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 - 통권 1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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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를 중심으로, 지구에서 인간이 지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피는 책이다. 


삶에서 꼭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기도 한데, 생태위기라는 말은 많이 한다. 지금 기후만 봐도 그렇다.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기후 변화가 아니라, 예측불능의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더욱 걱정이 되는데, 기후는 생태, 환경과 잘 연결이 되지만 의료는 생태, 환경과 잘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아, 의료도 바로 생태, 환경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인간의 삶에서 생태, 환경과 관련 없는 분야가 어디 있겠는가. 정치나 경제도 생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의료 또한 마찬가지다.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나서는 지금, 단순히 그들의 진료거부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가 원하는 의료는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 의료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단순히 의사 수 부족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의사 수를 늘리는데 반대할 필요는 없다. 의사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의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을 생각하면 공급이 늘면 수요에 여유가 생겨 가격이 내려간다. 의사 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진료를 더 쉽게 받을 수 있고, 의료비용도 줄어들 수 있다. 이건 참 단순한 발상이다. 오히려 의료 수가는 올라갈 수 있다. 자신들의 손익비용을 맞추기 위해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사 수를 이대로 두자는 말은 아니다. 녹색평론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나라 의사 수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적다고 한다. 이건 객관적인 지표라고 하니 의사 수를 늘려야 하는 방향은 맞다)


그러니 지금의 의료 문제를 단지 의사 수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공공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의사 수에 있지 않다.


공공의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가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병원이 거대한 성채처럼 사람들의 삶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가 있어야 한다. 굳이 병원이 아니어도 된다.


진료와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면 된다. 이런 장소가 있으면 치료가 중심이 아닌 예방이 중심이 된다. 즉 환경과 생태 파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질병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이 의료가 생태, 환경과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그러니 의료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그들과 어울리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의료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지방은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멀리 도시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문제다. 또한 의료 활동이 주로 사적인 병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공공의료 자체가 이미 부족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의사 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특정 과에 몰리는 현상, 공공의료 현장으로 가지 않는 현상 등등을 염두에 두고 의료개혁을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의료 공백이 큰 지역부터 의료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환경, 생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 이런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생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양창모가 쓴 '농촌 돌봄의 기발한 대안 두 가지'다. 사실 기발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잘 실행이 되지 않아서지 충분히 실행 가능한 일이다. 이미 하고 있기도 하고.


하나는 '마을 진료소'를 설치하는 것이란다. 마을 진료소가 설치되면 시골 사람들이 멀리 도시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한 오랜 시간 방치될 일도 없다. 그런데 의료법에 문제가 있단다. 아니 의료법의 기타 사항을 잘 활용하면 될 텐데, 복지부동이라고 먼저 나서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문제다.


의료법 제33조 1항에는 의료기관으로 허가되지 않은 공간, 예를 들면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는 진료행위를 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 예외 규정 3호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요청하는 경우'에는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않고도 진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76쪽)


이 법조항을 살리면 마을회관에 진료소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공공의료가 아니고 무엇인가. 굳이 병원을 새로 짓지 않아도 된다. 있는 공간을 활용하면 되니. 그러면 환경파괴를 할 필요도 없다. 


병원이 먼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곳에서 진료 받을 수 있어서 좋고, 또다른 건설로 환경을 침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석이조인데... 참...


둘째는 '이웃복지사'란다. 그렇다. 바로 이웃들이 서로를 돕는 것이다. 이웃복지사는 함께 사는 이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이웃들의 사정을 잘 안다. 이들이 의사가 진료를 왔을 때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주면 진료는 훨씬 수월하다. 


그런 점을 정부가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의료개혁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마을 진료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공공의료 확충이 필요하다. 공공의료 확충에 필요한 의사 수도 증원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수익보다는 사람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의사들. 그들이 많아지면 이윤보다는 환경, 생태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로 이미 진입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도 환경, 생태와 의료는 연결이 된다.


물론 인간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많은 질병들이 환경, 생태 파괴로 인해서 발생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서 치료보다는 예방 쪽에 중점을 두는 의료 활동이 더욱 필요하기도 하고.


의료 개혁에 관한 글들이 이번 호에는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의료 개혁과 환경, 생태 문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함을 생각하게 됐으니, 녹색평론은 나에게 무척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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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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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이런 질문은 좋다. '어떻게'라는 말에는 그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그냥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는 것을 '어떻게'라는 부사어를 써서 표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라는 말에는 이들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냥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어떻게라는 말에는 '어떤'이라는 관형어도 포함되어 있다.


즉,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떤 어른이 되는가다. 물론 이 책에서는 청소년기에 만난 가난했던(과거형으로 쓰고 싶지만, 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가난하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추적해서 보여주고 있다.


정말 많은 일들을 한다. 어떤 아이는 학교를 벗어나고, 어떤 아이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을 간 아이든, 대학을 가지 않은 아이든 그들은 성장과정에서 가난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없다.


