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다. 시의 소재가 주로 달, 물, 산, 돌 등이니 잔잔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의 두 번째 시선집이라고 하는데, 시인이 '근래에는 달과 별, 꽃, 무지개, 돌, 들에 마음이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단순한 자연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이별과 만남, 삶과 죽음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습니다.'('시인의 말'에서)라고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자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연을 파괴하는 일은 없겠지. 자연처럼 순환이 인간이 지닌 운명임을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을 영원히 살겠다는 욕심을 버리겠지.


세상에 죽지 않은 인간들이 계속 지구에서 살아간다면 도대체 지구가 몇 개나 필요할까? 몇 개가 뭐야, 우주 곳곳에 있는 행성으로 이주해도, 그 행성들도 곧 포화상태가 되어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고 이주하는 그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을까.


결국 자연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데, 인간도 역시 그러한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지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유한성을 거부하고 무한을 추구하는 인간들. 과학기술을 앞세워 영생을 추구하는 현재. 과연 우리는 자연에서 얼마나 멀어지려 하고 있는지.


자연에서 가장 멀어지는 것이 전쟁 아닌가. 무기, 온갖 무기. 이 무기들이 사람만 죽일까. 아니 지구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함께 죽인다. 그리고 쉽게 빨리 사라지지도 않는다. 전쟁이 남긴 상흔은 꽤 오래 간다. 상흔만이 아니라, 무기들이 남긴 오염들, 피해들 역시 복구하기 쉽지 않다.


하여 가장 반(反)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면 무기다. 최첨단 무기. 그러한 무기들이 지상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날아다니면서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 전쟁. 이 전쟁은 그 자체로 반(反)자연적이다.


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킨 사람, 자연을 거스르는 사람.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 인간이 거주할 지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세계가 과연 그러한가.


말이면 다 말인 줄 알고 뱉어내는 힘센 나라 대통령이란 작자. 제 나라 영토에 폭탄이 떨어질 일이 거의 없다고 남의 나라를 폭격하는 사람. 주변 국가들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사람. 그의 말은 폭탄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을 죽이는 그러한 폭탄들. 그 폭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사람. 그런 사람이 강대국의 대통령이다. 이름을 말하기도 싫다.


시집을 읽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그러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시집에서 어째서 그런 반자연적인 인간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바로 이 시와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는 자가 그 자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 자가 이런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해본 적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시를 보자. 제목도 '무지개'다.


    무지개


섬광이 터지고

사람과 사람 말 사이에

무지개 섭니다


저 무지개 걸어가려는 나의 무게는 너무 무거운 걸까요

내가 아무리 무게를 줄이려 하여도 한 마리 나비처럼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말 위에 그어진 무지개 위에 누군가 손짓하여 걸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면

오오 무슨 마술을 부려서라도 내 마음을 나비 한 장의 무게로 변신시킬 수는 있으리라


그리하여 그 무지개 위에서

내가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설혹 원수를 만난다 할지라도

외나무다리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위에선


함께 부등켜 포옹할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리라


김선영, 누구네 이중섭 그림. 인간과문학사. 2013년. 119-120쪽


이럼 얼마나 좋을까.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다리.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다리. 색색깔의 아름다운, 어느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다양함. 그리고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제 때가 되면 사라지는 그런 다리.


이 다리를 걷는 사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를 걸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절대로 말 폭탄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리라.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연과 사람을, 사람과 사람을, 아니 우주라는 존재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리라.


제 때를 알고 갈 수 있는,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일 텐데...


맑고 밝고 따뜻한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것과 반대되는 이 지구의 현실에, 폭탄의 다리가 아니라 무지개다리가 서로를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와, 참 읽기 힘들다. 시라고 하기보다는 산문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시들이 길다. 길고 행이 나뉘어 있지 않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외국어가 왜 이리도 많이 나오는지... 외국어? 시집 제목이 '근무일지'인데... 노동하는 이야기일 텐데... 외국어라니?


  왜 외국어가 많이 나올까? 시집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이 시집에 나오는 사람은 노동자라고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라도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일 저 일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하지 않으려 하는 일. 소위 3D업종이라고 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 그것도 일정한 일이 주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일해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주체로 등장하니, 시가 짧을 수가 없다. 많은 것이 뒤엉켜 있는 작업장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작업장 아닌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근근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공간. 그들끼리도 소통이 잘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러한 모습이 많은 외국어로 시집에 나타나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의 삶을 표현하는데 정제된 언어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는 없다. 혼돈, 아니 어지러움, 무어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복잡함. 이것이 바로 이들 노동의 세계다.


