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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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사회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곤충사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편이 좋다. 왜 곤충 이야기를 하는가? 바로 우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곤충에게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운다고나 할까.


이 책은 최재천 교수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본인이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 의예과에 가려고 했으나 떨어져 2지망으로 동물학과(생물학과)에 입학하고, 학과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다가 유학을 결심하고, 유학해서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민벌레를 연구하고, 개미를 연구하게 되는 과정이 초반에 잘 나와 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우리들의 삶을 연결지어 이야기를 한다. 곤충 사회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협력을 한다. 즉, 경쟁을 하기도 하지만 협동을 통한 경쟁이라고 해야 옳다는 것이다. 경쟁을 하더라도 대부분의 과정을 협력을 통해 이루어나간다는 사실. 이것이 사회적 존재로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점을 곤충 사회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존재들은 하나의 역할만 하는 존재로 구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한 장소에 함께 있어야 한다. 같은 종 내에서도 다양한 역할이 있어야만 성공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는데, 이를 확장하면 생물종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물들이 공존해야 한다.


다른 생물종을 파괴하면 결국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다.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 이 점은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멸종시킨 생물들로 인해 인간이 멸종할 수가 있다. 하긴 그것을 피하기 위해 화성으로 이주하자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이주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금 살고 있는 지구를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인간 중심의 개발을 멈추고 생물 다양성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인구 감소를 걱정하기보다는 적정한 인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그 인구를 유지하면서 다른 종들과도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책 전반에 걸쳐 실려 있다. 자신의 삶과 생물학 연구 동향, 성과와 그리고 우리 인류의 삶이 연결되고 있다. 하긴 인간의 삶이 다른 종들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다윈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구상에 있는 생물들은 하나에서 시작되었음을, 창조론을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이 바로 모든 존재는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삶을 추구해야 함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공 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 아홉은 이렇게 답할 겁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라고요. ... 꽃을 피우는 식물은 자연계에서 무게로 가장 성공한 존재이고, 곤충은 숫자로 가장 성공한 존재입니다. 이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물고 뜯어서 성공한 게 아니고 서로 손잡고 함께 성공한 겁니다.' (15쪽)


이 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것을 최재천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과 생물학의 성과를 연관지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기후 위기의 시대에 생물 다양성이 파괴되고 있는 현실도 직시하고 다양한 종들이 공생할 수 있는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이 말을 사람들에게로 확장해서 말하고 있다.


'생태적 전환을 해야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명한 인간이라는 자화자찬은 이제 집어던지고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공생적 인간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로서 다른 생명체들과 이 지구를 공유하겠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공생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279쪽)


최재천 교수는 이 책에서 인간과 다른 종들의 공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이 다른 종들만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보라. 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 위험에 처한 나라들을 보라. 여기에 좀 가지고 있다고, 힘이 있다고 없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들을 보라. 


다른 종과도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 같은 종인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면 다른 종의 멸종으로 인간이 멸종에 이르기 전에 인간끼리 서로를 멸종시키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 자연으로부터 배우라고 그렇게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해 자연이 보여주고 있는데, 사피엔스라고 지혜롭다고 하는 인간이 기를 쓰고 배우지 않으려고 하고 있으니... 이 책을 쓴 저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읽는 나도 답답했는데...


하지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기후 위기에 대해서도 생물 다양성에 대해서도 그리고 인류의 평화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아직은 희망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책도 나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단순히 곤충사회에 관한 책이 아니다. 우리 인간 사회, 아니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는 종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최상위에 있는 인류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최재천의 곤충사회는 최재천이 말하는 인간사회다. 우리가 처한 현실과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미래 사회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도 좋지만 호모 심비우스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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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4-10-22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때문에 생각났는데 딱 보여서 놀랍고 반갑네요.^^

kinye91 2024-10-22 09:45   좋아요 1 | URL
하하, 좋네요. 가끔은 이렇게 연결되는 책이 있는 것 같아요.
 
얼굴을 그리다 - 초상화가 정중원 에세이
정중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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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예전에는 많이 그려졌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없었으므로. 사진이 나온 다음에는 초상화는 거의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아니다. 여전히 초상화가 그려지고 있다. 사진으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을 초상화가 찾아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진이 있는데 굳이 그림을? 그것도 요즘 사진이 얼마나 화소가 많아 화질이 뛰어난데...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사진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이 책을 읽으니 그것이 아니다. 


