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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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양이다. 두꺼운 책.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하루에 300쪽씩을 읽어도 (사실 하루에 300쪽씩 읽기에는 벅차다) 이틀하고도 하루가 더 걸린다. 총 700쪽이다. 감사의 말까지 하면.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인용했고, 또 다루고 있는 책이라도 읽기에는 쉽지가 않다. 그것도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나같은 사람 말이다. 


경제쪽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경제쪽과 담을 쌓고 살았다는 말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지 않았다는 말과도 통하는데, 특히 숫자가 많이 나오는 거의 수학 수준의 경제학 책은 멀리하고 살았다.) 그럼에도 경제는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하다. 내가 살아가는 일들이 모두 경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얼핏 책장을 넘기면 수많은 도표가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그 도표들이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다. 어라? 거의 백 년에 걸친 자료들을 분석한 이 책에서 비슷한 형태의 도표들이라니. 읽어보자는 마음이 인다. 비슷한 패턴을 보이는 도표들을 보며, 숫자보다는 좀 쉽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도표들은 세계 경제가 비슷한 경로를 밟아왔다는 뜻이니 우리나라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한때 왜 사람들이 피케티, 피케티 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읽기 시작. 여기에 피케티 자신도 '이 책은 경제학 못지 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다'(47쪽. 서장)라고 말하고 있으니, 세계 경제의 역사를 한번 살펴본다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 책을 보면 개별 국가들이 다 다들게 발전해 왔고,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이 다 다르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책에 나온 표를 보면 액수에서는 차이가 날지라도 변해온 추이는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공통점이 있다는 뜻인데, 피케티 주장은 세계는 불평등한 쪽으로 발전해 왔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가? 많은 자료들을 도표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 도표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세계는 평등을 향해 왔다고 생각했고, 유례없는 평등의 시기가 요즘 아닌가 했는데,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피케티는 이를 몇 가지 등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중 불평등을 유발하는 등식은 자본 수익률(r)이 경제 성장률(g) 크다는 등식이다.(r>g) 이런 등식은 거의 깨지지 않았다고 한다. 즉 지금까지 1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이 등식은 지속되어 왔으니, 양극화가 일어나고 점점 심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많은 경제학 용어들을 댈 필요가 없다. 자본이 수익을 얻는 비율이 경제가 성장하는 비율보다 높으면 자연스레 자본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즉 부익부 현상이 지속된다. 부익부가 되면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빈익빈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불평등이 심화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경제가 나아가야 한다. 피케티 주장도 이것이다.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피케티 방법은 두 방향에서 나온다. 하나는 정치, 즉 국가의 사회화다. 사회적 국가라고 하는데, 경제를 시장에 맡겨두는 방식으로는 불평등이 해소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앞선 등식에 답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이 등식에서 평등을 지향하려면 자본소득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선의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제도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국가가 되어야 한다. 즉 법과 정치가 함께 해야 한다. 경제학이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피케티 역시 이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결말 부분에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경제학을 위해'(692쪽)라고 하고 있으며, 직접적으로 '나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592쪽)고 하고 있다.


왜냐하면 경제를 법과 정치에서 분리하려는 강단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그런 식의 경제학으로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경제학자들도 사회학자들처럼 치열한 논쟁의 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논쟁의 일환으로 그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국가론. 이는 민영화로 나아가는 현대의 흐름과는 배치된다. 민영화는 공공부분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이는 자본 소득을 더 늘리는 쪽으로 가게 될 뿐, 결코 공공의 부를 평등한 쪽으로 나누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교육, 의료 분야 등 사회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관장하는 사회적 국가. 사회적 불평들을 줄일 수 있는 기본적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회적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 국가의 재정이 무엇으로 확보되는가? 세금이다. 그렇다면 세금을 어떻게 걷어야 하는가? 누진세율이 이야기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누진세는 국가의 재정 확보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금을 더 줄이겠다고 하는 지금 새겨보아야 할 주장이다.


다른 한 방법은 경제학적인 방법이다. 세금을 걷는 일. 누구에게? 자본소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그는 자본소득세를 도입하자고 한다. 그것도 한 국가 내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를 통합하여.


그래야 명확한 소득이 밝혀지고, 그에 따라 소득세를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 소득세를 누진적 방법으로 걷는다면,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해마다 걷는다면 소득 불평들이 더 심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그만큼 가장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조세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세계가 통합해서 재산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재산을 은닉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경우에는 누진 자본소득세로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려는 노력이 효과가 없어진다.


