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e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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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구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구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이 모든 것을 구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면?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돈이 없으면 모든 것이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니 넘침이 곧 행복은 아니다. 이 넘침에는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조건.


자,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는, 넘쳐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그 질문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 시대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이 질문을 뒤집으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가 된다.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 돈이 없어도 구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


이 책의 제목은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다. 책 뒷부분으로 가면 사랑과 아끼다를 함께 쓰고 있다. 사랑 애(愛) 자에는 아낀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284쪽). 그렇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아껴주겠다는 말을 하니, 사랑과 아낀다는 말은 함께 쓰이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 공기의 사랑'이라는 앞 제목에는 이미 아낀다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이다. 한 공기라는 말이 사랑을 꾸며주는 데서 찾을 수가 있다. 사랑을 주는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한 공기'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아끼는 행위이다. 상대가 부족하지도 않게 하고, 또 물리지도 않게 하는 행위. '한 공기'에 담겨 있는 사랑이다.


뒷제목인 '아낌의 인문학'은 이 용어를 빌리면 '사랑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면 인문학은 당연히 사랑이어야 하고, 사랑은 아낌이니, 아낌의 인문학이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인문학이 지닌 효용에 대해서 잘 들어오지 않는 사람을 위해 우리가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한 공기의 사랑'을 앞에 둔 것이다. 그렇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그런 역할.


책은 총 8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강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번째 부분은 김선우 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시는 그 자체로 인문학이다. 하여 이 책에서는 김선우의 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고로 김선우 시집 '녹턴'에서 시를 인용했다고 한다.


시로 시작한 강의는 두번째 부분에서 부처(불교)로 넘어간다. 그렇다고 불경 강의냐 하면 그것이 아니다. 부처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이 삶을 행복하게, 사랑이 찬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손가락일 뿐이다. 그러니 부처에 대한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부처의 이야기가 가리키는, 또 가르치는 쪽을 보아야 한다. 따라서 부처와 더불어 동양의 사상가들, 서양의 여러 철학자들도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자연스럽게 세번째 부분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한다. 이론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앎과 실천이 함께 하는 철학자의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렇게 세 부분이 합쳐져 한 강의를 이룬다.  


강의는 8강으로 나뉘어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다. 우리 사랑하는 삶을 살자고. 서로 아끼면서 살자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실천하자고.


한 강 한 강 읽어나가면서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니.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모든 존재를 아껴야 한다는 것. 모든 존재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내가 아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고, 돈이 없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아껴줄 때 세상은 더 살 만해질 것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이 책은 우리 삶에 한 공기의 밥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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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내 인생의 사서四書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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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시끄럽다. 세상엔 내가 속해 있기도 하지만, 내 외부로 볼 수도 있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주변이 가만 놓아주지 않는다. 시끄러운 소리들이,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자꾸만 귀를 통해, 눈을 통해 들어온다. 외부가 내 내부에 들어와 나를 흔들어 놓는다. 어라,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내 삶이 왜 이렇게 밖으로 인해 흔들려야 하지?


내가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중용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면 안 되지만 중용에서 벗어난 내 마음이기에 흔들리는 것이란 생각을 했다.


중용에서 벗어난 마음이란 무얼까? 어느 한쪽에 치우친 마음일까? 자꾸만 재단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려는 마음. 반대로 무조건 받아들이고 옹호하려는 마음. 그렇기에 내 생각과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들이 내 마음을 흔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혼란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요즘은. 마음을 수양하고 싶은 마음에 눈에 확 들어오는 책이 있었느니, 그 책이 바로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이다. 정말 중용이 필요한 시간이다.


하여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의 구성이 중용 강독이 아니니, 중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저자가 생각하는 주제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으니, 중용 책을 찾아 펼쳐놓고 함께 읽기 시작한다. 


읽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 그건 중용에 어긋나는 일이다. 제대로 알고 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중용은 이것과 저것을 합쳐서 딱 중간이 아니다. 옮음을 알고 옮음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용이다.


