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는 만큼 내가 성숙해질 수 있을까?


  자연이 내게 거는 말들을 나는 들을 수 있을까?


  나무가 하는 일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가을이 되면 나무들이 제 잎들 색깔을 변하게 하는 것도, 세월에 따라 자신을 맞추는 방법인데,

그렇게 세월에 자신을 맞춘 나무들을 변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 아니 나무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계절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바꾸지 않으면 그 나무는 살아갈 수 없다.


  노자가 그랬던가. 죽음은 딱딱하고, 삶은 부드럽다고. 딱딱함은 경직됨이니 이는 변화를 거부함이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일 뿐.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많다. 단지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사람은 그렇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니까. 우리 역시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끔은 그것을 잊고 자연을 마치 없어야 할 것처럼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 시인이 뭐냐고, 시가 뭐냐고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선생님의 말이 있다.


"시는 뒷냇물이 하는 말을 받아 적는 거란다. 그리고 살구꽃이 피어 있을 때의 마음을 받아 적는 거란다. 또 보리밭 위로 날아오르는 종달새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거란다. / 그때 뒷냇물이 살구꽃이 보리밭이 종달새가 너희들에게 무슨 말을 걸어올 거야. 그걸 받아 적는 게 시라고 한단다. / 모든 사물들은 다 말을 하고 있단다. 그 말을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지." (김명수, 77편, 이 시들은. '강 6'에서. 녹색평론사. 2022년. 29-30쪽)


시인의 자전적인 요소가 담겨 있는 '강 6'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 그렇다. 바로 이런 시인들. 꼭 시를 쓴다고, 시를 발표한다고 해서 시인이 아니다. 사물의 말을 듣고 그것을 받아 적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인이다. 


그 사람이 받아 적은 것이 시다. 그런 시인들이 많은 사회는 좋은 사회다. 누가 누구 위에 있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함께 어울리는 그러한 사회일 것이다.


하여 그런 시인들이 있는 사회는 평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단지 인간들만의 평화가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평화.


아름다운 세상일 텐데... 가을,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자연이 형형색색 가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열매들과 함께. 이 시집을 읽고, 적어도 자연이 건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열고 지내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따로 있지 않고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된다면 그 사회는 참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편]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짧은 시에 그토록 많은 시간이 담겨 있다니... 


  시란 말의 절제, 그 절제 속에서 더 많은 말들을 하는 것.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과연 할 말을 다할 수 있을까?


  '찰나'라는 말, 시간은 한없이 짧을 수도 있는데, 그 짧음이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빛이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논쟁이 있었듯, 시간이 연속이냐 불연속이냐는 논쟁도 있을 수 있지만 어느 하나로 정할 수 없는 것이 빛과 시간 아니겠는가.


시도 마찬가지다. 무어라 딱 정해서 하나의 틀에 가둬둘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닌가. 그래서 서정춘의 시를 읽으면 짧은 시 속에서 더 긴 인생을, 더 많은 삶을 만나게 된다.


시인의 말이 마음에 치고 들어온다.


'아하, 누군가가 말했듯이 / 나도 "시간보다 재능이 모자라 더 짧게는 못 썼소." (5쪽)'


하, 더 짧게 못 써도 좋다. 황지우의 '묵념, 5분 27초'처럼 아예 백지가 되지 않아도 좋다. 서정춘의 시는 충분히 짧다. 그리고 충분히 길다.


첫시 '랑'에서 말한 것처럼, 서정춘의 시는 시와 우리를 이음새 좋게 이어지고 있다. 시랑 나랑 우리랑 사회랑 세계랑 우주랑, 이렇게 이어주고 있는 시들을 읽으면 짧음 속에서 긴 여운을 느끼게 된다. 좋다. 그 말밖에는.


 랑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사랑하기 좋은 말


서정춘. 랑. 도서출판 b. 초판 1쇄. 9쪽.


이렇게 우리는 이어짐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서정춘의 이 시가 더 마음에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최근에 겪었던 탄핵 정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 이어져 있었던지... 시인 역시 시를 통해 또 행동을 통해 함께 이어져 있었기에 이러한 '랑'을 노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2016년 탄핵 정국을 시인은 이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2016년 10월 26일부터였다

광화문 촛불 혁명 광장에서

내 촛불이 힘껏 빛나 보였을 때

나여, 그날만은 비로소 시인이었다


서정춘. 랑. 도서출판 b. 초판 1쇄. 31쪽.


