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디지몬 - 길고도 매우 짧은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시리즈 67
천선란 지음 / 위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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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빠져들게 하는 존재들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한 가지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할 때가 있다. 왜 그런지 모른다. 그냥 빠져든다. 그 빠져듦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 생각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빠져듦이 워낙 강렬해서 이성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 천선란에게는 디지몬이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무언인지 모를 외로움에 빠져 있던 천선란에게 다가온 디지몬. 천선란은 자신에게도 그런 디지몬이 왔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디지몬은 디지털 세상에 존재하는 것.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리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꿈꾸기에 이곳에서 저곳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이곳의 힘듦을 이겨낼 수도 있다.


이곳의 힘듦을 이겨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또한 내 삶임을 다른 세상의 존재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작가 천선란이 성장담이라고 봐도 된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된 지금까지의 일들을 디지몬과 엮어서 이야기해주고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디지몬을 꿈꾸던 때에서, 디지몬에 나오는 인물들과 자신의 삶을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그들의 문장이 '용기, 우정, 사랑, 지식, 희망, 순수, 성실, 빛'(32쪽 주)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자신이 마음에 들어했던 인물과 그 인물의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작가는 디지몬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발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때론 슬픈 장면이 나오는데, 그 슬픈 장면이 작가 천선란이 쓴 작품과 겹치면서 아, 이래서 작가가 이런 작품을 썼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디지몬들이 지닌 문장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녀야 할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몬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작품이고, 천선란 같은 민감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삶과 연결지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어린 시절에 빠져들었던 그 무엇이 단지 어린 시절의 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책의 뒷부분에 가면 천선란은 자신에게 온 또다른 디지몬을 이야기한다. 실제 디지털 존재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엄마를.


그런 엄마와 함께하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는 작가의 모습에 뭉클하기도 했다. 그래,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 상황 속에 있는 나는 유일한 존재고, 그것은 나의 유일한 경험이니까.


그것이 바로 나니까, 그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작가 천선란을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좋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왜 천선란의 작품이 따스함을 품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기도 했고. 


그러면서 나에게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도 생각해 보고. 내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 내 삶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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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메리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 열정과 창조의 두 영혼
샬럿 고든 지음, 이미애 옮김 / 교양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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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스프와 메리 셸리. 어쩌면 두 명 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고, 둘 중 한 사람만 들어본 사람, 또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SF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둘 다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한 사람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괴물의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가 메리 셸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셸리'란 이름에서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하는 '바이런, 키츠, 셸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기 쉬운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의 어머니다. 비록 딸 메리를 낳고 열흘 만에 산욕열로 죽지만, 남겨진 작품들로 인해 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는 고드윈과 결혼을 하니, 메리 셸리는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주장한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시민혁명이 일어나던 때,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시민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인식하던 때, 이때도 여성은 시민이 되지 못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 여성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지던 때가 이때다.


그리고 남성과 동등함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때가 이때인데, 그럼에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출판을 통해서 주장을 했으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겪어야 할 고통을 지금에서 짐작하기는 힘들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생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성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자립을 주장한다. 자신이 할일을 찾아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남성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결국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육아에서도 마찬가지고. 사회를 변혁하고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당시에는 동등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고군분투한다. 사랑에도 독립적이지만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고 그 일을 끝까지 유지하려 한다. 메리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인 셸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입으로 살아가려 한다.


남편이 시를 쓴다면 자신은 소설을 쓰는 메리 셸리.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당시에는 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벌어지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 여성의 삶도 남성의 삶과 동등하다는 것, 그리고 남성성이 얼마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메리 셸리의 과업이 된다.


