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하게도 저는 고독합니다
1.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어제 산 책 3권. 최근에 한길사 한나 아렌트의 정치사상 3종 세트가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건데, 책은 살 수 있을 때 사야 한다. 책은 언제든 품절될 수 있다. 사야 하는 책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은, 줄 쳐야 하는 책은 미리 사 두어야 한다. 갑자기 맘이 급해져서 구입한 에이드리언 리치 두 권. 버지니아 울프 책은 예뻐서 샀다. 위의 카테고리에서 찾는다면 이 책은 ‘사야 하는 책’이다. 책이 손에 쏙 들어와서 좋기는 한데 확 펼쳐지지 않으니까 읽을 때 주의 요망.
2. 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의 책은 처음인데 책 소개의 흥분된 광고 문구만큼의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질투하는 남자 혹은 질투하는 사람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지만, 그 남자 정확히는 그 남자들(남편과 연인들)의 한결같은 찌질함을 계속 읽어가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 그레이엄 그린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 하겠지만, 무서운 책을 읽는 건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주운 문단은 여기. 질투 코드는 아니지만, 유머 코드는 나랑 맞는 듯.
"이름이 랜스인가요?"
"랜슬롯 경의 이름을 땄습니다.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놀랍군요. 꽤 불유쾌한 이야기가 있는 사람인데."
"그가 성배를 찾았습니다." 파키스씨가 말했다.
"성배를 찾은 사람은 갤러해드예요. 랜슬롯은 기네비어와 잠자리를 함께하다가 들켰죠." 왜 우리는 순진한 사람을 놀려주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걸까? 질투인 것일까? 파키스씨는 아들을 배신한 듯한 표정으로 아이를 건너다보며 침울하게 말했다. "처음 듣는 얘깁니다."
3. Normal People
처음 코넬과 메리앤이 헤어지고 난 뒤, 메리앤이 자신의 삶을 차근차근 쌓아간 데 비해 비극의 원인 제공자였던 코넬은 무척 힘들어한다. 괴로워하고 방황한다. 아, 나는 이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던가. 나는 코넬을 용서했다. 방황하는 그에게, 고통받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 너도 아직 어리지. 그래, 네가 실수한 거야. 우리 모두 다 그렇잖아. 실수를 하고, 그리곤 후회를 하지.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단다, 코넬.
근데 이 장면에서 코넬과 메리앤의 두 번째 이별 이후, 코넬의 여자친구가 과거 코넬과 메리앤의 관계를 묻는 장면에서 나는 코넬에 대한 용서를 철회해 버리고 말았다.
사랑하지 않고, 연인이지 않으면서 섹스하는 관계. 코넬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100번이나 강조하고 싶은 말, We’re just friends. 아, 코넬 얘는 진짜 안 되겠구나. 고쳐서 쓸 수 없겠어. 그렇게 나는 또 코넬을 버렸다. 술 퍼마시고 막 울고 고통받고 방황하고 그래도, 이번에는 안 봐줄 생각이다. 진짜다. 이번에는 진짜 안 봐준다.
4. 자기 해석학의 기원
푸코의 『상당한 위험』을 클리어하고 푸코의 다음 책으로 넘어갔다. 신간인데다가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얇은 두께도 마음에 들었지만, 소제목 <그리스도교와 고백>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두 번째 유인 요소이다. 첫 번째 유인 요소는 당연히 알라딘서재 고인물 쟝쟝님.
중죄를 범한 죄인이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음식, 의복, 성관계 등을 제한하는 삶에 대한 계율을 의미했던 참회(22쪽)는 주로 공개적이고 행위 중심이었는데(23쪽), 기원후 4세기부터 죄인이 영적 지도자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들을, 말을 통해 상세하고 분석하며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한다. 말로 하는 철저한 고백. 푸코는 이러한 고백 행위를 ‘자기 해석학’의 기원(24쪽)으로 보았다.
지금 40쪽까지밖에 읽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도교와 고백>이라는 흥미로운 파트를 읽기 위해 가열차게 전진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녀서 기독교 문화에는 익숙하지만, 천주교의 문화에 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많다. ‘죄의 고백’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기독교와 천주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가톨릭교회는 교리 제1422조에 따라 고해성사를 통해 신부가 죄 용서를 선언하는 순간 천국에서 하느님이 죄를 용서하신다고 정해놓고 있다(네이버 교회용어사전). 신약성경 야고보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라고 쓰여있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 고백으로 ‘죄 사함’을 요청하는 일은 교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는 인간(혹 그가 사제일지라도)이 될 수 없고, 중보자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죄의 고백이 ‘자기 해석’을 넘어 ‘주체 구축’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어떻게 그려질지 흥미진지하다. 그러나, 이 책은 매우 어렵고. 어렵거나 말거나 그렇게 책장을 넘기고 있던 그제 밤, 나는 이런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아, 나에게 푸코를 던져주었던 그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읽고 있다니.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사진 배경으로 푸코의 『말과 사물』이 없었더라면 밤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나는 아마 그에게 전화를 걸었으리라. 내가 이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고 있다니까! 『깊은 강』이 웬 말이여! 왜 당신은 푸코 안 읽고 있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왼쪽 면을 가득 채운 닭다리 너겟 한 접시를 보고 말았으니. 내 마음은 봄날 눈 녹듯 일시에 녹고 말았다. 닭다리 너겟은 최근 나의 최애 독서 친구로서, 22년 상반기 최고의 선택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그러한 선택을 공유하는 친구의 선택을, 나는 존중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묻는다. 나에게 푸코를 추천한 그대여. 그대는 왜 강을 건너려 하는가. 내 앞에 이렇게 도도히 푸코의 강이 흘러가게 해 놓고서. 당신은 왜, 당신은 깊은 강을 건너려 하는가. (혹은 이미 건너갔는가?) 내 앞에 흐르는 이 푸르고 도도한 푸코의 강을, 나더러 도대체. 어떻게 혼자 건너가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