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를 부탁해 소설x만화 : 보이는 이야기
박서련 지음, 정영롱 만화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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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 제사. 엄격한 형식을 고수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일. 부모의 제사만이 아니라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를 제사 지낸다는 종가집 맏며느리.


잊을 만하면 제사가 돌아오지 않을까? 부모의 제사를 함께 모셔도 명절 두 번에 네 번의 제사가 되는데, 부모를 따로 모시면 명절 두 번에 여덟 번의 제사. 그러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이때는 잊을 만한 시간도 없다.


간소하게 지내면 괜찮겠지만 어디 그런가? 특히 종갓집에서는 더 심하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콩 심어라 팥 심어라 한다면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못 견딜 일이 된다. 얼마나 부담이 많이 되면 제사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곤 할까?


하지만 제사가 지니는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또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것이 제사라고 한다면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


살아 생전 본인이 좋아하던 음식 중심으로, 또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시간도 조정하고 한다면 제사를 고인에 대한 애도 표현으로, 즉 고인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부담이 아니라 고인과 관계 맺었던 사람들이 고인과 자신들의 마음을 잇는 시간으로 제사를 활용한다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도 제사는 여전히 힘든 일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제사를 대행하는 사람이 나온다. 집안일을 대행하듯이, 제사 역시 집안일 중 하나니까 대행을 할 수 있다. 주관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니까.


그런 설정, 지금 제사 대행업이 있는 줄은 모르겠는데, 음식은 해주는 업체가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직접 절까지는 아닐 테지만, 소설에서는 절까지도 하는 대행업을 하고 있다. 하긴 중요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면야 뭐.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있겠지만, 제사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고, 이런 추세 속에서 가족들이 애도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사 대행업체를 통해 제사를 지내는 일도 생길 수 있겠다.


아이들 돌잔치, 부모님들 회갑잔치(요즘은 거의 하지 않지만 더 연세가 드시면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팔순 또는 구순 잔치 등)와 각종 상조회를 보라. 많은 집안일이 대행으로 바뀌었지 않은가. 그러니 제사 역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마음을 다해 제사를 치러주는 인물을 통해서 결국 제사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앞부분이 '둘이 먹다 하나가'라는 박서련이 쓴 소설이고, 뒷부분이 '죽어도 모르는'이라는 정영롱이 그린 만화다. 소설은 제사 대행업을 하는 수현의 관점에서, 만화는 죽은 정서(이름을 바꾸기 전에는 영란)의 관점에서 전개가 된다. (소설에 나오는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속담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한다)


같은 사건을 다른 두 화자가 서술하고 (보여주고) 있는데, 소설도 소설로 읽어도 좋고, 만화도 만화로만 봐도 좋다. 두 작품을 함께 보면 더욱 좋고. 물론 책의 순서대로 소설부터 읽어야 한다. 수현이 정서의 집으로 가고,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까지가 소설이니까. 그 다음 부분이 만화에서 더 이어지니.


두 작가의 작업이 이렇게 잘 맞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설과 만화가 잘 연결이 된다. 그러면서 마음을 여는 장면을 만나면서 감동을 받게 된다. 제사 역시 그렇다. 제도와 형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애도하는 마음, 즉 마음을 잇는 일이라는 점을 소설과 만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작품은 제사의 문제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마음,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일, 그것은 또 산 사람들의 마음과도 잇는 일임을 생각하게 된다. 애도하고 추모하는 방식으로서의 제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대행업체에 맡기든 본인들이 직접 하든지 간에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제사가 되도록, 산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제사가 아니라 산 사람들의 마음도 풀어주는, 그래서 죽은 사람의 마음이 당연히 풀리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에서 더 좋은 것은 소설가와 만화가, 그리고 편집자가 이 작품을 위해서 주고받은 내용들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창작일지'라는 이름으로. 그것 역시 좋았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이.


짧지만 긴 울림을 주는 소설과 만화다. 좋았다. 이런 작품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 작품집 중 소설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인용한다. 진정한 제사란 바로 이런 것. 화려하고 형식, 규격에 맞는 제사가 아니라. 하, 이런 제사.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제사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사상 앞에 이부자리를 편 부부의 이야기다. 부부는 해도 지지 않은 초저녁에 상을 차리고 제사상을 받으실 시어미니 묘까지 산보를 다녀온다. 돌아온 후에는 상 앞에 자리를 갈고 잠깐 누웠다 다시 어머니 묘에 간다. 그렇게 날이 저물기도 전에 제사가 끝난다. 어느 해에 제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유식한 학자가 그 집 앞을 우연히 지나다 부부를 보고 무슨 짓이냐고 묻는다. 남편은 대답한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신 소원이, 내가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는 것이었으니 아내와 사이좋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마땅하고, 어머니는 눈이 어두워 밤길을 다니지 못하시니 모시러 갔다 다시 모셔다드리는 게 이치지요. 학자는 그들의 제사야말로 가장 훌륭한 제사임을 인정하고 만다. 

