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나'


  당연하지 않은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존재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면 다른 존재들은 나로 인해 가려진다.

  

  아니, 다른 존재들은 나에게 들러붙는 방해물이 된다. 거추장스럽다고 여긴다. 


  그런 상태.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나는, 적당히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에 집착하면 안 된다. '나'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나'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아니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서효인 시를 읽으면서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일이 '질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 즉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 그러한 욕망이 질투로 나타나는 것.


다른 존재가 지니고 있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에 앞서, 그것을 자신이 지니지 못했다는 결핍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질투 아닐까.


그런 자신을 보면서, 결국 질투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일 수밖에 없음을... 하여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남을 사랑한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 


그 보이는 것들을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하는 것. 시인... 시...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는 생각.  



      로맨스


  질투는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를 좋아해서 생기는 감정은 아니다 그것은

  제가 저를 너무나 좋아해서 생기는 습기 같은 것이라

  해수욕장의 발바닥이다 털어도 털어도 모래가 붙는다

  도넛 방석 위에 앉아 불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면

  거기에 진짜 내가 있다 늠름한 표정으로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날도 많은데 남은

  나를 좋아해 미칠 수는 없겠지 오늘은

  동료가 어디 심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후배가 어디 상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친구가 어디 해외에 초청되었다고 하고 오늘은

  그 녀석이 저놈이 그딴 새끼가 오늘은

  습도가 높구나 불쾌지수가 깊고 푸르고 오늘도

  멍청한 바다처럼 출렁이는 뱃살 위의 욕심에

  멀미한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나는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변명하고 토하고

  책상 위에 앉아 내 이름을 검색하고

  빌어먹을 동명이인들 같은 직군들 또래들 심사위원들 수상자들 주인공들 나는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데 남들은 괴이쩍게 평온하고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

  늠름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털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화장실 간다

  오줌을 누는데 보이는 건 불룩한 아랫배가 전부

  이런 나라도 사랑할 수 있겠니,

  대답 대신 쪼르륵

  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푸르고 깊은 몸 곳곳에 해변의 모래가 들러붙어서

  사무실에까지 왔다 질투는

  로맨스 같은 구석이 있다 오늘은

  예고편에 불과하고 내일은 동료와 친구와 선후배와 옆자리와 뒷자리와 동명이인과 같은 직군과 비슷한 또래와 노인과 젊은이와 이토록 연안에서 깊이 추잡스럽겠지만 극적이게도

  바깥은 평온하다. 그것이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줄도 모르고


서효인,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문학동네. 2022년. 1판 2쇄. 96-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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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절주절. 시인의 독백을 듣는 듯한 느낌. 시인이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명확하게 하기보다는, 나는 내 말을 한다, 당신은 당신의 말로 알아들어라 하는 듯한.


 5부로 나뉘었는데, 각 부에 제목을 붙이고, 그 제목 앞에 숫자가 있다. 무슨 숫자지? 잠깐 고민했는데, 답은(답이라고 할지 잘 모르겠지만) 해설에 나와 있었다. (해설이 이 시집을 읽는데 도움을 많이 주었다.)


 연도란다. 17흔적, 06상자, 04연맹, 00프랑스, 99반복. 해설에 따르면 이 시집은 2017년부터 시작해 1999년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놓은 것.


  그렇다면 시집을 거꾸로 읽으면 어떨까? 우리는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니... 학교에서 역사(국사)를 공부할 때도 아주 먼 과거부터 배워 현대로 왔으니...


별의 역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별의 탄생, 빅뱅부터 시작해 지금의 우주로 오지 않나? 그런데 시인은 거꾸로 배치를 했다. 시간의 흐름과 반대로. 이는 현재에서 과거를 바라봐야 한다는 얘기인가?


시집의 처음에 실린 시, 그러니까 현재를 대변하고 있는 시가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9-11쪽)이다. 채리? 모르는 사람. 굳이 알려고 할 필요가 없는 사람. 누구나 채리가 되어야 하니까. 적어도 이 시집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가 바로 채리가 되어야 한다. 


왜? 시인이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앞자리엔 채리다 ...(중략)... 누군가의 채리가 자리에, 그것도 익숙한 앞에 앉아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에서)


앞자리, 이것을 현재라고 하면, 현재를 인식한 사람만이 과거를 반추할 수 있다고, 즉 의식적으로 과거를 돌아봐야 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거에 잠식당해 절대로 앞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 하는 듯하다.


