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2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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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쓰기다. 쓰기는 읽기다. 읽으면서 머리 속에 글을 쓴다. 그냥 글자만 따라가지는 않는다. 문자를 읽으면서 그 문자에 속한 또는 문자가 포괄하고 있는, 문자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자연스레 쓰인다.

 

마찬가지로 쓰기는 읽기다. 쓰면서 읽게 된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쓰기와 읽기는 같은 행위가 된다. 그런데 왜 읽기와 쓰기를 할까? 그것은 자신을 알기 위해서다. 자신을 알고, 자신이 아는 것을 밖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이 책에 있다.

 

'독서의 목적은 생각하는 긴장과 외로움, 쾌락을 얻기 위함이다. 독서는 이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 독서는 타인의 삶을 사는 행위다. 자기만의 사고와 태도, 시각은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 (121쪽)

 

혼자만 알고 있으면 읽기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냥 읽는 것이다. 이때 읽기가 쓰기라고 했으니 어디에 쓰는가 하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쓴다. 자신의 몸에 마음에 쓰는 것, 그것이 바로 문자를 통해 남들에게 알리지 않는 쓰기다.

 

이것도 의미가 있지만 읽기가 남들에게 알려지는 쓰기로 전환이 되면 더 많은 파장을 만들 수 있다.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내 읽기가 쓰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읽기로, 다시 다른 사람의 쓰기로 간다. 이렇게 읽기와 쓰기가 연결되면서 끊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지를 알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읽기와 쓰기에서 나온다. 무지를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를 굳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행할 뿐이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178쪽)

 

바로 읽기/쓰기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냥 행한다. 그것이 잘못된 건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지는 권력에서 비롯된다.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지만 무지로 굳어지게 되기도 한다.

 

무지로 굳어진 권력은 자신들의 세계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행동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이 책은 이런 당연한 세계에 틈을 내고 있다.

 

정희진의 읽기가 쓰기로 전환되어 우리의 읽기를 촉발하고 다시 우리에게 쓰도록 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지의 세계, 당연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 구절을 보자.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 사회는 약자가 말만 해도 폭력으로 간주한다.' (165쪽)

 

결국 읽기가 쓰기로 나아가지 않으면, 익숙함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를 잃는다. 왜 우리는 읽기와 쓰기를 통해서 타인이 되어야 할까?

 

'타인이 됨으로써 약자의 저항(탈전통)과 융합을 강조하는, 공동체의 원리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169쪽)

 

바로 우리가 홀로 살아가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쓰기는 공동체의 삶에, 자신의 지식을 재배치하는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나를 알기 위해서 읽는다'로 바꿀 수가 있다. 우리는 나를 알기 위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알기 위해 읽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해줄 책만이 아니라 자신과 정반대에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책도 읽어야 한다.

 

아니, 좋은 읽기는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내가 안주하고 있던 세상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내가 발딛고 있는 현실을 흔들지 못하는 읽기는 나를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정희진의 이 책을 읽으며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 역시 무지와 당연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그냥 내게 주어졌기 때문에 의식조차 하지 않고 살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좋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정희진이 읽은 책을 평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 이 책이다. 수많은 책이 나오고, 많은 생각들을 만나게 되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여성에 관한 글들이 많다. 그 중에 몇 구절을 인용한다.

 

'여성 대상 폭력의 특징은 가장 죄질이 나븐 사례가 법으로는 가장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186쪽)

 

'차별은 심한데 인식이 낮은 사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다. 남성의 자연스런 일상이 여성에게는 모욕, 차별, 생명위협이다. 남성은 자신의 행동에 대응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행복권 침해'로 생각하고 증오와 피해의식을 느끼기 쉽다.' (218쪽)

 

