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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수요일, KBS <환경스페셜>에서 독수리를 보여줬다. 현재 세계에 만마리 정도 남아있는 보호종인 독수리는 최근 한국에서 자주 눈에 띤다.  주로 몽고의 여러 지역에 퍼져살고 있는 독수리는 강추위를 피해, 먹이를 얻기 위해, 한국 땅을 찾는 것이다. 철원지방에서 간혹 보였던 독수리들이 최근 광양까지 내려올 정도로 남하한 것은 순전히 먹이 부족때문이다. AI 영향으로 각 지자체들이 철새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힘이 약한 것들이 밀려나게 된 영향인 것이다. 이것은 반대로 그 이전까지 각 지자체들이 무분별하게 먹이주기 행사를 관광자원으로 활약하면서 독수리들이 떼로 몰려들도록 유도한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은 개인적으로 독수리도 철새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다. 그저 맹금류, 특히 하늘을 나는 용맹한 새라고만 생각해왔는데 말이다. 아무튼 AI 의 전파체로서 독수리가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검증없이 관광의 미끼로 사용했다가 가차없이 저버리는 행정으로 말미암아 독수리는 배고픔과 싸워야만 하는 처지에 몰렸다는 것이 이내 슬프다. 또한 사람의 선입견이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지르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있다. 나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독수리는 사체만을 먹는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을 사냥해서 먹이를 취한다고 생각해온 것은 순전히 잘못된 편견일 뿐인 것이다. (세상에, 독수리가 하이에나였다니...) 그런데 이런 편견으로 말미암아 마을 주변까지 먹이를 찾아 날아온 독수리들을 오리 우리에 가둬버리고 굶기는 잔혹한 일도 생기고 있다. 반면, 광양의 흑염소 목장에선 도중에 죽어버린 염소들의 사체를 벌판에 뿌려줌으로써 독수리들이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배부를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함정은 있다. 그 사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 상태에서 어떤 오염원이 있는지에 대한 검사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인 것이다.

먹이를 인위적으로 주어서 독수리의 개체를 늘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한 논란은, 독수리가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있을 정도로 자연이 복원된다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물론 그 복원이란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게 문제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먹이를 한 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 서열마저 무너지고, 야성마저 사라져버린 독수리들의 치열한 몸싸움을 보자니 너무 가슴 아팠다. 아무리 비정한 생존경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토록 비열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인간의 탓이다. 야성이 사라진 독수리가 상상이 가는가. 가축처럼 되어버린 독수리라니...

독수리가 다시 힘차게 날 수 있는 날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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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03-0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뵙겠습니다.
방명록에 인사를 드릴까 하다가
독수리 글 읽고 너무 동감하여 여기다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알라딘의 말 많은 파란여웁니다. 꾸벅~
어제 이 방송 보면서 말문을 잊었습니다.
조만간 독수리 공부를 해 뵈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철창안에 갇힌 독수리와 농장 주인의 얼굴 두꺼운 거짓말..
인간의 위악성에 치가 떨립디다.

오대산 사진을 보면서 예전 산행이 떠오릅니다.
갖다와서 서투른 그림을 한 장 그린 것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테지요.
앞으로 종종 님의 서재에 꼬리를 감추고 들락날락해도 되겠습니까?

하루살이 2006-03-09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갑네요. 파란 여우라니. 제가 여우보단 늑대를 좋아하지만 색깔 중엔 파란색을 제일 좋아한답니다.^^
방송을 보면서 치가 떨리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네요. 님은 독수리에 대해 공부까지 하겠다니... 훌륭하십니다. 그리고 그림이라... 왠지 파란여우와 무척 잘 어울리는것 같네요. 꼬리 감추지 마시고 자주 들러주세요. 저도 마실가겠습니다.
 
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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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날 일간지에 앞으로 없어질 것 같은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미래학자가 예측한 내용이 소개된 것이 기억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일부일처제였는데, 최근 조용남이 공개적으로 애인을 두자는 인터뷰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진다. 이 소설은 일부일처나 애인을 뛰어넘어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주장한다. 나의 아내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또 결혼하는 사태. 즉 1명의 아내에 2명의 남편이라는 신가족제도의 탄생을 소설은 진중하면서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아내를 사랑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전 과정을 축구와 빗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설정은 경이롭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경쾌한 문체에 통쾌한 웃음까지 선사하니, 그야말로 재미 만점이다.

