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생각하지 말자. 그냥 제목만 생각하자. 우리는 지금 겨울을 나고 있다. 봄을 기다리면서. 그런데 우리에게 다가올 이다음 봄은 어떤 모습일까?


  만물이 생동하는 봄답게 우리들도 생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 봄이 올까? 봄이 오도록 가로막고 있는 존재들에게, 이제 겨울은 갔다고, 봄의 시대라고, 자리를 비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떤 폭력의 위협을 받지 않고. 겨울처럼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고, 봄답게 만물이 하나둘 언 땅을 뚫고 나올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의문형으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평서형으로 끝나는 문장을 쓰고 싶다. 우리는 봄다운 봄을 맞이한다 정도의 문장. 생기 넘치는 말들이 넘치는, 거기에 폭력은 끼어들 틈이 없는 그런 봄을.


유희경 시집을 읽다. 제목이 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하긴 한번에 쉽게 이해되면 시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렵다.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시집을 읽으면서 아직도 봄이 오지 않았음을 생각한다. 봄이 와야 하는데... 제목이 된 시를 보면 더더욱 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봄이 아니다. 이런 봄이 아니어야 하는데... 시집을 읽으면, 제목이 된 구절이 두 번 나온다. 하나는 시로, 또 하나는 부록에서.


부록에서 시인은 '이다음 봄에 우리는, / 어떻게 되는 걸까요.'(139쪽)라고 하고 있다. 묻고 있다. 무언가 앞 구절을 보면 시인은 봄에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봄은 닫히지 않고 열린 존재다. 열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남은 일은 문을 열고 나서는 것.'(139쪽)이라고 한다.


우리에게도 봄은 이렇게 문을 열고 나서는 때가 되어야 한다. 그런 봄을 우리는 맞이해야 한다. 제목이 된 시의 끝부분에서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65쪽)라고 하고 있지만... 해석을 할 수가 없다. 그냥 읽자.


이다음 봄에 우리는


  살해(殺害)의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새들이 날아오르고 그들의 검은 깃털이 폭설처럼 쏟아졌습니다 그중 하나를 주머니에 감추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야기를 버렸습니다 새들이 쪼아먹기를 아무도 쫓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쫓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당신이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이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이야기를 버렸으니까요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거나 내가 당신을 밀쳐내거나 둘이 손을 잡고 도망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봄엔 당신이 나의 꿈을 꾸었지요 당신이 말해준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함께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계단 끝에는 버려진 집들이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었고 우리는 숨바꼭질을 했었어요 당신이 나를 찾을 차례에 밤이 되었고 당신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것도 살해입니다 당신은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때에도 새들이 날아오르고 한가득 날리던 검은 깃털들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당신은 이야기를 어디에 유기했던가요 차라리 분실했습니까 왜 말이 없나요 내가 버린 이야기 때문인가요


  깃털은 잠든 사람의 눈썹을 닮았습니다 하염없이 나는 그것을 만지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는 세계에서 당신이 사랑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날것의 생애가 음악이 될 때 그래요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이것은 나의 살해, 꿈이니까요


  이다음 봄에 우리는 어느 무덤에서 울어야 할까요


유희경, 이다음 봄에 우리는. 아침달. 2023년 1판 5쇄.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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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해가 지나갔다. 용! 우리나라에서 왕을 상징하는 동물 아니던가. 같은 얼굴이라고 해도 왕의 얼굴은 용안이라고 했고, 왕이 입는 옷은 용포라고 했으니... 용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용의 해 끄트머리. 왕이 되고 싶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지금 시대에 군주정 시대도 아닌데 왕이 되겠다고 하는 모습도 우습지만, 마치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연상시키듯이, 예전에 손바닥에 당당하게 왕(王)자를 써서 보여주었던 그 사나이가 용의 해가 가지 전에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말 왕처럼 해보고 싶었는지... '짐은 국가다'. 무슨 절대 왕정 시대의 말과 행동도 아니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 말을 안 듣는 집단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집단이다라니... 자신이 국가라고 생각하는 용의 해가 가는 것을 너무도 아쉬워해서 왕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는지...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개인 방송기기를 들고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가 그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횡설수설 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국민들이 지금 시대에 무슨 왕? 하면서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로 몰려갔으니... 용의 해는 자칭 왕의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의 최후가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하는데... [빅이슈] 이번 호에서도 놀란 가슴을 함께하는 행동으로 다스린 사람들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록 그들이 국민들을 무시했지만, 국민들은 물과 같아서 자칭 왕이라는 배를 엎어버릴 수 있음을 다시 보여주었으니... 


이번 [빅이슈]에도 그러한 물의 역할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 평소에 잔잔한 물줄기 역할을 하던 잡지가 [빅이슈] 아니었던가.


