고위 장교였던 스톡데일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8년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많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전쟁 영웅이다. 그에 따르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낙관주의자들이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와 주위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다가오는 부활절에는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상심해서 죽는다고 한다. 반면에 현실주의자들은 크리스마스 떄까지는 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으로써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는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것이 개인이든 기업이든 성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사고방식임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을 결코 혼동하지는 말아야 한다.  34, 35쪽
 

말을 꺼내기가 민감한 부분이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함께 고민을 나누어야 그 사람과의 관계가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 단, 서로에게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으므로,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쪽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상대방과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개선하고 싶기 떄문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한 사람이 얼마나 풍요로운 인생을 사는가는 얼마나 진실한 인간관계가 많은가에서 가름된다. 그리고 그 관계를 끊임없이 개선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5쪽 

따라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을 때도 커뮤니케이션을 할 떄와 마찬가지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방어적인 생각을 버리고 저 부분이 내가 부족하구나, 저건 나중에 고쳐야지와 같이 자기가 몰랐던 점, 고칠 점을 열심히 찾아보는 발전 지향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만약에 공부를 하거나 교육을 받으면서 예전에 그 친구가 했던 말이 틀렸구나 혹은 결국은 회사에서 해오던 정책이 틀렸네와 같은 생각만 계속 든다면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특히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면 자기 방어의 함정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75쪽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말을 잘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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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생물학적으로 눈에 보이는 차이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MBC스페셜 <남자의 말 여자의 말>에선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가지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남자끼리, 또 여자끼리 6명씩 자리를 함께 한 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도록 했다. 여자들은 주제를 다양하게 바꿔가면서 수다를 떨었고, 남자들은 꿀먹은 벙어리에 가깝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등등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들도 많다. 이러한 차이는 어렸을 때부터 나타난다. 또 책 <아이의 사생활>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남녀의 차이를 알아본 시험을 통해 언어에선 여성이, 공간감각은 남성이 앞서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 도대체 남녀간의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한 걸까.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들자면 인간이 사냥, 수렵생활을 하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여자는 육아와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로 말이다. 사냥을 하는 남자는 한가지 사냥 목표만을 향해 몇일이고 말없이 집중해야만 한다. 반면 여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열매나 뿌리 등을 캐기 위해 서로 정보를 나누며 다양한 살림살이를 한다. 이런 행동은 뇌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쳐, 언어를 말할 때 남자는 왼쪽 뇌만 여자는 양쪽 뇌를 모두 사용하도록 진화하게 됐다.  

뇌의 사용부위가 다르다는 것은 여러가지 뜻을 내포한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걸어봤자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도 TV를 시청하고 빨래를 개는 게 가능한 여자들. 남자들의 대화는 결론을 이끌어내야만 하고, 여자들의 대화는 공감을 필요로 한다는 것 등등. 그래서 때로는 서로 말을 거는 행위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가 다툼없이 서로를 배려할 수 있기 위해선 이러한 남녀 차이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남자, 또는 그 여자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정말 별달라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으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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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도둑 - 한 공부꾼의 자기 이야기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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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입적하면서 무소유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경쟁하고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심에 대한 경계심으로서의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쓰는 마음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굳이 무소유라는 이름을 내건 건 그만큼 인간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다.

장회익 교수의 공부도둑은 소유에 대한 집착도 아름다울 수 있는 분야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바로 공부다. 공부를 통한 나의 사유를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매력적이다. 내것일 때 아름다운 것. 바로 생각이다. 실은 공부에 대한 욕심은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갖으려 하지 않는 무소유 정신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공부는 바로 꼭 필요한 그 무엇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부란 바로 남주는 것이기도 하다. 

학문 그 자체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가히 경쟁만능 시대라 할만큼 모든 것을 경쟁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만연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 경쟁이라는 것은 함께 취할 수 없는 소수의 목표를 놓고 서로 취하겠다고 다툴 때 나타나는 것인데, 학문의 목표는 결코 한두 사람이 취하면 없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274쪽 

'공부도둑'은 장회익 교수가 어떻게 공부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초등학교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 환경에서부터 선진 학문을 배우고자 유학을 떠났던 이야기까지 파란만장한 삶도 녹아있다. 그리고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통합을 통해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명의 신비는 생명체 낱생명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밖에 놓은 무엇 보생명 사이의 관계에서 온다. 달 자체만 들여다보아 달의 모습이 변하는 이치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생명체 자체만 들여다보아 생명의 신비로운 이치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달의 신비가 달 밖에서 오듯이 생명의 신비가 생명체 밖에서 온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333쪽 

나는 앞에서 생명의 신비는 생명체 밖에서 온다고 했다. 이것은 생명은 낱생명 단위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온생명으로 보아야 이해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로운 성격을 지칭한 것이었다. 347쪽 

올바른 가치판단과 당위설정을 위해서는 기필코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또 자연의 객관적 이해를 비롯한 모든 사실의 이해가 궁극적으로는 바른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 활용되어야 한다는 우주설에 내표된 동양의 전통적 관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386쪽 

그래서 장회익 교수가 갖게 된 바른 삶의 방향은 온생명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환경에 대한 관심도 온생명에 대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 때문인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다툼도 온생명을 생각한다면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다. 

