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뒷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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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책인데 밀리의 서재로 읽고 있어서 내게는 한없이 얇은 당신이다. 책을 안 가지고 외출했을 때만 가끔씩 꺼내 읽어서 영 진도가 안 나가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16퍼센트 정도 읽었다. 앞부분의 주요 테마는 횡격막인데, 횡격막 토크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중요한지라 앞부분에 번역가가 따로 정리해 둔 부분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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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예는, 호메로스의 인간이 '횡격막'으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사고와 인지 활동의 중심을 뇌에서 찾지만,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횡격막은 단순한 가슴과 배 부분을 나누고 호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리적, 해부학적 기관이 아니라 감정과 사고, 판단과 숙고, 그리고 관심과 배려, 호감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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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집에 있는 천병희 번역과 김현 번역의 이 책을 비교해 보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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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간 어색한 듯한 김현 번역에 점수를 주고 싶은데, 직독직해 느낌의 김현 번역이 시적인 의미에 더해, 뒷부분에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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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략가,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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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자연이 아닐 때도 있지만, 현상의 관찰에서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가 대놓고 작위적이면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독자가 아니고, 눈 밝은 독자도 아니지만, 일말의 전개가 교훈으로 갈무리될 때는 거부감을 느낀다. 이 책에서는 자연 관찰 그 자체에서 얻어 가는, 얻어 갈 수밖에 없는 지혜가 돋보인다. 다른 식물은 어떻고, 잡초는 어떻고. 잡초의 꽃가루를 전해주는 곤충은 어떠하고, 꽃등에는 어떠하고 꿀벌은 어떠하고. 끈질진 생명력과 결국 살아내려는 식물과 잡초, 곤충의 결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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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잡초는 다르다. 잡초는 조건이 나쁠 때도 최대한 활약해서 씨앗을 생산하지만 조건이 좋을 때도 최대한 성과를 내서 씨앗을 많이 생산한다. 자기 자원을 씨앗 생산에 얼마나 분배하느냐 하는 지표를 '번식 분배율'이라고 하는데, 잡초는 개체 크기에 상관없이 번식 분배율이 가장 알맞다. 조건이 나쁘면 나쁜 대로, 조건이 좋으면 좋은 대로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씨앗을 남기는 것이야말로 잡초의 강점이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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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부분은 여기다. 사람에 의해 재배되는 채소나 화단의 꽃들은 조건이 열악하면 꽃을 피우지 않는다. 하늘 높은 줄 오르고 치솟는 집값과 낮은 출생률과의 연관성을 기억하지도 말자. 꽃을 피울 수 없다. 씨앗을 만들 수 없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라면? 거름을 너무 많이 주면 줄기나 잎만 무성해지고 중요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영양분이 풍부한데 왜 꽃을 피우지 않는 거지? 왜 씨앗 만들기를 하지 않지?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자면, 식물은 그 중요한 씨앗 만들기를 '잊어버린 듯' 하다. 할 일을 하지 않는다. 잡초는 아니다. 잡초는 좋은 환경에서도 나쁜 환경에서도 일정한 번식 분배율을 유지한다. 잡초는 다르다. 잡초는 전략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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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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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인데 소설처럼 읽고 있다. 나는 미셸이 아니고, 남편은 오바마가 아닌데. 나는 미셸이고, 남편이 오바마가 되는 이 신기한 일들. 미셸이 잘 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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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의 고단함은 아무리 하소연해도 끝이 없다. 퇴근하고 와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차례로 씻기고, 밥을 차리고, 밥을 먹이고. 그리고 남편과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 이런 날이 한 달, 두 달, 그리고 세 달 이어질 때, 그 상황을 그냥 감내할 사람이 있을까. 친정과 시댁, 양쪽으로부터 육아 도움을 받았음에도 딱 18개월 워킹맘으로 살았던 내 생각에는 완전 엑스다.

And yet, in his curious and round about way, he seemed destined for exactly this moment. I knew because of I'd seen up close how his mind churned nonstop. Over years, I'd watched him inhale books, newspapers, and ideas, sparking to life anytime he spoke with someone who offered a shard of new experience or knowledge. (2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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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문은 여기에 있다. 내 남자가 유독 훌륭한 남자일 때, 내 선택은 어떠해야 하는가. 내 남편의 유능함이 나의 포기를 요구할 경우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남편의 탁월함이 나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페미니즘 고전에서 반복되는 그 지긋지긋한 양보와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왜, 내가 양보해야 하는가. 왜 포기하는 사람이 나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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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이 유능한 변호사였던 건 확실하다. 만약 미셸이 하버드 법학대학 종신교수였어도, 아니,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어도 마찬가지다. 오바마의 아내라면, 아내로서의 일을 해내야만 한다. 행복한 가족 단상이 필요한 미국 대선에서 알콩달콩 스위트홈의 모습을 전시하기 위해 오바마의 아내라면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포기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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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가 지구 전체의 운명을 바꾸었던가. 오바마가 미국의 역사를 바꾸었던가. 오바마가 미국 내 흑백 갈등 문제를 해결했던가. 그렇지 않다. 『오, 윌리엄』에서 윌리엄의 말처럼, 선택지는 생각보다 더 좁고, 결정의 상당 부분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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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순간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미셸의 결정이다. 다락방님이 페이퍼에서 썼던 것처럼 '가족의 결정 사항'이라는 건, 결국 미셸의 선택이었고, 미셸은 더 큰 정치 무대에 나서고자 하는 오바마를 지지하기로 한다. 오바마와 미셸의 결정의 이면에, 나는 이 부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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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spoke so often and so passionately of healing our country's divisions, appealing to a set of higher ideals he believed were innate in most people. But I'd seen enough of the divisions to temper my own hopes. Barack was a Black man in America, after all. I didn't really think he would win. (226p)

