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SF #1
정소연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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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때 문단에서 정통 문학으로 취급받지 못해서, 외국에서는 많은 작품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도외시 되었던 문학이었는데... 최근에 봇물 터지듯 SF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SF에 대한 여러가지 글을 실어 놓은 바로 이 책에서.


'SF 영화에 투영된 과학과 기술은 현시점에서 상상한 미래가 아닌, 그 시대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무엇을 욕망하고 두려워했는지를 반영한다.' (279쪽)


이 문장에서 SF 영화를 SF문학으로 바꿔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SF문학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욕망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소외되고 차별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좀먹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SF문학을 읽게 하는지도 모른다.


SF문학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기정사실로 드러나 있고, 소외와 차별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상상의 세계, 상상의 인물(존재)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을 통한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하게 된다.


이러한 때 SF문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그에 걸맞게 다양한 글을 싣고 있는데, SF 공간과 작가에 대한 소개와 비평이 있고, 영화감독 연상호와 SF작가 배명훈의 인터뷰가 있으며, SF작품이 7편이 실려 있고, SF에 대한 칼럼과 신작 소개가 수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SF작품에 대하여 다양한 방면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어, SF작품에 대한 초심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여러 편의 SF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자신이 읽은 것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더 많은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기도 하고.


소설적 상상을 현실이 뛰어넘었다고 하는 말들도 들리지만, 현실은 소설의 상상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은 지금을 살고 있지만 눈은 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바라봄을 우리에게 현실처럼 안겨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문학이다.


하여 SF작품에는 현실과 다른 장소, 인물, 사건들이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현실로 수렴된다. SF작품을 통해 발산된 다양성들이 현실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삶을, 생각을 통해 수렴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SF작품을 읽게 된다. 지금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SF작품을 찾게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SF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우리의 불안이 더욱 심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뭐, 딱딱한 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실린 소설 일곱 편을 읽어봐도 좋다. 짧은 소설들이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다른 책에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시 멈췄다. 역시 문학은 여러 번 읽을수록 다른 점을 느끼게 한다. 씹을수록 맛나는 음식과 같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150쪽)


과연 그럴까? 인지 공간이라는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지식의 공간, 그 외의 지식은 사라져야 하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간일까? 인지 공간에는 어떤 지식만이 남을까? 그것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남겨야 한다고 믿는 지식들 뿐이지 않을까? 소수에 해당하는 의견, 지식들은 인지 공간에 남지 못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지식만이 진리라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게 된다.


전체 속에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한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논쟁이 되고, 다양한 발산들이 수렴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진리는 찾아질 수 있다. 


단지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진리까지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하는 식의 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를 우리는 두려워한다. 하여 다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권력에 의해 왜곡된 진리가 우리를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권력을 깨뜨리는 것은 또다른 거대한 권력이 아니라 작품 속 '이브'처럼 작은 존재, 그러나 자신을 잃지 않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SF문학에 대한 여러 글들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면 아마도 SF문학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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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이 왜곡한 한국사의 장면들 - 국어사전으로 한국사 공부하기, 국어사전 속 한국사 용어와 인물들
박일환 지음 / 새로운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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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각종 상을 줄 때 상품으로 사전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 옥편, 영어사전 등을 부상으로 줬다. 그만큼 사전은 공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집에 사전을 비치해 놓고 있는 집은 많지 않다. 굳이 종이 사전을 펼쳐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대부분 해결이 되고, 또 인터넷 사이트에 질문을 올리면 답이 곧장 올라오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서 사전을 검색해서 찾아도 되고.


종이 사전이든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사전이든 사전은 무언가를 모를 때 참고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쉽게 접하는 위키피디아라든가, 나무 위키 등을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사실들이 정리되어 있다. 물론 잘못된 사실도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밝혀지는 즉시 수정이 된다.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사전 작업에 참여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잘못된 내용은 즉시 수정을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수정해줄 사람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내용 중에 그래도 사전은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사전을 참고하는 경우는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굳이 싣지 않아도 될 사람 이름까지 싣고 있는데, 이왕 수록할 것이면 제대로 하던지, 이렇게 많은 내용이 잘못되었을 줄은 몰랐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만들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겠는가. 그들은 사전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우리말을 모아, 그 말들이 계속 살아남도록 하기 위한 노력. 목숨을 잃은 학자도 있는데... 지금은 많은 자료들을 편리하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그리고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이라면 사실에서 오류는 최소화해야 하지 않나. 오류가 발견되면 즉시 고쳐야 하고. 따라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비판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그것에 대해서 검증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즉시 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국립국어원이 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 아닌가 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하기 전에 '우리말 샘'이라고 따로 운영하는 사전이 있다. 사전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미 수록된 낱말들에 오류가 있다면 당연히 즉시 수정해야 하지 않나.