이 가난이라는 굴레는 너무도 튼튼해서 여간해서는 끊어버릴 수가 없다. 질긴 가난의 질곡. 이 질곡은 대학에 들어간 아이나 들어가지 않은 아이나 똑같이 겪게 된다.


대학에 들어가도 공부에 전념할 수 없는 환경. 졸업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도약할 수 있는 받침대가 없다. 자신이 받침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기껏 받침대를 만들기 위해 토대를 마련해 놓으면, 주변의 누군가가(그 주변의 누군가가 가족인 경우가 태반이다) 파놓고 만다.


지속되는 가난의 굴레.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청소년시기처럼 살아가려 하지 않는다. 힘든 청소년시기를 거쳐왔다. 그들은 그 시기를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긴 이 책에 나올 정도면 그 시기를 극복해야만 한다.


10년 동안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아이들이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니, 이는 10년 후에는 부자가 되어 있지는 않아도 적어도 과거와는 결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토대를 마련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프다. 이 책에 실린 내용은. 이 아이들이 그런 토대를 마련한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힘이다. 그들의 노력이다. 주변의 누군가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으로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더라면 좀더 쉽게 마련했을 그 토대를 힘들게 힘들게 마련하고, 이제 받침대를 놓으려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저자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어떻게 바꿔나갈 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일'(278쪽)이라고 하면서, 청소년기에 방황하는 아이들을 과거의 잘못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이나 과오, 실수에 대해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는 기회, 다시 힘을 내볼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할 역할'(256쪽)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가 좀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명 청소년의 삶이 이 책에 실려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그들의 삶. 앞으로도 가볍지 않을 그들의 삶. 하지만 그들은 고통스런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이런 청소년들이 어찌 이들 여덟 명뿐이랴. 이 책에 나온 청소년들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최소한의 발판도 마련하지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그런 사람들을 개인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개인 탓을 하기 전에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점이기도 하리라.


가난은 결코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또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가난 구제를 못하는 나라님이라면 쫓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사회는 충분히 가난을 쫓아낼 수 있는 사회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난한 아이들의 삶을 10년동안 추적해서 보여준 이 책. 가난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꿀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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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속으로 -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
원도 지음 / 이후진프레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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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다. '경찰관속으로' 경찰관들이 겪었던 일들을 풀어낸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두꺼운 겉표지를 넘기면 속표지에 제목에 쉼표가 들어가 있다. 이 쉼표의 위치가 슬프다. 아니 무섭다. 이것이 현실인가 싶은 마음이 들고, 이 책의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결찰, 관 속으로'라고 되어 있다. 경찰이 '관' 속으로 들어간다? 이게 무슨 말인가? 경찰과 죽음이 연결되는 제목이다. 물론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본다. 그래서 그런 죽음들을 보면서 죽음의 사연, 억울한 죽음의 해원을 담당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고마운 경찰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다르게 경찰이 관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경찰의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경찰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죽음도 의미하고, 경찰이 사회에서 죽은 듯하게 지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경찰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줄은 몰랐다. 몰랐다고 책임이 면해지지는 않겠지만, 경찰이 권력을 휘두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지,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일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현직 경찰관이 자신이 겪은 일을 글로 풀어내었다. 글로 풀어내어 다시 경찰로 살아갈 힘, 동기를 얻었다고 하면 좋겠다.


이들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 외부에서 단순하게 보면 경찰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현장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얼마나 적은지를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온갖 제도들이 그들이 시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을 제약하고 있다는 사실. 공권력을 행사해도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이는 악성 민원만이 아니다. 그들이 왜 난동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대응하지 못하는지를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강한 대응이 자칫하면 엄청난 소송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이 책에 실제 사례를 통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날개를 잘라버리고 날지 못한다고 욕하는 꼴이다. 경찰들 몇몇이 비리를 저지르고, 또 권력을 추구하는 몇몇들이 경찰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들로 인해서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경찰들을 싸잡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경찰들이 소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국 피해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이 현실에서 적용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제대로 지팡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직은 그 점이 일선에 있는 현장 경찰들에게 얼마나 부족한지 이 책이 보여주고 있으니, 사기가 떨어진 경찰은 시민을 위해서 소신껏 행동하기 힘들다. 그 결과가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로 다가올 수가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당한 공무 집행에 힘을 실어주어야 하고, 그것을 개인의 용기에, 결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렇게 제도가 정비가 되고, 경찰들에게 책임과 권한을 준다면 더 많은 경찰들이 진정 '민중의 지팡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경찰들이 겪는 일들, 그들이 하는 마음 고생, 몸 고생 등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역시 당사자들이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야기들이 퍼져나가고 고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할 수 있다.


