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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스 -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
앤절라 첸 지음, 박희원 옮김 / 현암사 / 2023년 6월
평점 :
이 책의 부제는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 보라색이 눈에 띄어 읽어야지 싶었어도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알라딘 이웃님들의 흥미로운 리뷰가 계속 올라와서 읽기 시작했다.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인간 사이의 용무가 섹스, 라고 주장하시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즐겨 읽던 독자로서, 나는 필립 로스의 의견에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은 동물이고, 섹스가 동물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최고 감각의 지속성, 쾌락의 한도와 한계, 호르몬의 고저를 포함한 신체의 변화 등을 고려했을 때, 성애의 폭발, 성적 끌림 등의 ‘찰나성’에, 나는 더 큰 방점을 찍는다.
이 책은 일반적인 ‘성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모든 사람이 섹스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 진짜 남자는 섹스를 많이 할 거라는 생각, 새로운 시대를 맞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은 원나잇에 개의치 않는다는 생각. 책의 문장을 그대로 가져와 본다. “섹스의 과시적 소비는 페미니스트 정치를 수행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되었다.” (98쪽)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도전한다.
나는 ‘진지한 long-term relationship’에 관심이 많다. 나와 비슷한 입장(?)이었던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자의 남자친구 헨리는 5년간 개방 연애(open relationship)를 하자고 졸랐다. 애인이나 배우자를 두고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만나자는 거였다. 저자는 그게 어려웠다. 매달리는 것 같아 싫었지만 그게 잘 안됐다. 괴로웠다.
견디다 못한 헨리는 끝내 가을에 나와 헤어졌고 그건 마땅한 일이었다. 헨리는 떠났지만, 나는 우리가 개방 연애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놓고 나눴던 끝없는 대화를 이해하려고 계속 골몰했다. 남자에게는 언제나 딴 길로 새려는 마음이 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던, 일대일 관계에 목을 매는 건 구식이고 내가 진짜로 노력하면, 정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욕망을 누를 수 있으리라던 헨리의 말. (28쪽)
오만하고 무모하면서도 겁먹었던 스물두 살의 저자는 오도된 버전의 성 해방(112쪽)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데이트 사이트 ‘오케이큐피드’에 로그인을 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그 남자의 집으로 갔다. 아프게 그리고 형식적으로 섹스는 금방 끝나버렸고, 저자는 득의양양하게 자리를 떴다. 감정 없는 섹스를 실천했다고, 자신은 이제 억압된 사람도 찰거머리도 아니라고, 나는 이제 충분히 ‘진보적인’ 사람이 되었다, 고 느꼈다.
헨리에게 이야기하자 헨리는 축하한다며, 자기가 다 기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여름이 더 지난 어느 컴컴한 밤, 헨리는 마음 한구석에서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내 행동이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벌이자 불신의 신호라는 직감이 들었다고. 헨리는 정확하게 짚었다. 헨리의 기분이 이상했던 건 자기가 내게 1순위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어쩌면 아주 작게나마 있었기 때문이었다.(114쪽)
강제적 이성애는 가부장제의 근간이다. 과성애 혹은 성애의 과몰입 역시 가부장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속임’일 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만, 나는 여전히... 사람은 누구나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그 상대는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남자는 섹스를, 여자는 공감을 원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여러 여성을, 여자는 한 남자만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데에 섹스가 아주 주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섹스 없이도 공감과 애정의 정서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섹스를 지나치게 경원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것이 인생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천명이 가까워지고, 매사가 귀찮고, 갱년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여성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한참(?) 때도 연애가 귀찮았다.
오히려 내 관심은, 어떤 사람에 대해 느끼게 되는 로맨틱한 감정이다.
전 세계 사람들에 따르면 로맨틱한 감정에는 보통 이런 게 들어간다. 심취와 이상화, 신체적·정서적으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독점하고 싶은 마음, 내 감정에 답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의 행동을 과하게 생각하는 것, 관심을 보이고 상대에게 공감하는 것, 상대를 위해 자기 삶의 일부를 바꾸는 것, 상대가 반대로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갈수록 집착하는 것. (194쪽)
저자는 ‘성적 끌림’ 없이도 이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애 중심의 혹은 이성애‘만’ 강제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동성 간의 감정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반값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남성들은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 가부장제에서 인간의 기본값은 남성이기에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연대’, ‘의리’, ‘충의’뿐 아니라,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당연하다. 그들에게 여성은 ‘성적 대상’이기에 진리에 도달하는 그 무엇을 ‘논의’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에 반해 여성들 간의 우정은 극히 ‘사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남자들의 회합은 ‘정책 연대’이고, ‘토의’이며, ‘회의’지만, 여성들의 회합은 그런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다. <등산 모임>, <골프 모임>과 <맘카페>, <엄마 모임>의 이름부터 그렇다.
남자들의 우정 혹은 남자와의 우정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남사친이 하나도 없는 나여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 주위만 둘러보아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현명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다. 남성들은 대우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평생을 살다가 갑작스러운 ‘낙하’에 크게 상심할 뿐이다. 4살 남동생을 둔 8살 여자아이의 지혜를 남성들은 평생 눈치채지 못하기도 한다. (가끔, 만 명에 한 명 정도로, 딸아이를 둔 남성들이 이를 눈치채는 것 같기는 하다/주의 : 우리 아빠는 아님)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강하고 바른 선택은 내 주위의 도덕적이고(사실, 지나치게 도덕적이기는 함) 진실하며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똑똑한 여성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그들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는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그것도 모르는 일, 체슬러도 말년에는 여성과만 동거함), 친구들과의 로맨틱한 관계를 잘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성애로 다시 읽는 관계와 욕망, 로맨스>의 결론이 내게는 그렇다.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가겠다. 그 대상이 꼭 남자일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성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으니. 우정을, 사랑을, 로맨틱한 관계를 이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