일하려 하는 데도, 일하는 데도 이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몸에 상처를 입히고, 손발이 잘려나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잃는다. 


시집 도처에서 그런 장면들이 펼쳐진다. 이게 지금 우리의 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그림자 노동, 아니 감춰진 노동 현장이다.


직접 이런 곳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알 수 없는 노동의 현실. 그러한 막막함 속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어떻게든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이 시집을 읽으면 우리가 보지 못했던 노동의 현실을 보게 되고, 우리가 이렇게 생활할 수 있게 되는 데는 이러한 노동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편리 속에, 화려함 속에 감춰진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하는 듯한 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단 한 문장으로 말한다. '살아가십시오' 


시집에 나오는 '오함마 백씨 행장'에서 죽어간 백씨처럼 죽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시인은 백씨와 같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노랗던 바나나마저 검게 타버려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어요. 백두영씨가 그랬던 것처럼.'('오함마 백씨 행장' 중에서. 111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이 현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죽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요소가 바로 이러한 노동들 아니겠는가. 그 점을 명심한다면... 보이지 않는 노동(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까.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우린 '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부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이미 나이가 있는 사람이거나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문부식이라는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으니까.


  시집을 냈다는 사실을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보고서야 알았으니, 문부식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던 나도 그를 시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험한 세상이었나? 시인 김남주가 시인보다는 전사로 불리기를 원했던 시대. 김남주보다는 약간 뒷세대이긴 하지만, 문부식 역시 그러한 시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개인의 서정을 꽃피우기에는 시대가 너무도 열악했다고나 할까.


  그에게 있던 서정이 활짝 피기 위해서는 이 사회가 먼저 그러한 토양을 지녀야 했다. 척박한 환경이 아니라 비옥한 환경.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토양, 그러한 시대가 되지 않으면, 서정이 풍부한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일을 하려 할 수밖에 없다.


잠시 자신의 서정을 미뤄두고 더 많은 서정들이 피어날 수 있게 자신을 그 쪽으로 움직여간다. 그런 사람이었다고... 지금 그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으련다.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이 시집 또한 30년도 더 전에 출간이 되었으니... 그리고 그가 그간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하므로.


오죽하면 알라딘에 시집 제목은 나오지만 시집의 표지 사진이 나오지 않겠는가. 또 문부식이라는 이름도 역사의 뒤안길에 있지 지금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권의 몇몇과 같이 언론에 나오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동자였다는 사실, 그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다가 석방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집을 읽는 데 중요하다. 다만 그 사건이나 문부식이라는 사람에 매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우리 역사 속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과거는 현재 속에 녹아들어야 한다. 현재에서 과거가 자꾸 자신의 자리를 내어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과거는 현재에 녹아 미래로 함께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를 놓아두고 이 시집을 읽는 이유는, 그럼에도 과거의 문부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의 문부식.


이 시집에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감옥에 가서 지낼 때의 이야기가 많다. 그때의 감정, 그때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고.


그때의 감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어 당시의 상황이나 심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시들이 많다. 그런 시들 중에서도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비'다.


    비


창살 속에 갇힌 나를

슬픔 속에 가두려 내리는가

소낙비

그대의 눈물되어

오늘은 수만 개의 창살로

꽂힐지라도

아직은 울지 않으리니

내 인생에 내린 창살로

아직은 울지 

않으리니


문부식, 꽃들. 푸른숲. 1993년. 초판 3쇄. 72쪽.


비와 창살, 슬픔과 눈물이라니...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 감옥의 창살 너머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비에서 창살을 느끼고, 내리는 비에서 눈물을 생각하는, 그렇지만 아직 울지 않겠다고, 견디겠다고... 견뎌내야 한다고 하는 다짐.


