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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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유명한 작품인데, 이제서야 읽었다. 오래 전 작품이라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좋은 문학 작품은 시대를 앞서가면 앞서갔지 결코 뒤따라가지 않는다. 조지 오웰이 쓴 [1984]를 보라. 그냥 상상에 불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나? 어쩌면 이 소설처럼 세계가 전쟁으로 나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요즘 세계 정세를 보면 이도 확신할 수 없지만 - 온갖 기술로 인간을 감시하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지 않나.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 남아 그것을 이용한 인공지능이 이미 실제 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상태. 여기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고,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게 되기도 했는데, 이런 점들이 이미 많은 문학 작품에서 그렸던 세계 아니던가.


그러니 이 소설, 오래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소설에서 안드로이드는 인간처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나오지는 않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안드로이드가 이런 말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계죠. 병뚜껑처럼 찍어낸 존재예요. 내가 실제로, 개별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거죠. 나는 단지 한 기종의 견본일 뿐이었어요.' (285쪽. 안드로이드인 레이철의 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에게 감정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이 쓰일 당시에는 이런 말도 입력에 의한 기계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결망이 극도로 적은 시대에 작가가 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1,000억 개의 신경망이 연결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우리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작중 인물인 안드로이드 현상금 사냥꾼인 릭 데카드의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소설에서도 이미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


탈출한 안드로이드들이 서로 연락을 하면서 서로의 생사를 걱정하는 점, 또 화성에서 지구로 탈출해 온 점. 그리고 자신들이 인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점 등등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이렇게 생각하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감정, 정서'를 인간의 조건으로 삼고, 안드로이드들은 그런 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자기가 하는 말의 실제 의미에 대한 정서적 자각도 없고, 감정적 분별력도 없지. 오로지 개별 용어에 대한 공허하고, 형식적이고, 지적인 정의定義뿐이야.'(287쪽. 릭 데카드의 생각)


하여 소설에서는 인간들은 황폐한 시대에 동물들과 함께함으로써 정서적 만족감을 얻는 반면에, 안드로이드들은 그러한 동물들을 죽이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지도어라는 요즘으로 치면 모자란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에서는 특수인으로 나오는 사람이 거미를 발견하고 행복함을 느끼는 반면에 안드로이드들은 거미의 다리를 자르는 행위를 한다. 


이는 다른 생명체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 레이철이 릭의 집으로 가 염소를 죽이니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가 바로 이런 생명에 대한 사랑, 또는 공감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릭이 제거한 안드로이드 중에도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지닌 존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오페라 가수로 살아가는 안드로이드는 음악을 사랑한다. 또한 레이철은 또다른 안드로이드인 레이철에 대해서 분노하는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릭은 레이철과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이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생각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소설은 고민하는 릭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고, 안드로이드의 존재를 기계라고만 정의하기 힘듦을 보여준다.


현상금 사냥꾼인 릭 데카드의 하루 동안의 일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화성에서 탈출해온 안드로이드 여섯을 모두 제거하는 릭. 그런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데, 결국 인간은 고민하고 후회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통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을, 그것도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것이 비록 생명이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기계일지라도 마음을 주는 것이 바로 인간임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이는 흔들리는 릭의 아내를 통해서, 그러면서 결국 릭과 아내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그런 공감을 통해서 기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됨을 보여주고 있는데...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그것을 계속 개발하려는 거대 기업의 모습도 소설에 나타나고, 무엇보다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이 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세대 또 미래 세대들이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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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면의 조개껍데기
김초엽 지음 / 래빗홀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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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란 말이 생각났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아니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늘 생각한 것이, 또 SF라고 평가받는 소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바로 이 '낯설게 하기'다.


낯설다는 말은 곧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나'라는 자아가 있고, 이 자아와는 다른 '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 낯섬이 일어난다. 즉 낯섬은 다름을 인식하는 행위다. 다름을 인식해야 변할 수 있다.


