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최병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평등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보는 관점을 버리라고 한다. 불평등하면 좋지 않은 것, 없애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쉬운데, 인류 역사상 모두가 평등한 시대는 없었기에, 어쩌면 인류 역사 내내 우리는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온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듯이 똑같은 생활을 하라고 하면 아마 견디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평등이라고 해서 무조건 같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나 대동소이(大同小異)라는 말 또는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같을 수는 없다. 비슷할 수는 있어도. 그렇다면 불평등을 다름으로 인식하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


불평등을 무조건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껴안고 가야 할 것. 다만 불평등의 부작용을 최소화 하는 방법을 찾는 것. 이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평등하기 위해서 위를 깎아 아래를 고이면 된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위는 놓아두고 아래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면 평등 개념이다. 그렇다면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불평등하니까 위를 아래로 내리자가 아니라 아래를 위로 올리자, 위하고 똑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도 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리자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책을 읽은 소감이 바로 그렇다. 불평등에 대해서 무조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불평등을 받아들이고, 격차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격차를 줄이는 것이 위를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올리는 방안, 위와 아래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고,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층과 하층이 어떤 집단인지부터 합의가 되어야 한다. 상층과 하층에 대한 합의가 없으면 논의가 산으로 갈 수 있다. 서로 다른 계층을 두고 정책을 제시하면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할 대책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하층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자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하층은 고령층이라고 한다. 수입이 없는 고령층. 그렇다. 노인빈곤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 노인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니, 수입이 없는 고령층을 하층이라고 보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고령층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펴야 하는가? 지금 실시하고 있는 기초연금 제도를 손보고, 즉 '지급대상자를 70%로 하지 않고, 월 288만원(2022년 부부 기준이다)+물가상승분만큼으로 대상자를 동결하'(369쪽)고 '절감된 예산으로는 75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에 한해 보충연금을 도입해서 추가 지급을 해야 한다'(369쪽)고 주장한다.


(참고로 2025년 기초연금 수급대상자는 부부가구의 경우 364만 8천원이 기준이고, 단독 가구의 경우는 228만 원이다. 이를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한 것과 비교해보면 3년동안 물가상승률을 4%라고 가정해도 약 325만원이 된다. 한 가구당 40만 원 정도의 예산이 절감되는 셈인데... 정밀한 계산이 필요하다. 물론 그는 보충연금을 일몰제로 하자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법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나는 논쟁이 있어야 한다. 공론화를 통해 우리 현실에 맞는 정책이 입안되고 실시되어야 한다)


이렇듯 이 책에는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어 있으니 참조해 볼 만하다. 여기에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하는 사항이 몇 있는데, 이는 불평등이 꼭 경제 위기와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역설적으로 불평등이 축소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고, 또 경제가 활성화될 때 특히 수출이 늘 때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고 튱계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이는 수출 산업이 주로 대기업을 비롯한 규모가 큰 곳에서 이루어지고, 이들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높기 때문인데... 


불평등이 우리나라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 또 세계 정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는 우리나라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농어업과 같은 생존에 필수적인 분야를 저부가가치 산업이라고 여기에 대한 투자보다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대기업과 같은 규모가 큰 기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견 타당하면서도, 그럼에도 농어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현실을 감안해서 농어업 종사자들에 대한 지원, 투자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면 했는데...


사실 계층 간 불평등도 심각하지만, 지역 간 불평등도 심각하고 농어촌은 거의 소멸 위기에 처해 있으니, 이는 생산성을 넘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여기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 하층은 고용되지 않은 고령층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 여기에 상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위에 있는 노동자들을 올릴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


수출로 인해 대기업이 살아가나고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는 만큼, 그에 따른 협력업체들 (중소기업)의 노동자 임금도 상승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 즉 수출이 잘 되어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해서 불평들의 폭이 확대되는, 저자가 주장하는 '좋은 불평등'을, 함께 상승해서 불평등의 폭이 좁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결국 분배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데, 세금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저자가 좀더 정리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금이 불평등의 격차를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할 테니까. 그런 역할을 하는 예가 바로 저자가 제시한 기초연금인데... 


