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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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관한 말들이 많다.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는 관용구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은 그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손이 차다는 말은 냉정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하면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손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소설 제목에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으면 냉소적인 사회,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소설은 다르게 전개된다.


소설은 소설 속의 소설 형식을 택하고 있다. 소위 액자소설이라고 하는 형식인데... 소설가인 '나'가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소설의 앞과 뒤가 소설가가 서술자로 나오고,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분에서는 장운형이라는 미술가가 서술자로 나오게 된다.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이 '그녀의 차가운 손'이다. 그리고 이 소설 제목은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왜 작가는 소설 제목을 다르게 붙였을까? 소설 속 소설에서 그녀는 누구일까? 읽다보면 그녀의 차가운 손(294쪽)이라는 말이 직접 나온다. 소설 속에서는 장운형이라는 서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어 이니셜로 나오기 때문에 이 글 제목이 된 그녀의 차가운 손에서 그녀는 E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읽다보면 소설 속 소설은 총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E는 3부에만 나온다. 이 3부까지 가기 위해 1부와 2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손을 이야기하지만 손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되는데...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 가족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또 가족들과 어울릴 생각도 없이 알콜 중독이 된 외삼촌. 이런 외삼촌과 가족들 관계를 통해서 서술자인 장운형은 어린 시절부터 가면을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가면을 누구나 다 지니고 있다고 믿고,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감추며 살아간다. 오히려 손가락이 잘린 외삼촌은 가면 없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는 가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남들이 보면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배척당하고 견딜 수 없게 된다. 2부 역시 마찬가지다. L이라는 여인이 나온다. 거구의 몸집을 지닌 여자. 그런데 장운형은 이 L이 손에 매혹된다. 이 손은 따뜻한 손이다. 그럼에도 L은 자신의 몸을 혐오하고, 살을 빼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면서... 이런 L과의 생활이 펼쳐지는 2부에서는, 우리가 남들을 바라보는 시선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L이 살을 빼려고 하는 이유 역시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한다. 견딜 수 없는 식욕, 폭식과 구토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손에 상처를 남기는 L. 그러나 L은 언제까지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 않는다. L은 자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자신을 받아들인 L이 장운형 곁에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장운형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차가운 손이라고 할 수 있는 E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삶을 사는, 외모 역시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보이는 여자. 장운형은 E를 처음 만났을 때 무언가 섬뜩함을 느낀다. 무엇일까? 이것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을 알아보는 모습이 아닐까?


2부까지 그렇게 손에 관심을 가졌던 장운형이 3부에서는 이상하게도 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얼굴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손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정도라면 E의 얼굴에서 풍기는 어떤 점이 장운형의 관심을 가져갔을텐데... 그것에 대한 추구를 하게 된다. 손에 대한 이야기는 없이... 그러다 후반부로 가면 E가 먼저 장운형에게 손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육손이로 태어나 손때문에 겪었던 일들을... 수술하고 나서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지내왔던 가면을 쓰고 살았던 삶에 대해서... 그 말들이 끝나고 나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석고를 뜨는 대상이 되었던 둘이... E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이들 서로에게는 가면이 필요없어졌다.


"네가 날 꺼냈고……또 난 널 꺼낸 건가?" (315쪽)


이 말로 장운형이 쓴 글은 정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둘이 석고 조각들을 발로 밟아 자근자근 부숴버리는 장면에서 이들의 가면은 이제 없다고...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될까? 가면을 벗어던진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가면을 쓴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표면상 그들은 실종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에필로그. 한강 소설은 결말이 희망적이다.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면을 벗은 이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들을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다. 둘이 함께... 그 점을 에필로그에서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장운형이 쓴 글 제목인 '그녀의 차가운 손'이 제목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녀의 차가운 손은 세상과 맞서 살아가고자 애쓴 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운 손일 수밖에 없다. 감추고 싶었던 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손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알게 되는 순간,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 더이상 차가운 손이 되지 않는다.


차가운 손은 바로 '그대'다. 우리다. 남들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우리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서 그 가면을 인식조차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사회. 그런 사회 속 사람들이 바로 '그대의 차가운 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다름에 대한 소설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느냐 배척하느냐에 관한. 차가운 손을 지닐 것이냐 따뜻한 손을 지닐 것이냐 하는 그런 소설. 


