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뉴스 보기가 겁난다. 누가 그랬었지. 뉴스를 보거나 듣지 않는다고.


  왜? 안 좋은 일이 너무도 많아, 사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내보내는 뉴스는 좋은 소식보다는 안 좋은 소식이 더 많으니, 마음이 깨진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좋지 않은 소식이 우리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세상사에 눈 감고, 귀 닫고 살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가끔 듣거나 보는 뉴스에는, 생각하기 싫은 소식들이 실린다.


  헤어졌다고 무참하게 살인을 하는, 또는 보복을 하는 이야기. 한때 좋은 관계였을 텐데, 아니면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을 텐데, 헤어지는 순간, 또는 헤어지자고 하는 순간 상대를 증오하고,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이, 한 하늘에서 살 수 없다고 너가 없어져야 한다는 식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으니...


최근에 읽은 클레르 마렝이 쓴 [단절(들)]이 생각났다. 헤어짐 역시 단절일 텐데, 우리 삶에 일어나는 수많은 단절(들)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응을 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헤어짐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또 헤어짐을 자신이 맺은 관계를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하는데, 아니다. 


헤어짐은 죽음이다. 죽음을 각오해야 헤어질 수 있는 관계(들)이 너무 많은 사회, 그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들도, 그렇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겪는 요즘이지만, 관계 맺기의 어려움만큼이나 헤어짐의 어려움도 겪고 있지 않나 싶다.


잘 헤어짐, 그러니 헤어짐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헤어짐에도 존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존중을 보여줘야 할 존재들이 앞장서서 헤어짐을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권진희 시집을 읽다가, 헤어짐의 존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관계 맺기의 진실성을 만날 수 있는 시, 이 시를 읽으면서 이것이 헤어짐의 예의 아닐까, 헤어지는 대상에 대한 예의, 존중, 그리고 그 대상을 만나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예의와 존중.


우리 사회는 보내는 예의, 존중도 잃고, 나를 떠난 존재와 관계 맺는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도 예의와 존중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됐다.


이 시를 헤어짐에 대한 예의와 존중, 또 새로운 관계를 맺을 존재에 대한 존중과 예의로 읽었으니... 오독(誤讀)이라면 오독일 수 있는 이런 시 읽기가 그래도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있다.


하, 어렵더라도 뉴스보다 시다. 시!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폐지 줍는 할머니가 있길래

묵은 책들을 끈에 묶어서 내놓았다.


종이가 많은 것은 반가우나

저걸 들고 어떻게 계단을 내려갈꼬-

서너 차례 계단길을 내가 오르내렸다.


내게 없어도 그만인 책과

종이 몇 묶음 나르는 것이야 대수롭잖은 것이

누구에게는 대수로운 것임을 모르지 않지만


고맙고 또 고맙다며

당신보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휜 허리 깊이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여태 내가 내놓지 못한 것들이,

아래까지 함께 들어주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계단길 되짚어 오르는 사이 세고 또 세었다.


권진희, 죽은 물푸레나무에 대한 기억, 푸른사상. 2012년.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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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현 교황의 회칙에 언급된 내용이라고 하는데...


  가톨릭을 대표하는 교황(이 용어가 황제를 의미한다고 해서 교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교황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쓰이니)이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중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를 빗대서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를 향해 모두가 나아가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인가? 그 사회가 번영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성경에 나와 있다고...


바벨탑은 결국 건설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각자 말이 통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오로지 하나가 되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은 아님을, 그런 세상은 지속될 수 없음을, 성경이 바벨탑 이후에도 인류가 계속 존속해 왔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니...


언어의 다양성은 삶의 다양성이고, 이는 획일화된 삶이 아니라 각자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바벨탑은 신의 분노로 무너지지만, 종교를 떠나서 획일성은 결국 유지될 수 없다는 비유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인공지능, 인공지능 하면서 하나의 목표로 나아갈 때 과연 그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지상어떻게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것을 박혜영의 글'우리 삶은 왜 외롭고 불안하게 되었을까(下)'에서 말하고 있는 미로 속에 들어간 인간들 모습과 연결지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크레타 왕 미노스의 명령으로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목적으로 만든 미로. 그 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실을 주는 테세우스 전까지는.


미로를 만든 다이달로스조차도 그 속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못 찾을 정도였다니... 그는 결국 날개를 만들어 날아올라 탈출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들인 이카루스를 잃게 된다. 이는 미로를 탈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또는 그런 미로를 만든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은 박혜영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로 속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가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벨탑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삶을, 미로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로를 빠져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데...


이런 과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녹색평론]은. 다만 이런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은 바벨탑을 만드는 인간들과 같은 상태 또는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미궁 속에 들어간 사람들과 같은 상태라고.


문제를 알려줬다. 해결책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만의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바벨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결책은 상황에 따라,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다를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함께할 때 아리아드네의 실이 작동할 수 있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문제를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도, 지구 생태의 파괴를 해결할 방법을 우주에서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들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를 고민해야 하는 때. 


