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 괄호 안의 불의와 싸우는 법
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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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 소수자 문제가 생기고, 차별이 생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틀림을 인정하지 않아서 소수자 문제가 생기고, 차별이 생기기도 한다. 아니, 차별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틀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생기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틀림을 다름으로 치환하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 다름으로 치환하면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틀린 견해도 다른 견해로 여기며 수용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한다.

 

물론 내 견해가 틀렸을 수도 있다. 틀린 내 견해를 다른 견해로 받아들여 달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하게 만든 책이다. 뜨끔하다고 해야 할까... 그만큼 이 책은 신랄하다. 신랄한 만큼 반발도 많을 수 있다.

 

그게 이 책이 의도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반발이 있어야 재반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반발도 없이 넘어가는 것, 토론이 되지 않는다. 토론이 되지 않으면 그게 문제인지 제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인데, 문제로 제기되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틀림을 다름으로 치환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 것이다.

 

저자인 위근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무언가에 대한 공통의 합의에 이르기 위해선 더 가차 없이 나의 '옳음'의 근거를 확보하고 상대의 '틀림'을 논박하는 논의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적 태도란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식의 태도가 아니다. 서로의 의견 차를 '다름'이라는 말로 쉽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서로 옳고 그름을 합의할 최소한의 근거를 아예 잃어버린다. 이것은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관점이다. 관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교조적이다. 우리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오히려 격렬한 논의 안에 뛰어들어 수많은 목소리와 경쟁해야 한다. 그 불편한 과정을 회피한 채 서둘러 절충안을 찾고 합의하려는 것, 그것이 강요된 화해다. 그리고 이러한 화해는 매우 높은 확률로 사회적 통념의 편에 선다. (7쪽)

 

어쩌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황희의 일화를 우리의 삶에 주욱 실천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네 말도 맞다. 네 말도 맞다. 허허... 이런... 그러니 모두 맞다고. 판단을 하지 말라고. 그건 아니다. 분명 옳고 그름은 있다.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 상대의 옳음을 듣는 것.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것. 절충이 아니라 옳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토론이다. 그리고 이런 토론을 통해서 사회는 발전할 수 있다. 여기서 다름은 옳고 그름의 다름이 아니라 상대와 내가 같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다름이고, 그것은 상대의 견해가 옳고 그른지와는 관계가 없다. 우리는 상대를 다른 존재로, 상대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지만, 견해가 틀렸을 때도 다르다고 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 나오는 것 중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과격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말. 왜 과격해졌을까? 권력을 쥔 자들이 할 수 있는 절차나 방법을 통해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알릴 길이 없기 때문에,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알리는 것조차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 과격함인데 그것을 가지고 반대한다? 그건 결국 그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약자들의 주장하는 방식이 과격하다고 해서 그 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그 과격한 방식을 다르다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반대로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이 옳을지라도 과격한 방법은 틀린 거라고. 그건 강자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라고 한다.

 

격쟁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하는 일. 그러나 격쟁에도 처벌이 따랐다고 한다. 격쟁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그 행위 자체에 벌을 준 것. 과격함을 잘못됨으로 판단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고 한다. 그때도 그랬는데, 현대에 와서 과격함만으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묻어버리려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근우는 꾸준히 자신이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 글을 쓴다.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 토론하자고 한다. 자, 나는 이렇게 불편하다. 이 불편한 상황을 견딜 수가 없다. 불편한 것은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릇된 것이기 때문에 고쳐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반박하라고, 그래서 토론을 하자고. 공론의 장을 만들자고.

 

글쓰기의 실천적 힘은 독립적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논의의 맥락 위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논의가 질적으로 풍부해지고 치열해질수록, 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쟁점들이 가시화되며 합의를 위한 공통의 토대가 조금씩 만들어진다. 세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이 공론장 안에서 충분히 성숙해가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획기적인 발상 역시 등장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천재적이진 않지만 성실한 글쓰기로 논의를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다. 나는 그곳의 일원이고 싶다. (9쪽)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아직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고 있기에. 권력 있는 자들은 그름을 다름으로 포장하야 논쟁을 하지 않고 그냥 인정하라고 한다. 그렇게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유야무야 논쟁을 없앤다.