'여성 살해는 일상이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225쪽)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아버지)들 간의 자존심, 자원, 욕망을 둘러싼 갈등을 여성의 몸에 실천하는 체계화된 사회 시스템이다. (227쪽)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살해들이 문제가 되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운동, 그와 더불어 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는 외침,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누군가에 의해 침해될 수 없는, 누구도 함부로 해서는 안될 생명이다.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생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어보라. 읽기를 통해 자신의 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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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녹색평론 이번 호를 기다리게 됐다. 이번 호에서 분명 코로나 19를 다룰텐데, 어떤 관점에서 다룰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칭찬받는 'K-방역' 쪽으로 논지가 흘러갈 것 같지는 않았고, 감염병 자체만을 다룰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분명 코로나 19 사태는 환경-생태 문제와 연결되어 있을테니, 그 관점에서 사상 초유라고 하는 이 코로나 19 사태를 분석하는 글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렇다. 코로나 19는 질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흔히 백신이 개발되면, 치료제가 나오면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처럼 다시 생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됨을 이번 호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코로나 19와 같은 바이러스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이고, 전세계를 팬데믹 상태로 몰고간 이번 일이 반복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를 코로나 19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온 삶의 형태, 또는 근대물질문명, 신자유주의, 성장우선주의, 민주주의와 연결시킨 글들이 많았다. 그렇다. 우리는 코로나 19 이전과 이후는 판연하게 다른 세상일 거라고, 우리는 결코 코로나 19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번 호를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코로나 19와 관련된 글들 제목만 나열해 본다.

 

한국형 뉴딜과 재난자본주의(강수돌), 균형재정론은 틀렸다(홍기빈), 팬데믹의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프랭크 스노든), 농업·농촌부터 살리는 그린뉴딜을(김해창), 팬데믹과 쿠바의 의료국제주의(원영수), 코로나, 흑인인권, 미국의 실상(전홍기혜)

 

얼핏 보면 코로나 19와 관련이 없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 기후변화 아니, 기후위기. 에너지에 관한 문제... 이런 글들을 '에너지 전환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기후변화에 대한 거짓 해결책들(메리 와일드파이어), 스크린의 배후-인터넷 접속의 진정한 비용(케이티 싱어), 기후위기의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장병윤) 

 

이중에 건강 문제도 건강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기후위기를 조장하고 가속하는 것이 인터넷이라는 것. 우리가 편리하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지구에 해를 끼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 바로 '스크린의 배후-인터넷 접속의 진정한 비용'이란 글이다. 이에 관련된 더 많은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김종철 선생의 글, 아마도 살아계셨을 때 쓴 마지막 글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코로나 시즌, 12개의 단상'

 

코로나 19와 기후위기가 연관되어 있다면,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민주주의 실현 없이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기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생태계 파괴가 계속될 것이라는 이야기니,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은 지속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국회. 따라서 '21대 국회를 바라보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21대 국회가 해야 할 일(하승수), 21대 국회는 국민발안권부터 제정하라(최자영) 는 글이 실려 있다.

 

한데 21대 국회, 과연 제대로 일을 할까? 이들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행태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국민들은 이들을 어찌할 수가 없다. 4년동안 속만 끓이며 지켜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국민은 주권을 지니고 있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어떤 법률을 만들 권한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회의원들을 소환할 권리도 없고.

 

그러니 이번 호에서 주장한 국회의원들을 뽑는 문제, 세상에 꼼수 정당, 위성 정당이라는 말을 듣는 정당들을 만들어 국회에 들어가고 만 그 행태들을 두 눈 뜨고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말로만, 헌법에만 조항으로 있는 주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제안을 한 글들은 의미가 있다.

 

국민들이 제대로 주권을 발휘해야 자신들만이 아니라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닌 모두의 이익을 위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이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고려하는 사람들에게는 생태 파괴는 있을 수 없고, 생태 파괴가 멈춰진다면 코로나 19와 같은 감염병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만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코로나 19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와 민주주의의 정체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이번 호를 읽으며 생각하게 됐다. 민주주의 정체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는 신자유주의, 성장 우선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함을 생각하게 해준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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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라고 당당히 말해요 -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외침 라임 틴틴 스쿨 15
다니엘레 아리스타르코 지음, 니콜로 펠리존 그림, 이현경 옮김 / 라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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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그런 사람들을 허균의 말을 인용하면 호민이다. 앞서 가는 이. 이들이 앞서 갔기에 후대 사람들이 조금더 좋아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호민들. 나중에 역사 책이나 전기에서 보면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냥 고민없이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에 따르는 불이익이 엄청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짧은 분량으로 그 사람들이 한 일을 정리해주고 있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좋다. 또한 그 행동을 한 시기도 나와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면 이들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한다.

