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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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 하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에게 읽히려고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담은 글. 그것이 일기다. 그러므로 일기는 솔직하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드러냄. 드러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자기 성찰의 도구가 일기라면, 왜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을까? 다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이 담긴 글을 통해 어떤 위로를 느끼려고 하는 걸까?


나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내 생각을 비춰보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일기는 더더욱.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세월호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데도 읽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는 여전히,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행 중이니까. 아직도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가 이런 문장을 들고 갔다는 내용의 글을 읽을 때 먹먹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109쪽)


이것은 특정한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런 일들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


누군가의 고통으로 내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는, 그런 사회는 되지 않아야 하고, 물신, 돈에 사람을 종속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여기서 생각의 힘, 아니 생각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발견한다.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행동한다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쉽게, 너무도 쉽게 '혐오'와 연결이 된다는 것.


사건, 사고, 혐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런 사회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너무도 쉽게 다른 존재들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141쪽)


경계심이 풀린다는 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그런 존재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없음을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72쪽)이라는 문장을 곱씹어야 한다.


더 살펴보고 더 고민해보고, 더 들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하는 게으름, 그냥 자신이 살아온 관성대로 행동하는 게으름. 그것은 나만을 고수하는 게으름이다. 오로지 나만이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남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일기'를 읽으면 그런 게으름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읽는다는 일이 게으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까. 그렇게 황정은의 '일기'를 읽으며 작가도 나도 건너왔던 시대를 다시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이라는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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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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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다. '나는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왔다.'(12쪽)고 커트 보니것은 말하고 있다.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13쪽)고,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 어떤 웃음은 두려움에서 나온다.'(13쪽)고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가 결코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베트남 전쟁을 목격했으며, 부시가 대통령일 때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 왜 세상이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지냐고 분노했던 사람. 또한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는 신랄한 풍자로 사람들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러한 풍자에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풍자가 아니라 비난이 될 것이다. 고도로 세련된 비난, 이것이 바로 풍자 아니겠는가. 당하는 사람조차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그러나 이러한 풍자를 아무나 할 수 없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강자를 풍자할 때는. 사실 풍자라는 말은 약자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약자를 풍자할 수는 없다. 약자를 풍자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약자를 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이니. 풍자는 강자에게 해야 하는 것. 강자를 풍자해 약자의 곁으로 강자를 내려보내는 것. 그것이 풍자다. 그러니 풍자를 통한 웃음은 사실 두려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강자에 대한 두려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풍자를 통한 웃음.


이와 비슷한 말로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126쪽)가 있다. 그는 평생을 웃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자, 풍자를 통한 웃음은 바로 세상을 향한 그의 발언이다.


세상이 아무리 개떡같아도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그의 삼촌이 했다는 말...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129쪽)


그럼에도 그는 절망한다. 그렇게 신랄한 풍자를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에. 그래서 뒷부분을 읽으면 슬퍼진다.


'나 역시 더이상 농담을 못 할 것 같다. 농담은 더이상 만족스런 방어 메커니즘이 아니다. ... 너무 많은 충격과 실망을 겪은 탓에 이제 나는 더이상 유머로 방어를 할 수가 없다. 웃음으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이 돼버린 듯하다.'(126-127쪽)


웃음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망가져버렸다는 인식. 그럼에도 그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믈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127쪽)고 하고 있으니, 그는 웃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도, 그것이 안 되더라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그는 신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신에게 맡기기보다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사후에 받을 어떤 보상이나 처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최대한 점잖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추상성에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다.'(81쪽)


이 얼마나 현실적인 말인가? 신에게로 도피하지 않고 자신이 발딛고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자세. 그렇게 살겠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일이라고.


'얘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32쪽)


그렇다. 보니것의 글을 읽으면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사후의 영혼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영혼. 어떻게 살아야 내 영혼이 건강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작품들.


보니것의 신랄한 풍자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우주의 전존재들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에 마음 아파하고 있으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고...


