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시간표 - 정보라 연작소설집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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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이야기는 곧 사람 이야기다. 귀신을 꼭 사람으로만 보지 않아도 결국 귀신 이야기는 사람 이야기로 귀결이 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존재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귀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귀신을 보고 그것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지금 현재로는. 우리는 둘리틀 박사가 아니기 때문에 동물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고, 또 외계 존재는 아직도 만나지 못했기에...)


이번 소설은 연작소설이다. 공간적 배경이 같다. 연구소다. 연구소 하면 먼저 감성보다는 이성을 생각한다. 이성이 작동하는 것,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려 하는 곳이 연구소다. 따라서 연구소에는 비합리적인 것들이 들어서기 힘들다.


그런데도 연구소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비합리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다는 것, 또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도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증명하기는 힘들지만 존재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이성을 작동하는 것이 인간 아니겠는가. 그래서 대부분의 귀신 이야기는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 귀신은 그냥 귀신이 되지 않는다. 귀신에 홀리는 사람은 그냥 홀리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있다. 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면 그것은 비합리, 비현실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현실적이 된다.


귀신 이야기가 사람 이야기가 되는 순간이다. 정보라 소설은 이렇게 비현실을 현실로 바꾸고, 귀신을 사람으로 바꾸어준다.


연구소에서 일하는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는 선배다. 그런데 선배는 앞을 볼 수 없는 인물로 나온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주로 예지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경향이 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존재가 된다. 선배 역시 연구소에서 오래 근무하면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준다. 


또한 이 소설집에서 귀신에게 도움을 받는 존재들은 약자들이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들, 그러나 남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은 존재들, 그런 존재들은 귀신이 해를 주지 않고 도움을 준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현실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소설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을 읽으면 우선 재미있다. 귀신 이야기는 늘 흥미롭지 않은가. 오죽하면 21세기에도 '심야괴담회' 같은 방송이 인기를 끌겠는가. 영화에서도 공포물에 주로 귀신이 등장하기도 하니, 귀신 이야기는 우선 우리의 호기심을 끈다.


무서워하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귀신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비슷하지 않은가. 무서워하면서도 귀신에 끌리는 존재들... 그런 호기심을 지나면 이제 우리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도박에 빠져 가족을 내팽개치는 사람, 산재를 당했는데 그 산재로 인해 능력이 있음에도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사람(양의 침묵)이 나오는가 하면, 귀신을 단지 자신을 알리는 흥미거리로 삼는 사람(저주 양)도 나오고, 금기를 어겨 고난을 겪게 되는 사람(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는 사람(손수건)과 다른 존재에 대한 배려가 없이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푸른 새), 제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고양이는 왜)도 나온다.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인물, 사건을 통해서 그런 인물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런 인물들이 잘 되거나 못 되는 모습을 이번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 귀신 이야기가 그렇듯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양의 침묵'을 보라. 연구소 부소장 이야기인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사회에서 배제 당하지만 그럼에도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존재들을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 삶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대로 '저주 양'에서는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 아니다. 자신을 알리려는 수단으로 연구소를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양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같은 양이지만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귀신 역시 마찬가지라면 위안이 될까?)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고양이는 왜'에서 살인이 밝혀지지 않아 살인자로 잡혀가지 않지만 그에 대한 벌을 받는다) 모습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뭐,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여름에 이 소설을 읽으면 시원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예전에 '전설의 고향'이란 방송이 한여름에 납량특집이라고 해서 방송되기도 했으니...


여름을 나는 방법으로 이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위도 잊고, 또 나름 귀신과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적어도 이 소설을 읽으면 '귀신은 뭐 하고 있나? 저런 인간 잡아가지도 않고.'라는 말을 왜 옛날부터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나 한다.


정작 그러한 귀신도 시한이 있다는 것을 마지막 소설 '햇빛 쬐는 날'에서 보여주고 있지만, 이는 원한이라는 것은 반드시 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 주변에 원한이 있는 존재, 무언가 풀지 못한 문제가 있는 존재가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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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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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 장기, 바둑이 있다면 서양엔 체스가 있다. 체스는 바둑보다는 장기와 더 비슷하다. 정해진 말들이 있고, 말들이 움직이는 규칙이 있으며 왕을 잡으면 경기가 끝난다는. 규칙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매우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기나 체스나 전쟁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장기나 체스는 상대의 말들을 없애는 쪽으로 운영을 하고, 최종적으로는 왕을 꼼짝 못하게 만들면 이기는 경기니까. 


