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헌책방에 간다. 알라딘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을 중고서점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중고서점이라는 말보다는 헌책방이라는 말이 더 정감있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은, 누군가가 한번은 읽은, 그런 사람을 거쳐서 다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결코 읽기를 마치지 않는, 계속 돌고돌아 읽어야 하는 그런 책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곳.


  '헌'이라는 말이 낡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이라는 뜻을,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헌책방에 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도 빨리 절판이 되고 품절이 되는 이 시대에, 조금 오래 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헌책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책방에서 시집이 꽂혀있는 서가를 훑어보다가 민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어, 민영 시인에게 이런 시집이 있었나? 아니, 한길사에서 시집을 냈다고? 하는 의문. 반가움. 고민도 없이 손에 들었다. 


시들이 난해하지 않다. 시인이 50대 후반 들어 쓴 시들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과거 이야기도 실려 있고, 인디언들을 보고 난 마음을 담은 시들도 있고,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시들도 있다.


그 중에 제목이 된 시 '바람 부는 날'을 본다.


바람 부는 날


나무에 

물 오르는 것 보며

꽃 핀다

꽃 핀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피고,


가지에 

바람 부는 것 보며

꽃 진다

꽃 진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졌네.


소용돌이치는 탁류의 세월이여!


이마 위에 흩어진

서리 묻은 머리카락 걷어올리며

걷어올리며 애태우는

이 새벽,


꽃피는 것 애달파라

꽃지는 것 애달파라!


민영, 바람 부는 날. 한길사. 1991년. 11-12쪽



우리나라 현대사 탁류에 비교할 수 있다. 정말 거칠게 빠르게 험하게 흘러온 역사. 그 탁류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온 사람들.


탁류를 맑은 물로 바꾸어간 사람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월은 흘렸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 피고 지고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피고지고의 반복으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지내온 세월에, 피었다 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달플 수밖에 없다. 바람 부는 가을 날 민영 시집을 읽으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한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런 탁류의 세월을 견뎌왔던가. 아니, 이젠 탁류의 세월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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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


  그릇을 굽는 도구. 실용적인 그릇부터, 예술 작품이 되는 도자기까지.


  뜨거운 가마 속에서 흙은 작품이 되어 나온다. 우리 삶에 다가오게 된다.


  가마는 그래서 미래를 품고 있는 상자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 상자에는 이미 완성된 것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에게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보낸 상자니까. 그것을 열면 온갖 것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는 안 좋은 것들도 꽤 많았다고.


하지만 가마는 아니다. 가마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들어간다. 미래를 품고 있는 것들이 가마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만들고 나면 그때서야 가마 밖으로 나온다. 완성되지 못할 것들은 가마 속에서 깨져버리거나, 나오자마자 폐기되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와는 다르다. 가마는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들을 내보낸다.


이러한 가마를 우리 인생이라고 하자. 인생살이를 시로 소설로 수필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말로 표현을 한다. 우리의 삶이 가마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흙을 가마에 넣어 무언가를 만들어내 밖으로 내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가마는 아주 높은 열로 빠른 시간 안에 흙을 구워 내보내지만, 어떤 가마는 약한 열로 오랫동안 흙을 구워 내보낸다.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가마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특성에 따라, 또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이 시집은 시인이 삶 속에서 굽고 굽고 또 구워서 드디어 내보내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 속에 넣고 이리저리 만지고 또 만지고, 열을 가하고 또 가하고, 드디어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꺼내놓은 시들.


그래서 [60년의 가마를 열다]는 시인이 살아온 생애를 글로 풀어내다라고 할 수 있다. 시집의 첫시가 '60년의 가마'다.


 60년의 가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조심스레 미루어 추측해 본다

어느 순간 이 세상의 부름을 받았고

그로부터 태동이 시작되었을 게다

세상의 시계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인간 면모를 갖추는 연습했을 거다


이것은 나와 아주 가까운 그 누구도

내게 눈치로도 알려준 적 없어

내가 여태껏 짐작해낸 것뿐이다

어떤 그릇이 될 거라는 그림도 없이

처음엔 순수한 채 투박한 토기처럼

점차 빛나는 도자기를 빚어내려 했었다


36.7 인간 세상의 가마에서

60년 시간 담금질로 구워낸 그릇들

설렘을 안고 맞선을 보이려 합니다


조이섭, 60년의 가마를 열다. 그림과 책. 2021년. 16쪽.



