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줄 알았다. 너무도 유명한 시집이었고, 제목이 된 시는 자주 읽었던 시였으니까.


  그런데 시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만 읽고 있었던 거다. 워낙 유명한 시라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시였으니까.


  그 한 시로도 충분하지만 시집을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집은 처음 간행된 시집과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시집이 다르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시인이 시집의 시들을 바꾸기도 하고, 제외하기도 했다고. 새로운 개정판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19권. 맑고 부드러운 언어로 전통 서정시의 순정한 세계를 펼쳐온 '우리 시대 최고의 감성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3년 첫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부 가름을 다시 하고 연작시를 해체하여 작품마다 제목을 새롭게 달았으며, 초기 시 4편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1979년 초판이 출간된 지 3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슬픔을 수반한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는 정결한 시편들이 여전히 가슴을 적시는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며 고요한 울림을 선사한다.


내가 읽은 시집은 2004년 개정판 16쇄니, 첫 개정판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다르다. 그렇다면 수록된 시도 조금 다를테고. 


뭐, 그런 사정이야 그렇다치고, 시집에 나오는 주된 낱말은 '슬픔''이다. 다른 낱말들 중에 빈도수가 높은 말도 있지만 '슬픔'만 취급하자.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시인이 그렇게 슬픔을 주겠다고 하고,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 13쪽)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기쁨에 취해서, 슬픔을 외면하는 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슬픔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을 멀리하면서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고 슬픔이 사라질까.


아니, 오히려 슬픔을 바라보고, 슬픔을 만나고, 슬픔과 함께해야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슬픔으로 가는 길'에서 - 8쪽)고 했다.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슬픔을 위하여'에서 - 9쪽)


이렇게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슬픔 많은 이 세상도'에서 - 14쪽)라는 시구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정호승 시는 그렇다고 슬픔 속에 함몰되어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호승 시는 움직임이 있다. 가고 있다. 끝에서 멈추지 않고, 그 끝에서 움직인다. 이는 그의 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라는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쁨의 세계로 함께 가기 위해서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사회라고 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라고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다.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슬픔을 생각하자. 나의 슬픔, 남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생각하면 그런 슬픔 속에서 우리는 기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호승 시집을 읽으면 그런 슬픔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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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세 도시가 나온다. 세 도시? 그렇다면 이 도시가 의미하는 사람들은?


  시집이니, 당연히 시인일 거라 생각한다. 아니, 꼭 시인일 필요는 없다. 문인이라고 하자. 


  강릉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이율곡, 신사임당, 허균, 허난설헌? 어라, 모두 예전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를 쓰기도 했겠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면, 강릉은 바로 시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강릉에 산다고 하기보다 강릉 사람이라고 하자. 그에게 강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다. 그러니 시인의 삶에, 시인의 시에 영향을 미친 장소가 바로 강릉이다.


그렇다면 프라하는? 프라하 하면 카프카가 떠오른다. 카프카? 변신... 소설가... 하지만 최근에 읽은 카프카의 시집도 있으니 그를 꼭 소설가로만 기억할 필요는 없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물론 체코어로 작품을 쓰지 않고 독일어로 썼지만, 그를 프라하 사람이라고, 프라하는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엔 함흥이다. 함흥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함흥? 백석?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니까. 그곳에서 자야를 만났으니까. 함흥은 백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가 된다.


이렇게 세 도시는 바로 작가의 삶을 이루는 장소가 된다. 시인은 강릉에서 이렇게 카프카와 백석을 자신 시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즉 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카프카와 백석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강릉, 프라하, 함흥


카프카는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뾰족탑의 이끼와

겨울 안개가

그를 기억한다


내곡동 지나

보쌀 지나

남대천 둑방을 따라

바다로 간다

안목에 가면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갈매기들이 산다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19쪽.


이시에서 왜 함흥? 할 수도 있다. 함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앟으니... 그렇다면 비슷한 제목을 가진 시 한편을 더 보면 된다. '춘천, 프라하, 함흥'이다.