'그대의 차가운 손'이 아니라 '그대의 따스한 손'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함을, 우리 모두 진실된 모습을 보이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가면을 벗게 해야 한다고,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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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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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이건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모방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 소설에서 효용성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되지만,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어느 정도 현실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한 작품도 꽤 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하는 작품이 여럿 있었으니, 소설에 그런 기대를 품는다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웬 사진 이야기? 이 소설에서는 개인이 겪는 아픔과 현실에서 벌어졌던 시대적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사진을 통해서 그 점을 더 깨닫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영은 기자인데 사진도 찍는다. 그가 찍은 바다 사진들. 사람들이 나와 있지 않은 바다 사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인영이 바다 사진을 주로 찍었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가면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에 사라진 의선을 찾아 가는 핑계 대상이 된 인물도 광산촌, 광부들 사진을 찍어온 장종욱에게서도 사진은 중요하다. 그 역시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이겨나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그동안 찍어왔던 사진들이 모두 타버렸다는 데서 둘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찍은 사진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소설 후반부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장종욱은 다시 광부들의 사진을 찍어 인영에게 보내주는데, 그때 찍힌 사진에는 수줍고 맑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나온다. 이렇게 소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때 장종욱은 사진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장은 결코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411쪽)


사진을 소설로 바꾸어도 말이 통한다. 작가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인 의선이 자신의 편지를 머리 속에서 정리해서 인영에게 전달해주려고 노력하지만, 말로는 완전하게 그려낼 수 없기에 결국 포기하고 있는 장면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진이나 소설이나 세계의 모든 면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작품을 읽고 보고 하는 이유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작품을 통해서 세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언어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그 역할을 한다.


한강은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개인의 아픔을 통해서 드러내려 하고 있다.


광산, 막장이라고 불리던, 한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갔던 그곳. 광부들의 삶은 결국 갱도에 갇혀 죽거나 진폐증에 걸려 죽거나 정부 정책으로 폐광이 되어 그곳을 떠나거가 떠날 수 없어서 그 검은 땅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폐광촌의 현실을 한강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곳을 주 무대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광산촌의 비참한 현실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사라진 의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 그렇다고 소설에서 광산촌의 현실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의선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드러나는 인물들의 고통이다. 의선을 찾아나서자고 제안하는 명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그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명윤. 


광산촌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장종욱. 그리고 대범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언니를 잃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영.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의선의 아빠, 그리고 정신지체인 오빠를 둔 의선.


이렇게 이들은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을 한 구석으로 몰아가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함을 한강은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한강 소설은 대부분 상처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는데, 가정에서 상처 입었다는 얘기는, 그 가정이 사회에서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뺑소니 사고로 앓아누운 아버지, 여행을 갔다 죽은 언니, 갱도에 갇혀 죽어 나온 남편을 보고 미쳐버린 아내, 자신을 떠난 아내가 있는 사진사 장씨 등등.


이들 상처는 개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지만, 한강이 사회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들 상처가 결국 사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의선이 받은 상처 역시 광산이라는 장소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고, 명윤이 굳이 의선을 찾아나서는 이유 역시 자신이 받았던 상처들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의선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상처가 사회를 통해 받은 상처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렇게 개인들이 겪는 아픔을 통해서 한강은 소설을 통해 우리가 개인적 상처 저변에 있는 사회적 상처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개인의 상처와 사회적 상처가 맞물리면서 소설은 전개되고,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더라도 인물들을 통해서 현실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결국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했다는 장씨의 일념과 같이 소설가 한강은 글로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아픔을 소설로 드러내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드러낼 수는 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다. 한강은 그 점에서 성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져서 자꾸 책장을 덮으려는 마음과 그래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갈등하면서 끝까지 소설을 놓지 않게 했는데...


아마도 끝까지 읽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소설 제목이 된 '검은 사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임씨가 장종욱에게 해준 이야기, 또 한번은 임씨가 딸인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다.


갱 속 깊은 곳에 사는 검은 사슴 이야기. 늑대처럼 단단한 이빨과 빛나는 뿔을 지니고 있는 검은 사슴. 해를 보고 싶어해서 광부들에게 부탁하지만 뿔도 이빨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검은 사슴 이야기. 여기까지만 보면 광산촌 사람들, 또는 힘없는 사람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억압당하고 희생당하는 모습으로만 끝나게 되는데...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에서는 이 검은 사슴이 죽어 웅덩이를 만들고 이 웅덩이에서 꽃이 핀다는 내용까지 나아간다.