만약 축구를 좋아한다면 더욱 이 책을 놓쳐서는 안될듯 싶다. 축구에 대한 상식과 어떻게 보면 하잘것 없는 스타들의 인터뷰들이 소설 속 이야기 적재적소에 배치됨으로써 축구도 사랑이나 가족 이야기도 그 효과가 배가된다. 예를 들면 팀이 2부리그로 떨어졌음에도 팀을 옮기지 않았던 바티스투타를 그라운드의 로맨티스트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거기에 빗대기도 한다. 그리고 남편이 둘인 상황을 투톱의 공격 형태를 지닌 포진도로 풀어내기도 하는데, 그 맞장구가 너무 절묘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소설은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현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지켜가고 있는 제도들이나 관습이 얼마나 우리를 얽매고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극한의 예시로 보인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정의가 영화나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고, 그것을 당연시여기며 마지막 희망을 가족에게 걸었던 사람들에겐 엄청난 충격일수도 있겠다.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족이 구성되고, 그것이 어떤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진행되며, 현실 속에서 가능하도록 작동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조마조마하다. 특히 주인공인 첫 남편의 심리가 어떤 식으로 혁명적 제도의 변화에 수긍해가는지 지켜보는 것 또한 재미있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축구를 현재까지 싫어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축구를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니 축구를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라.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에 손해볼 것은 없으니까'라는 단상은 어느새 아내의 또다른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방법이 있을까, 없다. 그 사람을 좋아하려 노력하지 말자.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해서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라는 식의 비꼼은 소설을 유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이 단언이 점차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슬프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일부일처제라는 가족 제도 그대로 완벽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애인두기는 아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능력있는 사람으로 대변될 것이다. 바람 피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람 피우는 것을 들키지 말라라는 식의 교훈이 떠도는 현실을 보면 과연 일부일처제가 무엇 때문에 지켜져오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만도 하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이 정착되어졌는지, 또는 그 제도와 현실간에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우리는 타성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꼭 가족제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한번쯤 그것이 왜 당연한 것인지 의문을 가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만약, 당연한 그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나에게 괴로움을 준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말미암아 행복하다면, 그저 불온한 상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의 재미만을 느끼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이러나 저러나 이 소설 읽기는 당신에게 웃음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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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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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마쓰모토의 대표작 2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점과 선><제로의 초점> 두 작품은 3,40년 전쯤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심증이 가는 범인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깨뜨려가는 재미가 그만이다. 다만 그 알리바이라는 것들이 지금-여기서 지금이란 세월이 흘러가버린 현재 상황- 돌이켜보면 그다지 기발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이 주는 퇴색을 맛본다는 것이 아쉽다. 마치 바둑을 배울때 다음 수도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 실력을 쌓아보면 3,4수 앞이 보이는 것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3,40년 전의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들이 일상화 되어 버린 생활 속에서 자주 대하는 것들이라 알리바이의 허점을 다분히 눈치 챌 수 있다는 것이다.

<점과 선>의 경우에는 정사로 보여지는 남녀 2구의 시체를 둘러싸고 미하라라는 형사가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분명 범인이 확실시되는데,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어, 그것의 허점을 찾아내려는 주인공의 치열함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 소설에서는 사건의 해결이 선입견의 불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즉 선이란 점과 점의 연결상태인데, 사람들은 그 점들과 별개로 선을 만들어버린다는 것. 점을 선으로 이해하는 선입견이 사건의 해결을 가로막고 있으며, 범인은 이 선입견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제로의 초점>은 갓 결혼한 여자 데이꼬가 갑작스레 실종된 남편을 찾는 이야기다. 남편과 연계된 사람들이 차례대로 독살되고, 범인이라 여겼던 인물도 죽음을 맞이하는 통에 범인을 가려내는게 쉽지않다. 범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범인의 심리가 자세히 그려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동정하게 된다는 점이 이 소설을 읽는 숨은 재미가  아닐까 싶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현재의 교통, 통신 수단을 생각해본다면 사건 자체가 보다 쉽게 처리될 수도 있을듯하지만, 그것은 조금 감안해서 읽어야 할 부분이다. 전화가 귀한 시절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현재에선 상상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이런 점이 소설의 재미를 조금 떨어뜨리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역시 사회추리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있다.

범행의 동기가 개인적 연유라기 보다는 사회적 문제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책의 무게를 묵직하게 만든다. 특히 <제로의 초점>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시대의 희생자가 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개인을 들여다보게 된다. 물론 사회적 문제라는 것 또한 개인적 문제를 도외시하곤 생각할 수 없지만, 또 개인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로 치부해버릴 수 있는 약점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점과 선>은 사회적 권력이 품고 있는 치부와 힘의 악용을 엿볼 수 있어 보다 더 직접적이다. 추리 소설이 개인적 사건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조직과 사회의 폭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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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이름은 유괴 - g@me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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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느낀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 간파하고 있다는 자만감으로 가득찬다. 하지만 알고보면 어디선가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와 닮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이 책은 영화로 이미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이미 해답을 알고서 책을 읽었던 셈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는 전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또는 정말로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라, 추측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재미는 이 트릭과 결과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시선의 변화. 바로 그 부분에 이 소설의 매력이 숨어 있다.

