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휴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폐간이라고 해야 한다.


  예전에 내가 받아보았던 잡지들이 격월간에서 계간으로, 계간에서 휴간이 된 경우가 많았고, 노숙인의 자활을 돕고 있는 [빅이슈]도 격주간에서 월간으로 바뀌었는데, 이것도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학교에서 교과서도 디지털로 하자고 하는 세상이니, 종이에 인쇄된 잡지들이 살아남기는 더더욱 힘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샘터] 역시 오랜 기간 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던 잡지였는데... 비록 정기구독을 한 적은 없지만 가끔은 읽을 기회가 있던 잡지였고. 그래서 이 잡지가 그만 발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의 잡지가 사라지는구나. 이렇게 종이책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구나. 아직은 서점에 가면 종이책들이 많은데, 이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디지털로 읽는 것과 종이라는 물성을 지닌 책으로 읽는 것은 차이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고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데...


너무도 많은 책들이 있어서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른다. 잡지들이 하나둘 휴간, 폐간하고 있는데, 이것이 종이책으로 옮겨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니.


이번에 알라딘에서 샘터 잡지를 창간호와 마지막호를 묶어서 판매를 했다. 이런 책 광고가 나오면 사야지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읽든 읽지 않든 사놓아야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


종이책에 덜 미안한 마음. 이렇게라도 사라지는 잡지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창간호, 와, 정말 오랜만에 세로로 인쇄된 책을 읽었다.


어린 시절에는 종종 세로로 된 책들이 있었는데, 그때는 신문도 세로 인쇄였지, 아마... 그러다가 가로로 모두 바뀌었는데...


세로 인쇄만이 아니라 창간호는 한자가 그대로 쓰였다. 그래도 사람 이름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주어 읽을 수 있는데, 본문에는 토를 달지 않아 한자를 모르는 세대는 읽기가 힘들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한자와 한글이 함께 쓰였던 시대가 있었는데, 샘터 창간호가 1970년 4월호이니, 이때까지도 한자어가 일상에서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필자로 참여했고, 생각할거리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창간호 특집이 '젊음과 여성'이다.


당시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들을 기획으로 잡아 창간호를 발간했다고 보면 되는데... 젊음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때가 되어서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져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에 보면 남성 중심의 사고가 더 우세한 것은 말할 것이 없으니, 여성에 대한 관점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비교할 수 있는 창간호이기도 하다.


마지막호의 표제에 '첫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동안 샘터와 만났던 사람들의 글과 독자의 글들이 실려 있고, 새로운 해를 출발하는 1월에 샘터 마지막호가 나오다니,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그래서 [샘터]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창간호와 같이 고흐의 그림으로 표제를 장식했고, 샘터 기자들의 말이 길게 마지막에 실려 있는데, 감회가 새롭다. 


[샘터]의 휴간으로 창간호와 마지막호를 만나게 되었지만, 마지막호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쉼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닌다.


손에 쥐고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잡지들이 계속 살아남기를 바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오래 전에 '사랑굿'이란 시집을 읽은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 시.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


  그러다 우연히 김초혜 시인의 남편이 조정래 소설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느 글에서 조정래 소설가가 예전에는 김초혜 남편 조정래였는데, 이제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가로 설 수 있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하나 더 나아가 이들의 가족문학관이 있다는 사실. 그 문학관의 이름이 좀 길다. 2017년에 개관했다고, 전라남도 고흥에.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


  그럼, 조종현은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시조시인이고 조정래 소설가의 아버지란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아버지 역시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분이라고 하고... 이렇게 가족문학관이 생기는 문학 가족인데.


이 시집은 1943년생인 시인이 2017년에 발간한 시집이니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원숙함의 경지라고 해야 하나,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모습이 담겼다고 해야 하나.


읽으면서 '잠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으니, 달관의 경지다. 이 정도면. 하여 시집에 실린 시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추운 겨울, 또 냉혹한 사회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시들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한발 물러나 보게 하는 시들도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달관의 경지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다 현대시를 비판하는 시를 읽고는 시인들에게도 현대시는 어렵구나, 그렇지, 현대시는 비평가들을 먹여살리는 역할을 하지.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니 비평가들이 해설해주어야 그나마 그렇구나 할 수 있으니.


하지만 비평가들마저 온갖 문학이론을, 철학을, 사회학을 들이대어 해석해내는 시들이 과연 많은 사람들에게 와 닿을까. 오히려 그런 시들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역할을 하지 않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들을 보면 어려운 시보다는 쉽게 마음에 다가오는 시들이 더 많지 않아. 거기에 그리 길지 않아서 암송할 수도 있고.


원로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초혜 시인이 쓴 '현대시'를 보자.


    현대시


자기도 뜻을 모르고

남은 더 모르게 쓴다


시가 울고 있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79쪽.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껴 시를 멀리하면 시도 울 수밖에 없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짧은 시들. 잠언과 같은 시들이 이 시집에 실려 있으니, 각박한 세상에서 마음에 위안을 주고 싶을 때 이 시집을 읽으면 좋을 듯하다.


