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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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존엄사'에 관한 법이 국회에 상정되었다가 폐기되었다고 한다. 존엄사를 법으로 규정한 나라들도 있는데, 우리는 이제 '연명치료중단'에 관한 법만 있을 뿐이다.


이 '연명치료중단'도 임종기에 들어선 사람에게만 해당한다는 것, 즉 임종이 임박하지 않다면 어떠한 연명치료도 불법이라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다. 


하여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했더라도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환자의 뜻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구조다. 이 점을 최근에 알고, 설마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이것이 확실하구나 하게 되었으니...


이런 상태에서 '존엄사'에 대한 법이 통과되기는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이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죽음에 대해서, 아니 죽음 앞에 겪게 되는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은 ~ 자신의 말기가 '쓸데없이 병원에서 고생하며 비용을 소모하고, 가족에게 부담을 지우고, 고통 속에 낯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를 두려워한다.'(48쪽)고.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2024년 기대수명은 83.7세, 건강은 65.5세로, 평균적으로 약 18년을 아픈 상태로 살다가 사망하게 된다'(99쪽)고 하니.


나도 그렇다. 나이 들어가면서 이렇게 내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려운 일이다. 돈은 돈대로 쓰고 가족에게 부담은 부담대로 지우면서도 고통은 고통대로 받으며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태로 지내는 것.


과연 이렇게 자신의 삶을 끝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을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죽음을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하는데, 끝은 분명히 있는데, 그 끝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끝이 올 때까지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라도 버티게 하는 것이 (아니, 연명치료를 거부하면 끝이 명확히 보이면 자신이 결정할 수도 있지만, 이런 임종 시기가 아니더라도 끝을 인식할 때가 있으니) 과연 그 사람을 위한 일일까?


'존엄사' (그냥 이 용어를 쓰기로 한다. 안락사라는 말보다는, 또 이 책의 저자들이 쓰고 있는 '의사조력임종'이라는 말보다는 쉽게 다가오니까)를 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들은 그래서 인간의 자기결정권과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존엄을 '조력임종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그냥 삶이 힘들기 때문에 죽어야겠다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명확한 자기 인식에 바탕한 결정과 그 고통을 더 이상 완화하기 힘들고 다른 치료방법이 없을 때, 삶의 존엄이 훼손되기 쉽다고 판단되어 그 사람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이 '존엄사'라는 것.


그래서 엄격한 과정이 요구되고 있는데, 주로 명확한 자기 의사 표명과 결정을 숙고할 수 있는 기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동의와 다른 의사 두 명 이상의 소견 등을 필수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존엄사'가 법으로 인정이 되었을 때 사회적 약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을 우려하고 있다. 사회적 압력으로 본의 아니게 죽음을 선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사회적 약자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비용이나 가족에게 지워진 부담 등으로 '존엄사'가 법으로 존재할 때 사회적 약자와 같은 누군가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존엄사'만 남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존엄사 법'은 사회적 약자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암묵적 압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고... 그러니 '존엄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완화치료'와 같은 다른 치료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고통을 줄이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완화치료(우리는 흔히 호스피스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존엄사'와는 달리 생명을 유지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법인데, '존엄사 법'이 통과한 나라들에서는 이와 같은 '완화치료'가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완화치료' 제도가 정착되지 않고 '존엄사'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고,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제기를 저자들이 하고 있는데...


'존엄사' 논의와 함께 '완화치료'와 '재택 임종'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데 힘써야 한다는 저자들의 말에 동의한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또는 함께해야만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다. 


'존엄사'가 법으로 인정되고 있는 네덜란드, 캐나다, 미국의 몇몇 주, 스위스와 존엄사는 인정하지 않지만 세계에서 처음으로 법원이 안락사가 허용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고 하는 일본, 또 죽음의 질이 좋은 대만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그 법이 도입되기까지의 과정과 취지, 그리고 실행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점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런 논의를 통해서 저자들은 '존엄사 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삶과 죽음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개인의 자율성뿐 아니라 가족 관계와 사회적 맥락, 그리고 돌봄 체계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208쪽)고 하고 있다. 즉 사회적 약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게 하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보자. 과연 돌봄 체계가 충분히 작동하고 있는지... 아니 우리는 치료 체계도 서울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나? 지방에서는 필요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또한 돌봄을 가족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완화치료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받지 못하고, 또 대상자가 되지 못한다고 해서 받지 못하지 않나?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아니 무엇이 먼저라고 할 수 없다.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 의료체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과연 의사단체나 복지부에서 이런 점에 대해서 어떤 의견을 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참고로 우리나라 완화의료 대상은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부전, 만성호흡기부전 등 다섯 가지 질환으로 제한돼 있으며, 이들 역시 말기 진단 이후에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79쪽)고 하니 갈 길이 멀다.


