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에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가 있다.
몸도 정신도 성장을 멈춰버린 아이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 일하러 가요."
"어? 공부하러 가는게 아니고?"
"네, 복지관에서 일해요. 9시 30분까지 가야해요."
"그래. 힘들지는 않니?"
"29 다음이 30이에요."
"어? 아, 그래 29다음이 30이지."
"근데, 꼬마야, 넌 어디 유치원에 다녀?"
딸내미. 이미 얼음이 되어 있다.
이 아이를 만날 때면 완전 얼음이 된다.
원래 낯을 가리는 편이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낯선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내 뒤로 돌아서 숨는 편이다.
하지만 이 아이와 만날 때면 그야말로 얼음이다.
2. "아빠, 이 사과는 못생겼어. 버릴거야"
"아니야, 버리면 안돼. 이것도 먹을 수 있어."
"아니야. 버릴거야. 쭈글쭈글하고 못생겼어. 안먹을거야."
"딸내미. 사과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잘 생긴 것도 있고 못생긴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고 파란 것도 있고, 가지각색인거야. 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거란다."
"아니야. 예쁜 것만 맛있어."
"딸내미. 예쁜걸 좋아하는 건 괜찮지만 그렇다고 다른걸 버리면 못써. 못난 것들도 다 아저씨들이 힘들게 땀흘려 거둔거란다. 그리고 맛도 좋아. 어디 한번 먹어볼까?"
안먹는다던 딸내미, 그래도 사과를 깎아주니 용케 먹는다.

예쁘고 건강한 것만 찾는 그 마음을 버리고,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려 딸내미와 함께 시골살이를 택했다. 그런데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그래도 하나 둘 자기와 다른 것들과 마주치다 보면,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길러지겠지. 아빠의 작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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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자락에 속해 있는 칠보산에 올랐다.

출발점은 절말, 쌍곡휴게소다.

 

등산로 초입에 집 한 채가 보인다.

요즘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집들을 보면 어떻게 지었는지, 주위에 농사는 무얼 짓는지 관심이 쏠린다.

어디에 살든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테니...

 

잠깐 집에 한눈 팔다 다시 길을 재촉하려는데 또다시 걸음을 멈춘다.

물이 너무 맑다. 말 그대로 거울같다. 한참 물이 부족할 때인데도 수량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

물에 비친 소나무마냥 내모습도 한번 비쳐보고 싶다.

 

그래도 길은 떠나야 하는 법. 10여분을 걸으니 쌍곡폭포가 보인다.

이름이 왜 쌍곡인지 알 수는 없다. 폭포라는 이름을 갖기엔 조금 민망해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 색깔만큼은 정말 투명하다.

 

폭포를 뒤로하고 5분 정도 걸으니 갑자기 길이 사라졌다.

울타리는 있는데 길이 보이질 않는다. 눈을 씻고 찾아본다. 주위를 둘러본다. 뒤를 돌아본다.

길은 없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막다른 길이라 생각되는 울타리 끝까지 걸어가본다. 끄트머리 오른쪽에 길이 나 있다.

멈춰 선 자리에선 착시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벽이라, 끝이라 생각했을지라도 정말 끝까지 가보아야 할 일이다.

길은 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산 곳곳에 소나무 가지가 부러져 있다.

아마 지난 겨울 눈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진 것일게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면 덜어내는 게 상책이다.

 

슬슬 걸어왔다 생각했는데 벌써 1/3 지점이다.

지난 주 월악산을 생각하면 트레킹이 가깝다. ^^

 

물맛에 취해 걸었다면 이번엔 조릿대 길이다. 주위가 온통 조릿대다. 아주 짧긴 하지만.

잠깐은 한라산이나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벌써 절반을 넘어섰다. 채 1시간도 안됐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산도 아니건만 휴대폰이 불통이다.

이렇게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서나 겨우 안테나 하나가 달랑달랑거린다.

아니면 긴급통화 정도만 가능할 정도의 전파만 머리 위를 지나친다.

한마디로 무수한 전파로부터 완벽하게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전파청정지대인 셈이다.

 

조금 더 걸으니 못다 이룬 사랑의 연리지라 부를 만한 소나무가 보인다.

다른 뿌리에서 나온 소나무 가지가 말라 죽어간다.

옆에 있다고 해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보다.

 

 

활목고개를 올라서는 이 순간부터 실제로 등산은 시작된다.

그 이전까진 그야말로 트레킹이었다.

 

소나무는 천근성이다. 뿌리를 원래 얇게 드리운다. 반면 넓게 뻗어나가 자신의 몸을 지탱한다.

하지만 역시 뿌리깊지 않은 나무는 쉽게 쓰러지는 법이다.

바위 틈에서도 뿌리를 박고 늠름하게 서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쉽게 쓰러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 소나무다.

