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문장으로 이번 호를 시작한다. 이번 호에서는 민주주의 특집이다. 도대체 민주주의가 무얼까?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면 제대로 답변을 못하게 된다.


  그냥 막연하게 민주주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치열하게 또 치밀하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또는 형식적 평등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선거 때가 되면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는 행위를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려운 문제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에도 너무도 다양한 편차가 있다. 극우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극좌에서 주장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중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민주주의, 중도라고 해도 다시 중도 좌파와 우파가 주장하는 민주주의에도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나 싶다. 특히 형식적 또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말에는 본질은 쏙 빼버려도 형식만 갖추면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깃들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게 된다.


수차례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형식적 민주주의는 달성했다고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폭과 깊이에서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가?


민주주의의 정의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뜻을 백날 정의해도 실천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아닌가. 


이번 호에서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라는 좌담에서는 그래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다. 이런 논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다룬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 서로 상충되는, 그래서 서로 보충해야 하는 글들도 있다. 즉, 비례대표 연동제와 추첨민주주의... 언뜻 보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비례대표제는 대의제를 대표하는 정치 체제이고, 추첨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비례대표제가 그나마 제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위성정당 논란이 있듯이 비례대표제가 왜곡되어 실현되었다. 그러니 비례대표제로 가자는 주장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니콜라스 코코마가 쓴 '추첨제 민주주의의 귀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주의자들은 현재의 정치제도의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고, 또 단지 정치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것을 꿈꾼다. 그럼에도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그들의 도구는 여전히 과두제 방식(선거, 정당, 정치인)이다. (79쪽)


비례대표제도 문제가 많은데,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도입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대의제를 택해서 선거날 투표 한 번으로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이 사회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와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전문적인 집단(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 교육 수준으로는 대졸 이상, 사회에서 통용되는 직업 종류에서 중간 이상 등등)에게 넘겨주고 마는 현상이니...


정치적, 경제적 사안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되, 정책 입안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현실. 그러므로 기껏 정책에 참여하는 길은 시위를 통한 압력 밖에 없다.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그러한 방법으로 제도권 밖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지금 정치권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입법 과정을 보라. 그리고 정치권에서 벌이는 정책들을 보라. 여기에 민중의 참여가 어디에 있는지...


그러니 많은 부분에서 민주주의에 어긋난 결정들이 나와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겪어도 정부에서 주도하는 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고, 이 사태로 인한 사회의 변화에 어떠한 참여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기후위기와 민주주의(박승옥), 기술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이광석), 자기절제와 민주주의(야보르 타린스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가(야니스 바루파키스) 등의 논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정의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있는가?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류세를 극복할 수 있을까(인류세에 인간을 다시 생각하며-노면 위즈바)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교육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학습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정현이)'은 생각해 볼 만하다. 여기에 다른 논의들도 민주주의가 우리의 삶에 필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우리 사회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난제들, 소수의 전문가들이 해결할 수 없다. 또 그들에게만 해결을 맡겨서도 안된다. 민주주의...바로 주권자들의 참여로 실현할 수 있다. 좀 더디더라도 그것이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라는 인식을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참여민주주의가 가능한 분야에서부터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번 호는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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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1-16 0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민주주의.. 진짜 답변하기 어렵네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내 맘대로 되야해!‘가 아닌지.. 정말 교육이 중요한데.. 하.. 답답한 현실입니다.

kinye91 2021-01-16 09:26   좋아요 0 | URL
답답하죠. 내 맘대로 해도 돼, 내 뜻대로 되어야 해 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데, 자유보다는 자율이라는, 절제와 양보에 대한 생각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는데요.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해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백가쟁명이잖아요. 그래도 교육에서 민주주의는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교육이 중요하고, 절대로 교육에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202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었다. 최근 시들의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에 거의 의무적으로 읽기는 하는데... 심사위원들이 호평을 하는 심사평을 읽으면서 참, 나와 거리가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긴 심사위원들은 시의 형식이나 실험 등도 고려하면서 시의 다면성과 완결성을 판단하겠지만, 나는 내 마음에 와닿느냐 닿지 않느냐로 판단을 하니, 그들의 판단과 내 판단이 일치할 리는 없다.


  일치하지 않더라도 공통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번 수상시집에 선정된 시들은 대체로 길다. 길어서 한 쪽으로 끝나는 시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두 쪽, 세 쪽 넘어가는 시들이 많다. 예전 같으면 단편서사시라고 했겠다. 장시라고 하거나. 도대체 사람들이 시를 읽어도 외워서 즐길 수가 없다.