그러니 먼저 완화의료의 대상을 생명을 위협받는 질환을 앓는 환자라면 누구나, 병의 종류나 질환의 그시기와 관계없이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국제적 표준에 맞게 법을 개정해야 할 것이다. 다음 돌봄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의료복지제도를 정비해야 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해서다. 저자의 말처럼 '좋은 죽음은 좋은 삶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좋은 삶은 혼자 만들 수 없다.'(250쪽)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용어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야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같은 행위를 무엇이라 부르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다. 때로 명칭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그 행위의 성격과 도덕적 의미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안락사'와 '연명의료 중단', '조력자살'과 '조력임종'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윤리적 무게를 지닌다.'(25쪽)


그래서 이 책에선 '의사조력임종'을 주요 용어로 사용하기로 했다(6쪽)고 한다. 이 용어는 '환자가 스스로 요청하여 그에 동의한 경우, 환자를 죽게 하려는 의도로 의사가 치사량의 약물을 직접 투약하거나, 의사가 처방한 약물을 환자가 직접 복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6쪽)고 하고 있다. 이 풀이에 따라 표에 나온 용어를 이해하면 될 것이다.


구분 유형 용어 설명
소극적 안락사 연명의료 중단 소극적 안락사
연명의료 중단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연명의료를 처음부터 시행하지 않거나(유보), 이미 시작한 치료를 멈추는(중단) 것.
죽음의 직접적 원인은 의료인의 행위가 아니라 기존
질병에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한다. 
적극적 안락사 자발적
(환자가 직접
동의)
자발적 능동적
 안락사
환자의 명확한 요청에 따라 의료인이 직접 치명적
약물을 주입하는 등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
'의료인 등 환자가 아닌 타인'이 죽음을 실행한다.
의사조력 자살 환자의 요청에 따라 의료인이 치명적 약물이나 도구를
처방하거나, 처방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죽음을 실행하는 주체는 '환자' 본인이다.
비자발적
(의사결정 능력 없는 경우)
비자발적
능동적 안락사
아동이나 알츠하이머 환자처럼 의사결정능력이 없어
본인의 뜻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에 이루어지는 안락사.
반자발적
(의사 확인 없이 진행)
반자발적
능동적 안락사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환자임에도 그 요청을 명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진행하는 안락사.
기타   조력임종 자발적 능동적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등 다른 의료인이 관여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자비로운 죽음 안락사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나, 죽임에 관여하는이의
동기(연민과 자비심)를 강조하는 표현. 전쟁, 재난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의 행위를 가리키기도 해, 의료 환경의
안락사와 구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조력임종을 둘러싼 주요 용어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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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섬과 세운상가 - 왜 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
박경선 지음 / 돌고래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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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愚問)이라고 해야 할까? 당연히 서울시장에 출마했다는 것은 자신이 서울을 어떻게 이끌겠다는 정책을 지니고, 그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니까. 여기에 서울이라는 곳이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이고, 서울시장은 곧 더 큰 권력으로 가는 경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는 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니까.


자신의 정책과 비슷한 정책을 지닌 시장이 전임이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자신과 다른 정책을 펼친 시장이 전임이었다면, 서울 정책이 바뀔 수밖에 없다.


즉 왜 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 라는 질문은 어째서 우리는 서울시장을 정책의 연속성 상에 있는 사람을 선출하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 책은 역대 서울시장 중에서 오세훈과 박원순이 번갈아 시장을 한 20년 정도를 살피고 있다. 둘의 정책이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서울시장을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년,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기에 이들은 오세훈-박원순-오세훈 순으로 서울시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오세훈이 당선된 시점에서 이 구도는 여전히 유효하기도 하고.


