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 카프카는 누구의 것인가
베냐민 발린트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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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유산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누구의 것이라는 말에는 '소유'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소유는 독점이라는 말과 통할 때가 많고, 독점은 이윤과 함께할 때가 많다. 즉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카프카의 유산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런 질문을 위대한 작가의 유산에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한다면 그 작가는 누구의 것 또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저작권이라는 이윤을 독점하는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작권조차도 특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것은, 지적 재산을 보호해서 작가나 그 계승자의 생활을 보장할 필요는 있지만, 영원히 이득을 취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으니,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발간 작품들은 어떤가? 그것들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후손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겠지만, 후손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하느냐도 논쟁거리다. 특히 카프카처럼 자식이 없다고 알려진 사람에게는.


이 책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을 다루고 있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막스 브로트가 가지고 있던 카프카의 유산에 대한 소송이라고 보면 된다.


이 소송이 벌어질 당시 막스 브로트는 문학계 또는 예술계에서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국가들이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소송을 벌일 만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받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놓고 이스라엘, 독일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던 에바 호페라는 사람의 소송이 대법원까지 가게 된 이유는 카프카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카프카. 유언을 집행하지 않고 오히려 카프카의 모든 글들을 모아 보관한 막스 브로트. 우리는 막스 브로트 덕분에 카프카의 작품을 만난다. 그가 인류의 문학에 공헌한 점은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보존하고 출판했다는 점이다.


이런 카프카의 유산을 막스 브로트는 생전에 자신의 비서였던 에스테르 호페(에바의 어머니)에게 카프카의 유산을 증여한다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막스 브로트가 죽은 뒤 그의 유산은 모두 에스테르에게 넘어갔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 처분권을 맡긴다는 증서와 함께.


1974년에 첫재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평생 재량껏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10년대에 들어와 다시 소송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대대적인 소송이고, 이스라엘과 독일이 참여했다. 에스테르 호페가 살아 있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의 죽음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그만큼 카프카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있었고, 카프카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려 개인의 금고 속에 영원히 잠들어 있을 거라는 우려도 있었다. 자, 카프카의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누가 보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명하다. 카프카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고,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존재가 보관하면 된다.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간단명료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송이 이루어지는 법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윤리보다도 명확한 것이 법이라고 하지만 법이 얼마나 애매모호한지는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소송]을 읽어봐도 알 수 있고, 짧은 단편인 [법 앞에서],[법에 대한 의문], [유형지에서] 등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


기나 긴 소송 끝에 이스라엘 법정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지만 아직 스위스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프카의 원고(취리히에 있는 호페 서류)는 반환 수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312쪽 주 참조)


소송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카프카의 작품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작품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던 작가의 유언은 어디 갔는가? 물론 후세인들은 작가의 유언을 다 지킬 필요는 없다. 작가의 유언과 달리 보존되어 인류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든 작품들이 많으니까. 카프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이런 소송을 통해서 문화 유산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 인류는 어떻게 문화유산을 보존ㅡ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 점을 생각나게 한다.


카프카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만이 아니라 막스 브로트의 생애, 그리고 그와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 카프카 작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 에바 호페에게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 등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카프카 사후에 벌어진 일들을 잘 살펴보게 한다.


여기에 작품을 두고 작가의 민족, 국가 또는 성향 등을 따지는 일과 작품을 보존하는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고. 문화유산에 이윤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보여주고 있으니...


카프카의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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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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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스페인 여행기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에서 특급열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지금은 기차 여행도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특급열차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교통수단이었으리라. 그런 교통수단을 타면 사람이 주체가 되지 않고 객체가 됨을, 무엇을 할 수도 없이 그냥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되어 '관에 드러누운 시체처럼 잠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14쪽)고 한다.


그럼에도 특급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국경을 넘을 때, 다른 집들과 다른 언어, 다른 경찰들, 다른 색깔의 토양과 다른 풍경을 지닌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언제나 내게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온다'(16쪽)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체코를 떠나 독일,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게 된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인물, 풍경, 풍속 등을 소개해주고 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세르반테스,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고야 등등),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톨레도 등 많이 들어본 지역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투우 경기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으며, 플라멩코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투우는 동물학대로 요즘은 거부되고 있지만 한때 스페인에서 대유행했던 행사였으니 차페크가 그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페크는 투우에 대해서는 양가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반려동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고 투우를 그냥 거부하지는 않는다.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지닌 고유한 풍습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영국 편처럼 날카로운 풍자는 없지만 스페인의 다양성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런 다양성이 우리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여행이 필요하고.


