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빈·송규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창비 한국사상선 20
박중빈.송규 지음, 허석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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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박중빈은 들어봤는데, 송규는 처음이었다. 하긴 원불교 신자도 아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원불교를 창시한(?) 사람이 박중빈이라는 사실은 역사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을 이은 사람까지야.


종교 지도자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사상가로도 볼 수 있다. 사상가로 이들을 보면 굳이 종교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이 책에 실린 박중빈의 [대종경]을 보아도, 특정 종교로 국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종교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방편에 불과하고, 그 종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는 것이 박중빈의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이비 종교는 뺀다. 박중빈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나 사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상이 무엇일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사상 아니던가. 그 행복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 부를 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사상가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실천하면서, 그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행복 추구를 모든 사람들이 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이룬 사회가 될 터이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가니, 어떤 특정한 종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정전]과 [대종경]이 수록되어 있고, 정산 송규가 쓴 [정산종사법어] 중 일부와 천부경 해설이 실려 있다.


무릇 모든 종교의 경전이 그렇듯이 좋은 말, 경청해야 할 말, 실천해야 할 말들이 실려 있다. 박중빈이나 송규가 말하듯이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그럴 듯한 말만 늘어놓아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부연할 것도 없고...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정말 우리가 명심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말이구나 했다.


'세상에 세가지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나니, 하나는 마음에 어른이 없는 사람이요, 둘은 모든 일에 염치가 없는 사람이요, 셋은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라.' (288쪽. 대종경, 요훈품 38)


햐, 이 구절, 누구에게 딱 맞는 구절 아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훈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뻔뻔하게 잘못을 하고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 그러니 그것이 악인 줄도 모르고, 혹 악인 줄은 알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리라. 그만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하니, 이들을 어떻게 제도(교육)할 수 있단 말인가. 박중빈 같은 사람도 힘들다고 했는데... 참.


그러니 요훈품에 나오는, 특별히 잘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다가온다. 보통 사람이라고 공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그 사람에게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니.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288쪽. 대종경, 요훈품 40. )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일, 박중빈은 도를 닦기 위해 특별히 출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 다만 그것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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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0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되지 않아야할텐데요...ㅠ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kinye91 2025-05-03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려먼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포르노랜드 열다 페미니즘 총서 5
게일 다인스 지음, 신혜빈 옮김 / 열다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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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하다. 아직도 이러한 현실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포르노는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가장 단순하게 인터넷 천국이 되면서,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쉽게 포르노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남아들이 포르노에 접하는 나이가 11세라고 나오지만, 지금은 더 빨라졌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별 상관이 없다. 인터넷에는 온갖 자료들이 나돌아다니니까. 또한 법망을 피해 외국에 서버를 두거나 또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포르노 유통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엔 딥페이크가 문제가 되는데,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상하게 상대를, 특히 여성을 농락하는 쪽으로 쉽게 쓰이고 있으니,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포르노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남성들의 자위용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상관관계는 분명 있으며, 포르노에서 다루는 내용이 여성들을 같은 사람으로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한다.


여기에 알게모르게 나이어린 소녀들에게까지 포르노에서 나온 의상들이 유행하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사회 전반에 포르노 문화가 퍼져 있으니, 그를 포르노랜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포르노랜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성을 착취하면서도 그것이 착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려는 욕구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포르노도 그냥 성적 욕구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 자체에서도 온갖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 특히 인종 차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포르노라는 것.


무엇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포르노라고 하니, 이것은 인권에도 반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섬뜩한 마음이 들고, 끔찍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심각한데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모습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포르노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이것이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의식을 조정할 수도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 점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포르노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사실을 그대로 적시했다고 하지만, 그 사실도 하나의 흥미로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 보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직설적으로 표현된 이 책의 내용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토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표현한 의미가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냥 포르노는 현실이 아니야, 연출된 거야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포르노에 나오는 영상들이 연출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학대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연출이 아니라 사실이고, 그것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으니...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노력이 함께가야만 포르노랜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도 자유로운 인터넷 세상, 어떤 한계를 정해야 할지 논의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포르노랜드'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붙인 이 책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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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2 : 환상의 나라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2
L. 프랭크 바움 지음, 존 R. 닐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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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다. 두 번째부터는 생소하다. 읽은 적이 없다. 그래도 도로시가 계속 나오겠지 하는 기대를 했는데... 도로시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팁이라는 소년이 나온다.


