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다.


개천절,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리는 날이 있는 달. 그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수천 년을 한반도에서 지내왔다. 하나의 민족, 이것이 꼭 하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구성원이 된다. 그러니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을 피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지 말자. 하나 속에 여럿이 속해 있다.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란 피의 순수성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면서 공통의 무엇을 지니고 살아온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혈통보다도 문화, 함께함 등등이 어우러진 공동체. 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탄압하고 쫓아낼 권리가 있는가?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좀더 힘센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쫓아내면 안 된다. 민족끼리 이 작은 지구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리는 이 지구에서 어울리면서 평화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민족은 공동체로서 제대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배워왔다. 다른 민족을 침략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런 평화 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런 우리 민족과 달리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억압을 멈추지 않고 있고, 세계는 그러한 억압을 멈추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간신히 자치지구라고 해서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도 가자지구는 봉쇄되어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에서 살아가기 더 힘들어진 사람들.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런 가자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다른 민족, 자기들 말로는 선택받았다는 민족, 그 선택받았다는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아왔는지,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한 민족이, 세상에 내가 당한 것 만큼 보복하겠다는 심정인지, 원.


가자지구에 구호물품을 전달하려는 사람, 단체들이 타고 있는 배를 나포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떴다.


<신문기사 링크 > 또 막힌 가자구호선단…이스라엘, 툰베리 등 500명 연행


인도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도 막는 민족, 그런 민족을 제재할 수 없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가자지구의 참상을 알리고 있으니.


이때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돕겠다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평화를 위한 움직임. 이는 이스라엘이 미워서가 아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깨고 있기 때문. 강자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따라서 가자지구에 평화가 오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는데... 열쇠를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세계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번역해서 펴낸 시집. [팔레스타인 시선집] 읽으면 슬프다.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저항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


번역해서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시들을 알려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개천절에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오기를...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야말로 '푸른 지구'가 되기를... 개천절을 맞이하여 바라는 마음.


이 책에 실린 짧은 시. 그러나 마음에 파고드는 그런 시. 아아, 이런 바람이...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창가 아래서 비명을 질러 대

날 한시도 가만두지 않던 녀석들아.

우당탕탕 소란으로

매일 아침을 채우던 녀석들아.

내 화병을 깨 먹고

발코니의 홀로 핀 꽃을 슬쩍한 녀석들아.

돌아와,

마음껏 비명을 내지르고

화병이란 화병은 다 깨부수고

꽃이란 꽃은 다 슬쩍 챙겨가렴.

돌아와...

돌아만 와다오...


할레드 주마. 류송 번역.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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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헌책방에 간다. 알라딘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을 중고서점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중고서점이라는 말보다는 헌책방이라는 말이 더 정감있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은, 누군가가 한번은 읽은, 그런 사람을 거쳐서 다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결코 읽기를 마치지 않는, 계속 돌고돌아 읽어야 하는 그런 책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곳.


  '헌'이라는 말이 낡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이라는 뜻을,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헌책방에 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도 빨리 절판이 되고 품절이 되는 이 시대에, 조금 오래 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헌책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책방에서 시집이 꽂혀있는 서가를 훑어보다가 민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어, 민영 시인에게 이런 시집이 있었나? 아니, 한길사에서 시집을 냈다고? 하는 의문. 반가움. 고민도 없이 손에 들었다. 


시들이 난해하지 않다. 시인이 50대 후반 들어 쓴 시들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과거 이야기도 실려 있고, 인디언들을 보고 난 마음을 담은 시들도 있고,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시들도 있다.


그 중에 제목이 된 시 '바람 부는 날'을 본다.


바람 부는 날


나무에 

물 오르는 것 보며

꽃 핀다

꽃 핀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피고,


가지에 

바람 부는 것 보며

꽃 진다

꽃 진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졌네.


소용돌이치는 탁류의 세월이여!


이마 위에 흩어진

서리 묻은 머리카락 걷어올리며

걷어올리며 애태우는

이 새벽,


꽃피는 것 애달파라

꽃지는 것 애달파라!


민영, 바람 부는 날. 한길사. 1991년. 11-12쪽



우리나라 현대사 탁류에 비교할 수 있다. 정말 거칠게 빠르게 험하게 흘러온 역사. 그 탁류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온 사람들.