이렇듯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면 세상의 온갖 주장에 휘둘리지 않고, 명확한 기준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란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명처럼 계속 변화, 발전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도 그 끝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미혹되지 않는 길. 바로 공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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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에 대해 단순한 이름뿐 아니라 읽어내야 할 내용이 있음을 알게하는...60쪽 

평면에 그린 지도로 보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사이가 극에서 극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실제로는 서로 인접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구를 상상하지 못하는 교사는 탐험가가 가보니 그렇다고 하더라 라는 말 말고는 더 할 수 없게 된다. 296쪽 

지금까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설정해온 기성개념이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를 의식적으로 검토하고, 이것을 새 이론을 통해 바꾸어놓는 작업이 요청된다.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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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
빈스 에버르트 지음, 조경수 옮김 / 이순(웅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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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연달아 번개에 맞을 확률과 거의 같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로또에 당첨된 사람은 주위에 많은데 번개를 두 번 맞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확률이 잘못된 것일까. 이것은 사람들이 로또는 당첨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반면 번개는 맞지 않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때문이다. 번개가 내리칠 때 마치 로또에 당첨되고자 하듯이 모든 사람이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면 우리는 주위에서 번개를 두번 연달아 맞은 사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책 '네 이웃의 지식을 탐하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것의 진짜 의미를 파헤쳐보고자 하는 책이다.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라기 보다는 논리적이면서도 다소 엉뚱한 그래서 재기발랄한 유머로 가득 차 있는 책이다. 자, 그 재미있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보자.

착시가 일어나는중요한 이유 가운데하나는 외부 신호의 처리다. 사람의 망막에는 약 1억 3000만 개의 수용기가 있지만, 시신경이 전달할 수 있는 정보는 100만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시각적 현실의 99퍼센트는 뇌가 스스로 대충 만들어내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능력이지만 이것은 우리 뇌의 큰 단점이기도 하다. 뇌는 구조와 질서가 전무한 경우에조차 구조와 질서를 인지하고 그로부터 법칙성을 유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판적이 되고 뭐든지 다 믿지는 마라.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고 어느 정도 자의적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속일 수밖에 없다. ..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뇌는 현실을 그럴싸하게 속여 믿게 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이런 속임수를 알아차리는 능력도 있다. 바로 그것이 이 책에서 다루려는 주제다.라고 책은 목적을 밝히고 있다. 

사고의 오류는 대부분 논리의 오류가 아니라 편파적 지각에서 기인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실제와 일치하는지 알아내려면 현실과 대조해봐야 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의 기본 사유이다. 과학적 사고는, 진부하게 말하자면, 추측을 검토하는 방법이다. 내가 냉장고에 아직 맥주가 있을지도 몰라 라고 추측한 뒤에 사실인지 확인해본다면 나는 사실상 이미 초기 형태의 과학을 행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학에서는 대개 추측이 검토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냉장고에 맥주가 있어 라고 주장하기만 한다면 나는 신학자다. 만약 확인해본다면 과학자다. 확인하고 맥주를 발견하지 못했는데도 맥주가 안에 있어 라고 주장한다면 비교도이다. ... 그러나 설령 가능한 실험을 모조리 다 했다고 하더라도 빌어먹을 냉장고 안에 실제로 맥주가 있는지 결코 100퍼센트 확신할 수 없다. 일말의 의심이 늘 남아 있다. 어떤 실험을 하건 실제의 작은 일부밖에 볼 수 없기 떄문이다. 그래서 과학에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90쪽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은 공식과 숫자에 대해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식의 한계가 어디인지 배운다. 무엇보다도 과학이 의미를 배운다. 회의하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고 권위자를 맹신하지 않는 것을. 그런 까닭에 과학과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동시에 발생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96쪽

