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인간 - AI 시대, 문명과 문명 사이에 놓인 새로운 미래
김대식.김혜연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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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인간' 제목이 참신하다. 새로운 문명과 문명 사이에 있는 인간이라고, 우리가. 이 사이를 '과도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개념이 좀 다르다. 과도기라고 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중간이라는 말인데, 결국 저쪽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말. 건너가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말이 '과도기'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인데...


반면 '사이'라는 말은 건너다라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아도 된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사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사이 인간'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지금 'AI시대'를 향해 가고 있지만, 'AI시대'가 정해져 있고, 반드시 그쪽으로 가야 한다는 당위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또는 이쪽도 저쪽도 바꿀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사이' 아닌가. 우리 '사이 인간'은 이 문명과 저 문명의 사이에 있으면서, 현재의 문명도 또 미래의 문명도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이 인간'에 들어 있는 뜻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과도기'라는 말보다 '사이'란 말이 좋다.


이 책에서 질문을 하고 있는 김대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두려움과 기대를 갖고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이를 우리는 호모메디우스 Homo Medius, 즉 '사이 인간'이라 명명하기로 했다'고.(10쪽)


그러면서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다섯 명의 사람들과 대화를 한 내용을 이 책에 실었다.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현재 문명에서 자신의 꿈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그들에게 지금 우리에게 다가왔고 앞으로 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 대해서 대화를 했다. 새겨들을 만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한 문명에서 다른 문명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어떻게 발달을 할지 사실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예측한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인공지능이 어떻게 그러한 상태에 도달했는지 잘 모른다고도 하니. 여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에 인공지능이 들어온 이래 인공지능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 시대로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 이미 세계는 그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이 인간'이라고 하지만 '과도기 인간'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듯한 요즘인데, 굳이 '사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문명을 완전히 떠나 저 문명으로 가자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이 문명에서도 유지할 것은 유지하되 새로운 문명을 거스를 수 없으니 이 문명과 새로운 문명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여러 사람의 대화를 그런 관점에서 읽었다.


첫번째로 실린 최재천과의 대화에서 '두려움'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낯선 것을 보면 두려워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하지만, 이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반추하면서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 아닌 존재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 점을 생각하면 최재천의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는 인간이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지구에 저질러온 일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보다 더 똑똑한 존재가 등장하면, 그 존재가 인간이 생태계와 동물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를 똑같이 대할까봐 걱정하는 거죠. 이 두려움이 우리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듯해요.'(20쪽)


이러면서 그는 '공존'을 이야기한다. 협동과 공존, 이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생존(생활)방식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의 말을 '사이 인간'에 적용해보면 우리는 미래의 문명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문명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그간 우리가 해온 행동을 되돌아보고 고칠 수 있는 것은 고치는 노력, 그러한 실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AI시대'라고 한다면, 이 문명에서 우리는 인간-인간, 인간-자연 등의 협력과 공존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AI시대'를 대비하는 '사이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다. 즉 이쪽과 저쪽을 다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과도기 인간'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리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나약함을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59쪽)라는 장강명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와 비슷한 말로 신지영의 말이 있는데, '우리는 AI와의 소통에 익숙해질수록 오히려 비언어적 표현을 더 풍부하게 활용해야 하며, 감각적으로 소통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 AI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역량은 기술을 다루는 능력의 개발이 아니라, 사람과 더욱 깊이 교감하는 법의 학습에서 출발해야 합니다.(253쪽) ... AI와의 소통에 익숙해질수록 인간과의 소통을 피곤해할 수 있어요, ~ 성장이란 바로 이러한 감정적 소모를 경험하며 이루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254쪽)'는 말.


감정적 소모, 이는 인간의 나약함과도 연결이 되고, 신체와 감정을 지닌 인간이 지니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이 인간'은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간의 특성을 지키면서 'AI시대'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가 유현준이 '저는 AI가 건축가의 도구를 넘어서 '파트너'가 되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고 생각해요'(76쪽)라고 했듯이, 'AI시대'를 거부할 수 없다면 협력을 하고 공존해야 한다.


인간의 특성을 잃지도 않으면서 인공지능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함께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 아닐까 한다.


