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두석 시집에는 '꽃'이 들어가는 시집들이 많다. 대꽃, 성에꽃, 투구꽃, 숨살이꽃과 더불어 꽃에게 길을 묻는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처럼...


  꽃. 아름답다고,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누군가를 축하할 때 우리는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릴 때 꽃을 가져가기도 한다. 그만큼 꽃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러던 시인이 이번에는 꽃이 아니라 새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 시집에도 '꽃'을 다루는 시들이 (동강할미꽃, 물매화, 산수유나무, 뻐꾹채, 바람꽃,도체비꽃 등등)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새들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관심이 옮아갔는가? 아니, 지상을 수놓는 꽃들과 천상을 수놓는 새들이 통한다고 보았겠지.


새들 역시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이니까. 우리가 심상하게 쓰는 표현 가운데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말이 있으니...


인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꽃에서 새로 확장이 된 것이겠지. 공중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꽃들과 지상에서 천상으로 비상하는 새들. 우리 삶도 한때 그렇게 꽃을 피우고 또 그렇게 비상했겠지.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야겠지.


결국 우리 삶도 자연의 일부이니, 삶과 죽음이 하나로 내 곁에 있듯이, 지상의 존재와 천상의 존재, 그리고 지하의 존재,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존재들이 내 곁에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자연을 다룬다고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자연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기에 누군가의 생명 유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기에.


'백로와 숭어'(52쪽)라는 시를 보면 이런 자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백로가 숭어를 낚아채어 가는데, '백로와 숭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마주친다 ... 백로도 숭어도 오직 보는 일에만 집중한다(최두석, 백로와 숭어 중에서. 52쪽)'고...


그렇게 죽살이가 한 순간 공존하고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그것을 시인은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앞의 시)고 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여러 굴곡이 있겠지만 삶은 그렇게 유지되고, 그러한 삶에 대해 최두석의 이번 시집을 통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참 삶은 위태위태하다. 이 위태위태함이 삶인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때가 잠잘 때여야 하는데, 그럴 때조차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때가 있으니. 자연도 마찬가지다.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온갖 것이 혼재해 있는 것이 자연이니.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본다. 


  두루미의 잠


삵 같은 천적 피하기 위해

얕은 물에 발을 잠그고 자는 두루미는

추위가 몰려오면

한 발은 들어 깃 속에 묻는다


외다리에 온몸 맡긴 채

솜뭉치처럼 웅크린 두루미의 잠


자면서도 두루미는

수시로 발을 바꿔 디뎌야 한다

그래야 얼어붙지 않는다

그걸 잊고 발목에 얼음이 얼어

꼼짝 못하고 죽은 새끼 두루미도 있다


한탄강이 쩡쩡 얼어붙은 겨울밤

여울목에 자리 잡은

두루미 가족의 잠자리 떠올리면

자꾸 눈이 시리고 발목도 시려온다.


최두석, 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사. 2023년. 42쪽.


시인의 눈이 어디 두루미에서 그치랴. 시인이 보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의 삶이고, 그러니 시인은 우리의 삶들에서 두루미와 같이 잠자리에서도 경계를 해야 하는 이들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흘러가도록 하겠지만, 인간은, 인간적이라 함은 같은 인간이 그렇게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 않는다. 측은지심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은 어려움에 처한 존재에 손길을 내민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곁의 자연을 보고 인간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시인의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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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 내 얼굴이 내 몸과 떨어질 수가 있나? 나는 들어왔는데, 내 얼굴은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얼굴이 지닌 뜻이 뭐지?


  얼굴, 그냥 생각하자. 우리는 얼굴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라고도 하고. 그렇다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제목이 된 구절은 '붉은 달(24-26쪽)'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집에 들어왔는데, '내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26쪽)이라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에 '마트료시카(120쪽)'라는 시를 보면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밖에 나갔을 때는 얼굴이 함께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내 얼굴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나를 알려준다고 하면 나는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할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최인훈이 쓴 [가면고]가 생각났다. 가장 완벽한 얼굴을 찾아 다니는 다문고 왕자의 이야기. 그는 완벽한 얼굴을 찾았지만, 시인은 아직 완벽한 얼굴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이미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찾기도 전에 생활에 치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그러니 나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여러 얼굴을 지니고 있고, 한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그 얼굴 속에 또 얼굴이, 얼굴이 계속 들어있는, 내 얼굴이지만, 내 얼굴이 아니기도 한. 내가 지니고 있는 얼굴이지만 새롭고, 또 놓고, 감추고 있는 얼굴일 수도 있는.


