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시라고 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제목이 자살을 유발하지 않느냐고?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니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고 자살을 멈춘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따스함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 효과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를 읽으며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책머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5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 실린 시가 어렵지 않다. 그냥 평범한 말들로 되어 있다. 마치 이솝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이솝 우화,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이 시집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그래도 그 사물들 역시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시라고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를 보면 욕조에 들어간 눈사람이 찬물을 틀까, 뜨거운 물을 틀까 고민을 하다가 결정하는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눈사람 자살 사건' 중에서. 14쪽)


그래,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해주는 마음. 이건 죽음을 앞둔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나를 따스하게 하고, 그 온기가 남들에게도 퍼질 수 있게 하는 것. 비록 '눈사람 자살 사건'은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즉 죽기 전까지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따스함은 곧 다른 존재에게도 따스함으로 다가간다. 각박한 세상, 추운 세상에서 이러한 따스함이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더 훈훈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밖에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결코 쓸모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 '초'와 같은 시도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존재 의미가 있음을, 결코 지금 필요없다고 내쳐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데... 아래 사진을 보라.



이 시집의 편집이 좋다. 그림과 시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따라서 시를 읽고 그림을 봐도 좋고, 그림을 먼저 보고 시를 읽어도 좋다. 그림과 시의 조화.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고 있게 만든 편집이다. 


그래서 더 읽기에 좋은 시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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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누스 푸디카'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비너스(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숙한 자세라는 뜻이란다.


  정숙한 자세라고? 누구에 의한 정숙함이지? 이는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 그러나 여성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시선을 자극하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시선이고 생각이다. 베누스 푸디카란 말도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베누스 푸디카이고, 이런 제목을 가진 시가 세 편이 실려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읽어가다가 혹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게 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이런 존재야. 자, 봐. 네가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볼 수 있어 하는. 그러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보이는 존재와 보는 존재를 뒤바꾸어버린 듯한 그림.


이 그림에서 여성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나를 보라고 하는 듯하다. 즉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보는 남자(보통은 그렇게 보니까)가 아니라 보이는 여성이다. 


시집 제목을 보면서 '정숙한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집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는 않고 보일 듯 말 듯하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화자의 모습이 바로 시인이, 아니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는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찾게 하려 한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이고, 여기서 시의 맛이 생겨난다. 대놓고 드러내도 시로서 별로 감흥을 못 주고, 너무도 꽁꽁 감춰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들면 역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보일 듯 말 듯. 찾을 듯 말 듯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의 감흥 아니겠는가. 분명 찾을 수 있는데 쉽게는 찾지 못하는 것.


'베누스 푸디카'는 바로 그런 시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무언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베누스 푸디카 3'이란 시에서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112쪽)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 망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투명 망토를 쓰면 애초에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있는지 모르면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시는 아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찾았다 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있어도 투명 망토를 벗기까지는 볼 수는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겼겠거니 하고.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겠지 하고... 하여 모든 시는 읽는 사람 자신만의 해석과 함께한다. 그 해석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왜? 보지 못하고 짐작만 하니까. 시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시가 없느냐 하면 아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이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이 시집 제목을 보고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쁜 현대인들, 답을 빨리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시는 그래서 어렵다. 답을 빨리 주지 않고 또 그것이 답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하여 이 시집 제목이 된 '베누스 푸디카'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보라고, 제대로 찾으라고 거꾸로 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뒤바뀜. 또는 주체의 뒤바뀜. 


빠른 시대, 편리한 시대에 조금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자, 투명 망토에 싸여 있는 존재를 찾아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읽기였겠지만. 그것으로 됐다.


베누스 푸디카 3

  기억의 탄생


그게 첫 동굴이었지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살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

울면서, 남자는 아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웅크린 채 아늑했지

그러고는 주문을 걸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미끄러운 건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요

나는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뺨은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어둠이 이불 속에서

고요히 높아져갔지


우리는 동산처럼 오래되었구나


훗날 기억이 왜 이렇게 모질게 남아 있을까 생각하다

첫 동굴 속에서 내 어둠이

증발 불가능한 액체임을 알게 되었네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

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 창비. 2017년 초판 2쇄. 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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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기계에 종속된 삶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녹색평론을 읽으면 마음이 답답해질 때가 많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과연 녹색평론에서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받아들여졌을까 하면.


  거창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삶을 바꾸는 생활을 하자고, 그것이 지구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라고.


  그런데 우리 삶을 바꾼다는 것, 내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것이야말로 가장 거창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단지 제도를 바꾼다든지, 법을 정비한다든지 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생활 자체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거창하고 힘든 일인가. 가장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 삶을 바꾸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나만 해서는 안 되지만, 나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민주주의. 또 지역자치. 공생. 환대. 


