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뇌
우주의 시작과 나의 끝



 













결국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인가이고, 해답은 그사이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해답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인생 수업>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현대 물리학 잘 모르는 사람)에서 원자의 발견은 가장 혁신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 문명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후세를 위해서 딱 한 마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질문에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을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유기체이되 고도로 발전된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가 한 세계의 소멸로서 이해되는지, 혹은 그러한 이해조차 필요하지 않은지말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일 뿐이며이 세상에는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지능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호모 데우스>) 근대 과학 발전 가운에 이루어진 해부학적 지식의 축적 결과, 내부 장기의 어디에서도 인간은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마음이란 뇌 속의 신경 세포 다발의 특정한 전기 신호라는 것이다. 유물론,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썼던 글(https://blog.aladin.co.kr/798187174/10771504, ‘나와 뇌’)의 한 문단을 그대로 가져온다.

 


나는 뇌가 아니다』의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나는 비물질적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상식적 통찰이라고 본다. 나는 나 자신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18) 고 썼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165), 우리의 인생에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이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 의미 같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면들의 형이상학적 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01).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만 볼 것인가. 측정되지도, 관측되지도 않는, 따라서 과학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영혼이 깃든 존재로 볼 것인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인간의 육체를 이해할 때, 이 육체는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인생 수업>의 저자들(공동 저자)은 이렇게 썼다.

 


There is a part of you that is indefinable and changeless, that does not get lost or change with age, disease, or circumstances. There is an authenticity you were born with, have lived with, and will die with. You are simply, wonder-fully, you. (5p)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입니다. (22)

 


앞부분에서 저자들은 당신의 사회적 역할이 당신은 아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존재로서의 당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a part of you”를 무엇으로 이해했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나 자신을 규정하는 그 무엇. 가장 중요한 나의 일부. 지금의 나를, 변함없이 이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의 저자 질 볼트 테일러는 갑자기 좌뇌의 손상을 입게 되었다. 언어와 사고의 순차적 처리가 불가능해지고, 시간 감각마저 사라졌으며, 시야에 보이는 것이 뒤섞여 대상들 사이의 물리적 경계를 나눌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통합된 나로서 내가존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좌뇌의 교묘한 활동 덕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의 나, 만져지고 느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는 좌뇌의 속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는 걸 밝히는 의미에서 성경을 가져와 본다.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e of live, and man became a living being. (NIV. Genesis 2 : 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 6)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에게 들어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 내부에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물질로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가 된다. 육체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영을 소유한존재가 된다.



지구를 황폐케 하는 데 더해 멸망 직전까지 밀어 넣은 끔찍한 인간 중심주의를 우리는 많이도 보아왔고 그 잔인함을 매 순간 목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구석 은하의 구석의 구석, 태양계 내 작은 행성 지구에 살고 있는 하찮은존재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나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더 이상의 결합을 포기하고(나는 지금 원자가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분해되는 순간, 차근차근 3차원 공간에서 원자의 해체가 이루어지면, 지금의 나, 읽는 나, 쓰는 나, 생각하는 나는, 물질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는 것인가. 영원히. 이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임의의 순간에 ''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엔드 오브 타임>, 224)

 



그래서, 마지막 물음은 그런 특정한 원자 형태(지금의 나)가 어떻게 바로 분해되지 않은 채, 현재의 이런 상태, 이런 배열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의문은 생명에게로 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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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이것 저것 다 조금씩만 잘하는 사람
    from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2023-04-19 15:54 
    영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없다고 보는 편인데 혼이나 백이나 기나 영이 (푸하하 갑자기 중딩 때 보던 퇴마록 생각남)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이생망을 실천하며 살 사람이 나… 과거의 나는 육체무용론자 쪽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몸 자체를 잊고 싶어했던 사람이었다. 영혼이 없다고 생각했기 망정이지 영혼의 건강 생각하기 시작하면 육체 따위 아예 안보려는 우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극N이라ㅋㅋㅋ 무튼 N을 극단적으
  2. 정의상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사안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3-12-05 15:39 
    이 책의 주장 8가지는 챕터의 제목과 같다. Ⅰ.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Ⅱ.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Ⅲ.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Ⅳ. 모형은 실재와 같지 않다Ⅴ.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Ⅵ.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Ⅶ.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Ⅷ. 자유의지는 없다 이 책의 제일 중요한 문장, 이 책의 결론을 포함하는 문장은 이 책의 첫 문단에 나온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다락방 2023-04-18 08: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에 대해 신앙과 뇌과학을 가져오시는데 말이지요, 저는 같은 의문을 갖고 있거든요. 내가 도대체 이렇게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는 그보다는 인간이 죽을텐데 왜 태어났는가, 가 궁금해요. 어차피 죽을건데, 그리고 제 경우에는 죽으면 모든게 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무것도 없음. 나씽의 상태가 된다고 보는데, 그러니까 지금 현재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어도, 죽고 나면 그 두려움조차도 없는 상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명백한 결론을 앞에 두고 왜 살아가고 있는가, 왜 심지어 어떻게든,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저는 이 답을 종교에서도, 뇌과학에서도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고(아마 이것이 제 한계이겠지요) 그보다는 철학적으로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실 철학적이라고 지금 여기 댓글에 써서 그렇지, 좀 더 솔직하게는 ‘계속 묻다 보면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묻고 답하는 과정에는 철학도, 여성학도 우선 끼어들지 않았고요, 그러나 ‘묻고 답하기‘ 만이 있었어요. 물론,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단발머리 2023-04-18 20:51   좋아요 3 | URL
인간이 죽을텐데 왜 태어났는가,의 그 질문이 저는 궁극의 질문, 바로 ‘그 질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만의 특징일 수도 있겠구요.

