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겠지만 - 월급사실주의 2026 월급사실주의
강보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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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 네 번째 소설집. 


2023년부터 시작해서 해마다 나오고 있다. 작가들의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직접 겪는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이런 일들이 있구나,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총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 중에 이태승이 쓴 '빈칸 채우기'는 공모에 당선된 작품이라고 한다. 빈칸 채우기. 소설의 처음에 이 빈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온다. 공공기관에서 연구(정책)보고서를 내는데, 그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서명이 있어야 하는데, 3년이 지나서 감사가 나온다고 하니, 그 빈칸이 문제가 된다.


생각해보자. 공공기관, 정부부처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처에서 공무원이 학자 및 전문가, 관련자들을 모아 정책 연구를 한다. 그리고 결과물을 보고서로 낸다. 당연히 보고서에는 참여자들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자신들이 그 연구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 표시가 바로 내가 했다는 서명이니까.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감사가 없다면 서명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감사를 코 앞에 둔 시점, 징계를 받아도 큰 징계는 받지 않을 거라지만, 하필이면 승진 심사를 앞두고 있다. 책 잡힐 일이 생기면 승진에 문제가 된다.


어떻게 하겠는가? 빈칸을 채워야 한다. 이제 참여자들을 찾아가 3년 전 보고서에 서명을 받아야 한다. 그 3년,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소설은 그 점을 살펴보게 한다. 그들은 연구보고서에 과연 진심이었을까? 


읽어보면 안다. 진심? 글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참여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구를 추진했던 공무원은? 마찬가지다. 그 역시 보여주기식 업무를 했을 뿐이다. 서명을 받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데,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소설 속 상황을 마냥 소설이겠지 하고 넘기기엔 무언가 씁쓸하다.


이런 표현 '서명 누락이 감사에서 단골로 지적받는 사안이라는 건, 그만큼 흔한 행정 실수라는 뜻이었다.'(이태승, '빈칸 채우기'에서. 264쪽)


흔한 행정 실수. 아니 행정 실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보여주어야 하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여 보고서는 의미가 없다. 정책연구 용역보고서. 좋은 말만 짜깁기 되어 있는, 그럴싸한 방안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이는 계속 반복되어 말만 바꾸어 제안된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굳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감도 없고, 서명이 중요할 리 없다.


용역비만 받으면 그만이고, 보고서만 내면 그만인 상황. 그런 상황이 공무원 사회에 만연한다면 사회는 그럭저럭 유지는 되겠지만, 이것을 우리는 관료화라고 한다, 변화는 힘들다.


변화가 얼마나 힘든지, 연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3년 뒤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에게서 정말로 그들이 연구하고 제안한 정책들이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 이런 모습을 그냥 소설 속 상황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 책의 기획 의도가 한국사회의 모습을 담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그렇다면 이는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관료 사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 중의 일부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일부가 별것이 된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보고서만 화려하고 실질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렇게 시간과 돈을 쓰고, 참여자에게는 스펙만 쌓게 하는 현실.


이젠 이런 모습을 관료 사회가 떨쳐내야겠지. 떨쳐내기 위해서 또 연구 용역을 주고, 보고서를 내는 일을 반복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보고서 천국으로, 서류 상으로는 너무도 훌륭한 사회가 되어 있을 테니.


이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 소설집의 제목이 되었다. 밀린 서명을 받으러 가는데 운전을 해주는 소위 금수저라 할 수 있는 후배 사무관이 하는 말.


'월급을 받으면서 재미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해요.'(이태승, '빈칸 채우기'에서. 279쪽)


무슨 소리? '워라벨'을 주장하는 이 시대에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니...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사무관이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노동을 당연한 듯 평생 해온 사람들'(성혜령, '퇴직금 돌려받기'에서. 154쪽)이 될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들,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하기보다는 아무 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사람들. 이런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워라벨'은 바로 사무관이 하는 말처럼 그들의 삶에 다가올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재미있게,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적어도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위해 '노무사'라는 직업도 있는데... 그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 강보라가 쓴 '우리의 투어'라는 소설이다.