그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책.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여기에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그림과 더불어 실려 있으니, 그것들을 곱씹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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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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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수필집이다. 1948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70을 훌쩍 넘어 곧 80이 되는 나이다. 예전에 60이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진다고... 그리고 70을 고희(古稀)라고 해서, 귀한 나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70이면 노인이라고 명함 내밀기도 그렇다. 80넘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90에 고종명해도 좀 이른 나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었다. 8899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젠 100세 시대다. 그런 시대에 60이나 70은 청춘이다.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70-80대의 몸이 이렇게 많은 인구를 차지한 적은 최근의 일이다.


몸은 아직 예전의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니,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온다. 그렇다.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것이다. 몸이 그것을 일깨워준다. 아마 김훈도 그러리라.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아끼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이야기가 있으니... 또한 병원에 가는 이야기, 친구들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오랜 이야기, 6.25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이 분이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듦. 지혜로워짐. 나이든 사람의 말을 흘려듣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큼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나이쯤이면 말보다는 귀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순(耳順)이라는 말, 귀가 순해진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의 잣대로 구분하여 듣지 않는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귀를 지녔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자신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 보고 듣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남과의 관계 정립에서 지혜로워진다. 또한 특정 경계에 매어 있기 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어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요즘은 60-70대에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이든 사람이 많으니... 특히 정치권을 보라. 이들 대부분은 이순(耳順)인데도 귀가 순하기는커녕, 오히려 귀가 더 사나워졌다.


자신의 잣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자기 틀을 절대로 깨지 않으려 하며, 남의 말도 자신의 틀에 끼워맞추는 듣기를 하는 경우, 그리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리적 시간이 몸을 채우고는 있으나, 현대 의학의 힘으로 과거 중년의 몸을 지니고, 정신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필을 읽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면 읽으면서 그 선입견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까.


김훈이 한 이 말...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331쪽)


그렇다. 이 책은 김훈이 내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는다. 물론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김훈은 내 앞에 없으므로. 하지만 일방적이지는 않다. 내 앞에 없는 김훈에게 말을 건네면서 읽을 수 있으므로.


이렇게 나와 작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수필이다. 이런 수필을 읽을 때는 자신만의 틀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틀을 내려놓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왜 그런지 생각해 보고. 속으로 반박도 해보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읽다보면 귀가 순해진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므로. 나 홀로만 세상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홀로들이 모여 함께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므로. 


김훈의 사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 그러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순한 귀를 갖기 힘들게 하는 상대를 어떻게든 추락시키려는 언어들.


그런 언어들이 판치는 사회는 견디기 힘든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김훈이라는 작가가 '말-언어'에 대해서 얼마나 고심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지 알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말.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말. 그런 말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우리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훈의 이 말,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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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의 말 - 우주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한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칼 세이건 지음, 김명남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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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세이건. 그는 우리를 우주로 데리고 간다. 우주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우주의 광활함 속에 지구의 작고 여린 면을, 지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하여 서로 연대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우주 전체로 보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존재인 지구에서 살아가는 더 작은 존재인 인간. 그런 인간들이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고 없애려 하는 전쟁을 끊지 못하는 모습은 참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더 넓은 세상, 더 큰 존재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열려 있는 길이 무수히 많음을 생각하면, 작디작은 공간에서 아웅다웅 싸우기보다는 더 넓은 곳으로 힘을 합쳐 나가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런데, 칼 세이건이 세상을 뜬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도 인간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돈이 많은 어느 나라 재벌은 화성에 인간을 보내겠다고 하는데... 칼 세이건의 이 말을 보면 참 가당치도 않다.


'우주에서 벌 돈이 있다면, 우리는 기업들이 우주에 못 가도록 뜯어말려야 할 겁니다.'(215쪽)


왜? 그것은 인류의 꿈과 생존과 상관없이 특정 재벌의 돈벌이에 이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돈벌이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바로 우리가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과학은 특정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칼 세이건이 말하는 과학은 사고방식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 이 합리적이라는 말에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인류의 이익이라는 개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학은 특정 전문가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와는 관계없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몇몇만이 참여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하긴 그러한 학생들을 모아 따로 교육하는 '과학고'가 많이 만들어진 나라이기도 하니까.