버락은 우리나라의 분열을 치유하는 일에 대해 자주,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 본래 자리 잡고 있다고 믿었던 더 높은 이상에 호소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의 분열을 충분히 경험하고 목격해 왔기에 내 희망을 어느 정도 절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버락은 미국에 사는 흑인 남성이었다. 나는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다. (2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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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은 가까이에서 본 그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를 알았기에, 더 중요하게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의 결정을 응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흑인인 그가 미국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믿음이 없었지만, 응원해 주었고, 확신이 없었지만 지지해 주었다. 오바마는 달랐던 것 같다. 오바마 자서전을 읽었으나 끝까지 읽지 않은 나여서, 이 부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오바마가 가졌던 확신은 무엇일까. 오바마가 품었던 희망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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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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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지만 내용이 궁금해서 구입해버린 이 책을 읽기 전, 사전만남 아니고 읽기 전 사전질문. (1) 수적으로 우세였던 인디오는 수백 명의 유럽인들에게 왜 그렇게 쉽게 정복당했던가. (『총, 균, 쇠』, 『사피엔스』에 나옴) (2) 유럽의 남미 지배가 그렇게 오랜 시간 공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3) 남미인들은 어떻게 지배자의 신을 자신의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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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여성의 역사』는 선물 받았고, 손열음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전곡>이랑 『라틴 아메리카의 열린 혈맥』은 내적립금내산이다. 항상 꼭 필요한 것만 사야지 결심하는데, 너무 야무진 결심이었나, 책탑이 안 되고 다 스탠딩이다.

소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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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1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잡초는 늘 정원에서 골치 아픈 존재지만 반가울 때가 있어요 추운 겨울 지나 아직 봄이라 말하긴 애매한 때 황량한 땅에 초록초록 잡초, 특히 질경이가 나와요 그때는 그 초록이 참 반가워요 그래서 남겨두면...어느새 질경이밭이 되어버리죠 그러면 반가움은 이제 싸악 사라지고 다 뽑아버리겠다아아 하면서 눈에 불을 켜죠ㅋㅋㅋㅋ잡초책을 읽으셔서 잡초 잡담 한번 해봤습니다😆

단발머리 2026-10-13 18:33   좋아요 0 | URL
초록초록 잡초가 초록은 이쁜데 ㅋㅋㅋㅋㅋㅋ 질경이밭이 되면 아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잡초 잡담이 이렇게 즐거운지 몰랐어요. 저는 물론 글자로만 아는 잡초이지만, 망고님과 잡초 이야기를 나누니 잡초가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독서괭 2026-10-12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셸 글 정말 잘 쓰죠! 저도 비슷하게 읽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지 말지 두고 미셸이 고민하다가 결국 지지하기로 하는 데까지 읽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복잡했을지…. 상상이 잘 안 돼요. 미셸이 오바마의 여러 면을 이해할 수 없다고 표현하는 거 보면 재밌더라고요.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므로 ㅋㅋㅋ 오바마가 쓴 책이 잘 팔려서 인세가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 잭과 콩나무의 잭에 비교하는 것도 웃기고요 ㅋㅋ

단발머리 2026-10-13 18:52   좋아요 1 | URL
네, 미셸 진짜 잘 써요~~ 저는 오바마 자서전도 반은 아니고 3분의 1 정도 읽었는데요. 미셸 글이 훨씬 더 좋아요. 저는, 독서괭님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부분을,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ㅋㅋㅋㅋㅋㅋㅋ참 좋네요.
이 책 중간중간에 오바마의 하와이완 특유의 느긋함이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잘 안 팔려도 잘 팔릴거라는 그 믿음과 확신. 결국 나중에 잭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6-10-13 1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책이 있다면, 탑을 쌓지 않고 스탠딩어도 참 예쁩니다. ㅎㅎ

맞아요, 미셸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녀가 오바마의 아내인것이죠. 그리고 읽다 보니 그런 부분 나오더라고요.

<우리는 버락에게 주어지는 호화로운 혜택을 나눠 받은 수혜자에 불과했다. 우리가 중요한 존재인 것은 우리가 행복해야 버락이 행복하기 때문이었고, 우리가 보호받는 것은 만약 우리가 안전하지 않다면 버락이 맑은 정신으로 나라를 이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백악관은 단 한 사람의 안녕, 효율, 힘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운영되는 곳이고, 그 한 사람은 물론 대통령이다.> -전자책 p 1204/1677

저는 미셸이 자기의 위치를 냉철하게 보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왜 중요하냐면, 이 나라 대통령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안전해야 그가 대통령 일을 수행할 수 있다, 하는 것이요. 이 부분 읽으면서 미셸이 참 미셸 답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요.

오뒷세이아 저도 읽으려고 생각중인데, 그러려니 일리아스 먼저 읽자, 하면서 아직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어요. 비커밍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하하.

단발머리 2026-10-14 07:39   좋아요 0 | URL
저 아직은 이 부분은 도착하지 못했는데.... 아, 진짜 미셸 포스 장난 아니네요. 단 한 사람의 안녕, 효율, 힘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
이건 이 사람이 대통령이어서만은 아니고, 권력과 힘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때 옆에 사람이 느끼는 당연한 생각, 감정 같기는 해요. 미셸처럼 정확하게 포착하고 표현하는 게 어렵죠. 다락방님 표현처럼 참 미셸답네요. 그냥 딱, 미셸이에요.

