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슬픈 열대
폴 고갱 지음, 박찬규 옮김 / 예담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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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고흐다. 그리고 장소로는 타히티다. 또 그를 떠올리면 소설 '달과 6펜스'도 떠오른다. 읽은 것 같은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 어쩌면 제목만 보고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해설만 읽고 넘어갔을 수도 있고. 아님, 어릴 때 읽었는데,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도... (이 참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여간 고갱이라는 사람은 요즘 컴퓨터 검색 용어로 치면 연관 검색어에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 파리라는 대도시의 삶을 견디지 못해 타히티라는 원시성이 강한 곳으로 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한 사람.

 

고흐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불화로 헤어졌지만, 고흐에 관한 그의 글을 읽어보니, 고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가족과 헤어져 살았는데, 어찌보면 무책임한 가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이 가족과도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글들이 많다.

 

그렇게 헤어져 살고 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생각을 그치지 않았던 고갱. 부인인 마테에게도 타히티에서 같이 살자고 말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홀로 타히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고갱.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림은 잘 안 팔리고, 그래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타히티에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자살 시도까지 했다고 하니... 고흐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했는데.

 

이 책에서 고갱이 쓴 편지글을 보니 자살 시도를 했지만 비소(?)를 너무 많이 먹은 바람에 다 토해서 살아났다는 것.(223쪽)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심장마비(이게 사인이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216쪽)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고생은 현세에서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은 삶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가정 생활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자식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견뎌내야 했으니...

 

하지만 그는 역작을 남겼다. 제목도 철학적인 작품.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

 

이 작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아무렇게나 그린 미완성 작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네. 자기 작품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이 그림은 내가 전에 그린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나고 앞으로도 이보다 더 좋은 작품은 나오기 어려우리라고 믿네.

  죽기 전에 내게 남은 모든 힘과 극한상황에서 나오는 고통스런 열정을 모두 쏟아붓고 순수하고 티없는 이상을 불어넣었네. 그래서 작품의 미숙함은 사라지고 삶이 솟아올라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지.

  이 그림은 모델과 기교를 배제하고, 그림이 내세우는 규범들을 무시해버렸네.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전부터 이런 것들을 뛰어넘고 싶었네. (223쪽- 226쪽) 

 

이렇게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남겼다. 그가 살던 곳을 과연 슬픈 열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남긴 곳인데... 슬픈 열대라고 하기보다는 작품의 안식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슬픈 열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고갱이 살아가던 그곳이 다른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곳에 불과했다는 것. 동등한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고갱이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그는 말년에 탄압받는 원주민들을 위해 일을 하려 했다고 한다. 탄원서도 내고. 그에겐 그곳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억압받고 무시 당하는 그런 곳이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일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자신의 예술을 지속하게 해준 그곳을 그는 적어도 동등하게 대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갱 자신이 직접 쓴 글을 통해서 그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어떤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고갱의 글을 읽음으로써 고갱의 작품에 더 많은 의미가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글만큼 고갱의 그림이 많이 수록되어 있으니, 여러모로 고갱을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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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만한 당신 - 함께 있어 든든했던,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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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만한 당신'이다. '가만한 당신'에 이어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도 35명의 사람들 부고가 실려 있다. 적어도 부고를 실을 정도면 무언가는 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렇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 억지로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애쓴 사람이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아갔을 따름이다.

 

그런 충실함이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평판보다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나간 사람들.

 

물론 이 책에는 세파에 휘둘려 살아간 사람도 나온다. 하지만 그에게도 자신의 삶으로 인해 남에게 무언가를 준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세상을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 여기에 '함께'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지금처럼 힘든 시대에,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는 시대에, 이 책 발문에 실린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김탁환이 쓴 발문인데... 이런 문장이다.

 

'함께'란 단어가 제목과 부제에 모두 포함되었다. '함께'란 단어만 보면 존 버거가 던진 질문이 떠오른다. "연대가 중요한 것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나요?" 이 책에서 '함께'가 반복되는 까닭이 혹시 지금 이곳의 고통이 두 배 이상 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함께 도모하지 않으면 쓰러지고 지쳐 목숨까지 위태로운 시절에 '함께 있어 든든했던,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가 나와서 다행이다.

 

그래, 이렇게 함께 했던 사람들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좋다. 그들로 인해서 세상이 조금은 더 따뜻해졌음을, 지금도 이러한 사람들이 존재함을 생각하게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사람이 없다는 것. 우리나라 사람도 실어줬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는 내내, 지금 우리나라도 겉으로 드러난 사람들 말고도 정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티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음에도 그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이 된 사람을 기리는 작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곁에도 이렇게 '함께' 있어주었던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게 한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 앞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무엇보다도 '함께'가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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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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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하다'는 말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말이다. 즉 남 앞에 나서서 특별한 존재로 우뚝 솟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다.

