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속력으로 당신이 서 있다'('시인의 말')


  움직임과 멈춤이 한 문장 안에 있다.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말들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 이 말이 안 되는 문장이 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도대체 무슨 뜻이지? 전속력으로라는 말은 속도를 지니고 있는데, 서 있다는 멈춤으로 다가가다니...


 이 문장에서 '전속력'과 '서 있다'를 함께보면서, 어쩌면 서 있음 자체가 전속력으로 자신을 내몰고 있는 행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앞에 서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온 존재, 아니 서 있기 위해서 달려나가려는 몸을 전속력을 다해 반대편으로 끌어당기는, 그야말로 작용을 제어하는 반작용.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 대등한 힘으로 맞서는, 그래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같을 때 멈춤, 즉 정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음을.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은 그러한 존재다. 나 역시 당신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것이 사랑일 것이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때에 사람들은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같은, 하여 사랑에 멈춰있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이 전속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서 있을 때, 우리 역시 전속력으로 시에 다가와 서 있게 되면 이때서야 작용과 반작용이 대등해지고, '시' 앞에서 우리는 서 있게 된다.


단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시와 함께하게 된다. 그렇게 시는 우리와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는 그냥 하나가 아니다. 여럿인 하나다.


하나로 보이겠지만,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서 있기 위해서 작용과 반작용이 끊임없이 균형을 이루듯이 시는 시 속에 수많은 여럿이 서 있는 상태.


그런 시를 읽는 일은 참, '전속력으로 당신이 서 있다'는 시인의 말에서 '당신'을 '시'로 바꾸면, 시에 담겨 있는 수많은 힘들, 움직임들을 의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수많은 힘들, 움직임들이 시에 있기에 시는 멈춰 있지만 늘 움직이고 있다.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시를 이해했다고 하겠는데, 시의 움직임에 휩쓸려 들어가고 만다. 이게 이 시집을 읽은 소감이다.


즉, 멈춰 있는 듯한 시에게 말려들어가 시 속 수많은 움직임에 휘둘리게 된 상태. 하... 참. 제목이 된 시 '무표정'에서 그랬다.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삶이라는 소용돌이와 시라는 소용돌이가 융합이 되어 더 큰 소용돌이를 만든 상태. 늘 다가오는 요일들, 날들... 하지만 그 날들은 결코 멈춰있지 않는다. 전속력으로 달려와 서 있지만, 그 속에는 다시 속도와 속도가 방향을 달리해 있을 뿐. 하여 멈춤으로 인식하는 날들이 결코 멈춤이 아님을.


무표정


  월요일이 비처럼 내리는 밤 일요일 밤 여관 같은 밤 화요일이 엿보는 밤 눈과 시선이 겉도는 밤 0과 1 사이에 세워진 정신병원을 세는 밤 그림자가 피의 성분으로 느껴지는 밤 따질 수 없는 밤 산 잠자리를 흙 속에 묻고 물을 주는 밤 눈물 대신 혓바닥을 삼키는 밤 훔친 메모지와 훔친 연필이 서로를 노려보는 밤 떠나는 기차 대신 떠나온 금요일을 응시하는 목요일 밤 버림받은 수요일 밤 수태되기 전날 밤 기억나지 않는 밤 구운 쥐가 밥상 위에 오른 밤 앙상한 토요일 밤의 이마를 관통한 총탄 자국 웃는 밤


장승리, 무표정, 문학과지성사. 2021년. 19쪽


분명 일월화수목금토라는 요일들인데... 이 요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니 이 요일들은 전속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서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다가온 날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지, 그냥 그렇게 왔군, 갔군 하면서 표정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보내지는 않았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각 요일은 전속력으로 다가오고 또 다른 요일들에 의해 밀려나기도 하지만, 그 날들은 모두 우리의 삶 안에 있음을, 모두가 무표정이 아니라 표정을 지니고 있음을.