그렇게 한강은 결국 핍박받고 억압받는 존재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이지만, 이들에게도 언젠가는 꽃을 피울 때가 있음을, 그 희망을 결코 놓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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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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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첫소설집을 읽는다. 알라딘 온라인중고에서 구입한 책. 최근에 읽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한강 소설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 읽은 소설이 몇 권 있지만 이참에 한강 소설을 독파해보자 하는 마음.


등단작을 실은 첫소설집이다. 제목은 등단작이 아닌 다른 작품으로 삼았는데, '여수의 사랑'에서 여수는 지역 이름이기도 하겠지만 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이중적인 의미가 소설 본문에서 나오는데,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가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여수의 사랑'. 39쪽)고 하니, 소설 속 인물들은 한 곳에 머물렀어도 머무르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인물의 고향이 여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 떨어져 나와서 근근이 생활을 해나가는데, 그럼에도 한 인물은 여수에 대한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면 다른 인물은 여수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면서 그리워한다. 여수로 가기를 희망하고 표를 끊어놓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날 사라진다. 여수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다른 인물은 그래서 여수로 가는 기차에 타고 여수에 내리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끝난다. 여수에서 출발해 여수로 돌아오는 과정, 회귀라고도 할 수 있지만, 회귀라기보다는 옴쭉달싹(옴짝달싹-몸을 아주 조금 움직이는 모양)이라는 부사어에 어울리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의 행동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하면 바로 '옴쭉달싹'이라는 말을 들 수 있겠다. 이 말은 뒤에 부정어와 함께 쓰이니,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려 몸부림치지면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수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참 힘들게 산다. 부모 잃고 경제력 없이 그래도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쓰니 없던 병도 생기게 된다. 인물들은 나름대로 병을 앓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견딜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다. 이런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병이다. 위통이든 신경질환이든, 지긋지긋한 가난과 함께 병을 앓는다.


옴쭉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상황. 독해지고자 해도 독해지지 못하는 사람들, 마음으로 독해지자고 하는 사람들이 병을 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나타나는 독한 마음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어둠의 사육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함께 사는 고향 언니에게 배신당하고 더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된 인물이 독기를 품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지내온 나날들을 생각할 때 나오는 말.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어둠의 사육제'. 251쪽)


그래서 이 소설집 인물들은 아프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육체로 자신이 아프지 않으면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있다. 자신을 대신해서 아파해야 할 존재들이 있다. 이렇게 세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삶에는 아픔이 있다. 병이 있다. 이 병을 한강은 우리에게 들여다보라고 한다. 인물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이런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보라고, 눈 감지 말라고.


그렇게 옴쭉달싹 못하는 인물들. 그러나 이들은 움직이려 한다. 남들에게는 비록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들은 최선을 다해서 움직인다.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있지만 아직 죽음의 세계에 가지 않기 위해. 이 소설집 인물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여수의 사랑'에서 떠나왔던 여수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그렇다. 다시 돌아온 여수는 예전의 여수와는 다를 것이다. 비록 삶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한강은 이 소설집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섣부르게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희망보다는 그냥 현실을 보여준다. 현실이 이렇다고.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려 아등바등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아등바등대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다고. 그렇다고 이들이 열심히 살지 않냐 하면 아니라고. 또 이들이 비도덕적이냐고? 아니라고. 이들은 누구보다도 더 도덕적이라고. 그래서 삶이 더 힘들다고.


이렇게 애면글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초상, 풍경화라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다. 밝은 색으로 채색이 되지 않은, '저녁빛'에서 재헌이 그리는 그림처럼 어둑어둑한 느낌을 주는 소설. 


그렇다고 사회 비판을 하는 소설은 아니다. 한강 소설에서 사회는 뒤로 물러나 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물이 인물을 둘러싼 환경에서 자신의 내면에 침잠해 고민하고 대응해 가는 과정만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으니...