탁류를 맑은 물로 바꾸어간 사람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월은 흘렸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 피고 지고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피고지고의 반복으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지내온 세월에, 피었다 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달플 수밖에 없다. 바람 부는 가을 날 민영 시집을 읽으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한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런 탁류의 세월을 견뎌왔던가. 아니, 이젠 탁류의 세월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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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


  그릇을 굽는 도구. 실용적인 그릇부터, 예술 작품이 되는 도자기까지.


  뜨거운 가마 속에서 흙은 작품이 되어 나온다. 우리 삶에 다가오게 된다.


  가마는 그래서 미래를 품고 있는 상자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온갖 것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 상자에는 이미 완성된 것들이 들어 있을 뿐이다.


  물론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판도라의 상자는 인간에게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보낸 상자니까. 그것을 열면 온갖 것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는 안 좋은 것들도 꽤 많았다고.


하지만 가마는 아니다. 가마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들어간다. 미래를 품고 있는 것들이 가마 속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만들고 나면 그때서야 가마 밖으로 나온다. 완성되지 못할 것들은 가마 속에서 깨져버리거나, 나오자마자 폐기되고 만다. 판도라의 상자와는 다르다. 가마는 우리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들을 내보낸다.


이러한 가마를 우리 인생이라고 하자. 인생살이를 시로 소설로 수필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글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말로 표현을 한다. 우리의 삶이 가마라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흙을 가마에 넣어 무언가를 만들어내 밖으로 내보이는 것과 같다.


어떤 가마는 아주 높은 열로 빠른 시간 안에 흙을 구워 내보내지만, 어떤 가마는 약한 열로 오랫동안 흙을 구워 내보낸다. 어떤 것이 더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다. 가마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의 특성에 따라, 또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이 시집은 시인이 삶 속에서 굽고 굽고 또 구워서 드디어 내보내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 속에 넣고 이리저리 만지고 또 만지고, 열을 가하고 또 가하고, 드디어 이 정도면 되었다 싶을 때 꺼내놓은 시들.


그래서 [60년의 가마를 열다]는 시인이 살아온 생애를 글로 풀어내다라고 할 수 있다. 시집의 첫시가 '60년의 가마'다.


 60년의 가마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조심스레 미루어 추측해 본다

어느 순간 이 세상의 부름을 받았고

그로부터 태동이 시작되었을 게다

세상의 시계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인간 면모를 갖추는 연습했을 거다


이것은 나와 아주 가까운 그 누구도

내게 눈치로도 알려준 적 없어

내가 여태껏 짐작해낸 것뿐이다

어떤 그릇이 될 거라는 그림도 없이

처음엔 순수한 채 투박한 토기처럼

점차 빛나는 도자기를 빚어내려 했었다


36.7 인간 세상의 가마에서

60년 시간 담금질로 구워낸 그릇들

설렘을 안고 맞선을 보이려 합니다


조이섭, 60년의 가마를 열다. 그림과 책. 2021년. 16쪽.



이 시집의 서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드디어 가마 속에서 꺼내어 보여주기 시작한다. 자신이 겪은 일들, 감정들을 시로 만들어 가마 속에서 꺼낸다.


시집을 통해 우리는 가마 속에서 나온 시인의 삶을, 시인의 그릇들을 만나게 된다. 차분히 하나의 인생이 가마 속에서 어떻게 빚어지고 달구어졌는지를 이 시집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내 인생을 가마 속에서 어떻게 굽고 있는지 생각한다. 나 역시 가마 속에 삶이라는 흙을 넣고 지금 굽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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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특이하다. 년도가 나왔다. 년도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1914년이란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봐도 왜 1914년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 년도에 일어난 사건을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뭐,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둥, 어쨌다는 둥 하지는 말자. 그냥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첫장을 넘기면서 만난 시. 그냥 충격이었다. 이 시 때문에 다시 1914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1914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백 년 뒤 2014년이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온다는 사실.


  한국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숱한 죽음을 마주했다. 그 죽음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죽음은 늘 뜻하지 않게 다가왔다.


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살아갔던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죽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첫시를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첫시의 제목은 '1914년 4월 16일'이다. 