어려운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숨쉴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주고, 또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하는 잡지 아니었던가.


이런 잡지가 자칭 왕 노릇을 하려는 자를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용의 해가 가고 뱀의 해가 되었다.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우리는 용꼬리가 되지 말고 뱀머리가 되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올해가 되었으면 좋겠고, [빅이슈]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뱀머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의미에서 뱀머리다. 사악함을 뜻하는 뱀이 아니다. 또다시 지난 해 용처럼 사악한 뱀처럼 행동한다면 그 뱀머리는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짐'이 되는 뱀들은 뱀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용꼬리다. 그것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용의 꼬리... 이미 지나간 용꼬리에 들러붙은 존재들. 그것은 '짐'이다. 우리 국민들의 '짐'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힘, 힘!' 외치지만, 그것이 국민들에게는, 정말 푸른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국민들에게는 그들은 이미 지닌 용꼬리에 불과하고, 그들의 '힘' 소리가 '짐' 소리로 들리고 마니...


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귀가 있다면 지금과 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겠지만... 이들, 정말 추위 속에서도 따스함을 나누는 [빅이슈]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을까? 아니, 읽지는 않더라도 사본 적은 있을까? 아니다. [빅이슈]라는 잡지의 존재를 하는 여당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국민을 대변한다면서, 국민의 힘이 되겠다면서, 정작 힘을 주어야 할 존재들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힘'이 아니라 '짐'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용꼬리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런 용꼬리는 이제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서 용과 왕, 뱀을 생각한다. 우리는 상서로운 푸른 뱀의 머리가 되는 해로, 그렇게 한 해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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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노년의 냄새가 풀풀 나는 시집이다. 이제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의 시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맨땅'이라고 낮은 곳이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삶이 '조그만 포구'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시들이 있다.


  나이듦. 늙음.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읽다가 이 시를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것이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때를 지나 이젠 꺾인 때. 그럼에도 자신이 꺾이기 전의 모습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꺾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꺾인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태도. 그런 삶.


그것은 죽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늙음이 젊음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러한 삶의 모습들. 젊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늙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젊음이 젊음이다.


말이 필요없다.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허리 꺾이고도


장맛비 갠 오후 짧은 산책 나갔다가

길가의 풀꽃 하나에 마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안과에 계속 다녀도 눈이 편치 않아

마음이 어디에고 자리 잡기 힘들어할 때

마을버스 종점 지나 서달산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난 씀바귀.

공사판에서 날라온 흙 조각에 맞았나

꽃대 가운데가 꺾이고도

땅으로 떨어지는 금빛 얼굴을 쳐들고 있었어.

흠집 하나가 얼굴 가운데 씨앗처럼 붙어 있었지.

자세히 보니 조그만 풍뎅이,

손 내밀어 날려버릴까 하다 그냥 놔뒀어.

그래, 벌 나비는 아니더라도

산 것에게 황금빛 쉴 자리 하나 마련해주는 게

허리 꺾이고도 얼굴 쳐든

한 꽃의 완성이 아니겠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년 초판 3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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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들이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시적인 사회,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시를 읽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란 내 마음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니,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 그 사이에는 평화가 싹튼다. 평화는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존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를 가까이하게 될까? 적어도 전국민이 한 편의 시라도 암송할 수 있는 사회는 어떻게 해야 만들어질까?


간단하다. 시를 좋아하게 하면 된다. 좋아하다보면 자연스레 읽게 되고, 읽다보면 외우고 싶은 시가 생기고, 그렇게 시를 외우는 사람이 많아지면 어, 나도 외워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고,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시가 사람들 마음에 번져나가게 될 것이다.


누구부터 시작해야 할까? 가능하면 어린 나이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것들, 어린 시절에 자주 만난 것들은 평생 그 사람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유초등 때 동시부터 시작해도 좋고, 초중고 때 다양한 시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를 좋아하게 해야 한다. 좋아하게 하려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야 한다. 


내 이야기. 우리들 이야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요즘 봇물 터지듯 나오는 청소년 시집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집 역시 시인의 세 번째 청소년 시집이다. 시인은 두 권의 청소년 시집을 내고 '이만하면 청소년들에게 시로 들려줄 말은 웬만큼 풀어냈겠더 싶었다'(4쪽)고 했다. 그럼에도 또 청소년 시집을 내게 된 것은 아직도 청소년들이 시인의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청소년들은 서로 같으면서 달랐습니다. 또래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고민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다채로운 빛깔을 뿜어내곤 했거든요,'(4쪽)라고... 그래서 그러한 다채로운 청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시로 풀어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청소년 시집을 통해서 다양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다채로운 그들의 생각과 고민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결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청소년들의 삶을.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고, 어떤 시들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시집의 4부에 실린 시들은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 그렇게... 남아 있는 마음의 빚. 슬픔을 시인은 끌어낸다. 끌어내 보여준다. 보여줌으로써 다시 그 슬픔을 안고, 그렇지만 이겨내고 살아가자고 한다. 읽어보면 안다. 어떤 시들인지...


