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3부 : 사신의 영생 - 완결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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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다. 참으로 방대한 소설이다. 내용으로도 그렇고, 분량으로도 그렇다. 3부는 거의 800쪽에 달한다. 1부가 400쪽이 넘고, 2부가 700쪽 정도니, 다 합치면 1900쪽이 넘는 분량이다. 그런데 내용은 광활한 우주의 사건들이다.


지구는 이 우주에 비견한다면 작은 점보다도 작다. 아주 미미한 존재, 우리가 현미경으로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 존재들보다 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어떻겠는가. 지구의 관점에서 인간들은 그리 큰 존재가 아닌데, 우주의 관점에서 인간들은 존재조차도 인식하기 힘든 존재들이다. 


바로 이 점이다. 2부까지 삼체 문명과 지구의 대결이라고 했다면, 아니다. 삼체 문명 역시 파괴되고 만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보다 월등한 문명을 지닌 삼체 문명조차도 한 순간에 파괴될 정도의 위치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주를 알 수 없다. 어떤 생명체들이 있는지, 어떤 문명이 있는지 알 수 없다. 2부의 제목이 '암흑의 숲'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너무도 커서 볼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아야 한다. 생존을 위해서.


2부의 뤄지가 말하는 우주사회학의 공리 두 개와 의심의 사슬과 기술의 폭발을 생각한다면, 생존하기 위해서도 알아야 한다. 즉 나는 상대를 알아야 하고, 상대는 나를 몰라야 한다. 암흑으로 위장해야 한다.


생존 방법이 세 가지가 제시된다. 삼체 문명이 파괴된 다음에 더 발전한 문명에게 지구의 좌표가 분명 알려졌으므로, 태양계 자체가 파괴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이제 인간들은 살기 위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 3부의 주인공은 청신이다.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지만 결국 인류의 생존자가 되는 사람. 여성으로 택한 이유는 남성성은 우주의 암흑과 통하기 때문이다. 이는 포용이 아니라 파괴다. 그러므로 파괴되는 우주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요소는 여성성이다.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읽다보면 청신에게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에는 명료한 것이 지지를 얻는다.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 과감하게 나아가자고 하는 주장. 이런 주장들은 절망 속에서 나온다. 그리고 절망 속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때 평화, 포용, 희생, 사랑을 주장하면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청신 역시 마찬가지다. 결정적인 순간에 청신은 파괴와 전쟁보다는 사랑을 택한다. 그 결과는 태양계의 파멸이다. 하지만 청신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는 선택이라면 상대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선택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파멸을 면할 수가 없다면... 


결국 어떤 선택이든 파멸을 미룰 수는 있지만 피할 수는 없다. 청신에게 두 번 주어진 선택의 순간이 그렇다. 청신은 사랑을 택한다. 그는 남을 파괴하면서 생존을 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점이 바로 청신을 계속 살아남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우주가 존재한다면 그 동안 우주에 존재했던 생명들, 문명들을 증언하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증언자는 여성성이 되어야 한다.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사회적, 철학적으로 말하는 여성성을 지닌 존재.


태양계를 넘어 다른 우주로 가고, 다시 소우주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자신의 생존이 대우주의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청신은 대우주로 가기로 선택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이런 과정을 거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흐르고, 우주의 공간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게 펼쳐진다.


청신과 몇몇의 인물들로 이 방대한 시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게 한다. 


물론 많은 과학지식들이 등장해 읽기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런 지식들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흥미롭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시야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태양계뿐만이 아니라 은하를 넘어 우주 전체, 그것도 시간의 범위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인간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주에서 인간은 너무도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 작은 존재 안에도 우주 전체가 있음을, 청신이 소우주에 남겨 놓는 존재를 봐도 그렇다.


