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레이토스의 불 -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
에르빈 샤르가프 지음, 이현웅 옮김 / 달팽이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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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에르빈 샤르가프의 자서전이다. 에르빈 샤르가프... 몰랐던 사람이다. 과학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면 알겠지만, 과학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내게는 전혀 낮선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이런 나에게도 친숙한 이름인 왓슨-크릭이 발견한(?) DNA 이중나선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샤르가프의 연구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과 함께... 


그렇다면 이 에르빈 샤르가프라는 사람도 생물학 쪽에서는 꽤 권위를 지닌 과학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책 제목 옆에 쓰여 있는 설명은 '한 자연과학자의 자전적 현대 과학문명 비판'이다. 샤르가프는 현대과학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음을 알려주는 말인데...


너무도 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과학은 전문가끼리도 소통이 안되는 경우가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융합이니 통합이니 하는 쪽으로 여러 학문이 교류하고 함께 작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요즘 과학풍토에 대해서도 샤르가프는 비판적일까 생각을 해보니, 그의 자서전을 읽은 결과 그는 요즘 이런 융합 과학 쪽에도 비판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샤르가프가 비판하는 과학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전문분야만으로는 더 나아갈 수가 없으니 다른 전문분야와 합쳐 나아가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 과학의 방향이다. 반면에 샤르가프는 작은과학을 추구했다. 그것은 각 분야로 더 쪼개지는 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넘어서지 않는, 인간 자체를 넘어서지 않는 과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의 표지에 천지창조 그림 중에서 신이 아담에게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장면에서 둘의 손가락은 맞닿아 있지 않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샤르가프는 바로 이 상태에서 자신의 삶, 자신의 과학을 한다고 한다. 떨어져 있는 이 공간을 넘어서지 않으려는 자세. 이것은 둘의 손가락을 맞닿게 함으로써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현대 과학을 비판하는 그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 샤르가프는 물리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들은 바꿀 수 있지만, 인간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생물학 분야에서 이루어낸 과학 결과물들은 비가역적이라고,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고, 인간이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추지 않는다고, 그 유기체들은 스스로 살아가게 된다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고, 그런 점을 명심하고 추구하는 과학이 작은과학이라고 한다.


그러니 샤르가프는 동키호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고집세고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과학자 취급을 받는다. 


이 책은 왜 샤르가프가 그렇게 현대 과학에 비판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살아온 시대를 통해 과학자들의 위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다.


책의 첫 시작은 원자폭탄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그 사건을 접하고 미국을 떠날 생각을 한다. 여기서부터 샤르가프가 생각하는 과학을 알 수 있게 된다.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프로젝트를 맨하탄 프로젝트라고, 엄청난 숫자의 과학자들이 모여 작업을 했고, 그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으며, 결과는 인류에게 참혹한 폭탄 생산이었다는 것.


기술과 권력에 종속되는 과학은 진정한 과학일 수 없다는 것, 그런 과학이 이제는 인간의 몸을 향하면 인간 복제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에 대해서, 그는 과학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시 책의 끝부분에 가면 그의 생애를 한 장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시대를 살고 있다. 샤르가프가 우려했던 부분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중.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샤르가프의 예측을 빗나가게 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더 많은 고려,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윤리들이 과학에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 나는. 그럼에도 샤르가프의 경고, 또는 우려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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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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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교육의 힘에 대해서 말하겠지 하는 기대를 했다. 이런 구절에서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109쪽)


그런데 아니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서 관점이 뒤틀린 사람이 제 관점을 찾아가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은?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이건 '배움의 발견'이 아니라 '교육의 해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배움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위에서 주어진다는 생각. 사실 교육이 내면에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능력들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책은 끝나갈 때까지 광신적인(?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기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모습은 '배움의 발견' 아니라 '교육에서의 탈출'이라고 해야 맞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지닌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으려나?


