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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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감염병이 창궐한다. 왜 나타났는지, 어떻게 전개될지, 누구에게 옮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공포에 빠진다. 공포에 빠지지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마비되면 희생양이 필요해진다. 자신들의 공포를 분노로 대체하고 분노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생물을 찾는다. 그런데 그 희생물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도한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원인 모를 감염볌에 대처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보다도 더 감염병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를 읽다가 네메시스는 보복의 여신, 복수의 여신인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이 강한 유대인 젊은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했는데...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첫번째와 세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같다. 바로 주인공 캔터 선생이 놀이터 감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함께 있던 아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작가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첫번째 화자가 캔터 선생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두번째 부분에서 서술자가 바뀌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 캔터 선생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다시 첫부분의 서술자로 바뀐다.

 

그런데 서술자의 태도가 확 변한다. 물론 캔터 선생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린 시절 자신들의 우상이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불량스런 아이들에게 대처를 잘하던 캔터 선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폴리오를 겪고 나서 장애인이 된 캔터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적인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낼까?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려던 젊은이에게 왜 네메시스는 나타났을까? 그것은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에 깊이 관여해서 자신의 정신과 몸을 갉아먹은 캔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애매한 사람이 희생당할 수가 있다. 캔터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결국 소설의 끝부부에서 서술자는 캔터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273쪽)

 

이 말 다음에 이런 말이 서술되고 있다.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273쪽)

 

'대신 가혹한 의무감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의 힘은 거의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하는 이야기에 아주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 큰 대가를 치렀다.' (274쪽)

 

이것이 바로 네메시스가 캔터에게 나타난 결과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몰랐다. 즉, 자신이 어디까지 책임지고 나머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에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이렇게 무한책임을 지는 사람이 선할 사람일까? 물론 이런 사람이 많다면 사회는 조금 더 갈등없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자그마한 일에도 신경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책임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결국 책임이라는 가상의 덫에 빠져 현실의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캔터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소설의 서술자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은 캔터는 자신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다. 네메시스!

 

폴리오에 감염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달랐기에 이들의 삶도 달라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을 빌리면 캔터는 "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네메시스에게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하필이면 내게?'라고 생각하면 자꾸만 원인 규명으로 빠져들고, 자기 책임의 늪으로 끌려들어간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다보면 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자신은 세상에서 도태되게 된다.

 

'왜?'라는 말대신 '어떻게?"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자기 책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늪에서 빠져나올 밧줄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충분히 벗어날 수가 있다.

 

캔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왜?'에 매달린다. 그래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원망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데...

 

폴리오라는 소아마비로 알려진 병이 유행하던 때를 중심으로 소설은 펼쳐지지만, 감염병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것도 감염병에 대해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과도하게 지닌 책임감 때문에 파멸해 가는 모습을 그린 것.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음에도 공포에 잠식당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끝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이럴 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폴리오는 주로 어린아이, 젊은이들을 공격했지만, 지금 코로나19는 나이 많은 사람, 병약한 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격리나 공포, 또는 치료제 없음으로 인한 불안 등등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것을 원인을 규명하는 데로만 돌려 네 탓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일부 선량한 사람들이 혹 자신이 전파자가 아닐까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도 - 물론 적당한 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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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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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이라고 하는데, 흔히 연작소설이라고 하면 단편 소설들을 모은 작품집을 말한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겹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사는 장소가 겹치든지, 여러가지로 인물들이 다른 소설에도 등장하거나 비슷한 사건, 배경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러한 연작소설 개념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등장인물들이 겹치는 경우는 없다. 장소는 겹치는 경우가 있지만(현수동 빵집 삼국지, 사람 사는 집, 모두 친절하다) 인물들은 서로 상관이 없다.

 

연작소설이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소설들은 모두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냥 독립적인 단편소설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연작소설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소설집을 관통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 그것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소설집 뒤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친절하다」와 「공장 밖에서」를 발표하고 나서 '2010년대 한국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주제로 한 연작소설을 쓰자'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이후 4년 동안 느릿느릿 단편 여덟 편을 더 썼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매일 이야기하는 한낮의 노동과 경제 문제들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부조리하고 비인간적인 장면들을 단순히 전시하기보다는 왜, 어떻게, 그런 현장이 빚어졌는지를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공감 없는 이해는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집니다. (379쪽)

 

이 말에 따르면 이 연작소설집을 관통하는 흐름은 바로 2010년대 우리 사회다.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이 나타나 있을까? 총 10편의 소설인데, 살펴보기로 하자.

