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 소멸 등으로 더 이상 제작, 유통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이제 이 시집은 헌책방에서 구하든지,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한다. 


  서정춘 시인이 젊은 시절에 한 것처럼 어쩌면 이 시집을 빌려다 한 편 한 편 손으로 써야할지도 모른다.


  필사. 시를 읽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쓰면서 그 시를 읽고 또 쓰면서 생각도 하게 되니까. 그렇다면 절판된 시집, 찾아서 필사를 하는 것도 시를 읽는 한 방법이 되겠다.


필사하기가 힘들다면 그냥 읽으면 된다. 어느 도서관에든 있을 테니까. 나 역시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왜 미리 구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를 읽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죽편]을 만난 것이 그렇게 일찍은 아니니까, 서정춘 시인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가능하면 이 시인의 시집은 다 읽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번 시집도 역시 짧다. 서정춘 시인은 긴 시를 쓰지 않는다. 언어를 다듬고 다듬어서 시로 내보낸다. 그렇다고 모두 짧지는 않다. 이 시집에 무려(? 서정춘 시인의 시라면 무려라는 감탄사가 들어갈 수도 있다. 다른 시인들에게는 그것도 짧은 시에 해당할 수도 있지만) 두 쪽에 걸친 시가 하나 있다. '기러기'라는 시다. 


하지만 다른 시들은 모두 한 쪽에 들어 있으니, 특히 제목이 된 '귀'라는 시는 한 문장이다. '귀'가 무얼까?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달이다. 하, 낮달. 


                              귀


  하늘은 가끔씩 신의 음성에겐 듯 하얗게 귀를 기울이는 낮달을 두시었다


서정춘, 귀, 시와시학사. 2005년 초판 2쇄. 9쪽.


이게 다다. 가끔 낮에 보이는 달. 그 달을 보고 시인은 신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귀라고 표현했다. 참신한 표현. 이렇게 두드러지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또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은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를 들으려 애쓰는 사람은 마음을 열고 들리지 않는 소리조차도 들으려 애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존재들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런 귀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열린 귀,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사람.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열린 사회다.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찬가지로 시인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또는 보려고 하지 않는 것들, 또 들으려 하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보여주는 존재가 아닌가 했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시인들이 쓴 시들을 읽으면  그러한 귀를 가지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즐거운 시 읽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류가 좋다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다. 하류... 흘러 흘러 도달하는 곳. 아니 도달하는 마지막 지점이 아니라 온갖 곳에서 온 물들이 모여 새로운 물,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곳.


  그곳은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니다. 다른 존재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 그곳까지 오기 위해 수많은 곳들을 거쳐야 했던 물들이, 다른 존재들이 모였다가 다시 길을 나서는 곳.


  하류에 도달하기 위해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와야 했던 존재들. 그런 소중한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시를 읽으며 하류의 고요함, 풍성함, 다양함, 그리고 잠시 휴식을 생각한다. 고단한 여정에 쉼을 주는 곳이 하류라는 생각.


이 하류를 좋아하는 시인. 그런 시인이기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짧은 시들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만나 감탄을 하곤 한다.


대나무에 관한 시 중에 '대밭일기'라는 시가 있는데, 우리가 쑥쑥 자라는 모양을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고 표현한다. 비가 그친 뒤에 죽순이 쑥쑥 자라난 모습을 표현하는데... 


이 시에서 시인은 '비 갠 뒤 / 대밭 속 / .../ 죽순이 올라 있다 / ... / 竹竹'(29쪽)'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죽죽 자란다를 한자어 대 죽(竹)자를 써서 죽죽(竹竹)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소리내어 읽으면 '쭉쭉'으로 읽히기도 하고, 하하 죽순이 올라오는 모양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표현이 참신한 시도 있지만, 지금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겨울에 눈사람이 빠질 수야 없지. 시인은 그러한 눈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읽으면서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미소展


  아이들이 눈 오시는 날을 맞아 눈사람을 만드실 때 마침내 막대기를 모셔와 입을 붙여주시니 방긋 웃으시어 햇볕도나 좋은 날에 사그리로 녹아서 입적하시느니


서정춘, 하류, 도서출판b. 2020년. 10쪽.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시. 이런 시들을 만날 수 있는 시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정춘이라는 시인]을 읽고, 서정춘 시인의 시집이 그리 많지 않으니, 다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다.


  짧은 시, 또 적은 편수의 시들이 실려 있는 시집. 그러나 짧은 시에서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니, 참 진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몇 권의 시집에 다른 시집을 구하려 했더니, 이런 절판이란다.