 

체사레 베카리아(사형 제도에 반대한 사람), 에멀린 팽크허스트(여성에게 참정권을 위해 노력한 사람), 나짐 히크메트(글 쓸 자유를 위해 감옥에서도 시를 외부로 내보낸 터키 사람), 지몬 비젠탈(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한 사람), 프랑카 비올라(성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몸 권리를 지킨 사람), 마바쉬 사베트(종교의 자유를 위해 포기하지 않은 사람) 등등.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행동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교육은 지식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적어도 배우는 공간에서 부당함을 느끼면 그것부터 고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 청소년들에게 이런 책을 읽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생각하는 인간, 주체로 설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 역사를 통해 호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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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 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지음 / 한뼘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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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다. 특히 누드화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누드화에서 여성들은 서 있기보다는 (물론 서 있는 그림도 있지만 많은 그림에서 여성들은 옷을 벗은 상태에서 누워 있다) 누워 있는 그림이 많다.

 

왜 그럴까? 여성의 몸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틀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성의 시선에 만족감을 주기 위한 구도.

 

많은 그림에서 누워 있는 누드화가 많다. 그것도 종교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여성의 나체를 그리기 힘들었지만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나(유디트, 수산나) 신화에 나오는 인물(비너스,다나에 등)의 누드화는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을 남성 작가가 표현했을 때는 남성의 시선에 알맞게 표현했다는 것, 적장을 죽이는 유디트가 지나치게 연약하고 아름답게 표현이 되어 있다든지, 하녀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표현이 되었다는 것. 수산나 역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점이 잘 느껴지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르테미스라는 여성 화가에서는 주류 남성 화가들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기에 그 그림을 예로 들어서 왜곡된 시선으로 표현된 여성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면 저자는 단지 남성의 시각에서 왜곡된 여성의 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주류의 시각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남성-백인-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이 미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신화에서 미의 여신이라는 비너스를 많이 그리는데, 어느 순간 누워 있는 비너스를 그리기 시작하고 그런 유형의 그림이 대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성적 환상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성적 대상화를 위해 곡선을 강조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 잡으며 서 있도록 그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비너스를 눕히는 것입니다.' (112쪽)

 

바로 이것이다. 비너스가 누운 이유는, 비정상적인 몸을 그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눕히는 것이다. 세계 명화라고 별 생각없이 보는 그림에도 이처럼 주류 시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지니지 않으면 그런 관점을 자신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가 만든 '충열 테스트'를 제시한다. 같은 나체 그림이라고 해도 남자의 시선에 복무하는 누드와 자연스럽게 그런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네이키드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충열 테스트'는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필연적인 노출인가?

② 표정과 동작의 의도가 명확한가?

③ 직업, 나이, 성격, 등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있는가?

 

이 중에 아니오가 두 개 이상이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누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필연적이지 않고 의도도 명확하지 않고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없는 그림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림을 세계 명화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부터 보아 왔다.

 

그렇다면 이런 누드화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제시된 네이키드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벌거벗음인데, 그것은 자연스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이키드는 단지 옷을 입지 않은 몸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옷이라는 껍데기를 걸치지 않은 상태. 어떤 꾸밈 장치도 없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중요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바로 네이키드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네이키드는 숨기거나 가리거나 치장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흔적과 현재가 드러납니다.' (157쪽)

 

우리에게 필요한 그림은 바로 이런 성을 왜곡한 누드화가 아니라, 네이키드화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다. 모르고 왜곡한 시선과 관점을 계속 지니고 있다고 면죄부가 발행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잘못이다.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느 한 쪽 성이 다른 성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정한 성의 관점에서 다른 성들을 해석하고, 그들의 눈에 비치도록 미술 활동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특정 성의 관점을 포함하여 주류의 사고가 우리 세상을 왜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이 책은 미술 작품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실전문제까지 제시하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진단 테스트가 있는데 많이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서 아담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이 그림을 제시하면서 저자는 이런 질문을 한다.

