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비난하려는 의도로 쓰는 말들이 있다. 그 말들이 혐오 표현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쓴다. 그런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반대로 그 표현을 자신들이 먼저 쓴다. 그래, 이 말, 나는 이렇게 쓴다 하면서.


  그런 말 중에 '퀴어queer'란 말이 있다. 이상하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쓰던 말들을, 그것이 어때서? 우린 너희와 달라. 그 다른 점이 바로 우리 특징이야 라는 듯, 당당하게 쓰고 있는 말.


  요즘은 퀴어란 말을 혐오 표현이라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어의 사용을 뒤바꾼 것이다. 혐오 표현에서 당당한 표현으로. 그 표현 속에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더 드러내는 쪽으로. 퀴어 축제가 있으니.


'이반'이라는 말도 있다. 혐오 표현이 아닌 말인데, 이 말은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쓰던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일반인, 일반인 하는데, 이 일반인에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기준과 다른 사람들은 정상성이 결여된 사람들이고, 이들은 일반인의 범주에 들기 힘들었는데...


이 말을 뒤집는다. 그래? 너희가 일반이라고? 그럼 우린 이반이다. 하여 이반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퀴어와 비슷하게 그 말이 지닌 의미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들을 표현하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


피하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맞서는 것이다. 언어의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이 그 의미를 재창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서게 된다. 사고방식을 넘어서면 태도가 달라진다. 당당해진다. 그래,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홍어'라는 말이 그렇다. 바다에 사는 생물 이름으로만 쓰이지 않았다. 특정 지역을 비난할 때 쓰였다. 비하하는 말, 혐오 표현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은 홍어가 특정한 지역만의 생물이 아니다. 홍어는 전국에서 요리에 쓰이는 생물이다. 생물? 아니 죽어서 발효되어 더 인기를 끈다. 회로도 먹지만 삭혀서 먹는 것이 더 잘 알려진 요리다.


독특한 냄새, 톡 쏘는 맛. 홍어를 어찌 비하할 수 있단 말인가. 그토록 즐기는 사람이 많은 음식을.


그러다 홍어를 '퀴어'나 '이반'처럼 쓴 시를 만났다. 시집 전체가 홍어 예찬이다. 당당하다. 우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긴 이름도 홍어(洪魚)다. 생김새가 넓적해서 홍어라고 하겠지만, 어느 곳에서나 삭혀서도 먹을 수 있어서 널리 쓰이는 물고기라고 홍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우리와 함께 하는 홍어. 그런 홍어를 문순태 시인시를 통해 우리 곁으로 가져온다. 언어의 의미 역시 긍정적으로... 홍어는 이제 당당한 우리의 음식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개성적인 존재가 된다. 누구도 무시해서는 안 될.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라는 시에서 전라도의 힘이라고 하지만, 이때 전라도는 특정 지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를 이루어낸,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우리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우리들이 바로 홍어다.


홍어, 전라도의 힘이여


너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비린내 나는 물고기가 아니다

짓밟힌 민초들의 울부짖음이고

애원성(哀怨聲) 판소리 가락이자

동학농민군의 죽창이거나

임을 위한 행진곡이며

눈물 머금고 핏빛으로 피어난

오월의 무등산 철쭉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를

음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불꽃같은 맛의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다

입에 넣고 씹기도 전에

폭발하듯 툭 쏘는 저항과

숨막히는 최루탄 냄새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자는 것

함께 홍어를 먹는다는 것은

더불어 홍어가 되자는 것

오래 삭힐수록 더 날카롭게

되살아나는 전라도 기질

아, 온몸 떨리게 하는

전라도의 힘이여


문순태, 홍어, 문학들. 2023년 초판 2쇄.  14쪽.


어디 전라도만이겠는가? 독재에 저항하는 우리 민중들은 전국 도처에 있었으니, 홍어가 전국의 모든 사람이 먹는 음식이 되었듯, 이렇게 홍어는 우리에게도 불의에 저항하는 힘의 상징이 된다.