사진도 나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때 어느 각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찍었느냐에 따라 내 얼굴이 달라진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내가 찍은 사진과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하니, 사진이 나를 똑같이 드러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림을 보면서 실물과 똑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칭찬이기보다는 창의성 없다는 말과 통할 때가 많다. 실물과 똑같을 수는 없지만 (이것은 이 책의 뒤에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대한 이야기와 하이퍼리얼리즘을 참조하면 된다. 무엇이 정말 '나'인지...) 화가들은 똑같이 그리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초상들을 보면 실물과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고 한다. 실물에 있는 점 하나도 빼먹지 않아야 했다고 하니... 하지만 그것은 그림의 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단점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지 똑같이 그렸다는 말과는 다르다.


즉 인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 그 사람을 꾸미지 않고 표현했다고 해야지 똑같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 초상들은 그런 그림을 통해서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을 드러내려 했다고 읽은 적도 있으니...


이 작가도 마찬가지다. 초상을 그리되 똑같이 그릴 수는 없다고 한다. 의뢰인이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은 시시각각 변하기 나름이고, 또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뢰를 맡아 그림을 그린 과정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처음에 그가 한 실수들, 그 실수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적어도 의뢰인이 만족할 만한 초상을 그리게 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초상은 똑같다를 떠나서 무엇을 드러내고 감추어야 하는지를 판단하고, 그런 판단에서 초상이 그려진다는 점을 잘 알려주고 있다.


또한 초상에는 사회의 모습도 담겨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지폐 속 인물들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 또 표준 영정이라고 하는 세종대왕, 이순신, 율곡, 퇴계 등의 초상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를 돋운다.


세상에 표준 영정을 제정해서 다른 얼굴을 그리지 못하게 하다니... 아니 그릴 수도 있겠지. 다만 비난을 받게 되겠지만. 이는 획일화다. 다양성과 개성을 추구하는 예술과 거리가 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당시에 그린 초상이 남아 있지도 않은 조상들의 얼굴을 표준으로, 딱 이거여야 한다고 정해서 다른 상상을 막다니, 그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화폐에 들어가는 얼굴이야 나라에서 그렇게 정했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밖에 다양한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양부터 우리나라까지, 그리고 초상이 지니고 있는 의미와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로 초상에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까지를 살피고 있다.


그가 그린 초상화 그림도 볼 수 있어서 좋고, 많은 인물들의 초상화와 그 초상화에 얽힌 사연을 만나볼 수 있어서도 좋았다. 


이 책을 읽으니 사진 또 인공지능 시대라 해도 사람이 직접 자신의 관점, 마음을 담아 그리는 초상화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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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책을 읽다가 이런 시도 있다는 글을 읽고, 어떤 시길래? 하는 생각에 읽게 된 시집.


  이렇게 기괴할 수가!!! 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세상에, 시라면 서정을 떠올리고, 서정이라면 뭐랄까? 그래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그런 상태를 많이들 떠올리는데, 이건 뭐, 정말, 작가의 말을 명심해야 했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똥 핥는 개처럼 당신을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무슨 영화 시작할 때 경고 문구도 아니고, 이런 말을 시인이 직접 하다니... 정말 기괴한가 보다 하고 읽기 시작. 읽기 시작하자마자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고... 그런데 그런 첫시가 그나마 덜 기괴했다고 해야 할까.


시집을 읽으면 계속 나오는 성기 이름을, 똥, 구멍, 피, 죽음... 결코 순수하다고 할 수 없는, 오히려 더럽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계속 나오고 있으니... 여기에 보통 사람의 윤리의식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아니 시를 읽어낼 수 없는 시들이 연이어 있다.


왜 이런 시들을 썼을까? 시가 시인의 마음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시인의 마음은 사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이 세상은 가족부터 시작하여 온통 더러움으로 물들어 있는 세상 아니겠는가.


푸름을 자랑해야 하는 나무는 말라 죽어 있고, 배설의 기쁨을 누려야 할 곳들은 기쁨이 아니라 더러움 덩어리처럼 표현되어 있으니... 정말. 우리는 이런 더러움, 죽음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일까?