여기서 함께 두면 물어뜯고 싸우는 물고기가 나오는데, 반대로 함께 한 방향을 보며 나아가는 물고기도 있음을. 노동자들을 서로 싸우게 하는 사람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함께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노무사'여야 함에도 정작 '노무사' 사회에서도 그렇지 못함을 이 소설에서 신참이라고 할 수 있는 송엄지라는 노무사의 발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니, 정말, '워라벨' 힘들다.


그럼에도 '노란빛의 작은 물고기 이모티콘 네 개가 연달아 찍혀 있었다. 나는 한 방향으로 나란히 놓인 그 독립된 개체들을...'(강보라, '우리의 투어' 중에서. 54쪽)이라는 표현처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이렇게 작가들이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각자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리라.


이밖에 실린 다른 소설들에서도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이런 저런 우리 사회가 지닌문제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이렇게 정리되어 있으니 표를 참조하면 된다. 


무엇보다 직접 이 소설을 읽으면서 2026년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각해보는 것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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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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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EE'


낯선 말이다. 프랑스어라고 한다. '받아쓰기'라고. 받아쓰기. 지금 아이들도 학교에서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저학년 때 받아쓰기 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단지 국민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중, 고등학교에서도 외국어를(중학교에서는 영어를, 고등학교에서는 제2외국어라 해서,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등을 배웠다.) 배우면서 받아쓰기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교사가 불러주는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하는 과정. 그런데 소설이라고 하는데 제목을 프랑스어로 달고 받아쓰기라고 했으니 제목부터 생각을 하게 한다.


받아쓰기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말인가? 정답은 있다. 그 정답을 제대로 옮기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지는 시험, 그것이 받아쓰기라 생각했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러한 받아쓰기라 아니라 삶을 인식하는,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받아쓰기라고 이 말을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 부분에 나오는 받아쓰기는 아마도 작가의 개인 체험이 들어간 것이겠지만, 개인 체험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 받아쓰기를 한다. 그것을 글자로 적지 않더라도...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면서 언어를 익히게 된다. 단지 언어를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배우고,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언어를 빼앗겼다면? 엄마로부터 자연스레 배우는 언어를 억압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런 받아쓰기 과정이 인위적인 받아쓰기 과정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과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데...


이 소설을 쓴 차학경의 삶을 보면 이 소설이 왜 받아쓰기이고, 다양한 형식이 시험되고 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차학경 자신도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이다. 미국의 언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사람. 그러니 그에게는 이제 생활해야 하는 언어를 받아쓰기 해야 한다. 엄마로부터가 아니라 그 사회로부터. 


그러면서도 엄마로부터 익혀온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가 들려주는 언어를 끊임없이 받아쓰기 하면서, 다른 언어도 받아쓰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 차학경은 프랑스어에도 관심이 있고, 배웠다고 하니, 이 소설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시오'라는 부분이 있는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지 언어의 번역, 받아쓰기 문제가 아니다. 바로 세계를 인식하고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다.


이 받아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넷이다. 유관순, 잔 다르크, 성녀 테레즈, 그리고 엄마. 유관순과 잔 다르크는 나라와 관련이 있다면, 성녀 테레즈는 종교와, 그리고 엄마는 이 모두와 연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받아쓰기 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는 엄마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역사,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세계 속 역사를 살피고 있으며, 자신의 신념인, (차학경은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의 형제자매들도 모두 이러한 세례명을 지니고 있다),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한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엄마의 말을 받아쓰기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을 통해서, 또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역사와, 종교와 사랑을 이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다.


하여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면 '원 속의 원, 동심원의 연속'(187쪽)이라는 표현처럼, 이 소설은 자신의 삶이라는 원에서 엄마의 삶이라는 원, 유관순 - 잔 다르크의 삶의 원, 성녀 테레즈의 삶의 원과 역사의 원이 동심원처럼 중첩되어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다양한 삶들을 'DICTEE'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형식으로 소설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받아쓰게 하는 존재에 따라 받아쓰기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에, 또한 받아쓰기를 하는 주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다양한 형식들이 이 소설 속에 혼재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로 꿰기는 힘들다. 읽는 사람 역시 차학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쓰기'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받아쓰기'에는 백 점이란 없다. 자신의 관점에 맞게 변용해서 받아들이고, 다시-쓰기를 할 뿐,