결국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로 나아가야 한다. 이 책 말미에서 중용은 천명(天命)에서 시작해서 지천(知天)으로 끝난다고 했다. 결국 주어진 것에서 찾는 것으로 앎에서 행동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중용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외부로 눈을 돌리기보다 내부를 보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남들보다 100배 이상 노력을 해야만 하는 나같은 사람에겐 아직도 중용에 도달하기는 요원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중용에서도 나오지 않던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중용에 도달하는 길 아니겠는가. 그러니 남들이 10배 노력하면 나는 천배를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중심을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언제까지 외부에 휘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마음을 품게 해주고 있으니, 읽으면서 편안해진 마음이 지속되려면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명심하고.


네 글자 또는 여러 글자로 전체가 60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강을 정리하고 있다. 그 정리된 말들이 모두 좋아 어느 것을 고르기가 힘든데, 에라 아무 쪽이나 펼쳐 그 말을 적어보자 하고 펼쳤더니. 나오는 말이 28강 용기라는 장에 나오는 지치근용(知恥近勇)이다.


햐, 이거 딱 맞는 말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 아니 가까운 것이 아니라 용기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몰라 얼마나 더 많은 부끄러운 일들을 하는지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자체는 부끄러운 행동을 반성하고 고친다는 얘기니까, 천명을 인식하고 도를 행하려 노력한다는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윤동주 시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시구도 생각나고, 자고로 성인은 신독(愼獨)이라고 해서 홀로 있어도 부끄럽지 않게 행동한다고 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도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고, 그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는 더 말 안해도 알 수 있으니... 


이렇듯 한 강 한 강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흔들리는 마음을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 그러니 이 책 꼭 오십이 아니어도 좋다. 중용은 우리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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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1-01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십시오~~~~

kinye91 2021-01-02 01: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향연.파이돈 니코마코스 윤리학 - 세계의사상 2
플라톤 외 / 을유문화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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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성애에 관한 논란이 많고, 그에 대한 반대가 극심한 집단이 주로 기독교 단체던데, 가끔 다른 글에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했다는 말이 인용되곤 한다.

 

본래 인간은 남성-남성(태양), 여성-여성(지구), 남성-여성(달)의 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 이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처음에는 성이 세 가지 있었지요. 지금은 남성과 여성의 두 가지 성이 있지만, 이 둘을 다 가지고 있는 제 3의 성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명칭만큼은 아직 남아 있지요. 즉 옛날에는 남여성, 즉 남성과 여성을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실물로도 있었고, 명칭으로도 있었습니다. ... 성에 세 가지가 있고 사람의 모양이 이러했던 까닭은, 남성이란 것이 맨 처음에 태양에서 태어났고, 여성은 지구에서, 남성과 여성을 다 가지고 있던 남여성은 달에서 태어난 때문이지요. ... 저들은 무서운 힘과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의 야심은 대단했습니다. 저들은 신들을 공격했습니다. (56쪽)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남성-남성이었던 존재는 남성을 원하고, 여성-여성이었던 존재는 여성을 원하고, 남여성이었던 존재는 서로 다른 성을 원한다고, 동성애는 자연스런 인간의 본성이라고. 플라톤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한데,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말이란 의미는 플라톤의 주장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은 사랑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한 한 발판으로 이 주장을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당시에 동성애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논거가 동성애 찬성의 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더 사랑의 본질에 가깝다.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다는데 있다. 뒤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유혹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육체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데 핵심이 있다. 그는 이미 육체적 사랑을 넘어선 것이다.

 

[향연]은 육체와 영혼, 이분법을 부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랑에는 육체적 사랑이 있고 정신적 사랑이 있다고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배웠다. 에로스와 아가페라고 배웠는데,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이 책은 하게 한다.