  제사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마음이 으뜸이고 형식은 거들 뿐.'(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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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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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主客顚倒)'와 '운칠기삼(運七技三)'


우리가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종속시키고 있음을 개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미 개발된 기술,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기술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발했지만, 한번 개발이 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기술이 계속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그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퇴보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킨다면 더더욱.


현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서 일 텐데...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 아닌가.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하자.(인공지능은 지금 논외로 하고) 그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특정 연령 때까지는 금지한다는 법안을 제출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제정이 되었나? 내년부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말이 있으니...그런데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중이 아닌 다른 시간에는 사용해도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학교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말인지. 학교에 따라 교칙을 정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학생들에게 문제라면 성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연결되는 현실 때문 아닌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으로 연결이 되는 것.


즉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대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물질성이 약화되는 것. 또한 자신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스마트폰 속의 공간이, 만남이 중요해지는 것. 


이는 바로 관계의 악화로 나타나고, 어디서 언제든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래저래 스마트폰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는데... 이 스마트폰으로 경험하는 온갖 사이버 세상들을 스마트폰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경험을 없애는 데 스마트폰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7장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현상도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런 주장이 아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세계가 주는 편리함이 바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주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구현되는 기술의 세계가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객체로 전락했다. 아니라고?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자. 운전을 하는 성인이라면 아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하이패스를 장착하지 않은 차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빠름과 편리함. 최신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데, 그것을 누가 찾는가? 운전자?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곳으로 간다. 주객전도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왜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학교의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준 채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노는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마저도 줄고 있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사회적관계서비스망을 이용하고 있다. 게다가 학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간을 갖기 싫어한다.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지식을 암기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림이 사라지고,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적관계서비스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삶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불확실성, 우연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두렵게 한다. 그래서 없애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기술을 통해서 이를 없애려 한다.


하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운칠기삼' 아닌가 한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30%정도라면,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이 70%라는 것. 그 70%가 바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데, 기술시대에 우리는 그런 70%의 우연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운이라고 하지만 이 운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변 존재들과 관계맺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들을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을 다 없앴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까?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삶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견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희망사항이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술의 문제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기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편리와 빠름에 익숙해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 주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술을 기업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330-331쪽)는 말이 헛된 울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대한 기술관련 기업들에, 그러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니... 참.


우리의 삶이 '운칠기삼'이라는 것, 그래서 기술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책을 학교에서부터 읽고 토론하게 하면 어떨까? 아래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니까...기후재앙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 일어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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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19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질의 작품을 읽으면서 놀라운게....20세기 초에 이미 무질은 경혐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리뷰를 보니 그제 본 내용이 떠오르네요..ㅎㅎ

kinye91 2025-12-19 13:56   좋아요 0 | URL
네, 그렇게 좋은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기도, 시대를 앞서가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남자들의 방 - 남자-되기, 유흥업소, 아가씨노동
황유나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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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상품으로 대하는 태도, 자신이 돈을 지불했으니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 이것은 인권에 위배되는 생각과 행동이다.


사람은 상품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노동력을 상픔으로 판매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노동자들도 자신을 상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유독 사람을 상품으로 여기는 분야가 있다. 바로 유흥업소다. 요즘은 남녀 불문하고 상품으로 취급한다고 하지만 (호스트 바 같은 경우?), 그럼에도 여성은 더 상품처럼 대우받는다. 그래도 된다는 듯이. 


유흥업소를 찾는 대다수의 사람이 남성이고, 유흥업소에서 이들을 접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현실. 여기에 충격적인 것은 우리나라 법이다.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즐기는 사람들이 남성이고, 그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인식이 법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식품위생법 시행령 제22조 제1항'에 보면 '유흥종사자란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부녀자인 유흥접객원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유흥종사자가 '부녀자'로 법에 명시되어 있다. 여성이 유흥종사자란 말이다. 남성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우습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을 추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어찌 여성이어야만 하는지.


법이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니 이도 문제지만 단순히 법을 넘어서 사회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가부장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데... 물론 저자가 지적하듯이 '부녀자'를 '사람'으로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이 법에 나온 문구는 바뀌어야만 한다.


이 책은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어떠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상품으로 여기는 남성들의 모습, 그러한 모습을 '남자들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


'남자의 방'이 아니라 복수형인 '남자들의 방'이라고 한 이유는, 어떤 특정한 남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라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구조적으로 '남자들'의 사고와 행동이 고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법 개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법은 빠져나갈 구멍이 늘 있기 마련이니까.