학교, 정부를 사탄으로 보는 모르몬교도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엄마에게서, 이들에게는 병원 진료조차도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되니 참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생이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


하지만 아무리 가리고 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어야 한다. 자식이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인 존 웨스트오버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자식을 견딜 다른 관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관점, 자신이 믿는 종교, 거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계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독립해 나아가려는 타라는 회개시켜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눈 앞에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기도할 줄 아는 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발 앞에 어린아이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213쪽)

어떤 운명도 아버지와 그 여성을 함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잃을 것이다. (214쪽) 


이 말이 핵심이다. 자, 나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있다. 둘 다 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있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로 남아 가족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타라는 타일어 오빠의 말을 듣고 대학에 간다. 대학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와 헤어지지 않았다. 자신 속에 있는 아이 말을 듣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지니고, 다른 관점을 알기 시작한다. 배움의 발견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쪽)


이 부분은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언니인 오드리에게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가부장제인 가족 형태를 바꿀 수가 없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저항을 했던 오드리는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나중에 타라에게 하는 말을 보면 섬뜩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드리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숀이라는 오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막는다. 엄마에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면 타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


맹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틀을 깨고 자신들을 바라볼 거리가 없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자신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교육만 있다. 아버지가 제시한 교육. 즉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잡지 않는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온 자식들은 볼 수가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배움을 발견한다. 배움의 발견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ㅈ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373쪽)


그렇다. 배움의 발견은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움, 고통, 그리고 인내,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분열. 하지만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471쪽)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   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7쪽)


교육이라는 자아를 지니기 위해서 거쳐왔던 지난한 세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타라는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이겨낸다. 그렇다. 이미 타라는 배움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던 아이와 이제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책 저자의 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14쪽)고 했다. 그렇디.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자식들을 허용했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삶을 자식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고,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는 타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라가 결정해야 한다. 아버지의 교육과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에서 독립한 자신의 삶을 찾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쓴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다. 아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뭐 이따위 가족이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종교 강요, 가정 폭력. 홈스쿨링을 빙자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조금이라고 그 틀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배제하는 모습. 심해도 너무 심한 폭력이다. 아이들 머리를 쥐어박아도 경찰서에 갇히는 그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자신의 관점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지, 그러한 교육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인데... 


정말 소설 같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결론이 궁금해져서. 이 글을 썼으니 적어도 저자가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읽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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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 오리아나 팔라치, 나 자신과의 인터뷰
오리아나 팔라치 지음, 김희정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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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타협하지 않음. 저널리스트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이지만, 작가도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하나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살아간 오리아나 팔라치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을 읽어보라.


사실과 진실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사람. 이 사람에게 기자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은 동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두 생활에서 글쓰기 방식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데서는 차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긴 외국 기자를 알 수가 없지. 그껏해야 퓰리처상이라는 이름이나 들어봤지, 우리나라 기자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탈리아 기자, 그것도 세상을 뜬 지 십 년도 더 된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현대 작가들이 쓴 이탈리아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고...


알라딘에 오리아나 팔라치를 검색해 보니, 소설 작품도, 또 그에 대한 소개한 책도 제법 있다.물론 소설은 절판이거나 품절인데,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었다. 어쩌면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로서 또 작가로서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가. 중요한 일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기자, 작가들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고, 또 특정 정파의 이익에 따라 사실을 짜깁기 해서 진실을 호도하는 저널리스트들을 많이 보아온 터에 침묵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삶, 불편하게 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여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기레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널리즘이 상실되어 있으니...


그렇다고 이 책은 오리아나 팔라치가 직접 쓴 자서전이 아니다. 죽은 뒤 그가 쓴 글들에서 뽑아 편집한 책이다. 하지만 모든 글이 오리아나 팔라치가 직접 쓴 글이니 자서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우선 침묵하지 않는 삶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말하고 있다.


작가나 기자는 사랑받고 환영받고 칭찬받는 직업이 아니다. 그들의  역할은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과 잘되는 것을 들려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나 기자의 임무는 나쁜 것과 문제가 되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미움받고 공격당하고 모욕받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76쪽)


기자만이 아니라 작가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작가는 허구를 창조하는 사람이기에 진실에서 멀어질 것 같지만, 아니다. 작가는 사실들을 간략하게 전달하는 기자와는 달리, 보이지 않는, 드러나지 않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작가 역시 진실을 전달하는 사람이 된다. 진실과 멀어진 작가의 생명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왜 작가 역시 진실되어야 하는지 오리아나 팔라치의 말을 보자.


