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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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른 매체에 발표되었던 작품들. 한 자리에 모인다. 한 작가가 쓴 작품이라도 다 다른 내용일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 작가는 다른 주제를 가지고, 다른 인물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책으로 묶이면 무언가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같은 작가니까, 그 작가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다가 그러한 공통점을 발견하면 역시 그렇지 하지만, 공통점을 찾지 못하면 뭐야? 하는 마음을 먹는다. 작품 한 편이 온전한 세계니까, 그냥 그 세계를 감상하면 되는데도...


이 작품집에서도 공통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먼저 생긴다. 김기태라는 작가는 어떤 점을 주로 소설로 쓰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읽다가 포기한다. 뭐, 꼭 공통점을 찾아야 해. 그냥 작가가 그때그때 우리에게 보여주는 세계를 같이 거닐면 안돼 하는 마음을 지닌다.


그냥 읽는다. 한편 한편을 독립적으로. 연결지을 생각은 버린 채. 그렇게 읽다가 어떤 작품이 내 맘에 가장 들었지, 우리 현실하고 어떻게 연결이 될까 하는 생각이 또 든다. 참, 가지가지한다. 그냥 읽고 받아들이면 될 것을.


작품에 우위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위가 아니라 내 맘에 얼마나 드냐를 생각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그래, 같은 작가의 소설 중에서도 내 맘에 쏙 드는 것이 있고,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는 소설이 있을 수도 있지 뭐.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감상일 뿐이니까. 그렇게 마음 먹는다.


연예인이 나오는 소설이 두 편이다. '세상 모든 바다''로나, 우리의 별'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연예인이 아니다. 김기태는 특출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을 등장시킨다. 우린 이런 보통사람들에 가까울 테니까.


이 두 작품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한다. 연예인을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설왕설래들. 그러다 그렇게 설왕설래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생각한다. 연예인을 비판하든 두둔하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산다.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산다. 그들의 신념이나 행동이 윤리나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굳이 뭐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무어라 한다. 이게 문제다.


그런 행태가 두 소설에 나타나 있는데, 그럼에도 연에인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의 처지에서 소설이 쓰였기에 무언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악성 댓글로 인해 피곤해지는 마음이 이 소설들을 통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다른 세계를 이해할 마음이 생긴다.


평범한 삶을 평범하게 그려내고 있고, 그런 평범한 삶 속에서 희노애락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덤덤하게 펼쳐진다.


'롤링 선더 러브, 전조등, 태엽은 12와 1/2바퀴, 무겁고 높은, 팍스 아토미카' 등이 그렇다. 교육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보편 교양' 역시 마지막에 가면 평범한 학생들이 등장해서 그들의 삶을 우리가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평범함이 바로 우리 삶이다. 이 평범함은 멀리서 봤을 때 평범함이지만, 각 개인에게는 비범함이다. 자신에게는 하나뿐인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평범한 삶은 곧 비범한 삶이 된다.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삶이 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그 점을 실감한다. 중심에 들지 못하는 삶. 그러나 자신만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 그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듣고 알게 되는 과정. 그리고 '기립하시오. 당신도!'라는 말을 서로에게 주고받는 과정.


이 둘이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팍팍한 현실도 삶을 뭉뚱그려 놓고 보면 평범함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비범하지만 평범한 삶. 그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김기태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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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3-28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관계, 가족, 계급, 교육 등을 상상해 본 책이었습니다.

kinye91 2025-03-28 09:39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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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작가가 있지? 거의 백 년 전에 쓴 작품인데, 지금 시대에도 맞는 이야기 같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한 작가다.


희곡인데, 연극으로 보아도 재미있겠지만, 책으로 읽어도 재미있는 그런 작품들. 차페크 작품이 지닌 풍자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지금 읽으면서 우리 사회나 또는 지구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과 비교할 수도 있으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세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다른 주제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에 대한 부정이 공통적으로 드러나 있다. 


