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면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면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온갖 습속들로 인해, 고집만 더욱 세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다고 느끼지 않을까?

 

  세상은 진보한다고 하는데, 진보라는 말과 다르게 삶에 대한 통제가 더욱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알면 알수록 오히려 지식이 힘이 되고, 지식이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앎에만 해당할까?

 

그렇지 않다. 진보라는 말에 과학기술을 포함한 앎의 발전이라는 말도 들어있다면, 세상 지식 총량은 늘고 있는데, 우리들 삶은 더욱 옭죔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식의 총체들이 우리들의 시각을 굴절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관점으로 보고,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인권'도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오히려 '있는 그대로'에서 점점 멀어져, 내 삶이 행복에서 더 멀어지고, 사회 역시 그 많은 지식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정말로 내 삶에서 많이도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손택수 시집을 읽다가 '있는 그대로, 라는 말'을 읽고 아, 그렇지! 하고 감탄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년.15쪽.

 

그래, 나에게 씌워졌던 많은 것들을 걷어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 그래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는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습속들을 걷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나 아닌 존재들을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로 먼저 볼 수 있는 눈, 마음. 그런 마음들이 대다수를 이룬 사회라면 수많은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택수, 이번 시집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에는 이 시 말고도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은 시들이 실려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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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스럽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살아간다. 꾸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렇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에는 인간이 꾸며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자연스럽다' 요즘 쓰기 힘든 말이다. 방송을 보면 사람들 모습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다.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와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오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로 고친, 꾸민,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들을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말도 뜻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더니, 온갖 좋은 말들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지금.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인 말을 자연스러운 말인 양 쓰는 이런 때에...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가상화폐를 가지고 투기(투자라고 하기엔 좀 뭐하다)를 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 화폐는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자기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제 화폐는 물질이 아니라 온라인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를 넘어서, 그것들이 기존 물성을 지닌 화폐를 끌어모으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기후 위기, 기후 재앙이라고 하면서도, 내놓는 정책들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는 이때...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해도,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몰라 하고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레타 툰베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은 있는 공항도 부족하다고 다른 공항을 더 짓겠다고 난리를 치니, 사람들을 많이 실어나르는 비행기는 기정사실이고, 그것들이 더 편리하게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인지...


발전에 대해서, 성장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면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이니,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니, 또는 과거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니, 꼰대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시대에, 그래, 자연은 그냥 인간이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코로나19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초래한 재앙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또 기술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정일근 시를 생각한다. 자고로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존재, 비존재에게도 민감한 마음을 투사하는 존재가 시인인데... 그런 시인이 종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자연스럽다는 말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백지의 피


그 시인 출판 기념식장에서 구겨진 백지 묶음 주웠다

처녀시집 묶어온 자리에 덧댄 고급 종이였다

시가 난무하는 세상, 시 한 줄 몸에 받지 못한

백지, 나무에서 종이가 될 때까지의 빛났던

운문 정신이 꾸깃꾸깃 어둡게 구겨져 있었다

깊은 밤 그 백지 한 장 한 장 다려 펴며 물었다

백지가 휴지 되어 버려지는 시대에 나는 시인인가?

종이의 날 선 귀퉁이에 시들이 우수수 베이고

태어나지 않은 시의 깊은 곳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63쪽.


요즘 이런 말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절대로 책을 훔쳐가지 않는다고... 교과서!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에 가보라. 교과서들을 어떻게 하는지... 아니 고등학교만이 아니다. 초·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년말이 되면 교과서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아예 업체를 불러 폐휴지로 분리수거를 하는 학교가 태반이니.. 종이를 우리는 이렇게 다룬다. 공부를 하는 학생조차도. 그래 학생들은,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공부밖에는 하지 못했기에,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를, 원수같은 교과서를 버린다치지만... 시인은? 왜 시인은 출판 기념식을 하고, 자신의 시집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종이들을 그렇게 버리고 마는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서는 안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일근 시인의 시, '자연론'을 본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57쪽.


