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 월급사실주의
김의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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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나온 첫번째 소설집이다. 현실은 점점 팍팍해져 가는데, 그런 현실을 과연 문학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나? 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문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를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집.


작가들이 우리 현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읽는 사람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희망을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희망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찾기를 또는 위안을 받기를 바라고 썼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저 현상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후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것, 동시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11-12쪽)


어떤 현상인가? 팍팍한 현실이다. 이를 '새로운 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무어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이라는 인식이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점점 양극화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작가들이 모여 각자가 바라본 현실을 작품으로 썼다.


이 소설집에는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양한 직업들이 나오지만 공통된 점은 이들 모두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작품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이, 비록 이 작품집이 2023년에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전세 사기라 할 수 있는 일을 겪는 인물,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부동산을 잡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발표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셋집도 마음 놓고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마음 놓고 살(파고 사다의 살이 아니라, 거주한다는 의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다.


말보다는 실행, 이것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인데... 집값 안정,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내 집이 아니라 내가 빌려 살 집도 구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얘기해야 한다. 기껏 빚내서 빌려 산 집(특히 전세)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들, 이 소설은(정진영, 숨바꼭질) 그나마 돈이나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으니...


젠세나 월세도 얻지 못하고 2호선 전철에서 자야 하는 배달 일을 하는 주인공 (주원규, 카스트 에이지)는 더욱 힘든 처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게으르냐면 그것도 아니다. 배달일을 하고, 밤에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한다. 그는 오후 3시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잘 집도 없고 애인의 집에서도 자지 못하고 결국은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몇 시간 동안 자기 위해 첫차를 타는 인물에게 어찌 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탓이 아님을, 그것이 네 선택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현장 실습을 나간 학생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런 현장을 선택한 것도 너니까 그건 너의 자기주도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여정, 섬광)


과연 자기주도권일까? 환경이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 아닐까? 그 현장이 열악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 그렇게 된 환경에서 과연 자기주도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자기주도권 (다른 말로 하면 주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을 지니라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개인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압력을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소설은 제시할 수 없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최영의 소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에서 만나보게 된다. 같은 카페에 있는,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 속해 번역일을 하는 사람과 영상 번역을 하는 사람, 단행본을 번역하는 사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다른 번역일을 하는 환상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이들은 같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속에서도 다른 이의 일들에 환상을 품고 있다. 물론 자신이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이렇게 비슷한 환경 속에 녹아 있는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오해를 하고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없어도 곧 대체 가능한 존재들 아닌가.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학습지 교사 등등. 


첫소설에 나오는 '우리는 순간접착체 같은 거네요?'(35쪽)라는 말이 마음에 아프게 와닿았다. 필요할 때만 쓰는. 그러나 늘 함께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


순간접착제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계급proletariat'가 합쳐진 말이라고)가 되겠다. 즉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고 확산시키는 사회. 아파트 단지에 있던 벤치와 나무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듯이 그렇게 한 순간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그럼 이런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지? 다른 건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못된 것이 내 잘못만이 아님을. 또 우리는 이렇게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할 문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월급사실주의란 말에 어울리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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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병원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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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편이 카오스와 철창에 이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하긴 읽지 않고 책이 출간된 순서를 생각하면, 그것도 지금까지는 세 권이 번역되었으니, 당연히 마지막 권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


한데 앞장을 넘기자 이런 말이 책에 있다. 소설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은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단독적인 서사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일러두기에 쓰여 있다.


어라, 그럼 이 편이 끝이 아니네... 첫부분을 보자마자 시간은 다시 사건 발생 당일로 돌아가 있다. 1963년 8월 9일 금요일 20시 27분부터 시작하니, 사건이 벌어진 지 약 1시간 정도 지난 뒤다. 끝은 1963년 8월 12일 월요일 19시 57분이니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시간보다도 짧다. 그 소설에서 잠깐 언급한 장면이 이 편에서 펼쳐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명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하긴 했지만 소련군이 들어와 약탈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그곳 시립동물원이 있는 큰 섬에서 아렌지코프스키 의사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햐, 이거 다른 편이 있다면 번역이 되길 또 기다려야 하네 하는 아쉬움... 그렇지만 이번 편은 앞의 두 권과 달리 조금 짧다.


