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사슴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소설을 읽으며 이건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모방이다. 이런 생각을 한다. 소설에서 효용성을 먼저 생각하면 안 되지만, 소설이 현실을 반영하고 어느 정도 현실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실제로 그런 역할을 한 작품도 꽤 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게 하는 작품이 여럿 있었으니, 소설에 그런 기대를 품는다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사진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웬 사진 이야기? 이 소설에서는 개인이 겪는 아픔과 현실에서 벌어졌던 시대적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사진을 통해서 그 점을 더 깨닫게 되기도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영은 기자인데 사진도 찍는다. 그가 찍은 바다 사진들. 사람들이 나와 있지 않은 바다 사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왜 인영이 바다 사진을 주로 찍었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가면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에 사라진 의선을 찾아 가는 핑계 대상이 된 인물도 광산촌, 광부들 사진을 찍어온 장종욱에게서도 사진은 중요하다. 그 역시 사진을 통해서 자신의 아픔을 이겨나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자의든 타의든 자신들이 그동안 찍어왔던 사진들이 모두 타버렸다는 데서 둘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찍은 사진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소설 후반부와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장종욱은 다시 광부들의 사진을 찍어 인영에게 보내주는데, 그때 찍힌 사진에는 수줍고 맑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나온다. 이렇게 소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한때 장종욱은 사진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걸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 장은 결코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하고 있었다. (411쪽)


사진을 소설로 바꾸어도 말이 통한다. 작가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인 의선이 자신의 편지를 머리 속에서 정리해서 인영에게 전달해주려고 노력하지만, 말로는 완전하게 그려낼 수 없기에 결국 포기하고 있는 장면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진이나 소설이나 세계의 모든 면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작품을 읽고 보고 하는 이유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작품을 통해서 세계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언어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그 역할을 한다.


한강은 바로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역할을 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개인의 아픔을 통해서 드러내려 하고 있다.


광산, 막장이라고 불리던, 한때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갔던 그곳. 광부들의 삶은 결국 갱도에 갇혀 죽거나 진폐증에 걸려 죽거나 정부 정책으로 폐광이 되어 그곳을 떠나거가 떠날 수 없어서 그 검은 땅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폐광촌의 현실을 한강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곳을 주 무대로 삼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광산촌의 비참한 현실을, 지금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사라진 의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현실. 그렇다고 소설에서 광산촌의 현실이 주를 이루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의선을 찾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드러나는 인물들의 고통이다. 의선을 찾아나서자고 제안하는 명윤에게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 그 그림자를 떨치지 못해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명윤. 


광산촌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고 근근이 살아가는 장종욱. 그리고 대범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언니를 잃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영. 집을 나가버린 엄마와 엄마를 찾아 헤매는 의선의 아빠, 그리고 정신지체인 오빠를 둔 의선.


이렇게 이들은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신을 한 구석으로 몰아가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함을 한강은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읽은 한강 소설은 대부분 상처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상처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보여주는데, 가정에서 상처 입었다는 얘기는, 그 가정이 사회에서 온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뺑소니 사고로 앓아누운 아버지, 여행을 갔다 죽은 언니, 갱도에 갇혀 죽어 나온 남편을 보고 미쳐버린 아내, 자신을 떠난 아내가 있는 사진사 장씨 등등.


이들 상처는 개인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지만, 한강이 사회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들 상처가 결국 사회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의선이 받은 상처 역시 광산이라는 장소를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고, 명윤이 굳이 의선을 찾아나서는 이유 역시 자신이 받았던 상처들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의선을 통해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되고, 그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상처가 사회를 통해 받은 상처임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렇게 개인들이 겪는 아픔을 통해서 한강은 소설을 통해 우리가 개인적 상처 저변에 있는 사회적 상처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게 개인의 상처와 사회적 상처가 맞물리면서 소설은 전개되고,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더라도 인물들을 통해서 현실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결국 '사진기로 찍어낼 수 없는 것을 인화지에 담아내고 싶어'했다는 장씨의 일념과 같이 소설가 한강은 글로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개인과 사회의 아픔을 소설로 드러내려 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소설은 완전히 드러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드러낼 수는 있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다. 한강은 그 점에서 성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져서 자꾸 책장을 덮으려는 마음과 그래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갈등하면서 끝까지 소설을 놓지 않게 했는데...


아마도 끝까지 읽게 만든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소설 제목이 된 '검은 사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두 번 나오는데, 한번은 임씨가 장종욱에게 해준 이야기, 또 한번은 임씨가 딸인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다.


갱 속 깊은 곳에 사는 검은 사슴 이야기. 늑대처럼 단단한 이빨과 빛나는 뿔을 지니고 있는 검은 사슴. 해를 보고 싶어해서 광부들에게 부탁하지만 뿔도 이빨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검은 사슴 이야기. 여기까지만 보면 광산촌 사람들, 또는 힘없는 사람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억압당하고 희생당하는 모습으로만 끝나게 되는데... 의선에게 해준 이야기에서는 이 검은 사슴이 죽어 웅덩이를 만들고 이 웅덩이에서 꽃이 핀다는 내용까지 나아간다.


그렇게 한강은 결국 핍박받고 억압받는 존재들, 고통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이지만, 이들에게도 언젠가는 꽃을 피울 때가 있음을, 그 희망을 결코 놓지 말아야 함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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