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받아보았던 잡지들이 하나둘 폐간이 되거나 휴간이 되더니... 그러더니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월간에서 격월간으로,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다시 계간에서 반연간으로 바뀌는 잡지들을 보게 된다.


  책이라는 물성을 지닌 존재가 우리 곁에 오기가 많이 힘들어졌구나 하는 생각.


  특히 돈이 되지 않는 잡지들은 발간을 지속하기가 힘든 상태가 되었음을 느끼게 하는데.


  [삶이보이는창]을 처음 만난 것은 격월간지였을 때였던가, 두 달에 한 번 만나다가, 계간지로 변경이 되어 세 달에 한 번 만나다가, 이번에 보니 일년에 두 번, 1월과 7월에 발간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운영이 힘들어진 거겠지. 참 많은 잡지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우리 일상의 삶을 다루는 잡지는 점점 더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점이 안타깝다.


  그럼에도 아직 폐간은 아니다. 한 해에 두 번은 만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있지만, 주의해서 눈길을 주지 않던 삶들. 그런 삶들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잡지를.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화가나 그림에 대한 이야기, 새에 관한 이야기, 자신이 살고 있는 이야기, 부모님 이야기 등등이 실려 있어,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이런 보통의 삶들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는데...


여기에 '문학' 부분이 있어서 시도,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소설도 읽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이 잡지에는 온갖 삶들이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 실린 단편소설 '오븐이 켜지는 시간(이상무)'은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조리종사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아이들 밥을 해주기 위해서, 즉 아이들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도 학습권 운운하면서 그들의 파업을 막으려 하는 학생의 모습에서, 몇 해 전에 모 대학에서 일어났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잡지가 어떤 잡지던가? '삶이 보이는 창' 아닌가. 학생들은 자신들의 점심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들에게 밥을 해주는 노동자들이 남이 아님도 안다. 그들의 노동으로 자신들이 맛있는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맛 있는 한 끼에 노동자들의 목숨이 담보로 걸리면 안 된다는 사실도 안다. 함께 살기 위해서 밥을 하고 먹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금 맛이 없더라도 남의 건강을 해치는 요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이 소설 속 학생들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리종사원을 '이모'라고 부르는데, 이 '이모'는 시중의 음식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부르는 호칭의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가족과 같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친밀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고 있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병에 걸릴 위험이 있는 요리를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테니... 그렇게, 학교라는 장소에서 함께 지내는 이들의 모습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것이 파업이라는 노동자들의 권리 행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 소설을 통해서 다시 우리나라 학교 현장을 생각하게 된다. 학교 급식이 공공화 되었지만 과연 조리종사원들이 일하는 환경은 나아졌는지... 여전히 암에 걸리는 사람,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고, 하는 일에 비해 사람 수는 적은데, 학생수가 준다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깎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예산에 여유가 있다면 이러한 환경 개선에 우선 투자를 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됐다.


우리나라 학교 환경은 여전히 좋지 않은데,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환경은 더더욱 좋지 않으니... 학생수에 맞춰 주던 교부금을 학교 전체적인 교육 환경 개선에 쓰도록 한다면... 결코 많다는 소리를 하지 못할 텐데.


이런 삶. 또 다른 많은 삶들. 내가 살아보지 않지만 [삶창]을 통해서 다른 삶들을 만나고, 그 삶들이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꿀 수 있으니, 이것이 책을 읽는 보람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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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몇몇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저 말이 저렇게 부정적인 말로 쓰일 수가 있었나 싶은 말들.


  그 중 한 말이 '자기 정치'라는 말이다. 세상에, 정치인은 모두 '자기 정치'를 하는 것 아니었나? 자기 정치를 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이 모여 정당을 이루면서, '자기 정치'를 '우리의 정치'로 또 '국민의 정치'로 확장해 나가는 것 아니었나.


  '자기 정치'도 할 줄 모르면서 남의 정치에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을 정치인, 아니 좋은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나?


  '자기 정치', 그것을 명확히 밝히고, 동료를 모으고, 또 시민들,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인이 바로 좋은 정치인 아닌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힘센 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기 말을 이리저리 바꾸지 않고, 행동을 그때그때 유리한 쪽으로 하지 않고, 뚝심있게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 지금의 정치판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도 이러한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을 좋은 정치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을 지지하기도 했었고. 지금도 그런 정치를 한 사람이 인정을 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기 정치'를 이렇게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로 쓰다니... 이거야 원. 이건 정치의 실종 아닌가. 그냥 강한 자의 정치를 따라하거나 침묵하거나 해야 하는 걸까?