이젠 팁의 모험이다. 그런데 1권과 완전히 다르면 오즈 시리즈가 되기 힘드니, 1권에 나왔던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팁의 모험에 함께 하는 인물들. 허수아비와 양철나무꾼이 등장한다. 물론 착한 마법사는 당연하고.


허수아비가 에메랄드의 왕에서 쫓겨난다. 소녀들이 쳐들어와 허수아비가 양철나무꾼이 다스리는 나라로 도움을 요청하러 간다. 팁의 모험 과정에 이 내용이 들어간다. 


자, 이제 내용은 팁과 더불어 허수아비가 왕위를 다시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에메랄드 왕의 후계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착한 마법사 글린다를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즈마라고 불리는 후계자는 어디에 있을까?


동화답게 오즈마의 존재를 말하는 순간 오즈마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마법이지 않은가. 소녀를 소년으로 바꾸는 마법. 그 마법이 풀리고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팁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2권은 이렇게 팁이 오즈마로 밝혀지고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는 것으로 끝난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지만,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오래 갈 수 없음을 이 동화에서 보여주고 있다.


기이한 존재들이 모여, 호박머리 잭, 목마, 하늘을 나는 검프까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상상에서 이룬다. 그렇다. 이러한 상상을 통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들을 꿈꾸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상상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옳지 않음이 어떻게 극복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지를 경험하게 해준다.


세상에서 소중한 것은 돈보다도 지혜, 사랑, 우정임을 이들의 모험을 통해서 보여주고, 돈만을 추구하는 삶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그런 생활은 지속될 수 없음을 반란을 일으킨 진저라는 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


자연스레 재미있게 읽으면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를 익히게 한다. 그것이 동화가 지닌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1권을 너무도 재미있게 읽은 아이들이 다음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해서 썼다고 하는데, 그만큼 아이들에게 상상의 재미를 주는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이 2권을 읽으면서 [나니아 연대기] 중에서 [말과 소년]이 생각났다. 출생의 비밀?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가는 주인공? 아이 때 한번쯤 상상했던 일들을 동화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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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 1 : 위대한 마법사 오즈 - 완역본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1
L. 프랭크 바움 지음, W.W. 덴슬로우 그림,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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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았던가?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가, 아니면 짧게 요약한 요약본으로 읽었던가? 오즈의 마법사는 분명 아는 내용이다. 적어도 이 1권은.


허리케인으로 오즈로 온 도로시가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만나 여행을 하고, 결국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는다는 모험 이야기.


줄거리야 워낙 유명하니까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동화답게 우연적인 요소도 많이 등장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이 동화의 매력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우리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상상 속에 빠지길 좋아하니까. 그런 상상 속에서 자신의 앞으로 살아갈 힘을, 방법을 은연중에 깨우치게 되는지도 모른다. 동화란 그런 것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직접적인 말이 환상 속에 펼쳐짐으로써 강요로 느껴지지 않는다.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냥 동화 속 인물들과 함께 모험을 한다. 그뿐인 것 같다. 하지만 알게모르게 무언가가 자신을 채우게 된다. 