 

어떤 사람들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말이 잘 들어맞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꼭 알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 이야기하고 남들에게 칭송을 받기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

 

이 책은 제목에 어울리게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가만한 당신'이라는 말에 맞게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 다섯 명의 부고'

 

부고라면 죽음을 알리는 글인데, 이 책은 이들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지를 기록한 전기문이라 할 수 있다. 약전(略傳)이나 소전(小傳)이라고 할 수 있는 글들인데... 한 명 한 명의 삶이 절대로 '가만한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정말로 이름 없이 살다간 필부들은 이렇게 남들에게 부고조차 남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부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제목에 맞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자신을 남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름을 알리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갔을 뿐이다. 이런 삶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좀더 좋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읽어가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네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따라서 이 책은 참 의미가 있다. 이들을 기리는 부고 형식을 택했지만, 우리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된 존재들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들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변해가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처음 들어본 사람이다. 그들이 한 일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에도 그들은 그렇게 앞에 나서기 보다는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다.

 

여성의 삶을 위해서, 흑인들의 삶을 위해서, 재소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서, 존엄한 죽음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등등... 이 사람들 이름을 여기에 적어두지는 않겠다.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기보다는 이들이 살아온 삶을 기억하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에 관한 이 책. 읽을 만하다. 읽어야 한다. 우리들 세상에 소금이 된 사람들 이야기니까. 다음 권은 '함께 가만한 당신'이다. 이 책도 함께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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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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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를 읽으면 참 행복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를 만난다는 것.

 

세상이 악보다는 선이 더 많다는 것, 받는 것보다 주는 행위에서도 행복을 더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동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읽으면서는 삶에 대해서, 삶이 자신의 몸에 어떻게 새겨지는지를 생각했다. 내 몸은 내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유미주의니, 탐미주의니 하는 것들을 떠나 그냥 그렇게 그의 작품을 읽으며 삶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자였다고 한다. 동성애자. 그게 무엇이 문제인가? 서양의 고대에서는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한 종류 아니었던가.

 

기독교가 지배 윤리로 작동하면서 동성애는 배격해야 할 사랑이 되었다. 그래서 동성애는 죄악이고, 질병이고, 어떻게든 사회에서 격리하든지, 치료하든지, 처벌해야만 하는 악이 되었다. 감정이 죄가 되는 현상이 벌어진 것.

 

하여 오스카 와일드는 작가로서 정점에 있을 때 소송에 휘말리게 되고, 패소하면서 감옥에 가게 된다. 그는 정점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이 책 표지에 적혀 있는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라는 말처럼 사랑을 했다고, 그것을 밝혔다고.

 

그래서 그는 감옥이라는 심연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 심연은 그에게 그냥 바닥이 아니다. 삶을 더 깊게 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자신이 한 사랑을 되돌아 보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사랑했던 사람을 더 깊게 볼 수 있게 된 시간과 공간. 바로 그 장소.

 

그 장소, 심연으로부터 그는 편지를 쓴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 내용 중에서 몇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나 역시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나는 내 삶이 한 편의 눈부신 희극이 될 거라고 믿었어. 당신은 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우아한 인물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삶은 한 편의 역겁고 혐오스러운 비극이었던 거야. 그리고 그 대재앙의 사악한 - 한 가지 목적만의 추구와 편협한 의지력의 발현에서 - 동인은 바로 당신이었지.  (88쪽)

 

사람은 상상력을 먹고 자라지. 우리는 상상력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현명해지고,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나아지고, 지금의 우리보더 더 고귀해질 수 있어. 상상력에 의해 우리는 삶을 하나의 전체로 볼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오직 상상력에 의해서만 실제적이고 이상적인 관계 속에서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지. 오직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게 상상된 것만이 사랑을 살찌울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증오는 무엇이든 먹고 살을 찌울 수 있지. (90쪽)

 

증오는 우리를 눈멀게 하지.  ... 사랑은 아주 멀리 떨어진 별에 쓰인 것도 읽을 수 있게 하지만, 증오는 당신을 철저히 눈멀게 해 담장으로 둘러싸인 옹색한 정원, 방탕함으로 꽃이 시들어버린 저속한 욕망의 정원 너머는 볼 수 없게 만들지. 당신의 끔찍한 상상력 부족 - 당신 성격 중 실제로 치명적인 단 하나의 결점 - 은 전적으로 당신 안에서 살았던 증오의 결과물이야. (92쪽)

 

예술가는 오직 표현을 통해서만 삶을 상상할 수 있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겐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리스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는 우리를 경외감으로 가득 채우는 광범위하고도 경이로운 상상력으로, 목소리를 잃어버려 표현을 하지 못하는 고통의 세곌르 자신의 왕국으로 삼아 스스로 그곳의 영원한 대변자가 되었지. ... 아름다움의 개념을 슬픔과 고통을 통해 실현하는 사람의 예술적 기질과 함께, 어떤 생각이든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되지 않는 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느끼고는 자신을 고통의 인간의 이미지로 구현한 거야. 그는 그런 식으로 예술을 매료하고 지배했어. (170-171쪽)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고통을 겪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지. 그리고 난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188쪽)

 

사실, 나의 몰락은 삶에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요구한 데서 비롯된 거야.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수치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고 경멸할 만한 행위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며 마지못해 사회에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는 거야. (194쪽)

 

속물은 사회의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힘들을 지지하고 돕는 사람, 그리고 인간이나 어떤 운동 속에서 역동적인 힘을 만날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지. (196쪽)

 

그는 이렇게 감옥에서 더 깊어졌다. 그런데 그 깊어짐이 작품활동으로 나왔어야 하는데, 더 이상의 작품활동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감옥에 가기 전 작품들인 것이다.

