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현 교황의 회칙에 언급된 내용이라고 하는데...


  가톨릭을 대표하는 교황(이 용어가 황제를 의미한다고 해서 교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전히 교황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쓰이니)이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 중에서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데,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를 빗대서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하나를 향해 모두가 나아가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인가? 그 사회가 번영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성경에 나와 있다고...


바벨탑은 결국 건설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각자 말이 통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오로지 하나가 되는 세상이 행복한 세상은 아님을, 그런 세상은 지속될 수 없음을, 성경이 바벨탑 이후에도 인류가 계속 존속해 왔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니...


언어의 다양성은 삶의 다양성이고, 이는 획일화된 삶이 아니라 각자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바벨탑은 신의 분노로 무너지지만, 종교를 떠나서 획일성은 결국 유지될 수 없다는 비유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인공지능, 인공지능 하면서 하나의 목표로 나아갈 때 과연 그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 아니라 우리지상어떻게 자신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그것을 박혜영의 글'우리 삶은 왜 외롭고 불안하게 되었을까(下)'에서 말하고 있는 미로 속에 들어간 인간들 모습과 연결지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크레타 왕 미노스의 명령으로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목적으로 만든 미로. 그 속에 들어가면 누구나 다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갈 수밖에 없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리아드네가 실을 주는 테세우스 전까지는.


미로를 만든 다이달로스조차도 그 속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못 찾을 정도였다니... 그는 결국 날개를 만들어 날아올라 탈출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들인 이카루스를 잃게 된다. 이는 미로를 탈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또는 그런 미로를 만든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신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을 향해 달려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은 박혜영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미로 속에서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가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벨탑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삶을, 미로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로를 빠져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하는데...


이런 과제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녹색평론]은. 다만 이런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은 바벨탑을 만드는 인간들과 같은 상태 또는 미노타우로스가 있는 미궁 속에 들어간 사람들과 같은 상태라고.


문제를 알려줬다. 해결책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만의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바벨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해결책은 상황에 따라,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다를 수 있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함께할 때 아리아드네의 실이 작동할 수 있다.


아리아드네의 실은 밖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문제를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도, 지구 생태의 파괴를 해결할 방법을 우주에서 찾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들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일,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를 고민해야 하는 때. 


하여 성장지상주의라는 미노타우로스에게서 벗어나야 할 때, 바로 아리아드네의 실은 성장만이 살 길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날 때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이 바로 [녹색평론]이기도 하고.


하여 지금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3대 매가프로젝트'나 '증권시장', 그리고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한 교육 개혁' 등등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을 살필 때,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공개적으로 토론이 될 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올라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벨탑의 교훈을 생각하자. 신의 분노가 아니더라도 오직 하나로만 된 사회는 존속할 수가 없음을... 다양함이, 그러한 다양함 속에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관계 맺으며 지내는 사회만이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음을, 해답이라 할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함을 생각하게 한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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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연대기 - 멸종의 비밀을 파헤친 지구 부검 프로젝트
피터 브래넌 지음, 김미선 옮김 / 흐름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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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멸종 연대기. 그간 지구 역사에서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다고 한다. 책 표지를 넘기면 이러한 대멸종의 타임라인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이 표 하나면 그 동안 일어났던 다섯 번의 대멸종 시기와 얼마나 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인도 정리해 놓았으니... 간단한 이 표를 머리 속에 담아두면 좋겠다.


다만 마지막에 '인류세'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 인류세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학자들끼리 논란이 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지금 시대를 인류세로 이름 짓는 것에 찬성하는 지질학자들과 아직은 아니라고 하는 지질학자들이 있으니...