이렇게 홍어는 이제 저항하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상징이 된다. 함께함,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을 대표하게 된다. 그렇게 홍어는 시인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홍어의 톡 쏘는 맛을 톡톡히 보여준 시간이다. 홍어가 먹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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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이 온다]에 출판사 직원인 은숙이 나온다. 광주를 겪은, 그러나 민주화가 되지 않은 시대, 출판 검열의 시대. 검열관에게 뺨을 맞은 은숙.


  엄혹한 시대다. 수많은 죽음을 겪고도 다시 죽음과 같은 검열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시대. 소설 속 이야기지만, 그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느 날 시집을 설명하는 글에서 시인 김혜순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만나게 되었다.


  뭐 망설일 것 있나? 읽어봐야지. [소년이 온다]가 소설로 쓰였다면, 시는 그런 사건을 좀더 압축적으로, 감정적으로 전달해줄 테니.


  뺨 일곱 대를 맞았다고 한다. 한 대에 시 한 편. 시인은 그 분노를 시로 쏟아내었다. 하지만 밝힐 수는 없는 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는 일. 시 자체가 직설이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감정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니.


차마 일곱 번째 시는 발표하지 못했다고, 어디엔가 두었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는데... 


'경찰서에 따라가서 뺨을 일곱 대 맞은 적도 있었다. 맞으면서 숫자를 세었다. 하숙집에 엎드려 뺨 한 대에 시 한 편씩 출판사를 결근하고 썼다. 그 시들을 몇 년 묵혔다가 이 시집에 실었다. 마지막으로 쓴 일곱번째 시는 걸릴 것 같아 애당초 넣지 않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집엔 여섯 편만 들어 있다.' (2017년 복간본, 시인의 말에서. 아마 1988년 초판본에는 이런 말도 싣지 못했으리라)


이런 사건을 '그곳'이란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곳은 어떤 곳인가?


'세계 제일의 창작소' (그곳 1)이고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져 떨어지는'(그곳 1) 곳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어진 사실은 진실처럼 유통이 된다. 그런 시대를 거쳐 지금은 최소한 그러한 거짓들이 사실로 둔갑하는 세상은 아닐 거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스토리와 테마 들이 만들어지는, 세계 제일의 창작소'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버젓이 사실을 왜곡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으니... 그곳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그곳에서 창작되는 많은 스토리들이 우리 삶을 옥죄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곳의 존재를 안다. 그곳이 실제했음을, 그곳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스토리와 테마들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곳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나 만나는 '그곳'이 되어야 한다. 


복간된 김혜순의 시집 [어느 별의 지옥] 맨 앞 부분에 실린 '그곳' 연작시 여섯 편. 그러한 그곳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지옥은 꼭 죽어서만 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시집 제목인 '어느 별의 지옥'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읽어 본다. '그곳'과는 다른 의미겠지만.


  어느 별의 지옥


무덤은 여기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두 개의 무덤 아래

죽은 자들이 모여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달을 올리고 끌어당기는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또 한세상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초승달 떠오를 때

기지개 켜는 곳

뱀과 뱀이 입 맞추고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되살아나고 뒈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문학과지성사. 2025년. 초판 2쇄.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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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봄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분들도 조금은 지내기 편해질 수 있겠지.


  계절로 인해 편해지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 분들이 자신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제공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이 더 좋겠지만, 아직은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이번 호에는 연예인 엄태구 씨가 나와 빅이슈 판매 도우미로 활동했다는 기사, 특히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더욱 훈훈해졌고.


읽다가 202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가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이란 단어를 선정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63쪽)


좀 무서운 단어지만, 뇌가 썩는다는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이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편협함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알고리즘이라는 말과 '뇌 썩음'이라는 말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알고리즘이 무엇인가? 자신의 성향, 취향에 맞는 것들을 연이어 제시해서 그것들을 계속 보게 만들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틈을 주지 않는 것 아닌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 그것도 콘텐츠(내용이라고 해야 하나)만 달리해서 계속 본다면, 편향적 사고를 지닐 수밖에 없다. 편향적 사고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니 그것이야말로 '뇌 썩음'에 해당하리라.


