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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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싯다르타.


우선 싯다르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부처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제목을 보고 부처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을 읽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싯다르타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인물은 싯다르타는 부처와 다른 인물이다. 부처와 만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부처가 진리를 말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니 부처와 이름이 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무어라고 했나.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말에 의존해야 하는가? 글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중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지 않았는가? 말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살아온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부처의 말을 달달 외운다고, 어느 때고 부처께서는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우쳐야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친구였던 고빈다로부터 부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부처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독일의 작가에 의해 소설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의 과정은 치열하다. 너무도 어렵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은 그 목표와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사문이 되고 결국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 머물지 않고 또 길을 나선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를 이루는데 그가 겪는 일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일, 재산을 불리는 일에 참여하여 향락에 빠지는 일 등이다. 세속적 욕망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젊은 싯다르타가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일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 강가에서 나름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자, 무슨 일을 겪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 어떤 사랑보다도 끊기 힘든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맹목적 사랑. 이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을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떨쳐내지 못하면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즉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어쩔 수 없어한다. 온갖 고뇌를 겪은 후에야 자식을 놓아줄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또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못난 존재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 싯다르타에서는 개를 넘어서 돌멩이도 나라는 존재와 같다는 인식이 나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모든 존재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서로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 여기에서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다양한 모든 존재들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에 있으니까.


이렇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소설로 쓴 것이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고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진리는 진리 추구라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들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옆도 보고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 그래서 싯다르타는 강가에 머물면서 강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강은 어느 하나의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든 소리들이 강의 소리에 들어 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꼭 불교라는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 소설, 또는 한 사람의 성장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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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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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직접 쓴 글인 [폴 고갱. 슬픈 열대]를 읽고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갱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이니, 사실과 허구가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 살피는 재미도 있을 터였다.

 

그런데 굳이 고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지식을 동원할 필요가 없다. 고갱이어도 좋고 다른 예술가라도 좋을 것이다. 예술을 위해서 삶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히티라는 지명과 증권중개업자라는 직업이 명백하게 고갱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고갱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이 소설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제목은 달과 6펜스다. 6펜스는 가장 낮은 가격을 지닌 은화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동전으로 하면 1원짜리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아니면 100원짜리 동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달로 상징되는 예술의 세계와 6펜스로 말해지는 현실의 비루함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6펜스를 가지고 불리고 불려 더 많은 돈을 가지려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6펜스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달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6펜스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살아갈 것이다.

 

그들에게는 현실의 삶이 중요하고, 현실을 삶을 초월한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6펜스의 세계는 비루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에게는 비루한 삶일지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6펜스의 세계는 삶 자체일 수 있다. 6펜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살아가는 삶. 그들은 그런 삶에 만족하고 살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경원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6펜스의 삶이라고 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한 삶. 또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이다. 주인공인 스트릭랜드는 6펜스의 삶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6펜스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달을 꿈꾼다. 달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서 흔히 인용되는 대상이다.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이상을 추구하는 삶. 그 세계가 바로 달의 세계다.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은 달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런 예술가들을 이렇게 작품에서 말하고 있다.

 

아스팔트에서도 백합꽃이 피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물을 뿌릴 수 있는 인간은 시인과 성자뿐이 아닐까. (70쪽)

 

6펜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술가의 세계,즉 달의 세계다. 이 소설에서 스트릭랜드의 부인과 주변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런 세계다. 그런 사람들에게 달의 세계를 추구하는 스트릭랜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102쪽)

 

지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은 이상한 것에 불과하다. 그의 작품을 당대에 알아보는 사람은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의 감식안 역시 시대를 앞서 갔기 때문이다.

 

6펜스의 세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달의 세계를 엿본 사람은 현실의 세계에 적응할 수가 없다. 스트릭랜드의 작품 진가를 알아보는 스트로브가 아내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가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것은 그에게는 예술을 알아보는 눈과 감수성은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화화 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를 고정된 관념, 물질적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습관이 오래되면 감각도 무뎌지게 마련이지만 그러기 전까지 작가는 작가적 본능이 인간성의 기이한 특성들에 너무 돌무하는 나머지 때로 도덕 의식까지 마비됨을 깨닫고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는 때가 있다. 악을 관조하면서 예술적 만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약간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정직한 작가라면, 특정한 행위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기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다. (197쪽)

 

자기가 창조해 낸 인물에 살과 뼈를 부여함으로써 작가는 다른 식으로는 방출할 수 없는 자신의 본능에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의 만족이란 하나의 해방감인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이다. (198쪽)

 

소설의 화자는 결국 이러한 스트릭랜드의 세계를 이해한다. 처음에 그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상하게 그에게 끌린다. 그리고 그의 예술관을 알아가게 된다. 작가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타히티에서 함께 사는 아타는 영국에서 결혼해 살던 부인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영국의 부인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관습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타히티의 아타는 오로지 스트릭랜드를 이해하는 예술의 세계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끝까지 함께 하는 모습에서, 어떤 인위적인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주인공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모습에서 달의 세계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 이 소설을 굳이 고갱이라는 실존 인물의 삶에 비추어 읽을 필요는 없다.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간의 간극 속에서 예술의 세계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삶을 알아가는 과정. 달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6펜스의 세계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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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
지현 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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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면서 떠올린 작품들.