결국 우리는 모두가 우주다. 그런 우주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우주가 사람에게 어질 수 없다. 우주는 우주의 법칙으로 운행될 뿐이다. 거기에 인간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우주의 법칙을 어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우주의 법칙을 명심하고, 그런 대우주의 법칙 속에서 소설 속에서는 우주의 다른 문명들끼리 다툼을 벌일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를 더욱 축소하면 지구에서 인간들끼리 서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우주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뿐더러, 인류가 서로를 갉아먹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삼체]라는 소설, 1부에서 3부로 가면서 더욱 속도가 나면서 흥미진진해 진다. 방대한 시공간을 가로지는 소설. 시야를 더 넓힐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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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2부 :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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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다. 암흑의 숲이다. 이제 지구는 외계 문명을 알았다. 그들이 지구로 온다는 것과, 그들과의 격차도 알았다.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지구인이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물론 400년 뒤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번 권은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1권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던 왕먀오는 언급도 되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그만큼 그는 2부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한다. 아니 그의 역할은 미미하다. 


대신 우주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창시한 뤄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뤄지와 더불어 1권에 나왔던 스창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하지만 이제 방향이 달라진다.


지구인들은 연합해서 삼체 문명에 대항하기로 한다. 삼체인들이 술수를 모른다는 점을 이용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숨겨진 계획을 실현하려 면벽자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네 명의 면벽자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하나하나 자신들의 계획을 간파당한다. 뤄지만 빼고.


알 수 없는 뤄지. 결국 뤄지로 인해 200년이 지난 다음 삼체 문명은 지구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멈추게 된다. 뤄지의 계획이 성공한 것. 그 계획이 성공하기까지는 뤄지가 주장하는 우주사회학이 큰 역할을 한다.


우주사회학은 두 개의 공리와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뤄지는 예원제에게 듣는다. 


공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존은 문명의 첫 번째 필요조건이다. 둘째 문명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확장되지만 우주의 물질 총량은 불변한다.' (17쪽)


여기서 파생되는 두 개의 개념은 '의심의 사슬과 기술 폭발'이다. 이 두 개념이 삼체 문명이 지구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의심의 사슬은 거리가 멀수록 더욱 많이 생기게 되고, 이것은 자신의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활한 우주에서 또다른 문명이 있는데, 이들 문명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는 일은 의심의 사슬을 통해 멸망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구보다 월등한 문명을 지닌 삼체 문명도 마찬가지다. 자신들보다 더 발달한 문명을 지닌 우주 문명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체 문명 역시 자신들의 위치를 드러내는 것을 삼가야 한다. 이 점을 뤄지가 파고드는 것이다. 그의 면벽자로서의 활동도 이런 점에 맞춰지게 되고.


또한 '기술 폭발'도 다른 문명에겐 위협적이다. 지금은 낮은 문명 수준일 수 있지만, 기술은 예측을 넘어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200년이 흐른 지구 문명을 봐도 알 수 있다. 분명 삼체 문명을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200년 동안 어떤 발전이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발전된 문명이 있다면, 비관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술은 폭발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면 미래에 지구를 정복하려는 계획이 성공할지 알 수 없게 된다.


이 우주사회학이 소설의 주를 이루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뤄지를 통해 간간히 나올 뿐이다. 그러다 소설의 막바지에 가면 이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 속에 수많은 인물들, 그 인물들이 대응하는 방식 등을 보여주면서 위기에 처한 인류가 어떤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는지를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다.


서로 다른 문명이 만났을 때 작가는 '의심의 사슬'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 없기에 갈등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의심의 사슬이 두 문명의 만남이 아니라 수많은 문명에게로 확대를 하면 공존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대를 완전히 알 수 없을 때 상대와 공존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든지, 상대와 거리를 두면서 타협하든지. 외계 문명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 점을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삼체 문명과 거리를 두고 공존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하게 2부가 마무리되었는데, 아직 200년이 남았다. 그리고 소설은 3부가 남았다. 어떻게 될 것인가. 여전히 지구로 오지 않겠다고 했지만, 삼체 함대는 우주 공간에서 태양계 쪽으로 항해를 하고 있으니.