이 책은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딸인 메리 셸리의 삶을 교차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 당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 사회적 비난 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고자 했지만 아이를 임신했을 때 또 사랑에 실패했을 때, 아이를 잃었을 때, 남편을 잃었을 때 등등 그들이 느꼈던 절망감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


어쩌면 딸인 메리 셸리는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고, 자신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시대를 앞서간 사람임은 분명한데,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는지, 어떤 오해를 받아야 했는지를 두 모녀의 삶을 통해서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시대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어떤 편견 속에 시달리고 사라져 갔는지... '나혜석'의 경우도 떠오르고... 나혜석이 독립적인 자신을 주장하지만 당대 사회에서 어떻게 가려졌는지, 어떻게 핍박을 받는지를 보면 19세기(엄마는 18세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남성과 여성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닌,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온전히 평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방대한 내용이지만 연대 순으로, 작품 활동 순으로 서술되어 있고, 또 엄마와 딸이 한 장씩 교대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당대 시대적 제약에서 그들이 지녔던 한계도 간과하지 않고 (그들의 내밀한 사적인 생활이 사료를 통해 재구성되고 있어, 당시에 그들이 느꼈던 감정들을 우리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 시대를 돌아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특히 그동안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유명한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메리 셸리와 관련해서는 '바이런, 셸리'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관련해서는 '토마스 페인, 윌리엄 고드윈'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 따로따로 알고 있었던 이 인물들이 서로 관계됨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여성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을 헤쳐왔는지를 알 수 있어서 더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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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자유의 브로맨스 - J.R.R. 톨킨과 C.S. 루이스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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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R. 톨킨, C.S. 루이스. 우리에게는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둘이 우정으로 뭉친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냥 소설가로만 알았지. 그것도 전혀 관계 없는.


이래서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다양한 책들을 통해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책은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문이자 길이됨을 이 책을 통해서 강화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톨킨이 나이가 조금 많지만 세상을 먼저 뜬 것은 루이스이고, 그 둘은 소설가이기 전에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고 하고, 함께 작품 읽기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환상소설을 쓴 작가라는 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에서, 현대 산업사회보다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 둘을 무소유와 무권력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고, 이를 아나키즘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정신이 작품에 어떻게 나왔는가를 살펴보고 있는데, 우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배경이 산업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고 한다. 또한 등장인물들 역시 공동체, 우정을 중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고.


두 사람이 쓴 많은 작품이 나오고 있지만, 대표작만 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둘이 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분제를 거부하지 않았다.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반지의 제왕]에서도 신분제 사회는 유지되니까. 하지만 전제군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군주가 등장하고, 신분제라고 하지만 거의 평등하게 지내는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함께 지내는, 무권력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서 행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으니...


이 책은 톨킨과 루이스의 생애를 다루면서, 그들이 어떻게 만났고, 우정을 어떤 식으로 이어갔으며, 작품 활동은 어떠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 둘의 관계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의 작품을 '무소유와 무권력을 향한 것'이라고 정리를 하고 있는 저자는, 이 둘을 통하여, 또 이들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 역시 '자유와 평등, 자유와 자치와 자연에 입각한 우정의 사회, 우정의 공화국을 이 땅에도 세워야 한다'(276쪽)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우정을 통해 맺어진 관계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리고 그런 우정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했음을 알려준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을 읽은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쓴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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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
김진주 지음 / 얼룩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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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한 번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난 예외라고 생각했다. ...... 범죄를 당한 사람들은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내 일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진짜 몰랐다. 그게 내가 될 수 있단 걸." (12쪽)


누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간다. 자신에게 닥치기 전에는. 장애 역시 마찬가지다. 남 일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하지만 남 일이 아닐 때가 있다. 그때가 되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진다.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날 피해자가 된다. 이유 없다.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연이 겹칠 뿐이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묻지마 범죄'라고 하지 않고 '이상동기 범죄'라고 한다. 그렇다. 피해자의 의사와는 관계 없는 가해자의 이상동기에 의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은 피해자다. 가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은 더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해자는 사건이 벌어지고 수사와 재판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정보를 차단당한다고 한다.


국가가 대신에서 가해자를 응징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재판 날짜도 모르고, 재판 관련 서류도 제대로 볼 수 없고, 더 이상한 것은 수사 과정에 대한 정보를 피해자가 얻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피해자 구제에 관한 것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그런 점들을 몰랐다가 직접 경험하면서 알게 되고, 그런 제도를 고치려고 노력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책에 있다. 사법제도가 피해자 구제를 기본으로 하고, 피해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고, 가해자가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교정하는 것이 뒤따라야 하는데...


가해자 교정을 중심으로 하고, 피해자는 거기서 소외되고 있는 모습을 이 책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공론화 한다. 왜? 재판으로 안 되니까. 사회적 압력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게 된다.