그렇다면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를 존중하는 싸움도 있지만, 어떻게든 상대를 파멸로 이끌 전략이 필요하다. 자신은 침착하면서 상대를 흥분시키는 전략과 전술. 또한 자신의 의도를 상대가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전술 등등.


이런 일들이 전쟁에서만 벌어지지는 않는다. 인간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강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의 속내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그는 천천히 상대를 관찰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인다. 반면에 약자는 서두른다. 상대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츠바이크 소설 '체스 이야기'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에서 일어나는 일. 우연히 체스 세계 챔피언이 탄 것을 알고 그와 체스를 둔다. 그를 이길 수 없음은 당연한데, 우연히 어떤 사람이 훈수를 둬 비기게 된다. 누군가? 세계 챔피언과 맞먹는 체스 실력을 가진 사람은? 서술자는 그를 찾아가 다시 한번 챔피언과 대결하라고 부추긴다. 이에 그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이야기가 바로 나치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무 것도 없고, 어떤 할 일도 없는 상태. 우연히 체스 대결을 기록한 책을 얻고, 그것만을 외우다시피 한 인물. 외운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직접 체스를 두는 인물. 하지만 한 사람이 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분열된다는 이야기.


결국 나치가 원하는 것, 가장 심한 고문은 인간을 분열시키는 것. 자신들은 어떤 물리적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정신이 붕괴되어 가게 하는 것. 그것이 고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나치의 잔인한 행위가 드러나는데, 챔피언과 체스를 두면서 챔피언의 태도에서 그는 나치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리는 그런 태도.


츠바이크는 나치가 멸망하기 전에 생을 마감했기에, 나치의 어둠이 사라질 것을 믿었지만, 사라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나치의 행위는 바로 체스 챔피언의 태도와 같은 것. 오로지 하나만 알고 상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의도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하는 그러한 행위들.


소설에서 인물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 그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서술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챔피언에게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저렇게 침착해야지. 나와 상관없는 일에는 신경쓰지 말아야지.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감정을 잘 이용해야지 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나가는 현실. 그런 사람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지금 사회 아닌가. 


하여 이 소설은 나치 시대를 비판하고 있지만, 자신만을 알고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는,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능력주의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면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그것이 자아를 분열시키는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치는 사라졌지만 최근에 신나치주의자들이 발흥하는 이유도 지금 세상이 능력주의만을 숭상하는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시에 나치가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시켰다면 지금은 능력주의라는 허상으로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등장인물이 체스판을 떠나는 것과 같이 우리 역시 벗어날 수 있을 때 벗어날 수 있도록 지금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들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낯선 여인의 편지'도 잘 읽었다. 한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음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여인의 그 사랑은 결코 남자에게 가 닿지 않는다. 왜? 남자는 강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수많은 여인들을 만나는 사람. 그에게 사랑은 하룻밤 또는 한때 집중했던 감정. 지속되지 않는 순간의 사랑이었을 뿐.


그러니 여인의 죽음은 그러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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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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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정보라 소설에 빠져 있다. 환상소설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소설 속에서 통렬하게 복수해주고 있어서 읽으면서 통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권선징악이고, 억울한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복이 따르는 인과응보가 있어서 권력이 현실에서 처벌받지 않는 유권무죄, 무권유죄 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사회에서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가끔 이거 약자의 대리 만족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아니 그러한 대리 만족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한 관점은 결국 현실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한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라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이번 소설집 제목은 [여자들의 왕]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모든 주인공은 여자다. 여자들을 등장시켜 그동안 우리들이 읽어왔던 작품들을 뒤집게 한다. 여성성을 평화와 사랑이라고만 생각하는 관점을 뒤집어 놓은 소설들이 있는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여성이나 남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집의 앞에 실린 세 편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든지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기사 이야기 또는 서양의 좀비들 이야기를 바꾸었다고 보면 된다.


