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몇몇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저 말이 저렇게 부정적인 말로 쓰일 수가 있었나 싶은 말들.


  그 중 한 말이 '자기 정치'라는 말이다. 세상에, 정치인은 모두 '자기 정치'를 하는 것 아니었나? 자기 정치를 하면서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이 모여 정당을 이루면서, '자기 정치'를 '우리의 정치'로 또 '국민의 정치'로 확장해 나가는 것 아니었나.


  '자기 정치'도 할 줄 모르면서 남의 정치에 따라가기만 하는 사람들을 정치인, 아니 좋은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나?


  '자기 정치', 그것을 명확히 밝히고, 동료를 모으고, 또 시민들,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인이 바로 좋은 정치인 아닌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힘센 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기 말을 이리저리 바꾸지 않고, 행동을 그때그때 유리한 쪽으로 하지 않고, 뚝심있게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 지금의 정치판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도 이러한 '자기 정치'를 하는 사람을 좋은 정치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을 지지하기도 했었고. 지금도 그런 정치를 한 사람이 인정을 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데, '자기 정치'를 이렇게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로 쓰다니... 이거야 원. 이건 정치의 실종 아닌가. 그냥 강한 자의 정치를 따라하거나 침묵하거나 해야 하는 걸까?


그러면 도대체 왜 정치를 하는가? 자기가 실현하고 싶은 정책을 이루기 위해 정치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 실현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하지 않나?


하려고 했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자기 정치'를 해야 하고, 그러한 '자기 정치'가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시대 선비들... 그 선비들 중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테고, 그 말을 떠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텐데, 그들 중에서도 '자기 정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때 미련없이 낙향을 했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던가. 후일을 도모하면서...


'자기 정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정치'가 실현될 때를 기다리는 자세. 내 때 되지 않으면 내 후배들, 또 제자들, 그 제자들 때에라도 실현될 수 있게 교육에 힘썼던 것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뜬금없이 '자기 정치'를 한다고 상대를 비난하다니... 정치인은 모두 '자기 정치'를 해야 하고, 이 '자기 정치들'이 모여 '정당 정치'가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담, 정당에 들어가서는 '자기 정치'를 포기해야 하나? 그 선이 어디인가?


포기가 아니라 '자기 정치'의 확대 아니겠는가? 나만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 안에서 토론과 학습을 통해 '자기 정치'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 그것이 바람직한 '자기 정치'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자기 정치'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서로의 '자기 정치'들의 접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고민하지 않는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인데...


그렇다고 아집과 독선, 독단에 빠져서 하는 행동을 '자기 정치'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런 착각을 '자기 정치'라고 여기고 밀고 나가는, 제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는 정치인도 있는데... 이들에게는 '자기 정치'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 그건 정치에 대한 모독이다.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지키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


이런 생각... 강재남 시집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세상에 시와 정치가 이런 식으로 연결이 될 수도 있구나, 그렇지만 시나 정치나 모두 언어를 통해서 상대에게 전달이 되는 것이니, 접점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하는 생각도 하고.


'자기 정치'가 외연을 확장해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힘을 받아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독창성과 고답성이 충돌하는 지점'('고답적인 너의 나라'에서. 16쪽)을 파악하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


즉 정치는 완전한 새로움도, 또 완전히 옛것을 고수하는 것도 아닌, 옛것과 새로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고 나아가는 것. 그러할 때 '이상하고 아름다운'('고답적인 너의 나라'에서. 16쪽)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자기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스스로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주게 된다는 사실을... 이 시집에 실린 시 '소리 내며 지는 꽃은 없다'를 읽으며 생각했다.


소리 내며 지는 꽃은 없다



  빈손인 내게도 가을이 찾아왔다


  무엇을 남기며 살고자함이 아니었지만 풍요로 남실거리는 들판이나 날개를 접은 저녁, 놀이 물드는 하늘을 보노라면 자꾸만 내 빈손이 들여다뵌다


  발걸음 따라 걷다 온 수월리, 하양지를 돌아 나오는 길섶으로 청노루 따먹던 연한 칡순이 계절을 잊은 듯 땅으로 뻗쳐 보랏빛 웃음 흘리고 있다


  철지난 그 꽃 어제를 모르고 스산한 바람 앞에 한줌 흙이 되어 땅으로 질 터인데 거짓 없이 싹틔우고 꽃 일궈냈음을 스스로 자랑 숨기고 소리 없이 질 터인데,


  지상의 꽃들 일제히 우우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 어찌 바람에 몸 맡기어 흔들리고 싶지 않으리 생각의 마디 툭툭 꺾어 마음불 지피고 싶지 않으리


  비우고 걸어가는 꽃길을 따라 이 가을 나도 해탈을 향하여 서늘하게 지고 싶다


강재남, 이상하고 아름다운. 서정시학. 2017년 초판 2쇄. 74-75쪽.