 

소설집은 크게 세 주제로 나누고 있다.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다. 자르기는 노동 현장에서 밀려나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한다면, 싸우기는 더 이상 밀려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이야기이고, 버티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다.

 

'자르기'라는 주제로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알바생 자르기, 대기발령, 공장 밖에서' 다들 밀려나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장강명 소설의 좋은 점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편을 두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을 못하는 알바생을 자르지만, 알바생을 자르는 데도 절차가 필요하고, 고용하는 데도 법적인 의무가 있음을, 그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을 겪는지를, 별 생각없이 고용하고 일 시키고 해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다.

 

'대기발령' 역시 마찬가지다. 회사에서 대기발령은 나가라는 얘기다. 직접 해고 통보를 하지 않고 제 발로 사직서를 내게 만드는 것. 사람을 없는 존재로 취급해서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지금도 경영진들이 종종 써먹는 방법이다. 그런데 대기발령을 받은 사람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음을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작가가 말한 '공감 없는 이해는 자주 잔인해지고, 이해가 결여된 공감은 종종 공허해'진다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그래서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공장 밖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사무직과 생산직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두 쪽 다 사연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 어느 자동차 회사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소설인데,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삶이 벼랑 끝에 매달린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들을 '죽은 자'라고 한다면 정리해고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산 자들'이라고 하는데, 이들 역시 삶이 벼랑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싸우기'에는 '현수동 빵집 삼국지, 사람 사는 집, 카메라 테스트, 대외 활동의 신'이 수록되어 있다. 한 동네에 빵집이 세 곳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살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에서 '일용할 양식'이라는 소설에서도 이런 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번에는 더 심하다. 그때는 프랜차이즈는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프랜차이즈가 들어와 자신들의 재량권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서로 경쟁하게 된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이 생존을 걸고 경쟁하는 그런 모습.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이다.

 

'사람 사는 집'은 철거민을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일방적으로 철거민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다양한 욕망과 이익이 있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도 있음을, 하지만 그들이 쫓겨나는 것은 삶을 박탈하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취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의 모습, 소위 열정 페이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모습을 드러낸 소설이 이 부분 나머지 두 편의 소설이다. 참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으니 이들은 싸워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버티기'에서는 '모두, 친절하다, 음악의 가격, 새들은 나는 게 재미있을까'가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살아가기 힘든 사회임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야기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서비스센터, 택배 등등) 사람들이 친절할 수밖에 없는, 소위 고객이라는 사람에게 절절매는 모습을 또다른 직장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그래서 그들은 모두 친절할 수밖에 없는,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 씁쓸하다.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예술가들도 그들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 평가받는 세상이 되었음을. 그럼에도 그들은 예술을 하고 살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소설은 교육계 비리다. 이 비리에 대처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장강명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말대로 201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가 느끼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 우리 눈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고. 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작가의 감정을 인물들에 담지 않고 담담하게 인물들을 그 장소에 풀어놓는다.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냥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를 파악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을 읽는 우리는 '산 자들'에 속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산 자들'이라고 해도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가 없는 사회가 지금 우리 사회다.

 

우리'산 자들'은 뒤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달려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죽어라고 달려야만 겨우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그런데, 그런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그것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 소설은 삶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 '음악의 가격'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사물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삶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모든 재화와 용역에 대한 무제한 스트리밍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사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다시 세울 수 있을 테니까. 공급량, 보완재, 대체재를 넘어서.

그러면 좋은 음악은, 다시 소중해질지도 몰라.' (335쪽)

 

그렇다. 우리 삶에 대한 가치에 대한 기준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 연작소설집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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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한글판) - 시극 나비잠
김경주 지음 / 호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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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자체가 몽환적이다.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꿈 속을 유영하는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한양도성을 축성하는 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 이 시극은 그 사실을 바탕으로 흐릿한 안개 속에서 도성이 축성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엇 하나 뚜렷하지 않다. 그냥 흐릿하고, 안개에 차 있는 듯한, 달빛에 취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달은 우리를 감상에 젖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 준다던데.

 

그래서 공포영화나 또는 괴기스러운 영화들에서 달은 그 분위기를 고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햇빛의 세계가 아니라 달빛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게 김경주의 시극은 내게 다가왔다.