이 시집의 서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드디어 가마 속에서 꺼내어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신이 겪은 일들, 감정들을 시로 만들어 가마 속에서 꺼낸다.


시집을 통해 우리는 가마 속에서 나온 시인의 삶을, 시인의 그릇들을 만나게 된다. 차분히 하나의 인생이 가마 속에서 어떻게 빚어지고 달구어졌는지를 이 시집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내 인생을 가마 속에서 어떻게 굽고 있는지 생각한다. 나 역시 가마 속에 삶이라는 흙을 넣고 지금 굽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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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특이하다. 년도가 나왔다. 년도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1914년이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봐도 왜 1914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 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뭐,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지는 말자. 그냥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첫장을 넘기면서 만난 시. 그냥 충격이었다. 이 시 때문에 다시 1914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1914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년 뒤 2014년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숱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음은 늘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갔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첫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시의 제목은 '1914년 4월 16일'이다. 


 1914년 4월 16일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김행숙, 1914년. 한국문학. 2019년. 초판 2쇄. 9쪽.


태어난 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 뒤, 탄생이 아닌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토록 처연한 슬픔이라니...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한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있었을 터.


친구들이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이라는 것은 용케 죽음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해방이 된 다음에 겪게 되는 4.3, 전쟁, 4.19,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자 운동, 고문 등등.


이런 죽음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떠나온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죽음들을 이제 21세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시 만난 죽음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슬픔. 이런 죽음들.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죽음 앞에서, 화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2014년 4월 16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죽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죽음들에 떠밀렸다.


이젠 더이상 그러한 죽음이 없도록... 진정으로 그런 사회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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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특히 들을 귀, 듣는 귀. 정말 중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지 않은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 소리들, 또 듣고 싶은데 들리지 않는 말들, 소리들.


  귀가 막혔나라는 말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 귀를 열어라는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은 곧 남을 잘 이해하라는 말.


  이해하라는 말은 포용하라는 말. 그와 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라 밀어내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말.


이렇게 중요한 귀.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귀.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이러한 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시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된 이 시 말고, 귀에 대해서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라는 시다.


손바닥에 귀가 있을 리가!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죽어갈 때 그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상하게도 그 화초가 싱싱하게 살아난 경험. 어떤 식물을 갖다 주어도, 그 집에 볕이, 빛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화초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왜 그럴까?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었구나, 식물들의 말을 들어줄 귀가 있었기에,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의 전화'를 통해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다는 말은, 식물들이나 다른 존재들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그런 마음을,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마음도 몸도 편해진 상태를 달리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 ...... / 검은 손바닥 그 한 많은 귀에 대고 / 제 말들을 마음껏 하면 / 그 말을 들은 천 개의 귀가 / 그것들의 아픔에 / 가만 가만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중에서/ 44쪽)


이 시 구절에서 그러한 마음이 다 표현되고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어머니의 손이 깨끗한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이다. 그것은 '바닥'이란 시를 보면 왜 검은 손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 ...... /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 ......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바닥' 중에서. 40쪽)


바다와 뻘(갯벌), 온갖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것들을 다른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바꾸어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설에서 한 말처럼, 바닥을 바다와 뻘과 더불어 인생의 바닥이라고 쓰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어머니는 다른 존재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했던 것.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귀'였던 것.


그러면 '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자. 그들의 귀는 눈이다. 눈으로 그들은 듣는다. 그러니 신체의 특정한 기관을 귀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는 수많은 귀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듣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중요한데,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존재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을 껴안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렇게 '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왜 시인은 귀가 서럽다고 했을까? 자신에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던, 자신이 듣고자 노력했던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 그러니 귀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그리운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더 작은 소리,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 초판 2쇄. 67쪽.