저 오뒷세이아, 밀리의 서재로 읽고 있잖아요. 어제부터 앤 카슨 소설로 샤사삭 넘어가서ㅋㅋㅋㅋㅋㅋㅋㅋ앤 카슨 <남편의 아름다움> 특별하네요. 띠용~~~

다락방 2026-10-14 08:39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오래전에 [남편의 아름다움] 되게 재미없게 읽은 기억이 있거든요? 그런데.. 특별한가요? 밀리의 서재에 있어요? 저도 한 번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단발머리 2026-10-14 08:48   좋아요 0 | URL
아~~ 그렇다면 그럴 수 있겠어요. 노벨문학상 작가책인데 생각보다 ㅋㅋㅋㅋㅋ생각보다 재미있고요. 재미없을거라는 예상을 넘어서요. 여름의 포도밭 겁나 뜨겁구요 ㅋㅋㅋ🍇

다락방 2026-10-14 09:17   좋아요 1 | URL
‘여름의 포도밭‘ 이런거 좋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적으로 페이크 리레이션쉽(fake-relationship)이라고 하면, 실제로는 연애 관계가 아니고 감정적 유대가 약한데, 겉으로만 연인처럼 행동하는 관계를 말한다. 서로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는 연인으로 소개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한다. 하지만, 로맨스 소설에서 fake-relationship이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연인인 척'하는 관계를 말한다. 남녀 주인공들은 자매의 결혼식에 데려온 파트너 역할을 위해서 혹은 헤어진 사이임을 주위에 알릴 수 없어서 여전히 연인'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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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에서 수행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설명되는 반복성은 fake-relationship 가운데 있는 두 연인의 행동과 유사점이 있다. 젠더의 수행처럼, 연인인 척 행동하기가 반복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역할극 속 행동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결정이 아니라는 게, 내가 보기에는 중요한 지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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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relationship에 들어가면서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 올리브는 애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커피 타임'을 제안한다. 수요일 오전 10시, 스타벅스에서의 만남이 바로 그것인데, 연인인 척하기 위해 시작한 이 심드렁한 수요일 데이트가 점점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영화가 아니라 책에 나온 부분이다) 먼저, 올리브는 애덤이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새롭게 알게 된다. 애덤의 준수함은 숨겨지는 종류의 준수함은 아니지만, 아무튼 올리브는 알지 못했다. 애덤 칼슨이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라는 걸 말이다. 올리브는 '가짜 수요일 데이트'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질문을 애덤에게 던진다. "좋아하는 색이 뭐예요?" 올리브의 생각은 그렇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서로 사귀는 사이라면, 좋아하는 색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그 사실이 올리브에게는 중요한 것 같다. 애덤을 당황시킨 이 색깔 질문이 상당히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올리브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묻지 않았지만 대답하자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은 하늘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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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올리브의 관점에서 펼쳐지고, 이탤릭체의 글씨는 올리브의 속마음 토크이기 때문에, 독자는 아무래도 올리브의 시선에서 사건을 관찰하게 된다. 소설 맨 끝에서야, 애덤이 3년 전부터, 그러니까 대학원 입학 인터뷰를 위해 학교를 방문했던 올리브를 처음 만난 그날부터 그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그걸 알 리가 없다. 실제로, 이미, 상당히 올리브를 좋아하고 있는 애덤의 질문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다. 애덤은 캐나다에서 자란 올리브가 왜 미국 대학에 진학했는지 묻고(이유: 전액 장학금), 고향에 자주 가는지, 졸업하면 그곳으로 돌아갈지를 묻는다. 그녀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이 연결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가짜 수요일 데이트'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서로의 삶 속으로 초대된다.

​

반면에, 올리브의 베프 안의 강요로 이루어지는 행동들은 올리브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fake-relationship의 수행 중에 강제된 행동들이다. 몇 톤은 나갈 법한 트럭을 밀어서 옮긴 애덤에게 키스를 해준다거나, 학과 체육대회에서 애덤에게 선크림을 발라준다거나 하는 행동들이 그렇다. 올리브는 남자친구에게 할 법한 행동들을 애덤에게 해줄 것을 강요받는다. 두 사람은 외면적으로 연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 특별히 신체적인 접촉은 두 사람 사이에 친밀감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된다.

​

손예진-지창욱-나나 주연의 <스캔들> 말고 이미숙-배용준-전도연 주연의 <스캔들>에 배용준의 이런 대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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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심인 척했을 뿐인데

척하다 보니

결국 진심이 되어 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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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을 사랑하는 척 연기하던 배용준은 전도연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나나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던 지창욱은 나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애덤을 좋아하는 척 연기하던 올리브는 애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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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04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설정 나오면 재밌게 보거든요? 설레이기도 하고ㅋㅋ 근데 과연 실제 상황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저는 처음부터 설레이는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리 척해야 하는 상황에서 척을 한다한들 그 관계가 연인으로 깊어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처음부터 친구였으면 계속 친구인거고 계속 옆에 있었더니 정분이 나더라 이런 상황은 제 성향과 경험상 일어나지 않더라고요ㅋㅋㅋㅋ그러니까 척을 해도 애초에 아무 감정이 없진 않았을 거다 라는 뭐 그런 생각.

단발머리 2026-10-04 19:59   좋아요 1 | URL
이런 설정이 유행이긴 하나봐요. 제가 즐겨 읽는 로맨스 소설에서는 더욱 그러기는 한데요.