이제는 인간의 관계를 넓고 깊게 해야 하는 시대.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사이 인간'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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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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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시봉이라는 이름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또 이 책의 광고를 보고는 이시봉이라는 사람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개다.


그럼 주인공이 '개'겠네. 개의 일생을 다룬 소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개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이다. 스페인, 프랑스, 한국이라는 세 나라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시간도 중세 시대부터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가 공존한다. 


집에서 함께 지내던 개가 유럽의 유명한 혈통의 개란다. 그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이 개의 혈통과 보존에 힘쓴 사람이 스페인의 권력자였던 고도이라고 하면서, 그를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이에 프랑스로 유학갔다가 이 개의 부모를 데리고 오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박유정-김상우, 정채민), 그리고 현재 이시봉을 둘러싼 사건이 전개된다.(정채민이 대표로 있는 앙시앙 하우스와 이시봉을 키우는 이시습과 친구들, 박유정의 아들 김태형)


세 가지 사건이 잘 연결이 되어 박진감 있게 전개되고 있어 소설은 순식간에 끝부분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그런데 끝부분이 무언가 좀 아쉽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일까에 대해서 명확한 결말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인데...


명확한 결말은 나오지 않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개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이를 다른 존재로 확장하면 사랑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개들을 통해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첩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재산 싸움도 펼쳐지니...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또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의 마음에 맞게만 하려고 하는 것도 역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히 인정해주는 것, 그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소설의 서술자라 할 수 있는 이시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시습이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든 외할머니는 네가 어떻게 자랄지 궁금하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한다. 믿음, 상대를 나의 기대에 맞추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러한 할머니의 사랑이 이시습이 이시봉을 사랑하는데, 또 자신을 돌아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할머니의 사랑과 반대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소설 속 정채민이나 김상우의 모습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이익이 먼저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결코 자신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겠지만...


이를 소설에서는 이시습의 입, 또는 김상우의 아내였던 박유정의 입을 빌려 '인색하다'고 한다. 인색함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만 바라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는구나. 그게 인색한 거구나' (493쪽) - 이시습의 생각.


이것이 이시봉과 같은 혈통의 개를 키우고 분양한다는 앙시앙 하우스의 수의사에게 하는 말이지만, 이는 그 회사의 대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바로 이 인색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시봉과 이시봉의 혈통을 이야기하고, 그 개들을 들여오게 되는 과정에서 '박유정-김상우, 정채민'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다. 


'박유정이 생각하는 인색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오직 하나뿐인 것이었다. 종교인이 종교만 생각하고, 아이 엄마가 자기 아이만 생각하고, 고리대금업자가 이자만 생각하는 것, 그 외는 아무것도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것.' (338-339쪽)


결국 인색함이란 '홀로'와 연결이 된다. 남을 나와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나'를 중심에 놓고 내 이익에 도움이 될 때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 내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내치는 것. 그것이 바로 '홀로'이고 이는 상대를 나와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자세다.


이런 인색함과 대비되는 것이 따지지 않고 사랑을 주는 것. 그러니 이시봉은 함께 살았던 이시습에게도, 정채민에게도 사랑을 준다. 명랑하고 투쟁 없게.. 이 투쟁 없는 삶이라는 말이 왜 들어갔을까 생각했는데... 


이 소설에서 투쟁은 인색함과 연결이 될 수도 있겠구나 했다. 물론 '투쟁'은 필요하고, 사랑과 연결이 될 때가 많다. 사랑이 없으면 투쟁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투쟁은 필요하고, 이는 이시습의 아빠가 투쟁의 현장에서 빠져나오지만 그 미안함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노조 간부가 되는 후배 이시봉의 이름을 따서 강아지 이름을 이시봉이라 지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람 이시봉의 투쟁은 사랑이 들어 있는 투쟁이다. 그러니 인색함을 바탕으로 하는 투쟁과는 다르다. 이를 구분해야 한다. 개 이시봉의 투쟁 없는 삶은 인색함이 없는 삶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고...