오즈의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다. 허수아비는 뇌를 갖고 싶어하고, 양철나무꾼은 심장을 갖고 싶어하며, 사자는 용기를 갖고 싶어한다. 이들은 자신에게 이것들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모험을 하는 과정을 보면 허수아비는 충분히 지혜롭고, 양철나무꾼은 사랑이 넘치며, 사자는 불굴의 용기를 지니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는 이미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그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선물할 뿐이다.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을 실제로 지니고 있다고 여기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즈의 마법사가 준 선물이다. 이렇게 오즈의 마법사라고 해서 오즈의 마법사가 큰 역할을 할 것 같지만, 그 역시 서커스단원일 뿐이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그렇다면 지혜, 사랑,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자신에게 있다. 그것을 자각하고 발현하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 점을 무의식 중에 깨달을 수 있으리라. 여기에 지혜, 사랑, 용기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해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셋을 아우르는 존재가 바로 도로시다. 순수함을 지닌 존재. 이러한 순수함을 지닌 존재는 외양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 우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을 그대로 인정한다. 도로시가 지닌 그러한 태도 때문에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사자 역시 자신들의 자리에 머물 수 있음에도 도로시가 고향으로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이는 나만의 목적 달성이 곧 행복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내 목적만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의 목적이 모두 달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여 위대한 마법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위대한 마법사는 바로 자신이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이제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를 다 읽기로 했다. 그냥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끝까지 읽어야겠다는 생각. 다음 편엔 널리 알려진 1권의 내용과는 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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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
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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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실화라고 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쓴 글. 글을 써서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여기에 허구는 없다. 그래서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사람들과 구분하려면, 이 작품에서는 '소설'이란 말을 빼야 한다.


'아이'부터 시작해서 '글을 쓰다'로 끝나는데, 글의 끝부분에서 어두운 터널을 지나 나온 끝에 글을 쓰게 된다.


글쓴이에게 글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의 이야기의 주체가 되는 것이어서였다. 너무나 오래전부터 빼앗겼던 나의 이야기(241쪽)'를 스스로 하는, 주체가 되어가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이 때, 외로움에 싸여 있던 아이에게 친절과 사랑을 가장해 찾아온 사람. 그 사람은 그런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킨다.


단지 성적 욕구의 만족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나쁜 놈 하면서 문제를 간단히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유명한 작가라는 것이고, 이러한 경험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 자신이 만났던 소녀들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은 작품이라고, 현실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작가. 또한 자신의 권위를 앞세워 소녀들을 자신의 올가미에 옭아맨 사람.


그에게 소녀들은 그것도 16살이 넘어서는 안 되는, 사춘기에 해당하는 소녀들(물론 아시아에서는 소년들도 포함이 된다)은 '먹잇감'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도 먹잇감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그가 성 맹수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사자나 그밖의 맹수들이 사냥을 할 때 노리는 먹잇감이 무엇인가. 무리 중에서 약해 보이는 동물을 선택하지 않는가. 그리고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이 책에 나오는 G로 표현되는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외로움에 빠져 있는,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는 소녀들을 찾아내면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자신에게 성적 만족을 또는 그의 말대로 하면 작품에 대한 영감을 더이상 주지 못해서 그가 만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런데 이것도 자신이 먼저 소녀들을 내쳤을 때 이야기다. 자신이 소녀들에게 내쳐짐을 당했을 때, 즉 먹잇감에게 반격을 받았을 때 맹수들이 당황하는 것과 같이 그 역시 당황한다. 하지만 맹수가 당황한다고 사냥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끝까지 추적한다. G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만나려 한다.


만나려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헤어짐도 깔끔했을 터. 하지만 G에게는 자신이 내침을 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작품으로 또 타인에게 유포를 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이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G에게 당했던 일들이 글쓴이에게는 평생 따라다니는 상처가 된다. 학교도, 다른 일도 하기 힘든 상황. 이때 질문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외로움에 처해 있던 소녀들이 왜 중년 남성에 끌리느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째서 그는 소녀들에게 끌리느냐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소녀들이 아니라 바로 그런 소녀들을 유혹해서 자신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승승장구한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2020년대에 들어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고, 글쓴이 역시 완전히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이겨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씀으로써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더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질문의 방향, 책임의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


'동의'라는 말, 두려워서 나서지 못했던 사람들의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경향이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은 권위에 의한 폭력을 계속 용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 속에서 이런 책을 써서 문단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성폭력의 전말을 밝힌 글쓴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글쓴이 역시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문단 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꽤 많이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이 책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권위를 이용해 가해를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덧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이 책에 관한 내용이 조금 소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G에 관해서도 논의를 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G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이 책을 먼저 읽고 그 책을 읽어도 좋고, 그 책을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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