죽고 나면 두려움을 느끼는 나조차 없어질 텐데, 어차피 죽을텐데,의 그 의문, 다락방님의 그 질문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예전에 <미비포유> 읽고 나서 글을 썼을 때도 그런 면에 중심을 두었던 기억이 나요. 죽고 싶은 사람의 죽고자 하는 의지보다 ‘죽어야 할 운명인 인간의 살고자 하는 의지‘요. 저 역시 그게 궁금합니다. 보통 하는 말로 70이 넘으면 더 건강에 집착하게 되고, 더 살고 싶다, 더 오래살고 싶다, 하는 욕망이 강렬해진다고 해요.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초연하고 평온한 자세 이면의, ‘정리된‘ 생각이 저도 궁금해서 계속해서 읽고 또 생각하고 있네요.

다락방님만의 답을, 저도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래오래 생각하다 보면 서로에게 빛이 되고 등이 되는 답을, 어쩌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DYDADDY 2023-04-18 13: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몸이 흩어지지 않고 기능하는 것은 각종 화학적 결합이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태양의 전자기파는 우리의 몸을 통과하지만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중첩되어 있는 분자간 결합이 태양광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두터워서 그늘을 만드는 것이지요. 내 손은 왜 내가 쥐고 있는 펜과 하나가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피부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내부로 뭉쳐있는 것만큼 외부로는 반발력을 가지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키스를 할 때 실제로는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전자적 반발력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끼는거죠. 즉 우리는 키스를 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ㅋㅋㅋ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몸은 다양한 세포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유지하는 ‘생체 공장‘인 것이지요.
자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의 경우 자아와 세계의 분리가 되지 않아 ˝ㅇㅇ는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라고 자신을 3인칭화합니다. 자아라는 것은 기억에서 출발하여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틀이 되는거죠. 기억은 뇌 속에서 존재하는데 단기기억는 대뇌피질에서 점차 측두엽과 해마로 이전을 하게 되어 장기기억화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에 비치는 것이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결국 뇌의 작용이지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몸의 세포 평균 2년, 몸의 원자는 5년, 뻐의 구성물질은 7년에 걸쳐 바뀌는데 뇌도 결국 세포이기에 점차 변하게 되지만 한번에 바뀌지 않기에 기억을 유지할 수 있어요.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세포의 사멸과 재생이 반복하는 고리가 끊어짐으로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피부 세포의 재생 불가에 대한 것은 괴사이지만 심장근육세포의 재생 불가는 죽음입니다.
워낙 책을 많이 읽으시니 용어나 맥락에서 혹시 오류가 있다면 바로잡아 주세요. ^^;;
그러면 당신은 죽음에 초연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할 수 있지만 ‘너‘의 죽음은 기억과 감정에 영향을 주기에 슬프고 아플 것입니다.
살아있다라는 것은 이런 유기체적인 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자아라는 것이 만들어지면 자연스레 세계와의 관계가 형성되기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거에요. 그 관계의 대상이 사물이거나 동물 혹은 사람, 더 나아가 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라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 자체의 물음이기에 데카르트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구요.
어제밤부터 메모장에 시간나는대로 쓰다보니 너무 긴 글이 되어버렸어요. ㅠㅠ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단발머리 2023-04-18 22:05   좋아요 4 | URL
대디님 댓글 감사해요^^