이러한 이시봉으로 인해 또 한 명의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되는 모습도 소설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 그건 이시습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하던 (가정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이 소설의 말을 빌리면 인색하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보는 사람이니까) 일명 '리다'가 그렇다.


'리다'의 아버지는 '리다'를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 고양이들을 죽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감정 이외에 다른 존재에 대한 마음은 전혀 없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인색함이 전형적으로 나타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할 때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비친다. 정채민의 경우도 그렇다. 이게 인색함이 무서운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소설은 개-이시봉을 통해 인색함이 아니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함을 여러 사람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색함이 없는 투쟁을 하는 이시봉-이시습과 친구들, 인색함으로 무장한 투쟁을 하는 정채민과 그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인색함 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들.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이시봉과 관련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가고, 그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홀로일 수는 없다는 것, 홀로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맺고, 이 관계의 바탕이 바로 사랑임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에 읽은 [신영복 다시 읽기]가 생각났다. 신영복 선생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때 존재론을 인색함으로, 관계론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함을... 그것이 사람의 삶임을 소설은 이시봉-이시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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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과 현대 세계 -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유기쁨 지음 / 눌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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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을 미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영혼이 있다고? 무슨 헛소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애니미즘은 원시인들이나 지녔던 미신에,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책은 애니미즘에 대해서 그러한 생각을 바꾸게 한다. '인간이 다른 존재의 생명성을 인정하는 애니미즘은 우리가 잘 모르는 생명세계에 대한 존중의 관계를 표상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177쪽)고 하고 있으며, 그래서 '사람'이라는 말의 뜻도 우리가 쓰는 말과는 다르게 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 여러 존재들과 관계 맺고 소통한다는 뜻이다.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하나의 "인간-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계 내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80쪽)라고 '사람'의 폭을 확장하고 있다.


인간만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기계도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바로 관계 속에서... 그러므로 애니미즘은 관계 맺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이라고 보면 된다.


연결되어 있음, 억지로 하나의 관계를 끊었을 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타나는 것. 그러므로 어떤 존재든지 소중하게 여기고, 그러한 관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애니미즘이다.


이렇게 애니미즘을 정의하면 애니미즘이 원시적이라거나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니미즘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은 요소가 무엇일까?


그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선물은 호의가 있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호의를 지닌 선물은 주고받기를 하고, 이 주고받기를 통해서 좋은 관계를 맺어가게 된다. 그런 관계 맺음은 한 쪽의 일방적인 이익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이 선물은 주고받음이 지속되는 가운데 점점 더 가치를 크게 하는데,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선물은 나선형의 전진을 하기 때문에 잠시 가치가 하락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점점 반복될수록 가치가 커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호혜적 선물 교환인데, 이와 반대되는 것이 바로 상품이다. 상품은 양쪽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마치 분업처럼, 어느 한쪽이 더 큰 이익을 얻게 된다. (분업이 상호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론으로만 가능하다. 분업을 통해 서로가 이익을 얻기 보다는 어느 한쪽이 더 큰 이익을 얻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왜냐하면 상품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만들어낸 물품, 또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존재들을 '사람'으로 보게 된다면 그 존재를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호혜적인 선물을 주고 받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의 애니미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이 책은 '비인간-동물-사람'부터 시작한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권리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서 많은 의학실험이나 과학실험에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또한 인간 역시 동물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래서 비인간-동물에게서 많은 위안을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 비인간-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점차 호혜적인 선물 관계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식물-사람'인데,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식물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과연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비인간-동물을 사람으로 인정했을 때 우리의 먹을거리가 문제가 된다. 채식주의자들이 있으니 비인간-동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에 사람에 따라 그럴 수 있지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식물-사람'을 인정하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이야? 그냥 죽으란 것인가? 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비인간-동물도 먹지 말라, 식물도 먹지 말라고 하면 인간이 먹을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여기에 저자는 생명은 생명을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생명 유지에는 다른 생명이 필요하다. 그러니 다른 생명으로 생명을 유지할 때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고 한다.


