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뇌
우주의 시작과 나의 끝
결국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이고, 해답은 그사이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나는 그 해답 사이의 간극에 관심이 있다.
<인생 수업>을 읽고 있다.
현대 물리학(현대 물리학 잘 모르는 사람)에서 원자의 발견은 가장 혁신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지구 문명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후세를 위해서 딱 한 마디만 남길 수 있다면 무슨 말을 남기겠냐는 질문에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답했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을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유기체이되 고도로 발전된 알고리즘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하다. 생명 활동의 중단, 원자의 해체가 한 세계의 소멸로서 이해되는지, 혹은 그러한 이해조차 필요하지 ‘않은지’ 말이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일 뿐이며, 이 세상에는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능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호모 데우스>) 근대 과학 발전 가운에 이루어진 해부학적 지식의 축적 결과, 내부 장기의 어디에서도 인간은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마음이란 뇌 속의 신경 세포 다발의 특정한 전기 신호’라는 것이다. 유물론,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이나 그 산물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예전에 썼던 글(https://blog.aladin.co.kr/798187174/10771504, ‘나와 뇌’)의 한 문단을 그대로 가져온다.
『나는 뇌가 아니다』의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나는 비물질적 실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상식적 통찰이라고 본다. 나는 나 자신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18쪽) 고 썼다. <숨결이 바람 될 때>의 저자 폴 칼라니티는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165쪽), 우리의 인생에는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이 신뿐만 아니라 사랑, 증오, 의미 같은 우리 인생의 중요한 일면들의 형이상학적 결정권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201쪽).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로만 볼 것인가. 측정되지도, 관측되지도 않는, 따라서 과학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영혼’이 깃든 존재로 볼 것인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장소로서 인간의 육체를 이해할 때, 이 육체는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인생 수업>의 저자들(공동 저자)은 이렇게 썼다.
There is a part of you that is indefinable and changeless, that does not get lost or change with age, disease, or circumstances. There is an authenticity you were born with, have lived with, and will die with. You are simply, wonder-fully, you. (5p)
당신 안에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불변의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없어지거나 나이, 질병,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당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왔으며 죽을 때도 함께할 진정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놀랍게도 당신은 변함없이 당신인 것입니다. (22쪽)
앞부분에서 저자들은 “당신의 사회적 역할이 ‘당신’은 아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존재로서의 당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구체적으로는 “a part of you”를 무엇으로 이해했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 나 자신을 규정하는 그 무엇. 가장 중요한 나의 일부. 지금의 나를, 변함없이 ‘나’이게 하는 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의 저자 질 볼트 테일러는 갑자기 좌뇌의 손상을 입게 되었다. 언어와 사고의 순차적 처리가 불가능해지고, 시간 감각마저 사라졌으며, 시야에 보이는 것이 뒤섞여 대상들 사이의 물리적 경계를 나눌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나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통합된 나’로서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좌뇌의 교묘한 활동 덕분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의 나, 만져지고 느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나’는 좌뇌의 속임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도 있다는 걸 밝히는 의미에서 성경을 가져와 본다.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e of live, and man became a living being. (NIV. Genesis 2 : 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장 6절)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에게 들어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기운,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일부가 인간 내부에도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경우,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존재로서, 인간은 물질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가 된다. 육체로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영을 ‘소유한’ 존재가 된다.
지구를 황폐케 하는 데 더해 멸망 직전까지 밀어 넣은 끔찍한 인간 중심주의를 우리는 많이도 보아왔고 그 잔인함을 매 순간 목도하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는 구석 은하의 구석의 구석, 태양계 내 작은 행성 지구에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인데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나를 구성하는 원자들이 더 이상의 결합을 포기하고(나는 지금 원자가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분해되는 순간, 차근차근 3차원 공간에서 원자의 해체가 이루어지면, 지금의 나, 읽는 나, 쓰는 나, 생각하는 나는, 물질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지는 것인가. 영원히. 이전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임의의 순간에 '나'는 입자의 집합이며, 입자의 특별한 배열을 나타내는 약칭이다(이 배열은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정도로 충분히 안정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구성하는 입자의 행동이 곧 나의 행동이다. 그 저변에서 물리 법칙이 나의 입자를 제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유전자, 단백질, 세포, 뉴런, 연접부의 네트워크 등의 고유한 배열 상태)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라는 거시적 서술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당신의 행동과 반응, 생각이 나와 다른 이유는 입자의 배열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엔드 오브 타임>, 224쪽)
그래서, 마지막 물음은 그런 특정한 원자 형태(지금의 나)가 어떻게 바로 분해되지 않은 채, 현재의 이런 상태, 이런 배열을 유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다시 의문은 생명에게로 간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무슨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