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열전 2 한서 열전 2
반고 지음, 신경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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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엄청난 양이다. 벽돌책이라고 하기도 한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니. 중국 한나라 때의 인물들을 수록했으니 양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능력 있는 사람들과 또 역사에 남길 인물을 선정해서 수록했으니...


하지만 열전에 포함된다고 해서 모두 본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모두가 잘살았던 것도 아니다. 끝이 안 좋은 사람도 많았고, 자신 때는 성공했을지라도 자식 대에, 그것도 아니면 자손 대에 망한 집안도 꽤나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전제군주 시절이니, 능력보다는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살 수 있었던 시대의 한계가 명확하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건의해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사형에 처해졌으니... 상소문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목숨 걸고 의견을 내야 하는 시절이라는 말이다.


또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는 있겠으나 사서 편찬자의 말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반고가 찬하여 말한다에서 00는 수년 간 승상이라는 직위에 있었으나 특별히 공을 세우지 못했고, 자리만 지켰다고 하는 인물들이 꽤 있었으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승상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는데 중국 한나라 때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갔다는 얘기고,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런데도 이들의 목숨은 파리와도 같아,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으니...


열전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 속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찾으라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면, 이런 열전을 읽으며 목숨 보전을 하기 위해서는 또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렇게 목숨을 부지해도 욕된 이름만 남기니까 좋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옳다고 여기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2권에서는 무신에서 문신으로, 즉 나라를 세우고 안정을 이뤄가는 과정이 지나 이제는 안정기에서 다시 쇠퇴기로 접어드는 때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무신보다는 문신의 비중이 커지고 있고, 이들을 통해서 유학이 중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유학이 나라의 학문으로까지는 정립되지 않았음을, 황제에 따라 또 열전에 나오는 인물에 따라 유학을 숭상하고 공부한 사람과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함께 실려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도 여전히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하여 과거제와 같이 선발로 관리를 뽑는 제도는 더 뒤에 나올 것임을...


이러한 추천제는 장점도 있지만 추천하고 추천받은 사람끼리 작당한다는 문제도 있으니 능력있는 사람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황제가 중심일 수밖에 없는 전제군주 시대에는 그러한 인재들을 잘 등용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도 행복한 시절을 만들어주는 길이었을 텐데, 다른 말로 하면 '적재적소'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서열전' 2권이다.


이 권에서 주목한 사람은 '금일제'다. 투항한 흉노의 태자라고 하는데, 무제에게 중용되어 무제 사후에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인재라면 국적을 따지지 않고 중용하는 황제. 그러한 황제를 통해 '적재적소'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데...


뒤로 갈수록 '적재적소'라는 말이 무너지면서 아첨을 일삼거나 또는 외척 세력이 대두하는 모습을 '한서열전' 2권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적재적소'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 선출직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그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도 이 말을 생각해야 하지만, 선출된 대통령이 임명하는 많은 장관들과 다른 공직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과연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제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많을수록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통령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미디어가 발달해서 많은 것들이 공개된 세상에서도.


착각 속에 살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열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니까. 그들의 다양한 행적을 통해서 지금을 살필 수 있으니까. 


적재적소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유취만년',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유방백세' 아니겠는가... 그 점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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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열전 1 한서 열전 1
반고 지음, 신경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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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한나라 역사책. 세계사 시간에 배운 적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이름만 알고 있다가 도서관에 '한서 열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빌려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이거, 도대체 이 인물들은 나라에 충성한 거야, 황제에게 충성한 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들이 백성을 위한다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충신이라 불리는 자들은 백성들을 위해 황제에게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할 텐데, 과연 이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이 열전을 통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또 황제에게 충언을 하는 내용은 나와 있는데, 그러한 충언이 백성들의 삶에 밀접하게 관계맺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백성은 멀다. 황제는 가깝다. 마치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과 비슷하게, 이들은 백성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 황제 곁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럼에도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건의한 사람들도 있었지. 그들을 대체로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 테고. 


그 점이 이 '한서 열전' 1권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역사는 그러한 충신을 기리는 역할을 해서, 다른 사람들이 본받게 하고자 하겠지. 반면에 간신이라는 사람들도 열전에 기록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위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보기로서 작동하도록 한 것일 테고.