 

진단 테스트 1

 

  이 그림은 르네상스 '3대 천재' 중 하나로 불리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일부입니다.

 

1. 그림에서 하나님의 성별과 피부색, 연령대는 어떠한가요?

2. 성경에 하나님이 백인 노년 남성으로 정의되거나 묘사된 부분이 있나요?

3. 성경에 2번과 같은 묘사가 없다면, 미켈란젤로는 왜 하나님을 백인 노년 남성으로 그렸을까요?

(14-15쪽)

 

이렇게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알려주고 있다. 읽어보면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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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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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감염병이 창궐한다. 왜 나타났는지, 어떻게 전개될지, 누구에게 옮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공포에 빠진다. 공포에 빠지지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마비되면 희생양이 필요해진다. 자신들의 공포를 분노로 대체하고 분노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생물을 찾는다. 그런데 그 희생물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도한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원인 모를 감염볌에 대처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보다도 더 감염병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를 읽다가 네메시스는 보복의 여신, 복수의 여신인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이 강한 유대인 젊은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했는데...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첫번째와 세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같다. 바로 주인공 캔터 선생이 놀이터 감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함께 있던 아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작가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첫번째 화자가 캔터 선생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두번째 부분에서 서술자가 바뀌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 캔터 선생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다시 첫부분의 서술자로 바뀐다.

 

그런데 서술자의 태도가 확 변한다. 물론 캔터 선생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린 시절 자신들의 우상이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불량스런 아이들에게 대처를 잘하던 캔터 선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폴리오를 겪고 나서 장애인이 된 캔터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적인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낼까?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려던 젊은이에게 왜 네메시스는 나타났을까? 그것은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에 깊이 관여해서 자신의 정신과 몸을 갉아먹은 캔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애매한 사람이 희생당할 수가 있다. 캔터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결국 소설의 끝부부에서 서술자는 캔터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273쪽)

 

이 말 다음에 이런 말이 서술되고 있다.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273쪽)

 

'대신 가혹한 의무감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의 힘은 거의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하는 이야기에 아주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 큰 대가를 치렀다.' (274쪽)

 

이것이 바로 네메시스가 캔터에게 나타난 결과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몰랐다. 즉, 자신이 어디까지 책임지고 나머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에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이렇게 무한책임을 지는 사람이 선할 사람일까? 물론 이런 사람이 많다면 사회는 조금 더 갈등없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자그마한 일에도 신경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책임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결국 책임이라는 가상의 덫에 빠져 현실의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캔터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소설의 서술자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은 캔터는 자신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다. 네메시스!

 

폴리오에 감염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달랐기에 이들의 삶도 달라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을 빌리면 캔터는 "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네메시스에게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하필이면 내게?'라고 생각하면 자꾸만 원인 규명으로 빠져들고, 자기 책임의 늪으로 끌려들어간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다보면 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자신은 세상에서 도태되게 된다.

 

'왜?'라는 말대신 '어떻게?"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자기 책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늪에서 빠져나올 밧줄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충분히 벗어날 수가 있다.

 

캔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왜?'에 매달린다. 그래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원망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데...

 

폴리오라는 소아마비로 알려진 병이 유행하던 때를 중심으로 소설은 펼쳐지지만, 감염병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것도 감염병에 대해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과도하게 지닌 책임감 때문에 파멸해 가는 모습을 그린 것.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음에도 공포에 잠식당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끝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이럴 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폴리오는 주로 어린아이, 젊은이들을 공격했지만, 지금 코로나19는 나이 많은 사람, 병약한 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격리나 공포, 또는 치료제 없음으로 인한 불안 등등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것을 원인을 규명하는 데로만 돌려 네 탓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일부 선량한 사람들이 혹 자신이 전파자가 아닐까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도 - 물론 적당한 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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