300쪽 조금 넘으니, 700-900쪽에 달하던 전편들과 달리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앞의 소설들도 속도감과 긴장감이 넘치지만 분량이 하루에 읽기에는 좀 많았는데, 이번 권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


아니, 하루 만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비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철창]에서 교도소로 가는 도중에 병원을 지나가면서 그들은 문 앞에 붙어 있는 글을 읽게 된다. 


"들어오지 마시오. 

모두 죽었음." 


자, 이제 우리는 왜 이들이 이런 글을 붙였는지를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정신병원. 이곳 역시 격리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감염자가 발생한다. 최선을 다해 막으려 하지만 사소한 실수, 무관심 등이 겹쳐 좀비는 확산된다.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가고, 간호사들과 위생사들 또 조리사들도 한 명 한 명 죽어나간다. 남은 사람은 수십 명의 환자들과 책임자인 니엠추크 과장뿐.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환자들을 살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의사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환자들을 위하는 일이 될까?


이는 존엄사 문제와도 겹친다. 어떤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일까? 니엠추크 과장은 '모든 의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우선 해를 끼치지 말라'이다'(313쪽)는 철칙을 깨기로 한다.


그동안 그는 이 원칙을 지키려 애썼고, 비록 의식이 없는 환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환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게다가 조리사와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감염병은 확산되고 구조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313쪽)는 표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환자들의 최후를 보지 못한다. 자신도 죽임을 당하기 때문인데... 죽임을 당하기까지 그와 병원관계자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이 편에 담겨있다.


여기서 재앙이 닥쳤을 때 대응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나타나는데, 겁을 먹고 무조건 도망치려는 사람과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것도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특히 의사나 간호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니엠추크 과장이 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가 지닌 책임의식, 재앙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환자들을 돌보려는 마음은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의가 꼭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는 것, 재앙의 순간에서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간호사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분노했던 것은 이러한 전세계적인 재난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제 목숨 하나 건지려고 안전한 곳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피신했다는 점. 그 이후에 그들은 재앙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


지금까지 읽었던 세 권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리'였다. 책임자는 도망치고, 그 책임을 떠맡은 '대리'들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펼쳐보이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당시 권력자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질적인 위험의 순간에는 제 자신의 안위만을 먼저 생각하는 권력자들... 전쟁 통에 먼저 도망가버린 대통령을 만났던 적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은 비판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지만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남는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폴란드 좀비들을 통해 재난 상황에서 인간들이 대처하는 여러 모습들, 권력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다음 편이 있다면 빨리 번역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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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철창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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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하루 동안 벌어진 일들이라면, 그런 혼란 속에서 당황하며 좌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좀비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이 펼쳐진다.


소설의 속도가 1권에 비하면 빠른 편인데, 세 군데서 사건이 진행된다. 한 곳은 교도소, 또 다른 한 곳은 1권에서 지휘권을 잡고 군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하는 비에드지츠키 소령이 들어간 시립동물원이 있는 큰 섬, 또 한 곳은 교도소에서 내보내져 소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의도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잔인한 사형수들이 은거하게 되는 광장의 은신처다.


교도소에서도 역시 소장은 피신을 하고 교도소장 대리를 맡은 사람이 나온다. 권력을 쥔 자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리를 맡은 대위 역시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선택을 한다. 


즉 죄수들을 내보내고 교도관들의 가족들을 교도소로 데려오는 것이다. 그곳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느 정도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좀비가 발생하면 사태는 급속도로 나빠질 수밖에 없다.


교도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여러 사건을 겪은 끝에 간신히 좀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물론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다. 


공공기관이 재난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데, 자신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만을 보호하는 기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위험에서 구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장 내 가족의 안위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이 아니고. 그것이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교도소 대리 소장이 하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범죄자들을 풀어주고, 사형수들은 가둬서 내보냈다고 하지만, 다른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위였다. 