소설에 여러 언어가 혼재되어 나타나, (책의 말미에 있는 오빠의 글에 의하면 '테레사는 한국어, 영어, 불어,그리스어를 인용해서 [딕테]를 구성했다'(211쪽)고 나와 있다) 번역자도 이 점 때문에 많은 고심을 했을 것인데, 읽기도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읽으면서 무언가 어렴풋하게 어떤 형상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느낌을 좀더 구체화하고 싶으면 소설 뒤에 실린 차학경 오빠의 글과 번역자의 말, 작품 해설 두 편을 읽으면 좋을 것이다.


한 번에 읽고 끝낼 소설이 아니라는 것, 두고두고 읽으면 그때마다 받아쓰기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 읽고 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남아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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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큐큐퀴어단편선 1
이종산 외 지음 / 큐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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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해받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이야기가 되었다. / 이야기의 힘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 살아 있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 그러니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기획의 말'에서. 8-9쪽)


'퀴어'란다.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다고 여기는, 그러나 정상이라는 범주는 정해져 있지 않다. 이러한 정상이라는 범주를 확장하면 '퀴어' 역시 정상이라는 범주에 들어오게 된다. 


사랑이라는 범주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일 수가 있는데도 굳이 사랑을 종류로 나누고, 그 종류에 따라 '정상/비정상'의 범주에 넣으려고 하기도 한다.


어느 한 쪽 범주에 넣은 것이 '비정상'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러니 기획의 말에서 말한 '이해받기 위해/이해하기 위해'라는 말, 무언가를 의식하는 말이다. 


이해받기 위해서, 또는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만든다. 이야기는 다른 세계를 우리 세계로 들여오기 때문인데... 다른 세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며,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끝이 아니다. 이야기로 시작된 사랑은, 이야기가 끝나더라도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는다. 이야기로 남아 있기도 하고, 또 사랑으로 남아 있기도 한다. 


다가온 사랑. 그러한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와 더불어, 또 이야기 없이도 사랑은 삶 속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랑을 어떤 특정한 범주에 넣으려고 하는 것, 이것 자체가 이야기의 힘을 망각하는 행위다.


이야기는 어느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모든 것에 속하고,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 그냥 이야기로 존재하면서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것. 그것이 바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은 어떤 범주 속에 갇히기도 하지만, 어떤 범주에도 갇히지 않는,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 소설집에는 그러한 '사랑'이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서 펼쳐진다. 6명의 작가가 펼치는 이야기. 6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사랑. 이 사랑 이야기를 읽고, 이 사랑 이야기가 끝나도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 마음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 


짧은 소설들이다. 또 이 소설집은 특징이 있는데, 각자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의 변주라는 것이다. 


이종산 '별과 그림자'            <-   캐서린 맨스필드 '가든파티'

김금희 '레이디'                 <-   제임스 조이스 <더불린 사람들> 중에서 '에러비'

박상영 '강원도 형'              <-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임솔아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   허먼 멜빌 '선원, 빌리 버드'

강화길 '카밀라'                 <-   조지프 토머스 세리든 르 파누의 '카밀라'

김봉곤 '유월 열차'              <-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작가가 이 작품들을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작가들이 참조한 작품을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먼저 읽었다면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읽는 재미가 있을 테지만.


각 작품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 소설집에서는 '퀴어'라 할 수 있는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한 사랑을 '비정상'이라는 틀에 가둬,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당장 멈추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은 모두 정상이고, 비정상이다. 우리 마음 속에 들어찬 사랑은 때로는 사람을 너무도 평범하게 만들지만, 어떤 때는 너무도 비범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이렇게 사랑은 모두 '퀴어'함을, 이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여기에 작가들이 참조한 작품들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니, 이야기가 이야기를 끌어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그야말로 '퀴어'한 이야기들을 통해 사랑의 여러 모습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소설집의 이야기들은 끝났지만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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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소설, 한국을 말하다 소설, 한국을 말하다
성해나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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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두 번째 책이다. 2024년에 나온 소설집을 읽고, 이렇게 한국의 상황을 작가들이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단 생각을 했다.