저는 처음부터 설레이는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리 척해야 하는 상황에서 척을 한다한들 그 관계가 연인으로 깊어지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 망고님 이 문장 읽는데, 너무 올곧으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도 그런 스타일이라서 아주 딱 알겠는 것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계속 있다가 정분 나는거는 사실 반칙이죠. 원래 감정이 있었는데, 아닌 척 했다가 나중에는 맞는 걸로 ㅋㅋㅋㅋㅋㅋ그런 생각입니다 : )

다락방 2026-10-05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애초에 그 ‘척하는‘ 계기 자체가 상대에게 호감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가 어떤 사정으로든 가짜 연애를 하게 되었을때, 그것을 내가 정말 너무 싫어하는 사람과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느 정도 좋아하는 마음, 호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척하다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거고요. 싫은 사람, 꼴보기도 싫은 사람에게 애초에 제안 같은 것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올리브에게 제안하죠. 지창욱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나에게 척하고, 배용준은 전도연에게 척합니다. 모든 척하는 관계가 다 진심이 되어버리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애초에 마음이 없었다면 척하는 것조차 시작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거죠.

하여간, 사랑의 가설 얘기는 재미있어요. 이렇게 풀어도 저렇게 풀어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6-10-05 16:29   좋아요 0 | URL
우아 ㅋㅋㅋ 저 놀랐던게. 다락방님이랑 망고님 댓글이 완전 같은 맥락인데, 저도 그렇게 느끼거든요. 페이크이지만 일단 그 전제가 어느 정도 좋아하는 마음, 호감일 수 밖에 없다고요. 나중에 올리브도 여러 번 속마음 토크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애덤이 성격 나쁜 거 다 알고, 폭군 같고, 재수없게 군다는 거 다 알지만.... 실제로 페이크 연애 중에 사건도 있었구요. 나하고 있을 때는 잘하려고 한다. nice. 나한테는 나이스. 나한테는 착한 남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창욱은 나나에게 돌진하고 배용준은 전도연에게 돌진하고 애덤은 올리브에게 돌진하죠ㅋㅋㅋㅋㅋㅋ 애덤과 올리브의 관계에서 제가 좋아하는 지점은 애덤이 가짜 연애를 제안한건 맞지만 시작은 올리브였고(이 시작이 좀 이상하긴 해요. 급키스라니...) 그 관계를 끝낸것도 올리브(이 지점은 영화에서 잘 표현해내지 못했구요)라는 점이었어요. 올리브의 주도성에, 저는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고야 맙니다. 사랑의 가설 좋아요! 하하하! 애덤이 도와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독서괭 2026-10-12 12:20   좋아요 0 | URL
저도 백퍼 동의!! ㅋㅋㅋ 그나저나 사랑의 가설은 정말 인기인가봐요. 영화가 나와서 더 그런가? 서점 갈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발견해요ㅎㅎ 빨리 읽어야 할텐데.. 그나저나 로맨스에 주디스 버틀러 가져오는 단발님 지성 어쩔거야~🫶🏻

책읽는나무 2026-10-05 2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캔들 영화도 예전에 영화관에서 봤었는데…그닥 감명깊단 생각은 안 했었거든요. 근데 이번 스캔들 넷플 드라마 한다기에 응? 하면서 보다가 영화 수위에 쫌 놀랐고…영화 결말이나 등장인물들의 해석이 조금씩 다른 차이가 있더군요. 근데 배용준이나 지창욱은 전도연과 나나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한 건 똑같았던 것 같아요. 절대 척한 게 아녔을 겁니다. 이미숙이나 손예진 마음 상하게 할까봐 계속 척한 거겠죠. 소설도 이런 맥락인 것 같군요. 물론 이미숙이나 손예진같이 눈치볼 사람은 없겠지만요. 다들 알고보면 첫눈에 반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단발 님이 좋아하는 색은 하늘색!ㅋㅋㅋㅋ 저는 물건마다 좋아하는 색이 다른 것 같아 선뜻 좋아하는 색을 바로 입밖으로 내뱉기가 쉽지 않던데..(생각해보니 모든 면에서 최애를 말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긴합니다. 늘 이것도 좋아보이고 저것도 좋아보여서.^^) 그래서 하늘색 좋아하시는 단발 님이 좀 부럽네요.^^

단발머리 2026-10-05 21:29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저는 이전의 스캔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전도연씨가 너무 연기를 잘하는 거예요. 특히 나중에 배용준이 변심한 것처럼 했을 때 충격받는 모습이 너무 예쁘더라구요. 그 와중에도 이쁨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책나무님 말씀이 맞네요. 배용준이나 지창욱은 전도연과 나나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한 거요. 그래놓고서 이미숙과 손예진에게 내기를 제안한 거였네요. 아이고, 그러고 보니 나쁜 놈, 아니 나쁜 놈들이네요. 이런...

저는 하늘색, 핑크색, 연보라색, 파란색 ㅋㅋㅋㅋ 아무튼 그 계열을 좋아합니다. 물건마다 좋아하는 색이 달라 고민되신다면 책나무님은 애덤파입니다 ㅋㅋㅋㅋㅋ 올리브도 처음에는 그런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깨닫거든요. 그 질문이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지를요.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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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말하고 싶은 건 번역이다. 일본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이라서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번역가의 솜씨 덕분일 테다. 한글로 된 소설을 읽는 느낌으로 술술 읽힌다. 소설 속 사건을 끌고 가는 의문은 한 가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문장은, 괴테가 한 말이 맞을까. 학자적 양심으로 성실하게 그 답을 찾아가는 도이치. 소설은 도이치의 뒤를 따라가며 답을 찾으려 하지만, 그가 찾은 실체는 사실과 거짓, 확신과 오해 속에 혼연일체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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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당신이 왜 베버 씨 사이트를 보고 있어?"