하여 나는 나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나'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얼굴만이 아니라 남의 얼굴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남의 얼굴을 통해서 나의 얼굴을 보기도 하니까.


  우리 사회에 다른 인물들인데 마트료시카와 같이 열어도 열어도 같은 얼굴이 나오는 인물들이 있다.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이들을 열지 않고 그냥 닫아두고 싶은데, 그런 같은 얼굴을 무슨 자랑이라고 계속 내미는 인간들이 있으니... 시와는 별 관계가 없지만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보고서 그런 인물들, 선한 마음, 인물들의 연속이 아니라, 안 보여야, 안 나와야 하는 인물들의 연속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남 얼굴 타령은 그만하고, 내 얼굴을 잘 찾아야지. 아니 지금껏 내가 지니고 있던 얼굴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얼굴들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은 다른 내 얼굴을 만들어가야지.


이 시집에는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두 편 있다. 똑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그렇지만 본질 찾기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트료시카


나는 몇 개의 거울을 들고서 달렸다 // 똑같은 것들이 슬퍼 보였다 //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70쪽.



마트료시카


문을 열면 / 문이 있었다 // 그 문을 열면 / 또 문이 있었다 // 문의 문을 열면 / 내 얼굴들 쌓여 있고 / 문밖에는 똑같은 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 나는 문의 문을 계속 열고 나갔지만 //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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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3-18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kinye91님의 시와 소설 평론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를 좋아해서 혼자 문학 작품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작품 속 아름다움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잘 짚어주시는 글을 보면서 저 또한 즐거워졌습니다.
자주 와서 읽고 문학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kinye91 2025-03-18 16:08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책을 읽고 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저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고고학이 과거를 살피는 학문이라면 고현학은 현재를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학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문학비평을 하면서, 김윤식 교수가 박태원의 작품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든가 [천변풍경]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조선의 모습을 잘 드러낸 소설이고, 이 소설들이 바로 현실을 재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평을 했다.


  일본인이 사용한 용어보다는 김윤식 교수가 사용한 용어로 내게 친숙해진 단어인데, 시집에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반갑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인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현실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인은 고현학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고 시가 그 당대에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의 고현학은 시대를 아울러 존재한다. 즉 시는 시를 읽는 현재에서 그 시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시의 고현학이 아닌가 하는데...


이민호 시집을 읽으면서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우리나라 현실이 어느 정도는 형상화되어 있겠지 했다. 당연히 시에서 현실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이 시집에서는 이 시를 읽고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 어쩌면 시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외발로 서 있는 詩(시)'라는 시다.


외발이라는 말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이 시대의 시는 이렇게 외발로 서 있지 않을까, 외발로 서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단지 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삶들이 이렇게 외발로 서 있는 시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 시를 읽으면 장면을 그려낼 수 있다. 그 장면 속에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詩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이민호, 피의 고현학, 애지. 2011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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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지들이 순할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먼지들은 순하다. 그냥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먼지들은 움직임보다는 멈춤과 친하다. 변화보다는 안정과 친하다. 그냥 조용히 그 자리에 쌓이고 싶어한다. 쌓이면서 세월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먼지들은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한다. 우리를 힘들게 한다. 순한 먼지가 아니라 독한 먼지가 된다. 이때 먼지는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때문에 먼지가 쌓였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시인을 빼면. 


  시인은 먼지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다르게 판단하고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집 제목도 그렇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라니.