하아, 우리 모두는 이때, 그리고 반복된 탄핵 정국에서 시인이었다. 우리는 모두 '랑'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시도 짧고 수록된 시도 많지 않지만, 그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시집이다. 읽으니 그냥 마음에 물결이 인다. 너랑 나랑 우리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뮤지컬로 '캣츠'의 원작. 원제는 '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이라고 한다.


  시 '황무지'로, 아니 황무지의 한 구절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작가.


  그가 쓴 고양이에 관한 시집. 


  쉽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이 고양이들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제 멋에 겨워 사는 사람들. 정말 이렇게 다양한 삶을 사는 고양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도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이들 고양이의 삶을 어떤 삶이 더 좋고 어떤 삶은 안 좋은지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삶들을 누리는 모습을 표현한 시들.


어떤 고양이는 교양이 있고, 어떤 고양이는 즐기고, 어떤 고양이는 사고를 치고, 어떤 고양이는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등등...


뭐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이 시집에 나오는 고양이들을 만나는 재미만도 쏠쏠하다. 그 중에 특별히 정이 가는 고양이도 있을 테고.


고양이가 사람을 집사로 선택한다고 하는데... 그런 점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기도 하고, 도시 주변에서는 들고양이들도 많이 보이고.


자기 삶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이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재미있게 읽으면서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문학이 주는 즐거움일 수 있음을, 이 시집을 읽으며 느꼈으니...


또 시집 뒤에는 영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한 시와 비교하면서 읽어도 좋고... 그리고 첫시와 마지막 시를 생각하면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도 좋다.


첫시는 '고양이 이름 짓기'이고 마지막에 실린 시가 '모건 고양이, 자기 소개하다'인데 사실 첫시와 어울려 끝시라고 할 수 있는 시는 이 시 바로 앞에 실린 '고양이에게 말 걸기'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짓는 것은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대와 관계를 맺는 처음이 된다. 그냥 "저기요."라고 불분명한 호칭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한 이름, 아니 상대가 원하는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함은 관계맺기의 기본이다.


'말로 할 수 없는, 말로 하되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 깊고 불가해한 단 하나의 이름'('고양이 이름 짓기'에서. 12쪽)을 아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모르고 대충 이름을 붙이거나 부르면 관계는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려면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는 과정을 '고양이에게 말 걸기'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설령 이름을 안다고 해도 함부로 먼저 부르지 말 것. 왜냐하면 아직 친한 관계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먼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즉 자신의 호의를 인정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


'고양이에게 믿을 만한 / 친구로 인정받으려면 / 존경의 표시가 필요하니까요'(고양이에게 말 걸기'에서. 80쪽)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도 그렇지 않은가. 무턱대고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은 요즘 말로 '스토킹'이 될 수 있다. 제대로 된 이름과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경우다.


그러니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고, 그 다음에 서로가 원하는 이름들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 우리 사람 사회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이 '캣츠'라는 시집, 고양이의 이야기지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뮤지컬 '캣츠'를 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만든 시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 전에 나온 시집이라 그런지 알라딘에서 찾을 수가 없다. 알라딘이 설립되기 전에 나온 책이니, 상품으로 등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절판이 되었을 것이고... 검색해 보니 알라딘 중고에는 한 권이 있다. 판매자 중고로 뜬다. 그런데 값이!


  지금 구할 수 없는 책들, 한때 사람들에게 사용가치로 다가왔던 책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교환가치가 높아지는 경우가 있다. 책이 화폐처럼 교환가치가 우선이 되면, 책은 아무에게나 다가가지 못한다.


  이 정도로 세월이 흐른 책은 도서관에서도 퇴출이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만나기 힘들어지니, 사용가치는 줄어들지라도 교환가치는 높아지기 마련.


자본주의 사회의 희소성 원칙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우연히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시영이란 시인에 대한 믿음도 있었고. 이시영 시인은 짧은 시들을 쓰는 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시집 역시 짧은 시들이 많다. 


그래 많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녹여내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 표현되지 않은 언어 사이에서 사람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 그것도 시인이 할 역할이지 않을까 싶고. 그런 역할을 잘하는 시가 내게는 사용가치가 높은 시인데...


이 시집의 제목이 된 시는 '가을 꽃'(12쪽)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첫행에 '진리의 길은 멀다 친구여'라고 되어 있다. 그냥 길이 먼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이 먼데, 시인은 그런 진리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사람일까? 이 시집에 시인에 관한 시는 두 편이 있다. 한 편은 한글로 '시인' 또다른 시는 한자어로 '詩人'. 그리고 '詩를 쓰려면'이란 시가 있다. 이 세 편의 시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겨울 나무'란 시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우선 시인이란 시 두 편을 보자.


