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
김덕일 지음 / 상상창작소 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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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정도는 서로의 경계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관계.


하지만 인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자연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종의 번식이 왕성해지면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다른 종의 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공간의 줄어듦. 줄어들어도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 줄고 줄어 결국에는 생존에도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한 종의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종들의 생존에 문제가 된다.


이렇게 다른 종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종. 인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예전 왕들은 백성들의 안전과 생활을 위해서 자신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적어도 말만이라도 그렇게 했는데, 또한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시늉을 내서,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게 하지는 않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다른 종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인류세라는 말이 굳어지지 않도록, 지속가능이라는 말이 정말로 지속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여전히 인간은 성장 신화에 갇혀 있다.


성장, 성장이 안 되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해마다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하는데 문제는 지구가 유한하다는 것. 즉 정해진 공간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성장한다면 다른 종들이 살아갈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심지어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


그 중 하나가 바로 '숲'이다. 숲을 없애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들이 지속되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산림이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런가.


여전히 우리나라는 숲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 줄어들고 있다. 줄어들어서 인간의 경작지로 변하든지, 주거지로 변하든지, 그도 아니면 인간의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 


그 변한 곳에서 살아가던 종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고, 숲도 제 기능을 많이 잃어간다. 그런 변화, 그것을 사진으로 담은 작가, 그가 바로 김덕일이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년 동안 그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논과 밭과 그곳에 있는 무덤, 그리고 숲의 사진이다.


이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점점 그러한 공존에서 인간의 영역은 넓어지고, 자연의 영역은 좁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중에서 찍은 사진들. 사진으로 보고 멋있다 할 수 있겠지만, 점점 줄어드는 숲을 보면서, 또 숲을 파헤치고 파괴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냥 멋있다고는 할 수 없다.



밭과 숲, 그 사이에 있는 무덤은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진처럼 숲의 한 가운데를 파괴한다면 과연 이것이 공생일까?


인간이 살기 위해서 자연을 어느 정도는 침해할 수는 있지만, 자연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지경까지 가면 인간도 살기 힘들어진다.


이 사진집을 보면 마냥 멋있다고만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영역이 이처럼 자연의 영역을 계속 잠식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 공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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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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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 속에서 쾅 쾅 치고 있는데도 오히려 방음벽을 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계는. 가자의 비명 소리, 이 소설을 통해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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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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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단지, 야자 중 ××금지, 낭인전, 풀각시, 교우촌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괴력난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괴력난신,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그냥 귀신 이야기라고 하면 될 것을.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를 귀신의 소행인가 한다. 귀신, 괴력난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 아니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아니, 현실에 좌절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를 불러낸다. 도저히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려는 마음.

 

그러한 마음들이 귀신을 불러낸다고 보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귀신 또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들은 모두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이 된다.

 

성주단지에서 주인공은 저는 귀도 보고 신도 보았던 거예요’(42)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또는 알 수 없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에게 귀신의 해코지가 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귀신은 누굴까? 교제 폭력(데이트 폭력이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나?)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단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끝없는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런 여성들에게 교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귀()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다. ‘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누가 이 귀를 막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막아주는가?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이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이끈 것은 바로 주인공의 행위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의지, 행동이 귀신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성, 능동적 대응이 나머지 소설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문을 열 수 없을 때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을 부수고 나오는 주인공. 이는 자신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그 한계를 남들이 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닫혀 있으면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없다면 문을 부수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다른 존재도 보았기를... 문을 여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 사람의 마지막도 지켜보지 않았을까? 목검으로 문을 부숴버리던 모습을? 정말로 그러했다면, 아영은 소녀도 같은 방법을 쓰기를, 그곳에서 나오기를 바랐다.’(113)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소녀는 아영과 친구들이 다른 세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다. 자신도 그쪽 세계로 넘어와 갇혀 있었으므로... 상대의 어려움을 알기에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존재이기에, 아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으로 그 소녀 역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연대 의식, 약자들의 연대 의식이 드러나는 소설이 풀각시. 화려한 영화 뒤에 감춰진 다른 존재들의 고통. 그렇게 고통을 약한 존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존재들.

 

하지만 약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연대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고통받더라도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행위를 한다.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더욱. 이런 연대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구하게 된다.

 

살을 날린다는 것은 그 살을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팔을 자를 때는 당연히 내 몸도 잘릴 것을 각오해야지요. 같은 팔이 잘리지는 않더라도 어딘가는 잘리기 마련입니다.’(229)라는 말.

 

이렇게 자신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연대다. 상대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에. 이러한 연대를 통해 고통은 잊힐 수가 없다. 잊히지 않기에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래, 꼭 당사자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모습이 김이삭의 이 소설집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낭인전도 마찬가지다. 변강쇠전을 비튼 소설인데, 옹녀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렇다. 늑대인간이든 유랑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사회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오래갈 수가 없다. 이는 교우촌이라는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던 조선 후기. 그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

 

하지만 다름으로 괴물을 만들어내면 그 괴물에 먹히는 것은 결국 자신들일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천주께서 저희 마을을 정말 가련히 여기시나 봅니다. 특히 굶주리는 아버지를요.’(276)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존재를 괴물로 취급하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괴물임을, 따라서 자신 역시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점을 잘 안다.

 

하여 여성들은 내 안의 괴물을 키우지 않는다. 남들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가 괴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저항한다. 홀로 또 함께...

 

이렇게 이 소설집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즉 괴력난신이든 귀신이든, 그러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사회에서 권력을 쥔, 남들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좇는 이들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약자들이 연대를 통해서 또 자각을 통해서 괴력난신에서 벗어나 삶의 당당한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주체로 서는 여성들의 모습.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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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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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도 슬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할, 상대를 사랑하기에 상대의 죽음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우리나라 법으로는 불법인.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언젠가 온다. 그 언젠가를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에 행복할 수도 있지만, 모르기에 더 두렵기도 하다.