시 제목이 무표정인데, 무표정이야말로 수많은 표정들이 대등하게 모여 지닌 표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 시인데... 수많은 날들이 무의미하게 그냥 흘러가지 않듯이, 무표정 역시 수많은 표정의 모여 있는 순간이라는... 우리는 그 무표정 속에서 표정들을 찾아야 함을, 이 시를 통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러한 해석 역시 전속력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서 있는 당신인 '시'를 내가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겠지만...


이 시를 통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 존재들, 아니면 내가 보내는 시간들, 날들 속에 있는 다양함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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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살아 있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그가 떠났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떠난 사람이야 알 수 없겠지만...


  그렇게 자신의 삶을 잘 산 사람은 떠나도 다른 존재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 인정을 받는다는 것, 칭송을 받는다는 것과 다른 개념. 물론 살아 있을 때 인정받고 칭송받으면 좋다. 자신의 행동을 인정받는다는 것, 그것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인정을 위한 삶만을 산다면, 과연 그것이 잘산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참숯. 하나의 삶을 살고 이제 다른 삶을 사는 존재다. 자신을 불태웠는데, 그냥 사라지지 않고 다른 존재들에게 좋은 것을 남겨준다. 그렇게 참숯은 삶과 삶 이후의 삶도 의미가 있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운 사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숯과 같은 사람이겠지.


타지 않으려 버티지 않고, 또 이왕 타버렸으니 그냥 재가 되어 사라져야지 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게 남 뒤에서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존재. 그런 삶. 


어떻게 살아야 이런 참숯과 같은 존재가 될까? 좋은 사회는 이런 참숯과 같은 존재들이 많은 사회일텐데...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다. 양선희의 '참숯'


참숯


  누가 참숯을 한 가마 보내왔네. 쌀통에 두면 벌레를 막고, 옷장에 두면 습기를 먹고, 냉장고나 화장실에 두면 악취를 제거하고, 거실에 두면 공기를 정화하고, 장독에 넣으면 장맛이 좋아지고, 배개에 넣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곱게 갈아 물에 타 먹으면 속병이 씻길 거라며, 참이지 못한 것을 속속 흡수하는 놀라운 색을 얻은 참숯을 보내왔네.


  나도 생을 잘 불태우면

  한번 더 타오를 수 있는

  불씨를 얻을 수 있을까.


양선희, 그 인연에 울다. 문학동네. 2023년 2판 1쇄.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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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시. 충격을 준다. 수직이 수평을 이룬다니... 하, 비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 수직으로 떨어지는데, 허만하 시인은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는 시집을 냈는데, 김정원 시인은 비는 수평을 이룬다고 한다.


  달랑 세 행짜리. 하지만 시에서 행은 중요하지 않다. 행들의 길고 짧음이 시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지 않는다. 시는 시로서 수평이다.


  그러다 수평이라니.. 평평하다는 뜻인가? 평평은 그럼 다 똑같다는 뜻? 아니다. 이때 수평은 다름을 포용한다는 뜻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하늘 아래 제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하늘에서 보면 다 고만고만한 수평 아닐까. 그러니 비는 하늘에서 내려와 너희들은 수평이라고, 평등하다고, 그러니 모두 친하게 지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이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하늘 아래 고만고만한 존재들이 자기들만이 특출난 듯 남들을 무시하는 행태들을 보면 참... 무어라 말해야 할지.


그땐 이 시를 읽으면서 우리 모두는 하늘 아래서 수평이라고, 그러니 모두 잘 지내야 한다고 비가 말한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137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이 존재한 것은 아주 미미한 시간. 그런 우주의 시간에 인간의 역사란 아무리 돌출했다고 해도 평평한 역사. 이렇게 시야를 확대하면 고만고만한 우리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 있는 모습은 좀 그렇다.