신문에 연재하고, 그 결과물을 단행본으로 냈다고 하는데, 신문에 연재한다는 조건인지 분량이 매우 짧다. 아주 짧은 소설들. 어떤 이는 엽편(葉片) 소설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손바닥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그냥 외래어를 써서 '콩트conte'라고 하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라. 이번 소설집은 214쪽인데, 참여한 작가가 19명이다. 즉 19명의 작가가 214쪽에 걸쳐, 그것도 기획의 말이 9쪽까지 있고, 각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한 장에 걸쳐서 작가 소개와 제목이 있으니 한 소설 당 10쪽 정도의 분량이라고 보면 된다. 


10쪽 정도의 분량에 한국 현실을 담고 있다? 신문에 한번에 연재가 끝나야 한다면 이 정도 분량일 수밖에 없고, 이 정도 분량이면 묘사보다는 설명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설명, 요약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김기태가 '효율'이라는 주제로 쓴 '진취적 시민을 위한 15분 읽기'라는 작품이다.


아예 이 작품에서는 묘사를 포기한다. 요약 설명을 하겠다고 대놓고 선전한다. 바쁜 시대, 빠름을 추구하는, 느림이란 비효율적이라는 이 시대를 반영한다고 작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소설, 한국을 말하다' 지면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실제로는 약 250장인 소설 전문을 압축하여 그 줄거리와 주제만 설명하기로 했다. 독자들은 단지 소설처럼 보이려고 늘어놓은 묘사들을 애써 읽을 필요없이 핵심만 취하면 되겠다. 즉 이것은 소설 읽어주는 소설이다.'(김기태, '진취적 시민을 위한 15분 읽기'에서. 이 책 29쪽.)


이런 소설들이 모여 있다. 하여 소설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책의 편집이나 기획 자체가 요즘 추세에 맞게 쇼츠(반바지라는 뜻이 아니라 짧은 영상이라는 뜻으로)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내용이 조금만 길어져도 다른 영상으로 넘어가는 모습들. 하여 짧은 영상들, 누구 말대로 3초 안에 시선을 잡지 못하면 실패한 영상이라고 하는 쇼츠들의 홍수 속에서 소설 역시 긴 흐름의 장편소설보다는 짧은 소설이 더 잘 읽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들을 떠나서 이렇게 쇼츠와 비슷한 이 소설집은 우리에게 2026년 한국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 점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제점을 우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문제를 인식한 다음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마음이 생길 수도 있겠지. 아무리 쇼츠가 유행하는 이 시대라 해도, 쇼츠로 인해 흥미를 느낀 점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려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서 다루는 2026년 한국의 문제는 무엇일까. 무엇이 지금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가. 주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제 역시 작가 수에 맞게 19개다.


'인공지능, 효율, 갓생, 탈덕, 도파민 중독, 배달 음식, 챗GPT, 나이 듦, 7세고시, 입시, 퇴사, 불임, 금쪽이, 정치 갈등, 계엄, 그루밍, 노벨문학상, 목소리, 전세 사기'


하나같이 지금 한국에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들이다. 그것을 작가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아주 무겁지 않게 툭 툭 작품을 통해 건드려주고 있다.


자, 이게 한국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야. 이것이 우리 현실이야.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있어? 하는 듯하다.


짧은 분량으로 결말을 내지 않는다. 아니, 결말을 낼 수 없다. 모두 진행 중인 문제이기에. 다른 사람들만이 겪는 일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고, 또 겪어야 할 일이니까. 겪어야 할 일에서 이 중 몇몇이라도 빠졌으면 좋으련만,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그것 또한 문제다.


이 작품 중에 좀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결말을 지닌 작품이 성혜령이 '도파민 중독'을 주제로 쓴 '방콕'이란 소설이다. '방콕'이 사람들이 여행을 자주 가는 태국의 방콕이 아니라 '방에 콕 박혀 있다'는 뜻의 방콕이다. 