 

이제는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적어도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하는 일에는 모두가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 책에 참 많은 사례들이 나와 있는데, 그 사례들에 대한 위근우의 주장을 읽고 그 근거들의 타당성을 판단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공론장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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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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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는데, 사실 말로만 심각하다 심각하다 하지, 기후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직접 눈 앞에 닥친 일이 아니고, 정부 관료들에게는 아무리 해도 성과가 나지 않는 일이며, 과학자들에게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일이기 때문일 것읻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돈이 되지 않는 일에 투자할 기업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정부나 과학재단들도 가시적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투자를 잘 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은 늘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40쪽)

 

그러니 기후 위기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카산드라의 예언밖에는 되지 못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말해줘도 누구도 믿지 않고, 또 행동하지 않는 그런 일.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 책의 또 다른 쪽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나무를, 또는 식물을 많이 심으면 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예측되는 향후 수백 년에 걸친 온실가스 수준의 환경을 만들고 거기서 고구마를 기르는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이 온실가스 예상치는 우리가 탄소 배출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계속 현재처럼 산다면 생길 것이라고 예측되는 수치다. 고구마들은 이산화탄소 양이 늘면서 더 크게 자랐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커다란 고구마들에는 우리가 아무리 비료를 줘도 영양소가 더 적게 들어 있고, 단백질 함유율도 낮았다. (387쪽)

 

공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느라 힘을 그쪽으로 써버리는 식물들이 영양에서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식물은 땅과 하늘, 양쪽에 모두 걸쳐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만 지구가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생활의 전환 없이 기후 위기는 해결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자런 호프라는 과학자가 식물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고, 식물과학자의 이야기라 해도 좋다. 그것은 바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인간이 식물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을 벗어나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절실했다. 어쩌면 세상을 식물들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식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식물들의 세계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환경 과학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113쪽)

 

바로 다르게 보기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것. 그래야 그 대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거리두기. 어쩌면 식물을 인간의 일부로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대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기 때문에.

 

모든 대상은 다르다. 모든 대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다 다른 대상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또는 무기물이든.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르게 보기는 곧 함께 살기다. 함께 살기에 실패하는 경우는 과학자들의 세계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자런 호프 역시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 과학자 집단은 자신들의 모습을 설정해 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적당한 학위와, 외모, 그리고 말투까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262쪽)

 

어디 성차별뿐이랴. 모든 차별이 바로 이렇다.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계에서도 이런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소수자가 과학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차별을 이겨내야 한다. 과학계의 차별뿐만 아니라 연구 기금 부족까지 이겨내야 한다. 자런 호프는 이 과정을 이겨내고 식물에 관해서 연구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길로 접어든다.

 

그 지난했던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무척 흥미롭고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아이를 대하는 자런 호프의 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이를 놓아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367쪽)

 

이 말을 과학으로 바꾸어보면 자신의 성과(결론-주장)를 놓아줄 수 있는 과학자,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자가 좋은 과학자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식을 놓아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듯이, 자신만의 것을 고집하는 과학자 역시 좋은 과학자일 수 없다.

 

자런 호프는 이런 것을 식물, 나무의 입장에서 깨닫게 된다. 새로운 시각, 그리고 식물들이 보여주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석하려는 모습에서 과학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단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한 사람의 자서전에 그치지도 않는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어떻게 주변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식물에게서 배워가는 과정도,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도, 또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맺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인 구달은 '닥터 두리틀'이란 소설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했다. 어떤 영장류 학자는 제인 구달의 이야기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했고. 과학을 어렵게만 여기고, 재미없게만 여기는 사람, 이런 책들을 읽으면 과학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다.

 

과학을 무슨 공식만으로 교육할 수는 없다. 과학은 우선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호기심. 그리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행동.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 이 책은 적절하다. 단지 과학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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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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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책이다. 그가 직접 그린 스케치와 그것을 그리게 만든 일을 글로 적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걸 뿐만 아니라 함께 가려고 한다.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0쪽)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말을 걸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다. 비가 올 때 우산을 홀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또 우산을 함께 쓰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줄 수 있는 사람, 비가 그칠 때까지 그 비를 맞으며 함께 견뎌주는 사람이 바로 존 버거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생각하게 된다.


사소함에서 중요함을 보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에 저항하는 일이고, 또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을 보게 되는 일이고, 머리 위에 있던 유리 천장을 깨뜨리는 일이다. 그건 바로 저항이다.


  깊이있는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된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85-86쪽)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저항이 아니다. 저항은 바로 현재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소함은 삶에서 중요함이 된다. 저항을 하는 순간이 바로 사소함을 중요함으로 만든다. 그것은 저항하는 삶이 소중함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남들에게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이 지닌 사소함은 남들 눈에 비치는 사소함일 뿐이다. 내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일 수 있다. 즉, 내 가치판단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을 그렇게 읽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대의,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내 삶이 요구할 때 저항하는 것이다. 


존 버거의 이 책은 '벤투의 스케치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벤투가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벤투라는 사람이 누굴까? 했는데, 스피노자다. 우리는 스피노자라고만 알고 있지, 그의 긴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베네딕투스(벤투) 데 스피노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1632-1677)는' (11쪽)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스피노자도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와 이렇게 드로잉을 한다는 공통점을 말하고 있다.


