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워프 시리즈 2
알렉산더 케이 지음, 박중서 옮김 / 허블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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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소년 코난'을 너무도 재미있게 본 세대다. '코난'하면? 미래 소년을 떠올리면 구세대, 명탐정을 떠올리면 신세대라는 말도 있지만, 꽤 오래된 애니메이션.


당연히 일본에서 만들어진, 그것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애니메이션이라서 원작이 있다면 일본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알렌산더 케이라는미국 작가였다. 


읽어보니 내용도 많이 다르다. 어느 작품이 더 우수하다 말을 하기보다는 작품의 장르가 지니는 특성,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등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지나친 문명의 발달이 한 순간 날아가버리고, 세상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갈 듯하다. 기계문명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 육지의 대부분이 바다로 가라앉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도 다시 기계문명을 일으키려는,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 부리는 '인더스트리아' 사람들과 여기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려는 '하이하버'로 나뉜다. 나머지는 사람들이 생존하지 않는 많은 섬들.


여기에 살아남은 코난이 있다. 홀로 살아남는 법을 익힌 아이. 그러다 인더스트리아로 가게 되고, 거기서 할아버지를 만나 탈출해 하이하버로 가게 된다. 그 과정까지만이 소설에 표현되어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했는지,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선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작은 존재들인 인간들에게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자꾸만 '미래 소년 코난'이 떠올랐는데, 그런데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전개가 다르다는 점이 소설의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포비'가 나오지 않고, 다만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짐시'라는 인물이 나와 포비와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하고 있는데...


세계에 다시 엄청난 쓰나미가 몰아닥친다. 그 쓰나미는 그나마 남아 있는 육지를 많이 쓸어가 버릴 것이다. 인더스트리아도 마찬가지고, 하이하버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쓰나미가 닥친 데서 끝난다.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이제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난이 지도자가 되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렇게 여길 수 있도록 하면서 소설이 끝을 맺는데...


아마도 그들이 만들어갈 세상은 자연과 인간이, 인간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코난이나 라나가 다른 동물들과 교감을 하는 모습이 소설 속에 자주 나오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 생각할 수 있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탐욕이 스스로를 파괴했기에 탐욕이 아닌 공존하는 쪽으로 세상이 나아가야 한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를 애니메이션에서는 더 받아들여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읽는 내내 애니메이션과 겹쳐서 다시 한번 추억을 소환한 읽기라고 해야 하나? 기후재앙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그 다음이 어떤 비극적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소설이기도 하고,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아주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서 파괴된 세게는 지금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세계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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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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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麻姑)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범인이 밝혀진 추리소설. 범인을 알려주는데, 소설에서는 범인을 만들려고 한다. 왜냐? 그 존재가 범인이 되면 안 되니까. 이것은 바로 힘에 관한 이야기다.


힘있는 존재는 범죄를 저질러도 범죄인이 되면 안 된다. 범죄인은 힘이 없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범인을 만들어 내려 한다.


일제라는 절대권력이 물러간 다음의 일이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또다른 절대권력이 왔다. 바로 미군정이다. 그래서 소설 제목에 '미군정기'라는 말이 들어간다. 또 제목을 계속 살피자. 진범이 왜 밝혀지면 안 되는지를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으니까.


'윤박 교수 살해 사건'이라는 말이 나온다. 살해당한 사람이 교수다. 윤박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실제 이름이라기보다는 박사를 줄여서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윤씨 성을 가진 박사. 미군정 당시 박사는 어느 나라에서 학위를 따야 인정을 받을까? 당연히 미국이다. 미군정이니까. 


그렇다면 어느 대학의 학위를 지니고 있어야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대학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대학은?