3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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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부 : 삼체문제
류츠신 지음, 이현아 옮김 / 자음과모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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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면서 광활한 우주를 상상한다. 138억 년 정도가 되었다는 우주의 역사. 그 넓이는 지금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가볼 수는 없는 크기이다. 빛의 속도로 가도 138억 년이 걸릴 우주의 끝.


그런 우주에 생명체가 사는 행성이 있을까? 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오만 아닌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했고, 그를 작품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화성이 멀고 먼 행성이었을 때 사람들은 화성인을 우주인으로 설정하고, 화성인이 지구에 오는 상상을 했었는데, 이제 화성보다도 더 먼 우주를 볼 수 있게 된 인간은 수많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상상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외계 행성을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외계 행성이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환경. 이는 우리 인간이 패턴을 인식하려는 경향을 생각하게 한다. 왜 우리는 패턴을 인식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예측가능성, 즉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삶은 예측이 가능한 상태에서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예측할 수 있어야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꾸려갈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런데 앞을 예측할 수 없다면? 잘 알지 못하지만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했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 삶은 불확정성이 맞다. 예측을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에 의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더라도 어느 정도 방향성은 예측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삼체 행성에는 그러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안정도 없다. 어떻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체에 수많은 문명이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성이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할 수 없다.


과학, 수학, 철학, 예언 등을 통해 삼체 행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한 그들이 선택한 마지막 해결책은? 바로 이주다.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 어떤 행성으로? 자신들과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


소설에서 이 장면을 마주하면서 지금 인간들이 화성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것이 생각났는데, 물론 화성은 인간들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행성은 아니니 다르기는 하지만. 그리고 현재까지 화성에는 생명체가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도 좀 다르다.


삼체 문명은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그들이 살 만한 행성이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소설이 이렇게 삼체 문명으로부터 시작했으면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삼체 문명이 주인공이 아니다. 바로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삼체 문명이 이주하기로 결정한 지구 생명체인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들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부의 비밀 조직에 끌려간 왕먀오 박사. 그의 눈에 보이는 이상한 카운트 다운 숫자. 그리고 형사 스창. 과학자들의 의문의 죽음.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왕먀오는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온몸으로 겪은, 천재 수학자인 딸을 잃은 천문학자 예원제를 만나게 된다. 예원제를 만나 과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러한 외계 생명체에게 지구의 존재를 알린 이가 바로 예원제임을 알게 된다. 그들이 삼체 문명을 지구로 오게 해, 지구를 개혁하려고 한다는 것 자체도.


여기에 소설은 지구의 환경 파괴, 인간중심주의 등도 다루고 있다. 자신의 종만을 위해서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인간들. 그런 인간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외계 문명을 통해서라도 지구를 개조하겠다는 생각을 지닌 지식인들.


아마 예원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지구 생명체를 멸종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구를 생명체들은 좀더 조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목표로 그러한 행동을 했으리라. 하지만 의도와 결과가 늘 일치하지는 않는 법.


삼체 문명은 지구를 정복하고, 지구에서 자신들이 살아가려 하지만, 결코 지구인과 함께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자손을 낳지 않게 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설의 말미에 그들이 보내온 말은 "너희는 벌레다!"(433쪽)다.


벌레. 다른 종을 벌레로 지칭한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를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박멸해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인간들이 벌레라는 말을 없애야 하는 존재로 사용하고 있듯이.


여기에 그들의 문명은 지구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나다. 그들이 보내온 양성자만 봐도 그렇다. 과학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기 쉽다. 하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형사 스창이 그렇다. 그는 좌절에 빠진 왕먀오와 다른 과학자를 밭으로 데려간다. 밭에서 왕성하게 보리를 뜯어먹고 있는 메뚜기 떼들.


이 메뚜기 떼들을 보면서 왕먀오는 깨닫는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벌레라고 했지만, 그들이 인간을 정복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벌레는 어떤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것이기에. 단순히 기술력의 차이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소설은 막을 내리는데...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밭에 있는 보리를 보고 느낀 왕먀오의 생각이.


