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 시민 -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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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 시민"은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엄마를 위한'과 '페미니즘'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9편의 소설을 뽑아 엮은 소설 선집이다. 그런데 읽다보니 장편소설에서 한 장이나, 한 부분을 발췌한 소설도 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같은 경우 장편소설인데, 이 소설에서 세서가 아이를 낳는 장면을 싣고 있다. 그 소설 전체를 읽어야 이 부분이 이해가 될 텐데, 그 점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소설들을 읽으며 엄마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다.

 

여성이 아니라 엄마다. 아니 엄마인 여성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소설은 담담하게 또 어떤 소설은 분노를 담아 표현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살기 위해 바등거리다 아이와 거리가 멀어진 엄마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도 있고, 아이를 낳는 과정을 다루는 소설도 있지만, 이 소설 선집에서 두 소설을 중심으로 생각을 하게 된다.

 

부치 에메체타가 쓴 [이등 시민]과 린다 쇼어가 쓴 [나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우선 [이등 시민]은 능력 있는 여자인 아다가 부모가 죽고 사회적인 압력에 또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데, 결혼한 남자가 능력이 없는 남자였던 것.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왔지만, 남편이라는 작자는 자신밖에 모르고.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인데... 남편의 부속물로서 살아가는 아다가 독립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모습이 여성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토니 모리슨이 쓴 [빌러비드]에서도 세서가 겪는 삶에 대해서, 흑인, 여성, 엄마라는 중첩된 관계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이등 시민]도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에 비해서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직장에 나가는 여성이라고 해도 집에 돌아오면 남성들보다 더 많은 일, 아니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집안일을 해야 하니,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로 살아가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예술가로서, 엄마로서 이중의 틀을 조화시키거나 한 쪽을 희생하거나 무시하거나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나의 죽음]이다. 자신이 죽었다고 하면서도 집안일과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죽음까지도 집안일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삶의 모습이 나와 있다.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런 소설은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어떤 남성은 자신이 집 안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이 책 부록에 실려 있는 한 글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아내가 일주일간 집을 떠나게 되면서 집안일을 했던 남자가 그 전에 자신은 30%정도 집안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10%정도밖에는 일하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 (216쪽)

 

그러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문학이 소설이니, 이런 엄마들이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을 남성들이 읽어야 한다. 아니면 여성 중에서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 돈이 많아 집안일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사람들과 그와 비슷한 사람들도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를 키우는 것이 엄마만의 몫은 아니고, 또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른 성적지향성들이 모두 함께 세상을 지탱하고 있고,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는데,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내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성장기에 있는 사람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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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러비드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6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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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토니 모리슨이 타계했다. 외국 작가들에 대해서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나라 언론이 다룬 작가들은 꽤 알려진 작가라는 생각, 그리고 토니 모리슨에 대해서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타계 소식을 듣고 모리슨이 쓴 작품을 읽어 본 적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작품은 예의상(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는 호기심에... 도대체 노벨문학상을 받는 작품들이 어떤지 알고 싶다는 그런 마음) 읽어보곤 했는데, 어째서 이 작가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을까?

 

아마도 편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흑인 작가라서, 흑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어쩌면 먼 과거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진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선입견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흑인에 관한 이야기가 과거라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아니다... [헬프]라는 영화나 [히든 피겨스]라는 영화 또는 책이 다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아주 먼 이야기, 과거 속에만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도 많은 과거가 있지만(이런 표현은 이 책에도 나온다), 이들이 언제든 과거에만 갇혀 살아서는 안 된다. 이들에게는 그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또 미래를 살아가는데도 장애물로 작용해서는 안된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주인공은 '세서'가 살고 있는 집에 두 사람이 방문한다. 순차적으로. 한 사람은 과거 백인 주인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폴 디',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죽인 딸이라고 추정하는 '빌러비드'

 

둘 다 과거와 관련된 인물이지만, 이들이 세서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폴 디는 미래로 나아가는, 즉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세서를 사회로 나서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와 함께 세서는 페쇄된, 유령이 나온다고 하는 124번지 집에서 나오게 되는데, 바로 이때 빌러비드가 등장한다.