물러볼 것도 없이 하버드 대학이다. 그렇다. 윤박은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패터슨 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32쪽) 여기에 소설은 이승만과 같은 동문이라고 한다. (33쪽) 어라?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박사 아니었어? 찾아보니,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단다. 동문 맞네. 그렇다면 그는 미군정기에서 힘을 지닌 존재다. 자신의 말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 명의 여성 용의자'  자, 거물급 남자가 살해당했다. 미군이어선 안 된다. 그렇다면 범인은 약자에게서 나와야 한다. 미군정 시기 누가 약자인가? 우선 사상적으로는 좌익이다. 좌익을 검거하고 처벌할 때니까. 그렇다면 좌익과 내통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살해당한 사람이 남성이고, 미군정과 관련이 있다면 좌익이 사주해서 정보를 빼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박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여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좌익과 어떻게든 관련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윤박과 관련이 있고, 좌익과도 관련이 있는 여성이 범인이 되어야만 한다.


소설은 이렇게 제목에서 사건의 내용을 암시해준다. 여기에 '마고'라는 말. 여성신. 한때 인류에게 추앙받았지만 남성신들에게 밀려난 존재. 그런 존재를 제목으로 삼았다. 여성성이 패퇴하고 남성성이 우세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힘이 없어진 존재들을 의미한다. 굳이 여성으로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여성만큼 또는 여성보다 더 약한 존재는 바로 성소수자니까.


이렇게 소설에는 여성과 성소수자가 나오고, 권력을 휘두르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존재들이 나온다. 그들에 의해서 진실은 가려지고 왜곡되려 한다. 이들을 태양이라고 한다면, 그 강한 빛으로 다른 주변의 존재들을 가려버리는 역할을 하는데... 소설에서 미군정과 양준수라고 하는 형사, 그리고 이든으로 나오는 미군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자, 범인은 밝혀졌다. 그럼에도 진실은 가려졌다. 왜 이들을 용의자로 지목했을까? 이것이 소설을 전개하는 핵심이고, 이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어야 한다.


세 명의 용의자. 셋이다. 그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은? 소설을 읽으면 둘이라고 하겠지만, 셋이다. 연가성, 권운서, 그리고 송화.


소설에서 연가성이 사설 탐정으로 활약하는데, 이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힘이 없는 사람들의 사건을 조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연가성의 이름이 '세 개의 달'이다. 세 개의 달. 달은 하나로 멈춰있지 않는다. 변한다. 변하는 모두가 다 달이다. 다른 존재들이지만 함께 하는 존재, 바로 이것이 달이다. 이런 달을 탐정 이름으로 택한 것은 선물받은 들고 다니는 회중시계에서 딴 것이겠지만, 태양과 달리 은은하게 어둠을 밝히는, 그렇다고 다른 빛을 없애는 태양이 아닌 달처럼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여성 용의자들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가 되고 (그것이 명시적으로 드러나든 드러나지 않든), 사건을 파헤치려는 연가성, 권운서도 서로 돕는 관계가 된다. 여기에 송화라는 사람은 나중에 등장해 왜 이 인물이 빠지면 안 되는지를 알게 해준다.


사건을 해결해가면서 연가성에게서 자꾸 한정현의 다른 소설들 인물이 소환된다. 그 인물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더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소설은 [소녀 연예인 이보나]에 실린 '우리의 소원은 과학소년'이다. 여기서도 세 명이 등장한다. 서안나, 윤경준, 수성. 이 셋의 관계는 조금은 다른 설정이지만 연가성-권운서-송화의 관계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 '낙관하자'란 말이 나오고, 이 말은 이번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비록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할지라도 또다른 시간이 그들에게 펼쳐질 수 있음을. 그래서 그러한 시간은 당대의 시간만이 아니고, 다른 시간에 또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전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 더 다른 소설과 연결점을 찾으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와도 연결이 된다. 복수를 하려 하지만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는 모습. 폭력은 남성성을 인정하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면,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그러한 방법은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없음을 여러 작중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들의 삶이 현실에서는 비극일지라도, 그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속했던 어둠은 달이 빛을 내어주듯이 다른 존재들에게 빛을 내어준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그래서 그 빛들이 모여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 우리도 낙관하자. 어둠 속에서도 함께 빛을 내는 존재들이 있음을. 자신만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서로가 서로의 빛을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들이 있음을.


