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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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많겠지만, 노동자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낮은 곳에 있으면 그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이 묻혀버리고 만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왜 주장하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니 자기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


가장 주목받지 못했던 삶을 주목받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더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게 되는 노동자들. 식민지 시대 노동자만이 아니라 지금 노동자들도 그런 경우가 많다.


체공녀 강주룡. 강주룡이라는 이름은 을밀대와 더불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을밀대 위에 올라가 자기 주장을 펼친 노동자. 그리고 그 강주룡이라는 이름과 지금 우리 시대의 김진숙이 겹쳐진다. 을밀대 위와 타워크레인 위.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다 얻었는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것도 불법이라는,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


소설은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해 간다. 간도에서의 삶, 결혼, 남편의 죽음, 조선으로 귀환, 다시 시집을 보내려는(딸을 팔려는) 가족으로부터 도망, 평양에서 고무공장 직공으로 살아가는 모습, 파업에 참여, 을밀대에 오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냥 읽어도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성으로 식민지를 살아가는 데에는 남자들보다 더 많은 질곡이 있음을 강주룡의 삶을 통해 알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결혼, 그 다음에 독립군에 참여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의 구설수에 오르게 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소설에서 강주룡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역사적으로 사실관계를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 작품은 소설이니까. 그런데 이 소설에서 표현된 강주룡의 모습에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니, 전쟁은 확실히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같은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 또는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전근대적, 가부장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군대내 성폭력 사건을 보면 그런 일이 전근대적 사건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 그것도 자신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태도가 이 소설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데, 이 점은 강주룡이 평양에 와서 노동운동을 하게 될 때에 겪게 되는 일과도 겹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토론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자들인데, 이들이 콜론타이 저작을 읽고 토론을 한다. 정작 여기에 참석한 여성은 강주룡 혼자 뿐. 이때 강주룡이 그들에게 한 말은 두고두고 생각할 만하다. (201-202쪽)


굳이 페미니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독립운동을 하건, 노동운동을 하건 거기에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음을 소설은 비켜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다루면서 강주룡을 통해 지금 너희들은 어떠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소설은 한 인간으로서,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가는 강주룡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강주룡의 외침이 허공 중에 사라지지 않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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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1 소설 보다
김멜라.나일선.위수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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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봄보다는 뒤에 나온 계절 소설을 먼저 읽었다. 하긴 소설을 꼭 계절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그 계절에 좋은 작품이라고 평가 받는 소설을 실었을 뿐이니... 어느 순서로 읽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이 계절에 따라 읽기 적합성을 띤다면, 그 소설이 어떻게 오래 동안 사람들에게 읽히겠는가? 좋은 소설은 계절을 넘어서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들 아니던가. 그래야만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 될텐데.


이 책에도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편집자들이 엄선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뜻하지 않게도 이번 책에도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 실린 소설이 한 편 있다. 그때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김멜라가 쓴 '나뭇잎이 마르고'란 소설이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소설. 단편임에도 첫 문장을 보자마자 아, 읽은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소설이라 기억에 남아 있었나 보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은 참 힘든데, 여성이자 장애인,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체'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소설. 체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만, 과연 우리 사회에서 체를 받아주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


왜 체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에서 양귀비 씨앗을 뿌릴까? (이들이 뿌리는 씨앗이 양귀비 씨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체와 관련지어서 양귀비 씨만으로 국한시키고자 한다) 예전에는 약으로도 쓰였던 양귀비라는 식물이 아편의 재료라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재배해서는 안 되는 식물이 되었는데, 양귀비는 그대로인데, 그가 어떤 시대에 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이 사회에서 양귀비나 체나 변두리로 밀려나기는 마찬가지. 그렇지만 체는 당당하다. 자신이 할 말을 하고 산다. 그렇다. 양귀비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 눈에 띠는 곳에서는 재배를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자라고 있는 곳에서는 그 역시 하나의 생명으로 자라게 된다.


우리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을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을 더 많이 보지 않나 하는 생각. 그 사람의 신체조건이라든지 사회, 경제, 교육 상황 등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인데, 우리가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생각하게 한 소설이다.