특히 이렇게 그러한 오류들을 바로잡아 알려주는 책이 나와 있는데...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립국어원의 책임방기라고 할 수 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사전 작업에 참여하기 힘드니, 오류를 알려주면 국립국어원에서 사전을 담당하는 사람을 두어 수정 작업을 하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래야 어떤 사실들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사전을 믿고 참고할 수 있지. 물론 사전에 사람 이름들이나 역사적 사건들까지 다 수록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들은 따로 인명 사전, 역사 사전 등으로 발간하면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미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사람 이름이나 역사 사건들에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수정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이 책의 저자는 힘써 말하고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앞에 K를 붙여 K-팝, K-컬처 등등이라고,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한국 문화를 자랑스레 여기는 이 때,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있나를 살피고 수정하는 것이 그러한 문화를 지속시키는 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자기 나라 사전조차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세계에 어떻게 문화 강국이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들, 참고하고 사전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얼마나 표준국어대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지...


사회교화사업(社會敎化事業): <교육> 잘못된 사회 풍조를 바로 잡고 좋은 풍속을 키우기 위하여 사회 대중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사업.


좋은 말 같다. 그런데, 지금 사회교화사업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의 유래는 무엇일까? 저자는 일제시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 말을 썼다고 한다. 즉 일본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펼치는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굳이 사전에 등재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굳이 등재를 할 것이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주든지. (190-192쪽)


이렇게 잘못된 내용들, 또는 불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이다. 사전의 오류를 밝히고 있지만 읽으면서 우리 역사나 인물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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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대소동 - 묫자리 사수 궐기 대회
가키야 미우 지음, 김양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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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냥 사라지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후대들이 계속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으니. 아마도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이 인간처럼 무덤을 남기를 바랐다면, 지금쯤 지구는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으리라. 그만큼 사라져야 할 존재가 사라지지 않으면 문제가 남는다. 인간들의 무덤이 그렇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묫자리는 대부분은 땅에 매장하는 방식으로 하는 무덤이었다. 무덤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현충원이 있지 않은가. 서울에 있는 현충원만으로 부족해서 대전에도 있고, 또 다른 지방에도 그와 비슷한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니.


국가유공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신 묘역만 해도 지금 포화 상태인데, 여기에 개인 묫자리까지 하면 더더욱 남아날 땅이 없게 된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물론 이 소설에 나타난 묫자리 소동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돌봐줄 후손이 없다는 문제지만.


소설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며느리 역할과 시어머니 역할을 하던 사람이 죽으면서 딸에게 유언으로 가족묘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수목장을 해달라고 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며느리라면 가족묘에 묻히는 것이 당연시하던 일본에서 자신만의 곳으로 가겠다니, 남은 남편은 충격이다. 여기에 가족묘를 돌봐야 하는 자식들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나뉜다. 그렇다고 일본 역시 저출생으로 또는 성을 바꾼 문제로 가족묘에 들어갈 사람은 정해져 있다. 한 명 아니면 많아야 두 명 정도. 그나마 손자(녀) 대에 가면 그것마저 끊길 처지다.


이러니 가족묘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심각한 가족 갈등을 무겁지 않게 이끌어가고 있다. 며느리의 입장, 시아버지의 입장, 그리고 아들과 그 자식들의 입장에 서서 각자 자신들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의 성씨 문화. 결혼을 하면 주로 남편 성을 따르는 일본의 관습을 문제 삼고 있다. 왜 결혼을 하면 자신의 성을 버려야 하는가? 세상에 성을 바꾸는 나라가 얼마나 되지? 우리나라는 자신의 성을 지니고 가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일본은 성이 바뀐다고 한다. 성을 바꾼다는 것, 그냥 단순히 성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관계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저 관계로 옮겨가는 것. 그것을 공식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이 바뀌는 문제다. 그런데 왜 남자 쪽 성으로만? 여자 쪽 성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나? 소설은 그렇게 자신의 성을 지키려 하는 손녀들을 중심에 놓는다. 