한강 소설의 인물들이 겪는 어려움과 갈등과 고민이 이들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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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2-03-08 17:5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3-0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3-08 19: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3-08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2-03-08 19:41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 2022-03-10 0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kinye91 2022-03-10 01: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3-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kinye91 2022-03-10 09: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가필드 2022-03-1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당선 축하드려요 😄

kinye91 2022-03-10 21: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내 여자의 열매
한강 지음 / 창비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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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한강 소설집이다. 소설 여덟 편을 상처를 지닌 인간들이 관통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상처 받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만,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상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어느 날 그는'이라는 소설에서 인물이 사랑에 빠졌다가 그 사랑을 잃고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의 삶은 지지리도 궁상맞다. 반지하 생활. 그러나 그곳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 여자 인물 말처럼 그 순간 순간은 진실일 수 있지만 영원은 없다고. 그러니 사랑이 변치 않는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다만 그때그때의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때 충실했던 감정만이 진실이라면, 사랑이 변했다고 해서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아기 부처'에서도 상처받은 인물은 나온다. 겉으로는 완벽한 사람,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상처가 있고,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 더 완벽하게 행동하려는 사람. 우리는 남에게 약점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러한 약점을 알아주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한없이 놓아두어도 되는데, 그마저도 의식하면서 지낸다면 그 관계는 온전할 수가 없다. 저마다 상처가 있다는 말, 이는 남의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과 통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파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상처라도 보듬고 가려는 모습,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딛고 새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자꾸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관계는 끝날 수밖에 없다. '붉은 꽃 속에서'에서는 그러한 상처를 승화시키는 인물이 나오고, '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다른 존재로 변해버린 인물이 '흰 꽃'이나 '철길을 흐르는 강'에서도 역시 상처받은 인물이 나온다.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중에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내 여자의 열매'를 보면 관계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에서 예전 여자의 일생 - 예전 여자의 일생이라고 하면 좋겠다. 자율적인 존재로 태어나 살아가다가 결혼과 더불어 자율성을 잃고 갇혀지내게 된, 그때부터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 요즘 여자의 일생이 아닌 옛날 여자의 일생이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이런 예전 여자의 일생에서 한 단계 나아간 작품이 바로 [82년생 김지영] 아닌가 한다. 겨우 한발짝 나아갔을 뿐이다 -을 느끼게 된다.


소설은 인물들과 인물들의 외적갈등이 나오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부부라고 할 수 있다. 신혼초에는 뜨겁게 사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랑이 식고, 그냥 함께 살아가는 부부.


아내의 몸에 멍이 생기기 시작한다. 처음 남편은 데면데면한다. 부딪쳐서 생긴 멍이겠지, 하지만 멍은 점점 심해지고 온몸으로 번져간다. 병원게 가보지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출장을 갔다온 남편이 발견한 아내는 멍이 아니라 푸른 빛을 띤 식물로 변해가는 아내였다. 나중에는 식물이 된 아내를 만나게 된다.


아내의 멍. 이는 삶에서 얻게 되는 상처, 멍이 하나 둘 늘고 넓어질수록 아내의 자율성은 하나 둘 줄어든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아내는 자신을 잃고 움직일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남편이 폭력적이어서 가부장적이어서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삶은 지속되지만 예전의 자신은 없다. 


한강 소설집을 읽으며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한다. 그 상처를 이겨내는 길. 상처에 머물지 않고 한발짝 더 나아가는 길.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바꾸는 길이라도. 이렇게 소설 속 인물들은 상처를 이겨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처 속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 상처와 더불어 삶은 계속된다.


멈추지 않는다. 이 점이 한강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상처받으며, 상처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설에서 표현함으로써 한강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을,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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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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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을 넘나든다. 하지만 환상 속에서 현실의 진실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한강 소설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진실의 열망을 환상을 통해서 보여준다. 너무도 참혹했기에 사실적으로 표현하기가 힘든 역사적 사실들을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서 서술한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환상과 현실이 넘나들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우리 삶에 끌어왔다. 단지 그 시대에 머물지 않고 여러 시대를 관통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광주민주화운동'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지만, '4,3사건' 역시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점이 많이 있다. 나라에서 이제는 반국가 활동으로 여기지 않고 기념식도 인정해서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려진 진실은 여전히 있다.


소설은 현재에서 시작한다. 4.3세대가 아닌 4.3을 어린 시절에 겪은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는 사람들. 나이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소설 속 인물이 모두 제주도 출신은 아니니까. 소설은 서술자인 경하를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경하는 작가다. 소설 속에서 알 수 있고, 또 이 소설 앞부분에서 [소년이 온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의 1부에서는 이런 작가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20여 년을 알고 지낸 인선에게서 연락을 받는다. 빨리 와 달라고.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를 당한 인선. 그런 인선과 만나고 함께 했던 시절들을 회상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인선이 부탁한다. 지금 당장 제주도로 가 달라고. 자신의 집에. 새를 살려달라고.