'보라, 이것이 바로 벌레다. 벌레의 기술과 우리의 차이는 우리와 삼체 문명의 차이보다 훨씬 크다.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것들을 박멸하려고 했다. 각종 살충제를 비행기로 분사하기도 하고 천적을 키워 뿌리기도 하고 알을 찾아 없애고 유전자 변형으로 번식을 근절하기도 했다. 태워도 보고 수몰시키기도 하고 각 가정에 살충제를 비치해놓고 사무실 책상에는 파리채같이 그들을 없앨 무기도 준비해놓았다. 이 긴 전쟁은 인류 문명과 늘 함께했고 아직까지도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았다. 벌레는 멸종되지 않았을뿐더러 예전처럼 여기저기에서 횡행한다. 그 수도 인간이 나타나기 전보다 줄어들지 않았다. 인류를 벌레로 보는 삼체인은 벌레는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439-440쪽)


이런 삼체 문명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통보를 받은 시점으로부터 450년 뒤다. 인류의 세대가 30년을 한 세대로 하면 15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도착한다. 그때까지 이미 외계 문명의 침략을 예고 받은 상태에서 지구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놓고 있을 것인가? 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지배에 놓일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해 스스로 인간 종의 멸망을 추진할 것인가? 


소설에서는 이러한 세 부류의 집단과 더불어 대책을 마련하려는 집단이 나온다. 어쩌면 내부의 갈등을 외부의 갈등으로 해소하려 할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세계 각 나라가 협력하는 모습으로 나오니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외계 생명체인 삼체 문명을 통해 지구에서 인류가 추진해온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끼친 부작용과 우리 지구가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갈수록 예측불가능해지는 기후 재앙 앞에서 지구를 떠나려는 계획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사람들도 있는 이 상황은, 삼체 문명이 처한 상황에 빗댈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삼체 문명처럼 다른 행성으로의 이주를 꿈꾸어야 할까?


아니면 지구가 더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가지 않도록 손을 맞잡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기후 재앙이라는 삼체 문명의 침입을 우리는 받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삼체 문명은 450년 뒤에 도착하겠지만, 기후 재앙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테니. 


'잘 쓴 과학소설이란 제일 변화무쌍하고 제일 정신 나간 상상을 뉴스 보도처럼 진실하게 쓴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447쪽)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으면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 우리에게 닥칠 삼체 문명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2부와 3부도 기대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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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7-22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딸이 재밌다고 읽어보라는데 여유가 없네요 ㅠ

kinye91 2024-07-22 11:39   좋아요 1 | URL
재미 있어요. 참 방대한 내용이지만, 읽을수록 흥미진진해져요. 여유가 있을 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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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그러한 평탄 속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주름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그런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주름을 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틈들을 가리려고만 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틈들을 인식하고, 그 틈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틈, 주름들을 가리려는 세력들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세력, 그들은 주름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허위가 밝혀지고, 허위로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름이 드러나지 않게, 틈이 나타나지 않게 가리고 메우려 한다.


권력자의 말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말을 억압하고, 말이 발화되지 못하게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들이 겪은 주름들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주름들을 펴서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하다.


