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특히 들을 귀, 듣는 귀. 정말 중요하다. 말하기보다 듣기가 우리 생활에서 많지 않은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말들, 소리들, 또 듣고 싶은데 들리지 않는 말들, 소리들.
귀가 막혔나라는 말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 귀를 열어라는 말은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 남의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은 곧 남을 잘 이해하라는 말.
이해하라는 말은 포용하라는 말. 그와 같아지라는 말이 아니라 밀어내려 하지 말고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말.
이렇게 중요한 귀. 하지만 평소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던 귀. 이대흠의 시집 [귀가 서럽다]는 이러한 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시집 제목이 된 시이기도 하지만... 제목이 된 이 시 말고, 귀에 대해서 참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시가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라는 시다.
손바닥에 귀가 있을 리가!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죽어갈 때 그것을 어머니에게 맡기면 이상하게도 그 화초가 싱싱하게 살아난 경험. 어떤 식물을 갖다 주어도, 그 집에 볕이, 빛이 잘 들어오지 않더라도 화초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왜 그럴까? 식물을 키우는 재주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그래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었구나, 식물들의 말을 들어줄 귀가 있었기에, 식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에 다시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었구나.
이렇게 누군가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죽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의 전화'를 통해서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어머니의 손에 귀가 있다는 말은, 식물들이나 다른 존재들의 말을, 마음을 들어주고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엄마 손은 약손,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자신의 아픔을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그런 마음을, 그렇게 아픔을 토해내고 나니 조금은 마음도 몸도 편해진 상태를 달리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 ...... / 검은 손바닥 그 한 많은 귀에 대고 / 제 말들을 마음껏 하면 / 그 말을 들은 천 개의 귀가 / 그것들의 아픔에 / 가만 가만히'('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중에서/ 44쪽)
이 시 구절에서 그러한 마음이 다 표현되고 있으니, 하지만 한 가지, 어머니의 손이 깨끗한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이다. 그것은 '바닥'이란 시를 보면 왜 검은 손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 ...... /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 ......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바닥' 중에서. 40쪽)
바다와 뻘(갯벌), 온갖 것을 배척하지 않고 다 받아들여 그것들을 다른 존재들이 살아갈 수 있게 바꾸어주지 않는가. 여기에 해설에서 한 말처럼, 바닥을 바다와 뻘과 더불어 인생의 바닥이라고 쓰듯이, 어려운 삶을 살아온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듯이, 그렇게 어머니는 다른 존재들의 아픔을 듣고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역할을 했던 것.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귀'였던 것.
그러면 '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한다고 하지 말자. 그들의 귀는 눈이다. 눈으로 그들은 듣는다. 그러니 신체의 특정한 기관을 귀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는 수많은 귀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듣는다는 행위가 이토록 중요한데, 듣지는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존재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들인가. 그들은 다른 사람을 껴안지 않고 오히려 밀어낸다.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이렇게 '귀'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왜 시인은 귀가 서럽다고 했을까? 자신에게 들려오던 소리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자신에게 위안을 주던, 자신이 듣고자 노력했던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는 것. 그러니 귀가 서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그리운 소리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는 것. 그래서 더 작은 소리,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소리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것.
귀가 서럽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사랑했던가 아팠던가
목숨을 걸고 고백했던 시절도 지나고
지금은 다만
세상으로 내가 아픈 시절
저녁은 빨리 오고
슬픔을 아는 자는 황혼을 보네
울혈 든 데 많은 하늘에서
가는 실 같은 바람이 불어오느니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귀가 서럽네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2010년. 초판 2쇄. 67쪽.
이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꽤 있다. 읽으면서 찡한 감동을 받게 되는 시. 전라도 사투리가 시에 고스란히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시들도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몇몇 시 제목을 보면 '오래된 편지, 동낭치 부자, 아름다운 거짓말, 아름다운 위반' 등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찾아서 읽어보면 좋을 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