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마법사 1 : 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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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았던가?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가, 아니면 짧게 요약한 요약본으로 읽었던가? 오즈의 마법사는 분명 아는 내용이다. 적어도 이 1권은.


허리케인으로 오즈로 온 도로시가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만나 여행을 하고, 결국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는 모험 이야기.


줄거리야 워낙 유명하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화답게 우연적인 요소도 많이 등장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이 동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상상 속에 빠지길 좋아하니까. 그런 상상 속에서 자신의 앞으로 살아갈 힘을, 방법을 은연중에 깨우치게 되는지도 모른다. 동화란 그런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직접적인 말이 환상 속에 펼쳐짐으로써 강요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냥 동화 속 인물들과 함께 모험을 한다. 그뿐인 것 같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무언가가 자신을 채우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허수아비는 뇌를 갖고 싶어하고, 양철나무꾼은 심장을 갖고 싶어하며,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이것들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모험을 하는 과정을 보면 허수아비는 충분히 지혜롭고, 양철나무꾼은 사랑이 넘치며, 사자는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는 이미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그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물할 뿐이다.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즈의 마법사가 준 선물이다. 이렇게 오즈의 마법사라고 해서 오즈의 마법사가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그 역시 서커스단원일 뿐이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그렇다면 지혜, 사랑,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발현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여기에 지혜, 사랑, 용기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셋을 아우르는 존재가 바로 도로시다. 순수함을 지닌 존재. 이러한 순수함을 지닌 존재는 외양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우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을 그대로 인정한다. 도로시가 지닌 그러한 태도 때문에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 역시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 수 있음에도 도로시가 고향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이는 나만의 목적 달성이 곧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 목적만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모두 달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여 위대한 마법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위대한 마법사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이제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다 읽기로 했다. 그냥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 다음 편엔 널리 알려진 1권의 내용과는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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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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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실화라고 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쓴 글. 글을 써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여기에 허구는 없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과 구분하려면, 이 작품에서는 '소설'이란 말을 빼야 한다.


'아이'부터 시작해서 '글을 쓰다'로 끝나는데, 글의 끝부분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 나온 끝에 글을 쓰게 된다.


글쓴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이어서였다. 너무나 오래전부터 빼앗겼던 나의 이야기(241쪽)'를 스스로 하는, 주체가 되어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이 때, 외로움에 싸여 있던 아이에게 친절과 사랑을 가장해 찾아온 사람. 그 사람은 그런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단지 성적 욕구의 만족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나쁜 놈 하면서 문제를 간단히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유명한 작가라는 것이고,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 자신이 만났던 소녀들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은 작품이라고, 현실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작가. 또한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소녀들을 자신의 올가미에 옭아맨 사람.


그에게 소녀들은 그것도 16살이 넘어서는 안 되는, 사춘기에 해당하는 소녀들(물론 아시아에서는 소년들도 포함이 된다)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도 먹잇감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그가 성 맹수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사자나 그밖의 맹수들이 사냥을 할 때 노리는 먹잇감이 무엇인가. 무리 중에서 약해 보이는 동물을 선택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이 책에 나오는 G로 표현되는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외로움에 빠져 있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소녀들을 찾아내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자신에게 성적 만족을 또는 그의 말대로 하면 작품에 대한 영감을 더이상 주지 못해서 그가 만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런데 이것도 자신이 먼저 소녀들을 내쳤을 때 이야기다. 자신이 소녀들에게 내쳐짐을 당했을 때, 즉 먹잇감에게 반격을 받았을 때 맹수들이 당황하는 것과 같이 그 역시 당황한다. 하지만 맹수가 당황한다고 사냥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끝까지 추적한다. G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만나려 한다.


만나려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헤어짐도 깔끔했을 터. 하지만 G에게는 자신이 내침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작품으로 또 타인에게 유포를 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이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G에게 당했던 일들이 글쓴이에게는 평생 따라다니는 상처가 된다. 학교도, 다른 일도 하기 힘든 상황. 이때 질문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외로움에 처해 있던 소녀들이 왜 중년 남성에 끌리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째서 그는 소녀들에게 끌리느냐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소녀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소녀들을 유혹해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승승장구한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2020년대에 들어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고, 글쓴이 역시 완전히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씀으로써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더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질문의 방향, 책임의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동의'라는 말, 두려워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경향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은 권위에 의한 폭력을 계속 용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 속에서 이런 책을 써서 문단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성폭력의 전말을 밝힌 글쓴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글쓴이 역시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문단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꽤 많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이 책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권위를 이용해 가해를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덧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 책에 관한 내용이 조금 소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G에 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G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 그 책을 읽어도 좋고, 그 책을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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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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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일들이 겹쳐 서술된다. 인물의 생각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주인공이 최면술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볼라뇨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꺼내려 했을까?