하여 남성 여성 구분없이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이 당연한 말이 쉽지 않음은 저자 역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기업의 접대비 손금계산에 유흥업소에서의 접대비를 불포함한다거나, 경찰이나 검사를 대상으로 한 유흥업소 접대는 성매매 유무와 상관없이 뇌물로 강도 높게 처벌하는 방법은 고려해볼 법하다'(219-220쪽)고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흥업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이러한 업종이 계속 살아남는 이유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 제도의 문제임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남자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도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로 '남자다움'이 '남자 되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겠지만 -없어야하겠지만- 예전에는 남자들이 군대에 가기 전에 집단적으로 성매매를 하던 일들이 그런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어쩌면 남자들도 남자다움 또는 남자되기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책이 바로 [맨박스]란 책이었는데, 이 책과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역시 '남성 만들기는 타자로서의 여성 없이는 불가능하다'(52쪽)고 하고 있으니... 여성들을 타자화하고 그들을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 상품으로 삼음으로써 만들어지는 남자 되기 또는 남자다움이란 바로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말한 내용에서 여성을 남성으로 바꾸어도 통하지 않을까 한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되는 것이다.' (시몬느 드 보부아르. 조홍식 옮김. 을유문화사. 1988년 중판.  326쪽 프랑스어 원문은 이렇다고 한다. “On ne naît pas femme: on le devient.”)


  다양한 종류의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공통점은 이들이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 여기에 그들의 인권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일은 성별을 불문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자들의 방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방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여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종속적인 (성별) 권력관계와 이를 합리화하는 경제논리'(220쪽)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별과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칸트의 말처럼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하여 '유흥산업을 비롯한 성매매산업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평범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장소이고, 그 특정한 장소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게 한국 사회다.'(223쪽)는 말이 나올 수 없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세상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남자다움, 여자다움' 또는 '남자 되기, 여자 되기'가 아니라 '사람다움, 사람 되기'가 아닐까 한다. 


성별이 사람의 삶에 권력 관계로 들어서지 않도록 해야함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이렇게 남성들의 유흥을 위해 상품이 된 여성들의 삶을 조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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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사회 - 시각문화로 읽는 현대 중국
탕샤오빙 지음, 이현정 외 옮김 / 돌베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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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의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는 책. 현대 예술이라고 하지만 미술에서도 유화나 수채화 또는 추상화보다는 주로 판화에 관한 내용이 많고, 영화에 대한 설명이 있는 장이 있다. 즉 중국의 현대 예술, 특히 미술과 영화를 중국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장점은 중국에 대해서 단일한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단일체제라고 하고,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보면 중국의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 중국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특히 이 책의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과 같이 다양성이 존재하는 나라임을 명심하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예술을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편협한 이해에 빠지기 쉽고 또 예술을 독단의 늪에 빠뜨리는 격이 될 것이다. 서양의 미술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유독 중국의 미술에 대해서는 또 중국의 영화에 대해서는 하나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렇게 되면 무엇을 놓치게 되는지를 구체적인 작품과 작가를 통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중국 현대 미술과 영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을 얻게 되며, 예술가들이 어떠한 고민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작품 활동은 당대 사회를 관찰하고 당대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살리려는 노력이었다는 점.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하나의 틀에 가두는 것은 문제라는 점을 저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어 그 작품들을 보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그 작품들이 창작되게 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통해 중국 역사와 문화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 중국을 바라보는 서양의 시각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들이 중국을 보는 시각이 고정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러한 서양의 시각을 받아들이게 되면 중국의 다양성을 놓치게 되어 중국의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궁극적인 주장은, 당대 중국 시각문화의 역사적 특수성과 보편적 의의를 만들어낸 열망들과 변화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점점 더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한 사회를 좀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402쪽)라고 저자가 말하고 있으니...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동안 중국 문화에 대해서 지니고 있던 자신의 시각을 인식하고 그 시각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들의 관점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문화대혁명을 저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그 문화대혁명이 미술에 끼친 영향을 설명하면서,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관점을 여전히 잇는 예술가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렇다고 문화대혁명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하진 않는다. 어느 한쪽에 치우친 시각을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은 다양한 중국 시각문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으니,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을 주욱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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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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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한다. 그 사람에 대해 맹목적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눈이 먼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이때의 판단은 남에게도 해당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그래서 이러한 맹목적인 사랑은 비극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또 표현도 하지 않은 채 상대에게 나를 알아달라고만 하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을 몰라주면 서운함을 느끼고, 그 서운함이 지나치면 상대에 대한 미움, 증오로까지 가게 된다.