소설의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낯설게 보게 하기.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낯선 세상을 만난다. 내게 익숙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익숙하다고 여겨졌던 세상이 낯설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위수정이 쓴 '은의 세계'가 바로 그렇다. 지환에게 낯선 환경(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는다)에서 다가온 하나. 그 하나와 함께 살지만 하나의 가족(사촌)은 또다른 낯선 존재들이다. 하나 역시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소설은 또 하나의 낯선 세계, 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진 상황 역시 제시하고 있다.


이런 낯섬 속에서 자신의 삶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을 환상 속에서 경험하는 지환. 이는 정말 낯선 세상이다. 서로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함께 살고 있지만, 사실 서로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지환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하나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낯선 세계 속에서 익숙한 인물들이 낯설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과연 나는 나인가?


그렇게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소설은 끝나는데...어쩌면 단편소설이 지닌 매력일 수도 있다. 여백이 많은 소설들. 그 여백을 독자가 채워나가야 하는 소설. 그리고 작가는 다시 다른 작품에서 그 여백을 채우고 또다른 여백을 남기는 그런 과정을 계속 이어나가는.


이렇게 두 작품은 주제를 명확히 깨닫지 못하더라도 읽어가면서 빨려들어가는데, 한사코 나를 밀어내는 소설이 바로 나일선이 쓴 'from the clouds to the resistance'란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이다. 1959년과 2018년이 교차하고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제목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다.


또 우리나라 소설이면 우리나라 말로 제목을 달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든다. 작가들은 자기 나라의 언어를 갈고 닦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들 아닌가. 너무 고루한 생각인 듯 싶다가도 작가들 마저 이렇게 영어를 제 나라 말인양 쓰면 나중에 우리나라 말로 된 소설이 남아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우겠지만.


지금 노래들을 보면 영어가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설에도 이렇게, 비록 제목만이기는 하지만, 들어왔으니,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소설 내용을 이해하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언가 토막토막, 무의식 속에 있던 일들이 그냥 마구잡이로 나열된 느낌. 어쩌면 그런 나열 속에서 일관된 무엇을 찾아야 하겠지만, 마치 잭슨 폴록의 작품이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을 곱씹어야 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독자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이런 소설은 평론가들에게는 좋은 작품이다. 자신들의 현란한 지식을 드러낼 수 있는 원재료가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같은 독자에게는 아니다. 그냥 이상 소설이 1930년대에 나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독자처럼 읽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하기가 힘드니, 궁금한 사람은 작가와 평론가의 대담을 읽어보거나 직접 작품을 읽어보기를...


그래도 이렇게 짧지만 계절마다 꾸준히 소설이 책으로 엮여 나왔으면 좋겠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 분량이나 가격 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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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미래 -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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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군더더기 없는 주장이다. 공간이 사람들 삶에 영향을 주니, 공간에 대해서 고민하고, 적절한 공간을 만들어내야 미래 사회에서 특히 감염병이 창궐하는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다양한 분야의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거공간인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종교 시설, 학교, 직장, 도시, 도로, 그린벨트 개발, 상업 시설, 청년들의 주거 문제, 국토 균형 발전 등에서 필요한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중에 아파트를 살펴보면 유현준은 포스트 코로나 아파트의 5원칙을 주장한다. 첫째, 1가구 1발코니, 둘째, 소셜 믹스 공원, 셋째, 기둥식 구조, 넷째, 복합 구성, 다섯째, 친환경적인 목구조 사용이다.


거실이나 방을 확장해서 발코니를 없앤 아파트가 많은데, 그런 구조가 사람들을 더욱 삭막하게 한다고 한다. 그러니 발코니를 통해서 자연을 주거 공간 안으로 들여와 안과 밖이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단 주장이다. 이것이 되면 자연스레 소셜 믹스 공원은 해결될 수 있고, 기둥식 구조나 다양한 분야의 시설들이 들어오게 되는 복합 구성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목구조로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주장대로 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은 이런 책을 읽으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라는 우화가 떠오르곤 한다. 당연한 주장이고, 좋은 주장인데, 그런데 어떻게 실행하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견도 실행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쥐들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다는 좋은 의견을 냈지만, 어떻게 달 것인가에서 실행 단계로 가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탁상공론에 불과하게 되었지 않나.