하여 성장지상주의라는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벗어나야 할 때,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은 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때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녹색평론]이기도 하고.


하여 지금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3대 매가프로젝트'나 '증권시장', 그리고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한 교육 개혁' 등등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살필 때,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공개적으로 토론이 될 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올라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벨탑의 교훈을 생각하자. 신의 분노가 아니더라도 오직 하나로만 된 사회는 존속할 수가 없음을... 다양함이, 그러한 다양함 속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관계 맺으며 지내는 사회만이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음을, 해답이라 할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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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반시]에 수록되었던 시들을 골라 엮은 시집이다.


  1994년 봄호부터 1997년 여름호까지 [시와 반시]의 <지난 계절의 좋은 시>에서 가려 봅은 것(5쪽)이라고 한다.


  지금 보면 오래 된 시집이다. 무려 30년 전 시들이니...


  시에 유통기한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시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기도 한다.


  세월을 이겨내는 시, 그것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시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까딱할 동안 너무도 변해, 그러한 변화를 따라가기 힘든 세상.


빠름, 그냥 빠름이 아니라 거의 빛의 속도와 맞먹을 정도의 빠름이다. 너무도 빠른 변화다.


그러니 과거의 시가 과연 지금도 통할지...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시들은 시대와 맞물려 있어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30년,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예전 시간 개념으로도 그랬는데, 지금 시간 개념으로 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정도의 변화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는 계속 창작되고, 또 예전 시를 읽어도 요즘에도 그렇지 할 수 있는 시들이 있다.


어쩌면 시이기 때문에 꼭 그 시대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시는 시대를 넘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릴 수 있으니까.


시들을 뽑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집에서 단순 명쾌한 시 하나. 90년대 들어 시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흐름과 다르게 쉽게 다가오는 시. 


그러면서 요즘 세태를 돌아보게 하는 시.


송유미의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 설거지'라는 시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설거지

                                                                  송유미


산더미 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밥공기들을 하나 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 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 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번 비우지 못해

청청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묻은 정(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게 가슴 하나 헹구지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 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강경주 외,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시와반시. 1997년. 99-100쪽.


이 시를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사고외주]라는 책이 생각났다. 자신의 생각조차도 이제는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


설거지, 손으로 하기보다는 식기세척기에 맡겨버리는 세상. 그렇게 자신이 하지 않고 맡겨버림으로써 생각하는 일, 닦는 일을 하지 않게 된 세상.


편리함에 몸을 맡기고 조금 불편한 것도 참지 못하게 된 세상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


마음 닦는 일은 쉽게 되지도 않는다. 참 어려운 일이다. 힘들다. 불편하다. 그리고 마음을 닦는다고 해서 무언가가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닦는 일은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현재를 즐기라는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면... 누가?


마음 닦기도 인공지능이나 식기세척기 또는 로봇청소기처럼 다른 존재가 해주면 좋겠지만, 누가 뭐래도 마음 닦기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마음 닦아야 한다는 동기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닦기는 스스로,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곤하다. 힘들다. 힘드니 포기한다.


마음 닦기보다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것이 얼마나 편한가. 나는 잘하고 있는데, 남들이 못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남 눈에 있는 티끌만 보이는 상태. 한자성어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 이 말 붙어 있지만 순서가 있단 생각이 든다. 나를 닦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 다음에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즉 내 마음 닦기가 된 이후에야 남에게 무어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현재,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


내 마음 닦기는 하지 않고, 내 마음에 때가 묻은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남 탓이니, 그런 남을 다스리기만 하면 내 마음도 닦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느껴지는 행태들이 너무도 많은 요즘인데...


남을 다스린다는 말에는 자기 마음을 닦았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남탓을 하기 전에,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모든 것을 외부에 돌리고 맡기는 세상에서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닦는 일이 무척 힘들어진 것이 요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인데... 90년대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으니...


이 시, 자신의 마음 닦기에는 소홀하면서 남에게 때를 씻으라고 큰소리치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읽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이 시를 읽으면서 과연 나는 마음 닦기를 하고 있었나 반성을 하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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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사랑하는 '나'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존재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다른 존재들은 나로 인해 가려진다.

  

  아니, 다른 존재들은 나에게 들러붙는 방해물이 된다. 거추장스럽다고 여긴다. 


  그런 상태.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나는, 적당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에 집착하면 안 된다.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아니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서효인 시를 읽으면서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이 '질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 즉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 그러한 욕망이 질투로 나타나는 것.


다른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 앞서, 그것을 자신이 지니지 못했다는 결핍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질투 아닐까.


그런 자신을 보면서, 결국 질투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일 수밖에 없음을... 하여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남을 사랑한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 


그 보이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하는 것. 시인... 시...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는 생각.  