 

삶이 예술을 이긴 경우라 해야 하나? 이미 감옥에 다녀온 와일드로서는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사회 속 개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늘 동성애자라는 딱지가 따라다녔을 테니, 개인주의자로서 사회를 무시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딱지였을 것이다.

 

주홍글씨...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처럼 정점까지 올라갔던 사람에게는. 하지만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편지글을 남겨주었다. 편지글을 통해 그의 삶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고, 또 그가 예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어 그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 책 뒷부분에는 앙드레 지드의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지드가 만난 와일드. 이 글들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한다.

 

와일드가 이런 일을 겪은 지 100년도 더 지났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와일드가 겪은 일에서 자유로운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와일드가 개인주의적인 일을 사회에 호소했다는 실수를 자책하고 있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개인주의를 사회적 압력으로 굴복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더더욱 읽어야 한다. 우리에게 여전히 부족한 것이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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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나혜석 지음, 장영은 엮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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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많이 들어본 작가다. 나혜석. 나는 그를 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화가로서의 나혜석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나혜석이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온전한 자아를 글을 통해 내보낸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림으로도 자신을 표현할 수 있지만, 글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기득권을 지니고 있던 존재들에게는 더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충격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글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림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이 집중하는 것은 새롭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사생활이다. 흠집을 내기 위해, 그들을 끌어내리기 위해 조그마한 잘못을 트집잡기 시작한다.

 

본말전도가 시작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 또 그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한 말이 아무리 옳아도 시대와 불화하는 생활이 약점으로 잡혀 처절하게 무너져내리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권리와 같은 권리를 주장하는 존재들을 무너뜨린다.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선동으로. 하여 그들 주장에 접근하기도 전에 이미 등을 돌리게 만든다. 나혜석도 그런 반격을 받게 된다.

 

여성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한 나혜석은 사생활로 인해 당시 주류 사회에서 내쳐지게 된다. 그가 주장한 것과 상반되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렇게 나혜석은 그림이나 글로 후대 사람에게 알려지기 보다는, 남성 권력들의 이야깃거리로 남겨지게 된다.

 

프랑스 유람, 거기서 최린을 만나 불륜에 빠져 결국 이혼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우리나라 여자 화가. 이정도로. 자, 여기에는 나혜석이 무엇을 주장했고, 어떤 삶을 살고자 했는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흥미거리, 또는 시대를 앞서 연애를 해서 불운한 삶을 살아간 사람 정도로만 남는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나혜석이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를 그의 글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나혜석이 쓴 글을 읽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달랑 몇 문장으로만 기억하는 나혜석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이혼한 경과를 당당하게 글로 써서 발표할 수 있던 사람이 그 당시에 얼마나 되었겠는가. 나혜석은 자신이 어떻게 결혼을 했고, 또 이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글로 써서 세상에 공표했다. 이 책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이다. '이혼 고백장'이란 글이다. 아마도 이 글을 통해 뒷담화로서의 나혜석이 아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나혜석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글 전에 소설도 발표했다. '경희'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 경희는 나혜석의 젊은 시절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교육, 당당하게 한 인간으로 인정받으려는 모습. 그런 모습들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소설은 교육을 받은 여성이 집안일도 잘하는 것으로 표현해, 여성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남자들보다 두 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들은 공부만 하면 되지만, 여자들은 공부에다 집안일도 잘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던 시절이었음을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혜석은 점점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글로 써 발표한다. '모母 된 감상기'에서 나혜석은 임신과 출산이 여성을 얼마나 속박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서 표현한 사람,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산 사람. 어쩌면 시대를 앞서 갔기에 더욱 힘든 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혜석은 글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나혜석은 '글 쓰는 여자'가 되었을 거고, 그런 글들이 남아 씨앗이 되어 발아되어 싹을 터서 열매를 맺기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경희'에 나오는 장면으로 글을 맺는다. 경희가 자각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나혜석 자신이 자신에게 한 말이리라.

 

  경희도 사람이다. 그다음에는 여자다. 그러면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  ...

  오냐, 사람이다.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찾지 않으면 누구더러 찾으라 하리! 산정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것도 사람이 할 것이다. 오냐, 이 팔은 무엇하자는 팔이고 이 다리는 어디 쓰자는 다리냐?

  경희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두 다리로 껑충 뛰었다.

 (소설 '경희'의 끝부분. 이 책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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