하여 참 단순한 방법인데도 실현하기가 힘들다. 한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가 여기에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피케티는 경제학만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이 방대한 책을 통해 주장하는 일은 바로 사회학, 정치학 등과 결합한 경제학이다. 전세계 사람들이 이런 방법에 대해서 토론을 하자고 한다.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학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토론을 하고 방법을 강구하자고 주장한다.


피케티가 이 방대한 책을 쓴 이유는 그런 토론에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해주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사실에 기반한 토론을 해야 하니 말이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에서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그는 통계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 통계자료에 의하면 세계는 불평등이 해소되는 방향이 아니라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니...


이렇듯 그의 책은 경제학 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경제학 책이라고 해야 한다. 사회를 좀더 평등한 쪽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자고 주장하는 책. 그가 제시한 방법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토론이 되고 있는지... 그의 제안이 진행 중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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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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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를 아는가? 들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는? 아리아드네를 모르면 아리아드네의 실 또는 끈은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들은 신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적다. 있어도 금방 사라지거나 악역을 맡거나 한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꽤 있는데, 이 여성들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부각시키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그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와 관련 있는 여성들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그의 아내 페넬로페, 마녀로 나오는 키르케, 칼립소, 또 세이렌들, 그리고 나우시카.


이 중에 오디세우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있을까 이들은 모두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신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자리를 비켜주게 되는데...


아르고호를 타고 모험에 나선 사람들, 그 배의 선장인 이아손. 그리고 이아손을 도와 그가 황금양털을 가지고 가게 하는 메데이아. 그렇다. 메데이아는 이 장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난다.


마법이 힘을 지녔다고 나오고, 마법으로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동생을 죽이고, 왕을 죽이고, 공주를 죽이고,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인 마녀로 낙인찍힌다.


이아손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악녀로, 마녀로 나온다. 그보다 악독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모가 키르케라고 하고,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이아손은 메데이가가 없었다면 황금양털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내지 않는다. 메데이아는 쫓겨나고, 이아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왜 메데이아가 자의식이 강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한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이렇게 신화 속에서만 만나면, 그냥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 메데이아를 인식하고 만다.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 


이 소설이 바로 메데이아를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고 썼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그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어떻게 변형이 되었는지를 비교할 수 있다.


차이점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데... 작품은 철저하게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당당한 삶의 주체로 서술하고 있다.


여성이 주체로 살아가는 모습을 참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에 동조하는 세력들. 그런 세력들에 의해서 쫓겨나는 메데이아. 


그런 메데이아의 모습을 소설은 메데이아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이아손과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빌려서 이야기한다. 서술자로 '메데이아-이아손-아가메다-메데이아-아카마스-글라우케-로이콘-메데이아-이아손-로이콘-메데이아'가 나온다. 메데이아가 4번, 이아손이 2번, 로이콘이 2번 나온다. 이들이 서술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는데, 당연히 주인공인 메데이아가 제일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남성들에 의해서 메데이아가 악녀로 변해가는지를 서술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위해 다른 인물들, 즉 메데이아에게 호감을 지닌 인물 로이콘을 2번 등장시킨다. 자신이 메데이아를 구하지는 못하지만, 메데이아를 파멸시키는 역겨운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


또 신화 속에서는 메데이아에게 살해당하는 쪽으로 나오는 글라우케 역시 메데이아에게 인정받는 처지로 나온다. 그리고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런 인물들의 말을 통해서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가 있다. 신화와는 전혀 딴판인 메데이아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악녀로 또는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 이야기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다 탄압을 받고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재탄생된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진 이야기의 이면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은 메데이아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전해내려온 이야기의 가려진 면, 보이지 않던 면을 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진실은 어쩌면 감춰진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강자의 언어가 살아남지만, 강자의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약자의 언어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메데이아, 악녀로만 알고 있던 인물을 여러 목소리를 통해서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라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미로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퇴치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끈을 이용해 나오는 방법을 알려준 크레타 섬의 공주다. 테세우스와 결혼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함께 가는 도중에 섬에 버려지게 된다. 디오니소스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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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07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변신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메데이야야 말로 잔혹하다는 생각 또 다시 했는데
이 소설을 먼저 읽었더라면 다른 관점에서 그녀를 볼 수도 있었겠어요...

kinye91 2022-08-07 19:25   좋아요 0 | URL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는 너무 달라요. 먼저 변신이야기를 읽으셨다면 이 소설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살아 낸 희망은 불구가 아니었으므로' ('대입 면접'에서. 124쪽)


  시집 한 권이 하나의 이야기다. 한 편의 삶이다. 학창시절을 살아낸 사람의 이야기.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그랬다.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일도 힘든 일인데, 장애를 지닌 학생으로, 그것도 가난한 집안 형편인 학생의 이야기. 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은 다하는 학생의 이야기.