이래야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허랑방탕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고 있는 이 '자연스럽다'는 말. '꺾었던 꽃의 아픔을 몸이 먼저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이렇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러운 체하는 삶이 아니라.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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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멀어진 생활이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기존에 해왔던 일상을 잃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생활 습관이 깨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생활습관만 깨진 것이 아니라 생존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감염병이라는 것이 우리의 권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한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온갖 곳에서는 개인정보보호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를 요구하면서도, 음식점이나 기타 다른 곳에 들어갈 때는 동의합니다 없이 그냥 개인정보를 적거나 큐알코드를 찍어야 한다.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는 상태니, 그런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펼치는 정책이 과연 올바른 정책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실행을 한다. 여기에 핸드폰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문제가 되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그냥 실행이 된다. 코로나19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게 우리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이런 일과 연결을 하면 안 되겠지만, 삶창 125호에 실린 이번 글 중에 소설 '어둠의 공간'이 머리 속에 남았다.


축산농가에서 일하는 사람. 공장식 축산으로, 오로지 사람들의 먹을거리로 제공되기 위해 키워지는 돼지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다. 또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갈 곳이 없어 그곳을 노동의 장소로 삼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삶에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농장이, 가장 비인간적인, 그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않는 모습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소설인데...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노동자의 모습. 여전히 그러한가? 이런 의문이 들지만, 여전히 그러하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길을 가다 보니, 대규모 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대기업 건설현장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플래카드. 아직도 공사중인 그곳, 대기업이 주도하는 공사현장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축산농가에서야 어떻겠는가.


그러니 제목이 '어둠의 공간'이다. 캄캄하다. 이 캄캄함 속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는 돈을 벌어 자기 나라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이 어둠의 공간에 남아야 하는 자신을 그렇게라도 다독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이 소설의 외국인노동자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지금 코로나19라는 감염병 때문에 어둠의 공간에 있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는 어떤 꿈을 지니고 있을까? 적어도 예전과는 다른,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고, 그것을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우리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 우주 차원의 공동체가 공생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어려운 시대에 더 고통받는 사람들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의 삶이 개선될 때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어둠의 공간을 밝혀주게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삶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희망의 빛을 보게 되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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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


  식민지 유산을 청산해야 하는데, 해방 된 지 70년이 넘었음에도 문제가 남아 있다. 가해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그런 일본에 책임 묻기를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상황.


  여기에 식민지로 인해 분단이 되었는데, 통일로 가는 길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더 캄캄해지고 있는 현실.


  또 식민지로 인해 세계 여러 곳으로 흩어진 우리 동포들 문제도 남아 있다.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동포들 중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또 후손들에 대한 관심도 많이 부족한 상황이지 않나 싶다. 이동순이 쓴 이 시집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다 구 소련 땅에 남아 있던 우리 민족 사람들이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삶터를 잃고 쫓겨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 있다.


일본 스파이가 될까봐 또는 일본에 협조할까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우리 민족들. 그들 중에는 강제 이주를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또 강제 이주 당해 중앙아시아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는데...


이 시집에는 그런 사람들 중에 홍범도 장군이 나온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임에도 강제 이주의 칼날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 역시 극장의 경비원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 간에 인류애는 살아 있음을 이 시집에서 보게도 된다.


지금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된 사람들. 소련 당국에서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 사람 이야기도 나온다. 


밤새도록 가족들과 빵 구워 담은 자루 / 식지 않도록 이불로 덮어 / 나귀 등에 싣고 온 / 카자흐 사내 막심 이크바로브 / 내 가족을 위해 자기 집도 냉큼 비워준 / 친형제보다 더 깊이 정든 / 카자흐 사내 / 원동에서 온 고려인에겐 / 말도 붙이지 말고 / 음식도 베풀지 말고 / 최소한의 접촉도 하지 말라던 / 당국의 지시 묵살하고 / 무엇보다도 인간의 도리 막중히 여기던 / 막심 아크바로브

('내 친구 막심' 중 일부. 96-97쪽)


그렇다. 당국과는 달리 민중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한다. 자신들도 어렵게 살기 때문에 어려운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국적을 떠나서.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집단도 있다. 바로 군대라는 집단. 군인이 되면, 군복을 입는 순간 인간성, 인류애는 군복 속으로 사라진다. 오로지 명령만이 남는다. 그들에겐 명령뿐이다. 명령으로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미얀마에서처럼.


