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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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 소설집이다.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작품이 나오면 읽어보려고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번 작품집에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 앞부분에 실린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는 내용이 통한다. 작중 인물이 겹치기 때문이기도 한데, 주로 세월이 흐른 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 겪었던 격정을 이제는 잊은 나이. 그럼에도 과거의 격정을 기억하는 나이. 그때 겪은 일들을 용서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상처를 지니며 살아가는 인물들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들에서 중심은 알핀랜드라는 창조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갈등을 겪지만 그들의 모습이 소설 속 알핀랜드에서 다시 구현되고 있고, 그러한 알핀랜드로 인해서 현실 속에서는 더 심한 갈등, 심지어 살인까지도 가능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


문학이 하는 역할. 자신의 삶을 새로운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나머지 소설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데, 그럼에도 공통점을 찾으라면 젊은 나이의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은 나이든 사람들이다. 이제 애트우드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년배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이 들어서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의 치열했던 갈등들이 어느 정도 무마가 되는, 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나는 소설들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보복을 하는 소설도 있다. '스톤 매트리스'가 그렇다. 살인 사건을 다룬다. 발견되지 않는 살인 사건. 그러나 이 살인에는 동기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성과 그 남성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여성이 나온다.


나이들어 만나게 된 둘. 남성은 물론 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린 시절 여성은 그 남성의 성적 노리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이 중요했고, 욕망을 채운 뒤에는 거기에 따른 책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 오히려 자기 욕망의 결과를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기만 했을 뿐.


이는 남성우월주의 세상,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으니.


시대가 변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그가 반성을 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쳤다면 아마도 여성은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사회분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 그러나 자신의 과오를 깨우치고 고쳤다면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남성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그는 자기 욕망 충족 욕구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신 외의 여성들은 모두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바뀐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그에겐 죽음이 다가올 수밖에. 


이러한 살인을 다룬 소설도 노년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좀 낯선 소설이 있다. 노년의 삶이 좀더 이해의 폭이 넓은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살벌하다.


노인들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진다. 노인들은 먼지 더미에 불과하다. 그들이 살아온 삶 전부가 부정당한다. 그들은 짐조차 되지 않고, 털어버려야 할 먼지 더미에 불과해진다. 그것도 젊은 이들에 의해서. 소설 속에서는 아기 가면을 쓴 인물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행위에 경찰 등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이는 노년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사회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세대 갈등을 넘어,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회가 손을 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화가 아닌가 한다. 노인들은 과거의 행위로 안락하게 살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직업을 갖지 못해 힘들게 살고 있으니, 그 노인들을 치워야 젊은이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 잘못된 행위. 그러나 이를 개인의 갈등으로 몰아가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권력. 


그렇다. 어쩌면 세대 갈등을 공권력이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코 세대들끼리 갈등이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임에도 이를 조장하고, 조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애트우드의 소설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다른 소설들도 있지만, 모두 노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소설은 과거의 신산한 삶을 넘어 조금은 여유로워진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도 이렇게 노년에 조금 여유럽고, 이해심이 많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세대갈등이 일어나게 그냥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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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 -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문예창작이론 강의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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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된 책이다. 문학이론이야 원래 어렵지만, 이 책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던가? 왜 구입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작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인리히 뵐 역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니까.


짧은 글들이 실려 있다. 문학에 관한 그의 생각. 전후 독일문학에 대한 생각 등등. 밑줄을 칠만한 구절은 꽤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콕 박히지는 않는다.


이미 시간이 꽤 흐른 문학이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일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까. 그러니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지만... 몇몇 마음에 드는 구절.


'좋은 눈은 작가의 연장 중의 하나이다.' (15쪽)


그래 작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것도 편향되지 않은, 사람을 위하는 쪽을 볼 수 있는 눈. 권력을 향한 눈이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눈. 자신이 창조하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래서 이 말을 뵐은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물이 똑똑히 보인다. 그가 사물을 똑똑히 보게 마련이다. 사물은 언어를 매개로 똑똑히 보고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의 눈은 인간적이고 절조가 있다.' (19쪽)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건 위대한 말이다. ... 나쁜 걸 만들었다고 예술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모험을 무서워하는 순간에 예술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25쪽)


어떤 작가들은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쓰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썼다고. 그렇다. 뵐의 이 말은 쓰는 수밖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고, 자신은 예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이럴 때 모험은 필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 그것이 예술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작가가 권력자에게 굴복하고 심지어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절도 이상의 죄를 짓는 것이다. 살인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33쪽)


그렇기에 작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이 써야할 것들을 쓸 수밖에 없다. 이때 권력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다. 이런 작가에게 누가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절망의 시기에 문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 아도르노가 비슷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뵐은 절망의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문학은 절망을 받아들이고,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보여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절망이 문학에서 표명되면 그것도 질적 차이점이 있다. 절망은 세로의 y축만으로는 값어치가 없다. 가로의 x축인 책임을 합쳐야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이란 크나큰 말이다.' (63쪽)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작가를 고르라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아닌가 한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많다. 최인훈, 황석영 등등. 그렇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논란이 된 한강의 작품들이 있으니... 바로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서 절망의 y축과 x축이 만나는 점을, 아니 그들이 속한 사분면을 만나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을 다한 작가가 바로 한강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작가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 개인, 역사 속 개인이기도 하다. 그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나를 한 개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 한 세대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일 그리고 보고 들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다.' (80쪽)