 

밖으로 나오려는 세서를 다시 안으로 몰아가는 인물. 빌러비드와 폴 디는 함께 할 수 없다. 결국 폴 디가 쫓겨나고 세서는 빌러비드와 함께 집 안에만 있게 된다. 직장도 그만두게 되고... 계속 자신의 과거를 끄집어내 이야기하게 된다.

 

현재 함께 살아가고 있는 딸 덴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많은 과거를 현재에 하나하나 반추하면서 살아가는 세서는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 속에 갇힌 인물은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서를 구해주는 인물은 바로 딸 덴버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느낀 덴버가 어려운 발걸음을 떼고 밖으로 나온 것.

 

덴버가 밖으로 나옴으로써 안에 갇힌 세서의 일이 알려지고 결국 세서는 빌러비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자신을 옭아매던 과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소설은 그 희망을 이야기한다.

 

빌러비드에 의해 쫓기듯이 나갔던 폴 디가 다시 돌아와 세서를 돌보겠다고 한 것. 집 안에만 있다가 밖으로 나온 덴버가 이제는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것.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환상적인 장면과 현실적인 장면이 겹쳐지면서 소설은 묘미를 더해가는데... 세서의 삶을 통해, 또 폴 디의 삶을 통해서 남북전쟁 전후를 살아가는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만날 수가 있다.

 

백인 주인에게 잡혀가게 하느니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이겠다는 세서의 행동을 중심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할 수 있는데... 착한 백인, 나쁜 백인으로 구분할 수 없다.

 

인종차별주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주인으로 나오는 가너도 결국은 백인일 뿐이며,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 보드윈에게 세서가 달려드는 것도 그런 이유때문이다.

 

개인의 좋고 나쁨으로 흑인들의 삶이 행복하다 말다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보드윈은 노예제를 반대한다. 그래서 흑인들의 탈출을 돕는다. 이런 사람에게 달려드는 세서의 행위는 특정 개인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노예제, 인종차별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해자에게 분노를 폭발하기보다는 자기 자식들에게 해를 가하는 쪽으로 행했던 과거의 행동과는 달라진 것이다. 세서가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결말 쪽의 행동이다.

 

그렇다고 자식을 죽인 세서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영화 [황산벌]의 마지막 장면에 계백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장면에서, 아내가 거부하고, 결국 계백이 칼을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황산벌]과 이 소설이 지닌 차이는 계백은 죽어서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죽인 가족에 대한 고통을, 하지만 이 소설에서 세서는 살아 있기에 계속 고통을 받는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또 살아남아 자기 곁에 있는 딸인 덴버에게도.

 

이 장면이 이 소설의 장면과 겹쳐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이 겪었던 인간 이하, 동물처럼 취급당했던 일들을 자식들이 겪에 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생각. 그 생각에 백인에게 끌려가게 하느니 차라리 죽어서 함께 저 세상에서 살자고 하는 몸부림.

 

그렇게까지 나아가게 했던 노예제의 비극. 흑인들이 몸으로 겪어야 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라지지 않는 고통들. 그 고통들을 소설은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그 고통이 전해졌을 때 읽는 이는 형식적인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이 노예제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차별이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가게 됨을, 그래서 쉽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함을,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흑인들이 옛날에 참 힘들게 살았구나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어야 했고, 또 지니고 살아야 했던 고통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이 알게모르게 차별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착한 쪽이라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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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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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많이 들은 시인. 파울 첼란. 유대인으로 태어나 학살을 경험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를 쓴 사람.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아우슈비츠를 바탕으로 서정시를 쓴 사람으로 알려진 시인.