 

육체와 영혼의 사랑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육체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고,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다. 물론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에 육체는 사라질 것,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은 영원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영원함은 곧 생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생식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는 행위는 사랑에 해당된다. 영원함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의 영원함만 추구하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라고 한다. 플라톤은

 

심령 면에서 생식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건 온갖 예지와 온갖 덕이에요. 모든 창조적 시인들, 그리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듣는 미술가와 공예가는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예지는, 나라와 가정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에 관계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절제와 정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신적인 성격이 있고 어렸을 적부터 그 영혼이 이런 덕을 임신하고 있는 사람도, 장성하면 자식을 낳고 생식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속에 자기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맵니다. (88-89쪽)

 

이런 덕에 대한 영원함으로 오면 그들의 사랑에는 육체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냥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고 함께 하면서 덕을, 예지를 영원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플라톤이 생각한. 여기에 남성은 여성만을, 여성은 남성만을 이라는 생각은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다. 이 사랑에 관한 설명을 소크라테스가 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디오티마'라는 여인을 통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덕의 영원성에 육체적 차이를 생각하는 것은 현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혼이 통하고 그 통함으로 영원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생식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적 생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사랑에서 굳이 성별을 문제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동반자가 되지 못하는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와 영적인 교감을 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 관계를 맺든 맺지 않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교감이고, 영혼의 생식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일원론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하여간, 동성애를 육체에만 국한시켜서 논의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또 플라톤을 인용하면서 본래 한 몸이었던 존재가 둘로 나뉘었기 때문에 서로를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것도 한 면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을 몸과 정신, 둘로 나누어 판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볼 수 없음을 [향연]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 부터 출발하여 저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둘에서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활동과 법률에로 나아가고, 아름다운 활동에서 아름다운 것을을 배우는 것에로 나아가고, 그 배움의 끝에 이르러 진실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고,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인생은 여기에 이르러, 그리고 여기에서만, ..., 그가 어디에서 그의 삶을 살아가든 저 아름다움 자체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89-90쪽)

 

사랑이란 무엇인가, 에로스란 무엇인가에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매개자인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렇다면 사랑은 인간을 유한한 존재에서 무한한 존재로 이끌어간다는 것. 그 단계에는 여러 단계가 있지만, 그것들을 거치며 아름다움 자체에 이르게 된다는 것. 이분법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또 아름다움은 성으로만 구분되지도 않는다. 이 [향연]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반대 논거를 제기하는 글로 자주 인용되지만, [향연]은 그것을 넘어 과연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책이다. 그 중간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종교는... 사랑이든, 자비든,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가 없다. 그 무한한 사랑을 알기 위해 나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사랑은 신의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한 단계일 뿐이다. 그렇게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향연]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여기에 관해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내 멋대로 읽은 플라톤의 [향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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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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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는 표현, 그것이 바로 역설이다. 문법에 맞지 않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잘 표현한 말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 지닌 역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특히 선(禪)에서 하는 말들은 대부분은 역설이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말이 되어야만 한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이, 삶이 되어야 한다.

 

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로 해탈했다고 해서 해탈했는가? 아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집착에 불과하다. 언어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를 넘어서는 것, 언어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해탈일 수 있다.

 

'무문관'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이다. 관문이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경계다. 경계에 있는 통로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문, 그것이 관문일 수 있다.

 

모든 종교에는 이런 관문이 있다. 대부분 초월종교에서는(강신주는 이 책에서 기독교를 초월종교라고 했다.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 신이 의도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 초월종교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인간이 지닌 의지로 천국에 이르는 길은 없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관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들은 영세든, 세례든 어떤 격식을 통해 관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문이 없다. 문이 없어서 '무문(無門)'이다. 특정한 문이 없다는 말을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문은 도처에 있으니까. 모든 것이 다 문이니까. 즉, 특정한 문이 없다는 말이지, 정말로 문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불교에서도 욕망의 세계와 해탈의 세계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두 세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욕망의 세계이고, 해탈의 세계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해탈의 세계로, 강신주의 말로 하면 주인이 되는 삶, 자유로운 삶을 사는 세계로 가는 문이 어디에 있는가 찾을 필요가 없다. 문은 내 곁에 있다. 아니 나에게도 있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문이 있다. 다 문이다. 다 문이기 때문에 문이 없다. 그래서 무문(無門)이다.