남을 인식하지 못하고, 남을 인식한다고 해도 나와 남의 차이를 알지 못하고, 그냥 나의 다른 부분으로만 여긴다면 변화는 있을 수 없다. 변화는 다름의 인식에서 오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으면 갈등도 없다. 갈등은 낯섬과 마주쳤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즉 삶이 변화없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서 앞으로 어떤 삶이 전개될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측불가능성, 이것이 낯섬일 수도 있다. 따라서 낯섬은 불안을 동반한다. 불안을 안정으로 해소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해소를 위한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따르게 된다. 이 갈등이 바로 우리 삶이다.


그러므로 SF소설은 낯섬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이란 이런 것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소설을 통해서 다름을 인식하게 되고, 이 다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균일하고 평평했던 안정적인 삶에서 균열이 일어난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럼에도 두려움과 불안에 휩쓸리지 않는 것은 소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과는 다르다. 


현실과 다름을 인식하고 읽어가서 실제 삶에서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 이렇게 다른 삶들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다.


김초엽 소설집을 읽으면서 낯섬, 다름, 그러면서 단순히 관광객이 아닌 내 삶에 그러한 낯섬을 끌어오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누군지 기억은 안 나지만 관광과 여행을 구분한 사람이 있었다. 관광은 보고 지나침, 여행은 내 삶에 끌어오기였던가?)


적어도 같음만을, 단일함만을 추구하지는 않게 되었다고 할까? 낯섬이 작동하기 위해서 '나'를 인식해야 하듯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 삶, 내 사고방식을 생각했다고나 할까.


나를 알지 못하면 낯섬을 경험할 수 없다. 낯섬이란 바로 '나'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먼저 '나'를 생각한다. '나'를 생각하고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존재들을 생각한다.


이들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아니 나와 같지 않음을 생각한다. 다르지 않다는 말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면, 존재들은 모두 다름을, 심지어 '나'조차도 하나가 아님을 깨닫는 데서 나와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뭐,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작품을 읽으면 된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김초엽 소설들처럼 잘 읽힌다.


잘 읽히면서도 무언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소설의 끝에 가서 더, 더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인, 어쩌면 계속되는 과정 속에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할 수도 있고, 세상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고민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하나의 답이 없음을, 나 자신도 하나가 아닌데 어떻게 하나의 정답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에는 여러 삶이 있고 그러한 삶의 우열을 가려서는 안 되니, 이 삶이 옳다 그 삶은 그르다고 말할 수 없음을...


다만 관계를 통하면 자신만의 삶을 유지할 수는 없음을, 관계란 바로 낯섬에서 발동하고, 낯섬은 나와 너를 인식한 상태에서 서로가 자신의 것을 지키고 잃으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는 관계의 시작임을 생각한다.


총 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에 다른 책에 수록된 작품이 네 편이다. 아마도 읽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이 소설, 어디에서 읽었는데, 어디였더라? 찾아보기도 했으니까.


예전 습관대로 소설집 뒤를 찾아보았다. 예전에는 소설집으로 단편 소설들을 엮어서 낼 때 그 소설들이 처음 발표된 지면을 알려준 적이 많았기 때문인데... 없다. 작가의 말을 읽어도 추천의 말을 읽어도 읽은 작품이 어디에 먼저 발표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런...


그래도 포기할 수 없지. 분명 읽었는데... 찾아볼 순 있다. 조금만 수고하면. 그 결과 종이책으로만 이야기하면, 먼저 출판된 책들은 다음과 같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자이언트북스. 2023년)

'양면의 조개껍데기' (팔꿈치를 주세요]-큐큐. 2021년)

'달고 미지근한 슬픔' ([다시, 몸으로]-래빗홀. 2025년)

'비구름을 따라서' ([토막난 우주를 안고서]-허블. 2025년)


여기에 '진동새와 손편지'란 소설은 '한국타이포그라피 학회'의 의뢰를 받아 쓴 작품이고 이 소설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타이포그라피로 써서 전시도 했다고 한다. 이 전시 영상이 있는데... 이것도 보면 좋을 듯하다.


한국타이포그라피 학회 (http://www.k-s-t.org/vibrating-birds-and-handwritten-letter/about.html)


여기에 덧붙이면 이 책을 산 이유 중 하나가 비정기 무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간될 때는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출간되자마자 사놓고, 이제서야 읽었으니...


