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었던 전래 동화 중 하나. 토끼의 재판.


  나그네가 호랑이를 구해줬는데,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자 다른 존재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는...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존재들은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토끼가 내가 상황을 잘 모르니 처음 상황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 상황에서 나그네에게 갈 길을 가라고 했다는...


  현명한 판결. 이러한 판결하면 솔로몬이 생각나고, 또 중국의 포청천도 생각이 나는데...


  이들의 판결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강자라고 해서 잘못을 덮어주지 않는다는, 정의를 세운다는 점. 남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는 점. 


그런데, 이런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나? 편견이 없어야 한다.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약자의 처지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현재보다도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전향적인 판결. 이는 글자에 매인 판결이 아니다. 법전을 아무리 읽어도 법전에 나와 있는 문구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그런 글자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글자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때 좋은 판결을 할 수 있다.


시대를 읽고, 사람들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책만 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읽을 책은 법전이 아니라 -법전은 이미 읽었을 테고, 그것은 필요조건이 되지만 -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책을 읽어야 한다.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책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책들... 그 사람책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결이 사람들의 판단, 감정과 시대의 흐름에 어긋날 수도 있다.


제가 알고 있는 법전 속에만 갇혀 있으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엘리트들이란 그래서 더욱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읽어야 하니까. 읽고 그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하니까.


토끼의 판결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그러한 존재를 응징한 것이었다고 본다. 토끼를 잡아먹기도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 상황에서는 호랑이가 분명 잘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끼는 편견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만 보지 않았다. 그런 토끼의 이야기가 계속 되어온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구해준 나그네와 같은 상황.


이런 현명한 판결을 하는 존재를 법관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은 정말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결을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떤 때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들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살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한다.


시민들의 눈높이에도,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판결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엘리트라고, 자신들은 오류가 없는 판결을 한다고 자부한다면, 그들이야말로 판결을 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들이 득시글하는 곳은 바로 똥통에 불과하다.


똥통에서 그 냄새에 익숙한, 그래서 다른 좋은 냄새를 오히려 악취라고 여기는 똥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된다. 자신들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할 뿐... 남들은 다 맡고 코를 가리고 있는데...


이동재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를 읽다가 몇 구절에서 요즘 판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특히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101쪽)이란 시에서는, 햐, 이런 것들이 엘리트라고, 이런 것들을 관료라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는데...


작년 12월 어느 날 국무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도 않고 그냥 몸보신하는 그런 회의. 마찬가지로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임을 모면하려는 노력만 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은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을 비판하면 '감히~' 하는 듯한 태도. 


이 시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관료들의 모습... 저만 살려고 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관료들의 모습이 그때의 관료들과 겹쳐진다. 그러면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듯한 비슷한 족속들... 똥통 속의 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좀 다른 상황인데, 이 시집에 엘리트라고 하는 교수 사회의 모습을 그린 '똥통에서 보낸 한 철'(105쪽)시가 있다. 어디 이것이 그곳만의 문제이겠는가마는... 지금 이런 똥통이 곳곳에 있으니... 저들만 자기들이 똥통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큰소리치고 있을 뿐.


   똥통에서 보낸 한 철

- 이 시대의 정의로운 한 인물을 기리며


그 동안 똥통에 빠져 있었던 기분이라고 했던가

이태리 유학까지 갔다왔다는 그의 목소리가

명색이 성악이 전공인 그의 목구멍에서

오 년 내내 치밀어 올랐을 욕지기

학교 문닫고 교수직에서 해임된 그가 한 말,

그가 말한 똥통이 비단 광주예술대뿐이겠는가

사방에 냄새나는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저들의 입이 모두 똥통이 아닌가

코 싸쥐고 싶은 똥통 천국,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으으, 너도 구더기

아악, 나도 구더기.


이동재, 민통선 망둥어 낚시. 하늘연못. 1999년. 105쪽.


* 이보령 교수는 광주예술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이었음.


하여 앞의 시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에 보면 '이 벼락맞을 놈들 백성들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구나, 그 놈들 후손들 또 지금도 곳곳에서 뒤꽁무니 길게 빼고 좇빠지게(아마도 좆의 오타이지 않을까 싶다. 좇이 아니라 좆. 참 적절한 비속어 사용이다.) 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의 수많은 성씨가 지금 네 연구실 앞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족보 좀 뒤져봐라 이 잡것들아, 책 옆에 끼고 사는 것이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101-102쪽)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있다.


소위 지식인아고 하는 것들이, 사회 엘리트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짓이 없는 사람들 등쳐먹기, 위기에 저만 살려고 도망치기, 다들 살기 힘들 때 재산 축적하기,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등이라면... 정말, 이런 자들을 어떻게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동재 시집을 읽으며 작년 겨울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겨울로 가고 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누가 따뜻한 모닥불을 지펴줄 것인가. 엘리트들? 아니, 그건 바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사람책은 엘리트들 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잘 읽을 테니.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책'을 읽을 줄 알아야 똥통에 빠지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자신이 똥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랭보가 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연상시키는 제목... '똥통에서 보낸 한 철' 


우린 그렇게 다시 똥통에서 한 철을 보내면 안 된다. 정녕 그런 세월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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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배 시인을 몰라도 이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개인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이 교류했던 문인들, 스승으로 모셨던 분들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렇다고 이 시집이 어렵냐 하면 전혀 아니다. 아주 쉽다. 읽기에도 쉽고 내용도 쏙쏙 들어온다. 이토록 쉽게 시를 쓸 수 있다니, 그런데 이 시들이 이렇게 마음에 들어오게 되다니 하는 마음에 경탄하게 된다.