이 시의 맨 마지막 문장이 '씨니까'인데, 씨가 바로 시다. 그러니 씨가 발아해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몫. 아니 씨를 자라게 하려면 반드시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씨는 발아하지 않고 썩어버리고 말 테니까.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발아되지 않는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발아하지 못하고 묻혀 버리는 삶이 얼마나 많은가. 


시를 독자들이 발견하듯이 삶도 자신이 발견해 키워야 하지 않을까? 시라는 씨, 삶이라는 씨. 결국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는 것. 발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주고 보듬어 잘 자라게 하는 것.


그럼에도 우리네 삶은 '제법 잘살았네'라고만 할 수 있어도 괜찮은 삶이었다는 것. 시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제법 괜찮은 시네라고만 해도 제 역할을 한 시라고...


그렇지 않으면 '스무 개가 겨우 천 원'('동네에서 가장 싼 프랑스'에서. 61쪽)에 팔리는 상품과 같이, 한꺼번에 묶여서 넘어가지 않을까. 자신 스스로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다른 존재들과 묶여서 처분하듯이 팔려나가는 상품처럼, 그렇게 홀로 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류에 휩쓸리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제법'이라는 말. 부정적으로 쓰기도 하지만, 아니다. 이때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 부정 속엔 긍정이 내포되어 있다. '그 녀석 제법 하네.'라는 말 속엔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기대를 넘어섰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


인생을 제법 잘살았다는 것은 기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얘기니, 시도 마찬가지다. 그 시 제법이네라는 말. 이 말은 시라는 씨를 심을 가치를 발견했다는 말이다. 심어서 키울 마음이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하여 시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인 '제법,'에서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쓸 뿐이다'('제법,' 중에서. 84쪽)라고 했지만, 시집의 시들이 우리를 '앞자리에 앉게 하고 다음 장을 넘길 수 있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주저리 주저리... 하지만 이 주절거림 속에서 삶을 발견하고 시의 씨앗을 심을 마음을 먹었다면, 심은 씨앗과 자란 결과가 결코 같지 않음을, 씨의 상태를 잊고 자란 결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시집을 '제법,'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제법,


  한때는 그 문장, 그 단어들은 시였다. 글자와 글자는 접착제로 제법 튼튼하게 붙어 있었고, 뼈대는 비록 얼기설기 엉켜 있었지만 나름 튼튼했고, 알록달록한 단어들은 제법 아름다웠다. 한때는 그 종이에 시가 쓰여 있었다. 비록 별것 아니었지만 분명, 그건 시였다. 잠깐 시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법'이라는 접착제가 제법 많이 쓰였고 현대시라는 관점에서는 좀 모자랄 수도 있었겠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 시를 한때,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 시는 분명 시였다. 지금은 제법 시였던 어떤 것이다. 제법 시다웠지만 다, 한때의 일일 뿐이다. 그냥 그 종이 위에는 이제, 검은색 글자들과 약간 색이 바랜 여백들과 나름의 침묵이 남아 있다.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지금 와서는 제법 아쉽지만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쓸 뿐이다.


서정학, 동네에서 가장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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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이런 말이 있다. 김선우라는 시인에 대해, 그의 시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늘 다채로운 감각과 사유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을 낸다. 생명에 대한 예민한 관찰, 시민성에 대한 적극적 발언, 기후위기와 생태적 환경의 파괴에 대한 직설적 반성, 자본을 향한 씩씩한 비판, 차별 없는 사랑과 연대에 관한 섬세한 이미지 등등.' (122쪽)


딱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김선우의 작품은 그랬다. 시만이 아니라 소설도. 그렇지만 이렇게 총평으로 이 시집을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김선우 시 전반에 관한 이야기지, 이 시집에 관한 정리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이 총평이 이 시집에도 적용이 되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집에는 그 전의 시집에서 주던 느낌과 다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쩌면 이 시집의 시들은 의미가 더 쉽게 전달되도록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 시로 서로 얽히는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고나 할까. 어쩌면 시인이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집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과의 대화'란 시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몇 구절.