꼭 여행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다양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자신만의 관점에 빠져 있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엘 그레코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 혹은 적어도 그는 비전의 소재와 형식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에게서 가져오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다.'(55쪽)고 했다.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한다는 의미고,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이 고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에 대두되었던 예술의 흐름으로 매너리즘은 이상적인 형태와 조화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예술표현을 하는 경향이라고 하니, 바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차페크가 말하는 매너리즘은 자기 습관에 빠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쓰는 뜻과는 거리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세계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세계도 중요하다는 것. 즉 나만 옳다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차페크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 다양한 사람들, 풍습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차페크의 이런 생각은 이 책 말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금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 다름을 통해서 나를 다시 보고, 나를 더 풍요롭게 하듯이, 그만큼 다른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의 마지막 말로 스페인 여행기를 맺고자 한다.


'... 자신들만의 문명화된 모습이 받아들여져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사랑에 대해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 우리가 이렇게 만나 기쁘니 국가들의 연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다만 주의할 점은, 그 나라들이 제각기 개성을 살려서 꾸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는 저마다 다른 머리카락 색깔과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하고, 그 나라만의 독특한 관습과 문화를 지녀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 나라만의 신을 가질 권리도 있어야겠지요. 왜냐하면 모든 차이점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겨질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기에 우리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우리를 구분 짓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봅시다!' (219쪽)


이런 혜안이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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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이 과거를 살피는 학문이라면 고현학은 현재를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학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문학비평을 하면서, 김윤식 교수가 박태원의 작품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든가 [천변풍경]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조선의 모습을 잘 드러낸 소설이고, 이 소설들이 바로 현실을 재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평을 했다.


  일본인이 사용한 용어보다는 김윤식 교수가 사용한 용어로 내게 친숙해진 단어인데, 시집에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반갑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인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현실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인은 고현학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고 시가 그 당대에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의 고현학은 시대를 아울러 존재한다. 즉 시는 시를 읽는 현재에서 그 시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시의 고현학이 아닌가 하는데...


이민호 시집을 읽으면서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우리나라 현실이 어느 정도는 형상화되어 있겠지 했다. 당연히 시에서 현실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이 시집에서는 이 시를 읽고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 어쩌면 시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외발로 서 있는 詩(시)'라는 시다.


외발이라는 말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이 시대의 시는 이렇게 외발로 서 있지 않을까, 외발로 서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단지 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삶들이 이렇게 외발로 서 있는 시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 시를 읽으면 장면을 그려낼 수 있다. 그 장면 속에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詩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이민호, 피의 고현학, 애지. 2011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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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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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왜 읽을까?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다른 사람이 가본 다음에 그곳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일까? 단지 가보지 못한 곳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여행기를 읽기도 하겠지만, 여행기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여행기는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한다.


거울에 나를 비추면 내가 보인다. 그런데 그 내가 진짜 나일까? 내 모습을 대칭되게 보여주는 것이 거울 아니던가. 그렇다면 여행기는 나를 살펴보게 하되,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차페크가 영국 여행을 하면서 썼던 글이라고 하는데, 단지 영국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차페크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다른 무엇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여행기의 목적이기도 하겠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머가 이 책에도 어김없이 담겨 있다. 또한 풍자와 해학도 넘쳐나고.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지금의 영국과는 엄청나게 다른 과거의 영국, 무려 100년 전의 영국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맞아, 영국은 그래, 하는 것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압도적인 느낌에 휩싸이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리고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죠.' (10쪽)


이것이 바로 여행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행기에 이런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제목을 '대놓고 다정하지 않지만'이라고 붙인 이유는 영국인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차페크의 내용에서 따왔다고 할 수 있다. 기차 여행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함께 가는데, 내릴 때 키가 작아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짐을 그냥 내려주는 영국 사람들 이야기... 대놓고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차페크는 그러한 예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단순하게 영국 여행기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영국인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제목을 붙인 것은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표현을 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거리의 모습을 '런던의 거리는 그저 삶이라는 물줄기가 집에 닿기 위해 거쳐가는 홈통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삶을 살지 않거든요. 무언가를 보거나 얘기하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지 않아요.'(22쪽)라고 비판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대놓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무언가를 만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반대로 광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연히 들르게 된 하이드 파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여러 활동들을 한다. 즉, 우연한 장소에서는 서로 관계를 맺지 않지만 광장에서는 활발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이 두 장면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역시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무언가가 일어난다. 이 광장에서 차페크가 본 영국의 하이드 파크에서 일어난 일처럼 수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또 다른 활동을 하는 많은 집단들이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광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하고...


차페크가 런던의 거리를 보면서 천편일률적인 집들에 놀라는 장면(13쪽)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서울에 오면 사각에 하늘 높이 뻗은 형태의 건물들만 즐비한 모습에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물론 빌딩 숲 사이로 고궁들과 한옥이 남아 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고 다른 표현을 하기도 하겠지만.