서울시장이 바뀌면 서울이 바뀔까는 질문이 오세훈 바로 전에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과 오세훈을 놓고는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같은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에 이어 오세훈을 선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명박이 추진한 청계천 복원 사업(사실상 복원이 아니라 청계천이라는 인공 하천을 다시 만든, 청계천 개발 사업이라고 해야 하지만, 여하튼), 뉴타운 사업, 버스 전용차로 도입 등등에 대해서 서울 시민들이 그리 반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즉 당시까지는 개발이 통했다는 것인데, 오세훈이 급식 문제로 중도 사퇴한 이후에 당선된 박원순은 이러한 눈에 확 띠는 사업들과는 달리 과정을 중시하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업을 중심으로 정책을 운영한다. 그리고 다시 박원순 이후 당선된 오세훈은 박원순이 했던 사업들을 지워나가고 있는 중이고...


이러한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정책이 바뀐 사례를 '노들섬'과 '세운상가'를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노들섬은 서울시 소유라, 서울시장이 자신의 정책을 쉽게 펼칠 수 있는 반면에, 세운상가는 민간인들의 소유가 많아 서울시장이 자신의 정책을 펼치려 해도 여러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하여 이 책은 우선 노들섬에 대한 두 시장의 정책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오세훈은 노들섬을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하려 했고, 박원순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장소로 하려 했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외양을 지닌 건축을 노들섬에 건설하려고 하는 정책이 오세훈의 정책이라면, 시민들이 가꾸고 변화시켜 가는 노들섬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박원순의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시장이 오세훈이니... 노들섬을 더 지켜볼 필요가 있고.


이와 같은 경우가 세운상가다. 세운상가 건물을 철거하고 재개발하려 하는 것이 오세훈이라면, 그 건물을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더해가려 했던 것이 박원순이라고... 하지만 다시 오세훈이 당선된 이후 100미터가 넘는 고층건물을 짓겠다고 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 두 시장의 정책을 저자는 책의 뒷부분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고 있다.


'두 명의 서울시장은 동일한 공간을 전혀 다르게 구상해 왔다. 오세훈 시장에게 노들섬은 글로벌 경쟁력을 상징하는 한강 위 랜드마크였고, 박원순 시장에게는 사용자가 중심이 되는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세운상가 역시 오세훈 시장에게는 철거와 재개발을 통한 '도심 재창조'의 대상이었고, 박원순 시장에게는 역사적, 산업적 장소성이 축적된 '창의제조산업의 혁신기지'였다. 동일한 장소가 전혀 다른 미래상으로 기획된 것이다.' (251쪽)


그렇다면 이 두 곳을 통해서 서울의 미래를 그리는 정책이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누구의 정책이 더 좋다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정책이 지닌 장점과 단점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읽어가면서 어떤 식으로 이 두 장소를 변화시켜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 내부자의 시선으로 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책을 보면 오세훈의 정책은 외부자의 시선이 강하다 할 수 있고, 박원순의 정책은 내부자의 시선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박원순은 '어떤 공간을 만들겠다는 하드웨어의 제시보다, 그 공간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고 어떤 활동이 이루어질지에 대한 소프트웨어적 비전을 강조'(195쪽)했다고 한다면, 오세훈은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비전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점을 광화문 광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광화문 광장을 생각하는 것이 내부자의 시선이라면 광장은 열린 공간으로 만들고 많은 전시물들을 설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광장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끌 무언가를 설치해야 한다. 이 점을 생각해도 두 시장의 정책이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들섬과 세운상가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마 오세훈 임기 4년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시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 곳들의 사업은 또다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변화를 겪지 않으려면, 적어도 서울시장의 정책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두 곳의 개발을 놓고 서울시민들이 냉철하게 평가하고, 그 평가를 받아들이고 서울시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발 추진 -> 중지 -> 변경 추진 -> 중지 ->변경 추진의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즉 누가 시장이 되느냐에 따라 바뀌는 서울 정책이 아니라 서울 정책의 일관성을 시민들의 의사에 맞게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을 선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렇게 우왕좌왕하면서 예산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노동까지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단기적 성과를 넘어서는 장기적 계획 체계, 다양한 행위자가 참여하는 거버넌스, 그리고 정책 전환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도시공간은 단기간의,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투기 행위에 휘말려 낭비될 것이다.'(257쪽)고 하고 있다.


이렇게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깨어있는 시민들이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자신의 정치적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울시장으로서 서울시민들과 함께 서울의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 그러한 장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선출하는 안목.


그래서 아쉽다. 이 책이 조금 더 빨리 나왔어야 하는데... 이번 지자체 선거가 끝나고나서야 읽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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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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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민 여성, 바로 저자의 어머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토대로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썼다면, 이번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도 할 수 있다.


