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무엇일까? 시집 제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비가(悲歌)'다. 말 그대로 슬픈 노래.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이 노래는 '아직 한번도 불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슬퍼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슬픈 노래는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 길을 지우고 난 후에 /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사막 같은 악보. 무엇이 있지. 무엇을 찾을 수 있지. 백지라고 해도 좋을 듯한 표현인데... 그만큼 마음에 모래만이 가득한 상태. 바람이 불면 이 모래가 흩날려 곧장 제 형태를 바꾸곤 하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형태가 바뀌어 버리는 사막. 그래서 누구나 다 다른 모습을 기억하는 그러한 사막. 사막 같은 악보. 이런 사막같은 악보가 쉽게 드러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 또한 제 마음을 드러내기 힘들다. 밖으로 표현하지 못해 안에서 안에서 메말라가는 마음.


이렇게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는 진정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일 것이다. 


그런데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의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서 있는 사내 2'라는 시를 읽으며 어쩌면 이 사내와 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슬픈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서 있는 사내 2


  쑥부쟁이 칡덩굴 얽히고설키며 철 따라 피고 지던 꽃들과 풀들의 흙을 밀어내어 논을 만들고 밭을 일구다가 꿈같은 속세의 끄트머리라고 당간을 세우고 금천을 넘게 하더니 어느날 불타고 무너져 내려 인의도덕을 서원하는 마당이 되더니 다시 부수고 그 자리에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전답이 되었으니 이 조화는 사람의 일인가 세월의 장난인가

  큰길 오가던 사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후세에 비석으로 한을 달랜들 금 가고 마음 모서리 떨어져 나간 채 서 있는 저 사내의 삭은 가슴만 하겠는가


*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문학의 전당), 2017년 초판 2쇄. 44쪽.


아마도 시인은 원주 흥법사지에 갔으리라. 거기서 느낀 점을 시로 썼으니, 시집에 작은 글씨로 *표로 장소를 알려주려 했겠지.


산에서 절로, 절에서 서원으로, 다시 서원에서 전답으로 바뀌었던 과정.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오고갔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 서려 있을 텐데, 그것을 지켜보는 사내의 심정은 어떨까?


그 사내의 삭은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아닌가. 그런 노래, 듣고 싶은가. 아니 그런 노래는 불러지면 안 된다. 불러지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마음이 사막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슬픈 노래를 만들게 해놓고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그런 자들로 인해서 슬픈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왜, 슬픈 노래는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에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애도가 끝나야 그때서야 비로소 슬픈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슬픈 노래가 사막 같이 변한 마음에 오아시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위안해주기 위해서는 슬픔이 지나가야 하니까. 그런 슬픔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하여 '삭은 가슴'을 지니지 않게 해야 하니까.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그럼에도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듯이, 그렇게 시집을 읽으며 희망을 찾는다.


           비가(悲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문학의전당), 2017년 초판 2쇄.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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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지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휴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폐간이라고 해야 한다.


  예전에 내가 받아보았던 잡지들이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계간에서 휴간이 된 경우가 많았고, 노숙인의 자활을 돕고 있는 [빅이슈]도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바뀌었는데, 이것도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학교에서 교과서도 디지털로 하자고 하는 세상이니, 종이에 인쇄된 잡지들이 살아남기는 더더욱 힘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샘터] 역시 오랜 기간 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잡지였는데... 비록 정기구독을 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읽을 기회가 있던 잡지였고. 그래서 이 잡지가 그만 발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의 잡지가 사라지는구나. 이렇게 종이책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구나. 아직은 서점에 가면 종이책들이 많은데, 이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디지털로 읽는 것과 종이라는 물성을 지닌 책으로 읽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고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데...


너무도 많은 책들이 있어서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른다. 잡지들이 하나둘 휴간, 폐간하고 있는데, 이것이 종이책으로 옮겨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니.


이번에 알라딘에서 샘터 잡지를 창간호와 마지막호를 묶어서 판매를 했다. 이런 책 광고가 나오면 사야지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읽든 읽지 않든 사놓아야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


종이책에 덜 미안한 마음. 이렇게라도 사라지는 잡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창간호, 와, 정말 오랜만에 세로로 인쇄된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세로로 된 책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신문도 세로 인쇄였지, 아마... 그러다가 가로로 모두 바뀌었는데...


세로 인쇄만이 아니라 창간호는 한자가 그대로 쓰였다. 그래도 사람 이름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주어 읽을 수 있는데, 본문에는 토를 달지 않아 한자를 모르는 세대는 읽기가 힘들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한자와 한글이 함께 쓰였던 시대가 있었는데, 샘터 창간호가 1970년 4월호이니, 이때까지도 한자어가 일상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필자로 참여했고,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창간호 특집이 '젊음과 여성'이다.


당시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기획으로 잡아 창간호를 발간했다고 보면 되는데... 젊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때가 되어서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져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에 보면 남성 중심의 사고가 더 우세한 것은 말할 것이 없으니, 여성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비교할 수 있는 창간호이기도 하다.