 

그러나 독일어로 쓰인 시를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의미만이 아니라 시가 주는 울림도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다. 시를 번역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첼란은 시를 유리병 편지에 비유했는데, 유리병 속에 담긴 사연은 길 수가 없다. 짧다. 그 짧음을 해석해 내는 것. 바로 시를 읽는 사람의 역할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 건너 저 편에서 온 유리병 편지를 읽어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언어는 어떤 울림을 준다. 그냥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시들이 있다. 우선 파울 첼란이 시에 대해서 한 말을 보자.

 

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분명 희망이 늘 크지는 않은 - 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어딘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223쪽)

 

시는 하나의 타자에게로 가려 합니다. 타자를, '마주 섬'을 필요로 하지요. 시는 그걸 찾아갑니다. 자신을 그것에게 줍니다.

타자를 향해 있는 시에게는 사물 하나하나, 사람 하나하나가 그대로 타자의 형상입니다. (240쪽)

 

이 말들을 통해서 그의 시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 시선집에 실린 마지막 시 제목이 '시 닫고, 시 열고'이다.

 

시집을 닫으면서 시는 열리고 있는 것이다. 닫힘과 열림이 함께 있다.

 

시(詩) 닫고, 시(詩) 열고

 

여기서 빚깔들은

보호받아 본 적 없는

맨이마

유대인에게로 간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여기 내가 있다. (218쪽)

 

또 한 편의 시가 있다.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말들을 막아서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는 말들이 나돌아 다니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생각이 드는데... 첼란이 의미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이 시가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말이 칼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파리 하나, 나무도 없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대화가

거의 범죄이니

그 많은, 이미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에. (208쪽)

 

유리병 편지가 오는 동안 시대가 바뀌었고, 말에 대한 판단이 바뀌었다. 정말 이 무슨 시대란 말인가. 말이 아닌 말들이 말이라는 탈을 쓰고 돌아다니고 있는 이 시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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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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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그냥 제목을 보았을 때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실비아 플라스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아마도 '벨 자'란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려주는 내용이겠거니 했는데... 책을 읽어가는데 '벨 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거의 끝부분에 가서야 '벨 자'란 말이 나온다. 246쪽에. 종 모양의 유리관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이를 억압과 통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요즘 용어로 바꾸면 유리 천장이라고 해도 좋고.

 

에스더 그린우드. 대학생활을 장학생으로 보내고 있으며 뉴욕에 파견되는 학생으로 뽑혀 인턴생활을 하는 능력있는 여학생. 글도 잘 쓰고 공부도 잘하는 전도유망한 학생. 그러나 그녀가 뉴욕에서 겪은 일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결코 좋을 수가 없다.

 

무언가 자신을 계속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살아왔던 시절.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내왔는데, 그들이 이중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고, 여성에게는 더 많은 제약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게 될 때 에스더는 자신 속으로 침잠한다.

 

자신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다른 사람과 어울릴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그 정신병원에서 만나는 여성들 또한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에 머리를 부딪친 사람들일 것.

 

에스더는 이런 현실 속에서 지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나중에 정신병원에서 나와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에스더가 비록 정신병원을 나왔다고 하지만 사회는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신병원은 '벨 자'를 에스더에게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병원이 아닌 사회에서도 능력있는 여성에게 주어진 보이지 않는 한계. 그것으로 인해 질식할 것 같은 마음. 정신병원에 가기 전 '벨 자' 속에 갇힌 에스더는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죽음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침잠해 얻은 결론.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깰 수도 있지 않을까. 깨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에스더는 그렇게 유리 천장을 깨겠다고, '벨 자'를 벗어던지겠다고 정신병원을 나왔는지도 모른다. 병원이라는 장소에서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의사를 만났고, 그로 인해 '벨 자'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벨 자가 내 머리 위 2미터쯤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내 몸은 순환하는 공기를 향해 열려 있었다. (284쪽)

 

그런데, 바로 이 표현에서 에스더가 벨 자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내 머리 위 2미터, 그것이다. 벨 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스더는 벨 자를 깨뜨리지 않았다. 없애지 못했다. 단지 그것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뿐이었다. 달랑 머리 위 2미터. 언제든지 내려와 자신의 몸을 가둘 수 있는 높이.