그런데 이것이 '인류세'라는 용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대멸종의 원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남아 있는 화석을 통해서 분석을 하고, 원인 규명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료가 남아 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 그것도 몇 만 년 전의 일이 아니고, 몇 억 년 전의 일이기에 더욱 더 알기 힘들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쓰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찾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다윈은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자기 주장을 하면서 아직은 그러한 근거들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후대에는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더욱 많은 증거물들이 발견되기는 해도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 학자들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대략 화석이나 다른 자료들을 통해서 합의점에 이른 경우가 많고,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러한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의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합의된 대멸종의 원인을 제시하고 있으니...


여기다 과거의 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미래를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인류세'를 들고 이대로 나가다간 인류에 의해서 대멸종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 책을 통해 본 지구의 역사를 보면 인류가 대멸종에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우연에 의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기에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다섯 번의 대멸종은 대비할 틈도 없었다. 아니, 대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급격하게 지구에서 일어난 재난, 변동이었으니... 세상을 뒤덮을 화산 용암들, 엄청난 열기와 냉기, 그리고 소행성의 충돌 등등.


대멸종하면 소행성 충돌을 우선 생각했었는데, 운석 충돌이라는 하나의 원인만으로는 대멸종이 일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가령 백악기 말에 일어난 운석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종을 보면, 이 운석 충돌이 엄청난 열기를 동반해 많은 생물들을 멸종시켰지만,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지구의 화산들을 거의 다 폭발시켰을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즉, 대멸종은 하나의 원인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이 한꺼번에 닥칠 때 벌어지는데, 지금 우리 인간이 벌이고 있는 기후 재앙으로 많은 동식물이 위험에 처해 있지만 대멸종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일들이 겹쳐진다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대멸종이 벌어질 수 있다고... 대멸종까지는 아니어도 소멸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그러한 멸종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하긴, 인간이 가만 있어도, 지금의 기후 위기를 해결한다고 해도, 우주의 역사를 보면 대멸종은 올 수밖에 없다고... 뭐, 대멸종이라고 하기보다는 어차피 태양이 폭발하면 지구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그것이 별의 역사이고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렇지만 인간의 시간 개념 속에서 몇 십 억 년 뒤의 일은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 그 먼 미래,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인류가 지금의 생활방식을 고수한다면 기후 재앙을 초래하고, 몇 십 억 년 뒤의 일이 아니라 몇 백 년 뒤 지구를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저자는 지구에서 일어났던 다섯 번의 대멸종을 살피면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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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 반시]에 수록되었던 시들을 골라 엮은 시집이다.


  1994년 봄호부터 1997년 여름호까지 [시와 반시]의 <지난 계절의 좋은 시>에서 가려 봅은 것(5쪽)이라고 한다.


  지금 보면 오래 된 시집이다. 무려 30년 전 시들이니...


  시에 유통기한이 없다고 하지만, 어떤 시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잊혀지기도 한다.


  세월을 이겨내는 시, 그것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시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요즘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까딱할 동안 너무도 변해, 그러한 변화를 따라가기 힘든 세상.


빠름, 그냥 빠름이 아니라 거의 빛의 속도와 맞먹을 정도의 빠름이다. 너무도 빠른 변화다.


그러니 과거의 시가 과연 지금도 통할지...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시들은 시대와 맞물려 있어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30년, 강산이 세 번 변한다는, 예전 시간 개념으로도 그랬는데, 지금 시간 개념으로 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정도의 변화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는 계속 창작되고, 또 예전 시를 읽어도 요즘에도 그렇지 할 수 있는 시들이 있다.


어쩌면 시이기 때문에 꼭 그 시대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시는 시대를 넘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릴 수 있으니까.


시들을 뽑아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시집에서 단순 명쾌한 시 하나. 90년대 들어 시들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흐름과 다르게 쉽게 다가오는 시. 


그러면서 요즘 세태를 돌아보게 하는 시.


송유미의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 설거지'라는 시다.