제가 많이는 아니지만 이쪽 분야 책 읽으면서 궁금했던 게 많았는데 대디님 댓글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어요. 피부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외부에 대해 갖는 반발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주로 의자를 예로 들거든요. 우리가 의자에 ‘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의자와 우리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 이렇게요. 대디님이 키스로 설명해주셔서 ㅋㅋㅋㅋ 너무 좋았어요. 나중에 저도 이거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키스‘로 예를 들어야겠다 결심을 했습니다. (제 지인들은 무슨 죄랍니까. 제가 이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막 해댈테니 말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

자아에 대한 부분도 제가 관심을 갖는 부분이고, 사실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고 싶은 분야이기는 해요. 대디님 말씀처럼 ‘<나>라는 인식‘은 ‘뇌의 작용‘일 수 있겠지요. 제가 오랫동안 읽고 있는 중인 <의식의 기원>이라는 책에서는 ‘의식을 하나의 작용으로, 언어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우리를 설명하는 그 무엇‘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가 태동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설명하는 작용, 정확히 위치(중앙교환 중추)를 특정할 수 있는 뇌활동의 하나로 이해하죠.

인간의 물리적 성질과 자아, 의식,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문제가 좀 엉켜있어서, 저 자신을 위해 ㅎㅎㅎ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물질적 존재로서 진화의 과정 중에 지구에 출현했습니다. 자아(인식)는 뇌의 작용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고, 세포의 사멸과 재생을 반복하는 고리가 끊어지면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원자는 자연 속에서 분해되어 다른 물질에게로 옮겨가는 순환을 계속합니다. ‘나‘라는 총체는 존재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존재할 일이 없습니다. 나와 같은 원자 배열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우주는 언젠가 종말을 맞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현재일까요? 지금의 나, 지금 살아있는 나, 댓글을 쓰는 나.....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디님. 최근에 친구가 ‘내 이야기에 진지하게 응해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라는 페이퍼를 썼는데요. 제 이야기에 진지하게 응해 주시는 대디님도 저의 친구이십니다. 결론이 같을 수 없을 테고, 어쩌면 저에게서 어떤..... 답답함 같은 것을 느끼실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제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 주셔서, 응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수하 2023-04-19 00:03   좋아요 2 | URL
우리가 키스를 할 때 실제로는 닿지 않는다…. 전자적 반발력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낀다.

이 표현이 매우 강렬하여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힘드네요 :)

그럼 어떤 것과 어떤 것의 접촉이란… 결국 불가능하겠군요? 언제나 거리가 있을테니까…

DYDADDY 2023-04-19 01:30   좋아요 2 | URL
단발머리님 // 키스의 예가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죠. 이것을 차원으로 생각해보면 각각의 개인은 1차원의 점과 같아요. 그 점이 자아를 가지고 자신을 중심으로 2차원 좌표계를 만듭니다. 그런데 대상이 없다면 그 좌표계는 아무 소용이 없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좌표계는 타자와의 관계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축을 더해 3차원 좌표계를 만들어보죠. 왜 높이라는 축이 아니냐구요? 먼지같은 점에 무슨 높이가 있을까요. 시간이라는 축에서는 기억과 감정이 생겨나요. 그렇게 만들어진 3차원 축 안에서 먼지같은 우리들은 각자 브라운 운동을 하며 우발적인 마주침을 만들어 타자와 조우하게 되요. 그 우발적인 조우에서 작은 반경 내에서 함께 움직이는 것을 친구라고 부르고 근접 거리 내에서 뭉쳐있는 것을 가족이라 부를 수 있겠죠. 여기서 시간이라는 축이 우발성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당연히 모부의 육체적 사랑때문이고 그 사랑은 DNA의 명령에 충실한 것이었겠죠. 진화 과정에서 생겨난 양성교배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DNA 돌연변이를 더 많이 만들어 내어 ‘생육하고 번챵‘하는데 저 적합했을 것이에요. 출생의 목적은 ‘없다‘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목적론적 사고를 장착하고 있는 동물이기에 당연히 삶의 목적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왜 저 새의 부리는 저렇게 생겼고 인간은 엄지를 유인원과 달리 사용하는가 등등의 물음에 목적론적 사고를 배제하면 남는 답은 환경 적응에 유리한 개체가 살아남아 자손을 더 많이 남겼다 입니다. 즉 DNA의 컨테이너인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생육하고 번창‘하는 목적만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인간은 사고하는 동물이기에 육체적인 목적을 거슬러 정신적인 목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합니다.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태어나 자라서 자아를 가지게 되면 ‘나‘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게 되죠. ‘나‘가 세상에서 없어진다고?!!! 라구요. 그래서 전에 말씀드렸듯이 종교나 사후세계가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좀더 자라 타자와 좀더 친밀한 애착 관계를 가지게 되면 그 때 느끼게 되요. ‘나‘가 죽으면 ‘이 사람‘이 ‘강아지‘가 슬퍼하겠구나 라구요. ‘나‘의 죽음은 두렵지만 견딜만 하죠. 죽으면 고통도 없을 것이고 굳이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번거로운 활동을 할 필요도 없죠. 하지만 ‘나‘가 죽으면 나와 친밀한 누군가가 슬퍼할거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정말 사랑한다면 자살을 못해요. 그 사랑이 아이일 수도 있고 연인이나 모부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는거죠. 그래서 ‘관계하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번 더 하고, 친구에게 네가 있어 좋다고 전화 한번 더 하고, 애정을 담아 애완동물을 한번 더 쓰다듬어 주고, 신에게 뭔가 더 해달라 하지 말고 감사 기도 한번 더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미루지 않고 바로 하는 것이에요. 롸잇 나우!
에고.. 쓰다보니 또 장문이네요. 친구라 명명해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단발머리님의 신앙때문이 답답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라요. 오히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서로 존중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하고 재미있죠. 아, 사는 목적에 그게 빠졌네요. 재미가 없으면 사는거 너무 지루하잖아요. ㅋㅋㅋㅋ