좋은 말이다. 이 좋은 말들이 현실에서 실현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쿠팡' 사태 아닌가 하는데...


기업이 이윤을 위해서 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편리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 수많은 정보들이 유출되었을 때 대책이 별로 없다는 것도 문제고. 이렇게 많은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


정보의 집적은 커다란 위험을 부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집권 역시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고. 이런 문제점들을 잘 지적해주는 것이 녹색평론인데...


이번 호에서는 삶을 바꾸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해온 노력이 실려 있는 글이 있는데 살펴볼 만하다.


여기에 우리 삶에서 필수적인 '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글도 좋았는데, (강우정, 기후위기와 물의 공공성) 우리가 쉽게 사서 마시는 생수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녹색평론의 외침이 외침으로만 끝나지 않기를... 책의 끝부분에 보면 독자의 소리나 녹색평론 읽기 모임을 보면 나만이라도 실천하자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되니,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여 우리 삶을 바꾸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한편 한편의 글이 소중해서 찬찬히 곱씹으면서 읽고, 내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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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12-23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색평론》에서 다루는 줄거리가 우리 삶에서 피어나려면, ‘녹색평론부터 서울을 떠나서 시골이나 멧골에 깃들’면 된다고 봅니다. 《녹색평론》은 ‘시골에서 손수짓기를 하는 사람’하고는 먼, ‘서울·큰고장에서 인문소양 있는 사람’한테 읽을거리로 그치는 틀에서 맴돈다고 느낍니다. 시골에서 나고자라서 시골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킬 만한 줄거리와 글감을 스스로 찾아내고 살펴서 담는다면, 이러한 글줄로 이 나라와 온누리를 바꿀 만할 테고요.

kinye91 2025-12-23 14:06   좋아요 0 | URL
‘녹색평론부터 서울을 떠나서 시골이나 멧골에 깃들’면 된다고 봅니다. 《녹색평론》은 ‘시골에서 손수짓기를 하는 사람’하고는 먼, ‘서울·큰고장에서 인문소양 있는 사람’한테 읽을거리로 그치는 틀에서 맴돈다고 느낍니다.‘는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님의 말씀처럼 녹색평론이 주장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고,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녹색평론도 노력해야겠고, 우선 저부터라도 제 생활을 돌아보고 바꾸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yamoo 2025-12-23 16:04   좋아요 0 | URL
음...제가 파란놀 님에게 바라는 책이네요...시골에서 나고자라서 시골에서 그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킬 만한 줄거리와 글감을 스스로 찾아내고 살펴서 담는 책을 제발 내주셔요~~
 

  '거기에는 없다.'


  '거기'는 어디인가? 또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제목이 된 시도 없다. 첫시가 '거기에서'다. 그렇다면 '거기'가 어디인지는 첫시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런데 알 수가 없다. 아, 이런...


  첫시에 나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두 죽음이다. 두 죽음이 시집에 걸쳐 나온다. 아이의 죽음과 트럭운전사(?로 추정되는 인물)의 죽음. 


그런데 죽은 사람과 눈을 맞춘다는 말이 나온다. 죽은 사람들과의 눈맞춤. 그러나 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역시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고.


'거기'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으로 바꾸면 '거기'는 '과거'다. 언제? 그런 궁금증을 자아낸다. 시집을 계속 읽어간다. '거기'를 찾는 여정이다.


 읽을수록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연결이 된다. 죽음들이 나오고, 죽음을 바라보는 화자의 모습이 나오니... 여기에 시들의 제목에 '공간'이 들어간다. '공간'이라는 말에 시간을 더해서 '장소'라고 해도 좋겠다.


이 장소들은 시집의 화자가 나고 자라고 지내는 시공간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시는 그런 장소들에 화자를 데려다 놓는다. 이렇게 찾으면 거기는 두 곳으로 나뉜다. 과거의 거기는 전라도 지방이다. 현재의 거기는 서울 근교다.('내가 사는 수도권에'(84쪽) -'신도시' 중에서) 전라도 지방 중에서도 지명이 나오는데 '비아동'이 시에 호명되고 있다. 광주다. '마을에서'란 시와 '신도시에서'란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비아동, 하남공단, 수완지구.


'광주'가 호명된다. 5공 청문회 이야기도 시에 있다. 그렇다면 '거기'는 광주라고 할 수 있다. 이 광주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하는데... 그냥 추측을 하면 그때에 죽었던 사람이 이제는 거기에 없다고 해야 하나? 왜, 그는 나를 따라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함께 만나기 때문.