그는 근대 예술과 과거의 활동들을 보면서 예술에서 '발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전진'과 '퇴보'가 아니라 끝없이 새로운 창작이 이어질 뿐이죠. 역사와 다양한 문화, 수집품, 세계 각지의 보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뿐입니다.'(47쪽)라고 하면서 예술에서 등급을 매기거나 발전, 전진, 퇴보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 예술에서 어찌 우월을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이처럼 차페크는 영국 여행을 하면서 영국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여행기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앞에서 인용했듯이 다름과 비슷함을 통해서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영국인들은 어디서나 영국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국인들을 비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영국은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세계라고 생각하는지 차페크가 우려했던 것들을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서 다시금 반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길지 않은 영국 여행임에도 영국의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영국의 모습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조국인 체코에서 반복하지 않게 하자는 마음을 담아 이 여행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유머를 보자. 영국 음식은 맛없기로 유명한데, 우리나라 출신으로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역시 그 점은 언급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 맛없음을 차페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음식이 그들의 성향과 이렇게 연결이 될 수 있다니... 그의 표현으로 이 글을 맺는다.


'훌륭한 영국 요리는 한마디로 프랑스 요리입니다. 보통의 영국인을 위한 보통 호텔의 보통 요리를 맛보면 영국의 우울함과 과묵함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죠. 압축한 소고기에 맛없는 머스터드를 발라 씹어 먹으면서 어느 누가 환하게 웃고 떠들 수 있겠어요? 이에 붙은 타피오카 푸딩을 떼어내면서 어느 누가 큰 소리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분홍빛 덱스트린에 담근 연어를 먹다 보면 누구든 지독하게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죠. 살아 있을 때는 물고기였다가 식용이라는 우울한 상태가 되면 '신발 밑창 튀김'으로 돌변하는 것을 아침과 점심, 저녁으로 먹고, 가죽을 우린 듯 시커먼 홍차로 하루 세 번 위를 그슬리고, 칙칙한 데다 미지근하기까지 한 맥주를 마시고, 특색 없는 만능 소스와 절인 채소, 커스터드와 양고기를 먹으며 살아왔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 주어진 육체적 쾌락은 다 누린 셈이니 이제는 과묵함과 진지함, 엄격한 도덕성을 포용하기 시작합니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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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06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님이 남긴 글이 새로 나왔으면 찾아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5-03-06 14:14   좋아요 0 | URL
저도 차페크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어요.
 
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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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을 읽었다. 과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우주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 (그것이 비록 번역을 통해서였지만)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렇게 쉽고 읽기 편하게 과학 내용을 설명할 수가 있을까. 어려운 수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과학책이라니... 


물론 로벨리는 과학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고 과학에 무지한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과학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과학에 대해서는 수학과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관념을 먼저 깔게 된다. 시험을 위한 과학, 시험을 위한 수학. 말로는 삶을 위한 과학, 수학이라고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던가.


그래서 이 책 역시 제목을 보는 순간 읽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많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라니... 과학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많은데 모든 순간이 물리학이라니, 이런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과학없이는 살 수 없다. 비록 과학이론을 몰라도 우리 삶에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 과학에 흥미를 불어넣어주는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와, 과학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


'이 책에 소개된 강의들은 현대 과학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9쪽)라고 시작하며에서 로벨리는 말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내용은 과학의 여러 공식들, 수식들이 아니다. 어떻게 과학이 우리 삶에 들어왔고, 우리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시작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줄 뿐이다.


상대성이론이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간단히 살펴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상대성이론이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게 했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과정에서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 없다고... '아인슈타인의 예측에서든 리만의 이론에서든 그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만 인정할 줄 알면 됩니다'(29쪽)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전문적인 지식은 과학자에게 맡겨도 된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과학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러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학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좁은 시야를 넓혀주며 하나의 시각만을 고집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런 면을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관계를 통해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두 과학자. 양자역학에 관한 장에서 이들을 등장시킨다. 뭐, 양자역학이야 워낙 어렵다고 하니 말할 것이 없겠지만, 한가지 불확정성이라는 말은 기억이 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많은 계기들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는 상태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과학이론을 설명하는데,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냥, 과학이 아름답구나 하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마지막을 인간으로 맺는다. 바로 과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우주를 탐험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니까.


로벨리가 말하고 있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호기심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향한 것이지요.'(133쪽)라는 말. 그러면서 그는 지금 우리 시대를 걱정하기도 한다. 


'아마 지구상에서 개인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종은 우리 인간뿐일 것입니다. 나는 조만간 우리가 만든 문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역시 진정으로 멸종에 이르는 모습을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종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134-135쪽)


과학을 하는 이유도, 우리가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연에 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알아야 하니까. 그가 과학지식을 우리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며 그러한 다양성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들의 삶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그래서 다 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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