상호존중이다.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는 있지만, 그것들 과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생명을 취할 때도 관계 맺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다른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내놓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면 그에 걸맞게 우리 역시 선물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생명이 아닐지라도. 이 점을 생각하면 먹을거리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음은 물질들인데, 이 물질들에게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긴 탑이나 돌을 쌓아놓고도 또는 바위에게도 절을 하기도 하니... 해, 달, 별들에게 소망을 빌기도 하니, 이들에게도 일종의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물질들에게도 생명이 있다고 여기는 집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단지 그들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자신들과 관계를 맺을 때 생명이 있다고 여긴다고 한다.


그렇다. 바로 관계다.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들, 이런 관계란 말 자체가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니, 생명의 실체를 규명하기 보다는, 관계 속에서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단 말이다.


기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인공지능 개발이 한참이고, 인간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이 나타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의 뇌를 장착한 기계가 나온다면 과연 그 기계를 '사람'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이 문제도 어느 정도 대답이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홀로 된 노인을 돌보는 기계들이 있지 않은가? 그 기계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을까.


이렇게 이 책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존재들을 통해서 '사람됨'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도 호혜적인, 선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인간들끼리야 말해 무엇하랴!


인간들끼리 호혜적인 선물을 주는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애니미즘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추구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시적이다, 전근대적이다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러한 애니미즘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현대 세계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임을.


저자의 마지막 말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관계들이 살아 있는 한,

                               세계는 아직 열려 있다."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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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 월급사실주의 2023 월급사실주의
김의경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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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나온 첫번째 소설집이다. 현실은 점점 팍팍해져 가는데, 그런 현실을 과연 문학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나? 또는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문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를 고민한 끝에 나온 작품집.


작가들이 우리 현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 읽는 사람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희망을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이 결코 희망적이지 않더라도 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희망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으니까) 찾기를 또는 위안을 받기를 바라고 썼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저 현상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그 현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그 고통에 대해서는 쓸 수 있다. 후대 작가들은 알 수 없는 것, 동시대 작가의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다.'(11-12쪽)


어떤 현상인가? 팍팍한 현실이다. 이를 '새로운 재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무어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현실이라는 인식이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점점 양극화되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작가들이 모여 각자가 바라본 현실을 작품으로 썼다.


이 소설집에는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다양한 직업들이 나오지만 공통된 점은 이들 모두 힘겹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작품을 하나하나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들 작품 속 인물들이, 비록 이 작품집이 2023년에 출간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이다.


전세 사기라 할 수 있는 일을 겪는 인물,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부동산을 잡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발표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전셋집도 마음 놓고 구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들이 마음 놓고 살(파고 사다의 살이 아니라, 거주한다는 의미)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바뀌지 않고 있다.


말보다는 실행, 이것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인데... 집값 안정,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내 집이 아니라 내가 빌려 살 집도 구하기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얘기해야 한다. 기껏 빚내서 빌려 산 집(특히 전세)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들, 이 소설은(정진영, 숨바꼭질) 그나마 돈이나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으니...


젠세나 월세도 얻지 못하고 2호선 전철에서 자야 하는 배달 일을 하는 주인공 (주원규, 카스트 에이지)는 더욱 힘든 처지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게으르냐면 그것도 아니다. 배달일을 하고, 밤에는 택배 상하차 작업을 한다. 그는 오후 3시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럼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 그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잘 집도 없고 애인의 집에서도 자지 못하고 결국은 2호선 순환선을 타고 몇 시간 동안 자기 위해 첫차를 타는 인물에게 어찌 네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탓이 아님을, 그것이 네 선택이었으니 누굴 원망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현장 실습을 나간 학생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런 현장을 선택한 것도 너니까 그건 너의 자기주도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여정, 섬광)


과연 자기주도권일까? 환경이 그러할 수밖에 없도록 내몬 것 아닐까? 그 현장이 열악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 그렇게 된 환경에서 과연 자기주도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자기주도권 (다른 말로 하면 주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을 지니라고 하지만, 어디 그것이 개인에게 맡길 수 있는 문제일까? 개인에게 가해지는 환경의 압력을 살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소설은 제시할 수 없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최영의 소설 '이해와 오해가 교차하는 방식'에서 만나보게 된다. 같은 카페에 있는, 비슷한 일을 하는 (회사에 속해 번역일을 하는 사람과 영상 번역을 하는 사람, 단행본을 번역하는 사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다른 번역일을 하는 환상을 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 


이들은 같은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일 속에서도 다른 이의 일들에 환상을 품고 있다. 물론 자신이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일 텐데, 이렇게 비슷한 환경 속에 녹아 있는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오해를 하고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음을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만 없어도 곧 대체 가능한 존재들 아닌가.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 학습지 교사 등등. 