그러니 '방콕'이라는 말에는 외부에 관심을 끊고 자신의 세계에서만 지낸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자신의 세계에서 지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도파민'이다. 즉 자신의 기분을 좋은 상태로 유지해주는 요소가 있어야 하고, 그러한 상태에서는 외부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내도 나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하기는 해도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냥 방 안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남들에게 물을 뿐이다. 이 역시 방콕을 벗어나지 않는 행위다.


직접 부딪히는 이웃의 일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웃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이웃의 신호를 알 수가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작가는 '방콕'이란 소설을 통해서 도파민에 중독된 우리들이 어떻게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단절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도파민'에 해당하는 것들이 지금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짧은 소설이지만 긴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짧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내용들을 상상으로 채워가기 시작하면 무지무지하게 긴 소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긴 소설은 바로 우리가 삶에서 살아가면서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우리 사회를, 자신의 삶을 다시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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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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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작품 읽기.


어렵다. [불안의 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왜 불안일까? 인간이 실존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말일까? 아니면 삶 자체가 불안일까?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가. 


읽어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느끼는 불안은 아니다. 불안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온다.


행동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고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한다. 행동을 통해서 삶을 살아간다. 아니, 살아간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불안이 스며들 틈이 없다.


즉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색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많은 고민을 한다. 행동하기 이전에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세상을 본다고 하기보다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있는 세상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세상을 있게 만들어내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할까.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될까. 이러한 생각과 고민들이 결국 삶을 불안하게 한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인데, 사색하는 인간은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고, 그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페소아가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글이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페소아의 또 다른 페소아라고 할 수 있다. 즉 페소아들 중 한 명인 소아레스가 이 글을 쓴 주인공인데... 자신이 몇 년 동안 일기처럼 쓴 글이 바로 이 책, [불안의 서]다.


회계보조원으로 일할 때 그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불안에 싸이지 않는다.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잠시 틈이 나면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그는 불안을 느낀다. 수많은 자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남긴다.


글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고 할 수 있는데, 길고도 긴 여정을 짧은 글들로, 그러니까 일기라고 할 수 있는 글들로 이 책을 이끌어가고 있다.


글에 년도가 나오는 장면도 있는데, 1910년대로 먼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30년대에 쓰인 글이다. 페소아가 1935년에 세상을 떴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1934년이 마지막 해로 나온다.


그러니 이 [불안의 서]는 소아레스라는 또 다른 페소아가 쓴 자신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겹치는 내용도 나오는데, 일기를 몇 년에 걸쳐 쓰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이 비슷해질 때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경구들, 적어놓고 때때로 들여다보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우리가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늘 행동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동 사이 사이에 그 틈을 생각이 파고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낯선 세상. 의식하지 않았던 세상을 의식하게 되고, 그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이 책에 나오는 구절들을 들여다볼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페소아(소아레스)가 창조한 세상이 어떠한지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때문인데... 그렇게 이 책은 '불안'에 떠는 영혼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지만, 사색하는 인간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창조자로서의 불안.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어찌 불안이 없겠는가. 이런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어쩌면 그 불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소아레스가 글을 써서 남기고 이를 페소아가 출간하게 되었으니... 이 책에 나오는 구절, 소아레스든 페소아든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30쪽)


많은 구절들이 마음에 와닿는데, 그 중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들이 있으면 또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도 했다. 포르투갈 어를 모르니,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는 것인데... 의미는 통하는데 문장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한 예로 '권태는 할 일이 없어서 병적인 분노가 치솟는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다. 그보다 훨씬 더 질환적인 상태, 뭔가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감정이다. 이것은 곧, 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권태도 따라서 지독해진다는 의미다.'(735쪽)는 문장이 있는데,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니 '할 일이 없어서 지겨운 건 권태가 아니다. 권태는 무슨 일이든 할 가치를 못 느끼는 상태인 더 심각한 병이다. 이런 상태일 때는 할 일이 많을수록 더 심한 권태를 느끼게 된다.'(불안의 책. 문학동네. 오진영 옮김. 2015년. 546쪽.)고 되어 있다.


앞의 문장보다 뒤의 문장이 그래도 이해하기가 더 쉬운데... 하여 포르투갈 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이해 안 되면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 그래도 안 되면 내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우기.


이렇게 읽기 역시 쓰기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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