'곤충 극장'은 곤충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이 지닌 욕망과 허위들, 그렇지만 삶에 대한 의지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곤충(나비)은 자유로운 성과 문학에 대한 조소를, 어떤 곤충(쇠똥구리)은 물질적 부에 대한 욕구를, 또 어떤 곤충들(귀뚜라미와 맵시벌)은 약육강식의 세상을, 어떤 곤충(개미)은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로 인한 파괴를, 어떤 곤충(하루살이)은 삶에 대한 욕구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곤충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물질만의 풍요로움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단 하루를 산다고 하루살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다른 욕망들로 인해 삶의 환희, 삶의 목적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민달팽이들이 '삶은 달콤하다'(100쪽)와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거지'(101쪽)라는 장면에서 누구나의 삶이 소중함을, 그런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차페크가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생명을 무한으로 늘리면 좋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서 말하고 있다. 삼백 년을 넘게 산 에밀리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무척 매력적이지만 가까이 만나면 너무도 차가운 존재인 그녀를 통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연장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연금술과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생명의 연장은 과연 축복일까? 지금도 죽음을 인간에게서 떨쳐내려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 작품의 끝에 삼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을 적은 종이(양피지)를 태우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차페크는 유한한 생명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한한 생명. 그래서 누구에게나 소중한 생명. 이 생명을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선동에 의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또는 버리라는 명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 전쟁뿐만 아니라 각종 테러 등 폭력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고, 드러나지 않은 폭력들도 얼마나 많은 시대인지.


그래서 평화는 전쟁 중에 잠시 오는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데, '하얀 역병'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차페크가 1930년대에 죽었는데, 전세계를 휩쓰는 역병을 생각해내고, 그 역병과 전쟁을 같은 위치에 놓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물론 역병에는 지역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최근에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했을 때 별 생각도 없이 또는 공격과 더불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특정 지역 이름을 붙여 '00 바이러스'라고 붙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 희곡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이것이 꼭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대국들이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음을, 그래서 전염병은 병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병이 지닌 이름으로도 또다른 편견을 조장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지역 이름을 붙이는 일을 금지한 것이 마땅함을 깨닫게 된다.


이 희곡에서는 역병의 백신을 발견한 의사가 나온다. 이 의사의 조건은 단 하나다. 나라끼리 평화협정을 맺어라. 그러면 백신을 제공하겠다. 하지만 독재자는 그런 평화 요구를 거절한다. 전쟁만이 살 길이라고... 사람들을 전쟁의 광기에 쓸려가게 한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이들은 역병에 걸린 것과 같다. 역병에 걸려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전쟁 역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 희곡에 나온 총사령관과 의사는 같은 전장에 있었지만 다른 곳을 본다. 총사령관은 자신과 더불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온 사람들을, 그래서 전쟁의 영광을 보는 반면에 의사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전쟁의 참상을 본다.


같은 전쟁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의사는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이용해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전쟁을 막으려고 한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없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무료로. 왜냐하면 그에게 백신은 인간을 살리는 도구이고, 평화를 이루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총사령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전쟁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평화를 이끌어올 백신을 거부한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한다.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런 세상, 그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이 희곡에 나와 있으니...


집단 광기... 폭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어느 것도 보지 못하고, 전쟁을, 폭력을 선동하는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을 차페크는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 위협을 느낀 차페크가 작품을 통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 경고는 유효하다.


전세계를 팬데믹으로 이끈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치달았기 때문이고,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이 희곡집을 읽으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 유한한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게 하는 사회 속에 있는가, 아니면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하얀 역병'의 마지막 장면... 사람을 살리는,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의사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슬프면서도 섬뜩한 결말. 그러나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고 있으니, 이 희곡을 읽으면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한번 읽어보라. 이 희곡을... 어쩌면 우리는 총사령관의 선동에 끌려다니는 군중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을 발 아래 깔아뭉개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그가 이 희곡집에서 표현했던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차페크, 읽을 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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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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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인정을 받은 작가들도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또는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에 새로움을 불러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불화한다. 


이를 쿤데라는 '어떤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것은 그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있으며,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바로, 이 새로움인 것이다. (365쪽)'라 하고 있다.