그러면 도대체 왜 정치를 하는가? 자기가 실현하고 싶은 정책을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나?


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 정치'를 해야 하고, 그러한 '자기 정치'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시대 선비들... 그 선비들 중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테고, 그 말을 떠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텐데, 그들 중에서도 '자기 정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 미련없이 낙향을 했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던가. 후일을 도모하면서...


'자기 정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정치'가 실현될 때를 기다리는 자세. 내 때 되지 않으면 내 후배들, 또 제자들, 그 제자들 때에라도 실현될 수 있게 교육에 힘썼던 것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뜬금없이 '자기 정치'를 한다고 상대를 비난하다니... 정치인은 모두 '자기 정치'를 해야 하고, 이 '자기 정치들'이 모여 '정당 정치'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담, 정당에 들어가서는 '자기 정치'를 포기해야 하나? 그 선이 어디인가?


포기가 아니라 '자기 정치'의 확대 아니겠는가? 나만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안에서 토론과 학습을 통해 '자기 정치'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자기 정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자기 정치'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기 정치'들의 접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고민하지 않는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인데...


그렇다고 아집과 독선, 독단에 빠져서 하는 행동을 '자기 정치'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런 착각을 '자기 정치'라고 여기고 밀고 나가는, 제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는 정치인도 있는데... 이들에게는 '자기 정치'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그건 정치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지키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 강재남 시집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세상에 시와 정치가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될 수도 있구나, 그렇지만 시나 정치나 모두 언어를 통해서 상대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니, 접점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도 하고.


'자기 정치'가 외연을 확장해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힘을 받아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독창성과 고답성이 충돌하는 지점'('고답적인 너의 나라'에서. 16쪽)을 파악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


즉 정치는 완전한 새로움도, 또 완전히 옛것을 고수하는 것도 아닌, 옛것과 새로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 나아가는 것. 그러할 때 '이상하고 아름다운'('고답적인 너의 나라'에서. 16쪽)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자기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스스로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주게 된다는 사실을... 이 시집에 실린 시 '소리 내며 지는 꽃은 없다'를 읽으며 생각했다.


소리 내며 지는 꽃은 없다



  빈손인 내게도 가을이 찾아왔다


  무엇을 남기며 살고자함이 아니었지만 풍요로 남실거리는 들판이나 날개를 접은 저녁, 놀이 물드는 하늘을 보노라면 자꾸만 내 빈손이 들여다뵌다


  발걸음 따라 걷다 온 수월리, 하양지를 돌아 나오는 길섶으로 청노루 따먹던 연한 칡순이 계절을 잊은 듯 땅으로 뻗쳐 보랏빛 웃음 흘리고 있다


  철지난 그 꽃 어제를 모르고 스산한 바람 앞에 한줌 흙이 되어 땅으로 질 터인데 거짓 없이 싹틔우고 꽃 일궈냈음을 스스로 자랑 숨기고 소리 없이 질 터인데,


  지상의 꽃들 일제히 우우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 어찌 바람에 몸 맡기어 흔들리고 싶지 않으리 생각의 마디 툭툭 꺾어 마음불 지피고 싶지 않으리


  비우고 걸어가는 꽃길을 따라 이 가을 나도 해탈을 향하여 서늘하게 지고 싶다


강재남, 이상하고 아름다운. 서정시학. 2017년 초판 2쇄. 74-75쪽.


그렇게 읽은 것이 이 시를 잘못 읽은 것이라 해도, 하, 역시 '고답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이 시를 그렇게 읽었다고 하면 지나친 곡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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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받아놓고 천천히 읽는다. 마치 빨리 읽으면 책하고 맞지 않는다는 듯이.


  근본으로 돌아가자. 이 빨리빨리의 세상에서 조금은 느리게 살아도 되고, 눈 앞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 세상에서 내가 보지 못하더라도 좋아지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세상을 추구하는 책인데, 후다닥 읽어버리면, 정말, 이 책을 잘 읽는 걸까 하는 생각.