어리둥절해진 도이치는 잠시 침묵한 끝에 상황을 이해했다. 베버는 아키코가 좋아하는 유튜버라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의 명언 찾기는 결코 의미 없는 짓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이어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무언가로부터 생겨났고,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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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극찬이 많았던 건, 소설 속 스즈키 유이가 인용한 작품들에 대한 찬탄으로 들린다. 어? 네가 이걸 알아? 이게 이거야?를 넘어서서 자신이 읽어왔던, 자신이 사랑하는 그 어떤 '작품'에 대한 애정과 외경심이 이 작품과 겹쳐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지돈의 <창백한 말>과의 어떤 유사점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계속 그 단편이 생각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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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둔갑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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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3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은 이 책이다. 수학 시간인데 책 읽는 묘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국어 잘해야 수학 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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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 세고 제 맘대로인 서 첨지는 손톱 발톱 깎다가 만난 쥐가(일단 쥐를 만났는데 왜, 안 쫓아냄?) 손톱, 발톱을 잘 받아 먹는 것을 보고(아니 그걸, 쥐한테 왜 주나), 손톱 발톱 깎을 때마다 쥐랑 조우했는데, 그렇게 서 첨지 손톱 발톱 먹고 자란 쥐는, 측간 가면서 벗어놓은 서 첨지의 옷을 입고 서 첨쥐로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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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저주. 서 첨지와 가짜 서 첨쥐가 대면하는데, 가족들로서는 육안으로 두 사람 중 누가 진짜인지를 판별할 수 없다. 집안의 농기구 수를 묻는 것도 어려워 죽겠는데, 마누라는 한술 더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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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간에 장독들은 어찌 되오?

마누라 물음에 진짜 첨지 황당하고 답답하여

붉으락푸르락 이마 주름만 꿈틀거리는데

가짜는 희희낙락 잘도 주워섬기는구나.

'큰 장독이 일곱인데

간장독이 둘이요, 도니장 독이 둘이요,

고추장 독이 하나요, 나머지는 김칫독이요,

작은 항아리는 뚜껑이 깨진 것까지 다섯이니,

모두 열둘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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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는 이 동화의 교훈을 이렇게 적고 있다. '가장이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역할을 해내지 못한 가장에 대한 비판이며, 가부장제도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재치가 이야기 속에 묻어나고 있다.' 만약, 그 해석이 맞다면 서 첨지가 깊은 산속 스님에게 전달(?) 받은 고양이를 데려와 서 첨쥐를 물리친 건 백래시로 보아야 하나.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서 첨지가 부인과 자녀들에게 퍼붓는 저주의 말은 또 어떠한가. 아무래도 그 해석에는 동의하지 못할 듯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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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서 첨쥐를 인공지능으로 읽었다. 나를 대신하는 척, 나인 척, 하는 이 묘령의 존재가 정보의 양과 접근성, 그리고 활용성을 무기로 '나'인 척할 때, 누가 나를, 나로 믿어줄 것인가 하는 걱정. 우리 집에는 장독대가 없고, 장독들도 없지만(김치냉장고는 있음), 신용카드 이용내역과 네이버 검색어, 시청한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지 못한지는 10분 안에 확연히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동화에서는 깊은 산속 암자의 스님이 키우던 고양이가 답이었다. 우리에게는 답이 있는가. 우리에게도 답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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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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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읽기가 지지부진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더블에서 오디오북을 산다. 오더블 무료 한 달 이용에서 결제로 넘어가 여러 권을 사고, 멤버십 해지하고, 다시 오더블 멤버십 신청하고, 오디오북 몇 권 사고 서너달 뒤 멤버십 해지가 반복되는데, 이번에도 진도가 지지부진해서 오디오북을 샀다. 좋은 점은 미셸 본인이 읽어준다는 점인데, 딕션도 좋고 발음도 듣기에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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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는 비빔밥 먹으면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눈으로는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오바마는 멋진 사람 같다. 하와이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하와이에서 온 사람다운 느긋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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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voice climbed in intensity as he got to the end of his pitch. He wasn't a preacher, but he was definitely preaching something a vision. He was making a bid for our investment. The choice, as he saw it, was this: You give up or you work for change. "What's better for us?" Barack called to the people gathered in the room. "Do we settle for the world as it is, or do we work for the world as it should be?"(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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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삶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쪽으로 한 걸음씩 내딛는 오바마에게서, 정치, 혹은 역사의 운명이, 결국 한 사람으로 집약되어 나타나는 모습이 엿보인다.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획기적이고 커다란 변화는 여러 사람들의 힘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 맞겠지만, 그 힘과 에너지는 종국에는 한 사람에게로 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노무현과 이재명이 생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바마의 당선으로 미국 사회에서 흑백 갈등이 옅어졌다거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에 한없이 우호적인 오바마 때문에 남북 관계가 기한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상징하는 것, 그의 존재 자체가 보여주는 가능성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한 지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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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와 미셸 검색하다 보니, 예전에 보았던 오바마 퇴임 연설 영상이 뜬다. 오바마는 미셸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연설하는 오바마와 미셸 옆의 큰딸, 그 옆에 사람들이 기립하고 박수를 치며 눈물을 흘리는데 반해 세상에나ㅋㅋㅋㅋㅋㅋ 미셸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는 가볍게 미소만 짓고 있다. 아하하 ㅋㅋㅋㅋㅋㅋㅋ미셸은 이런 사람인 것이다. 그런 찬사와 기립 박수를 받을만한 사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바마 찍은 사람들은 다들 고마워해야겠다. 오바마를 공공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통 큰 미셸이 양보해 주었다. 희생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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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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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재미난 책은 이 책이다. 예전에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이라고 나왔을 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두께에 압도당해 앞부분 읽다가 반납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개정판 나와서 살까 말까 하는데 앞의 띠지가 황정은 작가의 말이었다. "철학책을 읽다가 내릴 정거장을 놓친 건 처음이다" 책 읽다가 정거장을 놓치는 건 얼마나 흔한 일이던가. 지난주에도 간만에 멀리 나갔다가 한참을 돌아돌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철학책을 읽다가'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듯싶기는 한데. 하여 좋아하는 작가의 말을 믿고 이 책을 구입하기에 이르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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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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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퐁티의 살아낸 사상에 대한 신념과 아이리스 머독의 "거주하는 철학"에서 얻은 영감과, 내 발자취를 되짚으며 느낀 기묘한 감정에 이끌려 나는 실존주의와 현상학의 이야기를 철학과 전기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탐색해 보고 싶다. 철학과 전기를 조합하는 것은(이를 완전히 거부했던 하이데거를 제외하곤) 실존주의자들과 현상학자들이 매력을 느꼈던 방식이기에 더욱 같은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철학이 삶이라는 형태로 빚어질 때 더욱 흥미로워진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개인적 경험 또한 철학적으로 고찰한다면 더욱 흥미로울 거라고 생각한다.(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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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전기를 조합하는 방식에서 당연히 떠오르는 한 사람은, 역시나 마리 루티다. 마리 루티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은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개인적 배경과 함께 풀어가는 철학, 이론,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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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페미니즘 학자들은 일부 인종· 민족 학자들처럼 개인적이고 일화적인 집필 방식을 끈질기게 고집했지만,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에선 자서전체는 한심할 정도로 순진한 의미 창출 양식으로 소외됐다. 개인적인 경험은 소위 '고급 이론high theory' 영역에서는 유효한 토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런 경향이 바뀌고 있다. 개인적인 것이 이론 집필의 정당한 요소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남근선망과 내안의 나쁜 감정들』,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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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거실 책상 위를 치웠다. 사놓고 책장에 꽂지 못한 새 책들, 바디워시, 머리띠, 밀크티, 작은 가방, 모자, 전등까지 이런저런 살림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일단 여기저기에 집어넣어 반을 비웠다. 일전에 건수하님이 형광펜도 보여달라 하셨는데, 요즘에는 이쪽(?) 형광펜을 많이 쓰고 있다. 예전에는 스타빌로 형광펜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아무튼 제일 애용하는 건 역시나 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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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엔 (항상) 간식이 필요하고, 줄은 연필로 그어야 제맛이다.