그렇게 읽은 것이 이 시를 잘못 읽은 것이라 해도, 하, 역시 '고답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이 시를 그렇게 읽었다고 하면 지나친 곡해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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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노래가 - 흐르고 굽이치다 어우러진 아홉 곡의 인생 이야기
노회찬재단 구술생애사팀 지음, 노회찬재단 기획 / 후마니타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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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츠린 어깨 펴고, 닫힌 가슴들 열리고, 한판 대동의 춤을 추는 날을 꿈꾸며 살아오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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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 만개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박지숙 그림 / 마음산책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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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 중에서. 46쪽)


쓸모없다는 판단을 누가 하는가? 거기에는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한다. 그러면서 내가 아닌 다른 존재들을 쓸모로 판단한다. 즉, 내게 유용하면 쓸모있음, 유용하지 않거나 내가 어떤 쓰임을 알지 못하면 쓸모없음.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존재들, 또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존재들은 어떤가? 이들은 쓸모없음의 범주로 들어가게 되는가?


이들이 쓸모있음의 범주로 들어오려면 내가 이들에게서 어떤 유용성을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내게 쓸모있음이 그들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면?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조정하는 것이라면?


즉, 그들의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나라는 존재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한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우리는 인간이 없는 행성을, 또는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사는 행성을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행성이 있다면 당연히(?) 인간을 구출해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중심주의. 즉 존재의 쓸모있고 없음을 인간을 중심에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 화성이나 달을 개척하겠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구말고도 다른 행성에서도 지배적인 위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이 소설집, 김초엽의 짧은 소설들이 모여 있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을 중심에 놓는 것에 의문을 지니게 된다. 생태주의자들이 했듯이, 또는 고대 중국의 노자가 '쓸모없음의 쓸모'를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인간 이외의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중심주의에 빠져 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 그냥 우리 눈에 비친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모래 이야기'라면, 인간의 쓸모에 부합하지 않아 버려진 존재도 스스로의 의미를 지닌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각의 탈출', 그리고 마을에서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미라 아주머니가 등장하는 '끈적이'라는 소설. 여기서는 통념에서 벗어나는, 또는 사회에서 쓸모있음으로 규정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들이 책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을 만들 거야. 정의에서 달아나고, 사전에서 달아나는 것을 만들 거야.'('끈적이' 중에서. 91쪽) 


이것이다. 바로 '쓸모있음'에 갇혀있지 않겠다는 것. 즉 여기서의 쓸모없음이 꼭 쓸모없음이 아닌 쓸모있음일 수도 있다는 것.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고정된 것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 정지는 그냥 정지가 아니라 수많은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인데...


'멈춘 줄 알았던 것들은 사실 멈춰 있지 않았어. 고정된 줄 알았던 것들은 단지 다른 시간의 규모를 지닌 것뿐이었어.'('모래 이야기' 중에서. 25쪽)라는 말에서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사모나'라는 소설에서는 인간이 아닌 '파티클'이라고 하는 존재가 중심이 된 행성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이 행성에 있는 인간을 구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사모나가 정말로 파티클의 행성이라면, 정말로 그런 존재가 있다면 ... 우리가 감히 개입할 자격 같은 건 없지 않겠습니까'('사모나' 중에서. 201-202쪽)라고 말하는 인물. 왜 모든 행성에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할까?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 질문. 


이 인물을 통해 '쓸모있음'이 얼마나 인간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고... 이 소설에서 바로 맨 앞의 구절을 인용했는데... 


이 소설의 뒤로 가면 해파리들이 만개한 세상에, 해파리와 공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어떻게? '해파리를 멈츄는 방법을 알아냈다. 바로 해파리를 그냥 놔두는 것이다.'('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73쪽) 이것이 바로 해파리를 쓸모있음과 없음의 기준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과 연결되어 각 행성마다 다른 인간중심의 판단이 같은 존재에게 가하는 폭력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젤리의 우울'이라는 소설이다. 눈물의 필요성에 따라 대우받거나 무시당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니, 역시 '쓸모있음'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들을 읽으며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를 위해 만들었다고 해서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끝까지 종속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실린 내용들이 지금은 상상이라고 하겠지만,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쓸모로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존재 자체에 대한 생각, 인간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이 지구에서 함께 존재하는 또다른 존재가 될 인공지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에 대한 시사점을 이 소설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지만 소설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글자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를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온갖 존재들이 모두 각자의 쓸모를 지니고 있음을, 그 쓸모를 어떤 특정한 한 존재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범주에 가두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소설집이다.