열차 바닥에 / 뜷어놓은 작은 구멍 / 거기 쪼그리고 앉는다는 게 / 죽기보다 싫었다 / 여자니까 / 내가 무슨 짐승인가 / ... / 여인들은 철로 옆 깔밭으로 뛰어들었다 / 하나가 뛰니 여럿이 우르르 / 한꺼번에 들어갔다 / 흰옷 입은 여인들 깔밭 사이로 보였다 / ... / 그때 돌연 총소리 탕탕 들렸따 / 탈주로 착각한 소련 병사 / 따발총 갈겨버린 것/ ('깔밭의 참변' 중. 62쪽=63쪽.)


이렇게 '깔밭의 참변'이란 시를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들과, 인간적인 면을 지키려는 여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비극이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들의 존엄은 지키기 위해 참고 참았다가 깔밭(갈대밭)에 들어가 볼일을 보던 여인들.


그런 여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오인하여 총을 쏴버리는 군인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군인들이 인간성을 군복 속에 집어넣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소련 군인들의 만행은 도처에서 나온다. 그냥 사람을 죽이거나, 버려두거나 하는 모습들. 과연 인민의 조국이라고 한때 자부했던 소련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민중을 위한 군대라고 할 수 있는가? 소련 역시 우리나라 비극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식민지가 된 조국, 전체주의자에 의해 강제 이주 명령을 받은 힘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도 항거로 받아들여지는 현실.


그런 비극. 이 시집에는 그러한 비극이 너무도 잘 표현되어 있다. 나라를 잃는 민족이 어떤 설움을 겪는지, 지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아가는 고려인 3세, 4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비극이 왜 일어났던가. 도대체 이 비극에 누가 책임을 졌던가. 아직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렇다. 책임은 끝까지 지지 않으면 언제고 책임을 다할 때까지 물어야 한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거나 없는 걸로 칠 수는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겪은 이 비극. 이동순의 '강제이주열차'를 읽으며 다시 되새기겨 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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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門)은 여러 역할을 한다. 문이 지닌 아름다움을 논외로 하고, 문이 지닌 실용성을 따지면, 문은 열림과 닫힘이다. 연결이자 끊김이다.


  열어서 외부와 연결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닫아서 외부와의 연결을 끊는 역할도 한다.


  문은 그냥 문이지만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다. 그렇게 문은 관계를 맺게도 관계를 끊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이 있어야 한다. 문이 없는 사람 관계는 없다. 다만 이 문이 잘 열리는 관계가 있고, 전혀 열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문을 어떨 때 열고, 어떨 때 닫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문을 닫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여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두드릴 때 열어주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의 비대칭. 이 비대칭이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온몸을 던져도 안 열리고, 다른 것들을 보내도 안 열리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도 힘들고... 참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는 힘들다.


어쩌면 시를 읽는 것도 이렇게 문을 여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문을 두드리는 일. 시가 문을 열어줄 때도 있고, 아예 안 열어줄 때도 있는데...


박소란 시집을 읽으며 많은 시들에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이 이상하게도 닫혀 있단 생각이 들었따. 시집 제목이 된 시 '감상'에 나오는 구절인 '한 사람의 닫힌 문'이라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감상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쏠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년. 64-65쪽.


과연 그 문이 열렸을까? 이상하게 시에서 한 사람과 나는 자꾸 빗나간다. 한 사람이 내게 몸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우리는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고 착각되는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그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나인채로 있다. 마치 한 사람의 비질에 쓸려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듯이.


나를 움직이는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을 때 그는 문을 닫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을 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도대체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릴까? 답은 없다. 다만,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어떻게 찾을까? 여기서 질문은 제자리로 온다. 우리는 그렇게 미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문을 열기 위해 헤매게 된다.  


그렇지만 문이 있으면 열림의 가능성은 늘 있다. 그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열리지 않더라도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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