더 큰 관점에서 인류를 보면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평평하다. 우리는 수평이다. 이렇게 외치고 싶다. 그래서 시인의 말처럼 '수평은 동무가 참 많다'고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필요한 요즘이 아닌가 싶고.


  비


수직은


곧장 수평이 된다


수평은 동무가 참 많다


김정원. 아득한 집. 푸른사상. 2021년. 13쪽.


그러다 다음 쪽으로 넘기니 또 다른 시. 와, 역시... '비'라는 시에서처럼 우리 모두가 수평이라면, 이제 남탓이 아니라 나를 돌아봐야 한다고... 내 마음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하는 듯한 이 시.


이런 마음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면 너니 나니 하면서 구별하는 분별심이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데... 내 탓이요 운동이 한물 가더니, 이젠 모두 네 탓이요, 네 탓이요 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이것도 역시 내 마음을 돌아보지 못하고 네 마음 탓을 한 것은 아닐지 우선 내 반성부터 하게 되었는데...


   겨울 호수


네가 던지는 돌에 / 내가 부딪히고 / 아픈 까닭은 //

물 샐 틈 없이 / 단단하고 차가운 / 나의 빙벽 때문이다 //

내가 물이라면 / 네가 던지는 돌이 / 상처를 내지 못하고 //

그 돌이 칼이라도 안으면 / 나비처럼 춤추며 가라앉아 / 그만 녹슬고 말 텐데 //

얼어붙은 나의 가슴을 먼저 녹여야 / 복수초도 꽃을 피우는 / 세상에 봄이 온다


김정원. 아득한 집. 푸른사상. 2021년. 14쪽.


그래, 이런 마음의 자세라면 어찌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비난들이 난무하겠는가. 그런 비난이 들어설 틈이 없을 것이다. 칼도 받아들여 녹슬게 하는 마음일진대, 어찌 남을 향해 날을 세우겠는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내 마음을 열지 못하고 꼭꼭 닫아걸고, 얼어붙게 할 때, 그때 너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다침을 이 시를 통해 생각하게 되는데...


이렇게 시집을 읽어가면서 마음을 녹여가고, 열어가고, 그러다가 '어머니 1~14' 연작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하다가, '도긴개긴'이라는 시를 읽고, 햐! 이런 일, 비판도 이렇게 부드럽게 할 수 있구나, 이런 비판 누가 트집잡을 수 있겠는가 하고 감탄을 하기도 하고.


  도긴개긴


토니 모리슨이 쓴 소설           

[The Bluest Eye]를 읽다가

먼 산 쳐다보며 뜬금없이 

지앙스런 상상을 한다


숯검정 같은 흑인을

"깜둥이"라고 경멸하는 

좀 덜 검은 혼혈아를

"참 어처구니없는 놈이네"

하고, 한국인이 비웃듯이


전라도 사람을

"홍어좆"이라고 멸시하는

일베 철부지를

"헐 느자구없는 새끼네"

하고, 콧방귀 뀌는 콩고인을


김정원. 아득한 집. 푸른사상. 2021년. 81쪽.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누군가가 이런 시를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으니... 시집에 실린 시들, 마음을 푸근하게 감싼다. 시를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각박해진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닌 시들이다.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좋은 문학은 다른 문학과 연결되어 있으니, 한 작품이 다른 작품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문학이 좋은 문학이기도 하니까.


(참고로 지앙스럽다에서 지앙은 전라도 사투리로 '말썽'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고 하고, '느자구없는 놈'에서 느자구는 '싹수'의 사투리라고 한다. 그런데 지앙스런 상상이 말썽이 되는 상상이라고 하기엔 좀... 그냥 남들이 하지 못하는 나만의 상상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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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자치단체 선거, 사전투표일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전투표에 참여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저번 선거 때보다 투표율이 높게 나왔으니...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투표하기 전까지 수많은 소리들을 듣는다.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소리들.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소리들. 이 일에는 자신이 적임자라는 소리들. 상대를 비방하는 소리들. 소리, 소리, 소리 들.