역시 김초엽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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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사진엽서, 식민지 조선을 노래하다 知의 회랑 40
최현식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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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는 국가를 주로 일컫는 말. 1900년대 초반 일본은 이러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옆 나라인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식민권력을 세웠다. 그리고 대만 및 동남아시아를 침략하여 또한 식민지로 삼았다.


식민지로 삼아 착취를 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이 아무리 사실을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사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식민지배를 했던 과거에 대해 사죄를 해야 한다. 식민지였던 나라에 대해서, 또 그 나라의 국민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한 다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새출발을 해야 한다.


여기서 책임질 자들이 책임을 지는 일이 가장 먼저 이루어졌어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책임자가 책임을 면했다. 그리고 이들이 계속 권력을 잡았다. 이런 모습의 일본이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면 식민지 경험이 있던 나라들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이유로 든 것이 바로 평화공존 아니었던가.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 일본이 재무장을 하려고 하는 것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한데... 책임도 지지 않고, 사죄도 하지 않고, 과거는 없던 일인 양 미래로 나아가자고만 외치고 있는 일본 권력자들의 모습에서 식민권력을 보게 된다.


그런데 총칼만으로 식민지를 지배할 수는 없다. 무력으로 한 나라의 주권을 빼앗더라도 계속 지배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도 지배해야 한다. 


이는 자신들을 우위에 두고, 식민지 사람들, 식민지 문화들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서 자신들에 의해 계몽되거나 발전되었다는 생각을 알게모르게 식민지 사람들이 지니도록 하는 정책을 펼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 정책 중에 문화, 교육을 통한 정책이 있는데, 이들은 교묘하게 의도를 감추고 있어서 쉽게 반발하지 못한다. 이 책은 그러한 일제의 식민정책 중에서 사진엽서를 통해서 조선인들의 무의식에 일본의 우월함을 각인시키고, 조선의 낙후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엽서는 글과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엽서에 있는 글들이 노래로 불렸다는 것, 이는 자신들의 선전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총칼만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서도 식민지 이념을 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진엽서를 통한 식민지 권력의 선전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는데, 처음은 아리랑으로 시작한다. 아리랑만큼 많이, 대중적으로 불린 노래가 있을까 싶은데, 이 아리랑조차 일본은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저항의식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점, 즉 노래를 통해 식민권력에 대한 저항을 도모하기도 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까? 아리랑에 비교될 수 있을 만한 노래들을 만들어 유포하는 것이다. 그 노래에는 일제를 찬양하고 조선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가도록 하는 것.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사람들이 듣고 부르게 하는 것.


이를 문화통치라고 할 수 있는데, 압록강, 백두산에 관한 노래를 통해 교묘하게 조선의 산하를 칭송하는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옹호하고, 또 자신들의 발전 상을 드러내며, 조선의 낙후성을 보여주어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러한 이념이 스며들게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는 드러내놓고 선전을 하지 않았지만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면 '압록강, 백두산'을 소재로 한 사진엽서에서도 노골적으로 대륙 침략, 일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는 내용을 드러내고 있으니, 노래를 통해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고, 독려하고 있음을 저자는 여러 자료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교묘한 식민권력, 제국주의가 무력으로만 지배한다면 식민지 사람들이 저항하기도 쉬운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려 한다면, 그 본질을 깨닫고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바로 그러한 방법을 일제가 사진엽서를 통해서, 또 노래를 통해서 쓰고 있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일제가 이러한 사진엽서 또는 노래를 통해서 - 이것은 나중에 국민학교(일제시대 용어다. 지금 초등학교에 해당한다) 음악 책에 실은 노래들을 통해 더 노골적이 되는데 -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려 했음을, 그래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파악해서는 안 됨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참 많은 사진엽서들이 만들어졌고, 사람들에게 전해졌구나, 이것들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사람들이 쉽게 세뇌당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이것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지금은 이러한 사진엽서, 노래를 통하지 않고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유튜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유튜브'들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래서 비판적 읽기/듣기/보기가 중요함을 잊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엽서 한 장을 보라. 이런 노골적인 내용이 일제말기에 사람들에게 다가갔으니, 처음에 의도를 숨긴 엽서들이 나중에는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이런 적나라한 홍보를 통해 처음의 의도들을 유추할 수 있다.