춘천, 프라하, 함흥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귀가 커 외롭던 카프카가 좋고

모르긴 해도, 당나귀를 닮았을 백석이 좋다


멀리 불빛, 불빛 같은 것도 잠기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겸손하게 사라질 때

언덕 위 자취방에 돌아와

주인집 노부부가 아끼는 노란 국화를 바라보는 일도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36쪽.


이 시를 보면 분명하게 백석이 나온다. 그러니 시인의 시에 영향을 준 사람은 카프카와 백석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이 문인들이 아니더라도 도시는 장소가 되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시에 영감을 준다.


그렇게 시가 탄생하기도 한다.


서정적인,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는 시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프카나 백석의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드는 시집이다. 그런 문인들처럼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을 느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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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그 이미지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데, 합쳐지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서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런 이미지들이 어렴풋하게 계속 무엇으로 합쳐지려 하고 있다. 합쳐진 이미지가 시인이 의도한 이미지가 아닐지 몰라도...


  퀼트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각조각들을 모아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하나의 형태 속에 다른 형태들이 있는데, 그 형태들은 독립해 있으면서도 전체의 구성으로 존재하는 것. 모자이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시집에는 서랍이 참 많이도 나온다. 그래서 제목이 된 시에 나온 시어 '퀼트'와 '서랍'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랍 역시 독립된 부분이다. 그러나 퀼트의 조각이 그렇듯이 서랍 역시 홀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때로는 다른 서랍들과 함께 더 큰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서랍은 서랍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퀼트가 여러 조각들의 모임이듯이, 서랍은 더 큰 존재의 일부로 존재할 때 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잃고 내용물도 잃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 인생이 바로 퀼트와 서랍 아닐까 한다. 삶의 단편들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던가. 삶의 단편들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삶이라는 전체 속에서 조망했을 때 우리 삶을 이루는 부분이 된다. 그러니 단편들이라고 하지.


이런 단편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에는 수많은 서랍들이 있다. 그 서랍에 채워놓은 것이 무엇이든, 많은 서랍들을 지니고 살고, 때로는 그 서랍들을 열어 밖으로 내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서랍을 꺼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면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퀼트와 서랍'을 통해 삶의 조각조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삶들이 나라는 삶을 구성하고 있고, 이것들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것도.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늘 말하지만 오독도 독해니까...


한밤의 퀼트(43쪽), 서랍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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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즉, 최선을 다한다는 삶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위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나를 갉아먹어서도 안 되고, 나를 위해서 다른 존재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목적이 되어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칸트의 말을 변주하면)


이런 당연한 사실을 [빅이슈]를 읽다보면 새삼 깨우치게 된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이런 사람들 덕에 이 험난한 사회에서도 희망이 있구나!


SNS가 유행하는 요즘, SNS를 하지 않으면 원시인 취급받는 요즘, 다시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SNS로 충족되지 않는 무엇을 책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 실린 오후의 시각 'SNS는 마약? 세계에 퍼지는 SNS 금지법'이라는 글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많은 나라에서 SNS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좀 살벌한 법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법률로 규제한다고 해결이 될까? 아마도 안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 말아라."라고 금지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SNS를 금지한다고 하지 않을까? 청소년기에는 오히려 금지를 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을까? 더욱 음성화된 SNS활동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후는 시원시원한 결단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가령 종교적인 분쟁이 일어났다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아예 배제하자고 하면 참 간단한 해결책이긴 하지만,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의 본질은 건드리지 않는 방법일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론을 통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스스로 정리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민주주의란 원래 끝없는 토론과 불협화음, 무엇보다 불만족스러운 결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27쪽)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SNS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해도 좋겠네"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면 좋겠네, 이렇게 해도 되겠네. 이렇게 한번 해봐야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순간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마찬가지다. 순간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늘 정리되어야 하고, 간단 명료한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 열심히 산다는 것과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열심히'라는 말에는 다양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 실린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들의 열심이, 나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고 있으니까.