     시인


삶이 경이인 사람

언제나 새벽 바다에서 애기처럼 돌아오는 사람

돌아와 설레는 발자욱을 남기고 사라지는 사람

해지는 저녁 바다가 밀물져 오면

쓰라린 갈매기 몇 마리와 함께  

다시 시작하는 사람

넘치는 밤 파도와 맞서 싸우는 사람

밤새워 늙은 섬처럼 일하는 사람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9쪽.


-----------------------------------------------------------------------


     詩人


일하는 사람만이 세계의 기쁨나무를 후려쳐

쫙 벌어진 기쁨의 알밤 열매 거둘 수 있고

일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한겨울 시린 노고목(老枯木)의 밑뿌리를 도타이 감싸

이듬해 봄

그 오랜 등걸에서도 어린 새순이 자라게 한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1쪽


이런 사람이 시인이다. 어렵지 않은 말로 시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 시인 자신은 어떤 시를 쓰고 있나? 과연 자신이 시인이라고 정의하는 존재에 걸맞는 시를 쓰고 있나 반성하고 있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시인데...


  詩를 쓰려면


시를 쓰려면

온몸에 저를 실어

산 같은 무게로 바위 같은 몸짓으로 활활 타오르는

넋의 푸른 숨결이 있어야 할 터인데

어느 날 만년필 끝에서 쉽게 풀어지고 씌어지는 나의 시여

너에게는 피의 냄새가 없다

말의 탐욕만이 있을 뿐

관념의 허상만이 있을 뿐

살아 있는 사람의 노여움 긴 긴 입맞춤이 없다

그 몰아치는 폭풍 속의 서늘한 눈빛이 없다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39쪽.


윤동주는 일제시대, 그 엄혹했던 시절에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라고 자신의 의지를 다잡고 있는데... 


이시영 시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시가 시대에 맞서지 못하고 있음을 반성하고 있다. 이 반성이 반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앞의 '시인'이란 두 시에서 말했듯이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인은 냉혹한 세상에 따스한 온기를 전달하려 한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그것을 버티고 새순을 내게 하는 일... 힘든 존재에게 따스한 손길을 내미는 것.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 시인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런 시인들이 있음은 당연하고...


하여 이 시집에서 '겨울 나무'란 시가 바로 이 세 시를 아우르지 않나 싶다. 


 겨울 나무


나무는 

겨울 나무는 옷 모두 벗고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아파트 광장에 서서

아직도 제게 남은 온몸의 더운 기운을 

언 땅에 주고는

밤 하늘에 저렇듯 엄연하구나


이시영,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년. 20쪽


이런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존재를 작년 겨울(올 봄에)에 보았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날씨에 서로에게 온기를 나누어주던 사람들을. 아스팔트에 있던, 광장에 있던 수많은 시인들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시였음을. 그런 시들을 통해 우리가 지금에 이르렀음을. 1988년에 발간된 시집. 1987년 민주화운동을 소환하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그 시들과 작년(올초) 상황이 겹쳐지는데... 


일제강점기, 윤동주 시인의 온기가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듯, 87민주화운동을 거친 시대의 온기가 이싱영 시인을 통해서 전해지고, 그것이 2024년-2025년 광장의 수많은 사람들의 온기로 우리 사회를 따스하게 했다면, 그것이 지나친 억측일까?


이래저래 이 시집은 내게는 '교환가치'보다는 '사용가치'가 훨씬 높은 그런 시집이었으니...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호시우행 2025-11-03 0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랫도리 벗고 영하 12도의 날씨에 광장에 서 있다는 표현이 정말 날카로운 시인의 시선입니다.

kinye91 2025-11-03 09:15   좋아요 0 | URL
네,맞아요. 이런 시인의 시선을 만날 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곤 합니다.
 

  어릴 때 읽었던 전래 동화 중 하나. 토끼의 재판.


  나그네가 호랑이를 구해줬는데,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자 다른 존재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는...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존재들은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토끼가 내가 상황을 잘 모르니 처음 상황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 상황에서 나그네에게 갈 길을 가라고 했다는...


  현명한 판결. 이러한 판결하면 솔로몬이 생각나고, 또 중국의 포청천도 생각이 나는데...


  이들의 판결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강자라고 해서 잘못을 덮어주지 않는다는, 정의를 세운다는 점. 남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는 점. 