유현준의 주장도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주장을 과연 어느 부처에서 검토할까? 국회에서 관련 법을 개정하려 할까? 주무 부서라고 할 수 있는 국토행정부나 중소기업벤처부나 뭐 이런 부처의 관료들이 이 책을 읽고 고민을 할까?


아님, 이러한 전문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의견을 정치권에 전달할까? 그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의 말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실행이 될까?


유현준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안-> (   )->실행'으로 가는데 그 빈 칸이 하나가 아니라 너무도 많은 (괄호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괄호 안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도 명확해야 하는데, 유현준의 책에서는 이 괄호에 들어갈 단계들이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문득 이 괄호를 주장하는 사람이 채울 수 있다면 우리 사회 공간 구조가 지금처럼 되어 있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괄호를 채우게 할 사람들은 바로 그 공간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유현준이 주장한 내용을 자신들의 공간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그 공간에 살 사람들이 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이것도 그렇게 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내가 살 만해야 그 다음, 우리가 살 만한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 책 곳곳에서 유현준은 사람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니다. 우선 내 배가 불러야 한다. 내 배가 부르면 남 배 고픈 줄 모른다고 하는 속담이 있지만, 아니다. 내 배가 불러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생각도, 행동도 내가 우선 살 만해야 한다.


이 점에서 유현준은 청년 주택 정책이 임대 위주로 가지 않고, 청년들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한다. 괄호 안을 채울 수 있는 하나의 단계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정책을 펼치게 하기 위해서는 또다른 괄호가 필요하지만, 우선 방향에 대해서 공유를 하면 비어 있는 괄호들을 채우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하는 유현준의 주장은 귀기울 만하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실천한 건축들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보여주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다만, 건축에 적용되는 수많은 법규들을 현실에 맞게, 또 미래에 맞게 개정하는데는 국회가 나서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다는 점이 문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공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들이 모여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면, 중간에 비어 있는 괄호들을 하나씩 하나씩 채워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유현준의 주장이 정리되어 있다. 그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의 계층 간 이동 사다리를 만들려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오프라인 세상에서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은 사람 간의 '만남의 밀도'가 높아지면서도 동시에 전염병에 강한 도시 공간이다. ... 선형의 공원, 자율 주행 로봇 전용 지하 물류 터널,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규모는 작아지고 다양성은 많은 학교, 다양한 부도심, 특색 있는 지방 도시가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 사회이 문제는 비전 없는 부동산 정책들과 세금 정책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도시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 (358쪽)


이 제안과 실행 사이에 있는 많은 괄호들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남아 있지만, 우선 이 주장들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 과정 속에서 괄호들이 하나하나 없어지게 되겠지. 


덧글


목구조 건물에 대한 이야기. 아파트 이야기를 하면서 앞부분에서 유현준은 목구조가 우리나라 아파트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무들을 접합해서 건축을 하기 때문에 나무들도 강도 높은 건축 자재가 된다고... 그래서 노르웨이에서는 2019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85미터 높이의 19층짜리 목조 건축물 '미에스트로네'가 완성됐다(50-51쪽)고 한다.


그런데 347쪽에 보면 전통 건축을 이야기하면서 목재 구조의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전통 건축물이라고 한정할 수도 있지만, '더 높은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료가 필요했다. 철이나 콘크리트는 목재나 돌보다 단위 면적당 압축력을 받아 내는 힘이 크다. 근대 건축에 접어들어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나오고 나서야 수십 층 높이의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됐다'고 하는데, 앞에서 아파트 논의에서 목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현대에는 목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으니, 목재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칫 잘못 읽으면 목구조 건축을 미래 건축에서 제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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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4 0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대화할 때 아주 유용한 책 같아요 ㅎㅎㅎ
전 후 반부에 유교수님이 출마하시나 생각했어요 ㅎㅎ

