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멀리 뛰기 - 이병률 대화집
이병률.윤동희 지음 / 북노마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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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지 못한다.

단지 그의 시집 두 권을 읽었을 뿐.

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마음에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만 지니고 있을 뿐.

두 권의 시집을 읽고 다시 그 시집을 펼쳐 보아도 비슷한 시에서 눈길이 멈춘다.

마음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나 보다.

아직은 이병률 시집을 다시 펼칠 때가 아닌가 보다.

대화집을 읽었다.

이병률이란 시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울림소리들이 반복되는, 무언가 그 이름을 부르면 울림이 느껴진다.

어던 종교에서 '옴'이라는 말만 외워도 좋다는 말을 본 것 같은데, 그렇게 '옴, 옴, 옴' 하다보면 마음에 어떤 울림이 생긴다.

마음에 파장이 생긴다.

그 파장이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이병률. 마찬가지다. 울림소리. 소리가 몸을 울리고 마음을 울린다.

시인 이름이 시란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이병률 시인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축축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시에서 받았던 인상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이름에서 연상이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축축하다는 표현이 무겁다면 촉촉하다는 느낌.

젖어있다는 느낌이 든다.

대화집을 읽으니 이병률 시인이 술을 좋아한다고 한다.

허, 역시 젖어 있군. 하는 생각을 한다.

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좋아한다.

젖어 있다. 사람 몸의 70% 이상이 물이라고 하니, 젖어 있는 것이 맞다.

젖어 있음, 물이다. 그런데 그의 시집 제목은 '바람의 사생활'이다. 바람, 불. 물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지만 대칭이다. 물과 불은 함께 존재해야 한다.

그가 여행을 좋아하는 것 이 대화집에 자주 나온다. 세계 곳곳을, 생각나면 훌쩍 떠났다고 한다.

낯선 곳에서 자신을 만나는 것. 여행의 묘미다.

그런데 대화집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런 자신을 남에게 다시 드러내 보인다.

대화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또 대화 상대라는 사진사를 통해 자신을 내보이게 된다.

대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 사진사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사진사가 포착하고 남기고 싶은 것을 찍어 사진으로 남기듯이, 대화자도 대화를 통해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을 끌어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대화자는 시인 이병률이 함께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읽어가면 된다. 이 책은.

그러면 자연스레 젖어든다.

이병률이란 시인에 대해서, 그가 하는 이야기에.

'안으로 멀리 뛰기'다. 밖으로가 아니다.

안으로 멀리 뛰기가 얼마나 힘든가?

특히 요즘처럼 온통 밖으로만 뛰는 세상에서는 더 힘들다.

온갖 매체들이 밖으로 뛰기를 강요하고 있다.

강요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밖으로만 뛴다.

여기에 반해 이병률은 안으로 뛰어야 한다고, 그것도 멀리 뛰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필요한 시절이다.

적어도 밖으로 뛰는 만큼 안으로도 뛰어야 한다.

인생은 대칭 아니던가.

안으로 뛸 수 있는 사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사람.

이 대화집에 나온 말처럼 서랍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안으로 뛰어야 자신에게 서랍을 만들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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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2
에릭 홉스봄 지음 / 한길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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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이 전세계적인 사건이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에 들어서 이제 혁명은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나라 혁명은 다른 나라로 퍼져 나간다. 그렇게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근대에 들어서 일어난 일이다.

 

그 이전에 한 나라에서 일어난 일은 한 나라에서 그치고 말았다. 어떤 일도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는 이제 세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홉스봄이 쓴 근대 역사 3부작을 읽기 시작했다. 먼저 '혁명의 시대'

 

당연히 혁명하면 제일 먼저 프랑스대혁명을 떠올린다. 이제는 보통명사처럼 쓰이는 그 혁명이 프랑스에만 머물지 않고 전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런 혁명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홉스봄은 두 개의 혁명, 즉 이중혁명 시대라고 한다.