첫시를 보자.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제목이다. 정현종 시인의 '섬'에서 차용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시들에서는 출처를 밝혀놓았는데 이 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으니,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우리가 보통 쓰는 표현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모듬회 접시 한가운데에

그 섬이 있다


난자당한 살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그

섬에


닿고

싶다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17년 1판 4쇄. 13쪽.


그 섬은 결코 사랑스러운, 평화로운 섬이 아니다. 죽음으로 둘러싸인 섬이다. 죽음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섬. 그 섬의 주변에는 여전히 죽음이 난무하는 그런 섬. 왜 그런 섬에 가고 싶을까?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아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직시하면서, 죽음과 함께하는 삶일 수밖에 없다. 그 섬에서 사는 삶은.


그러니 결국 시인이 추구하는 삶은 비루함, 더러움, 어려움, 죽음을 멀리 멀리 감추고 사는 세상이 아니다. 시인은 우리의 삶은 이러한 비루함, 더러움, 어려움, 죽음과 함께 있다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그것이 아니라 삶은 아름다움이라고, 죽음과는 상관 없다고, 죽음은 가려져야 할 존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봐라, 이것이 네가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너는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세상에도 가지 못하고 있다. 네가 사는 세상은 죽음의 세상이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죽음으로 둘러싸인 섬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랑하는 시 '진달래꽃'을 변주한 '역겨운, 역겨운,역겨운 노래'(38쪽)라는 시를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더해 시인이 쓴 '시'라는 작품. 시인은 시를 삶에서 길어올리지 않았다. 죽음에서 끌어왔다. 



내 죽은 몸을 떠나지 못하는


내, 구더기의


영혼


김언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17년 1판 4쇄. 80쪽.


이것이 시라니... 우리가 생각하는 시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야말로 똥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구더기, 그것의 영혼이 시라니... 


이런 시가 이 시집에 수두룩하니 나오니, 정말 비위 약한 사람, 아니면 도덕의식이 높은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할 시집이다.


하지만 어디 삶이 좋은 면으로만 이루어졌던가? 그 좋은 면이 가리고 있는 좋지 않은 면, 그것도 우리의 삶임을 이 시집은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꿈보다 해몽' 식의 이해를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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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 따라 하다 보면 돈이 쌓이는 친환경 소비 라이프
최다혜.이준수 지음, 구희 그림 / 미래의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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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참 더웠다. 기후가 확실히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해였다. 더위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는 추위로, 어느 나라는 홍수로, 어느 나라는 산불로 몸살을 앓았다. 이런 어려움이 일상이 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지리라.


지금 고단해지는 것을 넘어 다음 세대에게는 고단함 정도가 아니라 고난과 재앙을 넘겨준다면, 그런 일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자산을 지금 앞당겨 써버리면 그들은 어떤 자산을 지니고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앞에서, 재앙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를 해야하는데, 이를 정부와 기업에게 맡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의지가 별로 없고, 이윤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는 기업 역시 앞장서서 환경을 생각하는 생산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도 나오는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업은 예외다)


이 책은 이런 위기 의식 속에서 출발했다. 중국이 각국의 쓰레기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뉴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과 쓰레기. 얼핏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쓰레기들을 중국이나 경제 발전이 안 된 나라에서 수입을 했었다. 그 덕에 부유한 나라들은 쓰레기 대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는 한 나라의 쓰레기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쓰레기의 총량이 줄지는 않고 오히려 더 느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을 실감하도록 한 것이 중국의 쓰레기 수입 거부였고, (쓰레기라고 하기보다는 재활용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나라는 정말로 쓰레기를 수입하기도 한다. 이때 수입은 쓰레기를 받고 그에 해당하는 수입을 얻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을 받고 쓰레기장을 제공한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재활용품 수거 거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였던 것이다. 쓰레기 대란... 평소에 별 생각없이 분리배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분리배출을 할 수 없게 되니, 다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현실. 이때부터 저자들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재활용을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물건을 구입했지만, 그것은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때부터 그들은 실천을 하기 시작한다. 안 쓰는 물건 정리하기부터.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소비를 줄이는 일과 연결이 된다. 소비를 줄이면서 가능하면 오래쓰기, 바꿔쓰기...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지금은 잘 쓰고 있지 않지만) '아나바다' 운동을 하게 된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는 일, 중요하다. 이것이 쓰레기를 줄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집 안에 있는 물건 중에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쓰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불필요한 소비를 자연스레 지양하게 된다.