바예호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를 살려달라는 요청을 팽선생이 받는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이 팽선생에게 바예호를 포기하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예호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팽선생은 자신이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지니지만 바예호에게 두번 다시 가지 못하고, 바예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커다란 줄거리 안에 다양한 인물들과 일들이 중첩된다. 환상적으로 때로는 불명확하게 서술이 되고 있는데... 마치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카프카 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생각하면 불확실함이 주를 이루는 것이 맞겠단 생각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때. 사람들은 행복의 시대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을 하지 않았던가. 세계는 더더욱 불확실성으로 빠져들게 되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사람들 역시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런 시대에도 자기 확신을 지니고 살아가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팽선생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헤매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바예호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지만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를 이리저리 헤매는 팽선생의 모습에서 위기를 인식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인 팽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팽선생 역시 헤매고 있다. 헤맬 수밖에 없다. 그를 최면술사로 설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내면에서는 불안감이 작동하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행동하기 힘든 상태. 그러한 인물들.


결국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바예호는 죽고 마는데, 이는 스페인 내전에 이은 2차 세계대전으로 빠져드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볼라뇨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명확한 주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인물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흐릿하게 역사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살아간다면 어떤 결말에 처할지를 보여줄 뿐이지만, 그런 삶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격동기에 살았던 볼라뇨로서는, 그 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혼란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보라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게 흐릿하게 살아감으로써 결국 바예호를 죽게 만들지 않았냐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일관되지 않은 사건들을 배치해서 어지러운 현실을 소설 속에 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 역시 명확하게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혼란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소설 속 인물인 팽선생처럼 생각은 있으나 헤매다 끝나고 말면 안 된다고, 적어도 그 점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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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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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197쪽) 

절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양쪽을 다 편드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한쪽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작품도 평가가 달라진다면, 외적인 이유로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답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독재자였던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고 알려진 페터 한트케를 저자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한트케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까지, 아마 이 책에서 저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는 페터 한트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을 보면 작가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시간(역사)도 필요할 테다. 그러니 동시대의 작가를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을 그와 연결지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작가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는 예외다. 범법자를 저자 역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범법자들의 사고방식이 작품 속에 은연 중에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다. 범죄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작품이, 가령 나치의 학살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든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는 작품, 아동 성착취를 지향하는 작품 등등은 그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더더욱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작품은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론을 통해서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사상을 찾아내는 읽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그러한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고 또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관점이 달라지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적도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작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펼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작품은 작가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받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다. 작가가 잘못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작품 속에는 사람들을 끄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라는 메시지가 있기에 살아남는다. 그 무엇을 찾는 읽기,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를 한 작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으니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들) 읽기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거스르는,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공론장의 역할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도 적용이 된다.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작가가 잊혀지기도 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던 작품이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나 작가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작가란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작품은 그러한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독자들도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시대의 공론장 속에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인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할 테고. 그러한 작품은 역사의 심판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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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하롤드 영감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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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무슨 범죄소설 같다.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다니. 읽어보니 내용을 알려주는 제목임은 확실한데, 원어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노르웨이어로 saganatt라고 했단다. '전설적인 밤 또는 신화적인 밤'이라고 해석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을 했다면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붙였으니, 이것이 번역의 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롤드 영감은 어느 날 길을 나선다. 이케아 사장인 잉바르 캄프라드를 납치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이케아가 시장을 잠식해 자신의 가구 가게가 망했기 때문이다. 공존을 하지 못하고, 소상공인들을 잠식해가는 거대자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가 망했으니,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으리라.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길, 엄청나게 내리는 눈. 여정에서 만난 젊은 소녀 엡바. 엡바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납치하지만, 엡바가 더 말려들길 바라지 않아 엡바는 보낸다. 즉 자신의 일을 젊은이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이케아 사장 역시 나이든 사람. 납치범이나 납치된 사람이나 '가구'를 판매한다는 점과 자식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배경과 사업을 하는 방향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다음 그에게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게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오. 가구점을 하는 사람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하오." (194쪽)

"나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움이 더욱 깊어지는 가구를 팔았고, 당신은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망가지는 쓰레기 같은 가구를 팔아 왔소." (194쪽)


하롤드 영감은 단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도 함께 팔았다. 가구는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삶이 함께하는 존재였던 것. 이웃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가 가구였고,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의미를 이케아가 들어오면서 잃게 되었다. 단지 돈을 못 벌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생명과도 같이 여겼던 가구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낙오된 듯한 느낌. 그러한 느낌을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마르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내는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을 가게를 처분하고, 이제는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이때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그렇게 무겁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다. 물론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경찰들과 납치 후에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겁게 진행되기보다는 경쾌하게 진행이 된다. 납치 후의 일은 범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된다. 


경쾌한 진행과 반대로 내용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하롤드 영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납치가 성공하고 경찰들과 대치하면서도 병원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하는 모습. 잠시나마 기억이 돌아온 아내의 모습을 통해, 그 밤이 하롤드 영감에게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밤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찌보면 이런 경쾌한 진행을 통해서 무거운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들의 삶을 잠식하는 거대자본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끝부분에 '내일은 월요일'(205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오늘까지는 이랬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하롤드 영감과 그의 아내 마르디를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그것은 희망이다. 비록 지금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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