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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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잎이 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서 서로를 볼 수 없는 '상사화'

 

어쩌면 죽음과 삶 역시 이러한 상사화 같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느 한쪽만 존재하게 된다. 한쪽이 오면 한쪽은 물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삶은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죽음은 자신이 볼 수 없다.

 

죽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도대체 죽음 뒤에 어떤 삶이 있을까?

 

그냥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 분명 새로운 삶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죽어보아야만 알 수 있으니 여전히 죽음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어쩌면 그는 근사체험(近死體驗)을 한 사람들을 통해, 또 자신의 근사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라고.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고.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들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나.

 

악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면, ' 저 사람 죽을 때가 되었나,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하면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고 하는 로스 박사의 말은, 많은 과학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죽어가는 사람의 소망이 담겨서 환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그것은 상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죽음은 실제라고 말을 한다.

 

영적 존재는 분명 존재한다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가장 사랑하는 영적 존재가 있고, 그 존재와 죽음의 순간에 함께 하게 된다고, 그 때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로스 박사의 말을 믿으면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이 책에 나오는 용어로 하면 우선 육체라는 고치를 벗고 영혼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일,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적인 변환을 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죽음, 그렇다면 사람들이 굳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묘지나 화장터가 혐오시설이 되는 나라에서는 로스 박사의 이런 책이 반드시 읽혀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문화를 지니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죽음을 그냥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오는데, 이럴 땐 부모의 죽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애도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한다. 그래야만 아이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꼭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냥 행복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로스 박사의 말을 들으면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 나를 심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이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잘 살기 위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지만,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해주지 못한 그 삶에 대해 이렇게라도 근사체험을 통해 들려주는 이유는 바로 지금 잘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한다.

 

읽어볼 만하다. 읽어봐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도. 잘 죽는다는 것, 그것은 잘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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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3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 - 몸과 마음, 물건과 사람, 자신과 마주하는 법
히로세 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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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지천명(知天命).

 

몸이 서서히 늙어감을 느끼는 나이. 사회에서도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을 나이. 자신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분야에서 서서히 밀려갈 나이.

 

우리나라에서 50은 정치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런 것을 경험하는 나이다.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일본 여자 작가가 50이 되어서 느낀 점을 쓴 책이다. 무겁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하긴 가뜩이나 50이 되어 인생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데, 글까지도 무거우면 읽기에도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을 그래프에 비교하곤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위로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 정점을 찍은 다음부터는 내려오는 그런 그래프.

 

정점이 언제일까? 확실한 것은 50이면 이제는 정점을 지나 내려올 때라는 거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20년 남짓 근무를 하고 이제는 퇴직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이고,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독립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렸던 인생에서 이제는 뒤돌아볼 곳이 더 많아진 나이이기도 하다. 속도도 예전처럼 빠르지 않은데, 다만 죽음을 향해 가는 속도만은 점점 빨라지는 그런 나이.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50이 되어 생각나는 바를 글로 썼다. 내용을 읽지 않고 작은 제목들만 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작은 제목을 인용해 보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도 괜찮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아갑시다

각자의 나이에 멋지게 어울리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어떤 일이든 단정부터 짓지 않습니다

변해가는 몸의 상태를 받아들입니다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여전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 50이라는 나이는 더하기보다는 덜어내기가 더 어울리는 나이다. 덜어내기가 어울리기에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변을 바라보면서 조금 느리게 자기 속도에 맞게 살아가는 나이다.

 

어쩌면 이런 덜어내기는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덜어냄으로써 더해가는 나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 여유있게 자신을 즐기며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이, 그것이 바로 50이다.

 

꼭 50이 된 사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들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삶. 그 삶을 즐기며 바람직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천천히 읽으며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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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5 0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똘 2017-06-1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kinye91 2017-06-15 20:27   좋아요 0 | URL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조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거서 2017-06-15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이 정점일까요… 뜬금없이 드는 생각입니다. ^^;;

kinye91 2017-06-15 20:26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사람은 40이 정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60이, 어떤 사람은 70이 정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50정도 되면 정점이거나 정점에서 약간 전이거나 후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고요.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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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특정한 나라의 역사를 연구한 책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이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살피는 책이다.

 

흔히 우리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지혜로운 인간이라고 인간 스스로 붙인 이름인데, 책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특정한 인간 종을 의미하지 않고 지구상에 살아온 인간 전체를 아우르기 위해서 '사피엔스'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런 '사피엔스'들의 역사를 살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지구상에 사피엔스라는 종족이 나타났을 때부터, 이들이 네안데르탈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피고 - 사실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전혀 다른 종이라고 한다. 사피엔스에 의해 네안데르탈인이 축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사실 외에도 과연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성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을 하고 답을 찾고도 있다 - 세계 곳곳으로 퍼져간 사피엔스들의 삶을 살피고 있다.