소설은 유능한 광고기획사 직원이 자신이 맡고 있던 프로젝트에서 제외되면서 시작한다. 임무에서 빠진 것은 순전히 광고주의 입김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게임으로 바라보고, 그와의 게임에서 꼭 승리하리라 생각한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광고주의 배다른 딸과 함께 계획하는 유괴. 소설은 바로 유괴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범인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범인을 찾는 탐정의 시선이 아니라, 범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이 특이한데, 완전범죄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 살펴볼 수 있어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마치 평상시 걷던 길을 다른 방향으로 걸을때 느끼는 색다른 느낌과 비슷할련지도 모른다.

또하나, 소설 속에서 부록처럼 나오는 범인이 개발한 게임에 대한 설명이 시선을 끈다. 청춘의 가면으로 기억되는데, 사회 생활을 하면서, 또는 가족을 대하든, 친구를 대하든 누군가와의 대면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한다는 것, 즉 그 사람에 맞는 가면을 써야지만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게임의 시놉시스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보여진다. 유괴를 계획하고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태연하게 회사에 출근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그것을 역이용하는 광고주의 모습 등은 소위 말하는 2차적 관계의 가식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주인공들을 통해 마치 중국의 가면탈 묘기를 하듯 가면을 바꿔쓰는 현대인의 모습과 함께, 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 소설이 조금 씁쓸한 것은 도대체 희생자는 어떻게 위로받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실이 그러하니, 희생은 마땅히 그냥 넘겨야 할 것인가? 어차피 게임 같은 인생인데, 희생이야 그냥 무시하거나 잊어버려야 하나? 그런데 권선징악이 현실과 떨어져있듯, 차라리 소설 속의 결과가 진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는 없을듯하다. 세상 곳곳을 돌아보건데, 해피엔딩에 가려진 희생자들은 얼마나 많던가? 소설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공상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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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3-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주인공이 아닌 자들의 삶이 가려져 있듯이요.

하루살이 2006-03-02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빛쪼가리 하나라도 마음 한 켠에 간직할 수 있다면...
 
희망 나침반
기타가와 야스시 지음, 황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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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꾸준하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왔다.

그래, 너는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냐?

으례 그렇듯이라고 말하기엔 무엇하지만, 대부분 과학자니 의사니, 대통령이니 장군이니 하는 직업을 말하곤 한다. 그 희망 직업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인기 직종이라거나, 전문 직종이라거나 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가령 2,30년 전엔 과학자가 대세더니 최근엔 탤런트가 희망 직종으로 떠오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되면, 또는 연예인이 되면 그 인생은 행복한 것일까? 대통령을 꿈꾸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행복을 보장받을까?

매너리즘에 빠졌든 실패를 맛보았든 힘들고 지쳐 있다면, 한번쯤 이 책을 들쳐보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당신이 돈만 있으면 어떻게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어떤 직업만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면 말이다.

책은 14세 생일을 맞은 사이드라는 아이가, 9명의 현자를 만나면서 깨우치게 되는 배움을 이야기한다. 그 배움은 책의 또다른 주인공인 알렉스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알렉스는 직장에서 더이상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한직으로 쫓겨난데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쌓여있다. 또한 집에서도 아내나 아이들과 이렇다할 교감을 나누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사이드와의 만남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 전환점의 계기가 된 9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다.

행동하라.

가능성을 믿어라.

자존심만큼 타존심을 소중히 여겨라.

어떤 직업을 목표로 하기에 앞서, 어떤 인간이 될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라.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에 최선을 다하라.

가장 귀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을 투자하라.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라.

자신에게 끊임없이 긍정적인 언어를 들려주어라.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먼저 베풀어라. 오늘을 성공의 첫날로 만들어라.

 

개인적으로 생각건데,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3번째로 보인다.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무엇이 될 것인가에 치중한 삶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해답은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에 있다. 그것은 나를 존경하는 것 만큼 타인을 존중하는 자세로부터 나올수 있다.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싶다거나, 돈만 있으면 당장 현재 일을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따위의 꿈은 도대체 무엇때문이었는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는게 행복할지를,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보다 더 진중하게, 성심껏 고민하며 살아왔던가 반성해본다.

명함으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성으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렇다고 명예를 쫓는 부나비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님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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