 

손에 모래를 움켜쥐었는데 잡히는 것은 아주 조금이고 나머지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느낌. 분명 한 편의 완결된 시극을 읽었는데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에 구멍이 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만큼 여운이 크다면 큰 시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달랠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것도 달랠 수 있다. 운명이란 자신의 삶 속에서 이야기를 비워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불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잠을 달래려면 자장가를 찾아 나서야 했다. (5쪽에서)

 

이 시극에서는 불면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잠을 자지 못한다. 잠을 잘 수가 없다. 잠을 자지 못하는 것만큼 큰 결핍이 어디 있겠는가. 잠이 시간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잠이 없으면 인간의 생명도 없다.

 

그러니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불면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달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고 밤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다. 흐릿한 안개, 무언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권력을 쥐고 있는 대목수도 엄마를 잃은 결핍을 지니고 있고, 악공 역시 엄마를 떠난 결핍이, 달래는 잠을 자지 못하고, 울지 않고 웃기만 하는 그런 결핍이, 성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잠들면 안 되고, 살아 있는 여인으로 달래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여인으로 노파가 나와 젖이 나오지 않는 결핍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세상은 결핍이 없는 인간이 없음을, 누구나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음을, 그런 결핍을 시극에서는 불면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인데 가질 수 없는,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음이 된 세계. 이 세계가 바로 불면의 세계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 결핍을 감추려고 하면 해결이 될까? 아니다. 결핍을 가리려고 한다고 해도 결코 가려질 수 없다. 결핍은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다음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만 해결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시극은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결핍을, 불면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주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핍을 드러냄으로써 결핍을 채워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결국 달래의 피로 비가 내린다. 불면의 세계를 이 시극의 사람들은 가뭄으로 겪고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서 시극이 끝난다는 것.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는 삶이 된다는 것. 그것은 바로 결핍을 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인정한 상태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모성이다. 어머니다. 달래는 그래서 모든 이의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는 자신을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비움으로써 자식들이 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메마른 땅에 비를 내려주는. 본인 스스로 결핍덩어리인 달래가 그 자신으로 다른 사람을 충족시켜 준다. 즉, 시인이 말한 것처럼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비움으로써 다시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작가의 말로 돌아온다.

 

시극은 이야기에 속살이 찌는 것을 밀어낸다. 배를 밀 듯 언어를 대양까지, 문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 (5쪽)

 

대양을 여행하는 것은 그 다음 몫이다. 이 시극, 작가는 잘 밀어냈다. 밀어낸 시극의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단순명료하지 않다. 온갖 안개와 풍랑과 암초를 만나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것 역시 결핍이다. 그런 결핍을 인정하고 떠나야만 여행의 맛, 멋을 알 수 있다.

 

아직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니 목적지가 없는지도 모른다. 내게 김경주의 시극은 그냥 바다를 떠다니는 배에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대양에 떠 있는 배에 내가 있다. 나비잠, 아직 내겐 자장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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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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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이름이다. 문학자로서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고.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지식인이 지녀야 할 책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사람이다. 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알려진 사람이기도 한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쓴 소설도 실존주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사르트르가 쓴 희곡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기도 하고.

 

우선 '닫힌 방'이라고 하면 폐쇄된 세계를 연상한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힌 세 사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그들과 서로 어울리지 못할 때 그때 닫힌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할까. 그 점을 볼 수 있게 하는 희곡이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지내야 할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공간은 닫히더라도 사람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공간만이 아니라 관계도 닫히게 된다. 이 희곡 '닫힌 방'은 공간의 닫힘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닫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상대에게 가 닿지 않는다. 공간만큼이나 관계 역시 닫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희곡이다.

 

'악마와 선한 신'은 인간의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악마와 선한 신이라는 제목에서 모순을 느낀다. 그냥 '악마와 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신에게 수식어를 붙일 수가 있지. 신은 이미 선악의 개념을 넘어선 존재 아닌가.

 

그런데도 제목에 '선한(bon)'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길은 신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군대를 이끌고 사람을 학살하는 앞부분의 괴츠가 악마에 해당한다면, 중간부분의 괴츠는 선한 신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신의 뜻을 확인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자신이 악마에서 신으로 전환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선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완전한 신에게는 그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괴츠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땅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가 사랑을 베풀려던 농민들은 이길 수 없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전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농민군들에 의해 학살당하다는 장면이다.