회고록이나 자서전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었으므로 소설 형식이 필요했다. ... 일대기에서 끌어내어 정교하게 다듬고 재창조하여 더 심오하고 더 큰 진실로 옮겨놓은 이야기이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일화는 객관적인 잣대로 설명될 수 없다. 저널리즘은 축소하지만 소설은 확장한다. ... 소설은 시와 같다. 그 시간과 그 장소, 그 사람을 초월해서 내일과 모레에도 유효하게 남아 있으며, 사진이 보여줄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이야기이다. (197-198쪽)


이렇게 진실을 말하려면 절대로 침묵해서는 안된다. 편안함만을 추구해서도 안된다. 불편해져야 하고, 남들을 불편하게 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강하게 주장되기 전에 오리아나 팔라치는 이런 말도 했다. 세상을 자유롭고 진실되게 살려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느껴지는 일일 것이다.


남자들의 주요한 문제는 경제적이고 인종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서 비롯되지만, 여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여자라는 사실에서 나오기도 한다. 해부학상의 어떤 차이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체의 차이와 더불어 여자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터부를 말하는 것이다. (79쪽)


당신이 남편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더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을지라도 그는 당신이 먼저 일어나서 커피를 준비하고, 먼저 집에 달려와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당신 기분과 관계없이 그의 기분에 따라 장단을 맞춰야 한다. (185쪽)


이 말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을 불편하게 보기 힘든 사람이다. 세상의 절반이 선천적인 조건으로 인해 불편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못 느낀다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여성의 문제를 오리아나 팔라치는 이란의 최고지도자였던 호메이니를 인터뷰할 때 겪는다. 그 과정을 읽어보면 오리아나 팔라치가 이렇게 말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오리아나 팔라치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한다.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용기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용기 있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두려워도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109쪽)


이 말 때문이라도 '나는 침묵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는 사실을 통해서 진실을 왜곡하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소위 기레기들이 자신이 들은 말의 앞뒤를 자르고 자신의 구미에 맞는 말들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내보내는 행태와 비교하면 새겨들어야만 한다.


내가 증오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인터뷰이가 내게 한 말을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주의를 기울였다. (127쪽)


가장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자세다. 이렇게 사실을 통한 진실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멀리하려 하지만 진실을 가릴 수는 없으므로, 이런 사람을 불편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진실은 더욱 잘 드러나게 된다.


나는 불편한 것을 말하는 불편한 여자이자 불편한 이야기를 쓰는 불편한 작가이다. (196쪽)


불편한 작가라고 했지만,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오리아나, 자신의 자유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기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거부할 수 있었던 사람. 어떤 정권의 구미에 맞는 기사를 쓰지 않은 사람.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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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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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떠올렸다. 자연 속에 스스로 들어가 자신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명랑한 은둔자 아니겠는가.


사람들사이에서 살아가는 일도 좋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생활을 하는 삶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했다. 그러니 이 책 역시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가꿔가는 사람이야기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됐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이 책은 사람들을 떠나 자연에서 사는 삶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의 이야기다.


함께 살지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 이를 고립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고독이라고 하면 괜찮을 듯하다. 고립은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은 결국 자신을 가두게 되지만, 고독은 자신의 세계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만남의 일시 정지라고 할 수 있으니...


캐럴라인 냅. 참으로 복잡한 내면을 지닌 사람이다. 알콜 중독에도 빠졌었고, 거식증에 빠져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던 사람.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그런 과정을 솔직하게 써내려 간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중독에 관해서 이런 말이 있다. 명심해야 할 말이고, 캐럴라인 냅이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중독이든, 어느 시점이 되면 당신이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행동이 당신을 통제하게 된다.(162쪽)


그렇다. 자신을 놓아버리는 단계까지 이르면 심한 중독이 된다. 거기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진다. 그 전에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왜?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 책은 이렇게 내밀한 자신의 생활을, 감정을 가감없이 잘 드러내고 있어서 캐럴라인 냅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들이 단순한 인간이 아님을, 아주 복합적인 존재임을 생각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단지 자신의 내면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생각도 솔직하게 쓰고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성추행에 관한 글에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캐럴라인 냅이 자신이 겪은 일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권력과 섹슈얼리티의 오용'이란 글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어떤 글에서는 너무 예민한 것 아냐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읽다보면 공감이 가는 글들이 많다. 섬세한 마음결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 그 다름과 함께 하는 일. 그것은 함께 하되 홀로일 수 있는 시간,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 책 읽을 필요가 있다. 읽으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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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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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가 심각해지는데, 사실 말로만 심각하다 심각하다 하지, 기후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직접 눈 앞에 닥친 일이 아니고, 정부 관료들에게는 아무리 해도 성과가 나지 않는 일이며, 과학자들에게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일이기 때문일 것읻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돈이 되지 않는 일에 투자할 기업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정부나 과학재단들도 가시적인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투자를 잘 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식물의 성장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은 늘 지식을 위한 과학이 아닌 전쟁을 위한 과학에 몰렸다. (40쪽)