한편 한편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다.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이 낯섬이고, 이 낯섬을 통한 관계 맺기는 결국 우리 삶은 과정에 있고, 늘 변화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마디 더 덧붙이면 개인적으로 이 소설집에서 가장 편하게, 그러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설은 '소금물 주파수'였다.


작가의 고향인 울산과 고래에 대한 이야기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렇게 존재들이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낯섬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나와 남의 관계 맺기의 시작임을 또 그것이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어서.


판매되지 않는 이 무크지에 실린 김초엽 자신이 이번 소설집에 대해 한 말을 끝으로 인용한다. 이보다 더 이 소설집을 잘 정리할 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


'편협한 한 개인의 몸에 갇혀 살아가고,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고, 오해하고 충돌하고, 그러면서도 각자의 경계 밖을 이해하고자 갈망하고, 마음을 잘 전달하고 싶어서 고군분투하는 한계가 우리가 지닌 희미한 빛이자 가능성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여기 담긴 소설들은 그 한계와 가능성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애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초엽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 출간 기념 무크지.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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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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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시봉이라는 이름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또 이 책의 광고를 보고는 이시봉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개다.


그럼 주인공이 '개'겠네. 개의 일생을 다룬 소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개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다. 스페인, 프랑스, 한국이라는 세 나라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시간도 중세 시대부터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가 공존한다. 


집에서 함께 지내던 개가 유럽의 유명한 혈통의 개란다. 그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이 개의 혈통과 보존에 힘쓴 사람이 스페인의 권력자였던 고도이라고 하면서,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에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이 개의 부모를 데리고 오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박유정-김상우, 정채민), 그리고 현재 이시봉을 둘러싼 사건이 전개된다.(정채민이 대표로 있는 앙시앙 하우스와 이시봉을 키우는 이시습과 친구들, 박유정의 아들 김태형)


세 가지 사건이 잘 연결이 되어 박진감 있게 전개되고 있어 소설은 순식간에 끝부분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끝부분이 무언가 좀 아쉽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일까에 대해서 명확한 결말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데...


명확한 결말은 나오지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개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이를 다른 존재로 확장하면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개들을 통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재산 싸움도 펼쳐지니...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또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만 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히 인정해주는 것, 그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소설의 서술자라 할 수 있는 이시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시습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든 외할머니는 네가 어떻게 자랄지 궁금하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한다. 믿음, 상대를 나의 기대에 맞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러한 할머니의 사랑이 이시습이 이시봉을 사랑하는데, 또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사랑과 반대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설 속 정채민이나 김상우의 모습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먼저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결코 자신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이를 소설에서는 이시습의 입, 또는 김상우의 아내였던 박유정의 입을 빌려 '인색하다'고 한다. 인색함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만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는구나. 그게 인색한 거구나' (493쪽) - 이시습의 생각.


이것이 이시봉과 같은 혈통의 개를 키우고 분양한다는 앙시앙 하우스의 수의사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는 그 회사의 대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로 이 인색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시봉과 이시봉의 혈통을 이야기하고, 그 개들을 들여오게 되는 과정에서 '박유정-김상우, 정채민'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 


'박유정이 생각하는 인색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오직 하나뿐인 것이었다. 종교인이 종교만 생각하고,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고,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만 생각하는 것, 그 외는 아무것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 (338-339쪽)


결국 인색함이란 '홀로'와 연결이 된다. 남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나'를 중심에 놓고 내 이익에 도움이 될 때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 내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내치는 것. 그것이 바로 '홀로'이고 이는 상대를 나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자세다.


이런 인색함과 대비되는 것이 따지지 않고 사랑을 주는 것. 그러니 이시봉은 함께 살았던 이시습에게도, 정채민에게도 사랑을 준다. 명랑하고 투쟁 없게.. 이 투쟁 없는 삶이라는 말이 왜 들어갔을까 생각했는데... 


이 소설에서 투쟁은 인색함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구나 했다. 물론 '투쟁'은 필요하고, 사랑과 연결이 될 때가 많다. 사랑이 없으면 투쟁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투쟁은 필요하고, 이는 이시습의 아빠가 투쟁의 현장에서 빠져나오지만 그 미안함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노조 간부가 되는 후배 이시봉의 이름을 따서 강아지 이름을 이시봉이라 지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 이시봉의 투쟁은 사랑이 들어 있는 투쟁이다. 그러니 인색함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과는 다르다. 이를 구분해야 한다. 개 이시봉의 투쟁 없는 삶은 인색함이 없는 삶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고...