반고는 한나라 후기 사람이다. 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이 전한 사람이니, 그가 사기 열전에서 다루지 못한 인물들이 이 '한서 열전'에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차례를 찾아보니 2권에는 사마천도 등장한다. 그렇지. 사마천이 '한서 열전'에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


1권을 읽은 소감은 '유방백세 유취만년(流芳百世 遺臭萬年)'이다. 좋은 행적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나 나쁜 행동으로 악명을 떨친 사람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 남긴 이름이 아주 다르게 받아들여지지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는데, 이 때 사람이 남기는 이름은 악명, 오명이 아니라 좋은 이름을 말하는데, 그럼에도 나쁜 행적으로 그 이름을 역사에 깊게 새긴 사람들이 있다. 이 '한서 열전'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황제의 친인척들 중에 '00왕'으로 봉해진 자들의 행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런 인간들이 남들 위해 군림하다니... 권력을 탐하는 자들끼리 죽이고 죽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이들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 툭하면 전쟁, 전쟁이니... 전쟁에서 자기들이야 명령을 내리면 끝이지만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목숨이 걸려 있는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법에서 가장 최우선이라는 말을 명심하는 장군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 '한서 열전'에서도 흉노와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데, '이광, 이릉, 곽거병'이나 진나라 멸망 후 다시 패권을 겨누는 초한 전쟁 때 장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들 중에는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인 장군들도 있었으니...


이런 열전을 읽으며 전쟁의 폐해가 과연 역사에 기록된 숫자로만 인식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도 된다. 몇 천을, 몇 만을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그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냥 숫자로 남겨질 수 있을까?


숫자 이면에 있는 사람을 보아야 하는데, 역사는 많은 전쟁에서 사람을 숫자로 대체한 경우가 많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전쟁, 그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다시 서로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것. '한서 열전'에는 이러한 죽임이 많이 나와 있다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살육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나라 초기에는 전쟁을 잘 수행한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한서 열전'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기 자식에게는 이름을 남긴다.


이름과 더불어 행적도. 그러므로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도 어떤 인물들의 이름이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았고, 어떤 인물들의 이름이 악취를 풍기는 이름으로 남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 앎에로 이끄는데 이러한 '열전'만큼 좋은 역할을 하는 책도 없다. 반고는 그러한 점을 살펴서 당시에 자신이 찾을 수 있는 자료를 찾아 사실적으로 열전을 기록했다고 한다.


역사를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에 따라서 정리하는 것, 우리나라 실록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그러한 기록들로 인해 좋은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일 권은 '진승-항적 전'으로 시작한다. 진시황이 죽고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큰 세력을 형성한 항우. 유방이 항우를 항우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항적'이라 했다고 하니, 한때 황제를 칭했던 항우조차도 죽은 뒤에는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살아서의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


진승에게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는 말이 나왔다고, 그렇게 진나라 말기부터 시작한 일 권은 사마 상여로 끝난다. 뒤로 갈수록 장군보다는 문인들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동중서'와 '사마 상여'가 대표라고 하겠다. 한나라에 유학을 숭상하게 만든 동중서. 글로써 한 무제를 감동시킨 사마 상여.


글의 힘을 깨닫게 하는데, 이 열전에는 이러한 글의 힘을 '상소문'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주장을 글로 황제에게 전해 역사에 남게 한 것들. 하긴 말로 한 주장들이 어떻게 제대로 후대에 전해지겠는가. 잘못 전해질 수도 있는데, 상소문은 원본이 남아 있는 한 그대로 전해질 테니, 글을 쓸 때 더 정성을 들여 쓰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고.


계속되는 2권. 더 많은 인물을 만날 시간이다.


아쉬운 점 

각 권의 앞에 한나라 연표와 이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표로 정리해 보여줬으면... '한서'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열전이면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인물들이 한나라 역사에서 어느 왕 때에 활동했는지를 한 눈에 들어오게 해주는 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서 열전'에는 한 인물을 이야기한 뒤 그 자손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있다. 손자에 손자 대에 이르러 대가 끊겼다는 등의 서술이 있는데... 표가 있으면 더 이해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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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밖의 이름들 -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아서
서혜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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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끝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변호사님은 무슨 일을 주로 하세요?"

이 질문을 여전히 종종 받는다. 예전에는 그 질문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조금은 단단하게 말할 수 있다. "저는 피해자를 위한 일을 주로 합니다." (253쪽)


변호사에게 무슨 일을 주로 하느냐는 질문은 아마 당신은 무슨 사건을 주로 맡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다양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을 주로 다루는 변호사들이 있으니까.


그러니 이런 질문을 받으면 변호사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느낌에, 아마 내밀한 무엇을 끄집어 낸다는 느낌에 답을 하기가 꺼려졌을 수도 있다.


검찰에도 '특수통'이니 '공안통'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으니 변호사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법이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때에 변호사에게 무슨 일을 주로 하세요라고 질문한다면, 그 질문에 담겨 있는 의도를 파악하려 할 것이다.


'변호사'라는 말을 풀이하면 표준국어대사전에 '변호-사(辯護士)「명사」 『법률』 법률에 규정된 자격을 가지고 소송 당사자나 관계인의 의뢰 또는 법원의 명령에 따라 피고나 원고를 변론하며 그 밖의 법률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변호사라는 말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변호사에게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마음?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마음? 아니면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만들지 않겠다는 마음? 그도 아니면?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설마 변호사가 돈을 추구하지는 않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전에 읽은 [시장으로 간 성폭력]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돈을 목표로 성폭력 가해자를 변호하고, 그런 변호의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더욱 괴롭히는 변호사 이야기였으니까. 가해자를 적극 옹호하는 변호사들도 있으니까. 왜? 그의 행동을 지지해서? 글쎄? 


