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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왕 - 정보라 소설집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정보라 소설에 빠져 있다. 환상소설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소설 속에서 통렬하게 복수해주고 있어서 읽으면서 통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귀신이 나오더라도 권선징악이고, 억울한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복이 따르는 인과응보가 있어서 권력이 현실에서 처벌받지 않는 유권무죄, 무권유죄 또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인 사회에서 소설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읽으면서 가끔 이거 약자의 대리 만족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아니 그러한 대리 만족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한 관점은 결국 현실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한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라 소설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이번 소설집 제목은 [여자들의 왕]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모든 주인공은 여자다. 여자들을 등장시켜 그동안 우리들이 읽어왔던 작품들을 뒤집게 한다. 여성성을 평화와 사랑이라고만 생각하는 관점을 뒤집어 놓은 소설들이 있는데, 어떤 특정한 성향이 여성이나 남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집의 앞에 실린 세 편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라든지 용에게 납치된 공주를 구하는 기사 이야기 또는 서양의 좀비들 이야기를 바꾸었다고 보면 된다.
기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공주가 주인공이고, 용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유모와 같이 (이 소설에서 유모가 깨어 있으면 용은 잠들어 있고, 용이 깨어 있으면 유모가 잠든다고 하니, 둘은 같은 존재다.)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가 어떻게 비틀리는지, 여기서 여성이 사랑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사막의 빛' 또한 마찬가지다. 이슬람을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이슬람 역시 포용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소녀의 입장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양한 문화가 만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자들의 왕,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어두운 입맞춤'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지만, 여기서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전쟁와 암투를 그리고 있다. 여성이 장군으로 나오는 경우 우리는 이미 '뮬란'에서 경험했다. 또한 우리나라 고전 소설인 '박씨부인전'에서도 뛰어난 여성을 만나왔다. 그럼에도 박씨는 여성으로서 무시와 고난을 겪고, 그것을 이겨냈다고 표현되고 있는데, 정보라 소설에서는 우선 뛰어난 능력으로, 그 자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쪽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성들이 왕이 되기 위해 암투를 벌이는 내용도 있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함에도 세상에서 잊혀지는 경우도 있으며, 흡혈귀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수도 있다는 설정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만나게 된다.
굳이 여성과 남성으로 가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앞 세 편의 소설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공주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기사나 왕자를 불필요한 존재 또는 사악한 존재로만 그리지 않는다. 왕비 역시 마녀라고 나오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마녀가 아니라 사랑을 찾는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다. 즉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 사연을 자신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소설은 복수보다는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특히 '사막의 빛'은 팔려간 소녀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소녀를 사간 상인들이(아랍 상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소녀를 학대하지 않고 함께하는 모습, 소녀가 다른 존재를 아끼는 모습, 술탄이 무지막지한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고뇌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 소녀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고향이 물 부족 없이 지내게 되었다는 결말.
동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 했던 인신공양(인신공희)의 모습이 그 자체로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결말로 나아가는 것 (아마 '심청전'도 그렇지만 심청전에서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심청이를 바다에 빠지게 했지만 이 소설에서 아랍 상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만 술탄에게 바친다는 행위는 심청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적어도 죽음을 알고 그곳으로 보내지는 않으니)이 좋다.
각박한 세상에서도 한 줄기 빛을 볼 수 있다면, 그 빛에 의해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문학이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복수의 소설이든 행복의 소설이든 모두, 그러한 한 줄기 빛을 보여주는 것.
정보라의 이번 소설에서는 그러한 빛을 보아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