마지막호의 표제에 '첫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동안 샘터와 만났던 사람들의 글과 독자의 글들이 실려 있고, 새로운 해를 출발하는 1월에 샘터 마지막호가 나오다니,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샘터]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창간호와 같이 고흐의 그림으로 표제를 장식했고, 샘터 기자들의 말이 길게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 감회가 새롭다. 


[샘터]의 휴간으로 창간호와 마지막호를 만나게 되었지만, 마지막호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쉼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다.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잡지들이 계속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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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6-01-18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향수 속으로 사라지는 잡지책들, 출판사 입장에선 팔리지 않는 잡지책의 출간을 이어나가기 힘들겠지요.

kinye91 2026-01-18 17:18   좋아요 1 | URL
그런 점이 안타까워요. 전통이 있는 잡지들이 계속 출간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감은빛 2026-01-18 17: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잡지와 단행본을 함께 만드는 출판사 여러 곳에 일했었어요. 잡지가 살아남기 어려운 이유는 짧은 소비기한 탓입니다. 책의 내용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단행본은 수십년 동안 판매가 가능하죠. 문학은 수백년도 가능할테고요. 잡지도 물론 내용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정기적으로 발행한다는 발행 주기 때문에 다음호 이전까지만 유통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잡지를 거의 읽지 않죠. 그리고 과거 잡지 유통은 몇몇 총판들이 거의 독점했는데, 비합리적인 유통구조 덕분에 유통으로 수익을 내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버틸수 있는 건, 구독자가 많은, 혹은 충성도 높은 구독자 층을 보유한 곳들 뿐입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온라인 서점과 대형서점이 커지고, 지역의 중소 서점들이 몰락하며 잡지 총판들도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왜곡된 유통구조는 크게 영향받지 않아도 상관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여전히 잡지의 유통기한이 짧고, 판매량이 적은 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죠.

제가 일했던 잡지사 한 곳은 결국 제법 유명했던 잡지를 폐간하고 단행본 출판사로 돌아섰어요. 안타깝지만, 구조적으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kinye91 2026-01-19 09:24   좋아요 0 | URL
네, 그러네요. 유통기한이나 판매량이 잡지의 발행에 큰 영향을 주니, 이것을 보완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수익을 떠나 좋은 잡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사회였으면 해서요.

카스피 2026-01-18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샘터잡지 오래전에 집에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최인호의 가족이지요.샘터가 폐간하는 이유는 판형이 작고 페이지수가 적어 광고수록이 많지 않아서 그런것 같습니다.요즘 잡지들보면 거짓말 보태서 광고가 반이지요.

kinye91 2026-01-19 09:26   좋아요 0 | URL
광고 없이 좋은 잡지들이 계속 발간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게 참 힘든 일이겠지만요.
 

  아주 오래 전에 '사랑굿'이란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 시.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


  그러다 우연히 김초혜 시인의 남편이 조정래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느 글에서 조정래 소설가가 예전에는 김초혜 남편 조정래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로 설 수 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하나 더 나아가 이들의 가족문학관이 있다는 사실. 그 문학관의 이름이 좀 길다. 2017년에 개관했다고, 전라남도 고흥에.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


  그럼, 조종현은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시조시인이고 조정래 소설가의 아버지란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아버지 역시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분이라고 하고... 이렇게 가족문학관이 생기는 문학 가족인데.


이 시집은 1943년생인 시인이 2017년에 발간한 시집이니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원숙함의 경지라고 해야 하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모습이 담겼다고 해야 하나.


읽으면서 '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 달관의 경지다. 이 정도면. 하여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추운 겨울, 또 냉혹한 사회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시들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한발 물러나 보게 하는 시들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달관의 경지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다 현대시를 비판하는 시를 읽고는 시인들에게도 현대시는 어렵구나, 그렇지, 현대시는 비평가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하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비평가들이 해설해주어야 그나마 그렇구나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비평가들마저 온갖 문학이론을, 철학을, 사회학을 들이대어 해석해내는 시들이 과연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을까. 오히려 그런 시들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역할을 하지 않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들을 보면 어려운 시보다는 쉽게 마음에 다가오는 시들이 더 많지 않아. 거기에 그리 길지 않아서 암송할 수도 있고.


원로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초혜 시인이 쓴 '현대시'를 보자.


    현대시


자기도 뜻을 모르고

남은 더 모르게 쓴다


시가 울고 있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79쪽.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껴 시를 멀리하면 시도 울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짧은 시들. 잠언과 같은 시들이 이 시집에 실려 있으니,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에 위안을 주고 싶을 때 이 시집을 읽으면 좋을 듯하다.


짧은 시 한편 더... 각박한 시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사람


흙과 나무와 바위를

모두 품는다


그래서 산이다


그래야 사람이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21쪽.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에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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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내 탓일까? 물론 내 탓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작 내 탓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은 남 탓을 하고,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래, 그건 내 탓이야 하면 세상이 바뀔까?