과학고가 많으면 과학에 관심이 더 많아질까? 아니다. 오히려 과학고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난 과학에 소질이 없어, 하고 과학을 도외시하게 된다. 과학고는 더 많은 학생들을 과학에서 멀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역할과 더불어 과학은 특정인만이 하는 분야로 고착되게 한다. 그러면 안 된다. 세이건의 말대로 과학은 사고방식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고, 세상일을 특정인들에게만 맡겨두게 된다.


좀 길지만 세이건의 이 말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사회를 만들었으면서도 동시에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해서 모르는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입니다. 무지와 힘이 이렇게 잘 타기 쉬운 연료처럼 뒤섞여 있다가는 조만간 우리 눈 앞에서 뻥 터지고 말 겁니다. ... 과학은 하나의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이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이해한 채로 우주를 회의적으로 탐문하는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질 줄 모른다면, 우리에게 뭔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제대로 심문할 줄 모른다면, 권위자들을 의심할 줄 모른다면 정치에서든 종교에서든 우리는 다음번에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돌팔이에게 만만한 먹이가 될 겁니다.' (320-321쪽)


이 말은 예언이 아니다. 이토록 복잡해진 시대에 회의적으로 사고할 줄 모른다면, 권력을 쥔 자들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전체주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은 과학에서 멀어진다면, 그 다음 결과는 무지를 이용하는 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고.


세이건의 이 말은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더더욱 복잡해진 과학기술은 우리를 과학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그냥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그런가보다 하고 따를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정말 그런가? 그런 증거를 대! 증거를 대기 전에 따를 수 없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다. 복잡한 시대일수록 더더욱 증거를 요구해야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고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가장 엄격한 수준의 증거를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일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331쪽)


과학에 무지하다고 해서 질문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무지하기 때문에 질문을 해야 한다. 무지한 사람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 세이건의 말처럼 '과학의 핵심은 비판, 토론, 개방적인 탐구, 지식을 체계화하려는 태도, 설득력 있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믿음을 미루는 태도, 비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태도'(299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면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생각에 끌리지 않는다. 세이건이 과학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또 각종 매체에 등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과학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과학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과학자는 아닐지라도 과학적 사고방식은 지녀야 한다. 그것이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이 책은 칼 세이건이 인터뷰한 내용을 연대 순으로 엮어놓았다. 읽다보면 그가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말들이 나온다. 그는 과학을 자신만의 분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과학을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려고 했다. 그런 활동 때문인지, 1992년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후보자로 선정이 되었지만 몇몇의 반대로 가입이 부결되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 과학계의 폐쇄적인 모습, 그것이 사람들을 과학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 이유 중 하나라 되기도 하겠는데, 나중에 명예회원으로 받아들였다는데, 참...


하지만 세이건이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가만 있는 그를 가입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겠지만, 그는 이미 전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과학자이지 않았는가. 무슨 회원이냐가 과학자임을 인정하는 자격증도 아니겠고.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칼 세이건이 우주를 관찰하면서 또 연구하면서 느끼는 행복함, 과학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는 과학을 하면서 행복해 했다. 또 과학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행복해 했다. 행복. 이것이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던 사람.


그래서 그는 정치 문제에도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냈다. 과학자가 왜 정치 발언을 하느냐고? 그는 과학자이기 때문에 한다고...


'당신이 스스로 어느 정도 전문가라 자처할 수 있는 과학 분야에 관련된 문제를 발견한다면, 인류의 지구적 문명에 닥친 위험에 관해서 발언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일일 겁니다.'(269쪽)  


지구 온난화, 핵개발의 위험성 등에 대해서 그가 발언하고 행동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자이기에, 그것의 문제를 알기에 가만 있을 수 없다는 그의 말. 그것이 바로 전문가 아니겠는가.