그런 점에서 이번 호에 실린 젊은 정치인이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누구는... (96-101쪽 참조)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 생각한다. 폭력적으로 싸우는 방식은 옳지 않지만, 싸움이 정치의 본질인 것이다.'(100쪽)


정책들의 싸움, 그것이 정치다. 고로 정치는 언어로 하는 싸움이다.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싸움이 바로 정치다. 언어가 아닌 폭력의 수단이 동원되는 순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주장이 없다면 정치는 없다. 다른 주장들이 언어를 통해 오고가고,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과정, 언어들의 싸움... 아니 주장들의 싸움, 이것이 정치다. 그러니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고도화된 정치 행위로 폭력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고도화된 정치 행위가 아니라, 국민을 어려움으로 빠뜨리는 헌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고도화된 다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뇌 썩음'으로 나아간다. 알고리즘에 빠진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진다.


오로지 자신에게 좋은 것들로만 주변을 채운다. 이런 존재에게 공동체란 존재하기 힘들다. 공동체에 온갖 존재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뇌 썩음'과 가장 거리가 먼 잡지가 바로 [빅이슈]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빅이슈]는 다양한 글들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체를 이루는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글들도 좋았지만 '뇌 썩음'이란 단어로 '알고리즘'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정말 정치인들은 이런 '뇌 썩음'을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젊은 정치인의 말을 다시 새기자. 뇌 썩음을 방지하는 길은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다른 무엇보다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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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두석 시집에는 '꽃'이 들어가는 시집들이 많다. 대꽃, 성에꽃, 투구꽃, 숨살이꽃과 더불어 꽃에게 길을 묻는다,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처럼...


  꽃. 아름답다고,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고, 누군가를 축하할 때 우리는 꽃을 선물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릴 때 꽃을 가져가기도 한다. 그만큼 꽃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러던 시인이 이번에는 꽃이 아니라 새를 시집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 시집에도 '꽃'을 다루는 시들이 (동강할미꽃, 물매화, 산수유나무, 뻐꾹채, 바람꽃,도체비꽃 등등)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새들이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관심이 옮아갔는가? 아니, 지상을 수놓는 꽃들과 천상을 수놓는 새들이 통한다고 보았겠지.


새들 역시 우리 곁에 있는 자연이니까. 우리가 심상하게 쓰는 표현 가운데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말이 있으니...


인위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시선이 꽃에서 새로 확장이 된 것이겠지. 공중에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꽃들과 지상에서 천상으로 비상하는 새들. 우리 삶도 한때 그렇게 꽃을 피우고 또 그렇게 비상했겠지.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어야겠지.


결국 우리 삶도 자연의 일부이니, 삶과 죽음이 하나로 내 곁에 있듯이, 지상의 존재와 천상의 존재, 그리고 지하의 존재, 아직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존재들이 내 곁에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자연을 다룬다고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자연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기에 누군가의 생명 유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하기에.


'백로와 숭어'(52쪽)라는 시를 보면 이런 자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백로가 숭어를 낚아채어 가는데, '백로와 숭어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마주친다 ... 백로도 숭어도 오직 보는 일에만 집중한다(최두석, 백로와 숭어 중에서. 52쪽)'고...


그렇게 죽살이가 한 순간 공존하고 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그것을 시인은 '강물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유유히 흘러간다.'(앞의 시)고 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여러 굴곡이 있겠지만 삶은 그렇게 유지되고, 그러한 삶에 대해 최두석의 이번 시집을 통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참 삶은 위태위태하다. 이 위태위태함이 삶인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가장 편한 때가 잠잘 때여야 하는데, 그럴 때조차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때가 있으니. 자연도 마찬가지다. 마냥 평화롭지만은 않다. 온갖 것이 혼재해 있는 것이 자연이니.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를 읽어본다. 