  수많은 소리들에 싸여 살아가고 있지만 평소에는 그 소리들을 잘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지낸다. 그러다 선거철이 되면 다른 모든 소리들을 누르는 후보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래도 안 들을래? 이래도 안 들려? 하는 듯이 사방에서 여러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들, 색깔로 바꾸면 무슨 색깔일까? 


소리를 볼 수 있을까? 볼 수 없겠지. 듣다와 보다는 다르니까. 하지만 듣다와 보다가 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다를 뿐, 외부의 존재를 내게로 들여오는 과정이 바로 '보다/듣다'일 테니.


장시우 시집을 읽다가 와, 이 시인, '소리'에 대해서 이렇게 많은 시를 썼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대부분 소리다. 소리, 소리, 소리. 그런데 소리를 볼 수 있겠단 시들이 있다. 또 시 중에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114-115쪽)이라는 시도 있다.


그래, 소리에 빛깔이 있다는 말은 색이 있다는 말이니까. 소리 역시 자신들만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말소리로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니... 소리에 색깔이 있고, 그 소리들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소리, 개성 있는 소리, 자신만의 소리를 듣지/보지 못하고 그것을 뭉뚱그려 보고/듣는다면 어떨까?


그런 세상은 참 삭막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라면 사람을 어느 한 쪽으로 딱 규정하고 다른 면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고 대우하지 않을까? 이런 세상이라면 사람들끼리 교류가 없어지고, 오로지 내 편 아니면 다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지 않을까.


시인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많은 소리들을 읽으면서, 문득 색깔이 떠올랐고, 그러다 아주 오래 전 학창시절, 미술 시간에 배웠던 삼원색을 합치면 검은색이 되고, 빛의 색깔을 합치면 하얀색이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검은/하얀'의 짝을 '어둠/밝음'으로 치환한다면(이렇게 나누는 것도 색깔에 대한 고정관념이겠지만) 지금 세상에 나도는 수많은 소리들을 합치면 무슨 색깔이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슨 색깔이 들까? 2024년 겨울부터 2025년 봄까지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 그들을 '빛의 혁명'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한다. '빛의 혁명'이라는 이름 기가 막히다. 바로 이 빛의 색깔들이 합쳐지면 흰, 밝은 색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엄이라는 어둠을 몰아내는 밝은 빛, 이것이 바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내는 소리들의 합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소리는 빛의 색깔을 띨 수 있다.


하지만 소리가 다 그런가? 빛의 색깔이 아닌 어둠의 색깔을 지닌 소리들도 있지 않은가? 사람을 벼랑으로 내모는 소리. 그런 소리들이 합쳐지면 검은, 어둠의 색깔로 변한다. 세상 역시 캄캄한 어둠의 세상이 된다.


지금 선거에 나선 사람들의 말,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 과연 빛의 말일까 아닐까. 그들의 말이 합쳐져 밝은 색이 될까, 아니면 어두운 색이 될까? 그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바로 그러한 판단, 어두운 색으로 가는 말들을 막을 수 있는 귀,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빛의 말들이 더 우세해지도록 하는 일. 우리 스스로 빛의 말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남에게 상처주는 말, 남을 비방하는 말, 자신만을 드러내는 말, 그 말들은 합쳐지면 어두워진다. 다른 존재를 가린다. 그리고 자신마저도 가린다. 아니 자신의 좋지 않음을 가린다. 그런 어두운 존재와 함께 어둠 속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빛과 같은 밝은 말, 합쳐져 더 밝은 세상이 되는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은 다른 존재들도 환한 세상에 있게 한다.