마음이 짠해지면서 경찰들의 고충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그간 경찰에 대해 지니고 있던 편견들을 깰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책, 이 책을 쓴 경찰 고맙다. 이 책을 읽은 지금, 경찰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경찰이 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찰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힘을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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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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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에 동의한다. 작가는 그동안 쓰고 싶은 글을 써왔다고 한다. 이는 즐거운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쓰고 싶은 글이라기보다는 써야만 하는 글이라고 한다. 써야만 한다는 말은 당위다.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일. 그런 일은 해야 한다. 이 책에 쓰인 글도 그런 의미에서 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매시절 나는 가장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쓰고 싶은 즐거움으로 쓴 것들이라기보다는, 반드시 써야만 한다는 요구를 느끼면 쓴 것들이다. 내가 원하건 원치 않건 이 이야기는 반드시 해야만 한다.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된다.' (4-5쪽)


이런 각오로 쓴 글이 실린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러니 이 책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제로 '밀레니얼 세대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라고 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가 과연 밀레니얼 세대만의 문제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젊은이들이 N포세대라고 자조하는 말을 하는 것이 어찌 젊은이들만의 문제겠는가? 그런 문제가 발생한 사회의 문제이고, 이런 문제는 세대를 막론하고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함께 풀지 못하고 세대로 국한지어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세대 갈등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것은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 넘김이다. 


세대 갈등으로 가면 서로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그러한 기득권을 두고 땅따먹기 식으로 정해진 땅을 빼앗는 방식으로 갈등이 전개될 수밖에 없다.


세대 갈등에 이어 젠더 갈등까지 이러한 땅따먹기식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갈등하게 만든 구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함께 그 구조를 바꾸려고 해야지, 거대한 구조를 그대로 놓아둔 채로, 나만 아니면 돼 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해결이 아니라 나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러한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 문제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젠더 갈등도 마찬가지다. 젠더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세대 갈등으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마찬가로 젠더 갈등으로도 해결되지 않음을 조리있게 설명하고 있다.


서로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그러한 점을 깨닫고, 우리를 여러 집단으로 갈라치지기 전에 먼저 인간임을,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나의 문제 해결이 너의 문제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와 너가 직면한 공동의 문제를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해결하려 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대로 나뉘기 전에, 성별로 나뉘기 전에, 빈부로 나뉘기 전에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다. 인간이 겪어야 할 일들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읽을 수가 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양한 갈등의 사례가 언급되고 있지만, 결론은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만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의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가치와 필요를 얻고,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서로 의존하며 기대는 힘으로 강해지고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대체로 우리에게는 거대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에서 대단한 역할을 하며 칭송받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저 서로의 세계가 되어줄 한 사람이면 우리의 삶은 유지된다.' (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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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롤러코스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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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노동(microwork)'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이크로(micro)를 작다는 뜻의 미세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주를 보면 이 용어에 대한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microwork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합의된 용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미세노동'이라고 번역한다-옮긴이. 12쪽)


그런데 미세노동이라고 번역을 해서인지 이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또는 세세한, 아니면 사소한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단위로 잘라서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든 노동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왜 하는지,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쓰임새는 어떠한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아주 간단한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내야만 하는 노동. 그것도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액수의 보수만을 받을 뿐이다.


왜 이런 노동이 만연하게 되었는지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플랫폼 자본주의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운영한다.


다만 정보를 얻은 다음 그 정보들을 분류해야 한다. 이 분류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동화, 또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활용할 수가 있다. 자동화된 기계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정보를 분류하고, 라벨링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확보할까? 두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잉여 인력의 양성이다. 자동화로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시킬 작업을 한다. 실직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적은 보수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 노동은 이렇게 잉여 인력을 기반으로 운영이 된다. 미세노동 역시 잉여 인력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기계화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그런 자동화, 기계화를 강화하는 일에 투입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가는 일을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책에서는 잘 지적하고 있다.


'지금 가난한 피박탈자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겁박하기 위해, 혹은 노동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을 부지불식간에 훈련시키고 있다. 이른바 마르크스의 생생한 악몽보다도 더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기계학습 시스템에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 혹은 이차적 목적이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미세노동은 매우 심각한 노동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128쪽)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 당연히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단결을 통한 집단 행동이 필요한데, 미세노동은 노동자들이 모일 공간과 시간을 제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 이들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과 더불어 이런 자동화-기계화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것을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미세노동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최소한의 노동력을 투입하는 쪽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노동을 적게 하면서 삶의 다양한 면들을 추구하는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생산성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미세노동'이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바로 임금노동에서 벗어났을 때나 가능하다.


이는 사회가 임금 사회가 아닌 무임금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희망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만, 무임금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최소한의 생활을 기본소득이 책임져준다면 그때는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을 미세노동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4시간 할 일을 4사람이 한 시간씩 또는 40 명이 6분씩 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저자 역시 이런 노동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노동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쪽이 아니라 더욱 나빠지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저자는 미세노동이 반대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쪽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세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결이, 그들의 행동이 필요함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책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의 편리 속에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혹은 노동력 착취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적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선은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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