또한 저자는 대학의 등록금 인하에 대해 '대학 등록금 동결정책은 대학 교육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사회진출을 위해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육 공급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 등록금 동결은 해지하되, 저소득 학생의 경우 장학금 지원을 강화하면 된다'(344쪽)고 부정적인 생각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오히려 장학금을 지급하는 쪽이 아닌 고등학교 무상교육처럼 등록금을 대폭 낮추고, 교육에 필요한 재원을 세금을 통해 마련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저자 역시 '복지 정책이 2차 분배이고, 노동 정책이 1차 분배라면 교육 정책은 0차 분배다'(348쪽)고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재원을 개인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마련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의 주장에 참고할 사항이 많은데, '좋은 불평등'이란 역설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정책 입안자들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특히 불평등의 원인을 국내와 국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저자의 관점은 배울 필요가 있다. 지금 세계는 한 국가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엄, 내란 그리고 민주주의 - 전쟁과 폭력, 극우와 혐오의 시대를 넘어
강성현 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민주주의는 계엄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 중에서 오동석이 쓴 '계엄제도가 국가범죄 수단으로 전락한 까닭'이라는 글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12.3 내란을 비롯하여 한국 헌정사에서 계엄제도는 헌법을 보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헌법을 파괴하는 수단임이 드러났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헌법이 아니라 계엄선포권을 포함해 대통령을 촘촘히 통제할 수 있는 법률이 부재하거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헌법을 고침은 물론 의회민주주의에 터 잡은 인권적이고 민주적인 입법 역량의 강화가 필요하다.' (205쪽)


왜 그런가?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계엄을 발효한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여순 사건' 때 제5여단장이었던 김백일 대령이라고 한다. 군 지휘관이 그것도 참모총장도 아닌 일선 부대의 지휘관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법도 없던 시절이라고 한다. 


세상에 법에 없는 명령을 내렸던 일. 그 뒤 계엄법이 만들어지고 몇 차례 계엄이 선포되었는데, 그것은 모두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계엄이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을 때, 민주주의가 성숙해가고 있다고 믿고 있어 계엄이란 생각도 하지 못하던 때에 다시 선포된 계엄. 민주주의와 가장 거리가 먼 계엄이 2024년에 선포되었으니... 


이미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광장으로 사람들이 나왔던 것이다. 포고문을 보자.


'1.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3.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336쪽에서 재인용)


헌법에 무어라 되어 있는지 계엄을 선포하고 집행한 이들이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포고문 1호다. 헌법에 따르면 계엄을 선포하면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고,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국회의 승인이 없으면 그때부터 계엄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그런데 국회활동을 금한다고? 말이 되나? 이는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면서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것. 모순 아닌가?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음을, 그래서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막았던 것 아닌가.


여기에 시위,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것을 금지한다면, 모든 언론과 출판이 계엄사의 통제를 받게 한다면 이는 계엄에 관한 어떠한 논의도 막겠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이 어찌 민주주의이겠는가?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겠다는 몸부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계엄의 역사, 과정,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등을 여러 저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정리해서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나라 계엄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역사 속 계엄들이 어떻게 정권 유지에 이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1부와 계엄의 제도적 본질과 반복 메커니즘, 그리고 이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응답을 고찰(16쪽)한 2부, 12.3계엄 이후 민주주의를 되묻는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실천의 기록을 담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계엄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고찰하게 해주고 있는데... 미래 세대라 할 수 있는 학교에서 이루어진 대화, 수업에 대한 내용도 있어서 지금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생각할 수도 있다.


'스스로 보수적 입장에 서 있다고 밝힌 학생은 진보적인 관점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반면 자신과 같은 입장은 교실에서 조롱받거나 희화화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자주 보는 유튜브나 커뮤니티의 극단적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교실이나 친구 관계에서 자신의 신념을 편하게 말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390쪽)


자신의 생각을 편하게 말하지 못하게 되면 뒤로 숨어들 수밖에 없다.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들으며 더욱더 자신의 생각을 공고하게 만들어간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드러내게 해야 한다. 드러내어 공개적으로 토론이 되어야 한다. 보수에서 더 나아가 극우가 되어도 그들이 숨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극우의 문제점을 논의할 수 있게 되고, 폭력이 아닌 토론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해가게 된다.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 학교 학생이 토로한 것과 비슷한 일을 겪는다)


이렇게 학교 현장에서 교사가 겪은 경험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민주주의가 성숙해지고, 다시는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그러한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 아니겠는가.


특정 이념을 지녔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닫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용인하면서 다양한 의견들이 조율되는 과정을 만들어나가는 것, 이것이 12.3 계엄 이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 사회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말, 광장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했던 약속, 지켰던 말들을 다시 상기하고 싶다. 