 

모든 것이 문이라는 말은 내가 문을 찾으려고 하면 문을 찾을 수 있고, 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느냐, 노예로 사느냐가 바로 문을 찾느냐 찾지 않느냐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냥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면(이것이 노예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애써 문을 찾을 필요가 없다. 내 삶을 내가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욕망대로 살아가면, 그 사람에게는 문이 필요없다. 문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여기와 저기라는 구분을 하지 않는 일차원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도처에서 문을 보는 사람은 여기에 살아도 모든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욕망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미 욕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슨 도인인양 하지 않는다

 

도인인양 하는 행동 자체가 문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을 넘어섰다가 다시 그 문으로 돌아온 사람, 사람들에게 문을 알려주려는 사람, 그 사람은 도인인양 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깨우칠 수 있게 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마치 원효가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살았듯이.

 

이 책은 무문 스님이 쓴 '무문관'을 강신주가 자기 나름대로 배치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무문관'이다. '화두'에 대한 이야기다.

 

단지 불교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서양철학과 불교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불교가 초월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문을 넘어서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우리가 자유로운 주인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편을 읽으며 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 있는 문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책을 읽고 그냥 언어에 매이면 거기서 끝이다. 문을 보여주었는데, 문만 보고 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에 대해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읽으면서 생각하고, 자기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을. 부처가 했다는 이 말 하나면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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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8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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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4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 고전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유명해서 그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래서 내용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 그것이 바로 고전이라는 말이리라.

 

논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조선을 통해서 성리학 중심의 나라였고, 유교는 우리나라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논어는 필독서였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면 왜? 그런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상을 읽는다는 거지 하는 의아한 눈길을 받을 수가 있다. 또한 유교는 우리나라를 문약에 빠뜨린 사상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으니...

 

내게도 마찬가지다. 논어를 읽어본 적은 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 번역본으로도 읽었고, 한문으로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해석도 하지 못했지만 읽으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몇몇 구절은 머리 속에 박혀 나가지도 않고.

 

그 유명한 논어의 첫구절은 학창시절에 한문 시간에 배우고 외웠으니...더 말할 나위도 없고. 하지만 논어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게 논어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이라는 색안경을 낀 눈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루한, 자기 사상에 갇혀 다른 사상을 전혀 용납하지 못한, 사상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죽이는 그런 사상. 그렇게 유교는 편협한 사상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그런 사상의 출발점이 논어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녹색평론에 연재된 배병삼의 글을 읽으며 유교에 대해, 아니 공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조선시대 실학이 주자의 눈으로 본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저술을 통해 본 공자를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배병삼은 공자의 말로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논어를 정리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논어가 총 20편인데, 그 20편을 한 편 한 편 분석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공자시대의 논리만 따라간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배병삼의 눈으로 본 공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배병삼의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눈으로 논어를 읽는 것이다.

 

남의 말만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논어의 첫번째 구절과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이와 더불어 논어를 함께 토론할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다. 역시 논어의 첫번째 장 두번째 구절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그렇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전을 통해서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다. 고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도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는 깨달았다.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 공자는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제자가 물어보았을 때 그 제자의 수준에 맞는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질문이 없는 학교... 지금의 학교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식 전수만이 학교의 목표가 아니다. 학교는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다. 그렇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육이 살 수 있다.

 

질문이 없는 학교에서는 결국, 공자의 제자 중에 공자의 길을 배반한 염유와 같은 기술자들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런 전문기술자로만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군자가 되기를, 자신을 바로 세워서 남도 바로 세우는, 나와 남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남을 통해서 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관계가 중시되는 이 사회에서 공자의 이 논어는 마냥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디딤돌로 해서 논어를 다시 읽는 그런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겠다. 다시 읽는 논어는 예전의 논어가 아니라 새로운 현대에 맞는 고전이 논어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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