짧은 시 한편 더... 각박한 시대.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사람


흙과 나무와 바위를

모두 품는다


그래서 산이다


그래야 사람이다


김초혜. 멀고 먼 길. 서정시학. 2017년 초판 4쇄. 21쪽.


나중에 기회가 되면 '조종현 조정래 김초혜 가족문학관'에 한번 가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내 탓일까? 물론 내 탓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정작 내 탓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은 남 탓을 하고,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양 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래, 그건 내 탓이야 하면 세상이 바뀔까?


 오히려 남 탓만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 꼴이 아닐까? 그것도 권력을 쥔 자들,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이 남 탓을 주로 하고, 억울하다고 하는 판에,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는 세상 아닐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참...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치는 인간이 떵떵거리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큰소리치고 위협하는 인간들이 더욱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 아닌가. 이럴 때 과연 내 탓만 하면 되겠는가.


물론 내 탓을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남 탓을 할 필요도 있다. 너희들이 이렇게 만들었어. 너희 때문에 세상이 힘들어지고 있어. 이제 너희들 말 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하고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고, 책임을 묻는 자세.


그런 자세를 과연 남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책임을 묻지 못하는 자세가 바로 남 탓 아닌가. 어쩔 수 없어. 해도 안 돼. 체념하는 순간 내 탓이 굳어져 더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우리 제대로 된 남 탓을 해야 한다. 이우성 시집 제목인'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를 보면서 든 생각인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하, 시 참 어렵군. 어려운 말은 없는데 시의 내용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으니, 여전히 시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내 탓인가, 하다가 자꾸 내 탓만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시를 쓴 시인 탓도 있다고. 시인이 자기만족만을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면 읽는 사람 마음에 어느 정도는 들어올 시를 써야 하지 않나 하고... 시를 잘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면서 이 시집을 읽었는데. 


그러다 '새'라는 시를 읽고 이 시 재미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 새가 과연 좌우의 날개로 날까? 좌우 중심을 잡아줄 몸통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몸통이 크냐 작냐가 중요하지 않다. 두 날개를 이어줄, 또는 붙잡아줄 몸통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좌우 대칭이 완전히 똑같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새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정치에 빗대면 좌우 균형이 맞춰진 상태라면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정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적이 없다면 정치는 제대로 된 적이 없지 않을까. 시에 나온 '이놈의 새 / 너 / 날아본 적 있냐'(97쪽)는 구절은 우리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는데...


이 나라 정치에서 과연 좌우 균형이 잡힌 적이 있었던가. 아니 좌우가 뒤집힌 적이 더 많지 않았는가. 어쩌면 좌우 개념조차도 흐릿해진 정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날아본 적이 없는 정치가 과연 내 탓일까? 이거 정치인이라는 남 탓을 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들이 제대로 할 수 있게 우리가 몸통 역할을 하려고 해도, 무슨 날개들이 몸통을 무시하고 저들만 키우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제 크기만 불리려 해서 도저히 균형이 잡히지 않으니, 남 탓을 하자.


남 탓을 하다가 이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압력을 넣어야 하는 내 탓도 가끔은 하자. 그래야 좌우 날개에 몸통을 갖춘 새가 되어 날 수 있을 테니까. 그때서야 비로소 새가 제대로 날 수 있게 될 테니. 이 시, 재미 있다. 


      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 첫번째 집은 [조선일보]를 보고

오른쪽 첫번째 집은 [한겨레]를 본다

아침마다 밖에 나오면 내 편과 네 편이 등지고 있다

나는 오른쪽 첫번째 집에 혼자 산다

왼쪽 첫번째 집 방향으로 가본 적은 없다

함정 같은 거에 발이 빠질까 봐

그렇다고 내가 이쪽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다

한 번만 구독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말 한 번이야 하는 마음이었는데

몇 년째 오기로 구독한다

기울어지는 게 싫어서

그런데 왜 내가 오른쪽인가

쟤들이 왜 왼쪽이고

문제될 건 없지만 가끔 어색하게 느껴진다

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돌아서면 오른쪽도 왼쪽도 뒤집혀버리긴 해

아 그렇게 쉬운 일이구나

그래도 실수로라도 몸을 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쪽으론

작가가 이렇게 편협해도 되나

새는 양쪽의 날개로 난다며

그나저나 참 오래도 산다

이놈의 새

너 

날아본 적은 있냐


이우성,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2쇄. 96-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화시라고 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제목이 자살을 유발하지 않느냐고?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니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고 자살을 멈춘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따스함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 효과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를 읽으며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책머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5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 실린 시가 어렵지 않다. 그냥 평범한 말들로 되어 있다. 마치 이솝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이솝 우화,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이 시집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그래도 그 사물들 역시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시라고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를 보면 욕조에 들어간 눈사람이 찬물을 틀까, 뜨거운 물을 틀까 고민을 하다가 결정하는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눈사람 자살 사건' 중에서. 14쪽)


그래,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해주는 마음. 이건 죽음을 앞둔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나를 따스하게 하고, 그 온기가 남들에게도 퍼질 수 있게 하는 것. 비록 '눈사람 자살 사건'은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즉 죽기 전까지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따스함은 곧 다른 존재에게도 따스함으로 다가간다. 각박한 세상, 추운 세상에서 이러한 따스함이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더 훈훈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밖에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결코 쓸모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 '초'와 같은 시도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존재 의미가 있음을, 결코 지금 필요없다고 내쳐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데... 아래 사진을 보라.