  두루미의 잠


삵 같은 천적 피하기 위해

얕은 물에 발을 잠그고 자는 두루미는

추위가 몰려오면

한 발은 들어 깃 속에 묻는다


외다리에 온몸 맡긴 채

솜뭉치처럼 웅크린 두루미의 잠


자면서도 두루미는

수시로 발을 바꿔 디뎌야 한다

그래야 얼어붙지 않는다

그걸 잊고 발목에 얼음이 얼어

꼼짝 못하고 죽은 새끼 두루미도 있다


한탄강이 쩡쩡 얼어붙은 겨울밤

여울목에 자리 잡은

두루미 가족의 잠자리 떠올리면

자꾸 눈이 시리고 발목도 시려온다.


최두석, 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사. 2023년. 42쪽.


시인의 눈이 어디 두루미에서 그치랴. 시인이 보고 있는 자연은 곧 우리의 삶이고, 그러니 시인은 우리의 삶들에서 두루미와 같이 잠자리에서도 경계를 해야 하는 이들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게 흘러가도록 하겠지만, 인간은, 인간적이라 함은 같은 인간이 그렇게 힘든 상황에 있을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지 않는다. 측은지심이라고 해야 하나, 인간은 어려움에 처한 존재에 손길을 내민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곁의 자연을 보고 인간의 삶을,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시인의 뜻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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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 내 얼굴이 내 몸과 떨어질 수가 있나? 나는 들어왔는데, 내 얼굴은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얼굴이 지닌 뜻이 뭐지?


  얼굴, 그냥 생각하자. 우리는 얼굴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라고도 하고. 그렇다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제목이 된 구절은 '붉은 달(24-26쪽)'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집에 들어왔는데, '내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26쪽)이라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에 '마트료시카(120쪽)'라는 시를 보면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밖에 나갔을 때는 얼굴이 함께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내 얼굴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나를 알려준다고 하면 나는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할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최인훈이 쓴 [가면고]가 생각났다. 가장 완벽한 얼굴을 찾아 다니는 다문고 왕자의 이야기. 그는 완벽한 얼굴을 찾았지만, 시인은 아직 완벽한 얼굴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이미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찾기도 전에 생활에 치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그러니 나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여러 얼굴을 지니고 있고, 한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그 얼굴 속에 또 얼굴이, 얼굴이 계속 들어있는, 내 얼굴이지만, 내 얼굴이 아니기도 한. 내가 지니고 있는 얼굴이지만 새롭고, 또 놓고, 감추고 있는 얼굴일 수도 있는.


하여 나는 나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나'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얼굴만이 아니라 남의 얼굴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남의 얼굴을 통해서 나의 얼굴을 보기도 하니까.


  우리 사회에 다른 인물들인데 마트료시카와 같이 열어도 열어도 같은 얼굴이 나오는 인물들이 있다.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이들을 열지 않고 그냥 닫아두고 싶은데, 그런 같은 얼굴을 무슨 자랑이라고 계속 내미는 인간들이 있으니... 시와는 별 관계가 없지만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보고서 그런 인물들, 선한 마음, 인물들의 연속이 아니라, 안 보여야, 안 나와야 하는 인물들의 연속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남 얼굴 타령은 그만하고, 내 얼굴을 잘 찾아야지. 아니 지금껏 내가 지니고 있던 얼굴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얼굴들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은 다른 내 얼굴을 만들어가야지.


이 시집에는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두 편 있다. 똑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그렇지만 본질 찾기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트료시카


나는 몇 개의 거울을 들고서 달렸다 // 똑같은 것들이 슬퍼 보였다 //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70쪽.



마트료시카


문을 열면 / 문이 있었다 // 그 문을 열면 / 또 문이 있었다 // 문의 문을 열면 / 내 얼굴들 쌓여 있고 / 문밖에는 똑같은 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 나는 문의 문을 계속 열고 나갔지만 //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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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3-18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kinye91님의 시와 소설 평론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를 좋아해서 혼자 문학 작품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작품 속 아름다움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잘 짚어주시는 글을 보면서 저 또한 즐거워졌습니다.
자주 와서 읽고 문학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kinye91 2025-03-18 16:08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책을 읽고 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저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