아무 곳에서나 시를 읊조리는 문화를 이루려면 시가 좀 짧아야 하지 않나. 무슨 조선시대처럼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는 것도, 판소리를 외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시가 길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 수상시집에서 유희경의 '교양 있는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교양 있는 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쓰이는 말인데, 가끔은 비꼬는 말로도 쓰일 때가 있다. 이 시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내게 한껏 기대를 주지만,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고 계속 나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교양 있는 사람, 우리가 참 많이 기대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다가 윤동주 시 '팔복'이 생각났다.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나'는 팔복에 나오는 슬퍼하는 사람이지 않나 하는 생각.


교양 있는 사람


  교양 있는 사람은 노크하며 묻는다 똑똑 계십니까 교양 있는 사람이여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이 없군요 당신을 위해 던져버렸으니까요 그것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선한 이마를 훔친다 경치가 훌륭하군요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다린다 어서 그가 말해주기를 한 층 한 층 올라설 때마다 떠올렸던 영광된 기억과 희망 찬 미래의 이야기들을 거기서 얻어낸 빛나는 영감들 그리고 그가 낚아챈 상념의 거센 발버둥과 울음소리에 대해서도


  몹시 피곤하군요 그는 졸린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고 그러면 교양 있는 사람은 자리에 앉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매번 반복되지만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내가 기다리는 교양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내가 기다리는 말을 해주리라는 사실을


202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9년. 15쪽. 유희경, '교양 있는 사람' 전문


어떤 면에서 윤동주 시가 떠올랐을까. '매번 반복되지만'이라는 시구에서였을 것이다. 윤동주 팔복은 마태복은 5장 3-12절을 비튼 시인데...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반복되다가 맨 마지막 구절에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난다. 이 시구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로 바꾸고 싶어졌고, '저희가 영원히 기다릴 것이오.'로 끝내고 싶어졌다.


기다림... 기대... 그래서 환호하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어떤 장애물도 다 없애놓았는데 ('여기에는 문이 없군요/당신을 위해 던져버렸으니까요') 그는 내가 기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서 침묵한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위해 준비했는데, 그는 나에게 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윤동주 시에서 슬픔을 기다림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태복음에는이렇게 나온다.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절-11절)


그래서 12절에서는 예수로 인하여 핍박받은 자들은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팔복이다. 이들은 현세에서는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복을 받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에게는 영원히 슬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면, 이 시 속의 '나'에겐 영원한 기다림일 수밖에 없다. 교양 있는 사람이 내게 준 것은 기다림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영원한 기대.


'나'가 왜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릴까? 그것은 그가 '영광된 기억과 희망 찬 미래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들여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그냥 잘 뿐이다.


그러니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입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을 이 시를 통해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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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난해하다.  이 시집은 아마도 평론가들에게 좋은 시집일테다. 평론가들이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시집일테니.

 

  일반인들 가슴에 콕콕 와박히는 시들은 굳이 평론가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평론가들이 개입하면 시에 대한 감상을 망칠 수 있다.

 

  마치 강요처럼 느껴질 수 있을테니. 그러니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에 와닿는 시들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는, 어려운 문학이론들을 동원해서, 또는 사회학, 철학 이론들을 동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시. 얼마나 좋은가? 일자리 창출이다.

 

  평론가들이 뿌듯하게 느낄 수도 있는 시다. 이렇게 말하면 평론가들이 기분 나빠하겠지만, 그들 역할이 무엇인가?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아닌가. 이 작품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역할.

 

그런 점에서 이 시집 뒤에 실린 신형철의 작품 해설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해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읽는 사람 취향이겠지만.

 

'이미 있는 독자'와 소통하기보다는 '있어야 할 독자'를 창조하겠다고 나서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야심가들을 흔히 전위(前衛)라고 부릅니다. (165쪽)

 

김언이 전위 시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해하기는,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쓰여 있으니 그렇게 판단해도 될 듯하다.

 

이 시집에 나온 한 구절...

 

전위는 새롭지만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다 ('취향의 문제'에서 95쪽)

 

그렇지. 새로우니까 전위지. 하지만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다는 말이 전위에 속한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지, 전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양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가 아닌 다양성. 단순성이 아닌 복잡성.