공론화가 되면 사법부에서도 관심을 가진다.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방송을 하기 시작하면 많은 것들이 그 전과 달라진다. 이런 모습을 보는 피해자의 심정은 어떨까? 과연 사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철저하게 피해자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피해자들이 사건이 벌어진 뒤 얼마나 힘든 일들을 겪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법(경찰, 검찰, 판사)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발견한다. 


이 엉성함이 피해자의 억울함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러면 피해자는 사건의 피해뿐만이 아니라 그 뒤의 과정에서 더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피해 구제를 받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마음의 상처가 더해지기도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안 되기 때문에 저자가 나섰다고 한다. 피해의 공포 속에 위축된 삶을 떨치고, 더이상 그런 피해들이 일어나면 안 되기 때문에, 또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더한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했다고 한다. 피해자를 돕기 위한 연대 활동에도 참여한다고 한다.


함께해야 고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므로. 함께하면서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고, 불합리한 것들을 개선할 수 있으므로. 그렇게 본인도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를 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세상이 좋아지는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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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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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빨리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책이다. 이런 책은 드문데, 구절구절이 마음에 와 닿고, 그 구절을 좀더 마음 속에서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 도처에 인용하고픈 문장들이 있지만, 굳이 인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솔닛의 말을 인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더 이 책의 내용에 맞는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마지막 부분은 꼭 인용하고 싶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그저 발성할 수 있다는 동물적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화들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렇게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세가지 있다.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이다.

가청성이란, 그의 말이 청취된다는 것을 뜻한다. ... 신뢰성이란, 그가 말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믿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존재라면, 그에게는 권리가 있다. 그의 말은 그 권리를 위해서 일한다.' (286~288쪽)


그렇다면 나에게 솔닛의 책은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을 모두 갖춘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솔닛이란 이름 자체에 신뢰감을 느끼고, 책을 찾아 읽으니 말이다.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 또는 보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찾게 되니.


솔닛은 이 책의 끝부분에서 손금을 봐줬던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당신은 결국 운명대로 살고 있네요." (296쪽)


이 책은 바로 솔닛이 겪은 이 우여곡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이 목소리를 지니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 역시 목소리를 지니지 않은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책을 발간하고, 또 행동으로 나서기도 하고.


그동안 읽었던 솔닛의 책이 어떤 과정 속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책들의 내용을 다시 반추하면서, 아 이렇게 솔닛이 우여곡절을 겪고서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알게 해주는 책이다.


운명대로 산다는 말은 곧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문제에 맞닥뜨려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세상에 없던 자신을 찾아내고 세상에 있는 존재로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손금을 봐주는 사람의 말을 빌려 한 말은 곧 솔닛의 삶을 정리하는 말이 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단해진 솔닛.


또한 보이지 않는 또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삶들이 결코 쓸모없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솔닛. 그런 솔닛의 문장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시 '산산조각'이 생각나기도 했다. 온전한 불상도 소중하지만 깨어진 불상도 그 자체로 소중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우여곡절이고, 그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우리 역시 운명대로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또 솔닛의 삶을 보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그 과정에서 웹툰 '화산귀환'의 장면이 생각났다. 상처를 통해서 더 강해진다는 119화의 장면. 


(화산귀환 - 119화 : 네이버 웹툰 (naver.com),  하지만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이 웹툰과 솔닛의 말은 차이가 있다. 물론 웹툰에서 주인공인 청명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지만, 이는 주인공인 청명이 바로 이야기를 하는 주체라는 말이 된다, 아직 다른 인물들은 청명의 이야기를 따라갈 뿐이다. 그들은 솔닛처럼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제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그 웹툰은 청명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될 테다. 우리 역시 솔닛의 말을 솔닛의 말로만 따라가면 우리의 말,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우리도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솔닛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솔닛은 글에서 자신의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302쪽)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깨뜨리기 위해서도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닛은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받아들였다. 바로 자신의 운명, 자신이 해야할 일을 직면했다. 


운명에 직면해서 회피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솔닛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어 밖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기존 이야기를 깨뜨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 운명대로 살고 있는 솔닛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그 과정, 이 책에 잘 나와 있으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자. 읽으면 읽을수록 솔닛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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