이건 소설 장치다. 경하는 어떻게든 제주도로 가야 한다. 그의 꿈속에 나왔던 장면들을 인선과 함께 작업하려고 했던 경하. 그것은 바로 4.3에 대해 쓰고 인선이 영상으로 담았으면 하는 경하의 제안이었다. 인선은 받아들였지만 어느 순간 경하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경하는 제주도에 간다. 폭설, 길 잃음, 간신히 도착한 인선의 집, 이미 죽어 있는 앵무새. 이렇게 1부는 끝난다. 경하의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172쪽)의 말과 함께. 그러나 죽음은 망각이다. 4.3은 망각이어서는 안 된다. 기억되고 기록되어야 한다. 아니, 기록이 남겨져야 기억이 된다.


2부는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시작된다. 4.3을 맨정신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 참혹했던 역사적 장면을 어떻게 맨숭맨숭하게 만날 수 있을까? 또 그 사건을 진정으로 만나려면 우리는 어떤 상태여야 하는가? 우리 마음 역시 그날 그 일을 겪었던 사람들과 비슷할 정도의 절망과 좌절 상태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경하가 제주도에 도착한 다음 상태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된다. 전기가 나갔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난방이 되지 않는다. 물도 끊긴다. 무엇을 해볼 수 없는 칠흑같은 어둠과 추위, 그리고 끊이지 않는 눈들. 


여기서부터 소설은 무엇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도대체 죽은 자가 누구일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정도 상태에서야 가려진 진실을 알 수 있다. 인선이 생각했던 자신의 엄마가 4.3때 희생당한 오빠를 찾아 헤매고 자료를 모은 장면이 2부가 전개될수록 서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엄마에게서 그런 끈기와 힘이 있다니, 그것은 진실을 알고 싶은 엄마, 그 일을 겪은 엄마의 몸부림이었다. 제주도에 나타난 인선을 통해서 경하는 인선의 엄마와 아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그 속에 감춰져 있던 4.3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에게 4.3을 보여준다. 말해준다고 하기보다는 보여준다는 말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경하가 인선이나 새들의 그림자를 벽에 그리듯이, 작가는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 하지 않고 벽에 그려진 그림자처럼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


경하가 벽에 그리는 그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4.3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언제든지 겹쳐지고 (소설에는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경하가 인선을 찾아 제주도에 갔던 과거와 또 한번은 지금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르는 장면에서) 지워질 수 있는 그런 역사. (경하가 벽에 그림을 그릴 때 연필(샤프)로 그린다. 지울 수 있는 도구다. 역사란 이렇게 누군가에게 기록되지만 또 반대로 지워질 수도 있고 덧씌워질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한강은 소설의 2부를 환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4.3의 희미한 그림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밝은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지지 않더라도 희미한 그림자로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기억되어야 할 역사라고. 그렇게 진실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기록 속에 남아 있게 된다고.


소설 끝에 작가의 말에서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328-329쪽)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은 이 지극한 사랑이 역사적 사건으로까지 번지게 하고 있다. 우선 동갑내기인 경하와 인선의 사랑.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지지해주는 그런 사랑. 그래서 경하는 인선이 신분증을 챙겨오라고, 제주도에 당장 내려가 달라고 할 때 자신의 몸이 안 좋아질 수 있음을, 약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집에 들르지 않고 제주도로 내려간다. 인선 역시 경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 사랑이 우리에게 4.3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엄마의 가족에 대한 사랑. 어쩌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사랑은 바로 기억하고 기록하고 진실을 알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런 일을 자식인 인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물론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인선의 진실에 대한 사랑... 이 사랑이 인선의 영화 3부작으로 드러나는데... 하나는 베트남 전쟁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또 하나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을 담은 영화, 그리고 하나가 4.3사건을 다룬 영화다.


이렇게 소설은 사랑이 중첩되면서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감출 수가 없다. 어떻게든 밖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을 통해 우리는 소설 제목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할 수가 없다. 영원히 기록되고, 기억되고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별은 없다. 우리 삶에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말에 답하고 싶다. 이 소설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고.


이렇게 나는 [소년이 온다]에 이어 [작별하지 않는다]를 꼭 읽어야 할 소설 목록에 추가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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