  자고로 고수일수록 단순해진다고 했던가,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를 보면 선 몇 개로 달마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달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드러나게 했으니, 시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울 필요가 없다. 쉽게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게 하면 된다. 그런 시인이 내겐 좋은 시인이다. 머리를 쥐어짜게 하는 시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니라, 

엄청난 상징 속에서 헤매게 하는 시가 아니라, 

평이하게 그러나 읽을수록 운율이 느껴지고 또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시.


이근배 시인의 시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간결한 언어, 단순한 언어. 그러나 그러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들어 있고,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들의 삶이 들어 있고, 그의 개인사가 들어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그러니 시인의 첫시인 '절필'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붓을 꺾는다는 의미의 절필은 작품 활동을 그만둔다는 말로 쓰는데, 작품 활동을 그만둔다는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절필을 선언하는 문인은 이미 한 자리에 들어선 문인이다. 그는 정점에 올랐기에 거기서 멈출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한 문인들이 절필을 한다고 하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지니고 '절필'을 읽어보면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정점에 서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그러므로 절필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에는 좋은 시를 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시를 보자.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 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 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이근배, 사람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문학세계사. 2004년. 11쪽.


절정에 이르러서야 사그러지는 그러한 자연. 자연을 닮고 싶은, 짐승스럽게라고 했지만 이는 자연이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보겠다는, 작품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말이라고 하겠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 그럴 때 정점에 도달할 수 있고, 절필도 할 수 있다. 시인의 바람. 그것은 시인의 바람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시 삶에서 불꽃을 피울 때를 기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이 시를 읽었는데... 나도 내 삶에서 이렇게 꽃을 피워야지, 불꽃을 쏘아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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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낱말을 중심으로 이번 호를 생각한다.


  에너지전환, 시민의회, 농업 등등


  이번 호에 이런 제목이 있다. '에너지전환은 몽상에 불과하다'.


  왜? 에너지전환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지 않은가.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개발과 도입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에너지전환에 문제를 제기하다니, 도대체 이유가 뭘까? 이런 의문을 가진다. 지금 세계는 에너지전환에 힘을 쏟고 있는데, 생뚱맞게 에너지전환이 몽상에 불과하다니...


그럼 에너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료라고 간단하게 정의하면, 우리의 생활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지 않나? '전기'만 예로 들어도 우리는 전기 없이 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전기는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예전에는 전기 없이도 살았지만, 한번 편리함을 맛본 사람은 그 편리함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전기로 굴러가는 것들이 워낙 많고, 우리들 삶을 지탱해주고 있으니... 전기만 놓고 생각해 보자. 전기를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화석연료, 수력, 풍력, 원자력, 태양력 등등이 있다.


화석연료가 기후 위기를 일으킨다고 친환경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풍력이나 태양열(광) 등을 이용하지고 하는데, 이를 에너지전환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전기를 생산하는 원료를 바꾼다고 해서 과연 환경 파괴가 멈춰지는가?


풍력만 해도 풍차를 만드는데 또다른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고, 태양열(광)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을 개발하는데 또다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그러니 에너지전환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생활형태를 유지하는 한 환경을 파괴할 위험은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너지전환에 앞서 생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생활의 전환이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을 두고 논의하고 살펴보고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고 도입해야 하는데, 이를 대의정치에 맡겨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대의정치에서 '대의'를 하기 위해서는 선출되어야 하는데, 당장의 불편을 초래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사람이 선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의정치도 필요하지만 시민의회와 같은 시민들의 숙의가 이루어지는 의회를 통해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녹색평론이 지속적으로 '시민의회'에 관한 논의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민의회가 활성화되고,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면, 특정 집단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녹색평론이 강조하는 것은 소농중심의 농업 개혁 아니던가. 기후위기, 기후 재앙으로 무엇보다도 농업에 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데, 농업을 소홀히 했다가는 그 후과를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 대농, 기업농보다는 소농 중심의 농업을 장려해서 다품종 소량생산체제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글들이 실려 있다.


다양성, 그것이 생존에 더 유리함은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증명이 되었으니...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밖에도 다양한 논의가 있어 여러가지를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번 호에 소개된 이 상징 기억하고 싶다. 생명평화무늬라고 한다. 무늬라는 말이 낯설면 로고라고 하면 된다.