kinye91 2021-09-14 08:02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 같은 선거철에 각종 공약이 난무하는데, 이 책에 나온 제안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것의 타당성, 실현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별 별 사이 - 소년소녀 X SF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동식 외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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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xSF'라고 한다. '청소년xSF'라고 하지 않은 편집자의 고심이 느껴진다. 특정한 성이 특정 연령대를 대표하고 있다는 느낌을 청소년이라는 말은 준다. 그렇다고 청소녀라는 말을 쓰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언어가 사고를 대표한다고 하면, 청소년이라는 말에는 의식하지 않더라도 남성중심주의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특정한 연령대를 독자로 상정하고 작품을 내놓은 출판사에서 용어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소년소녀xSF'라고 했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 네 편의 주인공들은 주로 중고등학생 정도의 연령이라고 보면 된다. 중학생 정도의 연령 13세에서 18세 정도를 사춘기로 잡으면 사춘기에 들어선 사람들이 주요 등장인물이고, 독자들도 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여기면 된다.


그렇다면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이 주로 경험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 친구 관계, 또 성장통(소위 사춘기 반항이라고 하는), 성적(공부), 사랑 문제가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들을 사실적으로 쓴 소설도 많지만, 이 소설은 SF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상상이 발현된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상상력에서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SF소설의 매력이다.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고, 그 거리만큼 현실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김주영이 쓴 '별 별 사이'는 친구 관계를 다루고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 온라인 수업은 부유층 아이들이 주로 하고, 오프라인 수업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주로 하는. 


같은 학교 학생이지만 서로 별과 별처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그런 사이들. 이렇게 먼 존재들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친구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친구가 되어야 함을 작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엄마의 가출, 부유한 친구의 제안, 그 친구는 엄마와 아는 사이 등등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예전 영화 '데몰리션 맨'에서 욕을 하면 경고가 나오고 어쩌고 하는 장면을 이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기발한 상상력으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잘 그리고 있다.


친구는 경제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서로가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부딪치며 지내는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친구가 된다. 그런 과정... 예전 어른들이 그러지 않았던가. 친구가 되려면 밥을 함께 먹고, 목욕을 같이 하고, 잠을 같이 자야 한다고. 그렇게 경제적 차이에 의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하는 생활 속에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SF라는 형식을 빌려 작가가 보여주고 있다.


김동식 소설 '이상한 미래의 사춘기'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기발한 상상력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화학요법에 의존해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그런 세상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예지의 가족을 통해서.


사춘기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그 격정적인 감정을 이용해 감정 에너지를 추출할 수 있다는 발상, 그러나 모든 아이가 사춘기를 거치지는 않는다는 사실. 아니 사춘기가 있다면 거치기는 하겠지만, 그 시기를 보내는 모습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예지 역시 사춘기를 요즘 말로 하면 쉽게 보낸다. 


소설 속에서 의사가 말하는 어려운 집안 아이들은 가족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춘기도 빨리, 조용히 넘긴다는 말은 슬픔을 자아내지만, 그렇지만 그런 집안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면서 웃으며 지내는 가족이 있음을, 마냥 슬프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예지와 예지 엄마의 관계 역전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냥 웃으면서 읽을 수도 있지만, 소설 속에는 우리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가 몇 있다. 과연 인간의 감정을 외부 요인에 의지해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또한 그런 감정조절이 된다면 왕따와 같이 피해를 보는 학생에게 기쁨 에너지를 쏘여 기분 좋게 하면 일이 해결되는가? 사춘기와 갱년기라고 꼭 지칭하면서 특정한 행동을 하리라고 예측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등등.


전삼혜가 쓴 '토끼와 해파리'는 슬프다. 물론 소설은 전혀 슬프지 않다. 이게 SF소설이 지닌 장점이기도 하다. 분명 슬픈 내용임에도 읽으면서는 슬픔을 느끼기 어렵다. 다만 읽고 나서 깊은 슬픔이 밀려온다. 


어렸을 때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 자기 또래와의 생활을 건너뛰고 어른이 된 모습. 그러나 지식의 발전 속도(우리는 어렸을 때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면 천재라고 찬탄을 하다가, 성인이 되어서 남들보다 특출하게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가 어렸을 때와 달리 어른이 되어서는 잘 보이지 않는 아이를 설정한다.