이러한 이시봉으로 인해 또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되는 모습도 소설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 그건 이시습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이 소설의 말을 빌리면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보는 사람이니까) 일명 '리다'가 그렇다.


'리다'의 아버지는 '리다'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고양이들을 죽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감정 이외에 다른 존재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색함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할 때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정채민의 경우도 그렇다. 이게 인색함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소설은 개-이시봉을 통해 인색함이 아니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여러 사람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색함이 없는 투쟁을 하는 이시봉-이시습과 친구들, 인색함으로 무장한 투쟁을 하는 정채민과 그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인색함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시봉과 관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그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홀로일 수는 없다는 것, 홀로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이 관계의 바탕이 바로 사랑임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 읽은 [신영복 다시 읽기]가 생각났다. 신영복 선생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때 존재론을 인색함으로, 관계론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함을... 그것이 사람의 삶임을 소설은 이시봉-이시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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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 월급사실주의
김의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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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나온 첫번째 소설집이다. 현실은 점점 팍팍해져 가는데, 그런 현실을 과연 문학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나? 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문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를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집.


작가들이 우리 현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읽는 사람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희망을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희망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찾기를 또는 위안을 받기를 바라고 썼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저 현상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후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것, 동시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11-12쪽)


어떤 현상인가? 팍팍한 현실이다. 이를 '새로운 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무어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이라는 인식이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점점 양극화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작가들이 모여 각자가 바라본 현실을 작품으로 썼다.


이 소설집에는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양한 직업들이 나오지만 공통된 점은 이들 모두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작품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이, 비록 이 작품집이 2023년에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전세 사기라 할 수 있는 일을 겪는 인물,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부동산을 잡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발표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셋집도 마음 놓고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마음 놓고 살(파고 사다의 살이 아니라, 거주한다는 의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다.


말보다는 실행, 이것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인데... 집값 안정,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내 집이 아니라 내가 빌려 살 집도 구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얘기해야 한다. 기껏 빚내서 빌려 산 집(특히 전세)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들, 이 소설은(정진영, 숨바꼭질) 그나마 돈이나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으니...


젠세나 월세도 얻지 못하고 2호선 전철에서 자야 하는 배달 일을 하는 주인공 (주원규, 카스트 에이지)는 더욱 힘든 처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게으르냐면 그것도 아니다. 배달일을 하고, 밤에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한다. 그는 오후 3시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잘 집도 없고 애인의 집에서도 자지 못하고 결국은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몇 시간 동안 자기 위해 첫차를 타는 인물에게 어찌 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탓이 아님을, 그것이 네 선택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현장 실습을 나간 학생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런 현장을 선택한 것도 너니까 그건 너의 자기주도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여정, 섬광)


과연 자기주도권일까? 환경이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 아닐까? 그 현장이 열악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 그렇게 된 환경에서 과연 자기주도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자기주도권 (다른 말로 하면 주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을 지니라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개인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압력을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소설은 제시할 수 없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최영의 소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에서 만나보게 된다. 같은 카페에 있는,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 속해 번역일을 하는 사람과 영상 번역을 하는 사람, 단행본을 번역하는 사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다른 번역일을 하는 환상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이들은 같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속에서도 다른 이의 일들에 환상을 품고 있다. 물론 자신이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이렇게 비슷한 환경 속에 녹아 있는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오해를 하고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없어도 곧 대체 가능한 존재들 아닌가.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학습지 교사 등등. 


첫소설에 나오는 '우리는 순간접착체 같은 거네요?'(35쪽)라는 말이 마음에 아프게 와닿았다. 필요할 때만 쓰는. 그러나 늘 함께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


순간접착제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계급proletariat'가 합쳐진 말이라고)가 되겠다. 즉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고 확산시키는 사회. 아파트 단지에 있던 벤치와 나무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듯이 그렇게 한 순간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그럼 이런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지? 다른 건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못된 것이 내 잘못만이 아님을. 또 우리는 이렇게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할 문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월급사실주의란 말에 어울리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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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츠와프의 쥐들 : 병원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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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편이 카오스와 철창에 이어서 사건이 전개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하긴 읽지 않고 책이 출간된 순서를 생각하면, 그것도 지금까지는 세 권이 번역되었으니, 당연히 마지막 권이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


한데 앞장을 넘기자 이런 말이 책에 있다. 소설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은 [브로츠와프의 쥐들: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단독적인 서사로도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일러두기에 쓰여 있다.