'집회 발언 시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298쪽에서 재인용)


그런데 서울시의회에서 청소년 인권조례를 폐지하겠다는 안을 통과시켰다는 보도를 보니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이 말을 잊어버렸나? 아니면 무시를 하는 것인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 말을 잊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이 말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계엄 책임자들을 처벌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이 일어날 수 없는 사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계엄법을 철폐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한다. 당연히 계엄법 철폐 뿐만이 아니라 차별금지법 제정 등 다양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하는 법들을 제정해야 하고. 차별금지법에 제정되어야 하는 이 때에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한다니... 참.


무엇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고, 그 의견들이 상호 존중의 토론을 통해 정립되어 가도록 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 표현은 좋지만 시대를 거스르는 정책이나 조례, 법 등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은 계엄의 역사, 과정,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생각해 보게 해주니 읽어보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대들, 조용히 빛나는
문선희 지음 / 가망서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으면서 노래 ‘등대지기‘의 가사를 생각합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라는. 고공에 올랐던 마음이 바로 그 마음 아닐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의 시선 - 역사학자 전우용의 시대 논설
전우용 지음 / 삼인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을 선으로 인식하면, 한번 지나온 시간은 다시 경험할 수 없다. 일직선인 선, 앞으로만 나아가는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겠지만, 역사라는 시간은 하나의 선이 아니다. 직선이 아니다. 곧장 앞으로만 나아가는 선이 아니다.


역사라는 선은 앞으로 뒤로 옆으로 위로 아래로 중첩되어 있는 선이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이 직선 위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변의 여러 시간들이 함께 있는 점이다.


이 점들에는 다양한 삶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가 없다.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중요한데,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과거를 불러오는 것은 역사를 잊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그것을 자꾸 불러오는 것은 오히려 현재를 붙잡아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도 역사를 잊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에도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인다. 누가 '정치는 생물이다'라고 했는데, 역사 역시 생물이다. 과거의 유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현재에 끊임없이 들어와 현재의 삶을 이끌어간다. 어디로? 바로 미래로.


그래서 역사에는 미래-현재-과거가 모두 담겨 있다. 시간의 선에서 역사라고 할 때, 우리가 있는 현재의 점에는 미래-현재-과거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잊은'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자기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 통한다.


전우용이 쓴 이 책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이라고 한다. 시일이 조금 흐른 글들도 있고, 최근의 일을 다룬 글들도 있지만, 역사라는 선에서 시일이 지났다, 최근이다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반복되고 있었는지, 그렇게 반복되도록 과거를 묻어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서 현재를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을 모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어째 이리 반복된 일들이 많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반복했는데 왜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정말 역사를 잊고 살았던가? 아니면 억지로 역사를 생각하지 않게 했던가.


이 책에서 '시키는 대로만'이라는 글과 '가만히 있으라'는 글을 읽으면 참...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일들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학교 교육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딱 맞는다.


'시키는 대로만'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서울의 모 학교에서 학생들이 발간한 신문을 압수했다는 기사가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무려 9년의 의무교육, 게다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에 가까우니 12년의 학창 생활 동안 몸에 익히는 것이 바로 '시키는 대로만'과 '가만히 있으라'라면, 미래는 암담하다. 


(이제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만'하지 않고, 또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행동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비상계엄' 사태 때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미래로 이끌어갔다.) 


창의성이 우선시 된다고, 이제는 인간과 기계(아, 그냥 기계가 아니다. 인공지능이다)가 함께해야 하는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만' 잘하는 '기계'를 어떻게 인간이 능가하겠는가. 그러니 이 말들이 통용되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현재-미래에서는 이 말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知)와 식(識)'을 구분하고 있는데(지(知)와 식(識) 사이의 거리'), 학교는 지(知)가 아니라 식(識)을 익히는 장소이니, 이러한 '식'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학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이 '시키는 대로'와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가 한다.


'지(知)란 사람이 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 곧 오성(悟性)으로 얻는 '앎'이요, 경험으로 깨닫는 '앎'이다. 반면 '말씀 언(言)', 소리 음(音)', 창 과(戈)'로 구성된 '식(識)'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얻는 '앎'이다. '학이습지(學而習之)', 즉 배우고 익혀야 하는 앎이다.'(304쪽) 


지식이라는 말에도 이런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현재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관성대로 지내지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과거와 다르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쓸모'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래서 '식'에 해당하고, 학교에서는 이러한 '식'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식'에 어떻게 '시키는 대로만'과 '가만히 있으라'가 통용될 수 있단 말인가. 전우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통해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현재에 들여와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더 인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실린 글에 언어를 통한 통찰.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 점을 생각해 본다. 마음에 새겨둘 말이다.