단지 드로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는 스피노자의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존 버거의 그림과 글과 스피노자의 글이 어우러져 있다.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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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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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사람에 대한 예의'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가 제목이 되었다. 왜? 당연한 일이 비범한 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고위관료라는 인간들이 국민들을 개, 돼지에 비유하기도 하니, 그들 눈에는 국민들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보다.

 

아니, 그들은 국민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권세 있는, 소위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사람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람이되, 자신들과는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사람인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들도 사람이라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면 주제 넘다고, 지금은 너희들 권리를 주장할 때가 아니라고, 오히려 이기적이라고 몰아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제목을 단 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또는 위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대우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노력이 바로 사람에 대한 예의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선에 두고 다른 것들을 먼저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 다른 것들로 사람이라는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런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과연 그것이 실패일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마친 이런 글이 있다.

 

패배를 실패로 착각해선 안 된다. 패배가 상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겼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72쪽)

 

참 좋은 말인데, 패배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파멸로 가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패배, 실패하지 않는 패배를 할 수 있는 집단이 있을까?

 

노동자들은 패배하면 곧 죽음이다. 이들이 해고는 죽음이다라고 외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패배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싸우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패배란 곧 실패다. 이들에게 패배는 사회에서 밀려나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은 쉬운데 실천은 어렵다. 아름다운 패배. 사회적 약자들에게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들 개개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 집단으로 보면 아름다운 패배가 될 수 있다.

 

전태일의 운동은 패배했다. 그러나 실패는 아니다. 분명하다. 전태일의 패배로 우리 사회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누가 패배라고 하는가? 우리 사회가 지금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운동 덕분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아름다운 패배가 있다. 이들은 이런 패배를 통해서 사회를 조금씩 조금씩 바꿔간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집단, 관심없던 집단들을 자신들의 주변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패배는 다른 국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이 책에선 '지더라도 개기자'고 했다. 언뜻보면 이해 안 되는 말이지만, 패배가 실패가 아니란 말과 같다.

 

개기는 것은 불필요한 행위로 보인다. 개겨봤자 달라지는 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개겨서 과연 달라지는 게 없는가. 달라지는 게 분명히 있다. 개기는 사람 자신이다. 개기면서 결심이 단단해지고 확고해진다. 다시 싸워야 할 때 웬만한 충격엔 흔들리지 않는다. 실패의 의미도 달라진다. 실패했을지언정 원칙을 지키고 주장함으로써 가치 있는 실패가 된다. (73쪽)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내 삶에 원칙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선은 있어야 한다. 그 선을 나 스스로 넘어섰을 때 패배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 이점에서 정치권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특히 국회의원 선거. 이승만 정권 당시 사사오입은 욕할 가치도 없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강행이 되었는데, 그보다 더 세련된(?) 비례대표 위성정당이란 것을 만든 야당, 여당.

 

이들에게 패배란 실패다. 그래서 이들은 정당하지 못해도, 비록 꼼수란 소리를 들어도 성공하려 한다. 원칙을 지키고 주장하는 실패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보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이제는 없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면 과연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까? 국민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이미 원칙을 잃고 자신들의 의석수만을 생각하는데... 그들에게는 정치권력에 대한 욕심은 있지만 좋은 삶에 대한,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없다.

 

여기에 최근 계속 언론을 타고 있는 검찰들의 모습. 또 다른 재벌들의 모습을 보면 과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이들에게는 좋은 삶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거나 또는 기득권을 지켜주는 직업이 전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이들만이 아니다. 곧 수능을 보는 전국의 수험생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그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직업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과정에 직업도 있는 것이다. 직업은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방편일 뿐이다. 삶을 직업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삶에 맞춰야 한다. (194쪽)

 

이 말이 통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좋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고 배제하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

 

글 한편 한편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사람에 대한 예의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진영논리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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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65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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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까오량 가족.

 

제목만으로는 낯설다. 그러나 이 소설 제목인 홍까오량이 우리말로 풀면 '홍고량 - 붉은 수수'라는 것을 알고 나면 바로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영화 '붉은 수수밭'

 

아주 오래 전에, 정말로 오래 되었나 보다, 본 영화다. 기억에 많은 장면은 남아 있지 않지만, 화면이 온통 붉은 색이었다는 것과 이들이 항일 투쟁을 했다는 것 정도는 기억이 난다. 게다가 일본군에 의해 껍질이 벗겨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장면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는데...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세상에 1989년에 개봉이 되었다고 한다. 햐, 정말 오래 전이구나! 붉은 수수밭 하면 두 인물만 기억에 남는다. 영화 속 인물 이름이 아니라 배우와 감독. 배우는 공리, 감독은 장예모.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 헷갈렸다. 중국 사람들 이름, 한자로 읽으면 두 글자에서 세 글자라 머리 속에 잘 들어오는데, 중국 발음으로 표기를 하면 도통, 길기도 하지만 의미가 머리 속에 안 들어오니... 서술자의 아버지인, 항일기에는 아들로 나오는 또우꽌은 한자어로 하면 두관豆官이란다.)