 

사피엔스들이 역사상으로 세 번의 혁명적 변화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을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으로 분류를 하고 있다.

 

이것은 순서대로 발전을 한 것인데, 인지혁명으로 인해 인간은(이제 사피엔스라는 명칭을 '인간'이라는 명칭으로 쓰겠다)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상상, 즉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데 인간이 인지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인간을 결속시키고 더욱 발전하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국가, 종교, 자본 등은 이런 인지 혁명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한다기 보다는 우리가 허구로 창조한 것들... 이런 바탕 위에 물질적인,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이다.

 

농업혁명으로 인해 모여 살게 되고,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인구가 급속도로 늘게 된다. 이런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다양한 문명이 형성이 되는데, 특정한 문명을 추적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종이 다른 종에 비해서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살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농업혁명에 뒤이어 지구상에서 최상위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 더이상 인간의 경쟁자가 지구상에는 없게 만든 것이 바로 과학혁명이다. 이런 과학혁명으로 인해 인간은 이제 인간 이상의 존재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들과 다양한 학문들을 융합하여 인간의 역사를 살피고 있는데, 이 책의 뒷부분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저자처럼 잘 알지는 못할지라도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인간이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역사는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은 현대인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기껏해야 갈림길에 있다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마찬가지다.

 

우주 역사, 지구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짧지만, 또 현대 인간의 역사는 더욱 짧지만 앞으로 인간이 어떤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추측을 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문제를 꼭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온갖 발전 속에서 과연 인간은 더 행복해졌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을 화학적 요소로 치환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앞으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게 하면 인간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 점을 간과하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의 예언처럼 우리는 괴물만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이미 인간은 인간의 수준을 넘어 지적설계자 노릇을 하려고 하고 있다. 지적설계자로서의 인간은 이제 신의 위치에 오르려 하는 것이다.

 

이 '사피엔스'라는 책의 마지막에서 인간의 발달이 결국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인간이 신이 되는 순간, 과연 인간은 존재하게 될까? 그 이후의 일이 책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호모 데우스"라고...

 

방대한 책이지만 잘 읽힌다. 인간이라는 종의 발달사를 통해 앞으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과연 신의 위치에 오르려는 인간이 어떻게 해야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피엔스'로 계속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무서운 종말일지, 행복한 낙원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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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기술
유시민 지음, 정훈이 그림 / 생각의길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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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이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긴 글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이나 아니면 카카오톡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글로 쓰거나 (분명 말이 아니라 글이다. 이제는 말의 시대가 아닌 글의 시대가 되었다. 이 글에서 유시민이 주장하듯이) 어떤 글에 대해서 댓글을 다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이렇게 모두가 글을 쓰지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은 별로 없다. 자신들의 글쓰기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거나 어떤 글을 쓴다는 일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도 한다. 특히 긴 글을 쓸 때는 더 큰 두려움을 지니고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긴 글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게 된 이유는 입시나 취업에 필요한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써야 합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데서부터 두려움은 시작된다. 왜냐하면 글쓰기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고 결과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 우선주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다. 입시나 취업이나 모두 소수만이 합격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 위주의 글쓰기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리고 글쓰기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런 자기 소개서를 잘 쓰고 싶으면 이 책 4장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읽어 보라. 분명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안 쓰고 살 수는 없는 세상이다. 어떻게든 우리는 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어차피 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잘 쓰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의 글쓰기 기술을 익힐 필요는 있다. 최소한의 글쓰기 기술이다. 이를 이 책 제목 대로 하면 '표현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을 표현하고 살고 자신의 의견을 남에게도 알리고 남들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지니기를 바라니까 말이다. 이를 글로 표현하든 말로 표현하든.

 

여러 책을 낸 유시민이 '표현의 기술'이라고 해서 글쓰기의 기술을 보여주는, 아니 기술이라기보다는 글쓰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쓰면 좀더 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예로 들어 적절한 표현 기술을 알려주고 있다. 꼭 이대로 따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이렇게 썼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그 생각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하든, 따라하지 않든 그것은 읽은 사람 마음이다. 다만 읽다보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없앨 수 있다. 그만큼 친절하고 자세하게 글쓰기 표현 기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자신을 작가라고 불러달라는 유시민의 말처럼, 작가는 읽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글을 쓴다고 하는 그의 말처럼, 읽는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표현의 기술이라는 책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딱딱하고 기계적인 글쓰기 책이 아니라,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글쓰기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책은 유시민 혼자만의 책이 아니다. 만화가 정훈이와 함께 한 책이다. 유시민의 글 중간중간에 정훈이의 만화가 글의 내용과 어울리게 들어 있다. 그 점도 이 책이 지닌 표현의 기술이다.