미신이 논리보다 매혹적인 건 확실하다. 이와 관련해 1970년대 동물행동학자들이 흥미로운 실험을 실시했다. 학자들은 3미터 길이의 우리를 만들어 그 끝에 먹이 그릇을 두고 실험용 쥐를 집어넣었다. 실험 방식은, 우리 문을 열고 10초 후에야 쥐가 그릇에 도착한다는 가정하게 10초 후에 그릇에 먹이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릇까지 가는 데 10초보다 시간이 덜 걸리면 그릇은 비어 있다. 몇번의 시험 끝에 쥐는 먹이의 등장과 경과시간 사이의 명백한 상관관계를 파악했다. 대개 그릇까지 가는 데는 2초 정도가 소요되었으므로 나머지 8초를 어떻게든 허비해야 했다. 그래서 가령, 괜히 세 바퀴를 회전했다. 그러고는 회전을 해야 먹이가 생긴다고 착각했다. 그 결과 쥐는 먹이 그릇으로 달려갈 때마다 번번이 똑같은 의식을 면밀하게 실행하게 되었다. .... 모든 일의 배후에는 보다 고귀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넘겨짚고 싶어하는 우리의 뿌리깊은 욕구가 저절로 믿음을 낳는다. 나쁜 일이 닥치면 많은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그 의미를 궁금해한다. 놀랍게도 잘 지내거나 나쁜 일이 전혀 없을 때는 의미를 묻는 사람이 별로 없다. 신비주의에 몰두함으로써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통제한다는 망상도 하게 된다. ... 어떤 말이나 방법이 믿을 만한지 혹은 수상한지, 어떻게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까? 나의 충고는 이렇다. 비판적이 되고 증거를 요구하라. 109쪽

통계의 가장 흔한 오류는 상관관계와 인과관계의 혼동이다. 예를 들어보자. 치열교정이 사춘기의 원인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치열교정과 사춘기는 상관이 있다. 두 사건은 같은 시기에 발생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상당한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해서 꼭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디오 게임과 폭력 행위, 황새 개체군과 출생률, 쓰레기 분리율과 이혼율을 보라. 약간만 술수를 쓰면 거의 모든 것들 사이에 상관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통계는 그릇된 해석의 온상이다. 118쪽

신경생물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염가 구매에 대한 기대가 대뇌지피질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 전기 충격을 받으면 팔을 들어올리게 하는 대뇌 운동영역에 전극장을 갖다댔다. 그러고 나서 피험자들에게 팔을 든 이유를 묻자 그들은 들고 싶었으니까요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우리도 어지간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믿게 하기 위한 뇌의 영리한 피알용 개그이다.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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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00년도 전에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이런 농담을 했다. 지성인이란 섹스보다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사람이다.... 원인은 인간의 강한 이해 욕구다. 우리가 뭔가를 이해할 때마다 뇌는 행복 호르몬 도파민 분비로 보상한다. 나 어땟어 란 질문에 뇌의 보상체계는 신체 자생의 마약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인류의 아득한 선사시대에 발생했고 성중추도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 뇌영역에서 일어난다고 추측된다. ...아이작 뉴턴은 금욕에 이르는 길은 무절제한 생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독서나 다른 사물에 대한 명상을 통해 딴 쪽으로 돌리는 것이다라고 생각했기에 결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231쪽

흥미롭게도 섹스는 우리가 재미를 보거나 해파리의 지적 결함을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생충을 막기 위해 발달했다.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는 빨리 변해야 한다. 박테리아, 바이러스,벌레 군단이 모든 생명체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이 병원체들은 전부 똑같은 약점을 가진 자가수정하는 생물들을 만나면 질풍같이 전체 개체군을 파멸시킨다. 반면에 유성생식을 하면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가 혼합되고 면역체계가 변한다. 따라서 기생충은 번번이 다른 조건에 직면하게 된다. 달팽이처럼 자가수정하는 몇몇 생물은 기생충의 습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섹스로 전환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238쪽 
 

피를 나눠먹는 흡혈박쥐들의 예에서 보듯 진화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생물들이 상호의존하는 긴밀한 사회 구조에서 살 때 아주 저절로 도덕적 행동이 발생한다. 반면에 그런 구조가 없으면 서로 특별히 공평하게 대할 이유도 없다. 공평함과 도덕은 명백히 생물학적이며, 전혀 종교적으로 생겨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 엄격한 성도덕을 뒷받침하는 일반적인 종교적 근원들은 진짜 휴머니즘적 가치들과는 별 상관이 없고 오로지 권력 문제와 관련이 있다.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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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물리쳐라.행동요법에 따르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평가이다. 137쪽
 

모든 것이 넘쳐나고 누구도 자기 행동에 제대로 책임질 필요가 없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린다. ... 우리는저임금, 고용 축소, 환경 파괴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지만, 그런 짓을 몸소 실천하는 기업들의 제품을 구매한다. 174쪽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확신을 갖고 시작한다면 의문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의문을 갖고 시작한다면 확신으로 끝날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과학의 광팬이다. 이데올로기나 종교, 세계관과는 반대로, 과학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스스로 생각하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남들이 하는 말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53쪽 

우리는 타인의 의지나 생각대로 생각하면서 마치 전기 충격이 아닌 자기의 의지대로 손을 들었다고 주장하듯 자신의 생각이라고 주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바삐 돌아가는 세상이긴 하지만, 잠깐만 멈추어 자기만의 생각을 해보자. (그런데 도대체 왜 세상은 이리도 바쁘게 돌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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