어라, 그럼 이 편이 끝이 아니네... 첫부분을 보자마자 시간은 다시 사건 발생 당일로 돌아가 있다. 1963년 8월 9일 금요일 20시 27분부터 시작하니, 사건이 벌어진 지 약 1시간 정도 지난 뒤다. 끝은 1963년 8월 12일 월요일 19시 57분이니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의 시간보다도 짧다. 그 소설에서 잠깐 언급한 장면이 이 편에서 펼쳐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분명 [브로츠와프의 쥐들:철창]에서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하긴 했지만 소련군이 들어와 약탈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그곳 시립동물원이 있는 큰 섬에서 아렌지코프스키 의사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햐, 이거 다른 편이 있다면 번역이 되길 또 기다려야 하네 하는 아쉬움... 그렇지만 이번 편은 앞의 두 권과 달리 조금 짧다.


300쪽 조금 넘으니, 700-900쪽에 달하던 전편들과 달리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앞의 소설들도 속도감과 긴장감이 넘치지만 분량이 하루에 읽기에는 좀 많았는데, 이번 권은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


아니, 하루 만에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비극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철창]에서 교도소로 가는 도중에 병원을 지나가면서 그들은 문 앞에 붙어 있는 글을 읽게 된다. 


"들어오지 마시오. 

모두 죽었음." 


자, 이제 우리는 왜 이들이 이런 글을 붙였는지를 소설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다. 정신병원. 이곳 역시 격리 된다. 그리고 여기서 감염자가 발생한다. 최선을 다해 막으려 하지만 사소한 실수, 무관심 등이 겹쳐 좀비는 확산된다.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가고, 간호사들과 위생사들 또 조리사들도 한 명 한 명 죽어나간다. 남은 사람은 수십 명의 환자들과 책임자인 니엠추크 과장뿐.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환자들을 살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의사로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환자들을 위하는 일이 될까?


이는 존엄사 문제와도 겹친다. 어떤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일까? 니엠추크 과장은 '모든 의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우선 해를 끼치지 말라'이다'(313쪽)는 철칙을 깨기로 한다.


그동안 그는 이 원칙을 지키려 애썼고, 비록 의식이 없는 환자,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환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게다가 조리사와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감염병은 확산되고 구조될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뿐이었다'(313쪽)는 표현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는 환자들의 최후를 보지 못한다. 자신도 죽임을 당하기 때문인데... 죽임을 당하기까지 그와 병원관계자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이 편에 담겨있다.


여기서 재앙이 닥쳤을 때 대응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나타나는데, 겁을 먹고 무조건 도망치려는 사람과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하는 사람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것도 자신들이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특히 의사나 간호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다. 니엠추크 과장이 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그가 지닌 책임의식, 재앙에서 도피하지 않고 끝까지 환자들을 돌보려는 마음은 진정한 의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의가 꼭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는 것, 재앙의 순간에서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간호사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분노했던 것은 이러한 전세계적인 재난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제 목숨 하나 건지려고 안전한 곳으로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피신했다는 점. 그 이후에 그들은 재앙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


지금까지 읽었던 세 권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리'였다. 책임자는 도망치고, 그 책임을 떠맡은 '대리'들이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펼쳐보이고 있는데, 이는 작가가 당시 권력자들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의식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질적인 위험의 순간에는 제 자신의 안위만을 먼저 생각하는 권력자들... 전쟁 통에 먼저 도망가버린 대통령을 만났던 적이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은 비판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지만 책임감 있는 사람들은 국민을 위해 남는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재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폴란드 좀비들을 통해 재난 상황에서 인간들이 대처하는 여러 모습들, 권력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다음 편이 있다면 빨리 번역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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