   냄비의 얼굴은 반짝인다

            -설거지

                                                                  송유미


산더미 같이 쌓여진 그릇을 씻기 위해 개수대 앞에 선다

밥공기들을 하나 하나 <퐁퐁>을 묻혀 닦아내다가

문득 씻지도 않고 쓰는 마음이 손바닥에 만져졌다

먹기 위해 쓰이는 그릇이나 살기 위해 먹는 마음이나

한번 쓰고 나면 씻어두어야

다음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 싶었다

그러나 물만 마시고도 씻어두는 유리컵만도 못한 내 마음은

더럽혀지고 때묻어 무엇 하나 담을 수가 없다

금이 가고 얼룩진 영혼의 슬픈 그릇이여,

깨어지고 이가 빠져 쓸 데가 없는 듯한 그릇을 골라내면서

마음도 이와 같이 가려낼 것은 가려내서

담아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누룽지가 붙어서 씻어지지 않는 솥을 씻는다

미움이 마음에 눌어 붙으면

이처럼 닦아내기 어려울까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는 주전자를 보면서

씻으면 씻을수록 반짝이는 찻잔을 보면서

영혼도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을수록

윤이 나게 할 수는 없는 일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릇은 한번만 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뼈 속까지 씻으려 들면서 

세상을 수십 년을 살면서도 

마음 한번 비우지 못해

청청히 흐르는 물을 보아도

때묻은 정(情)을 씻을 수가 없구나

남의 티는 그리도 잘 보면서도

게 가슴 하나 헹구지 못하면서

오늘도 아침 저녁을 종종걸음치며

죄 없는 냄비의 얼굴만 

닦고 닦는 것이다.


강경주 외,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시와반시. 1997년. 99-100쪽.


이 시를 읽으면서 최근에 읽은 [사고외주]라는 책이 생각났다. 자신의 생각조차도 이제는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


설거지, 손으로 하기보다는 식기세척기에 맡겨버리는 세상. 그렇게 자신이 하지 않고 맡겨버림으로써 생각하는 일, 닦는 일을 하지 않게 된 세상.


편리함에 몸을 맡기고 조금 불편한 것도 참지 못하게 된 세상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


마음 닦는 일은 쉽게 되지도 않는다. 참 어려운 일이다. 힘들다. 불편하다. 그리고 마음을 닦는다고 해서 무언가가 자신에게 돌아오지도 않는다.


어쩌면 마음을 닦는 일은 현재의 이익을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고 현재를 즐기라는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고 하면... 누가?


마음 닦기도 인공지능이나 식기세척기 또는 로봇청소기처럼 다른 존재가 해주면 좋겠지만, 누가 뭐래도 마음 닦기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마음 닦아야 한다는 동기는 외부에서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 닦기는 스스로,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곤하다. 힘들다. 힘드니 포기한다.


마음 닦기보다 원인을 외부에 돌리는 것이 얼마나 편한가. 나는 잘하고 있는데, 남들이 못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라고...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남 눈에 있는 티끌만 보이는 상태. 한자성어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말이 있다.


나를 닦고 남을 다스린다. 이 말 붙어 있지만 순서가 있단 생각이 든다. 나를 닦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 다음에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즉 내 마음 닦기가 된 이후에야 남에게 무어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현재,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과연 그런가?


내 마음 닦기는 하지 않고, 내 마음에 때가 묻은 것은 내 탓이 아니고 남 탓이니, 그런 남을 다스리기만 하면 내 마음도 닦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느껴지는 행태들이 너무도 많은 요즘인데...


남을 다스린다는 말에는 자기 마음을 닦았다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남탓을 하기 전에, 남을 비난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모든 것을 외부에 돌리고 맡기는 세상에서도 맡겨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닦는 일이 무척 힘들어진 것이 요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인데... 90년대에도 이런 경향이 있었다면 지금은 더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으니...