새로움, 그냥 낯섬이 아니라 낯섬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언제든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작가들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화가 고흐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있다고 하면 될 테고. 유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이상과 같은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면 카프카에 대한 실례가 될까? 그가 이상보다는 먼저 나고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이상을 한국의 카프카라고 하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이 죽고 김기림은 쥬피터(제우스)에 이상을 빗대어 표현한 시를 썼는데(쥬피타의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이상이 죽은 뒤 우리나라 시단이 반 세기나 뒤로 갔다고 아쉬워하는 김기림. 그런 김기림에 빗댈 수 있는 사람이 카프카의 유언을 배신하고 그가 남긴 글들을 출판한 막스 브로트 아닌가 한다.


카프카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로트. 하지만 쿤레라는 이 책에서 카프카를 그렇게 규정지은 브로트를 비판하고 있다. 브로트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한정지었기 때문에 후속 연구자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브로트는 카프카를 세계문학에 위치시키기보다는 아주 작고 협소한 부분으로 후퇴시켰다고 쿤데라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으로 카프카를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카프카가 남긴 유산을 더 추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쿤데라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헤르만 브로흐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스베보와 호프만슈탈과 함께 소(小) 맥락 속에 넣는 것에 항의했었다. 가엾은 카프카, 그에게는 이 소맥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프만슈탈도, 만도, 무질도, 브로흐도 돌이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겨 둔 유일한 맥락은 펠리체, 아버지, 밀레나, 도라라는 맥락뿐이다. 그는 소설사와 동떨어진, 예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전기라는 소-소-소-맥락 속으로 되돌려 보내진 것이다.' (400쪽)


이게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으려고 너무 애써선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혹 작가 자신이라 해도, 작가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쿤데라가 우려하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하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규칙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연 개인이 생존할 것이냐 멸할 것이냐가 중대 관건이 되는 그런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7쪽)'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이런 위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매체들에 의해서. 조심해야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을 작가의 사생활과 연결시키는 것도 위험한데, 그냥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쳐 까발리려 하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장 지독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공에 해당하지만, 카프카가 굳이 출판하고 싶지 않았던 글들까지 출판한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과(잘못)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문학,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지만, 문학과 예술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쿤데라의 이 책에서는 작가를 대하는 태도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짧은 글들의 모음. 그러나 연결이 되는 글들. 소설로 치면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고 향유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에 세상을 뜬 쿤데라, 노벨 문학상이 놓친 또 한 명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작가. 이렇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쿤데라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다. 그는 결코 그런 평가를 바라지 않았을테니.


기억할 만한 구절들도 많아, 아래에 남겨둔다.

~라블레의 책은 전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된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말이다. - P14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 P15

웃음이 소설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적 세속화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해롭다. 그래서 종교와 유머는 사실 양립할 수 없다. - P18

소설은 ~ 다른 법칙에 토대를 둔 다른 세계다. 유일 진리가 맥을 못 추는 곳, 악마적 모호성이 모든 확실성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옥 같은 곳이다.
- P 42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이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 P50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서정, 서정화, 서정적 담론, 서정적 열정은 흔히 전체주의라 불리는 세계의 구성 요소다. 전체주의 세계는 그냥 굴라그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 시로 수놓인,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그런 굴라그인 것이다. - P234

곡의 구성(곡 전체의 건축적 편성)을 작곡가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채우기 위해 빌리는, 그런 미리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구성 자체가 하나의 발명, 작곡가의 독창성 전체가 투영되는 그런 발명이어야 한다. - P256

진정으로 소설적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 P259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행위 자체를 자극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 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들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 - P260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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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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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지정해준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할 수 없고 그냥 구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을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선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 한 사람이라도 구했다는 안도감, 아니면 내가 구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어떤 마음이 들까?


이래도 저래도 마음은 확실히 편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린 사람보다는 살리지 못한 사람이 많고, 살린 사람들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소설에서는 폭력범을 살리기도 하고, 사기꾼을 살리기도 한다. 정작 자신이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면서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여기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네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목화의 조카인 루나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니까.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3쪽)


소설은 오 남매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나무, 하늘과 땅을 잇는, 또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목(神木)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던가. 두 나무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서로 다르게 자란 두 나무는 뿌리를 연결해 결국 한 나무가 된다. 사람들이 베어버렸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 나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단 한 사람만을. 그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할머니 임천자. 겨우 단 한 명을 살린다는 것에 좌절하는 엄마 장미수, 그리고 왜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는 신목화. 나중에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전부인 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이건 생명은 소중한 것.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것.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어떤 가치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이 가족의 셋째인 금화의 죽음을(? 명확하게 죽었다고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목화와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 바다로 보내려는 것은, 금화의 죽음을 인정하고, 금화를 보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설정한다.


