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서 거장의 클래식 5
천쉐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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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 대한 글이라고 해석이 된다. '악녀서'라니.. 악마같은 여자가 나오는 소설인가 싶었다. 세상에서 악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있는데, 요즘은 이들에 대한 다른 시각을 지닌 소설들이 나오기도 했으니, 이 책에 나오는 악녀들은 누구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소설을 읽어도 악녀를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악녀인가? 하는 의문. 오히려 상처받아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점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난 사람 이야기. 


밀려났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제 자리를 찾은 사람 이야기. 이런 사람들을 악녀라고 하면, 우리 모두는 악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악녀들이 악녀라고 불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 텐데... 네 편의 소설 주인공은 모두 여자다. 그리고 이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사랑한다. 소위 말하는 동성애자이다. 


이런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지금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는데, 퀴어 축제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시위대들... 차별금지법이 동성애찬성법 또는 동성애권장법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동성혼이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인구총조사에서 동성 배우자를 인정한다는 최근 기사를 봤는데, 우리나라 역시 한 발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흡하기는 하지만. 반면에 대만은 동성혼을 인정한다고 한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그는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된 자유중국 타이완에서 첫 번째 동성 혼인신고를 하고 당당하게 함께 살고 있는 1호 부부이기도 하다. 다산 작가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지만 그는 어느 자리에서도 동성애를 권유하거나 예찬하지 않는다. 동성결혼은 자신의 삶이지 타인이 개입하거나 타인에게 권유할 성격의 어떤 가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존재이자 삶이지 선택 가능한 가치나 이념이 아니다.'(242쪽)고 하고 있다.)


대만 작가인 천쉐가 쓴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러한 동성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터. 이러한 자유롭지 못한 사회에서 밀려나는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겠는지를 이 소설은 짐작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아 찾기에 성공한다. 그래 그러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게 되기까지,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당하게 선언하기까지 겪게 되는 과정. 


굉장히 힘들고 우울한 과정을 거쳤음이 분명한데 소설은 빠르게 전개되는 서술방식으로 인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지는 않는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면 그 인물이 겪은 갈등과 고통을 함께할 수 있고, 그러면서 주인공이 자신을 찾고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상한 집'은 약간 다르지만) 과정에서 읽는 내 마음도 펴지게 된다.


굳이 동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통념과 다른 생각,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배제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봐도 된다.


다수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 아니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척당하는 사람들. 그래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이들일 뿐이다. 이들에게 다른 존재로 살아가라고 강요할 순 없다.


그런 강요를 누구도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므로, 그 다름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이 소설 속 인물들도 그러한 삶을 살아왔으니... 하여 방황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나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내 사랑은 바로 이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 그러한 일들을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 편인 '고양이가 죽은 뒤'라는 소설은 천쉐의 자전적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물론 내가 천쉐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지만 이 책에 실린 '후기-칭에게'를 읽어보면 아, 작가도 이런 과정을 거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천쉐는 소설을 쓰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은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려 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예술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소설과 작가의 삶을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소설의 소재를 가져오더라도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인물의 삶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냥 소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작가의 삶을 참조할 수는 있지만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은 삼가야 한다. 천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에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일은 어떻게 계속 소설을 써나갈 것인가, 어떻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소설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흥미를 갖는 제재는 무엇이든 소설의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싶었다'(12쪽)


그렇다면 작가의 삶을 몰라도 이 작품을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또한 작가의 삶을 잘 알아도 읽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한 편 한 편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 이 빛이 남에게서 주어진 빛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빛임을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악녀서'라고 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러면 이런 '악녀'가 더 많이 생겨, '악녀'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악녀'라는 말이 소수자라는 말로 쓰이고, 소수자는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 소수든 다수든 다 다른 존재라는 것, 다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그곳에 이르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이 소설집의 복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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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로 '캣츠'의 원작. 원제는 '노련한 고양이에 관한 늙은 주머니쥐의 책'이라고 한다.


  시 '황무지'로, 아니 황무지의 한 구절인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작가.


  그가 쓴 고양이에 관한 시집. 


  쉽게 읽을 수 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이 고양이들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 제 멋에 겨워 사는 사람들. 정말 이렇게 다양한 삶을 사는 고양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람들도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구나.


이들 고양이의 삶을 어떤 삶이 더 좋고 어떤 삶은 안 좋은지 이야기하지 않고, 그 삶들을 누리는 모습을 표현한 시들.


어떤 고양이는 교양이 있고, 어떤 고양이는 즐기고, 어떤 고양이는 사고를 치고, 어떤 고양이는 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등등...


뭐 삶을 생각하지 않아도 이 시집에 나오는 고양이들을 만나는 재미만도 쏠쏠하다. 그 중에 특별히 정이 가는 고양이도 있을 테고.