Keep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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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10-05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커밍 오더블 샀는데.. 하.. 쩝.. 샀다고요. 사기만 했습니다. 완독 한 달 뒤로 미뤄지니 또 읽기를 게을리 하게 되네요. 발등에 불떨어져야만 읽는 것인가. 하여간 다시 열심히 읽어야겠지요.
단발머리 님, 사진 속의 컵 너무 예쁘네요!

저 살구 철학자 책 구판으로 가지고 있는데(심지어 원서도 있다능.. 이 얘긴 전에도 했죠? ㅋㅋ) 재미있다고 하시니 너무 좋습니다. 읽을 의욕이 생겼지만, 언제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언제 보아도 참으로 정갈하고 깔끔한 단발머리 님의 독서풍경 입니다.

** 그런데, 쥐한테 손톱 발톱은 왜 먹인대요? 으.. 너무 싫어.............

단발머리 2026-10-05 21:16   좋아요 0 | URL
저는 오더블 없으면 못 읽었을 거 같아요. 계획 다시 세우고 열심히 읽어야 하는데 ㅠㅠㅠ 암튼 오늘 30쪽은 읽은 거 같아요.
오더블 사랑합니다. 소듕해요~~~
사진 속 컵은 버틀러 컵입니다. 버틀러 책 [비폭력의 힘] 사면서 받은 사은품입니다. 책은 아직도~ 지만 제게는 컵이 남았네요^^

칵테일 책 읽다가 너무 괜찮아서요. 저도 원서 폭풍 검색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쪽수를 더할수록 어려워지고 있어서요. 저는 원서는 포기하고 일단 이 책을 재미있게 읽어보려고 합니다.

프레임 안의 깔끔함이지만, 다락방님 정갈하다고 하셨으니깐 ㅋㅋㅋㅋㅋㅋㅋ 그 정갈함은 즉시 접수합니다!

2026-10-0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10-09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6-10-1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머 비커밍 오더블 미셸이 직접 읽나요?? 갑자기 듣고 싶어졌어요!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싶은데 버튼 어디갔나요 ㅠㅠㅠㅠ 진짜 이거 언제 돌려놓을거냐 알라딘~~
 











영화 <사랑의 가설>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 책이 훨씬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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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렇다. 책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는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다. 영화가 책을 원작으로 하지만 원작에 기대지 않고 확연히 다른 구성과 전개로, 혹은 배우들의 열연으로 다른 작품이 창조되는 경우도 있을 수는 있다. 이 영화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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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반적인' 경우로서, 영화가 책보다 못하다. 중요한 장면들(표지의 올리브와 애덤의 첫 키스 장면, 안과 올리브가 서로를 위로하며 힘을 주는 장면)을 영상화하는 데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fake-relationshp을 합의하는 장면은 어설프고, 다른 사람에게 사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억지스럽다. 올리브의 친구들에게 두 사람이 사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올리브 친구의 파티에 교수인 애덤이 참석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나 바쁜 박사 과정생들의 여가 생활이 흥청망청인 것도 이해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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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주인공들의 생각을 보여줄 수 없으니 축약하고 또 축약하는 건 당연하지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각 등장인물들의 대사까지 바꿔버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소득이라면, 올리브를 열연한 릴리 라인하트가 너무 이뻐서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화면이 환해진다는 것. 그것 말고는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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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서는 이웃님의 아름다운 페이퍼가 있어서 일부러 링크를 걸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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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님 : 인생 로맨스 소설 (https://blog.aladin.co.kr/suha/16731051)


바람돌이님 : 로맨스라는 힐링 (https://blog.aladin.co.kr/baramdori/16744532)


다락방님 : 굶주림 (https://blog.aladin.co.kr/fallen77/15196039)

사랑의 가설 (https://blog.aladin.co.kr/fallen77/1433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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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100배 낫다. 책을 읽는 게 낫다. 이 말 쓰려고 페이퍼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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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9-25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페이퍼 보고 영화 궁금했는데, 벌써 보신 거군요!!