시인인지도 모르고 헌책방에서 보자마자 이 책을 산 이유는, 문부식이라는 과거 역사를 통해 알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시대를 그는 시를 통해서 어떻게 표현했을지, 김남주 시인과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인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감옥생활을 알 수 있었고, 그가 당시에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만족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로이카 2026-03-09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 나와서 반가워서 댓글 남깁니다. 옛날에 훈련소 있을 때 혼자 조용히 읊조리던 노래였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JRQqnrOPBU8&list=RDJRQqnrOPBU8&start_radio=1

kinye91 2026-03-09 12: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곳에서는 깨진 것들을 사랑의 얼굴이라고 부른다'('불사조' 중에서. 16-17쪽)


  이 구절이 충격이었다. 깨진 것들이 사랑의 얼굴이라니... 그러다 생각해 보니 사랑은 깨짐 아니던가. 


  자신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깨졌을 때 비로소 상대에게 나 자신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지 않을까.


  이렇게 깨지기 위해서는 자신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이 버림이 이루어지면 자신은 작아질 수 있다. 깨짐이 무엇인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점점 작아지면 컸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래서 작은 것들도 사랑하게 된다. 


수많은 작은 것들이 주변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서 또 깨지고 깨지고, 깨지지만 죽지는 않는다. 이 시 제목인 불사조처럼.


불사조는 죽음에서 태어난 존재 아닌가. 그러니 불사조는 깨짐으로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다. 이 불사조와 연결되는 것이 '시인하다'라는 시다.


시인 역시 수많은 깨짐, 죽음을 거치고서 시에 자신을 불어넣은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데... 그냥 한글로 '시인하다'라고만 되어 있어 무슨 뜻인지 고민해야 하지만, 읽어보면 시를 쓰는 시인이 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시인하다


스무 살의 나는 하루에도 아홉 번씩 죽었다

서른 살의 나는 이따금 생각나면 죽었다

마흔 살의 나는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죽는 법을 자꾸 잊는다

무덤 속에서도 자꾸 살아난다

사는 일이 큰 이득이라는 듯,


살고

살아나면

살아버린다


서른과 마흔,

사이에 

산문이 있었다


그걸 쓰느라 죽을 시간이 없었다!


박연준,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문학동네. 2024년 1판 5쇄. 125쪽.


이래서 시인은 불사조다. 시만 쓰지 않는다. 산문도 쓴다. 쓴다는 행위로 살아간다. 쓰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열정으로 넘치던 20대에는 여러 번 죽을 수 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죽음의 횟수는 줄어든다. 다른 말로 하면 열정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줄어들었을 때 시는 멀어지기도 한다. 열정이 자신을 꽉 채웠을 때 시가 다가온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따라서 시인은 이때 산문을 쓴다. 쓰기를 버릴 수 없으므로, 더 깨지기 위해서 산문을 쓴다. 그래서 죽을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나? 시를 써야 한다. 살았으니까. 죽음에서 살아왔으니, 시를 써야 한다.


그러니 시집 제목이 된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했더니, 아직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구절이 바로 '불사조'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불사조는 바로 시인이다. 이렇게 시인은 깨지고 깨지고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깨져서 작아졌기에 더욱 작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 죽음도 볼 수 있는 사람. 그러기에 '시인하다'고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경림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남긴 시들을 모아 낸 시집.


  나이듦을 느낄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시들이 꽤 있다.


  그렇게 살아오면서 시인은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서 읽는다.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로.


  하지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다고 여기기 힘들다. 그때 그때의 삶이 힘겨울 때가 많기 때문인데...


  이런 힘겨운 삶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또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아름다운 삶이 된다. 나중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이 아름다움이었구나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보자.


  고추잠자리


흙먼지에 쌓여 지나온 마을

멀리 와 돌아보니 그곳이 복사꽃밭이었다


어둑어둑 서쪽 하늘로 달도 기울고

꽃잎 하나 내 어깨에 고추잠자리처럼 붙어 있다


신경림,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창비. 2025년. 10쪽.


나이 들어 바라보는 자신의 삶. 복사꽃밭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삶 아니겠는가.


이런 삶을 산 사람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여 시인은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해질녘'에서.. 11쪽)고 하고 있다.


큰소리만 내는 사람, 커보이려고만 하는 존재들에게서 가려져 있던 것들, 제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눈. 그런 존재들이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그런 존재들에게 다가가는 발. 그런 존재들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손.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존재. 시인은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우리에겐 그런 사람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큰소리들이 난무하고 있는 요즘, 신경림 시인의 이 시들을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