'본래 쓸쓸한 세상인걸요. 사람에게는 사이가 있으니. ... 시가 없으면 반드시 시가 태어나죠. 인간(人間) - 사람 사이는 채워야 하기에. ... 시인이 없는 세상은 없어요.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 사람에게서 사이를 보았다면 당신은 시인이에요. ... - 사이가 더 커지지 않는 세상. / 우리 모두 시인인 세상을 엿보며 / 시인은 이렇게 무사태평이다.'('시인과의 대화' 중에서. 30-31쪽)


그렇다. 시인이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시집이다. 하여 시인은 자신의 조카가 짖는 모습을 보고도 '네가 짖는 대신 개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면 되잖아, 이런 따위 말만큼은 하지 않는 걸로 시인 이모의 소임을 다하는 시간.'('쉬잇! 조심조심 동심 앞에서는' 중에서. 36쪽)이라고 표현한다.


인간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를 인간과 동등한 존재로 대하는 모습. 그런 모습은 '야생 사과나무 앞에서 열매 하나를 얻기 위해 / 나무에게 말을 걸던 만년 전 사람을 떠올린다/.../사슴 한마리 앞에 인간 한마리로 온전히 대결하던 조상을 떠올린다'('마스크에 쓴 시 2'에서. 62쪽)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사이'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에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울 때는 자신의 관점에서 채우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나를 둘 다 존중하고 인정하는 상태에서 그 사이에 자신을 놓아두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어느 한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니 동물들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동물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상대가 되어보는 일, 그것이 바로 사이를 채우는 일이라고 하는 듯하다.


이렇게 사이를 채우지 않고 자신 쪽으로만 끌어당기려고 하는 존재가 있으니, 시인은 그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존재는 바로 자본이다. 자본은 성장, 성장 하면서 상대를 자신에게 속하게 만들려고 한다. 어느 것이든 있는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계속되는 잠식. 이런 잠식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갈 공간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멈추어야 한다고 외친다. 이 시집 곳곳에서 이렇게 멈추라는 말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멈추지 않으면 온갖 감염병으로 시달리게 되는데, 이 시집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삶의 모습이 제3부에 '마스크에 쓴 시 1~14' 연작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연작시에는 '멈춰야 해'라는 말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런 감염병은 결국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서 빌린 것이 아니라 '함부로 빼앗은 것들'이라고, 그래서'존재의 벼랑 앞에/한줄의 시로 부끄럽게 엎드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을 우리 모두가 지닌다면 '내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마스크에 쓴 시 13'에서 인용. 80-81쪽)


이렇게 시인은 인간들만의 관계에만 사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는 사이가 있고, 이런 사이들을 채우되 한쪽으로 끌어들이는 채움이 아니라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 사이에서 함께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그런 마음이 이 시집 전체에 나타나 있으니, 해설에서 말하고 있는 정리가 이 시집에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시가 많은데, 이 시, 기억해두고 싶다. 어쩌면 사이를 채우는 일을 이렇게 잘 표현한 시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사랑은, 꽃피는 얼룩이라고


    네가 있던 자리에는 너의 얼룩이 남는다

    강아지 고양이 무당벌레 햇빛 몇점

    모든 존재는 있던 자리에 얼룩을 남긴다


    환하게 어둡게 희게 검게 비릿하게 달콤하게

    몇번의 얼룩이 겹쳐지며 너와 나는

    우리가 되었다


    내가 너와 만난 것으로 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남긴 얼룩이 너와

    네가 남긴 얼룩이 나와

    다시 만나 서로의 얼룩을 애틋해할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우리가 되기 시작한다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얼룩들은 조금씩 몸을 일으킨다

    서로를 안기 위해

    안고 멀리 가면서 생을 완주할 힘이 되기 위해


김선우. 내 따스한 유령들. 창비. 2021년.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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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색깔의 표지가 있는 시집이다. 북펀드에 응모했더니, 내게는 초록색 바탕의 시집이 왔다.


  표지에 있는 네 가지 색깔, 팔레스타인 국기에 있는 색깔이다. 내가 알고 있는 국가의 깃발이 몇 개 되지 않지만, 왜 세 표지 중에서 랜덤으로 보내줄까 했더니, 이것이었다.


팔레스타인 국기에서 따온 것. 그렇게 시집은 표지에서부터 팔레스타인에 응답하고 있다. 시집 제목을 보라. '(팔레스타인을 향한/위한) 응답의 시' 아니던가.


괄호가 마음을 울렸다. 괄호,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멀리서나마 마음으로나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들에게 응답하는 존재들이 세계 곳곳에 있고, 멀디 먼 한국에도 있다고 하는 듯한, 괄호. 그리고 응답.


이 시집을 읽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금은 나라 이름이지만 사람 이름이기도 했는데, 누구였더라? 오래 전에 본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검색했더니, 야곱이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었다더라.