기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공주가 주인공이고, 용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유모와 같이 (이 소설에서 유모가 깨어 있으면 용은 잠들어 있고, 용이 깨어 있으면 유모가 잠든다고 하니, 둘은 같은 존재다.)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가 어떻게 비틀리는지, 여기서 여성이 사랑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사막의 빛'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이슬람 역시 포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소녀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들의 왕,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어두운 입맞춤'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여기서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전쟁와 암투를 그리고 있다. 여성이 장군으로 나오는 경우 우리는 이미 '뮬란'에서 경험했다. 또한 우리나라 고전 소설인 '박씨부인전'에서도 뛰어난 여성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박씨는 여성으로서 무시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냈다고 표현되고 있는데, 정보라 소설에서는 우선 뛰어난 능력으로,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쪽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성들이 왕이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내용도 있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함에도 세상에서 잊혀지는 경우도 있으며, 흡혈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만나게 된다.


굳이 여성과 남성으로 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앞 세 편의 소설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공주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기사나 왕자를 불필요한 존재 또는 사악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왕비 역시 마녀라고 나오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마녀가 아니라 사랑을 찾는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즉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사연을 자신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소설은 복수보다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특히 '사막의 빛'은 팔려간 소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소녀를 사간 상인들이(아랍 상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녀를 학대하지 않고 함께하는 모습, 소녀가 다른 존재를 아끼는 모습, 술탄이 무지막지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고뇌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 소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고향이 물 부족 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결말.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 했던 인신공양(인신공희)의 모습이 그 자체로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결말로 나아가는 것 (아마 '심청전'도 그렇지만 심청전에서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심청이를 바다에 빠지게 했지만 이 소설에서 아랍 상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술탄에게 바친다는 행위는 심청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죽음을 알고 그곳으로 보내지는 않으니)이 좋다.


각박한 세상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면, 그 빛에 의해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문학이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복수의 소설이든 행복의 소설이든 모두, 그러한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것.


정보라의 이번 소설에서는 그러한 빛을 보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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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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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고통으로 사람을 치유한다는 사이비 종교가 등장한다. 얼핏 들으면 불교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불교도 고통을 말하고 있지 않나. 그 고통을 넘어서 해탈로 가는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불교 아니던가.


그런데 불교는 고통을 일부러 주지는 않는다. 이미 삶에 고통이 들어있기에 그 고통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면, 사이비 종교는 고통을 통해서만 사람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기에 외부에서 고통을 가한다. 신체적인 고통을 포함해서.


반대로 이런 신체적 고통을 없애기 위한 의학적 노력이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앤다는 것도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일 수 있지만, 현대 의학은 약물을 통해 신체를 조절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부작용도 없고 중독도 되지 않는 약이 나온다면...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는 약이 있다면 어떤 세상이 될까?


그런데 부작용이 없고 중독도 안 되는 약을 개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한다면? 그 결과 나온 약으로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고통을 없앴다고 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내 고통을 없앤다? 이것도 문제다. 동물 실험을 금지하고 있는 요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그 사람을 고통에 빠뜨림으로써 개발된 약이라니... 그런 약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소설은 강력한 두 부류를 설정하고 있다. 약을 통해 고통을 없애는 제약회사. 고통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 그렇다면 제약회사가 약 개발에 성공하면 사이비 종교 집단은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없다. 제약회사를 없애야 한다. 그러한 약을 개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들이 약의 제조법을 빼돌려 복제한 약을 이용해 고통을 극복했다고 선전한다.


이렇게 두 집단은 대립하면서도 고통을 이용한다는 면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회,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다.


사이비 종교는 제약회사에 폭파해 최고 경영자들이 죽고 (소설 속 주인공 경의 엄마와 아빠다), , 약 제조법을 훔쳐 약을 제조하고(제약회사에 폭탄을 던진 태의 엄마가 위장 취업해 제조법을 빼내온다) 결국 사람이 죽는다.(검증이 안된 약을 제조해 신도들에게 먹게 하고, 그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는다.) 형사들이 수사에 나선다. 과거 사건 관련자인 경과 태, 그리고 경을 사랑하는 현이 형사 륜과 순과 함께 등장한다. 여기에 의사... 이 의사의 존재가 환상문학으로 이 소설을 판단하게 한다. 