물론 가해자도 변호를 받아야 한다. 그건 최소한의 인권이니까. 그러나 마음이 있는 변호사라면 가해자의 잘못을 확실히 지적하고, 그 잘못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변호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해자의 변호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보다 더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


이것을 넘어서서 온갖 법기술을 동원해서 가해자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변호사, 금력, 권력을 지닌 사람들을 변호해 그들이 책임을 지지 않도록 하는 변호사. 이런 사람을 변호사라고 할 수 있나?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지. 법률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변호사들과 구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인권변호사'하면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변호사라면 당연히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지 않을까, 또 변호사라면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을 변호사라고 한다면 굳이 '인권'이란 말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호사는 모두 사람의 인권을 위해야 하기 때문에.


이 글의 저자는 그래서 인권 변호사라는 말을 거부한다. 또한 자신은 거창한 사명감 때문에 피해자를 위한 일을 한다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잘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어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변호사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일을 할 테고, 그렇게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인권은 기본이 될 테니까. 또한 변호사 역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 또 자신의 마음이 가는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테니, 그런 변호사여야 한다.


이 책을 읽어보면 많은 피해자가 나온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일들을 어렵사리 공론화 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그들을 더욱 힘들게 할 때, 함께 있어주는 변호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그런 힘이 되어주는 변호사가 바로 이 책의 저자다. 그러니 그가 '피해자를 위한 일'을 주로 한다고 하는 말을 수긍할 수 있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법률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마음이 없을 것 같은 법에 마음을 담으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은 변호사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의 저자는 그렇게 법에 마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 이런 변호사들이 더 잘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힘이 있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법정 안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변호사. 하여 '법에도 마음이 있'(250쪽)고 믿는 변호사들이.


이런 변호사들로 인해 법은 특정인들만이 다루는 분야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법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에 읽었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의 [호의에 대하여]에도 나오듯이 착한 사람들이 법을 알아야 하고, 착한 사람들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변호사들이 많다면 '피해자들을 위한 일을 하는 변호사'이기 전에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변호사'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법정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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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11-19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턱이 높은 곳...예전부터 병원과 법원이란 공간이 그런 곳 아닐까요. 그런 문턱을 낮추는 사람이야말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턱 낮은 곳을 좋아합니다~

kinye91 2025-11-19 08: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문턱을 찾아 낮추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저도 존경합니다.
 
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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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연예인 못지 않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 작년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방송에서 보던 얼굴이니... 출연 횟수로 따지면 어느 연예인 못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 심판을 진행했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그리고 올해 4월 침착하게 읽어가던 탄핵심판 선고문. 그것을 많은 국민이 지켜보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얼굴은 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단편적으로밖에는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법관의 신상을 어떻게 잘 알겠는가? 신상이라고 해봤자 언론에 알려진 아주 적은 부분밖에는...


그가 탄핵심판 선고 이후에 퇴임을 했다. 그리고 책을 냈다. 책? 좋은 기회다. 문형배라는 판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주어지는 셈이니.


그가 판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 블로그에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올린 글도 있고, 기쁜 마음으로 올린 글들도 있었겠다. 여기에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도 있었을 테고.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보지 않아서 추측을 할 뿐. 이 추측은 책에 기반하고 있고.


자신이 올린 글 중에서 고르고 골라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거의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다. 20년이라면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은 바뀌었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과거 시기의 글들을 실은 이유는 그 글들이 과거에만 매어 있지 않고 현재에도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쓴 글들과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 마지막으로 법원과 관련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읽어가면서 판사 문형배(그냥 판사로 직함을 통일하련다. 전 판사라는 말도 좀 우스우니까)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는 느낌, 판사 문형배 속에 사람 문형배가 들어있음을, 그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7쪽)이라고 했지만, 아니다. 그는 성공했다. (이 성공이 평균인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인지,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인지는 헷갈리지만, 두 경우 모두로 해석해도)


최근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연설 중에 마크 트웨인을 인용한 글을 보면... 그 글은 이렇다.


마크 트웨인은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지만 노벨상은 못 받았죠. 그런 그가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네 마디를 대답으로 떠올렸습니다. 저도 그 답이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들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좋은 평가" 

(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문학동네. 2019년 1판 5쇄. 57쪽.)


이 글을 보면 문형배 판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감사의 말'에 보면 그가 버스를 탔을 때 버스 기사님이 '이 버스에 문형배 재판관이 타고 있습니다. "박수 한번 칩시다"'(405쪽)라고 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이웃의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바로 우리와 같은 삶을 산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한 성공이 어디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두 의미 모두에서.