 

[흑설공주 이야기], [바다로 간 마녀]. [이갈리아의 딸들]

 

이 작품들은 서양에서 전래된 동화를 페미니즘으로 다시 썼거나, 또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여성 중심의 사회로 바꿔서 표현했다. 그래서 남성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 왔다는 것을 깨닫도록 해준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업이 이루어져 왔겠지만, 이번에 나온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작품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다시 쓴 것이다.

 

대상 작품은 '콩쥐 팥쥐, 홍길동전, 구미호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다. 이 중에 홍길동전은 홍길동전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쳐쓴 것이 아니라, 아기장수 이야기와 오누이 대결을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빌려 다시 쓴 것이다.

 

그냥 전래동화를 재미있게 읽어왔는데, 그 전래동화가 재미를 넘어 우리들이 사고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교육학 용어로 말하면 잠재적 교육과정에 해당했음을 이 작품들 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품들과 더불어 책의 맨 뒤에는 단군신화를 재해석한 글이 실려 있다. 우리는 흔히 단군할아버지라고 하고, 우리 조상이라고 하지만, 그 신화 속에 담겨 있는 가부장적인 모습, 남성성을 확대 · 유지하는 역할을 단군신화가 하고 있었음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견해가 다를지라도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은 남녀가 동등하게 지내려면 참조할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첫째,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 남성 3대의 타고난 신성으로 인정되고 정당화되었다. 둘째, 여성을 남성 3대(시아버지, 남편, 아들)의 수직적 관계 속에 위치시킴으로 인해 가부장적 혈통제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완성되었다. 셋째, 한 남자(환웅)와 두 여자(웅녀와 호랑이)를 수평적 관계로 위치시킴으로써 일부다처제의 전통이 자리 잡고 정당화되었다. (280-281쪽)

 

부록으로 실린 단군신화의 해석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고, 이렇게 해석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도 여러 시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동안 남성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인 사고체계가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해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알게 모르게 여러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 무의식에 고착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무의식에 쌓여 있던 사고체계를 흔들어 놓을 필요는 있다.

 

흔들려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번은 어, 정말 그런가 하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콩쥐팥쥐에서 팥쥐와 계모는 나쁘게만 나오는가? 물론 베델하임처럼 성장 이야기로 읽어서 부모로부터, 또 형제로부터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대타적으로 악인을 설정하고, 그 존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하는 말도 성립하겠지만, 그렇게 계모와 계모의 자식을 악인으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가부장적인 면을 수용하고 있는 이야기 방식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집에서 팥쥐는 능력있고 우애 있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고, 계모 또한 사려 깊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홍길동의 누나로 나오는 홍길영 역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능력, 어쩌면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오누이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합치는 모습으로 표현해서 비극이 아닌 진취적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구미호 이야기는 특히 슬프다. 왜 구미호에는 수컷이 없는가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구미호 이야기를 서양 중세의 마녀 사냥과 비교하고, 힘없는 여성을 짓밟는 남성들의 야만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녀와 나무꾼은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고, 다르게 표현된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딸을 등장시킨 것이 의미가 있다. 딸에게도 크나큰 짐이 지워졌음을,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는데, 그래서 부부간의 문제가 부부간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을 지우지만, 그 짐을 서로가 덜어줄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옛이야기를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다시 쓴 작품들. 읽어볼 만하다. 아니, 읽어야 한다. 페미니즘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사상이니, 이런 작품을 읽고 내 안에 있던 가부장적 요소들을 들여다 보는 눈이 필요함을 깨닫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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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개정판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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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문자라고 한다면, 읽기와 쓰기는 그러한 활동의 완성일 것이다. 문자로 쓰고, 그 문자를 읽는 행위. 그것을 인간은 자신의 삶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든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가 읽기에 대해서 쓴 것이다. 그가 읽어온 책들을 여섯 분야로 정리해서 쓰고, 우리에게 그것을 읽게 하고 있다.

 

즉, 김영하는 읽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우리는 읽다라는 제목에 맞게 그 글을 읽는다. 읽기를 통해 김영하가 생각하고 깨우치고,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했던 것들을 통해서 우리 삶에 또 하나의 결을 보태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 특히 나를 작가로 만든 문학작품들에 바치는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206쪽)

 

그는 자신이 읽어 온 책들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우리는 그 사랑 고백을 다시 읽으며 나는 도대체 어떤 책들에게 사랑 고백을 할 것인지 생각한다.