이런 행동을 공공기관이 한다면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각자도생이라고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협동이고, 책임을 지는 기관의 대처여야 한다.


이런 점에서 소령은 자신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령이 있는 큰 섬에서는 전열을 정비하고 좀비들에 대처하기 시작한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대피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서서히 좀비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와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좀비로 변한 원인이나 대책을 세우려는 노력도 하게 되는데...


반면에 좀비보다도 더 지독한 지옥이 펼쳐지는 곳이 사형수들이 탈출한 도심이다. 이들은 생존자들을 붙잡아 좀비를 유인하는데 쓰거나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는다. 이들은 이러한 재앙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간성을 잃은 자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데...


좀비의 지옥에 이들의 지옥이 더해져 그곳 사람들은 그야말로 인간이 겪을 수 없는 참담한 고통을 겪게 된다. 재난 상황에서 재난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려는 존재가 있기 마련인데, 공공 기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인간성을 상실한 작자들이 판치게 된다는 것을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잔혹하게 행동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 협조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내어놓게 하는 자들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들의 잔학함에 치를 떨면서 읽게 되고, 언제 어떻게 이들이 파멸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을 지옥에 빠뜨릴 것인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렇게 떨어져 있던 세 곳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소령이 지휘하는 군인들이 교도소와 연락이 되고, 간신히 살인자들에게서 탈출한 소녀가 범죄자들의 음모를 알려 그들을 소탕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 죽은 사람들도 좀비가 되는지 실험을 하는데...이때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한다. 그 살인자들, 사형수들을 좀비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데 이용하는데,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비에드지츠키 소령은 내켜하지 않는다.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런 비인도적 행위에 동원할 수는 없다는 쪽이고, 의사인 아렌지코프스키는 어차피 사형수들이고, 이들의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쪽이다. 이런 논의는 정의와 공리의 문제로 다룰 수 있지만 쉽지 않은 문제다.


다만,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적인 복수극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처벌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러한 드라마를 보고 통쾌하게 여기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범죄자들이 저지른 짓은 죽어 마땅한 짓들이다. 그 장면을 읽으면 이들이 그냥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총살이나 교수형은 이들에게 너무도 자비로운 형벌이라는 생각. 이들이 사람들에게 저지른 짓은 좀비들에게 먹히기 전에 온갖 공포를 겪는 것으로도 대체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2권의 마지막엔 소련군이 들어온다. 그런데 해방군이 아니라 약탈자로서... 이제 좀비에 더해 또다른 위기가 시작된다. 아직 좀비가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시간은 2주가 지나 있다. 3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끔찍한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두려움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그 위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 가는 사람도 있고. 


3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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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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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9일 금요일 19시 50분.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한 격리병동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폴란드에 출혈성 천연두가 유행하게 되고,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하게 된다. 격리를 통해서 전염병을 차단한다는 발상, 이거 몇 해 전에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코로나19 팬데믹 때 우리 역시 겪었던 일이다.


격리로 일정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잡히면 좋겠는데, 여기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변이가 생긴다. 사람들이 죽어도 죽지 않는 상태로 변하게 된 것. 단지 그런 상태로 변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변한 존재들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격리병동에서 시작된 이 재난은 브로츠와프 전체로 번져나가게 된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곧 변한 존재, 처음에는 변질자라고 하지만 나중에 좀비로 이들에 대한 규정이 확정이 된다. 그런 존재를 눈으로 목격하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게 된다.


팔다리가 분리되어도 죽지 않고 그 팔다리가 따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하고, 머리가 짓이겨져도 움직이면서 공격하는, 총알이 몸을 뚫어도 죽일 수가 없는 그런 존재들. 살아있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해서 그들과 같이 만들어버리는 좀비들.


그렇다. 수많은 좀비 영화, 소설들이 그렇듯이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팔다리가 따로따로 움직이는 좀비는 없었는데... 