이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꽤 있다. 읽으면서 찡한 감동을 받게 되는 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에 고스란히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시들도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몇몇 시 제목을 보면 '오래된 편지, 동낭치 부자, 아름다운 거짓말, 아름다운 위반' 등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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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25-09-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대흠의 시 중에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라고 시작하는 동그라미 라는 시를 좋아하는데요 ㅎ 옹가강가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처럼 참 동글동글하게 순하게 귀를 열고 살고 싶기도 합니다 ^^ 일생을 흙 속에서 산, ​ ㅇ 을 떠받친 어머니...

kinye91 2025-09-06 16:15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을 순하게 하는 시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했어요. icaru님의 글을 보고 ‘동그라미‘를 비롯해, 이대흠 시인의 다른 시들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끼리는 사는 곳이 달라도, 나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나 보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시집을 읽으며 우리나라 시인인 나희덕이 쓴 최근 시집 [시와 물질]이 떠올랐으니.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물론 글에 관한 많은 책을 내기도 했지만, 주로 애트우드의 소설을 읽었는데, 시도 썼다니, 좀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애트우드가 시를 먼저 쓰기 시작했다는 것. 꾸준히 시집을 냈다고 해서 열다섯 권이 넘는 시간을 출간했다고 하니, 어느 한쪽으로 애트우드를 규정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시나 소설 도는 수필의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고 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나 할까.


애트우드는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라는 것은 인간 존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지요. 삶, 죽음, 회복, 변화를. 공정함과 불공정함, 불평등과 드물게 평등을. 각양각색의 세계와 기후와 시간을. 슬픔과 기쁨을.' ('독자들에게'에서. 7쪽)


여기서 '시'를 문학(예술)'로 바꿔도 될 것이다. 그러니 작가들이 어느 한 분야에서만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도 시와 소설을 모두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애트우드가 시집에서 한 말은 소설에서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인데, 문제는 시가 독자에게 도착하는데 늦을 수 있다는 것이다. '늦은 시'(13-14쪽)에서 시인은 '시라는 건 십중팔구 / 대단히 늦기 마련이다,'('늦은 시' 중에서)라 하는데, 그러면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늦었다, 너무 늦었다, / 춤을 추기에는 대단히 늦어버렸다. / 그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라. / 빛을 더 밝혀라. 계속 불러라. / 노래를, 영원히.'('늦은 시' 끝 부분)라는 표현을 통해 포기하면 안 된다 하고 있다. 이것은 시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애트우드가 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누군가의 말처럼 브레이크가 없는 세상이다. 멈춤을 모르는 사회, 성장이 아니면 망한다고 생각하는 세상.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 성장을 외치는 사회. 성장하기 위해서는 온갖 물질들을 이 지구에 토해내야 하는 세계. 그런 세계다.


이런 세계가 멈추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까? 하여 시인은 제발 멈추라고, 힘들지만 멈춤을 알아야 한다고 시 '플라스틱기 모음곡'(123쪽-136쪽) 중에 '6.마법사의 견습생'(129-130쪽)이라는 시에서 '마법사의 견습생 / 그것도 같은 이야기. '나아가기'는 쉽다, / 진짜 어려운 건 '멈추기' / 처음에는 아무도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고 나면 '기다리기'는 너무 늦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시가 늦을 수 있지만,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시는 '인간 존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떨까? 그런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미래를 바꿔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학(예술)이 하는 역할 아니겠는가. 최근에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아이들아'(139-140쪽)라는 시에서 시인은 그런 세상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표현하고 있다. 미래 세대들이 그런 세상에 살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무슨 권리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아, 너희는 새가 없는 세상에서 자라게 될까? / 귀뚜라미가 있을까, 너희들이 사는 곳에? / 과꽃이 있을까? / 적어도, 조개는 있겠지. / 조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 ...... / 아이들아, 너희는 얼음 없는 세상에서 자라게 될까? / 쥐도 없고, 곰팡이도 없을까? // 아이들아, 너희는 자라기나 할까?'('아이들아'에서)


정말, 이런 미래를 물려주면 안 된다. 멈춤을 아는 지혜, 그것을 우리 조상들은 지학(止學)이라고 했다.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 아닐까. 시인은 나이로 보면 저물어가는 때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릴케의 말인 '시는 우리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과거이다'(84쪽)를 인용한 시 '좀비'(84-86쪽)의 내용과는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겠지만, 애트우드의 이 시는 '좀비'가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과거, 우리의 현재를 만들고 또 미래를 만들어갈 버려서는 안 될 것들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는 '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애트우드의 시가 바로 그렇다.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겠다는, 계속 우리 곁에 머물면서 생각하게 만들겠다는 그런 시. 


애트우드의 시집을 읽으면서 소설도 생각하게 됐으니, 다만 책의 분량을 고려할 수밖에 없겠지만, 영어 원문이 실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면 300쪽이 훨씬 넘어 문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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