  이 시집도 그렇다.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해보면 이렇게 나온다. 품절이라고... 그리고 이유가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시집들이 절판이 되어 구하기 힘든 상태. 운이 좋게 여러 도서관을 찾아보니, 있다. 오래 전에, 15년 전에 발간된 (이제 16년 전이라고 해야겠지. 2010년에 발간된 시집이니) 시집이라 몇몇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아주 못 구해 읽을 시집은 아니다.


하지만 소장은 할 수 없다. 헌책방을 뒤져 운 좋게 구하면 모를까, 품절은 곧 절판과 같은 뜻이고, 이는 더이상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아쉽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구할 수 있는 시집을 구해서 잘 읽을 수밖에. 이 시집, 읽으면서 짧음의 미학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시란 짧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짧게 표현하기 위해서 잘라낸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잘라낸 말들을 시로 살아난 말들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서정춘은 한 쪽을 넘기는 길이의 시를 쓰지 않았다. 시들이 모두 한 쪽에 한 편씩 들어가 있다. '새벽', '돛'이라는 시는 두 줄이다. 그 두 줄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새벽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주로 시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시인은 이를 청각과 시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시를 보면 '흰 꼬리 고양이 울음소리가 / 문지방에 희미하게 걸렸습니다'(31쪽)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새벽이다. 이런 시들... 이토록 진한 서정이라니... 그냥 읽으면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한번 더 마음 속으로 음미하고, 눈을 감고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시들.


좋다. 이 시집의 제목은 '빨랫줄'이란 시에서 가져왔다. 그 시를 보자. 빨랫줄.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 마당 있는 집에서는, 또는 옥상이 있는 집에서는 빨랫줄이 있었다. 그런 빨랫줄을 보고 시인이 표현한 것을 보자. 이렇게 진한 서정이 시에 담겨 있다.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서정춘, 물방울은 즐겁다. 천년의시작. 2010년. 15쪽.


다음에는 서정춘의 절판된 시집인 [귀]를 찾아 읽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이 내린다. 

  겨울이면 당연히 눈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내 눈이 한번도 오지 않으면 이상하고 섭섭하다.

  눈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눈은 다른 식물들에게도 물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강수량이라고 하는데, 이 강수량이 부족하면 우리뿐 아니라 자연도 고통을 겪는다. 강수량은 강우량과 강설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니까, 겨울엔 눈이 와야 한다.


  그런데 눈이 오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계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에 큰 지장은 없더라도 출퇴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때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눈이 오면 마냥 좋았다. 많은 것을 눈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썰매 타기 등등. 또 하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남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기도 하고. 이렇게 어린 시절의 눈은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시간의 문제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무엇을 급하게 할 이유가 없다. 눈이 오면 그냥 놀면 된다. 바쁘게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린 시절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이 많다. 그러니 급할 일도 없다. 


여유있게 느리게 시간을 즐기니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해가 쨍하든 날이 흐리든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논다. 이것은 바로 여유에서, 느림에서 왔다. 그 느림이 나이들어가면서 점점 빨라진다. 여유는 줄고, 시간은 빨라진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길은 도로가 되고 꼬부랑길은 쭉 뻗은 직선 도로가 된다. 길을 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도로를 가는 존재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느리게 갈 수가 없다. 최근에 많은 도시에서 최고속도를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빠름이 사고를 많이 일으키니 조금 느리게 가면 여유가 생기니 사고가 줄지 않을까 해 펼치는 정책. 실제로 사고율이 많이 낮아졌다고도 하고.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 노인 보호구역에서는 그 속도를 더 늦추기도 하니까. 이런 속도를 다들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실제로 도로에 나가보면 그 제한속도를 지키는 차들은 별로 없다. 물론 단속카메라 앞에서는 잘도 지킨다. 빠른 시대에도 범칙금(과태료 등등)을 내지 않고 빠르게 가려고 하니까. 시내 도로도 그런데 고속도로로 가보면, 제한속도 카메라 앞에서만 지키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그건 참 좋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상대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는 빠름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눈은 반갑지 않다. 느리게 가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고가 꼭 눈 때문일까? 눈이 오면 더 천천히 가라고 그렇게 경고를 하지 않는가. 천천히, 느림을 받아들이면 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 그런 느림을 참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 아닌가. 그러니 책임을 눈에게 지우지 말자. 


눈이 내리면 잠시 쉬라는 거구나, 조금 늦게 여유있게 가라는(하라는) 거구나 하면 되는데, 현대인의 생활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유홍준의 시집을 읽다가 '눈'을 떠올리고, 느림과 여유<->빠름과 조급함을 생각했다. 바로 이 시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데, 발상이 기가 막히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게 쩍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뭉툭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은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남해나 거제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넣었을 거북!

이 망할놈의 나라 도로 곳곳을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다진다

갈라 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진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한다


유홍준, 나는, 웃는다. 창비. 2007년 초판 3쇄. 56쪽.