이런 실천부터 일회용품 안 쓰기, 가능하면 채식에 가까운 식단 짜기, 산책을 할 때는 쓰레기 줍기(플로깅이라고 한다), 차는 가급적 잘 이용하지 않고 한 집에 꼭 필요한 한 대만 운용하기 등등.


자신들이 직접 실행했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이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임을, 여기에 절약이 자연스레 되니 저축도 되고 있음을...


무엇보다 이 책은 비장하지 않다. 환경 운동이라고 해서, 지구를 지킨다고 해서 비장할 필요는 없다. 또 완벽할 필요도 없다.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니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들 역시 가끔은 반(半-절반 반이라는 한자어를 쓰고 싶다. 反, 반대로하는 반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은 환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환경을 생각하는 일탈이니까) 환경적인 행동도 하지만,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즐겁게, 그리고 꾸준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려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비장함보다는 가벼움, 간혹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래,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거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하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즐겁고, 유쾌하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환경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이 특정한 소수의 인물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개인들의 실천과 더불어 정부, 기업 차원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파타고니아와 같은 기업이 필요하고, 각국의 정부는 환경을 살리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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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건너기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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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의 한 권이다. SF작가라 할 수 있는 천선란이 썼다. 천선란 하면 따뜻한 소설이 떠오르니, 이 소설 역시 따스함을 전해줄 거라 생각하고 읽었다. 


읽기 전에 책 표지에 접힌 면을 보니, '동화에서 소설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한다. 이는 동화라고 하면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최근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지만, 동화라는 말 자체에 아이 동(童)자가 들어 있으니)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가는 과정에서, 소설을 만나는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 깊은 독서를 위한 마중물'이라고 했으니, 징검다리, 마중물. 모두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 작품은 이 작품을 통해 또다른 작품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또다른 작품을 만나게도 하지만, 그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또다른 자신을 만나게 해준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즉 다른 나를 만나러 가게 하는 징검다리이자 (징검다리는 그냥 막 건너지 않는다. 사이 사이가 띄어져 있기에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이 다리에서 저 다리로 건너갈 때 앞을 정확히 보고 정확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니 징검다리는 현재 자신이 딛고 있는 다리를 알아야 하고, 다음에 디딜 자리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다) 다른 존재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무엇을 맞이하는 마중물인가? 당연히 지금보다 나은 나로 가는 징검다리이고, 지금보다 나은 나를 맞이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 '어떻게'의 역할을 각 작품이 하고 있겠지만, 이 작품은 '상처'를 이야기 한다.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평생 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 상처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마주보고 싶지 않은 상처,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결코 꺼내보고 싶지 않은 상처.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때에 나와 나를 괴롭히게 된다.


상처가 징검다리나 마중물이 아니라 물귀신처럼 나를 잡아 나락으로 끌어내린다. 그것을 잊으면 잊으려 할수록.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주보아야 한다. 끌어안아야 한다. 상처는 상처니까, 없앨 수 없으니까. 없던 일로도 할 수 없으니까. 자신에게 상처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소설은 그래서 아이 때로 간다. 거기서 아이를 만난다. 자신이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만나러 간다. 어른이 된 내가 아이가 된 나를 만난다. 그리고 아이인 나는 어른인 나가 자신임을 알아본다.


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 시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존재를 만난다. 이 존재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보다 훨씬 크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나는 어른이 되어 있다.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냥 묻어두고 있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직면한 두려움. 아이가 만났던 두려움과 더욱 커진 두려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냥 묻어두어서도 안 된다. 이제는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누가? 어른인 내가? 아니다. 아이와 어른인 내가 함께해야 한다.


함께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 바로 어린 나를 보듬어주는 일이 된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일이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과거의 나와 결별한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를 징검다리 삼고, 과거의 두려움을 마중물 삼아 다른 존재로 나아간 내가 된다.


짧은 소설에서 이렇게 '나'는 '어린 나'를 만나고 어린 나를 내 안에 받아들인 '어른'인 나가 된다. 그래서 따스하다. 상처가 있음을 알고도 따스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은 내용면에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이 소설은 다른 작품으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마중물이 된다. 그런 마중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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