DYDADDY 2023-04-19 01:29   좋아요 2 | URL
수하님 // 전자기적 반발력이 없다면.. 그냥 모든 것이 뒤엉킨 단백질 바다가 되겠죠. ㅋㅋㅋㅋ 조금더 확장해서 생각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한 접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정신적으로 타자와 동일화된다는 것은 ‘나‘라는 자아의 죽음과 같죠. 다만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접촉은 불가능해도 감각세포의 압력으로 느끼듯 흡수는 가능하다는 것이에요. 마치 크림이 피부에 스며드는 것처럼,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분을 얻는 것처럼요. 책이나 영화, 음악같은 미디어도 정신적 흡수가 가능하겠죠.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3-04-19 20:57   좋아요 1 | URL
대디님~~ 밤마다 댓글 대행진 ㅋㅋㅋㅋ 제가 요즘 낮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밤이면 밤마다 돌아옵니다.

대디님 댓글 읽다보면 그간 얼마나 많이 읽고 또 깊이 사유해오셨는지 느껴져서 참 좋아요. 다시 한 번 우리의 결론이 다르더라도 제가 대디님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대디님을 존경한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를 DNA의 운반자로 보는 경우, 저는 그런 방식과 설명 역시 인간의 존재와 목적, 삶의 의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생물학적 목적이 최우선시 되는 삶 또한 가능하고 또 그런 삶에 대해 비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우리 인간을, 인간 종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했을 경우, 우리 삶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특별히 이것을 죽음의 문제에 대입할 경우, 우리 삶의 목적이 없고, 의미가 없고, DNA의 운반자인 우리가 그 임무를, 즉 출산의 의무를 완수했다면 오늘을 더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은 서로간에 모순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 역시 자살에 대한 접근이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살을 죄악시하는 교회의 일원이기도 하고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맞습니다. 나를 기억하는, 나를 원하는 한 사람이 있다면 자살에 대한 결정이 오래오래 유예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마음이 현재 삶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면 말입니다. 타인에게서 동물에게서 소중한 그 무엇에 의지하는 삶의 의지가 삶을 버리려는 의지를 이길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기독교인의 위치에서 인간 삶의 목적, 의의, 의미에 대해 써보자면.... 삶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제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제가 괜찮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주시니까, 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 분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정도로 내가 특별한 존재니까,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저는 오늘을 삽니다. 바로 위에 제가 밑줄긋기한 책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그런 노예‘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신에 기대는 인생을 원하지 않는다고요. 저라면, 딱 그 정반대지요. 저는 이 우주 속의 단독자로 살 자신이 없고,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밤마다, 아침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밤이 자꾸 깊어가는데ㅋㅋㅋㅋ 제 댓글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대디님!