이러니 작가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앞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문학이 에로와 섹스 그리고 종교와 사회 문제를 떠맡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고 패배하는 곳에서는 바로 작가들의 책임 있는 말이 필요하다.'(87쪽)고 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있는 현실로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108쪽)는 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저항을 많이 할수록 더 잘 쓸 수 있다.'(152쪽) 이때 저항을 권력에 대한 저항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관습, 틀, 고정관념 등 그러려니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있는 것 뒤에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저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저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몇몇 구절들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면 됐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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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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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된 소설에서 '빛'을 생각한다. 그냥 빛이 아니라 희미한 빛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는 너무도 멀고 작아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 또 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빛. 둘 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그 빛은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이러한 '희미한 빛'이 아닌가 한다. 제목이 된 소설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서 빛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몫, 일 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이러한 빛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마지막 소설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빛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빛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왜 서로 다른 매체에 발표된 단편소설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들에서 '빛'이 '볕'이 되는 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보이는 빛이 볕이 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순간이 있었음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소설들에 나온 어떤 인물들에게서 이러한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빛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크지도 않다. 위대한 빛, 누구나를 다 비추는 그러한 빛이 아니다. 희미한 빛이다. 내게 다가온, 나를 이끌어준, 그래서 어둠에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해준 빛이다. 나를 이끌어준 빛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빛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삶은 모두 개인적이다. 개개인의 삶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그렇기에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서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에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겪는 기쁨, 고통도 다 사회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나를 이끈 희미한 빛은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사회가 어두울 때 더욱 나를 이끌어준다. 어둠 속에 묻혀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빛. 그 빛은 희미한 빛일지라도 나를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 계속 가게 한다.


그리고 그런 희미한 빛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깨닫게 된다.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사회가 조금씩 발전해 왔음을. 개인이 어둠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음을.


이런 빛은 볕이다. 온기를 지니고 있는. 단지 밝음만이 아니라 온기를 지니고 있는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은 나를 감싸준다. 따스함에 감싸인 나, 남을 감쌀 수 있다. 그렇게 빛이 볕이 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따스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게 된다. 기댈 수 있는 존재가 한때라도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음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나를 이끌뿐만 아니라 포근하게 감싸주는 존재들이 우리 삶에 있었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희미한 빛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따스한 볕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까지 그러한 존재가 되어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소설을 통해 다짐을 한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에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빛이 되고자 하는 존재는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남에게 곁을 내어주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마음에 남아 계속 볕의 온기를 지속시킨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빛이 볕이 되어 온기를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이는 한 세상은 어둠으로만 차 있지는 않게 된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라도 빛나는 빛들, 앞을 보게 만들어주는 빛을 생각했고, 그 빛들이 우리에게 전달에 주는 별의 온기를 생각했다.


세상은 차갑고 어두운데, 최은영의 소설은 차가움 속에 따스함을, 어두움 속에 밝음을 지니고 있다. 짧지만 이러한 빛과 볕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파종'이라는 소설에 나온 '삼촌' -소설 속 화자에게는 오빠-이 아닌가 한다. 곁에 있어주면서 삶의 자세를 보여준 존재. 바로 이 존재에게서 빛과 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를 만나게 되지만.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빛과 볕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누구일까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게 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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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향하여
존 버거 지음, 이윤기 옮김 / 해냄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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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다. 부드럽다. 문장들이 간결하다. 물론 영어로 읽지 못하고 번역으로 읽었지만, 번역으로 읽어도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문장의 아름다움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간결한 문장에는 길고 긴 역사가 담겨 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역사도.


결혼을 향하여... 죽음을 향해 가는 줄 알면서도 결혼하려고 하는 한 쌍이 있다. 아니, 여자가 거부해도 남자가 한사코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시간을 조금 늘려보면 이해가 된다.


어차피 우리는 죽는다. 죽음을 향해 살아간다. 그 시간이 길거나 짧을 뿐이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 그렇다고 방탕한 삶을 산 것도 아니다. 우연히 걸렸을 뿐이다. 사랑의 결과라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한 질병이다. (지금은 에이즈를 완치하지는 못해도 만성질환 정도로 여길 수 있게 치료제가 개발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소설은 19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이니, 그 당시 에이즈는 죽음으로 가는 질병이었다)


사귀던 친구 지노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니농. 하지만 지노는 니농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차피 사람은 죽는다. 죽기까지 사랑을 하면 되지 않는가. 지농은 니농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결국 니농의 허락을 받은 지노.