 

프랑스대혁명 하나로 세계적인 사건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대혁명과 더불어 산업혁명을 들고 있다. 즉 경제와 정치가 맞물려 세계사적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정치경제학이 쇠퇴했지만, 1980년대에는 정치경제학이 붐을 이루었다.

 

정치와 경제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함께 간다는 것을 그 학문을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이다. 홉스봄도 마찬가지다. 경제혁명 없는 정치혁명은 오래가지 못하고, 정치혁명 없는 경제혁명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789년부터 1848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으로 경제구조가 개편되기 시작하고, 프랑스대혁명으로 정치구조 역시 달라지고 있음을, 그리고 이러한 이중혁명으로 예술, 철학, 과학, 종교 등 사회 각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고찰하고 있다.

 

신분제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중류층이 대거 등장하게 되는 시기.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자본가라 할 수 있는, 또는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또 부를 더욱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정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부의 축적을 방해하는 정치 구조를 개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가 영국에서는 비교적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면 - 물론 그 과정에서 영국 또한 피를 흘린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다만 프랑스대혁명과 같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 프랑스에서는 피를 부르는 혁명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경제혁명이 영국에서 먼저 일어났으며, 이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차이를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영국보다 늦은 프랑스에서는 다른 경제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고, 이것이 다른 정치혁명을 유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이 전세계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이다. 혁명의 이념을 지키려는 프랑스와 자국으로 그런 이념이 번지게 할 수 없다는 유럽 전제국들의 전쟁. 여기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혁명의 이념은 유럽 여러 국가로 퍼져가게 된다.

 

한번 번진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 다른 정치 구조를 엿본 사람들은 이제 과거에만 머물 수가 없다. 힘이 약해 현상태를 유지하더라고 그들의 눈은 이미 앞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다른 세계를 알게 되었으므로.

 

그러니 프랑스대혁명으로 촉발된 정치 개혁이 보수적이든 급진적이든 다른 나라들에서도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세계는 신분제 사회에서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도시빈민이 되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형성된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빈곤한 생활을 하는 사회로 변해가게 된다.

 

이들을 포요하는 이념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세계는 이제 귀족 중심에서 자본가 중심으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 변혁을 꿈꾸는 집단이 농민에서 노동자들로 옮겨가기 시작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중혁명이 유발한 사회의 모습이다.

 

방대한 저작인데... 과거를 살피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시대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살피면, 지금 인공지능 시대 또는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비슷한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온 혁명의 시대에도 그 시대를 거부하고 과거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 어쩔 몰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사람, 그 시대의 변화를 읽고 거기에 영합한 사람, 그 시대의 변화를 읽었으나 부정적인 면을 간파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했던 사람 등 다양한 인간 집단이 존재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혁명의 시대에 이어지는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읽으며 현재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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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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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읽기 두 번째.

 

이번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 소설이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해야겠다. 성장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성장소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까지만 이야기하고 있다. 더블린을 떠나려고 하는 장면에서 끝나고 있는데...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전개되면 좋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간중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자신의 의식을 가감없이 서술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의식의 흐름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조이스 소설이 읽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순간순간 생각나는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읽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다. 먼저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순간, 읽기에 지장을 받는지도 모른다.

 