그런데, 이런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나? 편견이 없어야 한다.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약자의 처지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현재보다도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전향적인 판결. 이는 글자에 매인 판결이 아니다. 법전을 아무리 읽어도 법전에 나와 있는 문구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그런 글자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글자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때 좋은 판결을 할 수 있다.


시대를 읽고, 사람들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책만 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읽을 책은 법전이 아니라 -법전은 이미 읽었을 테고, 그것은 필요조건이 되지만 -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책을 읽어야 한다.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책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책들... 그 사람책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결이 사람들의 판단, 감정과 시대의 흐름에 어긋날 수도 있다.


제가 알고 있는 법전 속에만 갇혀 있으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엘리트들이란 그래서 더욱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읽어야 하니까. 읽고 그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하니까.


토끼의 판결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그러한 존재를 응징한 것이었다고 본다. 토끼를 잡아먹기도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 상황에서는 호랑이가 분명 잘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끼는 편견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만 보지 않았다. 그런 토끼의 이야기가 계속 되어온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구해준 나그네와 같은 상황.


이런 현명한 판결을 하는 존재를 법관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은 정말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결을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떤 때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들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살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한다.


시민들의 눈높이에도,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판결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엘리트라고, 자신들은 오류가 없는 판결을 한다고 자부한다면, 그들이야말로 판결을 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들이 득시글하는 곳은 바로 똥통에 불과하다.


똥통에서 그 냄새에 익숙한, 그래서 다른 좋은 냄새를 오히려 악취라고 여기는 똥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된다. 자신들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할 뿐... 남들은 다 맡고 코를 가리고 있는데...


이동재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를 읽다가 몇 구절에서 요즘 판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특히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101쪽)이란 시에서는, 햐, 이런 것들이 엘리트라고, 이런 것들을 관료라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는데...


작년 12월 어느 날 국무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도 않고 그냥 몸보신하는 그런 회의. 마찬가지로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임을 모면하려는 노력만 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은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을 비판하면 '감히~' 하는 듯한 태도. 


이 시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관료들의 모습... 저만 살려고 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관료들의 모습이 그때의 관료들과 겹쳐진다. 그러면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듯한 비슷한 족속들... 똥통 속의 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좀 다른 상황인데, 이 시집에 엘리트라고 하는 교수 사회의 모습을 그린 '똥통에서 보낸 한 철'(105쪽)시가 있다. 어디 이것이 그곳만의 문제이겠는가마는... 지금 이런 똥통이 곳곳에 있으니... 저들만 자기들이 똥통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큰소리치고 있을 뿐.


   똥통에서 보낸 한 철

- 이 시대의 정의로운 한 인물을 기리며


그 동안 똥통에 빠져 있었던 기분이라고 했던가

이태리 유학까지 갔다왔다는 그의 목소리가

명색이 성악이 전공인 그의 목구멍에서

오 년 내내 치밀어 올랐을 욕지기

학교 문닫고 교수직에서 해임된 그가 한 말,

그가 말한 똥통이 비단 광주예술대뿐이겠는가

사방에 냄새나는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저들의 입이 모두 똥통이 아닌가

코 싸쥐고 싶은 똥통 천국,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으으, 너도 구더기

아악, 나도 구더기.


이동재, 민통선 망둥어 낚시. 하늘연못. 1999년. 105쪽.


* 이보령 교수는 광주예술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이었음.


하여 앞의 시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에 보면 '이 벼락맞을 놈들 백성들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구나, 그 놈들 후손들 또 지금도 곳곳에서 뒤꽁무니 길게 빼고 좇빠지게(아마도 좆의 오타이지 않을까 싶다. 좇이 아니라 좆. 참 적절한 비속어 사용이다.) 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의 수많은 성씨가 지금 네 연구실 앞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족보 좀 뒤져봐라 이 잡것들아, 책 옆에 끼고 사는 것이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101-102쪽)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있다.


소위 지식인아고 하는 것들이, 사회 엘리트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짓이 없는 사람들 등쳐먹기, 위기에 저만 살려고 도망치기, 다들 살기 힘들 때 재산 축적하기,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등이라면... 정말, 이런 자들을 어떻게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동재 시집을 읽으며 작년 겨울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겨울로 가고 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누가 따뜻한 모닥불을 지펴줄 것인가. 엘리트들? 아니, 그건 바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사람책은 엘리트들 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잘 읽을 테니.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책'을 읽을 줄 알아야 똥통에 빠지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자신이 똥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랭보가 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연상시키는 제목... '똥통에서 보낸 한 철' 


우린 그렇게 다시 똥통에서 한 철을 보내면 안 된다. 정녕 그런 세월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