그만큼 책을 읽다보면 문형배 판사의 사람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가 몇몇 글에서 '착한 사람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평균적인 사람에 대한 호의를 드러내는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법을 몰라서, 그냥 사람은 다 자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겠거니 해서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착한 사람들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최소한 법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니, 그가 사람에 대해 지닌 사랑을 이런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판사 재직 시절 사형 선고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며, 판사의 선고 이전에 당사자들끼리 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 점을 봐도 그는 사람에 호의를 지닌 판사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여는 말'에서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다고 하는 말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판사가 아니라 사람들 곁에 있는 판사 생활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책에서 은인으로 언급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존재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그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표현한 것은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비록 판사로서 또 헌법재판관으로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지만, 본질은 평균인의 삶을 살았다고, 그런 평균인의 삶이 바로 그의 삶에 체화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읽으면서 추웠던 작년 겨울부터 올 봄까지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 추위를 그의 탄핵 심판 선고문을 통해 따스한 봄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도 그의 삶을 통해 계속 그러한 따스함을 우리 사회에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그와 같은 판사들이 있다면 차가운 법이 아니라 따뜻한 법이 될 것이고, 그러한 따뜻한 법이 바로 우리 사회의 정의 실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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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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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틀막.


보니것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무슨 헛소리야? 했을 거다. 당당하게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제퍼슨을 비판하면서 '불이 안 났는데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경우를 빼곤, 제 맘대로 말할 자유가 있거든요.'(153쪽)라고 한 사람이니...


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는 모습을 봤다면, 이 말을 다시 우리에게 들려줬을 수도 있겠다.


'요즘엔 그 어느 때보다 고문실이 많습니다.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는 많죠. 미국이 종종 우방이라 부르는 나라들 말입니다.'(200쪽)라는 말을.


그만큼 그는 말할 자유를 옹호한 사람이다. 그래서 검열을 반대했고, 검열에 반대했던 사서들에 대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에서 검열을 가장 많이 당한 작가' 181쪽-188쪽)


그는 자신의 말할 권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할 권리, 심지어는 극단주의자들의 말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유가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추악한 사상 하나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의 대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미국의 영웅들처럼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188쪽)


이런 보니것에게 입틀막이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비판할 권리를 막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 (누가 좋아하는 말을 쓴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수정헌법1조를 옹호한다. 이 법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로 대학 졸업식 연설문을 담은 이 책은 이렇게 보니것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가 각 졸업식에서 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제 성인이라는 것,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회를 좋아지게 하는 쪽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졸업이 예전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생을 즐기라는 것. 커다란 일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작은 것에서도 인생의 행복을 찾으라는 것.


그래서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라는 말을 때때로 하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제대로 받은 교육으로 세상의 억측가들에게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 억측가들을 독재자라고 해도 좋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선동가라고 해도 좋다. 그런 인물들이 많은데, 지금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아마 보니것이 살아 있었다면 이 트럼프를 풍자하는 말을 통렬하게 했을 텐데... 단지 트럼프 뿐만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지도자랍시고 트럼프의 아류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이니... 보니것이 졸업생들에게 한 이 말,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나라 2030세대 (세대론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것은 이러한 세대론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세대에 속한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살며 떼어낼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 나의 아이들이 이 행성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조용히 해! 나도 여기 좀 전에 도착했어. 내가 므두셀라-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969년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다-라도 되는 줄 알아?" ... 우리는 대체로 동일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28-29쪽)라고 하고 있으니, 이 말 정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에게 그대로 전해줘도 되겠단 생각이 든다.


'억측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남성과 현명한 여성입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우리의 생명과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십시오. 존경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46쪽)


우리나라도 이런 억측가들이 있으니, 보니것의 이 말을 자꾸 되새겼으면 좋겠다. 그가한 것처럼 그들이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거나 사회 생활을 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들에게, 당신들이 배운 것을 생각해라. 그리고 지금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잘 생각해봐라. 우리는 현명해져야 한다는 이 말. 이것은 부탁이다. 그리고 당신들과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세대 구분이 아니라 우리는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니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이 말들.


여기에는 사랑이, 믿음이 그리고 연대가 깔려 있다. 이것이 보니것이 평생 동안 추구한 일들 아니었을까? 이런 그에게 '입틀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를 그는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보니것 연설이 지닌 보편성이 이런 데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참조할 만한 문장이 많은데, 친절하게도 책의 맨 뒤에 '시대로부터 동떨어졌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장 모음'이라는 장이 있다. 보니것의 문장 중에 생각해볼 만한 문장들이 실려 있으니, 그것을 읽어도 좋다.


이 책의 제목을 바꿔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 이 맛에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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