'평화는 서로 싸우지 않고 어울려 사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생명이 어울려 사는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배치하고 가운데 원을 통해 '하나'로 연결했다.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  아래에 사람, 오른쪽에 네발 짐승, 왼쪽에 새와 물고기, 그리고 위에 해와 달과 초목을 배치했다.'(195-196쪽) 


이런 뜻을 지닌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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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다.


개천절,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리는 날이 있는 달. 그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수천 년을 한반도에서 지내왔다. 하나의 민족, 이것이 꼭 하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구성원이 된다. 그러니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을 피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지 말자. 하나 속에 여럿이 속해 있다.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란 피의 순수성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면서 공통의 무엇을 지니고 살아온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혈통보다도 문화, 함께함 등등이 어우러진 공동체. 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탄압하고 쫓아낼 권리가 있는가?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좀더 힘센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쫓아내면 안 된다. 민족끼리 이 작은 지구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리는 이 지구에서 어울리면서 평화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민족은 공동체로서 제대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배워왔다. 다른 민족을 침략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런 평화 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런 우리 민족과 달리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억압을 멈추지 않고 있고, 세계는 그러한 억압을 멈추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간신히 자치지구라고 해서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도 가자지구는 봉쇄되어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에서 살아가기 더 힘들어진 사람들.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런 가자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다른 민족, 자기들 말로는 선택받았다는 민족, 그 선택받았다는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아왔는지,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한 민족이, 세상에 내가 당한 것 만큼 보복하겠다는 심정인지, 원.


가자지구에 구호물품을 전달하려는 사람, 단체들이 타고 있는 배를 나포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떴다.


<신문기사 링크 > 또 막힌 가자구호선단…이스라엘, 툰베리 등 500명 연행


인도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도 막는 민족, 그런 민족을 제재할 수 없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가자지구의 참상을 알리고 있으니.


이때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돕겠다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평화를 위한 움직임. 이는 이스라엘이 미워서가 아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깨고 있기 때문. 강자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따라서 가자지구에 평화가 오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는데... 열쇠를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세계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번역해서 펴낸 시집. [팔레스타인 시선집] 읽으면 슬프다.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저항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


번역해서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시들을 알려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개천절에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오기를...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야말로 '푸른 지구'가 되기를... 개천절을 맞이하여 바라는 마음.


이 책에 실린 짧은 시. 그러나 마음에 파고드는 그런 시. 아아, 이런 바람이...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창가 아래서 비명을 질러 대

날 한시도 가만두지 않던 녀석들아.

우당탕탕 소란으로

매일 아침을 채우던 녀석들아.

내 화병을 깨 먹고

발코니의 홀로 핀 꽃을 슬쩍한 녀석들아.

돌아와,

마음껏 비명을 내지르고

화병이란 화병은 다 깨부수고

꽃이란 꽃은 다 슬쩍 챙겨가렴.

돌아와...

돌아만 와다오...


할레드 주마. 류송 번역.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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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헌책방에 간다. 알라딘에서 운영하는 헌책방을 중고서점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중고서점이라는 말보다는 헌책방이라는 말이 더 정감있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손때가 묻은, 누군가가 한번은 읽은, 그런 사람을 거쳐서 다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결코 읽기를 마치지 않는, 계속 돌고돌아 읽어야 하는 그런 책들이 다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곳.


  '헌'이라는 말이 낡았다는 말이 아니라, 내게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친'이라는 뜻을,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준'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헌책방에 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너무도 빨리 절판이 되고 품절이 되는 이 시대에, 조금 오래 된 책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헌책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헌책방에서 시집이 꽂혀있는 서가를 훑어보다가 민영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어, 민영 시인에게 이런 시집이 있었나? 아니, 한길사에서 시집을 냈다고? 하는 의문. 반가움. 고민도 없이 손에 들었다. 


시들이 난해하지 않다. 시인이 50대 후반 들어 쓴 시들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과거 이야기도 실려 있고, 인디언들을 보고 난 마음을 담은 시들도 있고,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은 시들도 있다.


그 중에 제목이 된 시 '바람 부는 날'을 본다.


바람 부는 날


나무에 

물 오르는 것 보며

꽃 핀다

꽃 핀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피고,


가지에 

바람 부는 것 보며

꽃 진다

꽃 진다 하는 사이에

어느덧 꽃은 졌네.


소용돌이치는 탁류의 세월이여!


이마 위에 흩어진

서리 묻은 머리카락 걷어올리며

걷어올리며 애태우는

이 새벽,


꽃피는 것 애달파라

꽃지는 것 애달파라!


민영, 바람 부는 날. 한길사. 1991년. 11-12쪽



우리나라 현대사 탁류에 비교할 수 있다. 정말 거칠게 빠르게 험하게 흘러온 역사. 그 탁류에서 중심을 잡으며 살아온 사람들.


탁류를 맑은 물로 바꾸어간 사람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세월은 흘렸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다. 피고 지고의 의미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피고지고의 반복으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렇게 되기까지 지내온 세월에, 피었다 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달플 수밖에 없다. 바람 부는 가을 날 민영 시집을 읽으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한다.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런 탁류의 세월을 견뎌왔던가. 아니, 이젠 탁류의 세월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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