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 4부작>은 나폴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인생 역경을 보내며, 멀어졌다 가까워지고, 함께 했다가 다시 헤어지는 레누와 릴라, 두 여인의 우정을 다룬다. 이 소설의 화자는 엘레나 그레코, 레누이다. 레누는 어떤 아이인가.
나는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에 얼굴이 예쁘장한 아이였고 이목을 끄는 것을 즐겼으나 건방지지 않았으며 상대방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섬세한 마음씨의 아이였다. (54쪽)
가난한 동네,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레누는 초등학교 선생님인 올리비에로 선생님의 강권으로 중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레누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공부한 사람’이다. 라파엘라 체룰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리나’라고 부르지만, 오직 레누만 ‘릴라’라고 부를 수 있는 그녀. 릴라는 어떤 아이인가.
릴라는 착해 보이는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이였다. 릴라는 너무 뛰어나서 우리 같은 평범한 아이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선생님들도 릴라에 비하면 어린 시절 자신들이 멍청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릴라의 완벽한 지성은 날카롭고 도발적이고 치명적이었다. (55쪽)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춘기 시절에 친구 눈에 비친 나, 내 눈에 비친 친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나 판단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나는 친구를 통해 만들어지고, 친구는 내 시선 속에서 형성된다. 레누는 지적인 면에서 자신을 압도하는 릴라가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음에도, 그녀와의 경쟁심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릴라가 중학교에 진학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지, 아니면 릴라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자신을 미워하는지. 릴라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지, 아니면 실패를 바라고 있는지. 레누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릴라는 계속해서 레누의 학업을 격려하고, 어렵고 힘든 라틴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도와주지만, 레누는 모르겠다. 릴라의 본심이 무엇인지 말이다.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416쪽)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나의 눈부신 친구’로서 릴라를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면에 뛰어난 릴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물러서지 않는 릴라, 완벽하게 아름다운 릴라, 자신만의 매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사로잡아버리는 릴라.
내 경우라면 잘 모르겠다. 릴라 같은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는 일은 즐겁고 유쾌하지만, 내가 만약 레누라면, 릴라와 60년 우정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나는 레누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섬세한 마음씨의 소유자도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힘의 움직임과 긴장을 잘 포착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릴라라면, 이렇게 말하는 릴라라면, 나를 응원했던 그 말의 진심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다음날 나는 릴라를 현관에서 기다리지 않고 혼자 등굣길에 나섰다. 우리는 공원에서 만났는데 입술 위에 든 멍을 본 릴라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미 지난 일이 아닌가.
“부모님이 널 때리기만 했어?”
“그럼 뭘 더 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라틴어 수업에는 계속 보내주시겠대?”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릴라를 바라보았다.
설마 그런 걸까? 릴라는 부모님이 벌로 내 중학교 진학을 취소하게 하려고 나를 꼬드긴 걸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중학교에 가지 못할까봐 그렇게 서둘러서 나를 다시 데려온 걸까? 세월이 흘러 오늘에 와서야 나는 생각해본다. 사실 릴라는 때에 따라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99쪽)
둘째주, 셋째주에는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그래. 네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여행 가자’, 이렇게 약속했었는데, 기약 없을 것 같던 그 시간들이, 6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 버렸다. 알라딘 적립금으로 크레마를 구입하고,『백래시』,『현남 오빠에게』 업로드를 확인하고, 『나의 눈부신 친구』, 『우리 사우나는 JTBC는 안 봐요』, 『올리브 키터리지>』 e-book을 대여했다. 계획은 『My brilliant friend』로 주로 읽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크레마의 도움을 받는 거였는데, 마음은 급하고 읽는 속도는 따라주지 않아, 결국 『My brilliant friend』는 밀려나고 말았다.
그들이 고비를 맞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신혼여행지 때문이었다. 스테파노는 베니스에 가고 싶어 했는데 릴라는 나폴리에서 너무 멀리 나가지 말자고 고집을 피웠다. 릴라는 이후로도 항상 나폴리에서 멀리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이스키아 섬에 들렀다 카프리 섬에 가서 상황이 된다면 아말피 해변까지 들르자고 했다. 모두 그때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였다. (384쪽)
패키지여행의 영원한 출발점이자 종착역인 관광버스 안에서 이 문장을 따라 읽던 날은, 폼페이에서 베수비오 화산을 먼 발치로 보고, 카프리 섬 ‘황제의 정원’을 둘러본 다음날이었다. 폼페이와 카프리섬을 말하는 엘레나 페란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바로 전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건 특별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공항에 도착해 핸드폰 설정을 바꾸자마자『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검색해 근처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집 앞 도서관으로 상호대차해 두었다.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는 알라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나폴리 4부작> 2권, 3권을 기다리는 동안 『혁명의 영점』을 읽었다. 식탁 앞에 앉아 3색볼펜을 들고 천천히 읽어나가는데,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즐거운 내용이어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궁금증에 대한 답이 바로 그 책에 있었기 때문이다. 줄을 치고 별표시를 하고, 책장을 넘겼다.
식구들 모두와 함께 있으면서, 삼시세끼 밥걱정, 반찬걱정, 간식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주 신나는 일이었다. 멋진 장소에서의 셀카 타임 역시 소중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딱 펼치고 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