첫소설에 나오는 '우리는 순간접착체 같은 거네요?'(35쪽)라는 말이 마음에 아프게 와닿았다. 필요할 때만 쓰는. 그러나 늘 함께하지는 않는 그런 존재.


순간접착제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불안정한precarious과 노동계급proletariat'가 합쳐진 말이라고)가 되겠다. 즉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양산하고 확산시키는 사회. 아파트 단지에 있던 벤치와 나무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듯이 그렇게 한 순간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존재들. 그것이 우리 현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집이다.


그럼 이런 작품을 읽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지? 다른 건 몰라도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잘못된 것이 내 잘못만이 아님을. 또 우리는 이렇게 한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가 아님을 작품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우리 각자가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고 행동할 문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월급사실주의란 말에 어울리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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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
권진관 외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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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다. 함께 읽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책. 웬만하면 신영복 선생의 책은 다 읽어보려 하고 있다. 오래 전에 녹색평론에 실린 '나의 대학시절'이란 글이 신영복 선생을 처음 만나게 했고, '청구회 추억'으로 신영복 선생의 글을 거의 다 찾아 읽게 되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 후에 읽게 되었는데, 이어서 '나무야 나무야'를 읽으며 이토록 쉽게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라니, [강의]와 [담론] 역시 감탄하면서 읽었다.


그런 선생이 더 우리 곁에 있어야 했는데,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선생은 갔지만 선생이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래서 신영복 함께 읽기, 신영복 다시 읽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읽기, 아니 계속 읽기를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신영복 선생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화이부동이라는 말.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선생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화이부동이지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고 했다.


즉 화(和)를 추구한다는 것은 똑같지 않다는 말이다. 똑같지 않기에 '관계'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관계맺기에 신경써야 한다. 즉 관계론이다. 신영복 선생이 존재론에서 나아가 관계론을 주장한 것은 바로 이 화이부동의 정신이다.


그렇다면 동이불화는 무엇인가? 바로 관계를 지우는 것이다. 동(同)을 추구한다는 말은 차이를 없애려 한다는 말, 이는 한 쪽을 다른 한 쪽이 흡수해버린다는 말이다. 여기에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흡수일 뿐이다. 그러니 동의 논리는 중심의 논리다. 중심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삶, 이런 사회는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화(和)의 논리로 나아가야 한다고 신영복 선생은 주장했다고 한다.


화란 관계이고, 이는 거리를 인정한다는 뜻이고, 이 거리를 완전히 없애지 않고 함께하기 위해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는 어디서 실현되는가? 바로 변방이다. 변방은 하나로 뭉쳐진, 관계가 없는 일방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이런 변방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왔다.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화의 논리보다는 동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배제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신영복 다시 읽기가 필요하다. 동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화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을지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때가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신영복 선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자체가 화의 논리를 실현하고 있다. 어느 하나로 신영복 선생을 규정하지 않고, 선생이 지녔던 다양한 모습을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이 느낀 대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들이 알려주는 신영복 선생의 다양함을 인식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거기서 자신을 읽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발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영복 다시 읽기 아니겠는가.


이 책에 실린 신영복 선생에 대한 글들을 몇 가지 말로 정리하면 '화이부동'과 '관계', 그리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의 여행'과 '변방'이 될 것이다. 이 말들이 하나로 꿰어질 수 있음을.


이 말들을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로 꿰어보면, 중심으로 가려는 동의 논리를 부정하고,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서 변방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실천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입장의 동일함'은 동의 논리, 즉 같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함께 해나가는 더불어 손잡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글들 속에 그간 알고 있었던 신영복 선생의 좋은 말들, 또 그의 글씨를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지금 시대를 보는 눈을 갖추고 함께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신영복 다시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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