 

칠보산도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마냥 계단이 나타났다.

그래도 경사가 아주 급하지는 않다. 1시간 조금 넘게 걸었기에 아직 다리에 힘도 남아 있다.

 

정상에 가까워지면서 나무들의 자태가 용트림한다.

 

저 멀리 산등성이 하나는 저혼자 햇빛을 받은듯 훤하다.

혹시 나무들이 병에 걸린 건 아닌가 걱정이 든다.

수종이 다른 것들이라 보이는 현상이길 바라본다.

 

드디어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 운치가 느껴진다.

곧 눈앞이 정상이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가득하다.

 

정상이다. 1시간 반 정도 걸렸다. 정상 표지에 써 있는 표고가 정확한지 모르겠다. 다른 표지판에는 그 높이가 다르다. 이런 경우가 종종이다.

 

정상으로 나 있는 다른 길, 떡바위 쪽 이정표가 보인다. 이 길로 내려가보고 싶지만 주차해 놓은 곳으로 돌아갈 생각에 욕심을 버린다.

 

먹구름이 잔뜩 끼었던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구름 사이로 내비친 빛은 몽롱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준다.

먹구름 속에 갇혀 해가 보이지 않아도 햇빛은 그 뒤에서 언제나 내리쏟을 준비를 하고 있음을.

그러니 우린 아주 작은 희망이라는 틈새라도 만들어 절망의 먹구름을 헤치고 나가고자 하는 것일지도.

하산길 또한 1시간 반이 걸리지 않는다. 총 산행시간은 3시간 정도면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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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상매체가 워낙 극사실적이라 간접경험이 직접경험 못지않게 됐다. 그시간, 그장소가 주는 아우라가 의미없을 정도다. 다만 간접경험은 나와의 직접적 상호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차이가 있을뿐이지만, 실제 상호관계를 맺는 경험은 한정돼 있다.

어미개가 새끼를 낳고 태반을 핥아 떼어내는 장면은 TV속에서 익히 보아왔다. 그런데 직접 눈 앞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니 기시감을 뛰어넘는 감동이 있다. 에미는 분명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았을텐데 새끼가 숨을 쉬도록 태반을 떼어낸다. 새끼가 다칠새라 조심조심, 생각보다 더디지만 착실히. 사람이라면 아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을지 몰라도 매체를 통해 배웠을 테고, 그 매체를 통해 배운데로 착실히 감정과 행동을 따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에미는 본능대로 태반을 떼어내고 난 뒤 본능과는 다르게(?) 그냥 혼자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아직은 날씨가 추운데 이대로 놔둔다면 새끼는 딱 얼어죽기 십상이다. 아무래도 주위에 사람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보통 새끼를 낳은 에미들은 신경이 예민해져 주위에 사람이 다가오면 무섭게 짖어댄다. 그런데 이 에미는 너무 순해 빠졌다. 짖지도 않고 그냥 슬그머니 자기 집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사람들 손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가.

어찌됐든 새끼를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 조심히 새끼를 집에 옮겨 놓는다. 에미는 새끼를 품는다. 다행이다.  

뜻밖의 장면을 보면서 에미의 본능은 어디까지인지 생각해본다. 개가 사람보다 본능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게 사람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개도 이렇게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정도가 있는데 사람이라면 더 심하지 않을까. 에미의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위신, 주위의 눈초리 등등이 에미의 태도를 결정하는 정도가 꽤 크지 않을까 감히 의심해본다. 또는 우리가 자라면서 배우는 어머니상(아버지상)에 갇혀 태도를 결정하는 것일지도.

아무튼 아이를 키우는 건 인생의 롤러코스트라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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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아침 일찍 일어난 딸내미.
느닷없이 냉장고 앞으로 가더니 "아빠, 아이스크림 먹을래."
뭐라? 지금 아빠 간을 살짝 보는거니?
"안 돼!!!"
아이스크림 먹는게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흠흠.
"지금 아이스크림 먹으면 아침밥 안먹을거잖아. 안돼"
"아니야, 아침밥 먹을거야."
"그래, 그럼 아침밥 먹고 먹어"
"싫어, 싫단 말야."
"아빠가 못먹게 하는게 아니잖아. 아침밥 먹고 먹으라 했어."
딸내미 눈치가 이젠 구십구단이다.
아빠가 절대 양보않겠다는 목소리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린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휙 집어넣더니
"아빠, 미워! 미워!"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방으로 휙 들어가며 문을 닫아버린다.
아~ 밉다는 그 말이 가슴을 콕콕 찌른다.
딸내미가 뭘 하나 방을 살짝 들여다보니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이런! 누가 지침서를 만들어 놓고 아이들한테 가르치는걸까.
나 삐졌다는 것을 이불을 뒤집어쓰는 걸로 표현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배우는 걸까.
"얼른 밥 먹자. 그럼 아이스크림도 얼른 먹을수 있잖아. 자~ 놀이터구조대 뽀잉도 보고."
살며시 이불 밖으로 나온 딸내미는 언제 그랬냐는듯 컴퓨터 앞에서 애니메이션을 쳐다보느라 넋을 놓는다. 밥도 잘 먹고.ㅋㅋㅋ.
가슴에 콕 박혔던 밉다는 말이 빠져나온다.
티거태걱. 이렇게 아빠와 딸은 정을 쌓아가는 것일까.
갑작스레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미움 받지 않으려 살아왔던 것에 대해 생각해본다.
'미움'이라는 단어.
내 사전에 최대한 싣지 않으려 했던 그 단어가 딸내미를 키우면서 자리를 잡으려 한다.
슬슬 나도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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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인지 모른다. 1000m터급 산에 오르는 것이. 그런데 하필 미세먼지가 가득한 2월말이었다.