  꼼꼼하게 읽어야 하지만, 천성이 그렇지 못해 그냥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지는 않게 읽는다. 어떤 글에서는 아, 이건 생각 못했네... 하는 내용을 발견하고,(이헌석, '핵산업은 과연 황글알을 낳는 거위일까 - 산업으로서의 원자력을 묻는다'에 이런 내용이 있다. '한수원의 2025년 말 기준 연결감사보고서에 따르면, 해외사업 부문공사손실충당부채는 1조 4,346억 원에 달한다') 이런, 이런 사실이 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을까 ?


원자력 발전소 수출에 성공했다고, 막대한 수익을 창출한다고 자랑스레 떠벌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해외사업에서 오히려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고?


여기에 '국내 재생에너지산업은 핵산업에 비해 수출액이 10배 정도 큰 산업이다.'(이헌석, '핵산업은 과연 황글알을 낳는 거위일까 - 산업으로서의 원자력을 묻는다'에서. 26쪽)고 하는데, 정부가 바뀐 지금도 여전히 핵발전소를 추가 건설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여기에 노후 원자력발전소를 가동 중지시키지 않고 수명 연장을 허가함으로써 계속 가동하도록 한다고 하는데, 그럼 그 비용은 어떻게 되지? 이런 것 저런 것 다 따지면 원자력 발전 수출과 국내 건설이 다르다고 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안전성 면에서는, 또 폐기물 처리에 관해 들어가는 비용에 관해서는...


이런 내용에다 '용인에 들어설 반도체 산업단지로 인해 원전 15개 남짓의 추가 전력이 필요하게 된 상황'(하승수, '66개의 '밀양'을 만들 것인가'에서. 69쪽)이라는 내용을 보고는, 아이고, 또 송전탑! 밀양 송전탑 건설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를 그렇게 경험하고도 또! 하는 생각.


도대체 이런 산업이 계속 언급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산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하기 때문이고, 장기적인 산업 정책이나 에너지 정책은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의 성과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삶보다는 성과를 먼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데,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고... 지역에서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존재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실려 있으니까.


그렇게 생명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생명 평화를 위협하는 경제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각각의 소리가 따로따로 겉돌지 않고 융합이 되어 합창이 되었듯이, 사람을 살리는 경제도 역시 이렇게 사람들이 함께 소리를 내야 함을 이번 호를 통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 표지에 '사람을 살리는 경제는 가능하다'고 쓰여 있다. 경제가 무엇인가? 영어로 된 말을 들여올 때 한자어로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두 글자를 따와 경제라고 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미 경제란 말에는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러니 우리 지금 경제는 그 말에 충실하기만 해도 된다. 그 점을 명심하기만 해도 사람을 죽이는, 다른 생명체, 또 다른 존재들을 죽이는 경제란 말은 있지도 않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런 경제를 계속 추구한다면? 최근에 읽은 서정홍 시인(농부)이 언급한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에 있는 말을 곱씹어 본다. 정말, 우리 그런 세상을 만들 것인가?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서정홍, 희망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교육공동체벗, 2025년.] 중 '권정생 선생님께'에서.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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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속력으로 당신이 서 있다'('시인의 말')


  움직임과 멈춤이 한 문장 안에 있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말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 이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전속력으로라는 말은 속도를 지니고 있는데, 서 있다는 멈춤으로 다가가다니...


 이 문장에서 '전속력'과 '서 있다'를 함께보면서, 어쩌면 서 있음 자체가 전속력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는 행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앞에 서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온 존재, 아니 서 있기 위해서 달려나가려는 몸을 전속력을 다해 반대편으로 끌어당기는, 그야말로 작용을 제어하는 반작용.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 대등한 힘으로 맞서는, 그래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같을 때 멈춤, 즉 정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음을.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그러한 존재다. 나 역시 당신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일 것이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때에 사람들은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같은, 하여 사랑에 멈춰있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이 전속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서 있을 때, 우리 역시 전속력으로 시에 다가와 서 있게 되면 이때서야 작용과 반작용이 대등해지고, '시' 앞에서 우리는 서 있게 된다.


단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와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시는 우리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는 그냥 하나가 아니다. 여럿인 하나다.


하나로 보이겠지만,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서 있기 위해서 작용과 반작용이 끊임없이 균형을 이루듯이 시는 시 속에 수많은 여럿이 서 있는 상태.


그런 시를 읽는 일은 참, '전속력으로 당신이 서 있다'는 시인의 말에서 '당신'을 '시'로 바꾸면, 시에 담겨 있는 수많은 힘들, 움직임들을 의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수많은 힘들, 움직임들이 시에 있기에 시는 멈춰 있지만 늘 움직이고 있다.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시를 이해했다고 하겠는데, 시의 움직임에 휩쓸려 들어가고 만다. 이게 이 시집을 읽은 소감이다.