고양이가 사람을 집사로 선택한다고 하는데... 그런 점을 떠나서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기도 하고, 도시 주변에서는 들고양이들도 많이 보이고.


자기 삶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이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재미있게 읽으면서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문학이 주는 즐거움일 수 있음을, 이 시집을 읽으며 느꼈으니...


또 시집 뒤에는 영어 원문이 있어서 번역한 시와 비교하면서 읽어도 좋고... 그리고 첫시와 마지막 시를 생각하면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도 좋다.


첫시는 '고양이 이름 짓기'이고 마지막에 실린 시가 '모건 고양이, 자기 소개하다'인데 사실 첫시와 어울려 끝시라고 할 수 있는 시는 이 시 바로 앞에 실린 '고양이에게 말 걸기'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짓는 것은 김춘수의 시 '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상대와 관계를 맺는 처음이 된다. 그냥 "저기요."라고 불분명한 호칭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정확한 이름, 아니 상대가 원하는 이름을 부를 수 있어야 함은 관계맺기의 기본이다.


'말로 할 수 없는, 말로 하되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 깊고 불가해한 단 하나의 이름'('고양이 이름 짓기'에서. 12쪽)을 아는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모르고 대충 이름을 붙이거나 부르면 관계는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러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려면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 인정을 받는 과정을 '고양이에게 말 걸기'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설령 이름을 안다고 해도 함부로 먼저 부르지 말 것. 왜냐하면 아직 친한 관계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먼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즉 자신의 호의를 인정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


'고양이에게 믿을 만한 / 친구로 인정받으려면 / 존경의 표시가 필요하니까요'(고양이에게 말 걸기'에서. 80쪽)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도 그렇지 않은가. 무턱대고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은 요즘 말로 '스토킹'이 될 수 있다. 제대로 된 이름과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경우다.


그러니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고, 그 다음에 서로가 원하는 이름들로 관계를 맺어가는 것, 우리 사람 사회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이 '캣츠'라는 시집, 고양이의 이야기지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뮤지컬 '캣츠'를 보고 싶단 생각이 들게 만든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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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선 - 역사학자 전우용의 시대 논설
전우용 지음 / 삼인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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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선으로 인식하면, 한번 지나온 시간은 다시 경험할 수 없다. 일직선인 선, 앞으로만 나아가는 선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겠지만, 역사라는 시간은 하나의 선이 아니다. 직선이 아니다. 곧장 앞으로만 나아가는 선이 아니다.


역사라는 선은 앞으로 뒤로 옆으로 위로 아래로 중첩되어 있는 선이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이 직선 위의 한 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그리고 주변의 여러 시간들이 함께 있는 점이다.


이 점들에는 다양한 삶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또 역사를 현재로 불러와 미래를 대비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가 없다.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이 중요한데,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과거를 불러오는 것은 역사를 잊은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고,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그것을 자꾸 불러오는 것은 오히려 현재를 붙잡아두고 있을 뿐이라는 말도 역사를 잊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는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현재에도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인다. 누가 '정치는 생물이다'라고 했는데, 역사 역시 생물이다. 과거의 유물로만 남아 있지 않다. 현재에 끊임없이 들어와 현재의 삶을 이끌어간다. 어디로? 바로 미래로.


그래서 역사에는 미래-현재-과거가 모두 담겨 있다. 시간의 선에서 역사라고 할 때, 우리가 있는 현재의 점에는 미래-현재-과거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잊은'이라는 말에는 현재의 자기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전망 역시 갖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 통한다.


전우용이 쓴 이 책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이라고 한다. 시일이 조금 흐른 글들도 있고, 최근의 일을 다룬 글들도 있지만, 역사라는 선에서 시일이 지났다, 최근이다는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지금-여기'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반복되고 있었는지, 그렇게 반복되도록 과거를 묻어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서 현재를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을 모았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어째 이리 반복된 일들이 많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반복했는데 왜 더 나아가지 않았을까? 정말 역사를 잊고 살았던가? 아니면 억지로 역사를 생각하지 않게 했던가.


이 책에서 '시키는 대로만'이라는 글과 '가만히 있으라'는 글을 읽으면 참... 어쩌면 우리는 이런 일들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어린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늘고 있지만) 학교 교육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딱 맞는다.


'시키는 대로만'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서울의 모 학교에서 학생들이 발간한 신문을 압수했다는 기사가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무려 9년의 의무교육, 게다가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에 가까우니 12년의 학창 생활 동안 몸에 익히는 것이 바로 '시키는 대로만'과 '가만히 있으라'라면, 미래는 암담하다. 


(이제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만'하지 않고, 또 '가만히 있지'도 않는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행동을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비상계엄' 사태 때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미래로 이끌어갔다.) 