송계계곡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깊은 산 속도 뿌옇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설렘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악소리 나더라도 오르자는 기분이 온몸에 넘쳐난다.

 

덕주사로 향하는 길. 아침 일찍 떠난 길이라 여유가 많다.

신라말 덕주공주에 얽힌 일화를 생각하며 천천히 걷는다.

불상을 지으라는 꿈을 꾸어 마애불을 자신의 얼굴 형상으로 짓는데 8년이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마 이 깊은 산속에서 신라의 부활을 꿈꾸며 병사를 모아 훈련을 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불상은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불온한? 상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덕주사다.

쉬엄쉬엄 절을 둘러보고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참, 알프스라는 이름을 가진 산도 많다. 왜 우리는 우리의 산하를 알프스에 빗대고 싶어하는걸까.

알프스의 느낌과 우리 산의 느낌은 정말 달라도 많이 다른데.

산은 우리의 삶과 문화를 일궈온 터전이다. 알프스를 동경하는 것은 아무래도 서구에 대한 동경이 여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젠 우리도 자랑스럽게 우리의 산하 그대로의 이름으로 불려지면 하는 바람으로 걸음을 조금씩 재촉한다.

 

마애불이 있는 암자까지는 그럭저럭 순탄하다. 마침 지칠 때쯤 쉬어갈 터가 보인 셈이다.

암자 옆에는 텃밭이 있다. 난 이 텃밭이 좋다. 공양보다는 스스로의 먹을거리를 위해 땀을 흘리는 스님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덕주공주의 얼굴을 닮았다는 마애불이다. 솔직히 여성스러운 느낌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부드럽고 인자하기는 하다. 마애불 앞에서 108배를 하고 산행을 끝마칠까 하는 마음도 인다.

슬슬 계단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경사가 급해진다. 걸음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 많아진다. 1시간 걷고 쉬던 것이 30분 15분 점차 줄어든다. 조금이라도 쉬지 않는다면 팍팍한 허벅지를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않다.

 

꽤 올라왔다. 하지만 미세먼지 탓에 시계가 좋지 않다. 깊은 호흡 속에 먼지만 잔뜩 들이마셨을까봐 걱정이다. ㅜㅜ

 

이제 절반을 넘어섰다. 그런데 시간이 애매모호하다. 아직까진 산 속의 해는 짧다.

 

돌아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아저씨 한 분이 뒤돌아선다. 아이젠도 없는데 잔설 때문에 미끄러워서 더이상 못가겠다는 것이다. 오호! 나에게도 좋은 핑계거리다. 그런데... 에이, 기왕 오랜만에 나선 길, 끝까지 가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미끄러운 길을 오르내리다 보니 저 멀리 영봉이 보인다.

 

송계삼거리다. 다시 갈등이다. 이제 그만 포기할까. 포기할까. 포기할까.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다.

 

기어코 오르기로 했다. 보덕암 삼거리. 미끄러운 것도 문제지만 마지막 계단길의 경사가 너무 급하다. 10여년 전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때도 힘들었던 것 같다. 한걸음 한걸음. 마치 철근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발이 무겁다.

 

기어코 영봉에 왔다. 한걸음 한걸음의 힘이다.

하지만, 왠지 이번 정상길은 흡족하지가 않다. 해냈다는 느낌표보다 무엇 때문에라는 믈음표가 더 크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다시 돌아가야 할 길이다.

그래 되돌아본다. 되돌아본다. 나의 길을 되돌아본다.

이번 산행은 되돌아보는 산행이었다. 미세먼지처럼 뿌옇게 흐려져버린 내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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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주사에서 영봉까지 넉넉히 세시간, 돌아가는 길은 두 시간 정도.

산행지도로는 여섯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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