 

사회에 나간 에스더가 어떻게 될지를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삶의 순간 순간에 벨 자는 에스더의 몸으로 내려와 가둘 것이다. 에스더는 그 벨 자 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인간들이 지닌 위선, 가식 등이 더욱 빨리 벨 자를 내려오게 할 것이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 벨 자란 생각이 든다. 자신 스스로 벨 자를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갇혀버리는 것이 아닐까. 남들과 같이 살기 힘들기 때문에, 에스더가 첫성관계를 해치워버리듯이 하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을까.

 

위악에 위악으로 대응하려는 것, 그것이 자신에게서 벨 자를 없앨 수가 없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

 

실비아 플라스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을 거라는 생각. 그런 사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 소설 속 주인공 에스더에게서 실비아 플라스를 본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벨 자'를 쓰게 하지 않았는가 반성도 하게 된다. 여기에 꼭 여성들만이 아니다. '벨 자' 속에 갇힌 사람들이 여전히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유리 천장, 벨 자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없애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벨 자'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벨 자' 속에 있으면서도 편안해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벨 자'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사회를 만든다. 그래서는 안 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자신이 '벨 자' 속에 갇혀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남자 버디와 같은 수많은 남자처럼은 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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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디카詩 한국문학 명저총서
이상옥 지음 / 국학자료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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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디카시'로 검색해 본다. 과연 디카시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는가를 살피는 방법이다. 하나의 장르로 디카시가 자리잡았다면 검색했을 때 많은 책들이 있어야 한다.

 

'디카시'라고 치고 검색을 하니 제법 많은 시집들이 디카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이젠 디카시는 시의 하위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이상옥이다.

 

처음으로 디카시라는 말을 썼고, 또 디카시에 관한 잡지들을 냈으며, 지방이나 서울에서 디카시 축제를 열기도 한 사람이니, 그의 작품을 시발로 해서 많은 디카시들이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디카시는 사진과 시가 화학적 작용을 해서 하나로 융합한 장르다. 시 따로 사진 따로 놀거나, 시나 사진 중 어느 하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시와 사진이 합쳐져 다른 존재로, 즉 디카시라는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카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책에서는 디카시에 대한 많은 논의를 모아놓았다. 이상옥 시인이 그동안 디카시에 들인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글들이다.

 

그 중 하나, 디카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디카시는 시인의 상상력이 아닌, 자연이나 사물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시적 형상이 구축되어진, 아직 문자언어의 옷을 입지 않은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그 형상을 문자로 재현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52쪽)

 

자연이나 사물이 말을 걸어오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걸어온 말을 시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카시다. 그러니 사진이 먼저 있고, 시가 나중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느끼는 감정을 사진과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문자에 갇힌 시가 아니라 문자를 넘어선 시, 그것이 바로 디카시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은 지금 시대에는 디카시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이 있다면 언제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 말에 대해서 문자로 표현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면 되니 말이다. 이것이 디카시가 지닌 장점이다. 그러니 디카시의 문자 표현은 짧다.

 

물론 길수도 있지만 짧게 표현했을 때 더 효과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물이 내게 걸어오는 말의 울림을 짧을수록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카시의 운율은 시조의 운율을 닮아간다고 한다.

 

시조는 짧은 길이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데 (평시조가 3장 6구 45자 내외라고 하니, 짧다.) 디카시 역시 한 컷의 사진과 문자 표현 속에 많은 것을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와 친해지면 주변을 잘 살피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디카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디카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이나 사물과 사람의 매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디카시가 정립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가 너무 난해해지는 이때 우리 삶 속으로 시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디카시를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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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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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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