하여 이 책에서는 과학에 대한 호기심, 그것을 추구하는 행복, 그리고 과학을 한 사람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 등을 세이건의 말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이래서 칼 세이건을 과학을, 분야를 좁히면 천문학을 대변할 수 있는 세계 최고의 학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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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각 사는 핑계 매일과 영원 11
이소호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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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인. 내게는 낯선 시인이다. 아니 들어본 시인이다. 예전에 쓴 글을 읽다가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인용한 글을 발견했다. 햐, 내가 이 시인의 시를 읽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집을 산 기억이 없다.


찾아본다. 시집이 없다. 역시 사지 않았군. 그렇다면 어디서 읽었을까? 분명 읽었기에 시를 인용했을 텐데... 그 시에 섬뜩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검색해본다. '이소호'라는 이름을 치고, 어떤 책들을 냈는지 찾아본다. 그러다 아, 여기서 이소호 시인을 만났구나, 발견한다.


[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수상후보작에 이소호 시인 이름이 있다. 여기였군. 다시 펼쳐본다.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졌다. 왜냐? 바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이소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그 시가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서 다시 읽은 이소호 시인의 시 몇 편은 내게 더 잘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시집을 읽고, 그 다음에 시인의 에세이를 읽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다. 뭐, 바뀌면 어떠랴, 내 맘에 드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었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시 몇 편은 읽지 않았는가.


이 에세이 읽기는 즐겁다. 시인이 왜 시를 쓰냐고? 쉽게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다. 얼마나 진솔한가. 뮤즈가 영감을 줘서 나는 그냥 받아쓰기만 했을 뿐이라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더 좋다고나 할까.


시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싸는 사람임을, 그 역시 소비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니, 소비하는 인간,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느낀 점을 시로 썼다는 점을 알게 되니 시인이 한결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만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좋다. 취미가 쇼핑인 시인이라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제목에 쓰인 두 단어 '쓰는, 사는'이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우선 '쓰는'이란 말은 시인이니까 '글(시나 소설, 에세이)을 쓰는'이라는 뜻과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돈을 쓰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둘 다 '쓰는' 행위였구나 하는 생각. 그럼 돈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시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분야를 직업으로 가진 생활인으로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


시인 역시 이 글에서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단지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출판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여러 상품(굿즈라고 하는데)을 만들어 함께 주기도 한다고 한다. 쓰기 위해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좋은 시도 나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는'이라는 말도 '삶을 사는'이라는 뜻과 '물건을 사는'이라는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핑계라는 말을 의미라는 말로 바꾸면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더욱 알찬 삶을 살 수 있다고, 또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의미를 잃지 않으면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치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의미는 삶에서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물건을 사더라도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가치가 있겠지.


이 책을 보면 정말 많은 물건을 사는데, 이 물건들을 사는데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이 바로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무언가를 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정말 다양한 물건을 사는 모습이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글을 읽으면서 과소비라는 생각,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시인의 핑계가 내게 통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시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시인이 이 에세이를 쓴 목적이 달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사고 싶다인데, 샀다가 되는 순간, 시인의 바람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묻혀 잊히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계속 읽히길, 시집도 물건처럼 그 사람 곁에 머물길 바라니까.


곁에 두고 어느 순간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 때로는 잊고 있다가도 아, 이 시집이 있었지 하면서 빼어 읽을 수 있는 물질로서의 시집을 사람들이 지니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시인의 기준을 한번 적용해 볼까.


좀 시간을 두고 꿈에 시집이 나오면 사는 걸로, 아니면 계속 시집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 사는 걸로... 하하.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신에게 시란 무엇인지를 말한 이 글은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적는다.


'나에게 시란, 인생에서 시선을 고이 두고 오랫동안 툭 잘라 기억하고 싶은 한 장면을 뜻한다.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나는 필요하다면 잘랐고, 세밀하게 관찰했고, 그 시선을 단 한 차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는 모났다. 불편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름다웠으며, 처연했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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