어쩌면 이 의사의 존재는 인간이 고통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을 몰랐던 외계의 존재가 인간의 몸으로 고통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 할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내 고통을 이겨낸다는 것은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통을 아예 없애는 것도 문제지만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것을 넘어서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다. 고통이 인위적으로 주어졌을 때는 폭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느끼는 고통,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겠지만, 성장을 위해 일부러 고통을 가하는 것이 성장을 도울지는 의문이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달랐다.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 비일상적인 삶의 경험과 강렬한 고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타인과 즉각적인 유대감을 맺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통과 고통의 탐색은 오히려 경을 타인으로부터 고립시켰다.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과거에 발목을 잡히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던져야 할 질문들을 모두 던지고 나면 같은 질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말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경은 그 사실 또한 확실히 깨달았다.' (301-302쪽)'  


이렇게 경의 깨달음으로 소설은 행복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그러한 행복을 보여주기 위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 고통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윤리적 의약 개발, 살인사건, 사이비 종교, 여기에 음모론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등장하고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 끝부분까지 의문의 인물인 외계의 존재까지 나오면서 그것이 밝혀지는 과정도 재미 있다. 소설은 그러면서 과연 고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끝까지 긴장을 하게 하는 사건 전개가 뒷이야기가 궁금하게 만들어 소설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재미와 생각.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남의 고통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고통에 발목 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불교를 고통의 종교라고 하지 않고 자비의 종교라 하고, 기독교를 원죄(낙원에서 추방된 고통)의 종교라 하지 않고 사랑의 종교라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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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2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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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잘살 수 있을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제쳐두곤 한다. 특히 지금의 생활에 빠져 있을 때 죽음은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그렇게 지금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남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는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감정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만약 죽음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렇게 행동할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언젠가는 반드시 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남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줄이거나 멈출 것이다. 그런데도 제가 제 쾌락을 위해 행동할 때는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행위들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 그 소설이 바로 정보라가 쓴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다. 학교 폭력을 떠오르게 하는 소설인데, 가해자들이 떵떵거리며 살아서는 안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서 가해자들을 소설 속에서 응징하는데, 이 소설에서 한때의 잘못, 어렸을 적의 실수라고 생각하는 인물이 나온다.


한때 저질렀던 잘못이라고? 용서할 수도 있지 않냐고?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은 개구리에게 그건 실수였어라고 한다면, 개구리가 아, 실수였구나, 그래 내가 용서할게라고 할까? 그것은 가해자의 입장일 뿐이다. 피해자는 귀신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귀신이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길 바라는 마음, 어쩌면 소설은 그러한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보라의 이 단편집에 실린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가 섬뜩하지만 그럼에도 위안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반드시 실현된다고 할 수 없는 인과응보. 소설에서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소설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을,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것. 


이 소설집에는 기괴하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 꽤 있다. 사실 우리가 죽은 사람들과 무엇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림자를 떼는 인물도 나오고('그림자 아래' - 이 소설을 읽으면서 구병모가 쓴 '파과'가 떠오르기도 한다. 나이 든 여성이 등장하고 그 일이 킬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죽은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도 있고('전화'- 이 소설은 따스하다. 죽은 자와 통화할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감추고 싶은 죽음도 있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도 있으니), 또 죽어서도 마약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존재도 있다.('사흘'- 마약이란 죽어서도 끊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게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좋다 )


이러한 장면들이 나오는 소설과 함께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도 있는데 (감염, 타인의 친절), 이런 소설들 역시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특히 남의 고통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 고통은 다른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니라고 하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하는 말들을 쉽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고통받는 사람에게 더한 고통을 주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결국 고통받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치는 그 사람이 고통을 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그러한 시간과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섣부른 위로를 삼가면서. '타인의 친절'이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고.


'감염'이란 소설은 섬뜩한 마음이 들게 했다.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동해도 그 행동이 결국에는 자신의 몸에,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모습. 자기 의지가 아니라 남이 원해서 하는 행동이었지만,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이 감염되고 마는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행동과 말들이 결국은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왜 폭력을 사용하면 안 되는지, 혐오 표현을 하면 안 되는지를 적실하게 보여준 소설이다.


등장인물이 감염되어 가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다소 기괴한 장면도 나오지만, 그러한 기괴한 장면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남에게 준 고통을 자신이 똑같이 받아야지만 속죄가 되는 것이 아니지만, 또 그러한 행위로 자신은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게 한 사람은 은연 중에 감염되어 폭력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감염이다. 하여 감염은 내 의지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면역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이는 이성이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순간 통제를 할 수 없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으로 폭력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온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예전에 발표한 소설들을 엮어서 낸 책인데, 한편 한편이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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