 오히려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 아닐까? 그것도 권력을 쥔 자들,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 남 탓을 주로 하고, 억울하다고 하는 판에,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 아닐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치는 인간이 떵떵거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큰소리치고 위협하는 인간들이 더욱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럴 때 과연 내 탓만 하면 되겠는가.


물론 내 탓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남 탓을 할 필요도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희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지고 있어. 이제 너희들 말 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고, 책임을 묻는 자세.


그런 자세를 과연 남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책임을 묻지 못하는 자세가 바로 남 탓 아닌가. 어쩔 수 없어. 해도 안 돼. 체념하는 순간 내 탓이 굳어져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우리 제대로 된 남 탓을 해야 한다. 이우성 시집 제목인'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 시 참 어렵군. 어려운 말은 없는데 시의 내용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여전히 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인가, 하다가 자꾸 내 탓만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시를 쓴 시인 탓도 있다고. 시인이 자기만족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 마음에 어느 정도는 들어올 시를 써야 하지 않나 하고... 시를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이 시집을 읽었는데. 


그러다 '새'라는 시를 읽고 이 시 재미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 새가 과연 좌우의 날개로 날까? 좌우 중심을 잡아줄 몸통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몸통이 크냐 작냐가 중요하지 않다. 두 날개를 이어줄, 또는 붙잡아줄 몸통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좌우 대칭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새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정치에 빗대면 좌우 균형이 맞춰진 상태라면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적이 없다면 정치는 제대로 된 적이 없지 않을까. 시에 나온 '이놈의 새 / 너 / 날아본 적 있냐'(97쪽)는 구절은 우리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이 나라 정치에서 과연 좌우 균형이 잡힌 적이 있었던가. 아니 좌우가 뒤집힌 적이 더 많지 않았는가. 어쩌면 좌우 개념조차도 흐릿해진 정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날아본 적이 없는 정치가 과연 내 탓일까? 이거 정치인이라는 남 탓을 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들이 제대로 할 수 있게 우리가 몸통 역할을 하려고 해도, 무슨 날개들이 몸통을 무시하고 저들만 키우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제 크기만 불리려 해서 도저히 균형이 잡히지 않으니, 남 탓을 하자.


남 탓을 하다가 이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압력을 넣어야 하는 내 탓도 가끔은 하자. 그래야 좌우 날개에 몸통을 갖춘 새가 되어 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새가 제대로 날 수 있게 될 테니. 이 시, 재미 있다. 


      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 첫번째 집은 [조선일보]를 보고

오른쪽 첫번째 집은 [한겨레]를 본다

아침마다 밖에 나오면 내 편과 네 편이 등지고 있다

나는 오른쪽 첫번째 집에 혼자 산다

왼쪽 첫번째 집 방향으로 가본 적은 없다

함정 같은 거에 발이 빠질까 봐

그렇다고 내가 이쪽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한 번만 구독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한 번이야 하는 마음이었는데

몇 년째 오기로 구독한다

기울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데 왜 내가 오른쪽인가

쟤들이 왜 왼쪽이고

문제될 건 없지만 가끔 어색하게 느껴진다

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돌아서면 오른쪽도 왼쪽도 뒤집혀버리긴 해

아 그렇게 쉬운 일이구나

그래도 실수로라도 몸을 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쪽으론

작가가 이렇게 편협해도 되나

새는 양쪽의 날개로 난다며

그나저나 참 오래도 산다

이놈의 새

너 

날아본 적은 있냐


이우성,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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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시라고 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제목이 자살을 유발하지 않느냐고?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니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고 자살을 멈춘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따스함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 효과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를 읽으며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책머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5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 실린 시가 어렵지 않다. 그냥 평범한 말들로 되어 있다. 마치 이솝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이솝 우화,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이 시집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그래도 그 사물들 역시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시라고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를 보면 욕조에 들어간 눈사람이 찬물을 틀까, 뜨거운 물을 틀까 고민을 하다가 결정하는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눈사람 자살 사건' 중에서. 14쪽)


그래,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해주는 마음. 이건 죽음을 앞둔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나를 따스하게 하고, 그 온기가 남들에게도 퍼질 수 있게 하는 것. 비록 '눈사람 자살 사건'은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즉 죽기 전까지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따스함은 곧 다른 존재에게도 따스함으로 다가간다. 각박한 세상, 추운 세상에서 이러한 따스함이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더 훈훈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밖에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결코 쓸모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 '초'와 같은 시도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존재 의미가 있음을, 결코 지금 필요없다고 내쳐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데... 아래 사진을 보라.



이 시집의 편집이 좋다. 그림과 시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따라서 시를 읽고 그림을 봐도 좋고, 그림을 먼저 보고 시를 읽어도 좋다. 그림과 시의 조화.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고 있게 만든 편집이다. 


그래서 더 읽기에 좋은 시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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