적어도 남녀가 평등한 사회라면 성을 선택할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고정된 성이긴 하지만 자녀에 따라서는 부모 중 한 성을 선택하거나 (예전 가부장제에서 무조건 남자 쪽 성을 따르던 것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 부모 둘의 성을 모두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선택권이 법적으로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성을 선택하는 것과 묫자리 문제는 다른 것 같지만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개인보다는 친족을 우선시 하는 사회의 모습. 개인과 개인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관계 속에 개인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살아서는 성이라는 관계, 죽어서는 묫자리라는 관계. 그러니 이 소설 [파묘 대소동]은 그러한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성이라는 요소에는 가부장 사회라는 모습, 여기에 누군가는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들어 있고, 묫자리에는 소설에서도 지나가는 말로 나오지만 남자 자기 부모의 무덤인데도 돌보는 일은 주로 며느리들이 하는 것, 또 며느리는 자신의 본가로 가지 못하고 시가의 묫자리로 가는 것 등등을 통해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소설은 파묘와 성(姓)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현대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리고 나름대로 현대에 맞게 즉 바람직한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이 결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말이라는 것을 이 소설에 나오는 주지 스님을 통해서 보여주며, 남성들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부부 별성 문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낸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소설에서 성(姓)에 대한 결정권은 어느 정도 부여되었지만, 한 성으로 반드시 바꾸어야만 부부로 인정이 되는 관습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 그것도 바꾸려고 한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부부 별성을 반대하는 정치인이 야유를 받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일본은 부부 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니... 


참... 이 소설, 그런 점에서 성(姓)과 묘지를 연결지어 생각하게 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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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독일의 과거청산과 기억문화
알렉산더 렌너.최광준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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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과거산을 잘한 나라라고 한다. 나치의 학살을 사과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여러 제도들을 마련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할 수 있는 문화를 지니고 있다. 기억문화라는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과거산이 제대로 되었는가? 되었다는 대답을 하기가 힘들다. 여전히 친일파들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을 보면. 하긴 어떤 학자는 (아니 기관장인가? 학자라고 하기엔 좀~) 일제시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적이 일본인 일본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치 치하의 비시 정부 프랑스인들은 국적이 독일인인가? 지나친 비약이긴 하지만.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인들은 국적이 미국이었고?


이 정도로 과거산이 안 되어 있으니, 기억문화라는 말도 생소할 수밖에 없다. 기억문화는 무언가가 정리가 되고 그것을 사회 차원에서 기억하는 문화가 확립되었을 때 쓰는 말 아닌가. 친일파 문제조차도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고 있는데, 무슨 기억문화?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일본과 얽혀 있는 군위안부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군위안부라는 말을 쓰지 말고 성노예라는 말을 쓰자고 한다. 그것이 더 정확한 용어라고. 용어 문제가 해결되어야 과거산, 기억문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자발적 매춘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으니, 과거 청산은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상태에서 기억문화라니, 가당치도 않다. 기억문화가 확립되기 위해선 과거 청산이, 진실규명이 확실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제조건이다.


이 책은 독일과 우리나라의 교류를 기념하여 독일 사람들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로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한 것을 정리했다. 토론 내용은 이 책에 실리지 않았고 발표 내용만 실렸는데... 그 중에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꽤 있다. 특히 '기억문화'라는 말.


그렇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지 않은가. 기억문화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을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 그것이 바로 기억문화다. 그런데 기억문화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과거 청산이 이루어져야 하고,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그렇다면 기억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을 정리해야 한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사건들을 철저히 조사해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일을 하는 위원회가 있다. 여전히 많은 것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많은 진실을 밝혀내기도 했으니, 기억문화를 확립하는 데 한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먼 과거만이 아니라, 2000년대 들어와서도 밝혀지지 않은 일들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 철저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권력을 지닌 가해자의 책임을 묻는 일, 그러한 가해자가 책임을 지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에서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는 것도, 평화의 소녀상 문제를 다루는 것도 그래서이다.


아직 가해자들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도에 반한 죄'를 철저히 적용하는 일이다. 


과거 청산과 기억문화. 독일 역시 완전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우리나라 역시 미흡하기는 하지만 그런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시민들이 더 잘 인식하고 함께할 때 진정한 '기억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다만, 학술적인 내용이라 내용이 많이 건조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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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검사들 - 수사도 구속도 기소도 제멋대로인 검찰의 실체를 추적하다
최정규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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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法)에 대한 불신 시대. 법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는 좋지 않지만, 법이 무시당하는 시대 역시 좋지 않다. 


예전에 함무라비 법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법이라는 말을 듣고 와, 무시무시하다 했다가, 그것이 아니라 당시에 과도하게 자행되던 힘이 있는 자들에 의한 법 집행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 것, 자신의 죄보다 더한 벌을 받지 않도록 한 법이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보고서, 아, 법이란 이런 것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내용을 다르게 바꾸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말은 곧 인권보호라는 말이다. 인권보호가 법이 우선하는 가치여야 한다는 것, 인권보호를 우선한다면, 그 법은 당연히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을 것이고, 사익(私益)이 아닌 공익을 추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 첫부분에 바로 이러한 법에 대한 이야기, 법 중에서 검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세 집단, 판사-검사-변호사 중에 검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법조인이라도 검사가 가장 큰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판사가 아니라 검사라고? 판결을 판사가 하는데? 판결은 판사가 하지만 검사가 기소를 해야만 재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소를 할 수 있는 집단이 검찰뿐이었다. 지금은 공수처도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일반 사건에 관한 기소 권한은 검찰만이 쥐고 있다. 여전히. 따라서 일반인들에게는 판사보다는 우선 검사가 더 어렵고 두렵게 다가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힘센 사람으로, 권력을 쥔 사람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면 검찰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일반인들을 대해야 하는가? 저자인 최정규는 '검찰제도의 핵심은 첫째는 시민들의 인권보호, 둘째는 권력으로부터의 분리다. 이 두 핵심을 가장 잘 담은 표현은 "공익의 대표자"다'(26쪽)라고 하고 있다.