창의성이 우선시 된다고, 이제는 인간과 기계(아, 그냥 기계가 아니다. 인공지능이다)가 함께해야 하는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만' 잘하는 '기계'를 어떻게 인간이 능가하겠는가. 그러니 이 말들이 통용되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현재-미래에서는 이 말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知)와 식(識)'을 구분하고 있는데(지(知)와 식(識) 사이의 거리'), 학교는 지(知)가 아니라 식(識)을 익히는 장소이니, 이러한 '식'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학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말이 '시키는 대로'와 '가만히 있으라'가 아닌가 한다.


'지(知)란 사람이 나면서 저절로 아는 것, 곧 오성(悟性)으로 얻는 '앎'이요, 경험으로 깨닫는 '앎'이다. 반면 '말씀 언(言)', 소리 음(音)', 창 과(戈)'로 구성된 '식(識)'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얻는 '앎'이다. '학이습지(學而習之)', 즉 배우고 익혀야 하는 앎이다.'(304쪽) 


지식이라는 말에도 이런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면, 현재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관성대로 지내지 않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과거와 다르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쓸모'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래서 '식'에 해당하고, 학교에서는 이러한 '식'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식'에 어떻게 '시키는 대로만'과 '가만히 있으라'가 통용될 수 있단 말인가. 전우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역사를 통해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현재에 들여와 현재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더 인식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실린 글에 언어를 통한 통찰.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 점을 생각해 본다. 마음에 새겨둘 말이다.


'사실 평화의 반대말은 전쟁이 아니다. 평(平)은 높낮이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글자로 반대되는 글자는 '차(差)'이다. 화(和)는 서로 다른 것들이 따로 놀지 않고 잘 어울려 있음을 뜻하는 글자로 반대되는 글자는 '별(別)'이다. 평화의 반대말은 차별이다. 

  총성이 울리든 아니든, 대량 살상 무기가 사용되든 아니든, 지금도 온 세상이 매일매일 전쟁 중이다. 힘으로는 결코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없다. 평화로운 세계는 차별 없는 세계와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330쪽)


이렇게 이 책에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할 수 있는, 그래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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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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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원작에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부제가 달려 있다고 하는데, 번역본에는 그 문장이 나와 있지 않다. 책표지에 있는 클레어 키건에 관한 설명에 나와 있다. 번역본에도 이 부제가 달려 있으면 소설을 좀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는데...


세 편의 소설에 모두 남녀가 등장한다. 두 편은 여자가 서술자로 등장하고, 한 편은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한다.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너무 늦은 시간'을 보면 강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러한 행동이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불만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또는 장난, 농담이었다는 식으로 행동과 말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상대의 감정을 느껴보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너무 늦은 시간'의 주인공 '카헐'이 바로 그렇다. 여성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만 생각한다.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면 좋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싫다. 싫은 정도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것을 비하하는 말로 표현을 한다.


그러한 언어에는 자신의 세계관이 담겨 있는데, 이는 세상은 남자라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지 여성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는, 여성은 남성의 편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니다. 여전히 불안에 시달리는 존재, 유리 천장에 갇혀 있는 존재는 남성보다는 여성이다. 여성은 그러한 위험을 늘 생각하고 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카헐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남동생과 함께한 장난, 과연 이것이 장난인지도 의문이지만, 그러한 장난을 웃음으로 넘기는 아버지의 모습. 여기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자신들을 위해 음식을 차린 엄마가 앉기도 전에 식사를 하는 모습도 그런데, 엄마가 앉으려 하자 의자를 빼서 넘어뜨리다니... 그것을 야단치지 않는 아버지. 아니 그렇게 할 생각을 한 아들 둘.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중에 카헐이 그때 아버지가 다르게 했더라면 하지만, 그것은 잠시고, 그는 아버지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런 그의 모습을 통해서 남자가 무의식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이 여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그리고 차별의식이 체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과연 '카헐'과 얼마나 다른가 하고.


'길고 고통스런 죽음'에는 여성 서술자가 등장한다. 작가다. 우리 말로 하면 작가의 집에 들어가 창작활동을 하려 한다. 그런데 한 남성이 방문한다. 다짜고짜. 그는 마치 권리를 빼앗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데... 


아니, 작가가 글만 쓰고 있나? 작가의 방에 들어가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자신만의 속도로 글을 쓰고자 함이 아니던가. 그런 과정에서 무엇을 하던지 그건 남이 관여할 사항이 아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글만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작가라는 존재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남성이 남성 작가에게 그렇게 행동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온갖 꼬투리를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클레어 키건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나타난다. 복수를 한다. 어떻게 작가답게 작품으로... 그래서 제목이 된 '길고 고통스런 죽음'은 작가의 작품에 나타나는 일이 된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함부로 말한 사람을 응징한다.