건수하 2023-04-19 0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단발머리님 덕분에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존재의 이유를 궁금해 해본 적이 없네요.. 그냥 살아있고, 굳이 죽고싶지는 않으니까 죽기 전까지 하고싶은 거 하고 살자는 생각뿐.. 그래서 죽음이나 내세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전 엄청 현실적인 인간인가봐요. 🙂

단발머리 2023-04-19 21:01   좋아요 1 | URL
엄청 현실적이신 수하님을 제가 항상 존경하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죽기 전까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자는 생각에도 백번 동의하고요.

건수하 2023-04-19 21:14   좋아요 1 | URL
다시 읽어보니 참 단순무식해 보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는 편이에요.. 🫣

단발머리 2023-04-19 21:16   좋아요 1 | URL
단순무식 아니에요. 오늘을, 매일을 열심히 사는 거죠.
그리고 수하님 말이 맞아요. 그건.... 영원히......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죠.

건수하 2023-04-19 21:27   좋아요 1 | URL
꼭 해야하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보는 것에서 나오는게 많은데 말이지요… 저는 안하지만 하는 분들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전에 mbti 얘기하며 n/s 나누는 기준의 갈매기와 새우깡 만화 생각이 나네요. 제 타입은 n이지만 s에 가까운 n인가봐요.

공쟝쟝 2023-04-19 13: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태도를 염두해 두는 자로서 신의 유무 보단 신에 대한 저의 태도를 말씀 드리면, 그건 죽음에 대한 혹은 블랙홀에 대한 그랜드 캐니언 같은 것을 보았을 때에 대한 혹은 아원자의 운동원리나 지평선 수평선을 바라볼 때 느끼는 느낌입니다. 단발머리님의 이 글도 그런 느낌으로 읽었어요. 저는 어릴때 무신론자가 되기로 한 이유로는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신론이 태도가 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나약해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하면 절대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는 아닐 거라고 아주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전 어릴 때 부터 권위를 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건 나를 담고 있더라고요. 그걸 안 건 얼마 안됨 ㅋㅋ)

전 여전히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인간 종의 지적총합을 다 합쳐도 알 수 있음이 없음 보다 많고, 그러나 우리가 신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어떤 무엇이 존재로 존재한다면 그냥 가장 낮은 자세로 절 하는 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없다고 하거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좀 문제적 이라고 생각하며, 세속화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측면에서 저는 무신론자 입니다. 그런데 적고 보니 불가지론이네요.
인간이 풀려고 해서는 안되는 숙제이며 흘끗 보는 것에 대해서도 몸을 삼가고 사려야하는.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태도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연재해처럼. 혹은 느닷없는 죽음처럼. 그게 운명일 수도 있겠네요ㅎㅎ 그리고 종교가 없는 나의 부모님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이것도 일종의 유교적(?)세계관인가 해요 ㅋㅋㅋ 그에 대한 공부는 안해봐서 모름 ㅋㅋ

단발머리 2023-04-19 21:04   좋아요 2 | URL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쟝님이 썼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걸 부디 ‘인정하라‘는 거에요.
무신론, 반신론(위의 책,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가 반신론)이 아니라 불가지론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현명한 스탠스라는 거죠. 과학이 모든 것이 될 수 없고, 과학의 설명이 100% 옳은 것은 아니라는 거요. 지동설 전에 천동설도 과학이었다는 ㅋㅋㅋㅋㅋ 그런 느낌?

공쟝쟝 2023-04-19 1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은 지금의 뇌과학이나 철학 혹은 지식(ㅋㅋ 푸코 식으로 말하면 에피스테메)이 향하는 일종의 (근대적)인간과 의미에 대한 해체는 서구 지식 (서백남ㅋㅋ) 자장 안에서 바라봐야할 거 같고요,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저에게는 중요하지 않거나 태도로서 이미 갖춰진 문제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방식의 연구(!)들을 두팔 벌려 환영하는 데요, 그건 제가 (문제적) 권위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다른 방향의 앎을 여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blah blah… 정리 안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발머리 2023-04-19 21:54   좋아요 2 | URL
서백남의 자장 안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소중합니다 ㅋㅋㅋ 자아는 환상이다 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4-19 21:53   좋아요 1 | URL
방금 푸코 강의 듣고 왔어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선언하는 인간의 죽음은 모든 지식을 담지 할 수 있고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 -외부 세계의 진리를 담보하고자 하는 (제 뇌피셜 오만한?!)-그런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죽음이래요. 그러니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단발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을지도.) 어쨌든 그들의 지식이 그들의 지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 안될 거 같아요. 확실히 공부는 나를 아는 공부여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그걸 안알려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