합쳐져 어두운 소리를 내는 소리들이 합쳐지지 않게. 그 소리들이 합쳐지지 않고 각자의 소리만을 낸다면, 그 소리 역시 제 색깔을 지닌 소리일 뿐이니까. 물론 합쳐져 밝은 소리가 되는 소리는 홀로 소리를 내도 좋지만 합쳐 소리를 내도 좋다. 밝은 세상을 만드는 소리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소리들은 어떤 소리인가? 우리의 소리에는 어떤 빛깔을 입혀야 하나? 아니 인위적인 색이 아니라 자연스런 빛의 색깔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 소리들이 합쳐져 하얗고 밝은 색이 세상을 뒤덮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시우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말도 어두운 색으로 가는 말이 아니라 밝은 색으로 가는 말이 되도록 해야겠다는...


자, 시인처럼 우리 주변의 소리들은 무슨 색깔일지, 우리도 한번 생각해 보자. 특히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소리에 빛깔이 있다면

이 방 안에 가득한 고요는

창밖에서 가끔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세탁기 빙빙 돌아가는 저 소리는

벽 너머 들려오는 누군가 씻는 물소리는

타닥타닥 글을 쓰며 내가 만드는 소리는

주전자에서 물 끓어오르는 저 소리는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나팔꽃 벙그는 소리는

참새 떼 달음박질하듯 나무를 옮겨 가며 지저귀는 저 소리는

온 종일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방 안에 가득할 때

그 색들은 무슨 빛깔이어야 할까

그저 가기 서운했던가

검정 비닐을 데리고 가는 저 바람의 색은 또,

지금 후두둑 떨어지는 소나기

저 빗방울 소리는 어떤 색일까

소리에 맞는 색을 찾아 주느라

나는 온종일 햇살을 켠다


장시우.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걷는사람. 2021년. 114-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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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이 시집의 '후기'에서 김기창 화백의 미수전(米壽展)에서 본 그림을 보고, 환한 웃음을,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한 웃음이 초월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헤게모니 -권력(들)에 대한 검색과  전복으로서의 웃음'(95쪽)이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웃음은 불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읏음으로서 권력을 넘어서는 경우.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웃음을 웃지 못한다.


  권력은 웃음조차도 탄압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서 말하는 '다친 무릎'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다친 무릎'들도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는 '다친 무릎'들도 있다. 


이 시집에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다친 존재들과 스스로 외부의 힘에 동화되어 다친 무릎들이 나오는데...


우선 외부의 힘에 스스로 동화되는 다친 무릎들은 시집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식탁이 밥을 차린다''제국주의가 간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편승해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그것들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사람을 소비한다. 사람은 그것들이 '나를 소비해'라는 말을 요청으로, 부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것들을 거부했을 때 자신이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느낌,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그것들의 요청을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당연히 따라야 할 것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그러니 내가 신용카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 신용 카드가 나를 분실 신고한다'('식탁이 밥을 차린다' 중에서. 9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니나리치가 너를 부른다 / 향기로운 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 / 불란서 멋쟁이로 꾸며주겠다고'('제국주의가 간다' 중에서. 12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여기에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하는가.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나라 아니던가. 몸 어디 한 군데쯤은 손을 대야 사회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풍조.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성형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남의 이목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 시집이 2000년에 나왔는데, 이러한 소비풍조, 또는 사람이 상품에 끌려다니고, 또 스스로 상품이 되어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지는 않았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한 시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는 없다. 


오히려 광고를 통해 사람을 이렇게 상품에게 종속되게 하거나 스스로 상품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시인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웃음일 텐데... 상품으로, 또는 상품이 되어 만족스러워 하며 내는 웃음이 아니라.


다음에 시집에 실린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이 나온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다칠 수밖에 없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시인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과의 연대를 꿈꾸면서.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은 누구인가? 아예 '다친 무릎'이라는 구절이 제목에 들어간 시도 있는데,('<다친 무릎>에서 시작된 인생'. 60-61쪽) 이 시를 읽고 다른 시들을 찾아보면 쉽게 '다친 무릎'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게 된다.