성경 (대한성서공회가 번역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1995년-) '창세기 32장 28절에 보면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라고 나온다.


이 야곱이 누구냐?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형과 아버지를 속인 사람 아니던가. 여기에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다니,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민족이라고 하겠다.


선민의식, 그것을 지니게 된 것이 이 야곱,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은데, 그간 서양의 역사에서는 '예수'를 팔아넘긴 민족이라고 해서 온갖 억압과 탄압을 받았다지만 그들이 지닌 이 선민의식을 버리지 않았으니...


현대에 들어 남들이 살고 있던 땅을 점령하고, 공존하기보다는 또다시 이기려고 점점 팔레스타인을 침략해 땅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정착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으니... 단순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와 추방을 동반한 정착이니...


또 이기려는 것인가? 누구를? 강한 자가 아니라 약자를,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을 물과 식량부족으로 스스로 나가게 하려는지, 저항하려는 사람을 군인, 민간인,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폭격으로 죽게 만들고 있으니...


그럼에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유대인에 대한 원죄의식이 있어서인지, 나서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자신들이 당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을 학살하고 있는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아니, 침묵하지 않는데, 많은 언론들이, 더욱 강한 자들이 다뤄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입을 막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귀를 막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못한 시인들이 있다.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직접 행동을 할 수 없더라도 조그마한 목소리라도 보태려 한다. 아니, 보태야 한다. 그래야 이 참상이 멈출 수 있으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응답, 그것이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할지라도 팔레스타인이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겐 할 수 있다. 또 더 큰 비극을, 참상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필요하다. 응답이... 시인들이 침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미약한 목소리나마 내려고 하는 것. 이런 시인들의 응답이 저 멀리 가 닿기를... 직접적이 아니더라도 그 마음이 그들에게 전해지기를...


시인들이 이런 응답을 할 때 나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응답은 무엇일까? 지금 할 수 있는 일, 이런 시인들의 응답에 나 역시 응답하는 것. 시집이 널리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 팔레스타인의 진실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배제가 아니라 포용으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


현대에 과학기술은 인류를 불멸로까지 이끌려고 하는데, 그러한 불멸로 가기 전에 전쟁으로 인해 사람이 죽어나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최첨단 무기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를 향한 외침. 그것이 우리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집을 읽으며 팔레스타인에 응답한 시인들에게 고맙단 마음이 들었다. 이젠 시인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응답할 차례라는 생각이 들고.


이 시집에서 '못 묻는다'는 송정원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다녀올게만 있고 다녀왔어는 없는 무수한 하루가'(145쪽)... 이런 현실이 지금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세상에, 이 땅에는 '안녕'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인사 '안녕하세요'를 하기 힘든 상황. 그러니 시인들이 나설 수밖에. 팔레스타인에 응답할 수밖에.


이 시집이 응답하는 시라면,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도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많겠지만, 내가 읽은 책으로는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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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시들 한편 한편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마치 시집 제목이 된 시 '아침은 생각한다'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이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자연스레 읽으면서 그러한 마음에 동화가 된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만큼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짧다. 짧지만 오래 간다.


  그 중 만난 시. 제비. 봄이 오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새. 예전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우리와 함께 살던 새.


  우연히 원주에 있는 '빙하미술관'에 갔다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갑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비와 제비들이구나. 새끼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주는 어미-아비 제비들.


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먹이를 보채는 새끼 제비들. 그런 제비들을 본 행복. 문태준의 시집에서 '제비1, 제비2'를 만나고 그곳에서 본 제비들이 생각났다. 


지금쯤 새끼들은 자라서 스스로 날개짓을 하며 먹이를 찾아다니겠지.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제비집을 두고 다시 떠나가겠지. 그렇게 그들의 삶이 반복되겠지.


제비 1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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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2


  제비 가족을 보러 광평빌라에 갔다 제비집에 제비들이 없었다 내부가 대낮처럼 텅 비었다. 사랑의 둘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 곳곳은 진흙을 쌓아 지은 제비집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야 제비집에 어떻게 오목하게 환하게 상공(上空)이 담기겠는가 제비집을 떠나 제비들은 흰 빛과 치렁치렁한 빗속과 엉긴 안개와 무너지는 노을 아래를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제비야, 내 언젠가 맑은 물과 꿈 위에 띄워놓은 꽃 같은 제비야


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1쪽




<원주 빙하미술관에 자리잡은 제비 가족과 제비집. 2026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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