단발머리 2026-09-25 19:45   좋아요 0 | URL
저, 시간 재면서 기다렸다가 5시부터 봤는데 말이지요. 그 전날 멤버십 가입하고요.
넘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허어...

건수하 2026-09-28 22:07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이 책에서 fake-relationship의 시작에 잘 설득이 안 되기는 했었습니다 ㅎㅎ 그 부분을 넘기니 괜찮았습니다만... 그치만 영화는 그 뒤에도 실패했나보군요? 사진만 봤을 때는 애덤의 외모도 잘 설득이 안 되기도 하고..;; 오랫만에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뭔가 쑥스럽군요 :)

다락방 2026-09-2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영화 기다리고 있었다고욧!!

단발머리 2026-09-25 19:4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기다리셨으니 꼭 보실거라 믿고요. 보고 나시면 간단하게라도 감상 남겨주세요.
저는 많이 실망했습니다. 너무 억지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지한 로맨틱 개연성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9-25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이 워낙 사랑하는 책이라 실망이 크셨을 듯요 ㅠㅠ 하지만 정말 책 원작 따라가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아요. 영상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잘 만드는 게 역량인 듯.. 이 영화는 여주 빼곤 실패했군요.. ㅠㅠ

단발머리 2026-09-26 09:22   좋아요 1 | URL
아주 실망이 컸습니다. 흠...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영상화하는 게 어렵기는 하죠. 속마음 토크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구요.
올리브 보는 재미가 컸습니다. 애덤은 아니구요. 올리브, 오직 올리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9-26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수하님, 바람돌이님의 주옥 같은 글에 더해 다락방님의 글 2편을 더 찾아서 링크 올립니다.
저 영화 보는 것보다 이 글 네 편이 훨씬, 훨~~~~~씬 재미있습니다. 로맨스 좋아하는 분이시라면, 절대!!!

놓치지 마세요!!

다락방 2026-09-26 14:36   좋아요 1 | URL
저 단발머린 님의 이 댓글 덕분에 ㅋㅋ 제가 쓴 글 다시 읽었는데 말입니다. <굶주림>.. 왜케 잘 썼어요? 글 쓰는 천재인가봐요? 너무 잘 써서 깜짝 놀랐네요. 명문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제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하고 있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 ㅋㅋ 잃시찾도 읽어야 하고 비커밍도 읽어야하고 진짜 마음 늠 급하고 초조해버려. 게다가 벌써 9월 26일.. 하..

단발머리 2026-09-26 16:41   좋아요 0 | URL
<굶주림>도 좋은데 <사랑의 가설>도 좋아요. 두 글 다 댓글 반응도 폭발적이고요 ㅋㅋㅋㅋㅋㅋㅋ <사랑의 가설> 영화보다 100배 재미있는 독서 후기 열람기인데 말이지요. 명문의 향연 맞습니다!!

저는 영화 보고 나서 책이 나아, 책이 좋아... 이러고 있는데 아... 이번 추석 짧네요. 내일이면 끝이라고 합니다. 이 무슨 일이에요. 참, 다락방님! 그 댓글 못 보신거 같은데, 독서괭님이 미셸 같이 읽기 한 달 더하면 어떨까요? 라는 의견을 내셨고요. 제가 O, X 중 O 팻말 높이 들었습니다. 참고해 주세요^^

다락방 2026-09-26 16:48   좋아요 1 | URL
앗, 그런 댓글이 있었어요? 저 못봤어요! ㅋㅋ 아 너무나 좋은 댓글이네요. 찾아가서 보고, 그리고 공지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6-09-26 16:50   좋아요 0 | URL
♥️🧡💛💚💙💜💕🥰 독서괭님 가장 최근 페이퍼에 있습니다요 ㅋㅋㅋㅋㅋㅋㅋㅋ그 댓글이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6-09-3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 님, 저 이 영화 보능중인데 왜이렇게 재미있죠, 저는? 초반부터 좋았어요!! 다 보고 페이퍼 쓸게요!!

단발머리 2026-09-30 20:59   좋아요 0 | URL
박수 짝짝짝! 👏👏👏👏👏 기다리고 있을게요!! 하트뿅뿅! 🥰

단발머리 2026-09-30 21:07   좋아요 0 | URL
앗! 다락방님! 지금 잃시찾 완독하셔서 홀가분하게 영화보시는 거 맞죠? 세상에~~ 아끼셨던 거군요. 우리 올리브, 우리 애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밤 되세요! 🥵

다락방 2026-09-30 21:2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제가 잃시찾 다 읽으면 보려고 꾹꾹 참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진짜 꿀잼이에요. 그리고 올리 왜이렇게 사랑스럽죠? 으.. 너무 예뻐요. 올리브 얼굴이 다 하네요 ㅠㅠ 너무 좋네요 ㅠㅠ
 