시집에 나오는 존재들을 살펴보면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할머니들'('여왕의 날씨'에서. 44쪽)과 '스페인 기병대에 학살당하고 능욕된 ... 홍인의 어머니와 딸들'('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7쪽)이고, '1980년 5월 19일 광주 /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관통상 / 열아홉 살 처녀 손옥례'('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8쪽) '들'이다. 


이런 존재들이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권력에 대해 정면으로 웃을 때 그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발휘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우리를 밟아도 우리는 일어선다. 결코 밟힌 채로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 이것은 사회의 소수자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반, 퀴어'라는 말을 써서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과 통한다.


이 시집에서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이반'이라고, 'ㄹ'을 탈락시킨 말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그러한 모습과 비슷한 시가 나오는데, 그 시 제목이 '<일상>에서 ㄹ을 뺄 수만 있다면'(68-70쪽)이다.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 보편이라는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과 다른이라는 의미의 이상하다의 이상일 수도 있겠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이상'일 수도 있다. 즉 일상에 매몰되어 이상을 보지 못하면, 다른 말로 '다친 무릎'들을 보지 못하면 결코 '이상'에 도달할 수가 없다. 


시인은 이 시에서 'ㄹ'을 무릎으로 보고 있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을 'ㄹ'에 빗대고 있어서 우리가 일상에서 반드시 'ㄹ'을 빼야 함을, 누군가의 다친 무릎을 괴고 생활해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가 실현되는 때로 시인은 상상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비록 현실에는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올 수 있고, 또 와야만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시간. 바로 13월의 13일. 13이라는 서양에서 불길하다고 여기는 숫자를 시인은 이 시집에서 권력관계를 뒤집는 시간으로 설정한다.


이것 역시 웃음의 힘이다. 불길한 시간, 금기의 시간은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런 시간을 '다친 무릎'들이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의 시간을 뒤집어버리는 것. 너희가 그렇게 떨고 있는 시간을 우리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 긍정성, 낙관.


시인은 '13월 13일의 사랑'(77-78쪽)과 '13월 13일, 마지막 축제'(79-80쪽)에서 그러한 뒤집음,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친 무릎'들이 서로를 부등켜안으며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꿈꾸며, 더이상 '다친 무릎'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시인. 그러한 시들.


시집을 읽다가 몇몇 기사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말도 안 되는 광고를 한 (차마 그들의 광고 문구를 쓸 수가 없다.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독이다.) 모 기업(굳이 안 밝혀도 다 아니까),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막말을 하며서 시위를 하는 몇몇 단체 사람들... 그리고 장애인 시위에 대한 이번 판결. 


지하철역 시위를 하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글을 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에게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확정했다는 기사. (‘지하철역 시위’ 전장연 대표, 공동재물손괴 벌금형 확정)


이 기사를 보면서 이 시집에 나온 '다친 무릎'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우리가 그들의 다친 무릎을 보듬고 고쳐주려고 하지는 못할망정, 다친 무릎을 더 세게 내려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시인이 시에서 말했던 'ㄹ'을 빼는 행위와는 정반대의 판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 시위 방법의 정당성을 묻기 전에 먼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다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헌법, 헌법하는데,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고, 34조에는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와 2항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분명 '모든' 국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이동할 권리는 행복추구권에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도 포함이 된다. 그러니 장애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제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실행되지 않아서 의무를 시행하라고 시위를 하는데, 시위의 방법을 가지고 유, 무죄를 따지는 것은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법원은 국가에게 시위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나? 국가가 너무 포괄적이라면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실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 시위의 적절성으로 판결하기 전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부작위로 인한 장애인들의 불편'을 먼저 따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 짙어졌는데,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다친 무릎'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시인이 후기에서 한 말처럼 '나의 시가 그런 유쾌한 검은 폭소의 실존적 울림을 가졌으면 좋겠다'(95쪽)고 했는데, 정말 그러한 웃음을 웃고 싶다. 그러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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