이 소설에서 연가성과 권운서처럼, 그리고 이들에게 묵묵히 배경이 되어주는 송화처럼. 그렇게, 우리도 낙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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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시에 뜨는 달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26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미선 옮김 / 내인생의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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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는 이유로 억압을 받거나 죽어야 할까? 단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죽어야 한다면, 그런 사회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일까?


성소수자가 박해를 받는 경우는 많다. 유대인 학살로 유명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에서도 성소수자들 역시 학살당했다. 그리고 여전히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도 많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고.


그럼에도 현대는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그들을 죽여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니, 사랑을 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커밍아웃이라는 말과 아웃팅이라는 말이 있다. 성소수자가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드러내는 방법이 커밍아웃이라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웃팅이다. 이 아웃팅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데 일조한다.


이 소설은 이란을 배경으로 한다. 혁명이 일어난 뒤의 이란. 이란은 신정국가라고 할 수 있다. 정치인보다도 최고 종교지도자가 더 중요한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살아남기 힘들다.


여기에 여성이라는 점이 더해지면 더더욱 약자의 처지에 몰리게 된다. 여성이자 어린이, 그리고 성소수자. 이는 이란에서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서 있게 된다는 말이다.


여성은 남성보다 하위에, 어린이는 어른보다 하위에, 성소수자는 용인되지 않는 자리에 있으므로, 경제적 지위를 떠나서 이들은 살아가기가 힘들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엄마와 돈벌기에 혈안이 된 아빠를 둔 파린. 이런 파린은 여학교에 간다. 그곳에서도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날 악기를 연주하는 사디라를 만나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이것이 문제다. 둘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안 된다. 부유한 가정이 아닌 사디라의 집에서도, 부유한 가정인 파린의 집에서도 둘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 성소수자에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결혼을 시키려 한다. 종속적인 삶. 주체적인 사랑은 인정받지 못한다.


견디지 못하는 두 사람. 그러나 둘은 곧 체포되어 감옥에 간다. 파린은 부유한 부모 덕으로 탈출을 하지만 그것이 다다. 부모는 파린의 사랑을 인정할 수 없다. 사디라가 먼저 탈출했다고 거짓으로 파린의 탈출을 도운 사람은 파린의 집에서 일하던 아마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 아마드.


관계는 얽힌다. 아마드는 파린의 집에서는 파린을 존중했지만, 탈출해서는 파린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는 여느 아프가니스탄 남자들처럼 여성 위에 군림하려 한다. 그러니 사디라의 죽음을 전해들은 파린이 아마드의 집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여학교의 교장도 마찬가지다. 혁명 정부에서 여학생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교장이지만, 동성애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 아이들이 처벌 받는 것도 감수한다. 그에게 학교란 정부를 지지하는 여성을 키워내는 일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니라.


아홉 시에 뜨는 달을 보며 이야기를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자신들의 사랑이 전해진다고 하는 파린과 사디라. 


이 둘이 겪는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사랑한다는 죄로 죽어가야 하는 사디라와 파린.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작가는 담담하게 그런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 엠마 골드만이 했다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말이 생각났다.


자신들의 생각을, 삶을 스스로 정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혁명 아니겠는가. 그런데 과연 현실의 혁명은 그러했는지...


이란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혁명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비틀어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파린과 사디라의 사랑을. 그러나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다.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하지만 계속 전진할 것이다. 달을 따라 갈 것이다.'(240쪽)라고 하면서 파린의 삶은 여기서 끝나지 않음을, 파린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인 악마 사냥꾼처럼 계속 나아갈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사디라를 마음 속에 품으면서. 


이렇게 사디라와 파린이 춤출 수 있는 사회, 그것이 바로 혁명 아닐까. 우리가 꿈꾸는 혁명은 바로 그러한 혁명이어야 한다. 누군가를 억압하는 혁명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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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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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굳이 리베카 솔닛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소설 속 인물인 한주와 유키노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무대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김추의 논문에서 클럽 줄리아나 도쿄와 대학생 운동조직이었던 전공투의 무대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에 전공투의 무대는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이는 그동안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무대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찾거나 또는 그러한 무대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줄리아나 도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힘들게 일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자신들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는 곳. 무대 위에서 그들은 남의 시선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즉, 줄리아나 도쿄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다. 그런데 이런 무대 역시 힘 있는 자들, 기존에 목소리를 쉽고도 크게 내던 존재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약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무대는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삶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을 삶의 힘으로 이어나간다.