자기 또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을, 또래 아이들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건너뛴 아이를 천재라고 찬탄만 해야 하는지... 오히려 그런 아이일수록 또래와 함께 지낼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영화 '어메이징 메리'를 보라. 무엇이 행복인지,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소설은 그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홍지운이 쓴 '그냥 그런 체질이라서'는 사춘기에 사랑에 빠진 사람 이야기다. 사랑에 빠지면 흥분하기 쉽고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그 점을 용족과 결혼한 후손이라는 설정으로 (반인반수도 아니고, SF니까 가능한 설정이다. 그렇지만 재미 있다. 과거 우리나라 왕족들은 대부분 용들의 자손이 아니던가. 그러니 SF라고 없던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다. 전통의 계승이다. 이 소설은) 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불을 뿜어낸 소년 이야기다.


그냥 웃음이 난다. 그리고 그렇게 사춘기의 사랑은 앞뒤 안가리고 불붙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에서는 웃음을 유발하면서 넘기고 있지만, 자신이 조절 못하는 사랑으로 상대가 다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웃고 끝내는 소설이 아니다.


네 편 모두 사춘기에 겪을 만한 일들을 주제로 다양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래서 진지하게 읽기보다는 웃으며, 깔깔거리며 읽을 수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는 설정이다.


그렇게 웃으며 읽다가 무언가를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네 편의 소설에는 웃음 속에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일들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SF소설은 전혀 현실과 같지 않은 상상력 속에서 현실을 바로보게 하고 있으니...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이 소설집에는 재미 있게 읽고, 웃으며 알게 모르게 마음 속에 사춘기를 겪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조금 더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작품들이 실려 있으니,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 또는 사춘기에 접어든 사람들, 읽으면서 낄낄거렸으면 좋겠다. 낄낄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올라올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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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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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하면 로봇을 떠올린다. 인간과 다른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장착된 기술, 로봇과 인간의 융합. 그래서 보통 인간보다는 능력이 뛰어난, 초능력을 발휘하는 존재. 


그래서 사이보그와 장애인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몸이 다른 존재와 결합되었을 때를 사이보그라고 하면 장애인은 사이보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사이보그라고 불러도 될까? 그렇게 부르자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장애인 하면 결핍, 부족, 부끄러움, 가려야 함 등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뭘 하면서, 그대로 다른 사람과 같이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책에 치료하는 약이 나와도 안 먹겠다는 장애인 활동가 이야기가 있다. 


이런 모습들은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 아니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일 수도 있겠다. 소위 정상인(정상, 비정상 개념으로 다가가면 장애는 결핍으로,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통상 쓰는 말이니 여기서도 쓴다면, 알으로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말로 통일하겠다)들도 자신을 다양하게 바라보는데, 때로는 만족해서, 때로는 불만족스럽게 보고 있으니,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때 그때 따라서 장애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르다. 비장애인도 마찬가지고.


사이보그가 되다에서는 다양한 관점이 나타난다. 무엇이라고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아니 규정할 수가 없다.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도 사회에서 지낼 때 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 없다. 하물며 다양한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라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장애를 완전한 비장애인처럼 해주는 기술이나 약, 수술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장애인으로 불편하게 살아가지만 첨단기술이나 의약, 수술 등을 거부하고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장애인인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 장애에 대한 관점, 기술에 대한 관점을 하나로 통일시켜서는 안 된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여 읽다보면 장애에 대해서 그간 생각을 하지 못했던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이 지내기에 어떤 환경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예전보다는 많이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본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정말로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많이 만나는가?


산책길에서, 또는 자전거도로에서 장애인을 만난 적이 얼마나 있던가? 길거리는 비장애인도 걷기에 위험하지 않나? 자전거도로에서 장애인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경우는 참 드물지 않나? 패럴림픽에 사이클 종목도 있던데...