  시집 전체로 보면 주인공은 저시력 장애를 지닌 학생이다. 시집을 읽다보면 저시력 장애를 지닌 학생은 남학생이다. 그는 교과서를 잘 읽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시력을 상실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라서 남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교사들에게...'너 이 자식, 일부러 안 보이는 척하는 거 아니야?'('선생님, 꼭 안과에 가 보세요' 중에서. 17쪽), '그림이 이게 뭐니 / 나뭇잎은 이런 색이 아니야 / 줄기도 그렇고 / 이렇게 얼룩덜룩하게 그리면 어떡하니'('색약' 중에서. 31쪽) 라고 말하는 교사들.


학생 한명 한명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고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사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를 지니지 않은 교사들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대학을 아예 포기하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교사. 세상에, 아직도 이런 교사가 있나? 시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교사들을 등장시켰다고 하더라도,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까지 등장하는 이 시집에서, 교사들이 읽으면 아마도 분노하리라. 


그런 교사들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그런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교사들 사회를 흐리는 미꾸라지 교사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미꾸라지 교사들이 물을 흐리지 않게 교사들이 먼저 행동해야 하고.


저시력 장애를 지닌 이 아이는 뇌전증을 앓는 아이를 도와주기도 하고, 또 성추행을 당하는 아이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다. 이들은 그렇게 우정을 쌓아간다. 비록 상황은 힘겨울지라도 그들은 이미 세상에 맞설 마음을 지니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뇌전증을 앓는 진솔이는 성추행을 당하는 소미를 도와주고, 뇌전증이라고 진솔이를 뒤에서 헐뜯는 아이들에게 소미는 진솔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옹호하고, 성적이 많이 오른 화자를 커닝했다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에게 '눈이 나쁜 친구가 시험을 잘 봤으면 / 대단하다고 해야지 / 커닝했다고 수군거리는 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냐 / 너희들 저런 시력으로 커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 한번 해 봐 / 말이 되는지'('커닝이라니' 중에서. 115-116쪽)라고 하는 진수.


이렇게 서로를 돕는 친구들. 그러니 시의 화자에게 희망은 불구가 아닐 수밖에 없다. 그런 희망으로 이들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그들을 응원하는 일, 우리 몫이다.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이야기를 입학부터 졸업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어느 시 한 편을 인용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이 시집의 첫번째, '입학식'에서 아직은 밑바닥에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면으로 떠오르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입학식


교문에서 중앙 현관까지 계단 없음

중앙 현관에는 계단이 넷

오르면 일 층이다

건물은 총 오 층이라는데


일 층에서 반 층 내려가 후문으로 가는 문

그 아래 계단이 반 개

하나 같지 않은 얕은 계단이라

반 개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한다

고개를 낮추고 인사를 나눈다


이제 괜찮다 두려울 것 없다

오늘은 이렇게 낯설어도

계단 수를 외우면

건물은 친구가 된다


입학이다.


김학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창비교육. 2020년.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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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 안의 소녀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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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 가슴을 때린다. 그래, 이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지. 온갖 최첨단 기술로만 이루어진 사회보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많은 과학 업적들이 우연을 통해서 발견이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공기오염을 줄이는 기술을 발견한다. 분진형 나노봇, 에어로이드. 공기를 정화시키는 아주 작은 로봇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에서 쓰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그러면 되었나?


아니다. 부작용이 있다. 어떤 기술도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공기 오염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 하필이면 그 기술에 이상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 소설 속 주인공 지유가 그렇다.


많은 사람이 기술발전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만, 지유는 오히려 통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는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유가 기껏 통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때는 비가 내릴 때. 비가 내려서 에어로이드가 녹아내릴 때.


남들은 우산을 쓰고 다니지만, 이때만큼 지유는 우산 없이, 통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 수 있다. 남들이 우산 없이 다닐 때는 통 안에 있어야 하고, 남들이 우산을 쓸 때 지유는 우산 없이 거닐고 싶어한다.