이 소설 속 유키노의 엄마가 그렇고, 김추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순간을 그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것이 삶 속에 남는다. (유키노의 어머니에게는 사진으로, 김추의 어머니에게는 기억으로 또는 칼로)


김추의 어머니가 자신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장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으로 제 마음대로 한 거라서 그런 걸까요? 행복하네요. 자금."

그러므로 내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의 너는 쑥스러운 건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저도 그럼 행복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286-287쪽)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주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무대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주가 "나, 이제 할말이 있어."(257쪽)라고 하는 장면. "한주, 너는 나의 의지야."(253쪽)라고 유키노가 말하는 장면에서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주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이지만 사귀는 남자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남자는 한주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말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합쳐진 상태.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나오지 않는다. 아니 소설에서 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인 한주가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주가 한국어를 잃게 만든 설정은 이래서 섬뜩하도록 현실적이고 슬프다. 그럼에도 연구자로서의 한주가 일본어를 잊지 않은 것. 하나의 소리(언어)를 잃고 다른 소리(언어)를 기억하는 일. 이것은 한주가 자신의 소리(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인 유키노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연인은 툭하면 유키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오해했다는 말,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을 때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쓸 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즉, 너는 네 언어로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점이 한주와 유키노를 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된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인물이 '정추'라는 음악가다. 유키노의 엄마, 그리고 학자인 김추의 엄마가 듣는 음악을 만든 사람. 정추.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 그런 정추가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이는 한주나 유키노 역시 정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소설에서 김추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그 장면.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축에 들었을텐데, 그 목소리로 남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았는가, 또 누구든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도록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유키노가 한주가 김밥 끄트러미를 놓고 이야기했듯이. 


한주는 김밥을 썰었고, 맨 끄트머리를 하나 집어서 유키노의 앞접시 위애 올려주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러니 유키노 네 거." (142쪽)


"한주 너는 나의," .... "내 끄트머리야." (142-143쪽)


슬프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명단에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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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8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배경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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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 여전히 전쟁 중이다. 전쟁이라는 말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해야 하는 편이 맞겠지만.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게는 변변한 무기가 없고, 비록 무장투쟁을 한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로 전쟁을 할 여건은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지역까지도 공격한다고 하니,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는 요원하다.


이 소설은 그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루고 있다.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살고 있던 아이가 죽어서 고양이가 되어 이름이 같은 베들레헴에서 지내게 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지내던 초등학생이 겪는 일들과 고양이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겪는 일들이 교차하고 있다. 고양이로서 겪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클레어는 초등학교에서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는, 그러나 교사들의 눈에 띠지 않게 말썽을 부리는,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영악한, 문제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눈감아 주는 선생이 떠나고, 깐깐한 선생을 맞이하여 그 선생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른다.


죽음, 끝이 아니라 고양이로 태어난다. 그것도 베들레헴에서. 갈등 상황에 처해 있는 그곳에서 클레어 고양이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아이를 만난다. 이스라엘 군인이 정찰 목적으로 들어간 집에 부모를 잃고 홀로 있던 아이 오마르. 이들과 지내면서 클레어는 한 면만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들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모두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적대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딱 두 편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편차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클레어라는 고양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어떻게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싶어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에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고.


클레어는 인간이었을 때 선생님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결코 잘한 짓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고양이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소설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양비론 또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음을.


전쟁에서도 인간이 있음을, 그 인간성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해 세상이 조금씩 평화로운 쪽으로 가고 있음을.


개인이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모습을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 고양이 클레어가 춤을 추어 양쪽이 더 심한 갈등으로 번지지 않게 한다. 이렇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음을, 아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여전히 대치 중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 소설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음에 암담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고양이 눈으로 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그 갈등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평화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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