여기까지만 보면 그냥 청춘의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니농에게는 체코인 엄마가 있다. 체코 민주화 운동과 관련이 있는, 체코로 돌아가 오랜 시간 다시 돌아오지 못한 엄마. 여기에 철도 신호원인 아빠가 있고. 이들 역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다. 즉, 이들은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노력을 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헤어진 뒤 만나지 못한다. 니농을 아빠인 쟝이 키운다. 그리고 딸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대사의 비극에 개인의 비극이 중첩이 된다. 소설은 이들의 결혼식을 향해 가는 아빠인 쟝과 엄마  제나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그런데, 이들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눈이 먼 사람이다. 눈이 먼 사람. 한때는 눈이 멀지 않았는데, 눈이 멀었다는 것은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사상만으로는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현대에 적응하기에는 무언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 장님인 서술자가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일인칭으로 니농이 서술하기도 하니까.


니농과 지노의 결혼식을 정점으로 쟝과 제나가 각각 오게 되는 과정, 오면서 그들이 겪는 일들과 과거의 일들이 서술되면서 현대사가 개인의 삶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런 역사가 짧고 간략한 문장, 아름다운 서술로 마치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래서 니농의 결혼식은 이들의 만남뿐만 아니라 행복의 극치를 보여준다. 분명히 다가올 비극은 현재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비극은 비극일뿐, 그것이 현재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 지금 이러한 행복을 위해 꾸준히 오게 된 것. 이것이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라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죽을 병에 걸렸다고 헤어짐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어서 좋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결국 만남은 이별로 끝난다. 그러니 만남과 헤어짐은 보편적인 인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시간의 길이로 판단해서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을...


행복은 결코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는 점을... 사랑을 하는 동안의 시간은 영원임을, 그 영원이 서로의 삶을 이어주고 하나로 되게 만들었음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질병에 대한 편견, 그로 인한 사람에 대한 배척,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이 소설을 읽으면 느낄 수가 있다. 에이즈에 걸린 니농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를 사랑하는 지노가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지, 그러한 둘의 사랑을 응원해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 공동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사랑하면서 세상을 살아감을, 그것이 인생임을, 이 소설을 [결혼을 향하여]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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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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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이다. 책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다. 한강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강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작품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그곳에서 소개한 한강 작품이었기에 구해 읽게 된 것.


물론 황순원이라는 작가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했고, 교과서에서 그의 '소나기'와 '학'은 물론이고 '목넘이 마을의 개, 독짓는 늙은이' 또는 '움직이는 성' 등도 알았고, 읽은 적이 있으니, 황순원 작가의 이름을 단 문학상을 탄 작품이라면 하는 믿음도 있었다.


읽은 소감은 당연히 좋았다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들도 좋았고. 어느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물론 단편 소설이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경우가 많아, 내가 그 작품을 읽었던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읽는 순간과 읽은 뒤에 내 마음에 남아 나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되어 있다고 믿고 있으니.


한강 작품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이다. 이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순간일 수 있다. 사실 눈 한 송이는 금방 녹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녹아버린다. 그렇지만 그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이 아주 길어질 수 있다. 안 녹는다고 느낄 정도로...


제목만으로는 순간인지 영겁인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을 순간이라고 보기도 하고, 아주 긴 시간이라고 보기도 하니 말이다.


소설에는 영혼이 등장한다.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 그 영혼은 맑은 영혼이다. 원망을 하는 영혼이 아니라 세상을 잘살고 간 영혼이다. 그런데 세상을 잘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소설은 바로 '잘살다'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결혼을 하면 퇴직을 하게 하는 회사. 결혼을 해도 버티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나가게 만드는 회사. 그것을 바라보는 동료들.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닐 수 있다. 선명한 악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회사를 설립한 사람을 악인이라고 하면 되지만, 그는 그 회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료들이 나올 뿐이다. 동료라고 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같은 사건이란 없다. 모두가 자신의 처지에서 다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뿐이다.


여기서 과연 '잘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를 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이 있을까? 그냥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을 배려하는 삶. 그러나 그 배려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또 과연 그 배려를 남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우리가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을 삶을 살아갈 뿐. 그것이 '잘산다'는 의미 아닐까.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한 사람, 잘살려고 한 사람은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한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용납하기 힘들다. 사고든 질병이든 그들은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잘살았다'는 말을 하게 된다.


자, 이들이 잘살았던 기간은 짧았는가, 아니면 길었는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그들은 잘살기 위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졌을 테고, 그 시간은 무척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을 한 다음에는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행동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 지니는 시간은 어떠할까? 그들을 보는 시간이 짧을수록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냥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잠깐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을까. 


반대로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는 시간이 긴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의 삶에 대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는 시간,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시간, 그러는 시간 동안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무척 긴 시간이 될 것이다.


해결이 안 되었으므로,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그러한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 동안은 괴롭고 힘들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간. 나에게 눈 한 송이가 녹는 시간은 어떤 시간인가 생각을 한다.


다른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이 되면 하고,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한강의 작품을 계속 음미하련다. 이 작품도 한강의 다른 작품들처럼 마음에 남아 쉽사리 나가지 않는다. 자꾸 곱씹게 만든다. 이것이 문학의 효용성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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