침묵이 아닌 말하기는 연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그런 연대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작품에서 '나의 언어 나의 이름'(42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언어,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회적 제약이 만만치 않다. 권력의 힘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그래서 약자들은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거나 한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을 언급할 때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정현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틈, 주름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주름으로 감춰져 있던 사람들, 삶들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더욱 다양함을, 더 많은 삶들이 감춰져 있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보여줌을 넘어 연대를 통해 그들이 주체로 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집의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떠나올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떠나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소설집 제목이 된 '쿄코와 쿄지'만 봐도 그렇다. 두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한 인물이다. 쿄코와 쿄지는 모두 경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같은 경자지만 한자어로 쓰면 다르다. 남녀 차별이 있던 시대에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자'를 넣기로 한다. 아들이 아닌 스스로 자(自). 이는 남의 눈에 비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자'로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신부'들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수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듯이, 운동권에서도 앞에 나섰던 많은 남성 운동권 지도자들은 언급이 자주 되지만, 뒤에서 그들을 받쳐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잘 언급되지 않듯이, 또 삼풍백화점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많은 여성노동자들, 용산 참사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 부마항쟁도 마찬가지로 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경자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행정을 담당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자의 자를 아들 자(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쓴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 쿄코다. 하지만 경자는 스스로 '자(自)'자를 쓰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自) 자를 쓰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 즉 약자들의 연대, 감춰진 사람들의 연대가 소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름으로부터, 틈으로부터 꺼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나타나는데, 명확히 서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삶에서 접힌 주름들을 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게 한다. 그 펴진 주름도 다 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한정현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낙관하자!'를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언어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소설집의 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버엔 그들에게 내가 공부했던 부산에 대해, 부산에서 바라봤던 광주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다.' (451쪽)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은 사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바로 그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연대가 있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현을 꼽을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이기도 하고...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이 되기도 하니, 읽으면서 한정현 작품들을 곱씹게 되기도 하는 소설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경자(京子)가 아닌 경자(京自)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러한 경자들을 주름과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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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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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발표된 연대 순으로 묶었기에, 이번 권에서는 1962년부터 1985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영화 '듄'을 보지 않았고, 소설 '듄'도 읽지 않았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듄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편들이 있다는데, 그것이 내게는 큰 의미를 주지 않았다.


그냥 SF소설이라고, 그런 소설들이 시대와 배경만 다르지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인간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고 읽을 뿐이다. 이 소설집도 다양한 배경,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인간이 만약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두 편이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생명의 씨앗'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아노 수송 작전'이다. 둘 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주를 주제로 삼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낯선 우주의 다른 행성에 정착해 살아야 한다면 과연 지구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행성을 지구와 똑같이 만들어야 할까? 오히려 그 행성에 인간이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생명의 씨앗'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을 발견하고 인간들이 이주해 살아가도록 한다. 초기에 정착하기 위해서 지구에서 씨앗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행성에서는 지구의 씨앗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왜 그럴까 고민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게 살아남은 생명체인 '매'에게서 답을 찾는다. 그렇다. 정착한 행성을 지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성에 인간들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이것이 진화 아니겠는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려 할 때 지구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생물들로, 지구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구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그 행성은 그 행성대로 수억 년 또는 수백 억년 동안 자신의 환경을 구축해왔다. (현재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이라고 하니, 그에 맞추면)


그렇다면 그 행성은 그 행성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지구에서 씨앗을 가져갔다고 해서 지구에서와 같은 성장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행성에 맞는 성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 행성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지구에서와 다른 선택을 한 호니다와 크로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주의를 고수하는 과학자들은 그걸 인정 안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과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들은 이곳을 또 다른 지구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지구가 아니었고, 지구가 될 수도 없었다. 들여온 생물들 가운데 매가 가장 먼저 이 사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크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429쪽)


과학자라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진화의 경로를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이 밟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갇힌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을 지구에 맞추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자들처럼.


하지만 생활에 밀착한 사람들은 과학자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 소설의 크로다가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지구가 아닌 행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지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다른 행성에 이주한 인간들이 마주칠 일들이다.


'피아노 수송 작전'은 이주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우주선에 실을 짐의 무게가 정해져 있다면... 


전혀 낯선 곳으로 가는 인간들이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과연 여기에 예술이 포함될까? 작가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가더라도 예술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는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 물론 그곳에서 조립을 하면 된다. 그러나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온 예술품과 같은 피아노라면? 완전히 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일부라도, 아니 과거를 인식시키는 부분이라고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피아노의 무게 때문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식이 이 피아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숨겨서 가져갈 수 없기에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조금 양보해야 하고.


이런 과정이 이 짧은 소설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성도 가보지 못한 인간이 낯선 은하로 가서 살아야 한다면, 정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갈까? 그런 이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밖에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소설들이 꽤 있다. 타임머신을 생각하는 소설도 있고, 과거에서 사람을 데려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도 있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두 소설처럼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듄]을 읽어봐야겠다. 적어도 그의 세계관을 잘 드러낸 소설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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