<출전:최현식, 일제 사진엽서, 식민지 조선을 노래하다, 성균관대출판부. 2023년. 352쪽>


참고로 절(節)은 일본어로 '부시'라 하고, 이 '부시'는 일본 전통 민요를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307쪽)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나랏님 위해 피어난 꽃이여 / 나라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을에는 / 아- 산화하시라 그대여 용감하게'


그리고 왼쪽에 있는 작은 글자들은

'몹시도 어여쁜 야마토의 아기도 총후 보국의 마음은 단단하니, 나의 쓸쓸한 마음은 아기의 건강함에 기대어 그대가 보다 순결하고 보다 강해지기를 기도한다'라고 한다.' (352-253쪽)


참 노골적이다. 이렇게 노골적이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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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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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굳이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있겠지만, 한 편 한 편이 모두 독립적인 소설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지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겠지 하면서 일곱 편의 소설에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고민을 한다.


우선 이 소설들, 잘 읽힌다.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의 거리를 유지하게 하면서도 그 인물들에게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아, 이것이 바로 사람 살아가는 일이겠지 하기도 한다.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에게는 깊은 동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피하고 싶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경멸의 마음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선망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유지하기도 바꾸기도 한다.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함께한다. 함께하면서 그 사람을 받아들인다. 다름에도,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음에도 함께하면서 서서히 관계를 만들어가고, 그 관계는 어느덧 자신의 삶에 들어와 바꿀 수 없는 무엇이 된다.


그것이 '나쁜 무리'이건, '아무 사이'가 아니던 상관이 없다. 세상에 만나는 사람에게서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로 지내기는 힘들다. 어떻게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 '소란한 속삭임'이다. '소란'이란 말과 '속삭임'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 붙어 소설을 이루고 있다. 속삭이는 사람에게 듣는 사람은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기 때문이다.


이때 귀를 기울이는 행위는 자신을 열고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시끄러움과는 다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들 관계가 이렇게 속삭임만으로 유지가 될까. 아니다. 시끄러움도 공존해야 한다.


소설에서 속삭임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시내와 광장에서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고 큰소리로 외치는 수자가 함께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소리를 내는 사람도 늘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에게도 속삭이고 싶은 내용이 있고, 그렇게 남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마찬가지로 속삭이는 사람도 늘 속삭일 수만은 없다. 어떤 때는 큰소리를 내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이들은 만나서 속삭이기도 하고, 남들에게 지적받을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데, 이때 시내의 윗층에 사는 두리가 등장한다. 삶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극도로 소리를 내지 않는, 남들과 어울리지 않는 두리. 하지만 아래층에 사는 시내는 윗층의 소음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이 소리의 원인은 시내가 두리의 집에 들어서면서 밝혀진다.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소음이라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지내는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소음, 이것은 보통의 시끄러움과 다르다. 우리 삶에서 공존해서는 안 될 요소다. 하여 이들은 힘을 합쳐 쓰레기들을 치운다. 소음을 내는 쓰레기를 치우고 나서 맥주를 마시면서 하는 대화. 


이 대화를 통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을 각자 깨닫게 된다. 속삭임과 시끄러움 사이. 아니 시끄러움과 속삭임에서 결국 자신을 발견하는 인물들. 그런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관계란 일방적일 수 없음을. 상대에게 또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다가가야 함을. 그렇게 하기 위해선 자신이 쌓고 있는 벽을 허물어야 함을. 


어쩌면 이러한 관계는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보려고 하는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소설집에 실린 첫소설인 '추운 뺨에 더운 손'을 보면 '마임'이 나온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처럼 연기하는 마임. 이 마임을 통해 서로를 읽어가는 인물들. 그렇게 서로가 만들어가는 관계는 눈에 확 띠지 않지만 '마임'을 하는 사람과 '마임'을 보는 사람이 어떤 공통적인 것을 찾아내듯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게 될 때 만들어진다.


그러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쁜 무리'는 없다. '아무 사이'도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뿐이다. 이러한 기댐을 깨달아가는 인물들.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일곱 편의 소설 모두 이러한 관계들을 중심으로 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다.


끝으로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라는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면 살수록 더 희미해지고 미약해지는데 사라지는 나를 붙들어주는 건 늘 내 곁에 있는 함께 희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어느덧 나를 정체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 또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삶에 대한 의지가 생겼습니다.'(292쪽)


이렇게 이 소설집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다. 그것이 마임처럼 확실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 관계 속에서 서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소설이 보여주고 있으니...


최근에 읽은 책에 실린 그림이 생각났다. 각자 존재하지만 또 함께해서 또다른 모습을 만들어내는... 우진영이 쓴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한겨레출판 2025년]에 실려 있는 그림인데(196쪽에 실려 잇다)... '이내'라는 화가의 <기억-마음에 담은 별>이라는 그림이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이 그림이 떠올랐으니... 미술과 소설이 통하는 지점이기도 하겠다. 이 그림 속 원들은 모두 소설 속 인물들이라고 보면 이들이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다른 모습,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생각한다. 우리 삶도 그러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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