경찰이 대응을 하다가, 군인이 출동을 하고, 전염병 전문의들의 조언으로, 이들을 고온에서 태워버리고자 한다. 화장, 말이 좋아 화장이지, 그냥 소각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즉, 과거에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 위험물이 된 존재들이니 아무런 거리낌없이 소각하려 한다. 한데, 소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들을 태우는 연기 속에 전염 요소가 들어 있는 것. 바람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는 전염. 


연기를 마신 사람들도 좀비가 된다. 이제는 군인이나 경찰로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니까. 아직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대책은 없는데 전염은 계속 되고, 이때 해결하려 나서야 할 정부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한다. 국민들이 어떻게 되든, 군인들이 어떻게 되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들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생각을 한다.


그런 목적으로 군인과 경찰을 이용하는데, 이는 부패한 정권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정부를 갖지 못한 나라에서 위기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폴란드의 권력자들은 소련의 눈치를 보고, 국민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여기는 모습이 소설에서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게 어디 폴란드만의 문제였겠는가.


책임감 없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재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자신들만 피란을 가고,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작자들. 이런 지도자연하는 작자들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도시 하나를 폭탄으로 완전히 날려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부패한 권력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때 전염병이 브로츠와프만이 아니라 폴란드 전역에, 아니 전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부패한 권력자들 역시 좀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런 권력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니, 사라지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런 권력자들은 재난 상황에서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킬 사람은 누구인가?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인물들이 대부분은 죽는다. 많은 인물들 중에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누구일까? 이들은 과연 이 재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전개가 급박하게 이루어진다. 그야말로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사람을 죽인다고나 할까. 수많은 인물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죽음의 잔혹함이 말로 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계속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작품을 이끌어가게 될 것인데...


소설의 전개로 보건대 군인들과 경찰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전염병 전문가, 일반 시민들 몇몇들이 다음 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은 쫓기고 있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지만, 이제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아니 어떤 해결책을 찾을 것인가. 그 점을 다음 권에 넘기고 있다.


첫권이 7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겨우 12시간이 지났다. 브로츠와프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제 부패한 지도부는 없다. 이들은 좀비에게 당했다. 그렇다면 이 재난을 해결할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 점을 찾아가는 것이 폐쇄된 사회였던 1960년대의 폴란드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작가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군인이라도 같은 군인이 아니듯이, 경찰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위하는 군대, 경찰이 있다면,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군대, 경찰도 있다.


여기에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명령에만 따르는 자들, 또 다른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다루는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재난 상황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로 인해 위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가게 되는지를 몇몇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첫권은 1963년 8월 10일 토요일 07시 50분에서 끝난다. 딱 12시간이 지났다. 이 12시간의 사건이 750쪽에 담겼다. 브로츠와프와 그 외곽지대에서 벌어진 일들로... 긴박하게 전개되는 사건들, 급속도로 퍼지는 좀비들.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다음 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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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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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에 읽은 소설은 소설집의 제목이 된 '가만한 나날'이다. 2018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는데... 


가만한 나날이라는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가만하다'가 무슨 뜻이지? 가만 있어처럼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 대책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고 쓸 때처럼 속수무책일 때, 또는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뜻이 모두 소설에 들어있지 않은가.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을 깊게 살피기 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 바로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서 상사들의 지시에 어떤 토를 달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 가부장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위계를 따지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직장에서도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기에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정말 가만히 있는 나날들이 연속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하지만 세 번째 의미는 좀 다르다.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의미는 격정적인 순간을 넘어서서 이제 자신의 삶을 찾았다는 의미, 그래서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쪽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만한 나날이라는 말에서는 남에게 휘둘리는 삶에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만한 나날'에서 주인공은 자의든 타의든 그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었고,(회사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해 떠났다고 하지만, 아마 그 회사가 계속 잘나갔더라도 주인공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 회사에 다닌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이 이 소설집에 많이 등장한다. 함께 살고 있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사람, 직장에서 만난 상사를 통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은 사람 등등.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이가 모두 20대에서 30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들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지, 그 시작이 얼마나 힘든지를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소위 흙수저라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녹록치 않은 사회. 그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하여 그들의 삶이 평온하다는 의미를 지닌 가만한 나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그렇지 않은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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