 1914년 4월 16일


나의 생년월일입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으로서

죽은 친구들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죽은 친구들이 나를 홀로 21세기에 남겨두고 떠난 게 아니라

죽은 친구들을 내가 멀리 떠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이

2014년 4월 16일입니다.


김행숙, 1914년. 한국문학. 2019년. 초판 2쇄. 9쪽.


태어난 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 뒤, 탄생이 아닌 죽음을 만나게 된다. 이토록 처연한 슬픔이라니...


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까?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죽음들이 한 세기를 살아오는 동안 있었을 터.


친구들이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이라는 것은 용케 죽음을 피해 살아왔다는 것.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해방이 된 다음에 겪게 되는 4.3, 전쟁, 4.19,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자 운동, 고문 등등.


이런 죽음과 함께하지 못하고 죽음에서 떠나온 삶을 살아왔는데, 그런 죽음들을 이제 21세기에는 만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데...


다시 만난 죽음은 이 세상 끝까지 떠밀려 온 것같은 느낌을 준다.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런 슬픔. 이런 죽음들.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죽음 앞에서, 화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2014년 4월 16일에서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죽음이 이어졌고, 우리는 또다시 이러한 죽음들에 떠밀렸다.


이젠 더이상 그러한 죽음이 없도록... 진정으로 그런 사회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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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


  특히 들을 귀, 듣는 귀. 정말 중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지 않은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 소리들, 또 듣고 싶은데 들리지 않는 말들, 소리들.


  귀가 막혔나라는 말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 귀를 열어라는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은 곧 남을 잘 이해하라는 말.


  이해하라는 말은 포용하라는 말. 그와 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라 밀어내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말.


이렇게 중요한 귀.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귀.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이러한 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시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된 이 시 말고, 귀에 대해서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라는 시다.


손바닥에 귀가 있을 리가!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죽어갈 때 그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상하게도 그 화초가 싱싱하게 살아난 경험. 어떤 식물을 갖다 주어도, 그 집에 볕이, 빛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화초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왜 그럴까?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었구나, 식물들의 말을 들어줄 귀가 있었기에,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의 전화'를 통해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다는 말은, 식물들이나 다른 존재들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그런 마음을,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마음도 몸도 편해진 상태를 달리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 ...... / 검은 손바닥 그 한 많은 귀에 대고 / 제 말들을 마음껏 하면 / 그 말을 들은 천 개의 귀가 / 그것들의 아픔에 / 가만 가만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중에서/ 44쪽)


이 시 구절에서 그러한 마음이 다 표현되고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어머니의 손이 깨끗한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이다. 그것은 '바닥'이란 시를 보면 왜 검은 손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 ...... /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 ......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바닥' 중에서. 40쪽)


바다와 뻘(갯벌), 온갖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것들을 다른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바꾸어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설에서 한 말처럼, 바닥을 바다와 뻘과 더불어 인생의 바닥이라고 쓰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어머니는 다른 존재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했던 것.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귀'였던 것.


그러면 '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자. 그들의 귀는 눈이다. 눈으로 그들은 듣는다. 그러니 신체의 특정한 기관을 귀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는 수많은 귀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듣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중요한데,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존재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을 껴안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렇게 '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왜 시인은 귀가 서럽다고 했을까? 자신에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던, 자신이 듣고자 노력했던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 그러니 귀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그리운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더 작은 소리,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 초판 2쇄. 67쪽.


이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꽤 있다. 읽으면서 찡한 감동을 받게 되는 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에 고스란히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시들도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몇몇 시 제목을 보면 '오래된 편지, 동낭치 부자, 아름다운 거짓말, 아름다운 위반' 등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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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25-09-06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대흠의 시 중에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라고 시작하는 동그라미 라는 시를 좋아하는데요 ㅎ 옹가강가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처럼 참 동글동글하게 순하게 귀를 열고 살고 싶기도 합니다 ^^ 일생을 흙 속에서 산, ​ ㅇ 을 떠받친 어머니...

kinye91 2025-09-06 16:15   좋아요 0 | URL
네, 마음을 순하게 하는 시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려고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 했어요. icaru님의 글을 보고 ‘동그라미‘를 비롯해, 이대흠 시인의 다른 시들도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