'사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다. 평(平)은 높낮이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글자로 반대되는 글자는 '차(差)'이다. 화(和)는 서로 다른 것들이 따로 놀지 않고 잘 어울려 있음을 뜻하는 글자로 반대되는 글자는 '별(別)'이다. 평화의 반대말은 차별이다. 

  총성이 울리든 아니든, 대량 살상 무기가 사용되든 아니든, 지금도 온 세상이 매일매일 전쟁 중이다. 힘으로는 결코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평화로운 세계는 차별 없는 세계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330쪽)


이렇게 이 책에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할 수 있는, 그래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장 이후 - 혐오, 양극화, 세대론을 넘어
신진욱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광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지니기도 했다. 그렇게 광장에서 연대를 통한 존중으로 혐오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의 '광장'에는 각기 다른 목표들이 있었겠지만 윤석열 탄핵이라는 한 가지 목표는 서로 공유했다. 그리고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광장'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이 '광장'에서 끝나지 않고 정치로, 우리 삶으로 다시 이어져야 한다. 즉 그때의 '광장'은 지금 우리 삶의 '광장'으로 다시 펼쳐져야 한다. 그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광장'을 분석하면서 '광장'의 연대에서도 분열을 찾고, 그것을 확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광장'에는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어떤 집단은 잘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광장'은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장'은 모두의 것이었다. 이때 '모두'에는 '다름'이 포함되고, '다름'에는 '이해와 포용'이 들어가게 된다.


'광장'의 기본 조건은 '다름'이다. '다름들'이 모여 함께하는 곳이 바로 '광장'이다. 이런 '광장'은 바로 정치가 이어받아야 한다. 정치 역시 같은 존재들이 모여 자기들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모여 무언가를 합의하고 실행해가는 행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광장'은 한때의 '광장'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광장'은 우리 삶 속에서 펼쳐져야 한다. 우리는 계속 그러한 '광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광장'에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광장 이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네 사람이 각기 자신들의 '광장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광장 이후'다.


우리의 '광장 이후'는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꾼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치의 영역, 삶의 영역에서 '광장'이 계속 살아 숨쉬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연 '광장'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가. 광장을 이야기하면서 특정 집단을 배제하지 않았던가. 왜 너희들은 그래 하면서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는 특히 2030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다. 2030 남성들이 극우화 되었다고, 보수화 되었다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2030 남성들을 그렇게 한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고, 보수화된 남성, 극우화된 남성이 있다고, 그 세대 전체가 그렇게 변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2030 남성들의 반이 넘는 사람들이 탄핵에 찬성했으며, 그때까지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왜 그들을 싸잡아서 보수, 극우화 했다고 하는지, 그런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자료들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하나로 묶어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들을 끌어들여 '광장'이 계속되도록 하는 노력을 과연 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처한 지금의 현실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안정한 삶이 안정된 삶으로 바뀔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을 마련해서 실행하는 노력을 해야 함에도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광장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광장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어쩌면 다시 '광장 이전'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온 지 이제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우리는 '광장 이후'를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도 '광장 이전'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2030 남성들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은 다르다는 안도감 속으로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결코 다른 존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광장'이 보여준 모습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던가. "같아지자"가 아니라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다" 아니었던가. 그런 '광장'을 우리의 삶에서 펼친다면, '광장 이전'을 주장하고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지워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중 이승윤의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이슈 중심 정치참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더 손해를 보고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 대립, 갈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세력이 활성화되기 쉽다'(214쪽)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갈라치기'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으니... 이 '갈라치기'는 '광장'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니던가. '광장'이 더하기의 정치라면 '갈라치기'는 빼기의 정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다. 


우리가 바라는 '광장 이후'는 '갈라치기'를 하는 '빼기'를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는 이런 정치세력에서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때 이루어진다. '광장과 더하기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


그런 점에서 아직은 '광장 이후'가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광장'을 경험한 우리들은 다시 '광장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치열하고 세밀하게 '광장 이후'를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제 '광장'을 정치와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광장 이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