여기에 이 책에서 나온 지적이 가슴에 콕 박혔다. 소설 속에서 과연 장애인이 얼마나 나오는가? 소설을 사회의 축도라고 하면서 그 소설 속 인물들 중에 장애인이 얼마나 되는가? 영화나 드라마는? 인간승리를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다른 주제를 전달할 목적이 아니면 장애인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비장애인들이 주변에서 장애인을 잘 못 보는 현실이 예술 작품에도 이렇게 나타나 있다. 이런 면도 지적하고 있지만, 과학기술로 장애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말... 과학기술이 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고, 계속 개발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서 장애인들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회, 즉 다름으로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많은 면에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온 몇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이 인용문들을 곱씹으며 장애인에 대해, 또 장애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각자의 몸을 둘러싼 테크놀로지와 세계를 관철하면서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이보그가 되는지 묻는다.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테크놀로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테크놀로지와 사회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 상상하고 제안한다. (5쪽. 전치형의 추천의 말에서)


나에게는 말소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전환해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35-36쪽. 김초엽)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63쪽. 김원영)


테크노에이블리즘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손상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개인에게 기술적 지원이나 교정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것을 혹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86쪽. 김초엽)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지만, 우리 모두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101쪽. 김원영)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연결들의 거점에서 등장하는 사이보그적 존재는 그 연결들 때문에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그 연결들을 지탱하고 견딘다는 점에서(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약간은 변형된 의미로 인용해본다면) "청테이프처럼 영웅적이다." (113쪽. 김원영)


사이보그 신화는 사이보그의 현실이 기계와의 불완전한 동거, 즉 불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138쪽. 김초엽)


완벽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은 기술과의 융합과 불화가 실제 사이보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39쪽. 김초엽)


장애인 사이보그들은 자신의 삶에 기술을 도입해 일상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기술과 불화하고 기술과 관련된 정상성 규범과도 불화한다. (144쪽. 김초엽)


신체 손상에 따른 기능을 보완하되 주목은 덜 받는 디자인은 오랜 기간 장애인을 위한 보철물 제작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이는 지금도 인공 보철 판매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다. (154쪽. 김원영)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dis-ability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따라서 고도로 발전한 테크놀로지가 기능의 결여를 보완한다 해도 여전히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 (155쪽. 김원영)


어떤 기술이 반드시 억압적이거나 해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과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관계 맺는 맥락이 중요한 것이다. (182-183쪽. 김초엽)


기술 지식의 생산자들이 무엇보다 장애인의 필요를 중심에 두고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으로 목적으로 하며, '따뜻한 기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200쪽. 김초엽)


장애인은 심리스-스타일의 세계 안에 끊임없이 '이음새'를 만드는 존재다. 많은 것이 자동화되고 인간 행위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늘 거기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주는 존재가 장애인이다. (248쪽. 김원영)


기계-다른 인간-동물과 결합할 때 더 효과적으로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하나로 움직일 때,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휠체어와 결합하고 다시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활동지원사와 접속할 때, 그 사에서 발생하는 많은 어긋남, 불화, 이음새의 단차를 넘어 결합해본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미래에 '증강해야 할' 역량이다. (250쪽. 김원영)


개인을 교정하는 것으로 장애를 해결하는 대신 환경과 접근성의 문제를 고려해 다른 세계를 설계한다. 장애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미래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는 미래가 ... (268쪽. 김초엽)


인류가 그보다 현명하다면,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고 또 서로 적응해가며 같이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인간으로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는 대신 이 사회 속에 다른 존재들의 자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275쪽. 김초엽)


장애는 그 사람의 삶에 새겨지는 경험이며, 치료가 반드시 답이 될 수는 없고, 어떤 이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277쪽. 김초엽)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장애인의 몸으로 물질세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는 구체적인 경험이고, 그 경험은 개인의 자아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278쪽. 김초엽)


우리는 어떤 사람과 하나의 시공간을 점유할 때에만 이미지와 소리에 제한되지 않는 풍부한 총체를 경험할 수 있다. (299쪽. 김원영)


기술의 발전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장애 정의와 접근성이라는 원칙이 기술의 핵심 가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 비판을 통한 개입, 장애 당사자의 지식 생산, 접근성 원칙의 의무화 등 시스템의 변화가 모두 적극적인 개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50쪽. 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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