 

그러니 기후 위기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카산드라의 예언밖에는 되지 못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정확히 말해줘도 누구도 믿지 않고, 또 행동하지 않는 그런 일.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 책의 또 다른 쪽을 보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나무를, 또는 식물을 많이 심으면 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예측되는 향후 수백 년에 걸친 온실가스 수준의 환경을 만들고 거기서 고구마를 기르는 실험을 해오고 있었다. 이 온실가스 예상치는 우리가 탄소 배출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계속 현재처럼 산다면 생길 것이라고 예측되는 수치다. 고구마들은 이산화탄소 양이 늘면서 더 크게 자랐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커다란 고구마들에는 우리가 아무리 비료를 줘도 영양소가 더 적게 들어 있고, 단백질 함유율도 낮았다. (387쪽)

 

공기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느라 힘을 그쪽으로 써버리는 식물들이 영양에서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식물은 땅과 하늘, 양쪽에 모두 걸쳐 있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 삶의 양식을 바꾸어야만 지구가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생활의 전환 없이 기후 위기는 해결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은 자런 호프라는 과학자가 식물과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고, 식물과학자의 이야기라 해도 좋다. 그것은 바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인간이 식물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눈을 벗어나 다른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인간의 삶도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사고방식이 절실했다. 어쩌면 세상을 식물들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식물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라 식물들의 세계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기초한 환경 과학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113쪽)

 

바로 다르게 보기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것. 그래야 그 대상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거리두기. 어쩌면 식물을 인간의 일부로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대상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기 때문에.

 

모든 대상은 다르다. 모든 대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다 다른 대상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또는 무기물이든.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르게 보기는 곧 함께 살기다. 함께 살기에 실패하는 경우는 과학자들의 세계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자런 호프 역시 이런 일을 많이 겪었다. 과학자 집단은 자신들의 모습을 설정해 놓고,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적당한 학위와, 외모, 그리고 말투까지...

 

전 세계 공공기관 및 사립 기구들에서는 과학계 내 성차별의 역학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이 복잡하고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결론지었다. 내 제한된 경험에 따르면 성차별은 굉장히 단순하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가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다. (262쪽)

 

어디 성차별뿐이랴. 모든 차별이 바로 이렇다.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과학계에서도 이런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 소수자가 과학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차별을 이겨내야 한다. 과학계의 차별뿐만 아니라 연구 기금 부족까지 이겨내야 한다. 자런 호프는 이 과정을 이겨내고 식물에 관해서 연구할 수 있는 안정적인 길로 접어든다.

 

그 지난했던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무척 흥미롭고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과학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를 아이를 대하는 자런 호프의 이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이를 놓아주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367쪽)

 

이 말을 과학으로 바꾸어보면 자신의 성과(결론-주장)를 놓아줄 수 있는 과학자,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과학자가 좋은 과학자라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자식을 놓아보내지 못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듯이, 자신만의 것을 고집하는 과학자 역시 좋은 과학자일 수 없다.

 

자런 호프는 이런 것을 식물, 나무의 입장에서 깨닫게 된다. 새로운 시각, 그리고 식물들이 보여주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해석하려는 모습에서 과학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단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한 사람의 자서전에 그치지도 않는다. 한 사람이 성장하면서 어떻게 주변과 관계를 맺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식물에게서 배워가는 과정도,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도, 또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맺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인 구달은 '닥터 두리틀'이란 소설을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했다. 어떤 영장류 학자는 제인 구달의 이야기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했고. 과학을 어렵게만 여기고, 재미없게만 여기는 사람, 이런 책들을 읽으면 과학에 흥미를 가질 수도 있다.

 

과학을 무슨 공식만으로 교육할 수는 없다. 과학은 우선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호기심. 그리고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행동.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에 이 책은 적절하다. 단지 과학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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