인권보호? 검찰이? 아마, 인권이 유린당하는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찰(서, 청)과 검찰(청)을 들 것이다. 우리 역사를 보면 그곳에서 엄청난 인권유린이 있었고, 인권유린은 곧 권력과 유착된 검찰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공익의 대표자가 아니라 권력의 대변인, 아니 권력의 사냥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이 물라고 하면 무는 역할, 수많은 조작 사건들을 보라. 또 힘없는 사람들의 사건은 무시하던 행태를 보라. (이 책에는 그러한 수많은 사건들이 예로 나오고 있다.) 그래서 검찰은 시민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한 조직이었다. 지금도 신뢰를 회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최근에 벌어진 여러 사례들을 보면 검찰은 더더욱 신뢰를 잃어가고 있으니...


저자가 이 책에서 들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저런 검찰이 법을 집행한다고 여태까지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했다는 말인가 하는 한탄이 나온다. 저런 검찰을 민주화되었다고 했던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가만 놓아두었는지, 검찰 개혁, 검찰 개혁, 정말 말이 많았는데, 무엇이 개혁되었지 하는 생각.


검찰 개혁을 누가 하지? 당연히 정치권에서 하는 줄 알았다. 검찰 개혁을 내세우며 당선된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래서 믿었다. 믿었는데, 믿음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이 책의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간 변호사로 검찰과 법원을 많이 접했던, 피해자의 처지에서 검찰과 법원을 바라봤던 변호사의 말이다.


첫째, 검찰 개혁은 정치인의 손에 맡길 수 없다.

둘째, 검찰은 스스로 개혁될 수 없는 조직이다. (284쪽)


왜냐? 아직도 그들에게는 기소독점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독점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절대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검사의 기소독점권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개혁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검사들이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 등 사건 관계자는 수사 진행 중 담당 검사와 면담을 요청할 수 있다. 담당 검사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면담 의무 규정, '시민 문전 박대 금지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263)라는 저자의 말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검찰청 민원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민원실에서 민원을 제기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자신의 사건을 검사에게 이야기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변호사조차도 검사를 직접 만나기 힘들다고 하니, 물론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들은 예외다) 상황에서 인권보호? 될 리가 없다. 


하여 검찰 개혁, 큰 것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앞에 언급한 검사의 면담 의무 규정이라든지, 또 민원실에 검사들이 직접 근무하게 한다든지 (하하, 검사님들이 그런 감정노동을 하시려고 할지?, 이 책에 보면 연구하는 법무연수원에 가는 것조차 좌천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시니), 기소를 독점하지 못하게 서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기소 대배심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또 검찰에 수사를 하게 하는 수사심의위원회법을 좀더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하든지 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그래야 검찰 개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도 잘 보면 정치인들이 해야 한다. 검찰은 스스로 하지 못할 테니까. 지금은 대의제 민주주의니, 정치권에서 이러한 제도를 만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한 압력을 누가 넣을 수 있는가? 바로 시민이다. 시민들의 압력이 강해지면 정치권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표를 의식하니까. 그러니 검찰 개혁을 할 수 있는 주체는 시민이다. 저자가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얼굴 없는 검사들]이란 말은 '시민들에게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285쪽) 검사들이라는 말인데, 이들도 자신들의 공을 내세울 때는 기자들을 앞세우고 언론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들의 얼굴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 또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이런 모습을 없애는 것, 그것부터 검찰 개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이 제목을 다르게 읽었다. 얼굴은 곧 낯이고, '얼굴 없는'은 '낯짝이 없는'이라고. 후안무치(厚顔無恥)라고. 다시 얼굴은 체면이고, 체면은 예의와 염치니' 얼굴 없는'은 '예의와 염치가 없는, 부끄러움이 없는'이라고 읽었다.


이젠 그런 얼굴 없는 검사들 없어져야 한다. 권력욕이 아니라 인권보호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이 검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 눈치를 보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검사가 왜 없겠냐마는, 검사라는 집단이 지금까지 그러하지 않았으니, 도매금으로 넘어간 다른 검사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얼굴 없는 검사들은 열심히 일하는 검사다운 검사에게 미안해 해야 한다. 시민들에게는 미안해하는 것은 당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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