그렇다면 과거가 현재와 함께 존재하면서 현재의 삶 속으로 계속 들어온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러므로 거기에는 없다. 왜냐하면 지금-여기에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 시집은 거기에서 떠나온 죽음과 함께 살아온 사람의 삶이 펼쳐진다. 거의 시간 순서로 읽을 수 있는, 화자의 어린시절부터 청소년, 청년, 그리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과정이 모두 '~에서'라는 장소와 연결되어 시집을 구성한다.


그러니 '거기에는 없다'는 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거기에 없는 존재는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과거와 현재의 공존. 거기와 여기의 공존. 이 시집은 그걸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집을 이해하는데 시집의ㅡ시인의 에세이 '거기에서 만난'이 도움이 된다. 이 글에서 두 죽음이 나온다. 광주민주화 운동 때 죽은 아이와 교통사고로 죽은 트럭운전사. 거의 동시대라고 할 수 있는 두 죽음. 시대는 다르지만 거기에서 나와 만난, 또는 나를 키운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와 5공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전두환을 비롯한 세력이 아니라 당시 광주에 있던 사람들-, 또 자신의 아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럼 이제 거기에 그들은 없다. 시인의 아이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거기에 살고 있지 않으니 (화자가 살고 있는 수도권 도시는 거기가 아니다. 여기서 확정짓자. 거기는 광주다) 논외로 한다면, 시인의 에세이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제 거기에 없다. 그들은 없지만 기록은 남아 있다.


'트럭도 아이도 / 사라진 후였다'('마을에서' 중에서. 14쪽)고 하고 있으니, 거기에 그들은 없다. 그렇지만 5공청문회나 다른 일들을 통해서 또 화자의 기억 속에서 거기에 그들은 계속 된다. 이렇게 시인은 그들이 없지 않음을, 자신의 삶 속에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나는 다만 /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 쓰면 쓸수록 어디까지가 나의 이야기인지 / 죽은 아이인지...'('신도시에서' 중 85쪽)


이 표현을 통해서 그들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하여 거기에 있던 죽음이 나와 함께했기에, 거기에 없음을 첫시를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서


뒤집힌 차에 나는 

매달려 있었다

너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너는 뒤돌아 갔다

나는 너의 등에 업히기로 했다 등에서

등으로 어깨에서

어깨로 정수리에서

정수리로 너를 만나고 스치는 이들에게로


서효인, 거기에는 없다. 현대문학. 2022년. 9쪽.


이렇게 시집에 실린 시들을 통해 '거기'에서 떠나 화자가 만나는 '그들'을 찾게 되는데...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과거의 죽음들을 딛고 서 있음을, 그것을 잊으면 안 됨을 시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거기'가 어디고 '무엇이' 없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시집을 읽으면서 각자 찾을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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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2-31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효인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일인입니다~~~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kinye91 2025-12-31 10:56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서효인 시인의 산문집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읽어봐야겠어요.
 

  거창한 삶은 쉽게 드러나고 남들에게 칭송을 받지만, 그렇지 않은 삶은 남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 사람들 아니었는가.


  그 다른 모습이 그냥 다름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기록된다.


  그러나 기록된 삶만이 남에게 칭송받는 삶만이 가치 있는 삶일까? 아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라 또 남에게 잘 보이려, 칭송을 받으려 하는 삶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삶은 위대하지 않은가?


위대하다. 은유의 [아무튼, 인터뷰]를 읽다가 계속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말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그냥 사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들 중에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 역시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대단한 사람이고 모두가 대단한 사람이라면 그리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한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은유의 책을 읽고 문태준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 점에서 연결되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런 연결을 해준 시가 '오솔길'이란 시다.


    오솔길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새로 돋아난 여린 잎사귀 사이로 고운 새소리가 불어오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햇살 아래 나뭇잎 그림자가 묵화를 친 것처럼 뚜렷하게 막 생겨나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 끝에서 보았네

조그마한 샘이 있고 샘물이 두근거리며 계속 솟아나오는 것을

뒤섞이는 수풀 속에서도 이 오솔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네


문태준,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2018년. 1판 7쇄.  75쪽.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 눈에 잘 안 보이는 길. 넓지 않은 길.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길. 그러니 이 길에는 온갖 생명들이 깃들어 있다. 그들을 품어주고 있다. 


이런 오솔길을 없앨 수 있을까?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숲으로 덮어두자고, 또는 더 큰 길을 내 편리하게 하자고 할 수 있을까?


오솔길은 오솔길의 가치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오솔길이다. 우리의 삶을 어느 척도로 재서 대단하다, 대단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오솔길 역시 길이다. 존재하는 길.


가끔 산에 가다 이런 오솔길을 발견하면 기쁘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한 기쁨이라고 할까. 이렇게 우리는 모든 삶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 아닐까. 이러한 오솔길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시.


은유의 인터뷰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오솔길과 같은 사람들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책과 책을 연결해주고 삶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주는 시. 그런 시인.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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