 

모옌의 소설이라는 것, 모옌이 중국 작가로는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모옌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에게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붉은 수수밭'의 원작이라는 점이 이 소설을 읽게 했다.

 

읽으면서 영화는 이 소설의 첫번째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소설은 첫번째 부분을 중심으로 하면서 그 사이 사이에 빈 시간과 사건을 다른 부분에서 채워주고 있다. 홍까오량 가족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서술자가 고량주를 만들어 파는 집의 자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동네에는 수수로 술을 만들어 파는 일을 주업으로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홍까오량 가족 하면 지식인 계열의 집안도 아니고, 또 권세가 있는 집안도 아니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아니니 도덕, 윤리, 체면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이들은 자신들 감정, 욕망에 충실한데,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옭아매려 하는 일제에 대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옌 소설의 장점이라고 하면 환상적인 장면들이 나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미신적인 요소들, 민중적인 요소들, 또는 환상적인 요소들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

 

이것에 더해서 모옌 소설은 좀 수다스러운 느낌을 주는데, 이 수다스럽다는 말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을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들려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점을 여러 가지로 바꿔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하겠지만,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소설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화의 원작이라 할 수 있는 1장은 '붉은 수수'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리고 사건의 전개가 영화와 비슷하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이면 너무도 친숙한 장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은 영화 속 장면이나 인물들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어서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영화에서 표현된 것을 넘어서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서술과 소설의 서술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영화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많은 것을 감추고 있으니, 그 감추어진 것을 찾는 재미가 소설 읽기에서 발동될 수 있다. 영화를 보았더라도 이 부분은 그래서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2장은 '고량주'다. 과거 회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1장 사건 당시도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여러 시간이 겹쳐진다. 그럼에도 주인공 집안에서 주인공인 또우꽌의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된다. 1장에서 빠진 부분이 2장에서 채워지는 것이다.

 

3장은 '개들의 길'이다. 개들의 길. 항일을 하던 시기, 사람들의 삶이 개들의 삶과 비슷하기에 이렇게 표현했나 했더니, 개들의 길.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보통 때라면 장례를 치러 다른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했으련만 그것이 불가능하고, 또 집에서 기르던 개들이 야생 개가 되어 시체들을 먹으며 지내는 장면.

 

그야말로 참혹한 장면이다. 시체를 뜯어먹으려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개들과 그를 지키려는 애들의 싸움. 이렇게 마을은 평상시의 삶을 잃어버린다. 사람도 개들도...

 

4장은 '수수 장례식'인데... 1장에서 2년 정도 경과했을 때를 기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간은 다시 1장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은 자주 겹치고, 사건들은 순서대로 나오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 섞여 있음이 바로 중국인들이 항일의 어려운 시기를 거쳐 왔음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 민중들의 모습이 나온다. 주인공인 위잔아오와 또우꽌은 팔로군에도 국민당군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둘을 다 불신한다. 다만, 팔로군 쪽에 좀더 마음이 가 있을 뿐이다.

 

이들은 민중에게는 또다른 억압 세력에 불과한 것이다. 소설에서 항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갈등을 벌이는 팔로군과 국민당군, 그리고 이 둘에 거리를 둔 민중들을 보여주고 있다. 항일 전쟁 시기라고 해서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민중들의 삶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장은 '이상한 죽음'이다. 그 시기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사건들이 표현되어 있다. 지금도 일본은 난징에서 자행한 학살을 부인한다고 한다. 그들은 그냥 모르쇠로 일관한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점을 민중의 시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그들이 작은 향촌인 이 마을에서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들을 저질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장에서 5장까지 동일한 인물, 동일한 지방, 비슷한 시기가 나온다. 어느 하나를 읽으면 다음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모두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이라고 해도 좋고,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좋다. 결코 짧지 않은 소설이지만 흥미롭게 읽힌다.

 

게다가 우리는 중국과 비슷하게 일본에게 맞서는 시기를 거쳐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소설을 통해서 전쟁이 일으키는 비극을 알게 되니, 식민주의 정책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이러한 제국주의로 인해 인류가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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