 

그래서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전위가 할 역할이고, 전위를 자처하는 시인은 시를 통해서 기존의 통념을 뒤집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기존의 언어로 해석되기가 매우 힘드니까,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 속에서 한 이 말처럼.

 

모든 언어는 은어니까 ('톰의 혼령들과 하품하는 친구들'에서 107쪽)

 

'은어'란 말은 말이되 기존의 뜻을 감추고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말들. 아는 사람끼리만 아는, 남들이 다 알면 그 효용성이 떨어져 버리는, 더 이상 은어로 존재할 수 없는 언어 아닌가.

 

그러니 전위 시인이란 자신들의 은어를 사용하는 시인이고, 그 은어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를 창조해내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텐데..  시가 은어라는 것을 넘어 모든 언어가 은어라고 하니, 언어 속에 숨어 있는 뜻, 그 뜻을 알아내고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독자. 행복한 독자다.

 

나는 아직 이런 은어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하다. 은유도 어려운데, 은어라니... 좀더 명확하게 말하고 소통하는 모습들이 넘쳐난다면, 시인이 모은 언어는 은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여 이 말에는 소통 불가의 우리 사회가 담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쓰는 언어는 은어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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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2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02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이 흉흉하다. 뭐 하나 제대로 정돈이 되지 않는 느낌.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는 생활을 하고 있단 느낌. 서로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현실이 된 느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한다. 용서를 빌어야 용서를 할 수 있을텐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기만 하면 용서는 물 건너 간다.

 

  하지만 작은 잘못은 어떻게 할까? 물론 작은 잘못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잘못을 깨닫고 진정으로 뉘우쳐야 한다. 그런데 뉘우침이 윽박지른다고 일어날까?

 

뉘우침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한다. 장발장을 보라. 그가 잘못한 것이라곤 빵을 훔친 것, 그것도 조카들을 위해서지만, 그에게 가해진 법의 핍박 속에 그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할 뿐이다. 그런 그에게 진정으로 뉘우치고 자신을 발견하게 한 것은 바로 미리엘 주교의 용서다. 용서를 통해 장발장은 거듭났다.

 

무작정 잘못했다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으니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싸줄 수 있는 잘못은 감싸줄 수 있는 것, 용서할 수 있는 잘못은 용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반성의 역설]이란 책이 있다. 반성문을 쓰게 하면, 반성을 강요하면 오히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반성의 역설. 그렇다. 네가 잘못했어. 그러니 반성해. 반성하는 글을 써. 그러면 그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반성, 남에게 읽히기 위한 반성문을 쓴다. 그 시간을 모면할 반성만 할 뿐이다.

 

다음에 또 그렇게 반성을 하고 또 반성을 하고, 점점 잘못은 강화되고, 심해진다. 이게 반성의 역설이다. 재판을 앞둔 피의자들이 반성문을 쓰면 형을 경감해주기도 한다는데, 이것 역시 반성의 역설이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반성을 하지 않는다. 단지 반성을 한다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반성. 이건 반성이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반성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반성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 속에서는 잘못했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그 마음 속 반성이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강요된 반성이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반성.

 

그래서 용서는 참 힘들다. 상대를 온전히 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 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가 변할 수 있게 품어주는 것. 작은 잘못을 품어주어 더 큰 잘못을 하지 않게 하는 것. 참 힘든 일인데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봉환의 시집을 읽다가 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교사이기도 한 시인이 학교 생활을 시로 쓴 것이 있는데, 웃음이 머금어지는 시도 있고, 예전에 교실붕괴, 학교붕괴가 생각나는 시도 있지만, 이런 학생이 있어서 어쩌면 학교라는 공간에서 이런 용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도 있다. 그 시를 보자.

 

은닉

 

  언젠가 박진화의 돈을 훔친 사람으로 주연이를 의심한 적이 있는데 진화가 그날 메일을 보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때 뭐 훔쳐봤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친한 친구의 지갑을 뒤지시진 않으셨죠? 주연이랑 저랑 많이 친하거든요. 주연이가 범인이라는 거, 우리 반 애들 아무도 안 믿어요. 그리고 그 범인이 밝혀지면 선생님이 쉬쉬하신다고 해도 저희는 누군지 다 알게 되겠죠.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반 애들도 금방 알게 되겠죠. 그 한 번의 실수가 알려지면 그 애가 너무 불쌍해질 것 같아서요. 이번 일은 그냥 저희끼리 해결하고 싶어요."

  그 후 박진화의 돈을 훔친 범인을 우리는 영영 잊어버렸다.