잠을 자듯이 죽음에 이르기를 꿈꾸지만 그런 사람은 만에 하나도 드문 경우.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과정을 고통 속에서 (이 놈의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질병이 유발하는 고통이란 놈도 의학의 발전에 비례해 증가하고 있으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읽고 우리나라에도 조력존엄사법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저자들의 주장처럼 이 법과 더불어 호스피스법이라든지 다른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법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아직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다른 여러 제도들조차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조력존엄사법이라니? 하는 생각도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조력존엄사법이 현대 사회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에서 이 책을 언급했기 때문인데... 저자의 경험이 묻어났기에, 더욱 실감이 나는 그러한 이야기.


엄마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딸. 이런 딸도 엄마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데, 거의 평생을 함께 지낸 남편인 아버지는 어떨까? 딸은 나중에 아버지가 왜 조력존엄사를 반대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된다.


아내의 고통을 가까이서, 날마나 지켜봐야 했던 남편으로서 그런 고통 없는 세상으로 아내가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러면서 외국에서 조력존엄사법이 통과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의사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의사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지만 살릴 수 없는데 고통만 지속되는 환자를 보면서 그들은 의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돈이 개입하지 않는다. 연민, 사랑이 개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은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무엇이 최선일까?


사람은 누구나 살려는 욕망이 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아니다. 옛말에 어른들이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은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람은 살고자 한다. 죽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꾸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대 의학으로도 줄여주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 그렇다고 고통과 함께 계속 살 수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들은 곧 죽음에 이른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1-2년 내에. 어떤 사람은 더 빨리.


이미 그들은 죽을 때를 알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때까지 견디기에는 고통이 너무도 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 이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우리나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환자는 고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법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법을 제정한 나라에서는 그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가 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가족의 선택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로 또 자신의 행동으로 선택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에게는 견디지 못할 슬픔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슬픔. 하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보다도 환자인 당사자의 고통이 더 심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는 법. 하여 엄마와 딸은 스위스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는 외국인도 조력존엄사를 할 수 있도록 받아주는 곳이 있으니까.


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에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는 현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마음. 그럼에도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엄마는 스위스에 가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115쪽)


죽음보다 무서운 고통, 아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기에 그런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엄마의 말. 딸은 가슴이 미어지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엄마와 헤어지고, 엄마와의 이별을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 딸. 그리고 남편인 아버지.


그러한 과정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엄마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존엄하게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스위스에 가는 과정과 죽음을 촬영하도록 허가한다. 그것이 생명을 경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하는 행위라고.


엄마의 말.

"다른 환자들이 나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194쪽)


어느 행사에서 딸이 한 말. 

"조력사망을 막는 것이 오히려 생명 경시입니다." (260쪽)


엄마의 죽음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한 딸이 한 말. 이런 죽음을 과연 생명 경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력 사망 아닐까?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위해 그들의 목숨을 끊어주는 행위가 나올 때가 있다. 이 때 사람들은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명을 경시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존재를 고통에서 구해줬기에 사랑을 실천한 고귀한 행위라고 한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서는 그런 행위를 칭찬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보면서 어째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영화나 문학에서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어째서 그들에겐 연민을 품지 않는지.


아직도 우리나라는 존업사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을 보면 의사, 변호사, 그리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존엄사법을 제정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많은 사람, 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정말 무엇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인지... 여기에 이 글을 쓴 딸도 분명히 말한다. 존엄사법과 완화치료 빛 다른 치료법도 함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나 어느 것을 먼저 해야지만 다음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진한 슬픔이 밀려오는, 그러나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이 흘러넘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진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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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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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이제 현실과 상상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아니 상상이 바로 현실에 나타난다. 지브릴의 꿈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은 지브릴의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브릴은 아니다.


자신의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통해서 참차와 다시 만나게 되고, 당시 영국에서 자행되고 있던 차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런 차별에 항의하는 사람들, 이를 환상 속에서 불길로 응징하려는 지브릴. 그리고 그런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참차.


이상하다. 왜 참차는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 하고 있는가? 자신은 영국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영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있는데, 또한 영국인 아내에게 버림받고(?) 있는데, 지브릴은 영국인이 되려는 생각도 없거니와 영국인(유대인이지만 국적인 영국인이고 또한 백인이니)과 사랑을 하고 있으니...


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증오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참차는 자신의 복수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무리 영국인을 비판하고 또 추앙하더라도 참차와 지브릴이 지닌 차이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들에게 추앙을 받더라도 이방인이다. 


중심부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중심부에 들어가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포함,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인도라고 하면 되겠다)에서 가능한 일이다.


참차가 아무리 영국인이 되려 해도 참차는 인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차가 인도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참차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


하지만 지브릴은 돌아와도 살지 못한다. 그는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도에서도 지브릴은 스스로 세상을 뜬다.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


이런 결말로 가기까지 지브릴의 꿈을 통해서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신념.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이성을 버리고 나아가는 사람들. 환상적인 이야기. 그들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시... 타락을 유도하는.


그러나 악마의 시는 인간의 타락을 유도하지만 결국은 인간은 자신의 신념, 생활을 회복하려고 한다. 


이런 과정. 환상적인 과정, 이것을 해설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했는데, 왜 사실주의냐면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분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수많은 차별들.


그러한 차별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 탄압. 폭력. 시위. 종교적 갈등이 참차를 통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고, 지브릴을 통해서는 환상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작가는 참차와 지브릴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자신을 잃고 남이 되려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것, 참차의 모습을 통해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좀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소설이다. 작가의 신상 문제는 차치하고, 작품 자체만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운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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