 

자신이 사랑을 베풀려던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괴츠. 그는 결국 인간의 길로 돌아온다. 인간은 악마도 신도 될 수 없다. 그 중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완전한 사랑도, 완전한 증오도 인간의 길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길은 바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증오 사이에 있다. 균형이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것은 인간이 갈 길이 아니다. 악마 쪽이든 신 쪽이든 완전한 인간은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괴츠는 악마와 신의 길을 좇다가 결국 인간의 길로 온다. 이제 그는 완전함을 포기한다. 그에게는 인간으로서 피를 흘리며 분노하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기뻐하는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소위 칠정(七情)이라고 하는 것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다른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는 한계까지... 이것이 바로 중용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악마와 신 사이에서 인간의 길을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인간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고고한 모습으로 홀로 지낼 수는 없다. 괴츠가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다시 농민들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신부였던 하인리히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 어쩌면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까딱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지만, 선한 신을 추구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것도 문제라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음을 생각해보라는 것이 이 희곡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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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9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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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의 희곡 작품집이다. 약력을 보니 1813년에 태어나 1837년에 세상을 떴다. 겨우 24세. 그런데도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작품을 남겼다. 아무리 그때라 해도 지금으로 따지면 겨우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아니면 졸업을 유예하고 대학에 남아 있거나 또는 취업이 되지 않아 대학원에 진학해 있는 경우가 많은 나이다.

 

그만큼 우리들이 세상에서 자리잡는데 시일이 뒤로 미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배 이상 늘어났으니,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겠다.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떴는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도 읽히는 작품을 남겼으니...

 

<보이체크>란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정부)를 죽인 보이체크 이야기. 그런데 질투에 눈이 멀기 전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무슨 실험대상처럼 여기는 사람들. 그런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의 심성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그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분위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일은 삼가야겠다.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 작품은 완결된 작품이고, 당통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로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우리가 배운 자코뱅파의 지도자.

 

<당통의 죽음>에서 생각할거리는 바로 혁명에 대한 것이다. 혁명은 개인의 윤리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혁명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결국 혁명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통이 변절자인지 아니면 희생양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 역사적인 평가를 넘어서 이 희곡만 가지고 판단하면 당통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코뱅파는 계속 피를 요구한다. 반혁명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혁명세력 내부에서도 숙청의 바람이 분다. 정권을 잡지 않으면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혁명을 일으킨 자들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혁명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이 되고 패배한 쪽은 단두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일까? 혁명의 순간에 피를 부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혁명 이후에는 그 피를 더이상 흘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피를 부르는 혁명을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혁명이 성공한 사회에서 다시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한다면 그런 혁명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을 도외시하고 윤리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이 희곡에는 무결점 도덕주의자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그는 도덕으로 사회를 지배하려 한다. 그런데 사회가 도덕만으로 유지될까?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요소는 바로 빵 아닌가.

 

빵이 충족되면서 동시에 장미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데 도덕이 사람들 내면에 자리잡아야 하며, 최소한의 법률로써 규제가 되어야 한다. 먹을거리와 문화, 그리고 도덕과 법.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법만을 앞세워서도 도덕만을 앞세워서도 안 된다. 공자 역시 도덕을 중시했지만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덕치(德治)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시황은 법가를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이후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법가가 아니라 유가를 받아들인다. 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법가가 필요할지 몰라도 사회를 유지하는데는 유가가 필요한 것이다. 즉 법치보다는 덕치가 더 사회를 지속되게 할 수 있다.

 

철저한 윤리국가는 사람들 숨통을 막는다. 사람들을 견디게 할 수 없다. 이런 철저한 윤리는 법의 엄정한 사용을 부른다.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일탈이 허용되었을 경우에 자유롭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조화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사는 마을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산다. 도덕군자도, 법률가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또 마을에서 지탄을 받는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을 매몰차게 쫓아내거나 마을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마을의 조화는 깨지고 만다. 사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범위를 넓혀서 우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다양성. 어느 하나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는 것. 그것이 혁명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그런데 <당통의 죽음>을 보면 그렇지 않다. 혁명이 일어난 뒤 하나로 수렴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죽음을 부를 수밖에.

 

수많은 죽음으로 사회가 계속 지탱할 수는 없다. 희곡은 정신이 이상해진 여인이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프랑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가는 쪽으로 진행된다.

 

바로 다양성, 관용이 부족한 혁명 정부가 초래한 일이다. 하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혁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생각 속에 갇힌 혁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이 나아지는, 그리고 다양한 삶들이 인정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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