더운 여름, 더 두터워진 [빅이슈]를 읽으면서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이제 다음 호는 선선한 때에 만나게 되겠지.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선선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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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구절은 없다. 그런데 시는 어렵다. 우리 현실의 과거와 현재가 시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고, 때로는 마음을 찡하게 하기도 하는데...


  '니들의 시간'에서 '니들'은 '너희들'의 줄임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너희'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의미한다.


  어떨 때는 나와 함께 하는 존재였다가 어떨 때는 나와 다른 존재로,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으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니들과 달라.'


하지만 '니들'이 없으면 '나'가 있을까? 아니다. '나'는 바로 '남'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남'이 없으면 '나'도 없다. 말장난 같지만, '남'이라는 말의 받침 'ㅁ'은 발판, 토대로 볼 수 있다.


'나'를 올려놓는 토대. 그렇다면 그 토대가 크면 클수록 '나'도 커진다. 그러니 '니들'이 많을수록, '니들'이 클수록 '나'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을 망각하고, '니들'을 자꾸 줄이면 '나'도 줄어든다. '나'도 약해진다.


그 점을 보여주는 시가 바로 '니들의 시간'이다. 1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1연. 창비. 2023년. 35쪽)


그래야 하는 인간이 지금은 어떤가? 이 '니들'을 얼마나 많이 파괴했는가? 마치 지구에 '나'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인간만이 지구의 유일한 생명이라는 듯이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일본에서는 핵폭발로 인한 오염수들을 바다에 방류하고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고 있다.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라는 시를 보자. 그 시에서 시인은 이렇게 절규하고 있다. 


'2023년 8월 24일, / 인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 엘니뇨, 미래의 소년들이여, / 너희 선조들은 핵물질을 열배 희석한 오염수를 바다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 삼십만년 동안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김해자, '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중 1연. 창비. 2023년. 100쪽)


이전에 핵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 1980년대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이미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친환경이라는 이름을 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1년에 또다시 후쿠시마에서 핵폭발을 겪고도...


건설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발전을 할 때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핵발전으로 인해 나오는 엄청난 양의 방사능 폐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는데, 여전히 핵발전, 핵발전하고 있으니... 여기서 도대체 우리는 '나'를 제외한 '니들'을 정말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다르게 체르노빌에서는 이렇게 많은 돈과 물질을 들여 그곳을 폐쇄하고 있다. 시인의 눈을 피해갈 수가 없다.


'나는 비쌉니다 / 초기 자금만 해도 28개국에서 칠억 육천팔백만 달러 기부 받았죠 / 감마선을 견뎌내는 고품질의 강철만 팔천 톤 / 백오십 미터 이중막 / 클 뿐만 아니라 무겁기까지 한 / 내 이름은 아르카입니다' (김해자, '내 이름은 아르카' 중 3연. 창비. 2023년. 96-97쪽)


여기에 묻혀 있는 수많은 '니들'. 더 많은 '니들'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들인 그 시간과 돈과 물질들. 이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돈과 시간과 물질을 절약한다고 더 많은 '니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오염수 방류 아닌가.


'니들'을 죽이는 시간. 아니 '니들'이 살아갈 시간을 빼앗아가는 행위. 그것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러니 시인은 '니들의 시간'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수많은 '니들'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 앞으로 올 니들을 / 니들의 시간을' (김해자, '니들의 시간' 중 마지막 연. 창비. 2023년. 39쪽)


이렇게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 덕에 '우리는 각자도생의  사명을 띠고'(32-33쪽) 살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로 안 좋은 분야에서는 1위, 좋은 분야에서는 아래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씁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이렇게 씁쓸한 마음을 들게 하는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배시시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시들도 많다. 시인은 '니들'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어치운 '니들의 시간'을 안타까워하기도 하지만, '니들의 시간'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한번 '니들의 시간'을 생각해 보자. 이 '니들'과 '나'를 과연 분리할 수 있는지. '니들'이 바로 '나'임을, '나'가 바로 '니들'임을 시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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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17 08: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집과 시인 알고 가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4-08-17 08: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은 시집이고,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김해자 시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