'남극'은 좀 섬뜩하다고 할 수 있는데, 소통하지 못하는 관계는 얼어붙은 남극과 같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을 일탈 행위를 하는 여성에게 닥친 비극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이 '친절'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절을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자신은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지옥과도 같을 수 있음을.


친절한 남성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친절이 문제다. 상대를 배려하는 친절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친절이다. 즉 상대를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고, 그 존재를 자신에게 끌어오기 위한 친절일 뿐이다.


이런 친절이 여성에게 어떤 결과를 일으키는지를 소설의 후반부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친절이 아니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는 친절은 친절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렇게 세 편의 소설에는 남녀가 나오지만 이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여자들과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관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소설이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클레어 키건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지만, 전에 읽었던 소설에서는 어떤 밝음, 따스함 등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 소설집에서는 어긋난 관계에 누가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어긋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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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이후 - 혐오, 양극화, 세대론을 넘어
신진욱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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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지니기도 했다. 그렇게 광장에서 연대를 통한 존중으로 혐오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때의 '광장'에는 각기 다른 목표들이 있었겠지만 윤석열 탄핵이라는 한 가지 목표는 서로 공유했다. 그리고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광장'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이 '광장'에서 끝나지 않고 정치로, 우리 삶으로 다시 이어져야 한다. 즉 그때의 '광장'은 지금 우리 삶의 '광장'으로 다시 펼쳐져야 한다. 그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광장'을 분석하면서 '광장'의 연대에서도 분열을 찾고, 그것을 확대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는가? '광장'에는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이 많았다고, 어떤 집단은 잘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광장'은 특정 성별, 특정 연령 대의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장'은 모두의 것이었다. 이때 '모두'에는 '다름'이 포함되고, '다름'에는 '이해와 포용'이 들어가게 된다.


'광장'의 기본 조건은 '다름'이다. '다름들'이 모여 함께하는 곳이 바로 '광장'이다. 이런 '광장'은 바로 정치가 이어받아야 한다. 정치 역시 같은 존재들이 모여 자기들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모여 무언가를 합의하고 실행해가는 행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광장'은 한때의 '광장'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광장'은 우리 삶 속에서 펼쳐져야 한다. 우리는 계속 그러한 '광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광장'에서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광장 이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네 사람이 각기 자신들의 '광장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이 '광장 이후'다.


우리의 '광장 이후'는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꾼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치의 영역, 삶의 영역에서 '광장'이 계속 살아 숨쉬게 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장'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과연 '광장'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가. 광장을 이야기하면서 특정 집단을 배제하지 않았던가. 왜 너희들은 그래 하면서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이 책에서는 특히 2030 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주장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한다. 2030 남성들이 극우화 되었다고, 보수화 되었다고 하는 말들이 많은데, 2030 남성들을 그렇게 한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고, 보수화된 남성, 극우화된 남성이 있다고, 그 세대 전체가 그렇게 변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통계를 보면 2030 남성들의 반이 넘는 사람들이 탄핵에 찬성했으며, 그때까지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왜 그들을 싸잡아서 보수, 극우화 했다고 하는지, 그런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자료들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하나로 묶어 비판하기는 쉽지만, 그들을 끌어들여 '광장'이 계속되도록 하는 노력을 과연 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처한 지금의 현실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안정한 삶이 안정된 삶으로 바뀔 수 있도록 그들의 의견을 듣고, 정책을 마련해서 실행하는 노력을 해야 함에도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광장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광장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어쩌면 다시 '광장 이전'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온 지 이제 거의 한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우리는 '광장 이후'를 맞이하지 못하고 지금도 '광장 이전'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2030 남성들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은 다르다는 안도감 속으로 도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한다.


결코 다른 존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광장'이 보여준 모습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던가. "같아지자"가 아니라 "다르지만 함께할 수 있다" 아니었던가. 그런 '광장'을 우리의 삶에서 펼친다면, '광장 이전'을 주장하고 있는 존재들의 목소리는 지워질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중 이승윤의 글에 이런 말이 나온다.


'사회구조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고 이슈 중심 정치참여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누가 더 손해를 보고 있는가'를 둘러싼 경쟁, 대립, 갈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세력이 활성화되기 쉽다'(214쪽)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갈라치기'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으니... 이 '갈라치기'는 '광장'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니던가. '광장'이 더하기의 정치라면 '갈라치기'는 빼기의 정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다. 


우리가 바라는 '광장 이후'는 '갈라치기'를 하는 '빼기'를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는 이런 정치세력에서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할 때 이루어진다. '광장과 더하기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사회.


그런 점에서 아직은 '광장 이후'가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광장'을 경험한 우리들은 다시 '광장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치열하고 세밀하게 '광장 이후'를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제 '광장'을 정치와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광장 이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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