      로맨스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늠름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화장실 간다

  오줌을 누는데 보이는 건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니,

  대답 대신 쪼르륵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푸르고 깊은 몸 곳곳에 해변의 모래가 들러붙어서

  사무실에까지 왔다 질투는

  로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내일은 동료와 친구와 선후배와 옆자리와 뒷자리와 동명이인과 같은 직군과 비슷한 또래와 노인과 젊은이와 이토록 연안에서 깊이 추잡스럽겠지만 극적이게도

  바깥은 평온하다. 그것이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서효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문학동네. 2022년. 1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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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절주절. 시인의 독백을 듣는 듯한 느낌. 시인이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나는 내 말을 한다, 당신은 당신의 말로 알아들어라 하는 듯한.


 5부로 나뉘었는데, 각 부에 제목을 붙이고, 그 제목 앞에 숫자가 있다. 무슨 숫자지? 잠깐 고민했는데, 답은(답이라고 할지 잘 모르겠지만) 해설에 나와 있었다. (해설이 이 시집을 읽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연도란다. 17흔적, 06상자, 04연맹, 00프랑스, 99반복. 해설에 따르면 이 시집은 2017년부터 시작해 1999년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


  그렇다면 시집을 거꾸로 읽으면 어떨까?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니... 학교에서 역사(국사)를 공부할 때도 아주 먼 과거부터 배워 현대로 왔으니...


별의 역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별의 탄생, 빅뱅부터 시작해 지금의 우주로 오지 않나? 그런데 시인은 거꾸로 배치를 했다. 시간의 흐름과 반대로. 이는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인가?


시집의 처음에 실린 시, 그러니까 현재를 대변하고 있는 시가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9-11쪽)이다. 채리? 모르는 사람.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사람. 누구나 채리가 되어야 하니까. 적어도 이 시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채리가 되어야 한다. 


왜?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앞자리엔 채리다 ...(중략)... 누군가의 채리가 자리에, 그것도 익숙한 앞에 앉아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에서)


앞자리, 이것을 현재라고 하면, 현재를 인식한 사람만이 과거를 반추할 수 있다고, 즉 의식적으로 과거를 돌아봐야 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에 잠식당해 절대로 앞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하는 듯하다.


이 시의 맨 마지막 문장이 '씨니까'인데, 씨가 바로 시다. 그러니 씨가 발아해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몫. 아니 씨를 자라게 하려면 반드시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씨는 발아하지 않고 썩어버리고 말 테니까.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발아되지 않는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발아하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시를 독자들이 발견하듯이 삶도 자신이 발견해 키워야 하지 않을까? 시라는 씨, 삶이라는 씨.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는 것.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주고 보듬어 잘 자라게 하는 것.


그럼에도 우리네 삶은 '제법 잘살았네'라고만 할 수 있어도 괜찮은 삶이었다는 것. 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제법 괜찮은 시네라고만 해도 제 역할을 한 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스무 개가 겨우 천 원'('동네에서 가장 싼 프랑스'에서. 61쪽)에 팔리는 상품과 같이, 한꺼번에 묶여서 넘어가지 않을까. 자신 스스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다른 존재들과 묶여서 처분하듯이 팔려나가는 상품처럼, 그렇게 홀로 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류에 휩쓸리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제법'이라는 말. 부정적으로 쓰기도 하지만, 아니다. 이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부정 속엔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 녀석 제법 하네.'라는 말 속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기대를 넘어섰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인생을 제법 잘살았다는 것은 기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얘기니, 시도 마찬가지다. 그 시 제법이네라는 말. 이 말은 시라는 씨를 심을 가치를 발견했다는 말이다. 심어서 키울 마음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하여 시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인 '제법,'에서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쓸 뿐이다'('제법,' 중에서. 84쪽)라고 했지만, 시집의 시들이 우리를 '앞자리에 앉게 하고 다음 장을 넘길 수 있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저리 주저리... 하지만 이 주절거림 속에서 삶을 발견하고 시의 씨앗을 심을 마음을 먹었다면, 심은 씨앗과 자란 결과가 결코 같지 않음을, 씨의 상태를 잊고 자란 결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집을 '제법,'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제법,


  한때는 그 문장, 그 단어들은 시였다. 글자와 글자는 접착제로 제법 튼튼하게 붙어 있었고, 뼈대는 비록 얼기설기 엉켜 있었지만 나름 튼튼했고, 알록달록한 단어들은 제법 아름다웠다. 한때는 그 종이에 시가 쓰여 있었다. 비록 별것 아니었지만 분명, 그건 시였다. 잠깐 시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법'이라는 접착제가 제법 많이 쓰였고 현대시라는 관점에서는 좀 모자랄 수도 있었겠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한때,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 시는 분명 시였다. 지금은 제법 시였던 어떤 것이다. 제법 시다웠지만 다, 한때의 일일 뿐이다. 그냥 그 종이 위에는 이제, 검은색 글자들과 약간 색이 바랜 여백들과 나름의 침묵이 남아 있다.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지금 와서는 제법 아쉽지만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쓸 뿐이다.


서정학, 동네에서 가장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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