이 시집의 편집이 좋다. 그림과 시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따라서 시를 읽고 그림을 봐도 좋고, 그림을 먼저 보고 시를 읽어도 좋다. 그림과 시의 조화.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고 있게 만든 편집이다. 


그래서 더 읽기에 좋은 시집이기도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누스 푸디카' 미의 여신으로 알려진 비너스(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정숙한 자세라는 뜻이란다.


  정숙한 자세라고? 누구에 의한 정숙함이지? 이는 바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 그러나 여성은 모든 것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여성은 중요한 부위를 가려야 한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욱 시선을 자극하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시선이고 생각이다. 베누스 푸디카란 말도 그래서 남성 중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시집 제목이 베누스 푸디카이고, 이런 제목을 가진 시가 세 편이 실려 있다. 무엇을 의미할까? 읽어가다가 혹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보게 하는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이런 존재야. 자, 봐. 네가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볼 수 있어 하는. 그러다 마네의 올랭피아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보이는 존재와 보는 존재를 뒤바꾸어버린 듯한 그림.


이 그림에서 여성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의 시선을 끌고 있다. 나를 보라고 하는 듯하다. 즉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보는 남자(보통은 그렇게 보니까)가 아니라 보이는 여성이다. 


시집 제목을 보면서 '정숙한 여성'이 중심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니다. 시집에는 오히려 감추어진 무엇을 드러내려는, 그러나 다 드러내지는 않고 보일 듯 말 듯하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이런 화자의 모습이 바로 시인이, 아니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시는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중요한 부분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생각하게 하고 찾게 하려 한다.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시이고, 여기서 시의 맛이 생겨난다. 대놓고 드러내도 시로서 별로 감흥을 못 주고, 너무도 꽁꽁 감춰 도무지 찾을 수 없게 만들면 역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보일 듯 말 듯. 찾을 듯 말 듯하게 표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의 감흥 아니겠는가. 분명 찾을 수 있는데 쉽게는 찾지 못하는 것.


'베누스 푸디카'는 바로 그런 시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그렇게 무언가가 보일 듯 보일 듯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베누스 푸디카 3'이란 시에서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112쪽)고 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 망토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투명 망토를 쓰면 애초에 보이지 않아서 그곳에 있는지 모르면 절대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시는 아니다.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그래도 찾을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찾았다 해도 만지고 냄새 맡을 수는 있어도 투명 망토를 벗기까지는 볼 수는 없다.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이렇게 생겼겠거니 하고.


시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겠지 하고... 하여 모든 시는 읽는 사람 자신만의 해석과 함께한다. 그 해석이 다 다를 수도 있다. 왜? 보지 못하고 짐작만 하니까. 시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시가 없느냐 하면 아니다. 시는 어디에나 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 밝은 사람이 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이 시집 제목을 보고 읽으면서 이것이 바로 시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쁜 현대인들, 답을 빨리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시는 그래서 어렵다. 답을 빨리 주지 않고 또 그것이 답이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하여 이 시집 제목이 된 '베누스 푸디카'는 보는 사람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잘 보라고, 제대로 찾으라고 거꾸로 보는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선의 뒤바뀜. 또는 주체의 뒤바뀜. 


빠른 시대, 편리한 시대에 조금 느리게 더 불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그렇게 한번 해보라고, 자, 투명 망토에 싸여 있는 존재를 찾아보라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 역시 나만의 읽기였겠지만. 그것으로 됐다.


베누스 푸디카 3

  기억의 탄생


그게 첫 동굴이었지


스물아홉의 젊은 아버지가 술 취해 나를 찾고,

나는 다섯살


신은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 사라졌다

울면서, 남자는 아이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나는 웅크린 채 아늑했지

그러고는 주문을 걸었다


당신은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미끄러운 건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요

나는 담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뺨은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어둠이 이불 속에서

고요히 높아져갔지


우리는 동산처럼 오래되었구나


훗날 기억이 왜 이렇게 모질게 남아 있을까 생각하다

첫 동굴 속에서 내 어둠이

증발 불가능한 액체임을 알게 되었네


나는 고인 채로 찰랑이다,

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다


박연준, 베누스 푸디카. 창비. 2017년 초판 2쇄. 112-11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