에피소드 중심의 엄마표 성교육은 주로 성추행의 위험한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다. 성충동에 사로잡힌 남자들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엄마의 묘사는, 열여덟의 엄마가, 혹은 내게 그 말을 할 당시의 엄마까지도 얼마나 순진한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열다섯이었고, 또 열여덟이었다. 결론은 항상 똑같았다. 기지를 발휘해 그 장소를 벗어나라.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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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창조』 못지않게 내 인생 최고의 페미니즘 수업을 열어주셨던 한문 선생님은 성폭행 보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성폭력이란 결국 성기에 가해진 폭력일 뿐이라고 선생님은 여러 번 강조하셨다. 20대 후반의 기혼 여성, 정규직이 아닌 1년 계약직 선생님이셨다. 중병아리 같은 여중생들 사이에서 백조처럼 보이는, 나란히 걸을 때 자꾸 곁눈질하면서 쳐다보고 싶었던, 배우처럼 예쁜 선생님의 말씀이 그러했다. 그때까지 내가 들었던 '성에 대한 담론', '여성의 성에 대한 설명', 그것을 토대로 내면에 공고화된 성관념과는 상반되는 주장이었다. 여성과 성, 혹은 순결과 성관계에 대해서 그런 설명은 처음이었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렇구나. 순결을 잃었다고 해도 자살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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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는 성(sex)이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시작점은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강조 때문이었지만, 사실 '섹스' 역시 '젠더'처럼 사회적으로 구성될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이 느끼는 쾌락에서 섹스가 가지고 있는 특이성을 모른척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동물적'이며, 또한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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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고,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없는 존재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내 몸의 경계, '나'라는 존재의 최종 한계가 외부의 '나'와 조우하는 유일한 방법은 접촉일 수밖에 없고, 라캉이 '성관계는 없다'라고 말한 바로 그 지점에서 찰나의 순간, '성관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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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간의 기억, 정보 처리, 사고 과정의 일부, 더 정확하게는 상당 부분에서, 인간의 성과를 압도하는 인공지능에게 부재하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이고, 실패이고, 고통이다. 그리고 몸이다. 우리 인간에겐, '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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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장황해져버렸다. 이쯤에서 대충 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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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대충 스무 개 정도의 글을 쓴 것 같다. 그만 써야지, 그만 쓰겠지 했는데 쓰고 나서 또 쓰고, 한참 뒤에 또 썼다. 애덤보다는 올리브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혼자 생각한다. 보스턴으로 출장 갔던 애덤이 지난밤에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에 애덤을 만났다. 애덤이 등장하자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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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무슨 가능성일까. 애덤의 등장은 두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는 걸까. 애덤의 등장이 왜 올리브에게는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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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의 가능성, 올리브의 희망은 뭔지 잘 모르겠고, 내 가능성은 이런 거다. 영화 <The Love Hypothesis>의 9월 23일 아마존 공개를 앞두고 주문한 『The Love Hypothesis』 하드커버를 이 밤에 영접할 가능성. 그 가능성은, 그 희망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고. 이 책을 (이유 없이) 이렇게 비싸게 구입한 게 부끄럽기는 한데,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책을 자랑해야겠는데, 자랑할 데가 여기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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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추석 선물 하나씩 받아온다는데,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인지 나는 선물 하나 없다. 자목련님 페이퍼가 책과 추석 선물에 대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내 페이퍼도 책과 추석 선물 페이퍼다. 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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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9-23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자랑하셔야지요. 자랑하셔야 하고 말고요. 저렇게 비싸고 예쁜 책인데요. 책등이 아니고 저 분홍색부분은 뭐라고 하죠. 바깥쪽이 책등이니까 책 배인가? ㅎㅎ 하여튼 멋진 한문 선생님의 얘기도 듣고 예쁜 책도 보고, 넷플릭스 소식도 듣고 너무 좋습니다. ㅎㅎ 즐겁고 평안한 명절 되세요. 오랫만에 인사해서 너무 좋아요. ^^

단발머리 2026-09-23 22:07   좋아요 1 | URL
음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분홍색은 책을 펼치면 연한 분홍이 되는데 그게 딱 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쁜 책은 보기에 좋을 뿐이지만 이 책은 행간도 더 넓어 보여 한 번 더 읽을까 생각이 듭니다.
영화는 오늘 아마존에서 오픈했는데(오후 4시) 저 너무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그렇게 만들기도 어려웠을 텐데요. 너무 아쉽습니다.
바람돌이님도 즐겁고 신나는, 맛있고 행복한 추석 보내시기 바래요!!

다락방 2026-09-25 16: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 너무 아름답네요. 덩달아 저도 사고싶어요. 하..
내가 좋아하는 책의 하드커버를 갖는다는 건, 충분히 기쁜 일이며 자랑할만한 일이죠. 아 너무 예쁘다.. 정말 예뻐요!! >.<

단발머리 2026-09-25 19:53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아하는 책 두 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아니, 한 권 더 살 수 있다고도 생각해요.
아... 이 이야기랑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저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을 소중히 여기고 또 열심히 읽어야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오래 교회 다닌 사람일수록 성경이 닳아 있고, 밑줄도 형광펜도 많을 거란 말이지요.

근데 제가 아는 어떤 분은(그 때는 간사님이셨고, 지금은 목사님) 매년 연초에 제일 저렴한 성경을 사신대요. 그래서 그 한 해에 1독. 그 다음해에 또 한 권 사셔서 새 성경으로 1독. 이렇게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제일 좋아하는 책, 소중한 책을 곱게곱게 보관하는데 노력을 기울이는게 아니라, 실제로 그 책을 읽는다는 거죠.

저도 새 책 사고 1독 다짐했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지만 말고 ㅋㅋㅋㅋㅋㅋㅋ 일단 한 번 더 읽자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6-09-25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의 최애 로맨스 love hypothesis를 도서관에 대기 걸었는데 순번이 한참 밀려있네요. 🥺

단발머리 2026-09-26 09:50   좋아요 1 | URL
아...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인기가 많아서 저자가 베셀작가라는 호칭을 얻은거 같더라구요.
이번에 영화가 나오면서 다시 한 번 관심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독서괭님 이 책 얼른 읽어주셔야 하는데 말이에요.
감상을 나누고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