즉, 멈춰 있는 듯한 시에게 말려들어가 시 속 수많은 움직임에 휘둘리게 된 상태. 하... 참. 제목이 된 시 '무표정'에서 그랬다.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삶이라는 소용돌이와 시라는 소용돌이가 융합이 되어 더 큰 소용돌이를 만든 상태. 늘 다가오는 요일들, 날들... 하지만 그 날들은 결코 멈춰있지 않는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서 있지만, 그 속에는 다시 속도와 속도가 방향을 달리해 있을 뿐. 하여 멈춤으로 인식하는 날들이 결코 멈춤이 아님을.


무표정


  월요일이 비처럼 내리는 밤 일요일 밤 여관 같은 밤 화요일이 엿보는 밤 눈과 시선이 겉도는 밤 0과 1 사이에 세워진 정신병원을 세는 밤 그림자가 피의 성분으로 느껴지는 밤 따질 수 없는 밤 산 잠자리를 흙 속에 묻고 물을 주는 밤 눈물 대신 혓바닥을 삼키는 밤 훔친 메모지와 훔친 연필이 서로를 노려보는 밤 떠나는 기차 대신 떠나온 금요일을 응시하는 목요일 밤 버림받은 수요일 밤 수태되기 전날 밤 기억나지 않는 밤 구운 쥐가 밥상 위에 오른 밤 앙상한 토요일 밤의 이마를 관통한 총탄 자국 웃는 밤


장승리, 무표정, 문학과지성사. 2021년. 19쪽


분명 일월화수목금토라는 요일들인데... 이 요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 이 요일들은 전속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서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다가온 날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그냥 그렇게 왔군, 갔군 하면서 표정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보내지는 않았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각 요일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또 다른 요일들에 의해 밀려나기도 하지만, 그 날들은 모두 우리의 삶 안에 있음을, 모두가 무표정이 아니라 표정을 지니고 있음을.


시 제목이 무표정인데, 무표정이야말로 수많은 표정들이 대등하게 모여 지닌 표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인데... 수많은 날들이 무의미하게 그냥 흘러가지 않듯이, 무표정 역시 수많은 표정의 모여 있는 순간이라는... 우리는 그 무표정 속에서 표정들을 찾아야 함을, 이 시를 통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러한 해석 역시 전속력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인 '시'를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겠지만...


이 시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 존재들, 아니면 내가 보내는 시간들, 날들 속에 있는 다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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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살아 있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떠났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떠난 사람이야 알 수 없겠지만...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잘 산 사람은 떠나도 다른 존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 인정을 받는다는 것, 칭송을 받는다는 것과 다른 개념. 물론 살아 있을 때 인정받고 칭송받으면 좋다. 자신의 행동을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인정을 위한 삶만을 산다면, 과연 그것이 잘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숯. 하나의 삶을 살고 이제 다른 삶을 사는 존재다. 자신을 불태웠는데, 그냥 사라지지 않고 다른 존재들에게 좋은 것을 남겨준다. 그렇게 참숯은 삶과 삶 이후의 삶도 의미가 있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숯과 같은 사람이겠지.


타지 않으려 버티지 않고, 또 이왕 타버렸으니 그냥 재가 되어 사라져야지 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남 뒤에서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존재. 그런 삶. 


어떻게 살아야 이런 참숯과 같은 존재가 될까? 좋은 사회는 이런 참숯과 같은 존재들이 많은 사회일텐데...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다. 양선희의 '참숯'


참숯


  누가 참숯을 한 가마 보내왔네. 쌀통에 두면 벌레를 막고, 옷장에 두면 습기를 먹고, 냉장고나 화장실에 두면 악취를 제거하고, 거실에 두면 공기를 정화하고, 장독에 넣으면 장맛이 좋아지고, 배개에 넣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곱게 갈아 물에 타 먹으면 속병이 씻길 거라며, 참이지 못한 것을 속속 흡수하는 놀라운 색을 얻은 참숯을 보내왔네.


  나도 생을 잘 불태우면

  한번 더 타오를 수 있는

  불씨를 얻을 수 있을까.


양선희, 그 인연에 울다. 문학동네. 2023년 2판 1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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