 

참 멋진 구절들이 많다. 이 구절들이 김영하가 새롭게 쓴 구절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 뽑아온 구절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이 책에서는 김영하의 것이다.

 

읽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다른 사람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문자라는 대상으로 표현된 그 무엇을 읽기를 통해 내것으로 만드는 행위가 바로 읽기인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지만, 첫부분에서 이 책은 이미 성공하고 있다. 고전에 대해서 한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고전을 읽으면서 그냥 '읽는다'른 말 대신에 '다시 읽는다'라는 말을 한다고.

 

고전은 당시를 넘어서는 무엇이 있는 것. 그래서 안 읽었어서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여러번 읽어도 늘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것. 그러므로 고전은 '다시'읽는 것이 된다. 이는 자신이 읽어서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독서의 가치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28쪽)

 

자신이 부족함을 깨닫게 하는 것, 그래서 겸손해지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읽기다. 이런 글들이 계속되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왜 소설에서는 악당이 선한 사람보다 더 자세하게 표현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함을 돌아보게 함이라는 것, 악당이 그냥 악당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악함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음을, 사람은 단순하게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지고 있음을, 그래서 사람을 복합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문학, 특히 소설이라는 것을 자신의 읽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읽는 인간이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사람들은 늘 읽는다. 읽는다고 의식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읽고 있다. 그것이 문자가 아닐지라도 우리는 모든 것을 읽는다.

 

읽는 행위는 바로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읽는 행위에 문자로 된 책을 읽는 행위는 한 차원 더 나아간 행위가 된다. 어떻게 읽기가 우리 삶을 넓고 깊게 만들 수 있는지를 이 책을 읽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 읽으면서 많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미 읽었다고 알고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그가 언급한 작품들은 많이 언급되는 작품들이고, 어렸을 때 명작이라고 꼭 읽어야 할 필독도서에 든 책들이니.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가 고전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을 김영하 글을 읽으며 그 책들에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다시 읽고 싶어지게 한다. 내가 읽으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점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이야기해주고 있으므로, 다시 읽으면서 과연 그런가 찾고 싶고, 또 다른 면도 찾을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책에 흥미가 떨어진 사람, 이 책을 읽으면 좋다. 다시 흥미가 생길 것이다. 도대체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생각하는 사람, 책을 읽어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읽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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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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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 눈에 띄는 대로 구입하고 있는 중. 제7회 작품집이다. 한편 한편 읽어가면서 이 작품들이 발표될 때를 생각한다.

 

소설이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할 때, 이 작품집에서도 2016년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 2016년이면 현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급격하게 변화된 세상에 살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 속 현실과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소설 속 인물과 나를 비교할 수 있다는 것.

 

이 중에 쉽게 마음에 다가온 소설이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와 정용준의 '선릉 산책'이다. 소위 사회적 약자를 등장시킨 소설인데...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는 그의 소설집 '산 자들'에도 수록되어 있다. 다른 작품들도 어딘가에 수록되어 있을텐데, 내가 읽은 것은 장강명 소설집 뿐이라서)

 

알바생. 아마도 우리나라 노동 인구 중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집단일 것이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도 달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라는 긴 이름도 호사스러워 알바생이라는 짤막한 언어로 불리는 이들. 최저임금을 간신히 받거나 또는 그보다 낮은 금액을 받는 사람들. 여기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태.

 

하지만 장강명의 소설은 알바생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알바생과 함께 일하는 직장 상사의 관점에서 소설이 전개된다. 그렇다. 알바생의 관점에서 전개되면 우리는 그저 그렇다는 생각만 하게 될 수 있다.

 

알바생들의 애환이야 다들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걸 소설로 표현할 때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장강명은 그 장치를 알바생과 함께 일하는 상사의 입장으로 설정했다.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성실하지도 않고, 일도 잘하는 편이 아닌 알바생을 결국 해고하기로 결정. 여기까지만 보면 참 일을 못하는 알바생을 많이도 감싸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만.

 

하지만 아니다. 과연 그것이 알바생을 감싸주고 도와준 것이었을까?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허위의식 아니었을까? 소설은 뒷부분에서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알바생이 계속 그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도. 소설 속 현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현실도 그러하므로.

 

'선릉 산책'은 장애인을 하루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래, 돌봄이라는 말에는 이미 위계가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해준다는 의미. 여기에는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

 

소설은 주인공이 돌봄 대상과 어느 정도 교감을 이루었다는 장면에서 반전을 이룬다. 그것이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서 베푼 것일 뿐. 정작 장애인의 처지에서 생각하지는 못했다는 것.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약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공감능력이 많이 상실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간혹 약자에게 시혜를 베푼다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약자들이 많다. 특히 팬데믹이 일어난 전세계적 재앙 앞에서 약자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때 강자의 눈이 아닌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머지 작품들도 여러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두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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