순한 먼지라는 말에서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요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첫행을 읽으면서 정착했다는 느낌, 이리저리 떠밀리다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이제 격동의 시기를 지나 안정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 안정이 오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화자가 후배에게 먼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순한 먼지들이 쌓인 책방은 슴슴함과 비슷하다. 심심함. 이것은 안정이다. 이러한 안정된 상태에서는 야릇한 지루함도 느껴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이다.


슴슴한(심심한) 상태. 먼지가 쌓이는 상태. 우리의 삶에 이런 나날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는 대체로 이런 슴슴한 상태, 먼지가 쌓일 정도로 안정되고 오래 지속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이 휙 불어오면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던 먼지들이 확 날리게 된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한다. 이런 고요, 이런 안정을 깨는 폭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들, 말들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두 시가 마음으로 들어온 이유가 그것이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과 '천하무적'


세상에 천하무적이라니... 이런 존재가 있을까? 없어야 한다. 천하에 적이 없는 존재라니, 없어야 하는데 시를 읽다보니 우리 사회에는 이런 천하무적의 존재가 있구나 하게 된다. 먼지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빅뱅에 준하는, 한 사람의 삶을, 사회를 뒤집어엎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는 말.  


그 말이 얼마 전에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는 먼지처럼 고요히 쌓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누구에게는 이 말이 천하무적의 말이었구나, 이 말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놓으려고 했구나, 참... 그냥 순하게 쌓여 있어도 좋을 말이었을텐데... 아니, 이제는 그냥 순한 먼지처럼 쌓여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우리 사회 내부의 반국가세력이 연계하여, 국가안보와 계속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우리 사회에 불러온 파장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 천하무적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고, 이 말을 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냥 순한 먼지처럼 이제는 역사 속에 쌓여 있던 말이 된 줄 알았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저 말이 슴슴한 내 삶을 휘저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슴슴한 삶을 순식간에 소름끼치게 했듯이.


정우영의 시 두 편을 읽어보자. 그리고 다시 천하무적의 말이 순한 먼지가 되기를 지켜보자. 


  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22쪽





천하무적


  슴슴하다, 말하자

  너와 내 관계가 슴슴해졌다.


  음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슴슴이 뭔지도 몰랐던 주변의 사물들이 돌연 슴슴함 속으로 잠겨들었다. 슴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라디오와 책이, 의자와 액자가 슴슴함 쪽으로 다가와서 쪼그라들었다.세상은 이제 슴슴함과 그렇지 않은 것의 이분법으로 정해졌다는 듯이.


  지금까지는 슴슴하지 않은 것들이 대세였으나

  내가 섣불리 슴슴하다 내뱉는 바람에

  다들 슴슴함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나는 곧 슴슴하지 않다고 말해야지 결심했는데, 어쩔끄나, 말릴 새도 없이 슴슴함이 순식간에 내 몸을 장악했다. 생강을 달여 마시면 달아날까, 이 슴슴함. 속으로 대증요법을 떠올리며 난감해하던 차, 남쪽에선 사라지고 북쪽에서만 살아남은 말, 사전이 내 귀에 속삭인다.


  소름이 온몸을 좌악 훑더니

  슴슴함이 홀라당 빠져나간다.

  슴슴함도 불온만큼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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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立春)이 지났다. 이제 봄이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겨울이다. 입춘 즈음에 입춘 추위가 찾아왔다. 강추위다.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러나 이 추위는 물러가리라.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니.


  눈이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덮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한때나마 눈 속으로 사라졌다. 눈 덮인 서울의 모습이 표지 사진이다.


  더러움이라고는 없는 세상 같다. 하지만 눈은 곧 녹으리라. 눈이 녹으면 추한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추한 것들을 잠시 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예 없애야 한다.


  눈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치워야 한다. 어떤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비상계엄으로 인한 겨울이었다. 봄을 향해 가는 겨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봄을 시샘하듯이 그렇게 찾아온 겨울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으리라. 오래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삶창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비상계엄으로 인해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그런 일은 엄벌에 처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함을.


그런데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직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추위. 하지만 버티려야 버틸 수 없을 텐데. 봄은 이미 오고 있으니. 입춘이 지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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