자기 목숨을 대신 가져가라고 할 정도로 소중했던 사람을 살리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바로 세상의 전부인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을 인정하게 되는 목화. 그렇다. 우리가 누구를 살릴지 결정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까?


아닐 것이다. 선택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명이든 소중하다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삼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조카인 루나까지 하면 4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이들 4대에 걸친 사람들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 있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인식하게 한다. 바로 내가 그들이 살려낸 단 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소설 속에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부터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죽음까지 다양한 죽음들. 그러나 죽음은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두 나무의 뿌리가 하나로 엮이듯이 하나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삶과 죽음에서 단 한 사람을 삶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 비극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한다. 삶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자신이 찾을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는 일. 그것은 단 한 사람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 벅찬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괴로워하는 사람. 더 많은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 살리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 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따라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도 무작위가 작동해야 한다. 구하고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삶의 길을 보여준 것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자.


세상은 온갖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니까. 물론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옳음과 그름도 공존하고, 선과 악도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삶에 더 중점을 두듯이 옳음과 선 쪽에 더 강조점을 두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는 가정.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시 아는가?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했음에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을지. 우리가 그 단 한 사람일지. 그렇다면 삶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을 살렸지만, 그 단 한 사람의 생명에는 수많은 죽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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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제조공장 문학의 숲 27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김진언 옮김 / 현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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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는 '절대제조공장'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공장인지 알 수가 없다. '절대'라고 번역을 해서 그런가, 차라리 '완전'이라고 번역을 했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완전을 만들어내는 공장.


'절대'는 무엇인가?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뜻인데, 과연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범신론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은, 즉 절대는 모든 존재에 깃들여 있다. 이렇게 존재에 깃들여 있는 신을 존재를 완전히 연소시키면 신만 남게 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을 완전 연소시킨다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차페크는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 완전 연소시킬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발명자는 이 기계에서 나온 신의 존재를 알고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팔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을 사는 사람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사장은 이 기계를 만들어 세계 곳곳에 팔아넘긴다. 그 결과 세계에는 신들이 넘쳐나게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 사랑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 사장은 공장을 노동자들과 공유하고 등등.


또한 이 기계는 자신의 힘만으로 생산을 해낸다. 노동력이 필요없다. 세상엔 물건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 풍요로움. 이 신성함.


이것으로 그쳤다면 차페크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물건은 넘치지만 그 물건이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른다. 


필요를 생각하지 않는 생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경제에만 국한된다면 사람들이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만들어진 '절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인식으로 '절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절대'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의 한계 밖에 있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한 '절대'를 '절대'라고 믿는다. 자신의 '절대'만이 '신'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는 '절대'가 아니다. '절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일들은 전쟁이다. 자신의 '절대'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강요와 강요가 말들과 말들의 다툼으로 끝날 수는 없다.


말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건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이고... 또 죽고 죽이고... 이런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쟁은 끝난다. 이 기계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시대가 돌아온다. '절대'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긴다.


내 '절대'로 다 파악하지 못했기에 남의 '절대' 역시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이 '절대'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이 와야 한다. 차페크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믿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절대'에 대한 인식을 본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기 위해서 타인을 살해하는 걸세. 알겠는가? 자신이 신 전체, 진리의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신,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걸세.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자신이 신의 진리 가운데 겨우 몇 미터, 몇 리터, 몇 주머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테니.'(285-286쪽)


다른 인물을 통해서 이러한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훌륭한 신은 믿지만, 다른 사람의 것은 믿지 않아. 그 사람도 역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믿고 있는데도.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믿지 않으면 안 돼.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깨닫게 될 거야.' (313쪽)


'알겠는가?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경멸하게 돼. 하지만 가장 커다란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야.' (313-314쪽)


이렇게 '절대'를 제조하는 기계가 일으킨 일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믿는 신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신의 일부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이 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신의 뜻대로 행한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함께 지내고 있음을 차페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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