       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다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빠져나오던 날부터

   나에게 교문은 벽이 되었다.


   학생도 아니고 성인은 더욱 아닌 내가

   마음대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많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버렸는지

   학교가 나를 버렸는지

   이제 와서 그런 건 따지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문밖에 서 있다는 것

   밀어도 꿈쩍 않는 벽들이 많다는 것


   길은 여러 갈래라지만

   그럴수록 고르기 어려운 법이어서

   어디로 발을 떼야 하나 고민할 때마다

   교문 안쪽의 세계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돌아볼수록 문은 멀여졌고

   어느새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 나는

   내가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는 중이다.

   벽이 문이 될 때까지 두드려 보는 중이다.


   들리니? 들리세요? 들리십니까?


박일환, 우리들의 고민상담소. 단비. 2024년. 29-30쪽.


이 시에 나오는 문과 벽이 어디 청소년들, 학교에만 해당될까? 우리들 삶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 문이 많은가? 벽이 많은가? 어떨 때는 문조차도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아닌가? 


그런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으라고, 시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외치는 것과 같다.


"들리니? 들리세요? 들리십니까?"


들어야 한다. 들리게 해야 한다. 들려서 벽이 문이 될 때까지 두르려야 한다. 그렇게 청소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벽을 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들이 많이 생기게 해야 한다. 


문은 곧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니... 시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 단순하다. 마음에 문을 만들고 그 문을 활짝 열고 서로의 마음이 이어질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런 사회... 자연스레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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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마지막 [빅이슈]다. 자신만의 한 해를 돌아보는 기사들도 있고, 다행히 살아갈 곳을 찾은 여성 홈리스 이야기도 있어서, 연말이 조금 따스해지기도 한다.


  추운 겨울날. 추위를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도록 해주는 잡지가 [빅이슈] 아니던가.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래, 책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야말로 12월은 노벨상 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축제여야 할 기간. 한강 작가를 축하하고, 다른 작가들도 축하를 받고, 그리고 여러 책들을 알리고 읽는 행사를 하는 주간이었으면 했는데...


한강 작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를 한 단계 더 올리는 그런 과정으로서 노벨 문학상이 작용해야 하는데...


이런 축제에 찬물을 끼얹는 집단이 있었으니... 자신은 힘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암묵적인 동의, 반대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반대를 하지 않은 것은 동의이고, 동조이다.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 전에는 자신들이 이 나라를 운영한다고 큰소리를 떵떵치더니, 막상 위기가 닥치니 나 몰라라 하는 꼴은 졸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결코 국정을 운영한다는 사람이 할 소리, 할 행동은 아니다.


이들만이라도 제대로 정신이 박혀 옳은 소리, 바른 행동을 했더라면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혼란스러워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치 한강 소설에 나오는 상황을 재현하기라도 한 듯, 그런 큰뜻이 있었을리는 만무한 이들이 여전히 언론에 나와서 큰소리를 치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이제는 따르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이미 많은 것을 경험했다. 문화적 소양 또한 높아졌고... 언론사들에게 소식을 맡기지만은 않는다. 자신들이 직접 소식을 실어나르기도 한다. 무엇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선다. 수많은 사람이 이 추운 겨울에 거리로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진 나라다. 이런 국민의 수준을 정치권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국민을 무슨 기억력이 나쁜 사람들로 매도하는 자들이야말로 수준 이하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진정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런 작자들과 반대 편에 서 있는 잡지가 [빅이슈]다. 사람들을 분노로 열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따스하게 하는 잡지. 그러한 [빅이슈]가 있어서 이 추운 겨울, 어느 정도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책을 많이 읽지 않았으리라. 책을 읽고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리라. 그러니 모든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고 실행했겠지. 그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생각도 하지 않고, 그것이 국민들의 정서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파악도 하지 않고.


이런 자들 때문에 노벨상 주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를 비롯해 문화예술인들이 축제를 벌일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것에 화가 난다. 이 화를 누를 수 있도록 상황이 해결이 될 것이라 믿고.


이번 호에 이렇게 책에 대한 글들이 있었는데..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책에 대한 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한 해 동안 [빅이슈]를 읽으면서 때로는 따스한 온기를, 때로는 시원한 청량함을 느꼈다. 내년에도 이런 역할을 [빅이슈]가 계속 해주기를 바라면서, [빅이슈] 판매원들과 편집진, 그리고 필자들, 또한 읽는 독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 모두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 잘 맞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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