단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 자신이 노동자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계급을 벗어났다. 그는 진보적인 정치 사상을 지닌 사람으로 노동자 계급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게 되었다.


저자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젊은 시절, 노동자였을 때 어머니는 조합원으로서 노동조합의 주장에 동조하고, 그들과 함께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서는 극우 쪽에 투표를 하기도 했으며,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즉 노동조합원이었다고 해서 모두가 진보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노동조합원이었던 어머니가 극우 쪽에 투표를 당당히 하는 모습, 이 책에 나와 있는데, 왜 그럴까? 


그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자신이 동일시할 집단이 없어졌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건재할 때는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정책에 찬성하면서, 노동조합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지닐 수도 있다. 그때 자신은 노동조합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으로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집단에 속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주장을 집단이 대변하고 있다는 인식, 하여 집단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노동조합원이었을 때 어머니의 처지였다고 한다면, 나이 들어 이제 노동조합원도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밀려날 수밖에 없는 노년에 이른 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느 집단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가족과도 떨어져 홀로 지내면서 많은 시간을 텔레비전과 함께, 요즘은 여기에 더해서 핸드폰으로 만나게 되는 온갖 모임들에서 보내는 영상들과 함께 보내게 된다.


자연스레 자신의 의식이 그쪽으로 편향되게 되는데... 그러므로 저자의 어머니 역시 극우 성향의 정치인에게 투표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는 이보다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인터넷이 워낙 잘되어 있는 나라라서, 온갖 정보가 넘쳐나고 있고, 한번 만나게 된 영상은 알고리즘으로 그것을 계속 강화하는 영상들, 방송들을 만나게 하고, 다른 성향의 방송은 만날 기회를 박탈하고 있으니...


이들은 자신을 동일시할 집단을 이러한 방송에서 찾는 경향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노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저자는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일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부르조아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노년에서 충분한 돈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노인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사회제도에 노년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어머니 역시 나중에는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한다.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사회복지 제도가 많이 퇴보하고 있다는 점을 저자의 어머니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식들도 독립해 살고 있고, 자신을 보살펴 줄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 물론 요양원도 천차만별이라 돈에 따라 환경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삶을 마감하기는 힘들다.


저자의 어머니가 겪은 일이 일반 서민들이 나이 들면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노년이 어떻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른 말로 하면 노년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노년에 이르러 정당한 대우를 받기 위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그들에게 필요한 사회 제도들을 어떻게 요구하고, 요구 사항이 관철될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는지를 이 책의 후반부에서 살피고 있다.


결론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움직일 힘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미래라는 바꿀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 지금 자신의 몸을 움직일 힘도 없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 연대해서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저자의 말을 보자.


'남들에게 들리도록 소리를 낼 수 있는 고령자들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의 가능한 '우리'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현실에서나 심지어 상상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공적 발언이 없기 때문이다.'(289-290쪽)


이 불가능성이 노년들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게 하는데, 그렇다면 노년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가려진 존재로 있다가 사라져야 하는가?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끝까지 누릴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다. 물론 자신의 노년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는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년에 겪을 일들이다.


이렇게 누구나 겪어야 할 일임에도 우리는 남의 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자신에게 오지 않은 일이고, 자신에게 닥쳤을 때는 이미 말도 행동도, 집단을 이룰 힘도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 때문이다.


자, 닥쳤을 때는 할 수 없고, 할 수 있을 때는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 상태, 이것이 바로 '노년'의 문제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노년을 그냥 없는 셈 칠 수는 없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대변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힘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외부에서 대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일이라고, 그러므로 미리미리 바꾸어야 한다고... 이런 상황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간접경험을 통해 미래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 노년을 대변할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노동자들이 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저자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불합리한 지시를 하는 관리자에게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 직장에 생계를 걸고 있는 어머니는 저항할 수 없었음이 이 책에도 나와 있는데, 이때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의 소리를 대변하는 노동조합과 진보 정치 집단이 이들을 대변한다. 