이 시, 자신의 마음 닦기에는 소홀하면서 남에게 때를 씻으라고 큰소리치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읽었으면 좋겠다. 나 역시 이 시를 읽으면서 과연 나는 마음 닦기를 하고 있었나 반성을 하게 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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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의 목소리 -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꺾이지 않는 마음, 현장의 이야기
모사브 아부 토하 외 지음, 파티마 부토 외 엮음, 이나현 옮김 / 돌베개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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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평화상은 '나바네템 나비 필라이'가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가자의 목소리]를 읽고 있는 중에 들은 소식. 필라이가 누구인가? 누구보다 국제법을 중시한 사람이라고 한다. 일부 힘 있는 국가에 세계가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국제법을 준수하는 세계가 되기를 바란 사람이라고.


하여 필라이는 유엔 팔레스타인 점령지 독립 국제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가자지구와 관련한 인권 침해 및 국제법 위반 의혹을 조사했고, 이 조사위원회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작전과 관련해 집단학살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끄덕도 하지 않고 있고, 가자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은 피해를 받고 있는데, 학교는 물론이고 병원 또 가정집까지 폭격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여기에 음식물이나 물에 대한 통제가 심해서 가자지구 사람들이 지속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는 사람들. 진실을 알리려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소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이 가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리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을 비롯한 힘 있는 나라들은 가자지구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쇠하고 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무시할 때 가자지구의 비극에 눈 감지 않고 국제법에 의해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 바로 그가 필라이라고 할 수 있다.


필라이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것은 세계가 몇몇 강대국에게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법을 더욱 강화하고,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특히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세계가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신호라고 할 수도 있고.


이 책에서 들려주고 있는, 외치고 있는 가자의 목소리가 적어도 세계의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가 닿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고.


[가자의 목소리]에서 오마르 바르구티의 말인 '왜 BDS가 중요한가'라는 글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 하면 하마스를 떠올리고, 무장투쟁, 테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전세계인을 대상으로 비폭력 투쟁인 'BDS'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BDS는 보이콧, 투자철회 및 경제제재(Boycott,Devestment and Sactions) 운동의 약자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돕는 기업, 단체들에 대해서 이러한 활동을 한다고 하는데, 이것을 미국에 적용하면, 반인권적인 또는 폭력적인 국가를 미국이 제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나라, 기업들을 경제, 정치적으로 제재하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BDS운동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알리고,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이러한 제재를 함께 하자는 운동이다.


이런 운동도 테러라고 하는 억압을 하는 나라가 있다고 하니, 참... 그런데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는 나라, 대표적인 나라가 미국이니, 그렇다면 미국부터 제재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부끄럽게도 우리나라도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는 하고 있다는데...


무기 거래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국방 기밀이라고 공개가 안 되고 있다 하는데,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이 이스라엘과 무기 거래를 하지 말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서 떠올랐다. 부끄러운 일. 지금도 무기 거래를 계속 하고 있는지...


이런 식으로 묻혀 있던 가자의 진실을 알리려는 글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러한 집단학살을 국제사회가 막지 못하고 있다니, 아니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눈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 국제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강대국이 세계를 좌지우지 못하게 하기 위한, 세계 평화를 각 나라들의 협력으로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이러한 국제법을 무시하는 강대국을 어찌할 수 없는 현 상황을 생각하면, 그동안 많은 전쟁과 학살을 거쳐오면서 인류가 다시는 그러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목적으로 만든 국제법이 무용지물이 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 필라이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국제법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세계가 국제법을 준수하도록, 특히 몇몇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세계가 끌려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 아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용어를 명확히 해야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테러 진압이 아니다. 집단 학살이다. 그리고 집단학살을 자행한 인물들은 범죄자이다. 그들을 세계 법정에 세워야 한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집단학살임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이 책. 이러한 가자의 목소리, 들어야 한다. 우선은 들어야 그 다음을 할 수 있다.


그 다음... 다음... '가자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 바로 그 다음이 중요하다. 지금 세계는 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더 큰 재앙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라... 이것은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통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바꿔야 한다. 그 출발점에 [가자의 목소리]가 있다.