아일랜드라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라는 민족주의를 벗어난 사람으로 조이스를 평가한다면, 이 소설에서도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거기에 완전히 동조하지 못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스티브 디덜러스. 디덜러스라는 성이 특이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를 영어식으로 변형한 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이달로스가 누구인가? 세상에 만들지 못할 것이 없는 장인 아닌가. 즉,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의 성을 디덜러스로 한 것은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는 민족주의와 더불어 종교와 교육이 성장의 주요인으로 등장한다. 당연히 성장소설이기 때문에 배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자각하는 상태, 그래서 자신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성장소설이고, 이 성장소설에서는 도움을 주는 조력자나 또는 환경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아일랜드 민족주의가 뿌리 깊에 박혀 있는 가족과 주변 분위기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스티븐과 여기에 그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는 예수회가 등장한다. 스티븐이 예수회 소속 학교에 다니기 때문이고, 그런 교육 속에서 한때 성직자가 되고자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학교 교육의 폐쇄성, 폭력성을 이 소설에서도 만날 수 있는데,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에서 받게 되는 체벌, 그 다음에 만나게 되는 지옥에 대한 장광설... 꼭, 체벌 다음에 벌점제로 학생들을 통제하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절대적 권위를 휘두르는 교사들, 하지만 그에 순종하지 않는 학생들... 에고, 참)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은 성직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유,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에 성직으로의 길을 포기한다. 그는 대학 생활 때 이미 작가로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렇게 자기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다보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가톨릭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환경에 빠지지 않고 자기 길을 찾아가게 되는 과정을 만나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가 작가로 서기까지, 어린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를 배경으로 쓴 소설. 조이스를 알기 위해 비록 소설이지만 이 작품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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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창비교양문고 32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정환 외 옮김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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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주 오래 전에 범우사에서 나온 소설 '율리시즈'를 사놓고,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책꽂이 어디엔가 꽂혀 있다가 자꾸 밀려밀려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 관심도 가지지 않은 소설이 되고 말았다.

 

이야기는 엄청 들었는데,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계속 들었는데, 막상 읽으려니 너무 어렵다는 생각. 지레 포기하게 만든 소설. 대충 이야기만 듣고, 다른 책에 실려 있는 해설만, 그것도 아주 짤막하게 쓴 글만 읽고 만 소설인데...

 

제임스 조이스는 언젠가 읽어야지 하고 미뤄둔 작가. 그러다 어떤 책을 읽다 조이스 소설을 읽으려면 먼저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으라고. 그 소설은 다른 소설에 비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써 놓은 글을 발견했다. 그래 이거야.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어야지. 그런데 이 책을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기억을 되살려 보니 도서관에서 지나쳐 가면서 본 적이 있다. 오래 전에 번역된, 창비에서 나온 소설. 문고본 크기로 나온 소설을 본 적이 있어, 마침 시간도 나고,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제임스 소설을 읽자 하고 도서관에서 가서 빌려온 책 두 권.

 

'더블린 사람들(창비)'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민음사)'

 

'더블린 사람들'부터 읽기 시작. 그래, 어렵지 않다. 뭐, 어차피 번역으로 읽는 건데,조이스가 쓰는 영어의 오묘한 맛을 알 수는 없지만, 번역본으로 전체적인 사건과 인물, 배경을 파악하는데는 지장이 없다.

 

총 15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고,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지 않는다. 아마도 더블린이라는 한 장소에 살고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소설을 통해서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이 겪는 일, 그리고 이들이 생각 등을 조이스가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형식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 찾으면 어떤 소설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이문구가 쓴 "우리 동네"나 양귀자가 쓴 "원미동 사람들"이 떠올랐다. 한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들 삶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

 

조이스가 쓴 '더블린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일랜드라는 나라,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은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한때는 번성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영국의 변방 도시다.

 

런던이라는 곳에 비하면 더블린은 퇴락해 가는 옛도시에 불과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자부심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들은 런던에 피해의식을,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퇴락해 가는 도시답게 사람들의 삶도 미래지향적이라기보다는 과거지향적(특히 '죽은 사람들'이라는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밝은 미래가 아니라 힘든 현실이 더 바싹 다가와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소설이 어두침침하지 않다. 우울하지 않다. 무언가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이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데도 그들이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것도 웃으면서 살아간다. 왜 너는 힘든데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냐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자신의 환경에서 그것에 맞게 살아가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에 잘 나와 있다. 이문구나 양귀자의 소설을 보라. 이들 역시 몰락해 가는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위성도시라고 하는 소도시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 역시 환경이 좋지 않다고 늘 찡그리고 살지 않는다. 그들의 삶에도 행복이, 웃음이, 즐거움이 있다.

