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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한참 아이들과 영어책, 그중에서도 챕터북을 신나게(?) 읽어나갈 때의 일이다. 그때도 이미 읽을 만한 챕터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수입되고 있어서, 만약 어떤 엄마가 아이에게 영어책만 읽히겠다고 작정(?)을 한다 해도 그게 가능할 정도였는데, 그러다 보니 그 많고 많은 영어책 중에서 내 아이에게 맞는, 내 아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영어책을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읽을 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영어유치원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영어 학원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한 엄마는 그렇게 아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 영어책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림책을 웬만큼 읽었지만, 두꺼운 소설책을 읽기에는 아직 부족한 아이에게는 ‘챕터북’이라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그에 속하는 책들 역시 어마어마한 양을 자랑했다. 더욱이 큰아이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내용에 감흥을 느끼지 않았고, 말괄량이가 주인공이면 더더욱 공감하지 못했다. 학교생활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에도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 책들을 제하고 나니 이런 종류의 책들만 도전이 가능했다. 동물이 주인공인 책들 혹은 판타지물. 그렇게 우리는 힘겹게 ‘네게 딱 맞는’ 챕터북을 찾아 헤매었다. 내용을 알아야 추천할 수 있으니, 전부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책들을 나도 같이 읽었다.
그중에 오래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는데, 그건 바로 댄 그린버그의 <Zack Files> 시리즈의 첫 번째 책 <잭의 미스터리 파일 1 : 벽장 너머의 세계>이다. 화장실 수납장을 열게 된 잭, 그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 너머에, 화장실 수납장 너머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평행 우주. 평행 우주론의 어린이 버전이다. 평행 우주, ‘우리가 속한 우주가 아닌 또 다른 우주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세계가 아닌 평행선상에 위치한 곳에 존재하는 다른 우주.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공간과 차원이 다른 수없이 많은 우주. 그리고 그 우주에 살고 있는 나. 혹은 ‘나’로 보이는 어떤 존재.
열여섯 혹은 열일곱 살의 소년이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된 열다섯 살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소년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다. 버려진 느낌과 황당함, 슬픔과 외로움을 담담히 감당하던 소년은 소녀가 말해주었던 그 도시를 찾아 떠나고, 그곳에서 그렇게 그리던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예전의 연인을 매일 만나면서 그는 그곳에서 잠시 편안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에게서 떨어진 그림자의 죽음이 다가오면서 고뇌에 빠지게 된다.
소년이 그리던 삶은 여기에 있다. 매일 소녀의 얼굴을 볼 수 있고, 소녀가 내려주는 쑥색 약초차를 마시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과를 마친 후에는 소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삶.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세계에 있다. 도시의 불확실한 벽, 높고 두터운 벽 안쪽에, 그가 원하는 삶, 그가 바라던 삶이 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내가 만나는 소녀, 나와 함께하는 이 소녀는 실체일까. 혹 이전 세계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실체인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는, 혹시 허구가 아닐까. ‘나’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나가 이제 곧 숨을 거두게 될 그림자가 나의 진정한 실체인 건 아닐까. 소년은 그림자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자신은 그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시에 남아있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고 만다.
이쪽 ‘현실세계’에서 그는 중년에 접어든 특징 없는 남자다. 지방의 작은 도서관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그에게 이제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걸어서 출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장을 보고 청소를 하고 다림질을 한다. 신비로운 존재인 이전 도서관장 고야스 씨와의 만남을 접점으로 그는 옐로 서브마린 요트파카 차림의 소년 M**와 더욱 가까워지고, 그를 통해 ‘도시’에 대해 듣게 된 서브마린 소년은 바로 그곳, 불확실한 벽 ‘안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의 임무였던 ‘오래된 꿈 읽기’를, 도서관에서 보내는 일상을 서브마린 소년은 원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평범하면서도 담백한 하루키의 문장들은 하나의 의문, 하나의 질문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어떤 세계가 진짜일까. 어느 세계 속의 내가 ‘진짜’일까. 내 행세를 하는 저 ‘그림자’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기대나 사회가 원하는 일정한 역할의 수행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냥 나. 나는 어떤 존재일까. 소설 속 고야스 씨는 자신을 단순한 일개의 통과점으로 본다(380쪽). 부모에게서 한 덩어리의 정보를 물려받아 자기 나름의 수정을 더해 자기 아이에게 물려주는 존재, 긴 쇠사슬의 고리 하나(380쪽)로서 말이다.
700쪽이 넘는 두꺼운 소설을 따라 읽어가면서도 누가 진짜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도서관장이 진짜인지, 불확실한 벽 이쪽의 ‘오래된 꿈 읽는’ 사람이 진짜인지. 하지만, 이쪽 아니면 저쪽, 이 세계 아니면 저 세계를 고집하던 나의 옹졸함은 어느 틈엔가 사라져 버린다.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다’던 소녀(110쪽), 당신과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다던 그림자(153쪽), 그리고 본래에 가까운 당신 자신이 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서브마린 소년(722쪽)은 하나로 연결된다. 나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열다섯 살의 소녀이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애원하는 그림자이며, 하루종일 책만 읽는 그 서브마린 소년이다. 불확실한 벽 저쪽의 내가 ‘나’인 것처럼, 불확실한 벽 이쪽의 나 역시 ‘나’이다. 두 세계에 모두 속하는, 혹은 속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그 찰나, 지금 현재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고, 이 세계와 저 세계로의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는 바로 나, 나 자신뿐이다.
외출할 때도 굳이 이 두꺼운 책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는데, 다음, 그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씨름하는 순간마다 도서관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설 속 중년의 ‘나’가 만나는 새로운 우주 역시 도서관이다. 이곳은 안전하고, 시간이 멈춘 곳이고, 그리고 나의 낙하를 받아줄 이가 기다리는 곳이다. 내가, 나를 기다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