마찬가지로 노년을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때 '노년'도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와의 경험을 통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적어도 이들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여 저자는 소리를 낼 수도, 행동할 수도 없는 노년을 위해, 아니'노년만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뀌고, 누군가가 가려진 채로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결국 근본에 있는 정치적 문제는 이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가 발언할 수 있는가? 이 기본이 되는 정치적 행위가 가장 극심하게 지배받고 박탈당하고 취약한 사람 가운데 그렇게 많은 이에게 여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면 그들에 관해서, 그들을 위해서 말하고 그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작가에게, 예술가에게, 지식인에게 돌아오는 과제가 아닐까?'(299쪽)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은 다른 나라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바로 우리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저자의 마지막 문제제기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과제, 이 과제를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큰소리치고 있는 '노인'들이 아니라, 정말 힘 없는 노인들, 그리고 그만큼이나 더 힘 없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 과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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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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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했다는 말.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무도 쉽게 유튜브 영상을 통해서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는 현실.


그럼에도 유튜브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너나 할 것 없이 유튜브를 하겠다고, 어떤 곳은 이들이 광장을 점령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들의 재미, 흥미, 관심사를 유튜브로 만들어 보여주는 이들을 모두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유튜브를 통해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전파하고, 행동을 촉구하는 이들마저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니까. 이렇게 소중한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도 표현의 자유일까?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서 혐오하고, 배제하고,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과연 용납되어야 할까? 이들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잇는 상황에서, 그러한 발언-선동들이 '사이다'라고 인정받는 사회에서 입시에 찌든 학생들이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통로가 유튜브에 있으며,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자신들을 지지해주고 응원해준다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니, 시원하단 느낌이 들게 해주기도 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나이, 질풍노도의 시기에 반항하는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에 단정적인 말은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르지 않다고 여길 테니까. 사실 그들의 행동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극우 유튜브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그것을 놀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고 하는데, 단순히 놀이를 넘어서 혐오와 배제로 나아가면 극우로 빠져들게 되기 쉽다.


저자의 아들 역시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는 유튜브에서, 또 친구들의 말에서 극우적 표현들을 익혔다고 한다. 이런 점을 알게 된 저자가 아들과 대화를 통해 극우 논리에서 벗어나 진실을 찾는 비판적 사고를 하는 아들로 자라게 하고 있다고 하는데...


학교에서 늘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한다.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하고... 하는 말들이 교육 목표로 실려 있기도 하다.


이렇게 민주시민과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한다는 학교에서 극우 논리가 판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교육만으로 이러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학교 현장이 오히려 극우 논리가 스며들고 확산되게 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면, 지금 학교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왜 학교에서 가르치는 그 좋은 내용들이 학생들에게 다가가지 않고, 유튜브나 다른 매체들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극우 논리, 또는 극단적인 논리가 학생들에게 다가갈까?


답은 뻔하지 않은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극단적인 사고로 가지 않는다. 적어도 상대가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무조건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말할까?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랑과 신뢰가 없으면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더 강화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다. 가족 간에도 '사랑과 신뢰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모가 좋은 말을 그렇듯하게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학원을 강요하고, 입시에서 성공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둔다면, 과연 그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말과 행동이 다른 존재로 부모를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부모 자식 간에 대화는 힘들어진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아이는 부모의 생각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 유튜브를 비롯한 극단적인 성향을 띠는 매체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마음에 파고들게 된다.


혹해서, 와, 통쾌하네 하는 생각으로 한두 번 보다 보면 알고리즘에 의해 이와 비슷한 영상들이, 매체들을 계속 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굳히게 되고, 부모와는 더더욱 멀어지게 된다. 부모를 꼰대라고 여기게 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 또는 앞과 뒤가 다른 이중인격자로 여기게 된다.


또한 학교의 그 좋은 목표들보다 자기 자식의 성적이 더 중요한 부모가 학교에 와서 교사들을 대하는 태도들을 보면, 어떤 학생이 교사의 말을 따르겠는가? 자신의 부모조차 무시하는 교사들의 말을.


이렇게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깨진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이끌어줄 어른은 집에, 학교에 있지 않고 사이버 상에 존재한다. 그것이 유튜브든 게임에서 자신들을 이끄는 사람이든, 단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른으로 착각한다.


부모, 교사가 아니라 이것이다, 이래야 한다, 저들이 나쁘다.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혐오와 배제의 말하기를 하는 그들을 어른으로 착각하는 순간, 극우 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극우 논리에 함몰된 자식을 구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부단히 대화를 한다. 그것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이런 일은 대부분의 부모가 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와 같지 않더라도 가족 간에 '사랑과 신뢰'가 있다면 짧은 시간에도 대화를 할 수 있다. 진심을 다하는 대화. 그래서 상대를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나만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도 경청을 하는 그런 대화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한 방법이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부모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실수할 때도 있음을, 다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자식이 느끼게 하고, 자식에게도 완벽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 배워나가는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을.