이 목소리들 중 슬픈, 너무도 슬픈 이 말들과 표...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들은(이스라엘 사람들) 총구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는 법을 배운다.(96쪽)

가자에서 아이들은 그 나이의 아이답게 살 수 없다. (142쪽)

가자에서 사상자들의 나이와 성별은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240-241쪽)


<모나 찰라비, '집단학살을 판단하는 방법',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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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애사 -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장애와 그 공존의 역사
정창권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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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는 분리, 배제가 아닌 통합과 공존을 이루는 사회의 역사다


우리나라가 장애/비장애로 나누고 차별하는 사회였던가? 서양의 관점에서 우리나라는 과거에 장애인을 위한 교육을 하지 못했다 하고, 근대화가 된 이후에야 비로소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이 실시되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인권 개념이 근대에 들어 확립되었고, 근대화란 곧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이 틀에 의하면 장애/비장애 통합교육 역시 우리 과거 역사에서 찾기보다는 근대 교육에서 찾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장애인을 차별하는 문화가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왔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역사 속 인물들과 자료들을 토대로 우리나라 역사는 장애/비장애의 통합교육, 통합 사회였지,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본래 역사적으로 한반도에는 몸의 다름을 결함으로 여기면서 사회적으로 배척하려는 의식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데 어울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통합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5-6쪽)


어라, 우리나라가? 정말? 그렇다면 장애/비장애의 통합교육, 통합 사회가 서양의 문화로 우리가 뒤늦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가 무엇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인권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 전통에서 찾기보다는 서양에서 도입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저자는 '장애를 전생이나 조상, 하늘의 죄와 연결시켜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담론은 개화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의 장애관이 불교적 인과응보설의 외피를 입거나 서로 결합되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39쪽)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책의 뒷부분에 가면 이러한 장애/비장애의 구분과 부정적 장애관을 확산시킨 신문이  [독립신문]이라고(288쪽) 하고 있는데...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운영한 사람들이 미국식 사고를 받아들였고, 조선의 것은 미개한 것이라는 인식을, 그래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을 통해서 했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000과 다름 없다는 식의 비유로 장애를 언급했으니, 이런 비유를 통해서도 장애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 배제하는 의식은 개화기를 거쳐 일제시대에 강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니,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은 아니었다는 저자의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통합교육을 했음을,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른 면에서 차별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것을 정승 자리에 오른 사람 중에 장애인을 예로 들어 보여주고 있다.


특히 지체가 부자유한 사람에게는 왕도 그가 벼슬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움을 주어서라도(내관을 통해서 부축하게 한다든지, 가마를 타고 오게 한다든지 등등) 계속 벼슬을 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장애/비장애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인품과 능력으로 사람을 판단했음을, 그래서 사람의 판단 기준에 장애/비장애가 기준이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서당이나 서원, 성균관에서도 장애/비장애의 구분 없이 통합교육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통합교육과 더불어 장애인이 곤궁한 생활을 하지 않도록 제도로 뒷받침하려고 했다고도 하니...


이러한 역사를 안다면, 장애/비장애를 구분하고, 분리-배제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현대 사회가 오히려 과거의 우리나라보다 더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 역차별이라고? 아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면 그 사회는 누구나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어찌 역차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한 일 아닌가. 신체의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지향한 것이 바로 조선을 비롯한 과거 우리나라였음을 저자는 여러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저자는 인권이나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은 동양엔 없었는데 근대화된 서양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통합 사회였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점을 일깨워주는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저자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장애사는 분리-배제가 아니라 통합과 공존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퇴계 이황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오는데, 그래, 조선 최고의 유학자 중 한 명인 퇴계의 부인이 장애인이었다는 사실. 그런 부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이 퇴계임을... 


그것이 훌륭한 인품을 지닌 퇴계라는 예외적인 인물의 일만이 아님을, 다른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우리 역사를 통해서 장애/비장애가 분리-배제의 요인이 아니라, 그냥 다름으로, 그 다름을 안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통합-공존의 사회가 되어야 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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