 

또 뒷부분은 만화가 정훈이의 표현의 기술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만화가가 되었나 하는 점을 중심으로 만화를 그려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의 표현의 기술이다.

 

둘이 함께 또 따로 만들어간 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표현의 기술이라는 제목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마음을, 진심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쓰기는 기교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담을 표현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 표현을 찾아내 그것을 글로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그런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고 진심이다. 이런 진심이 이 책에서는 잘 느껴진다.

 

진심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표현의 기술이니...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참으로 표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른들뿐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자신의 마음을 적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수줍어서 그렇다고 이해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아니다. 서투른 표현, 마음과는 반대로 하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딱 좋다.

 

아니 오해가 아니다. 상대방은 그 표현의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내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게 글을 쓰는 것, 내 마음을 진실되게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쓰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표현의 기술'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명확하게, 글로, 만화로 잘 보여주고 있다. 

 

덧글

 

의문 : 48쪽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에서 두 가지 도덕법을 밝혔는데, 다들 아시는 정언명령 1번과 2번입니다. 146쪽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에 있는 정언명령 1번입니다.ㅡ 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정언명령, 가언명령은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가 주장한 내용이다. 뭐 실천이성비판이 순수이성비판의 부록 쯤 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내가 갖고 있는 책에 작은 제목으로 -부(附). 순수이성비판-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래도 보통은 정언명령은 <실천이성비판>에서 나온다고 하니까 이 점은 고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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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연가 - 그때 그 시절... 노래와 함께 걷는 서울의 추억 서울의 풍경들
이영미 지음 / 예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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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이 쓴 "서울은 깊다"라는 책이 자꾸 생각났다. 서울이 얼마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인지를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여준 책이 "서울은 깊다"라면, 이 책은 대중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답게 노래로 서울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역사, 문화, 삶을 노래를 통해서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 한 장소를 이루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장소에는 사람과 시간과 온갖 유형, 무형의 것들이 모두 함께 하고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든 시간 순서를 두고 존재하든 한 장소에 존재함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이런 시간성과 다양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은 그 장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서울토박이들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강북에서 태어났고 자랐지만, 지금은 지방에 살고 있듯이, 강남에서 태어나 강남에서 자라고 강남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물론 존재하겠지만, 이들에게는 왠지 '토박이'란 말을 붙이기가 꺼려진다.

 

토박이란 말에는 그 말에 따르는 어떤 역사, 깊이, 문화, 사람들이 함께 하기 때문인데... 어쩌면 '토박이'란 말에는 촌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도 서울은 고향이다. 빌딩 숲과 자동차 흐름과 콘크리트만이 이 주된 기억으로 남을지라도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곳은 고향이다. 비록 '토박이'란 말을 잘 쓰지 않게 되더라도.

 

'토박이'들이 사라져가면 장소의 깊이도 더 깊어지지 않는다. 그 깊이에 머물다가 자꾸 채워져 깊이가 사라지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드는 강남이다.

 

이런 반면에 강북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같은 서울임에도 '토박이'란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미 역시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1950-60년대쯤에 강북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아파트나 빌딩숲은 친숙한 공간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골목, 흙, 개울, 한옥이 친숙한 공간이었다. 이 공간들이 지금의 강남처럼 변해가는 과정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서울토박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지도 모른다. '

 

강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시골스러움, 촌스러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과거의 일에 불과하고.

 

이 책에는 일제강점기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서울을 노래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서울이 어떻게 노래에 등장했고, 어떻게 변모해갔는지를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놀라움의 대상이었던 서울이, 외국 취향의 욕구를 대변했던 서울이, 반대로 그것을 성취하자 이제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전원생활을 꿈꾸는 서울생활로 바뀌어가더니, 어쩔 수 없는 서울의 모습, 서울 생활의 환희를 보여주는 노래들이 나오다가, 서울의 복잡한, 살기 어려운 모습까지도 보여주는 그런 노래의 변천사.

 

대중가요(민중가요도 가끔은 나오지만 대중가요에서 다룰 수 없었던 내용을 이야기할 때만 나온다)를 통해 사람들의 의식과 욕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일종의 미시사라고 할 수 있는데, 대중가요를 중심으로 서울의 깊이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가 있다.

 

여기에 시대순으로 서울을 노래하는 노래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서울의 변화와 사람들의 생활양식의 변화, 그리고 노래에 나타나는 의식의 변화를 함께 살펴볼 수 있어서 좋다.

 

역시 서울은 깊다. 건축적으로 서울을 살펴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살펴도 그렇고, 이렇게 노래로 서울을 살펴도 그렇다. 이 깊이가 서울을 좀더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들었으면 더 좋겠는데... 서울의 깊이를 알면 함부로 깊이를 없애는 정책을 펴지는 않을테니, 그런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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