남을 배제하고 혐오해서는 절대로 자신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고 행복하는 사는 삶을 부모가 원한다는 것을, 그래서 극단적인 논리를 주장하는 존재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부모-자식 간에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있어야 대화도 가능하다. 어디 이것이 부모-자식 간에만 해당하겠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무너진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우리 사회가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특히 미래세대들에게는 더더욱 그런 관계 회복이 절실하다. 


그 점을 이 책에서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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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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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라 말을 하기 힘들다. 내가 겪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도 이런 일을 겪어왔기에... 최근에 여행 간 곳에서 보게 된 소나무들의 상처.


소나무 줄기에 브이(V) 모양의 상처들이 있었다. 깊고 굵게, 그 상처를 얼핏 보면 나무가 웃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다. 웃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연료가 부족한 일제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해 연료로 쓰기 위해서 커다란 소나무들에 그런 상처를 남긴 것이라고...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80년이 넘었지만 나무는 그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라고, 기억하라고 하고 있다.


그 소나무 상처.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올랐다. 팔레스타인을 기억해야 한다고.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집단 학살이라고. 부정하는 자들에 맞서 그러한 학살을 기억하고 알려야 한다고.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기록해야 한다고.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또 팔레스타인 문학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슬픔, 분노, 고통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번역하는 언어가 강한 나라일 때는 더더욱.


영어, 영국의 언어이자 미국의 언어. 지금 이스라엘은 미국과 딱 붙어 있고, 팔레스타인 비극을 초래한 나라는 영국이니, 영국이나 미국의 언어인 영어로 팔레스타인, 가자의 상황을 번역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의 저자는 이렇게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영어는 - 특히 주로 언론과 외교 성명, 그리고 '양측'을 내세우는 서사에 쓰이는 영어는 - 팔레스타인의 고통으로부터 가해의 주체를 지워버리고 대량 학살을 '충돌의 격화'로, 봉쇄를 '안보 조치'로 축소하도록 신중하게 구성되어 있다. 가자를 이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가자의 현실을 가리도록 고안된 바로 그 구조들에 맞서 싸우는 일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처해 있는 망명 상태다.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지만 그 어느 쪽도 온전히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71쪽)


이런 어려움에도 저자는 번역을 한다. 왜냐하면 '가자에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집단학살뿐만 아니라 전쟁이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삶의 평범한 순간들 역시 기록하는 작업(68쪽)'이기 때문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번역을 하고, 기록을 한다. 이러한 번역이나 기록은 곧 기억의 행위이고, 기억은 저항이 된다. 즉 '가자에 관해 문장 하나를 쓴다는 것은 전 세계의 무관심이라는 구조물에 맞서는 일(85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가자가 오로지 상처로만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는 따뜻함이 있던 곳.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그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하는 가자 사람들의 모습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자는 글을 쓴다고. 


결국 저자는 가자에서 살지 못하고 지금은 더블린에서 산다고 한다. 이 책에는 가자에서 나와 베를린과 더불린에서 겪는 일들도 나와 있는데, 이 곳에서도 저자는 가자를 잊지 못한다. 가자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기에 저자는 가자에 대해 끊임없이 글을 쓴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읽으면서 가자의 눈물, 슬픔이 떠나지 않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음, 잊지 않고 항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이 책에 나온 저자의 시에 '다른 이들이 피 흘린 길을 밟는 일'('가자, 인내의 끝에서' 중. 197쪽)이라는 구절이 있듯이, 우리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피 흘린 길을 함께 걷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는데, 아직도 가자는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 당부 잊어서는 안 되겠지. 그래서라도 이런 책을 읽어야겠지.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 여기 쓰여 있는 일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가자 사람들이 여전히 똑같은 조건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6쪽)


이 책을 읽는 순간, 한겨레신문 (2026년 6월 11일 자)에 이런 글이 실렸다. 


이스라엘로 떨어지는 이란 미사일을 가자에서 보며…


저자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 잊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 기사를 읽고, 또 이 책을 읽으며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관심을 거부하는 독서, 스스로에게 변화를 허락하는 독서의 경험'(8쪽)을 하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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