이렇게 지유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수가 없다. 함께 할 수 없는 신체조건이다. 자, 이런 사회에서 지유는 행복할까? 생명을 이어가겠지만, 지유는 남들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과학 소외라고 하면 어떨까? 또는 기술 소외라고... 온갖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외되는 사람들. 그러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수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불편함, 어려움은 무시되기 일쑤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시혜를 베풀듯이 지유에게 통을 선물하는 업체도 있지만, 이는 그들의 기술을 알리는 목적도 있고, 또 함께가 아니라 당신도 살 수 있는 세상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유에게 다른 존재가 다가온다. 노아. 복제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다. 노아 역시 갇혀 있다. 이런 노아와 지유가 함께 산책할 수 있을까?


"이 동네를 너랑 같이 산책해도 재밌을 텐데. 그렇지?" (54쪽)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한 지유의 마음이 잘 드러난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산책할 수 없다. 둘 다 소외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들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도 괜찮은 지유와 다른 사람들 눈에 띠면 안 되는 노아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시대에 둘 다 소외되어 있기는 하지만, 소외의 정도는 다르다. 그렇게 소외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그들을 함께 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순간, 어느 한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둘은 다른 방법으로 함께 한다. 지유는 노아에게, 노아는 지유에게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이 비록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는 못해도 그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소외된 존재들의 연대. 그것이 그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주 짧은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 보라고. 지금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위기가 아니라 재앙임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자, 이 재난을 소설에서처럼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만 하면 될까? 


그런 방법이 다시 지유나 노아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래서 작가의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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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 김동식 소설집 2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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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소설은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다. 혹평을 하자면 그렇다. 허무맹랑.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 괴력난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옛날 이야기에서 귀신 이야기가 참 많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는 경우, 또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도 많았다. 사람들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 도깨비를 활용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김동식 소설은 바로 그런 옛날 이야기와 연결이 된다. 허무맹랑이나 괴력난신이라고 비판만 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들이 감추고 있는 욕망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동식 소설 역시 우리들이 감추고 있던, 또는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욕망들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특히 옛날 도깨비에 해당하는 요괴를 통해서. 요괴는 결국 우리들이 욕망의 결집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요괴들이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데...


소설은 아주 짧다. 짧아서 읽기에 편하다. 그냥 별다른 생각없이 읽을 수도 있다. 환상적인 이야기 아닌가. 그럼에도 읽은 다음에는 마음 한 켠에서 어떤 의문이 일어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지닌 욕망이 이렇게 발현될 수 있음을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젊음에 대한 욕구, 돈에 대한 욕구,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 건강에 대한 욕구 등등. 그렇다고 이런 욕구들을 다 충족시키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욕구, 욕망들이 다 실현되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어쩌면 그런 욕구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편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소설집 제목이 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를 보아도 그렇다. 이 요괴는 약하다.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을 먹을 뿐이다. 먹는다? 다른 말로 하면 다시 태어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상태로 사람을 돌려놓기 때문이다. 젊음에 대한 욕망. 그런 욕망때문에 사람들을 요괴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사람들의 욕망이 요괴를 세상에서 가장 약한 요괴에서 가장 강한 요괴로 바꾸어 놓는다. 


부작용이 발생하고 만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오천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또 천 명 당 한 명이 죽어나가도, 이렇게 점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확률이 높아져도 사람들은 젊음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욕망 앞에서 눈 멀어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이 소설집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편하게 읽히는 이 소설에서 우리는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풍자 개그를 보면서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듯이, 이 소설집을 통해서 감춰진, 또는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들 욕망을 요괴를 통해 마주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들 삶에 대해, 욕망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일, 또는 잘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는 일, 소설가가 하는 일이고, 그것을 소설을 통해서 하게 되는데, 이 소설집은 그런 면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결코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니고, 괴력난신에 해당하는 소설이 아니다.


우리 사회, 우리 욕망에 관한 여러 편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도깨비를 통해서 옛날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했듯이, 김동식은 요괴를 통해서 현대인들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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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7-25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 종교학이나 민속학 책인줄 알았는데 풍자소설이었군요^^
도꺠비 소재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혹하게 하는 재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개 감사드립니다

kinye91 2022-07-25 16:56   좋아요 0 | URL
김동식 소설은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