 

'더블린 사람들'이란 소설도 마찬가지다. 퇴락해 가는 도시 더불린에서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오지만, 이들은 그 환경에서도 나름 잘 살아간다. 바로 이것이다. 이게 삶이다. 소설은 이렇게 우리들 삶을 보여준다.

 

조이스가 아일랜드를 떠나 세계인으로 살고자 했다고, 편협하게 아일랜드 민족주의를 고수하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것을 비판했다고, 더블린 사람들은 그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하는 해설도 있다는데... 물론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퇴락해가고, 사라져가야 할 것이지만, 여전히 더블린 사람들에게 남아 있음을, 그럼에도 새로운 세대들이 성장해 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실린, 아마도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소설인 '죽은 사람들'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게이브리얼의 연설 가운데 한 토막이 이를 말해준다.

 

'새로운 세대가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세대들입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대해 진지하며 열광적이고, 그들의 열정은 잘못된 방향일 때조차도 대체로는 진지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적이고, 또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사유로 고통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62쪽)

 

그러면서 그는 '저는 과거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겠습니다.'(263쪽)고 말한다. 그렇게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조이스 소설의 첫걸음, '더블린 사람들' 그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조이스가 난해하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이상이라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소설가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이상 소설을 배우고 읽는다. 조이스도 마찬가지다. 영국에서 중요 작가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읽는다고 하는데...

 

선입견을 버리고 그냥 소설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을 시도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라는 작가에 대해서 두려움을 조금은 떨쳐내게 한 소설집이 이 '더블린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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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둘리 2020-01-10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울 것 같아, 요즘엔 읽고 고민할 여유가 없으니 나중에 읽어야지..이런 식으로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도대체 몇 권인지....kinye91님의 글을 보고 새삼 생각하게 되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kinye91 2020-01-10 0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참 많아요. 그래도 언젠간 읽겠지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죠. 감사합니다.
 
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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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파업을 경원하는 시대가 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파업이 노동자들이 지닌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파업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불법, 과격, 폭력을 함께 연상한다. 그렇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파업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겪어왔던 일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 노동자들만이 겪었던 일일까? 아니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산업혁명 초기에 겪었던 일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런 일을 겪고서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는 파트너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그런 존재였을 뿐이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에 미국에서 일어난 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에 반대해 파업을 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어린이의 시각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그래서 일방적인 노동자들의 요구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가족이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두려움에 싸여 있는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빵은 당연히 필요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니까. 그런데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가 있을까?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장미도 필요하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파업 피켓에 이렇게 쓴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하지만 파업은 힘들다.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가진 것이 많은 자본가와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한데, 그 중에 제일 필요한 빵이다. 먹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오래 싸우기 힘들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가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고통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 굶주림은 고통 그 자체이다. 부모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하는 굶주림은.

 

빵만큼 필요한 것이 연대다. 노동자들의 연대. 소설에서는 다른 지역의 연대가 나온다. 아이들에게 휴가를 주라고, 자신들이 파업하는 기간 동안에 돌보겠다고.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는 빵만이 아니라 사랑이, 그리고 장미에 해당하는 교육이 제공된다. 노동자들의 연대로.

 

파업을 반대하는 아이의 관점에서 소설이 전개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가족들을 걱정하는 마음과 다른 지역의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모습, 파업을 잔인하게 진압하려 하는 자본가들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서서히 파업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간다.

 

여기에 어린 시절부터 노동할 수밖에 없었던 남자 아이가 함께 등장해 당시의 모습을 드러내고, 노동자로 성장해가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아직도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함께 누린다고 할 수 없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구별이 생겼고,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동자들도 많다. 지금도 아직 빵을 얻지 못한 노동자들이 있는 상태.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함께 노동자들의 삶에 들어와야 하는데... 오래 전 일을 다룬 소설을 통해서 지금을 생각하게 된다. 빵과 장미가 필요한 건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 모두의 삶에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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