논바닥이 가뭄에 말라 땅이 갈라지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고 하는 표현은 봤지만, 도로 위 아스팔트가 갈라진 것을 거북이 등으로 표현하다니... 도로, 빠름의 대명사. 거북, 느림의 대명사. 둘의 기묘한 대조. 우리의 생활이 느림을 용납하지 못함을 이렇게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이 현대인의 생활이지 않을까. 도로의 이런 상황을 부실공사, 과적으로만 보지 말자고, 그것은 빠름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이 일으킨 문제라고. 이런 상황이니 '눈'도 좋을 리가 없다. 하여 유홍준의 이 시를 읽다가 눈을 생각하고, 내 생활이 너무 빠름과 조급함으로 치우치지 않았는가 반성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흉터''문 열어주는 사람'이 묘한 짝이구나 했는데, 이 두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꽁꽁 감추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것 또는 갇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꺼내주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천국 가는 길'이란 시도 좋았고, '아교'라는 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벌레 잡는 책'을 읽으면서는 낄낄거리기도 했고, '북천'이란 시를 읽으며 왜 서정주의 '동천'이란 시가 떠오르지, 나중에 두 시를 연결해 봐야지 하는 생각도 했으니.


여러모로 읽기에도 좋고 생각도 할 수 있는 그런 시집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무엇일까? 시집 제목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비가(悲歌)'다. 말 그대로 슬픈 노래.


  그런데 시인은 이 시에서 이 노래는 '아직 한번도 불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는 슬퍼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슬픈 노래는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 길을 지우고 난 후에 /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사막 같은 악보. 무엇이 있지. 무엇을 찾을 수 있지. 백지라고 해도 좋을 듯한 표현인데... 그만큼 마음에 모래만이 가득한 상태. 바람이 불면 이 모래가 흩날려 곧장 제 형태를 바꾸곤 하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형태가 바뀌어 버리는 사막. 그래서 누구나 다 다른 모습을 기억하는 그러한 사막. 사막 같은 악보. 이런 사막같은 악보가 쉽게 드러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 또한 제 마음을 드러내기 힘들다. 밖으로 표현하지 못해 안에서 안에서 메말라가는 마음.


이렇게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는 진정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일 것이다. 


그런데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신의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서 있는 사내 2'라는 시를 읽으며 어쩌면 이 사내와 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슬픈 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서 있는 사내 2


  쑥부쟁이 칡덩굴 얽히고설키며 철 따라 피고 지던 꽃들과 풀들의 흙을 밀어내어 논을 만들고 밭을 일구다가 꿈같은 속세의 끄트머리라고 당간을 세우고 금천을 넘게 하더니 어느날 불타고 무너져 내려 인의도덕을 서원하는 마당이 되더니 다시 부수고 그 자리에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리는 전답이 되었으니 이 조화는 사람의 일인가 세월의 장난인가

  큰길 오가던 사람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고 후세에 비석으로 한을 달랜들 금 가고 마음 모서리 떨어져 나간 채 서 있는 저 사내의 삭은 가슴만 하겠는가


*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흥법사지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문학의 전당), 2017년 초판 2쇄. 44쪽.


아마도 시인은 원주 흥법사지에 갔으리라. 거기서 느낀 점을 시로 썼으니, 시집에 작은 글씨로 *표로 장소를 알려주려 했겠지.


산에서 절로, 절에서 서원으로, 다시 서원에서 전답으로 바뀌었던 과정.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오고갔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 서려 있을 텐데, 그것을 지켜보는 사내의 심정은 어떨까?


그 사내의 삭은 가슴에서 나오는 노래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아닌가. 그런 노래, 듣고 싶은가. 아니 그런 노래는 불러지면 안 된다. 불러지게 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마음이 사막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마음을 사막으로 만들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슬픈 노래를 만들게 해놓고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들은 또 누구인가.


그런 자들로 인해서 슬픈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왜, 슬픈 노래는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에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충분한 애도가 끝나야 그때서야 비로소 슬픈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슬픈 노래가 사막 같이 변한 마음에 오아시스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위안해주기 위해서는 슬픔이 지나가야 하니까. 그런 슬픔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하여 '삭은 가슴'을 지니지 않게 해야 하니까.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염없이 슬픔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데, 그럼에도 슬픔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되듯이, 그렇게 시집을 읽으며 희망을 찾는다.


           비가(悲歌)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불러지지 않은 그 노래는

슬픔이 불길처럼 흘러간 후에

강물보다 더 우렁우렁 눈물 쏟아낸 다음에

끝내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길을 지우고 난 후에

사막 같은 악보를 드러낼 것이다

슬픈 사람은 노래하지 않는다

외로워서 슬픈가

슬퍼서 외로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어디쯤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

슬픈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부르는 그 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동네(문학의전당), 2017년 초판 2쇄. 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