증오는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를 어떻게 증오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미움으로 증오로 변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관계도 없는 존재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움과 증오가 가장 쉽게 발현되는 관계는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일 수밖에 없고, 그 점을 이 소설집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소설집에 실린 '그 개와 혁명'은 이러한 미움을 잘 극복한 상태의 가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상대가 지닌 결함을 감쌀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함보다는 사랑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소설은 유쾌하고 발랄한 기분이 들게 한다. 죽음이라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점을 느끼게 해주는데, 이는 결함을 모르쇠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조차도 사랑으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 '우리 철봉 하자''내가 머물던 자리'다. 결함이 도드라지는데, 그렇다고 결함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는다. 그 결함을 딛고 나온다. 홀로가 아니라 함께. 따라서 결함이 미움과 증오로 가게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서로의 결함들이 보이고 연결이 되면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된다.


함께 철봉을 하는 장면이나 트럭을 함께 타고 나가는 장면은 그래서 희망을, 밝음을 전해준다. 결함보다는 사랑을... 미움과 증오가 사랑으로 감싸이는 모습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팜'이라는 소설은 '그 개와 혁명'의 전 단계라고 볼 수 있겠다. 한때 운동권이었던 아버지와 그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딸. 여전히 딸이 아버지를 받아들인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서로의 결함을 감싸는 전조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분재'는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소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만 적절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그렇다고 서로를 미워하지는 않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 상대를 사랑하기에 배려한다고 하는 행위들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할머니(차연)-엄마(수진)-딸(윤재)의 모습을 보면서 느낄 수 있다.


그냥 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관계는 없다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표현을 해야 한다고, 자신의 결함도 드러내고 또 사랑도 드러내야 한다고, 그래야 결함을 사랑이 감쌀 수 있다고. 가족이니까 무조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이니까 더 많이 표현해야 한다는 점을, 차연이 식물들에게 쏟는 관심, 말들을 딸인 수진에게 했더라면, 마찬가지로 수진 역시 딸인 윤재에게 했더라면, 이들의 관계는 더 돈독한 관계이지 않았을까.


물론 소설에서 이들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거리'가 느껴진다. 물리적 거리도 있지만 심리적 거리가 많이 느껴진다. 무엇이 그런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할까 했더니 바로 이런 표현들이다. 


'차연은 주말마다 오는 윤재에게 부러 오지 말라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손주가 오면 일단 좋은 음식을 먹여야 했다., 그것뿐일까. 몸단장도 해야 했다.' ('분재' 중에서. 255쪽)


가꾼다? 손녀 앞에서. 이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심리적 거리. 교육과는 상관없다. 왜냐하면 이미 손녀도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성인인 손녀 앞에서도 단장을 하고 요리도 자신이 해야한다고 여기는 것, 이것이 '거리'다. 결코 편하게 마음을 놓아버리는 만남이 될 수 없는 관계.


이렇게 비틀어진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사랑과 결함'이다. 어른들의 사랑과 결함이 오롯이 자신에게 전해졌다고 믿는 인물. 그런데 어떤 것이 더 우세하게 전해졌을까? 자신의 현재를 만든 것이 사랑일까 결함일까? 그것은 모른다.


다면 이 소설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여기는 고모(순정)가 동생의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을 때다. 그만큼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일 텐데... 그러한 순정의 모습은 바로 벽(턱)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로 나타난다. 


나는 쓸모가 있는데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느냐고, 자신의 온몸을 벽에 부딪히는 청소기. 그것은 사랑을 주었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고모 순정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것은 다른 가족을 바라보는 순정의 관점이 왜곡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왜곡되어 있다고 하기보다는 오래되어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상황이 바뀜에 따라 자신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모습, 그것이 바로 벽에 부딪히는 로봇청소기와 같은 모습으로 고모(순정)이 행동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니 가족 간에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른 행동,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과거에 했던 것처럼만 하면 안 된다. 그건 결함이다. 변화, 그것이 사랑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집에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시절(초등학교), 우리는 계절마다(중학교), 그 얼굴을 마주하고(고등학교)'는 한 여자아이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가장 가까운가? 우선 가족, 그리고 친구다. 그런데 이들과 관계맺기에 실패하면 어려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가족끼리도 결함을 감싸주기가 쉽지 않은데, 친구 사이에서 한번 드러난 결함은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한때로 그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음을,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상대의 결함만을 보았을 때는 더더욱 힘들어짐을 잘 보여주고 있다.


3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에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일들이 남탓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중에서. 133쪽)


그렇다. 상대의 결함은 잘도 보았으면서 자신의 결함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그 결함을 알았을 때, 그 다음의 삶은 달라진다. 내 결함을 알면 상대의 결함을 감쌀 수 있는 마음의 빈공간이 생기기 때문인데, 그래서 어두우면서도 어떤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객관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상대의 결함을 결함으로만 여기지 않고 감쌀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사랑이라는 전체집합 속에 결함이라는 부분집합이 있다는 것. 결함을 아예 모른 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사랑의 한 부분집합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말 아닐까. 


이 소설집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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