 

이봉환, 밀물결 오시듯. 실천문학사. 2013년. 60쪽.

 

제목이 은닉이지만, 이건 은닉이 아니다. 감싸줌, 포용, 용서다. 훔친 아이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또 그 아이가 수치심을 지니고 반항심을 지니지 않도록 하는 것. 그런 품어줌이다.

 

은닉이라고 하여 감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아이가 이들의 마음을,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이 시집의 첫시인 '밀물결 오시듯'처럼 자연스럽게 그 아이의 마음에 닿아 그 아이를 품어준다.

 

그래서 이 시는 따스하다.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내 것을 앗아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실수한 사람일 뿐이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감싸주려는 마음이 너무도 잘 드러난다.

 

이런 모습이 필요하다. 작은 실수들에 얼굴 붉히며 잡아먹으려는 듯이 달려드는 사회가 아니라...

 

하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용서다. 감싸줄 수 있는 용서와 단호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용서. 이것들에 공통으로 들어 있는 마음은 바로 상대가 사람다운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하도 법, 법 하면서 학교에서부터 너 잘못했으니 처벌 받아라고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더니, 반성을 하기보단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해졌는지... 이 시를 읽으며 [반성의 역설]이 자꾸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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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다. 혹독한 추위가 시작되고 있다. 겨울은 추워야 겨울답다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말들을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힘들다.

 

  사람에게도 힘들지만, 자연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겨울은 힘들다. 그래서 다들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생존을 위한 적응을 해왔다.

 

  하지만 올 겨울은 더 혹독할 것 같다. 자연에게도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더더욱.

 

  코로나19. 한 해 동안 사라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세계인을 괴롭혔다. 사라질 만도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더 기승을 부린다.

 

  질병도 사람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참 견기디 힘든 질병이다. 한 해 내내 이토록 사람들을 집요하게 괴롭히다니.

 

서로의 영역이 붕괴되어 벌어진 현상이라지만,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간다는 인간들이 한 해  동안 온전한 백신을 만들지도 못했고, 치료제 또한 개발하지 못한 상태. 이렇게 다시 겨울을 맞이 했고, 없는 사람들에겐 너무도 혹독한 겨울이 될 것이다.

 

케이-방역이라고 해서 코로나19를 효과적으로 잘 막고 있던 우리나라도 점점 확진자 수가 늘고 있다. 한 해 동안 쌓인 피로감들이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할 이 때, 우리는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다. 여기에 조류독감까지 유행할 것이라고 하니, 가금류들 또한 힘든 겨울이 될 것이니...

 

이때 마음의 위로를 주는 시를 하나 발견했다. 나무... 우리들에게 늘 희망을 주는 나무이긴 하지만, 이진희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이 시를 읽고는 우리들 내부에서도 이러한 희망, 뜨거움이 간직되어 있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인의 시들이 '불균형, 불완전, 불일치' (시 '저 구름 멀리 흘러가는 곳'(40쪽)에서)를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시는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래 희망이 있는 한 삶은 있다. 삶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이 '희망'이라고 하지 않았나. 밖은 너무도 춥고 힘들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스함을 준비한다. 언젠가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는 겨울에 뜨겁다

 

내면 깊이 상처 입은 이들이

겨울 별장에 스스로를 유폐한 뒤 상처를 덧내며

악취 풍기는 미로처럼 무자비한 계절에 대한

기나긴 비명을

간신히 썼다

지우기를 거듭하는 동안

 

뜨거워진다, 나무는

침묵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지만

 

강철 눈보라

은박지처럼 야박한 햇빛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붙박인

나무의 내부는 그러나

 

온종일 걷는 사람의 단단한 종아리보다

질주하는 동물의 터질 듯한 심장보다

쉼없이 노래하는 사람의 달아오른 성대보다

미친 듯 춤추는 사람의 마룻바닥 같은 발바닥보다

 

뜨겁다

 

차디찬 땅속 깊은 곳 어두컴컴한 뿌리부터 뜨거워서

매번 새로운 봄의 문장을 훌륭하게 완성한다

 

이진희, 실비아 수수께끼. 삶창. 2014년. 64-65쪽.

 

1연은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악취 풍기는 미로'에서 헤매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이 속에서도 준비하는 사람이,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는 것. 그 준비가 눈에 잘 띄지 않더라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래 희망은 있다. 이 겨울, 다시 봄을 생각하며 견뎌내야 한다. 아직 희망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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